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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진 시인 / 조용한 가족 외 3편 최금진 시인 / 조용한 가족 노파는 파리약을 타 마시고 죽었다 광목으로 지어 입은 속옷엔 뭉개진 변이 그득했다 입 속에 다 털어 넣고 삼키지 못한 욕설들이 다족류처럼 스멀스멀 벽지 위를 오르내렸다 어디 니들끼리...... 한번 잘 살아봐라...... 스테인리스 밥그릇처럼 엎어진 노파의 손엔 사진 한 장이 구겨져 있었다 손아귀에 모아진 마지막 떨리는 힘으로 노파는 흙벽을 긁어댔으리라, 뒤집혀진 손톱 그 핏물을 닦아내는 여자의 완고한 표정을 노파는 허연 게거품을 물고 맞서고 있었다 호상이구만 호상, 닭 뼈다귀 같은 노파의 몸을 꾹꾹 펼쳐놓으며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코를 막았다 서랍장 곳곳에서 몰래 먹다 남긴 사과며 과자부스러기들이 쏟아져 나온 것말고도 썩은 장판 밑에선 만 원짜리 몇 장이 더 나왔다 발가벗겨진.. 2023. 5. 19.
정하해 시인 / 이별 협곡 외 1편 정하해 시인 / 이별 협곡 먼저 지하철을 내리던 사람이 손을 흔들었습니다 남은 사람이 역을 빠져 나갈 때까지 혼잣말이 터져 나오는 이별의 방언은 섭섭한 손짓 같아서 그렇게 허공을 흔들리게 하는, 밖은 꽃들이 흔한 철인데 말이죠 이런 날, 몸이 기우는 사람을 불러내어 벛꽃 툭 터져 휘날리는 창밖을 무한반복으로 내다보며 분홍색만 이야기했습니다 찻잔을 잡는 손이 자꾸 떨어지는 것이 꽃에 닿으려는 듯 어스름이 되어서야 일어나 횡단보도를 건너 뒤돌아본 그때까지 손을 흔들어 그 손, 벚꽃잎과 섞여 색다른 꽃잎만 같았습니다 휘날리듯 오래 서있는 한 사람 그림자가 이미, 적색이 되도록 한 패거리로 떨어지는 꽃잎이 또한 협곡을 이루어 같이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무크 『포에트리 슬램』 2023년 상반기호 발표 정하해 시인 .. 2023. 5. 19.
이여원 시인 / 오리의 계절 외 2편 이여원 시인 / 오리의 계절 열 두 개의 숫자들, 둥근 시계 안에 흩어져 있다 시침 밑으로 분주한 초침이 물 갈퀴질 중이죠 계절풍과 물가의 산란産卵을 끝낸 몸속의 시계가 징검다리처럼 물을 건너고 있죠 물의 상피, 굳어져가는 호수는 단호하다 새 을乙 자의 숫자들, 모두 아랫배 쪽이 젖어 있지만 햇빛 얹혀 있는 곳은 모두 등이죠 숫자가 숫자를 앞지르지 않듯이 아무리 거센 물살에도 뒤로 가지 않는 시간들 언젠가는 다 날아갈 추운 계절의 시간들이죠 누군가 돌을 던지면 흔들리는 수면 위로 겁먹은 숫자들이 제 발자국을 가슴에 붙이고 날아오르죠 쥐눈이콩 같은 까만 눈으로 별이 춤을 추는 것, 구름이 집을 넓혀 가는 것, 바람이 아이를 낳는 것, 나무가 이사를 가는 것 다 본 매서운 눈 그 눈으로 수만리를 날아와 천연.. 2023. 5. 19.
고은진주 시인 / 푸른 무대 외 1편 고은진주 시인 / 푸른 무대 핑퐁으로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허점 속으로 빠져나가려는 것이다 뜀뛰는 라켓으로 내리꽂는 회전으로 상대를 향해 파고드는 파고들어서는 속수무책이 되려 하는 상실의 점수, 받아치지 못하면 실연이다 판이 끝나는 게임 포인트였다면 망연자실이다 스피드하게 찍고 날아가는 너와 나의 점수들 주고받는 실점들 아무렇지 않게 이어지는 깨끗한 듀스 처음부터 빈틈 노리고 찔러 넣는 빈틈없는 무대에서 사소한 약점은 치명을 부르지만 결점이 방어되는 순간 승패는 또 다른 흥행이다 엎치락뒤치락 접전 벌이면서 돌진하다가 유쾌해지다가 휘어지는 스매싱 백핸드의 절정을 지나 멀리 튄 공 찾으러 가는 사이 혼자 서성거리는 푸른 무대의 날들 고은진주 시인 / 알레르기 봄을 한 상 차려 먹은 듯 목덜미에 꽃이 .. 2023. 5. 19.
장석남 시인 / 수묵(水墨) 정원 9 외 2편 장석남 시인 / 수묵(水墨) 정원 9 –번짐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장석남 시인 / 큰 눈 큰 눈이 오면, 발이 묶이면, 과부의 사랑 舍廊 에서처럼 편안함이 일편 근심이 뒤주 냄새처럼 안겨온다 큰 눈이 오면, 눈이 모든 소란을 다 먹으면, 설원 雪源과 고요를 밟고 와서 가지 않는 추억이 있다 한 치씩 나앉은 사물들 모두 제 아버지가 온 듯 즐겁고.. 2023. 5. 19.
김옥종 시인 / 연어의 노래 외 3편 김옥종 시인 / 연어의 노래 그대여 이쯤에서 자갈밭에 이부자리를 펴자 너는 춥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외롭다라고 등을 긁어주마 시린 여울목의 안통 스폿에서 산란하자 네 배꼽이 너덜 해지고 나의 배꼽이 헤지도록 가파르게 도달했으니 바다와 민물이 교차하는 기수 구역에서 네 살과 내 살이 교차하는 계절의 간극에서 너의 쓸쓸함을 애무해 주마 혼인 색의 주검으로 깨어나는 것들의 태생은 내려놓을 고향이 없다 -시집 『민어의 노래』(휴먼앤북스Human&Books, 2020) 수록 김옥종 시인 / 벼락 새비 젓 이제서야 당신을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슬픔이 슬픔을 위로할 때는 안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서로의 생채기가 맞닿아서 덧나기 때문입니다 슬픔이 슬픔에게 다가서고자 할 때는 생채기의 반대편을 날이 선 칼로 베어 낸 선혈로.. 2023. 5. 19.
정미 시인 / 다 써버린 걸음으로 외 1편 정미 시인 / 다 써버린 걸음으로 어머니, 폭삭 늙은 유모차의 유모로 취직하셨다 유모차를 밀면서 걸음을 달래고 있다, 자꾸만 바닥에 들러붙는 신발과 빙글 웃는 유모차 일 못하는 유모를 모른 척 눈감아 주는 것일 텐데, 어머니 애기엄마가 걸음마 들고 뛰어올 때를 기다리다 지친 듯 아장아장 걸음을 싣는다 유모차 가득 강 건너 아이들은 그림자를 숨기고 훔친 관절을 쪼아대고 있다 날랜 신발을 타고서 저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날아오는 아이들을 보면, 마침표 없는 길이여서 접착제로 이어 붙인 무지개여서 가장 아기일 때 걸음, 가장 삭은 걸음을 태우고는 두 번 다시 엄마로 오지 않을 거라는, 어머니 무연고 아기걸음으로 손잡이를 붙잡고 유모차의 기분을 살핀다 엄마 없어도 울지 마, 재활의 말씀을 유모답게 비끄러매는 것,.. 2023. 5. 19.
정공채 시인 / 노기자 (老記者) 외 2편 정공채 시인 / 노기자 (老記者) 늙은 기자하고 술을 들면 이야기는 길다. 봄비는 느리게 오던가. 장마는 오래 내리던가. 우리가 여기서 술을 마치면 아마. 다른 골목을 길게 돌아서 이차를 할 거야 자유주의자 당신의 긴 이야기는 아직도 멀었다. 이제 겨우 묘종을 심는데 불과할걸세. 정공채 시인 / 성평리 삼천포에서 다도해 뱃길 남으로 남빛을 쪼개면서 노저어 돌면 바른편엔 내내 표고 구백의 산자 소오산 치맛폭에 펼쳐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그늘 노량 바다 성평리는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하동군 고전면의 성평리가 보일 것인가! 남빛 그 좋은 바다도 뒷전으로 놓아둔 달을 먼저 보는 저쪽 산맥의 돌담투성이 성평리 크나큰 별을 따는 고향이거늘··· 바다는 계집년 너풀대는 치마라, 큰 산을 뒤로 앉히고 방정맞은 .. 2023. 5. 18.
이가희 시인 / 민들레 외 2편 이가희 시인 / 민들레 길모퉁이 처질러 앉아 있는 민들레 반나절 햇살이 와서 깨운다,노란 꽃 그 위에 반 평의 햇살도 퍼질러 앉는다 꽃술 속에 든 나비 한 마리 온몸에 파란하늘이 묻어있다 이가희 시인 / 숨 쉬는 일에 대한 단상 항아리 속 검은 보자기 아래 노란 꽃술들 살짝살짝 보자기들 들어 올리며 고르게 숨을 쉰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끼얹은 때면 하루가 다르게 살 차 올라 마치 둥근달 보는 것 같은데 물관부를 따라 물 길어 나르는 노랫소리에 맞춰4분 음표들이 방안을 뛰어다닐 것 같은데 숨 쉬는 일이란, 틈새를 비집고 촘촘한 영토를 다스리는 일이다 고개는 떨구었지만 단 하나뿐인 내生을 수직 상승시키는 일이다 이가희 시인 / 둔산동. 2 신도시 길 따라 한 소절 바람에 몸부림치는 이파리 큰 초년생 플라타너스.. 2023. 5. 18.
이령 시인 / 풍장 외 1편 이령 시인 / 풍장 느닷없이 출몰 한다 골목은 골목을 만나 벽이 된다. 벽은 도처에 있다 벽은 벽을 벗어나야 길이 된다. 길은 층층 그늘이 마수걸이하는 상가 지나 노브랜드가 창의적인 브랜드로 거듭난 햄버거 가게 건너 세상에나 여기서도 카카오 뱅킹이 가능하다고? 첨단 붕어빵 리어카 너머 두릅나무 가시에 걸린 족제비 사체가 건너편 무인 카페 로봇을 향해 칸칸 슬쁨*을 방사 한다 그러니까 여기가 우리들의 오늘, 불가 촉 생의 밀실과 광장의 풍장이구나! 살고 싶다의 어원인 밀실과 살아간다의 어법인 광장이 줌 인, 줌 아웃 되는 지금 밀실이 광장의 통로라는 걸 익숙하다는 건 능숙하게 길들여져 간다는 걸 턱과 입에 마스크를 두 개나 낀 행인이 증명 한다 사람과 사람이 사람 속에서 사람이 사람과 사람 속에서 느닷없이.. 2023. 5. 18.
김건화 시인 / 개구리주차 외 2편 김건화 시인 / 개구리주차 ​ ​ 좌충우돌 경차가 인도와 차도에 반쯤 걸쳐 개구리 주차를 한다 내가 하긴 버겁고 남주긴 아까운 애인을 경계할 때 그냥 친구로 지내자는 것은 한쪽 발은 친구라는 명목 아래 이별의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지 않기 위해 걸쳐 놓은 받침목이다 ​ 아래로 내리지 못한 바퀴의 미련과 위로 올리지 못한 바퀴의 소심함이 공평한 기울기를 흥정한다 적당한 거리는 안정감을 주기에 자신을 속이고 교묘히 핑계를 만들어 단속을 피해 왔다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타협점의 경계에 놓아둔 한쪽 발이 왜 이리 불안하고 설레는지 함부로 쏟아낸 열정에 배신당하고 얻은 견인할 수 없는 엉거주춤의 과태료는 얼마일까 ​ 오늘도 단속을 피해 개구리주차를 한다 ​ -월간 『우리詩』 (2020년 5월호) 김건화 시인.. 2023. 5. 18.
서안나 시인 / 손톱의 서정 외 2편 서안나 시인 / 손톱의 서정 손톱은 내가 처음 버린 영혼 손톱은 영혼이 타원형이다 손톱은 죽어서 산다 끊임없이 나를 밀어낸다 손톱을 오래 들여다보면 나무뿌리가 뻗어 나오고 진흙으로 두 눈을 바른 아이가 더러운 귀를 씻고 있다 손톱을 깎으면 죽은 기차들이 나를 통과해 가고 늙은 쥐가 손톱을 먹고 있다 늘 바깥인 손톱의 밤은 얼마나 캄캄한가 사랑은 개연성 따위는 필요 없다 멀리 날아간 손톱은 가끔 얼굴이 되기도 한다 서안나 시인 / 애월 2 내 늑골에 사는 머리 검은 짐승을 버렸다 애월이라 부르면 밤에 갇힌다 검정은 물에 잘 녹는다 맨발로 돌 속의 꽃을 꺾었다 흰 소와 만근의 나무 물고기가 따라왔다 백사장에 얼굴을 그리면 물로 쓰는 전언은 천개의 밤을 끌고 온다 귀에서 천둥이 쏟아진다 시집에 끼워둔 애월은 .. 2023. 5.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