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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진 시인 / 바다 옆의 방* 외 2편 이운진 시인 / 바다 옆의 방* 햇살은 사각형으로 눈부시다 그 곁에서 젊음과 닮았던 바다는 조그맣게 푸르다 어쩌면 이것은 망각에 관한 것인지도 모른다 빛과 구름과 물결은 한순간도 바꾸지 않고 그저께였고 어제였고 조금 전이었던 시간은 오지 않고 가지 않는다 나쁜 것은 모두 나였다고 자책할 때 눈 뜨지 못하도록 햇살은 반짝이고 햇빛을 빨아들이는 벽은 튼튼하다 아무도, 그 누구를 위해서도 울지 않을 때까지 바다만 시리게 바라보는 곳 마른 꽃도 줄 끊어진 기타도 꿈속에서나 나에게 돌아오던 한 사람도 없는 곳 어쩌면 이곳은 천천히 그리고 아름답게 너를 잃기 위해 만든 방인지도 모른다 견뎌야 할 기억이 더 남아있어 내가 간다면 그 빈방으로 가는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제목 이운진 시인 / 비둘기 애인 죽은 .. 2023. 5. 20.
김추인 시인 / 모래의 시학(詩學) 외 2편 김추인 시인 / 모래의 시학(詩學) 꽃이 머금은 시를 받아 적네 유리새 유리알 노래를 시간의 옷 속 켜켜 눌러둔 바위의 시 억년 바위의 침묵을 나, 꺼내어 베껴 쓰고 있네 가을비 허공을 그어대며 나 좀 봐 나 좀 봐봐 숨길 듯 숨길 듯 슬쩍 내보이는 연하게 빗금 치고 있는 비의 발자국을 사물의 모서리들을 스캔하네 저기 저 절로 고운 것들의 말씀을 모래알들의 귀엣말을 김추인 시인 / 사하라의 신기루 오는 이 가는 이 없이 사막 가시나무 제 그림자에 묻는다 “저기 물위, 범선 한 척 오는 거 보이지?” 김추인 시인 / 떠도는 오감도(烏瞰圖) ㅡ호모사피엔스의 환(幻)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을 잊기 위해 더 걷어내야 할 가벼움이 있습니까 갑옷을 벗어던지기 위해 더 보태야 할 무엇이 있습니까 몇 개 자모음을 토해 .. 2023. 5. 20.
최현선 시인 / 바람난 가족 외 1편 최현선 시인 / 바람난 가족 오빠가 말하는 벽 말이야 어떤 유명한 시인의 시에도 나온다는 흰 벽 엄마가 그러는데 그거 가족력이래 시집온 그해에 엄마는 알았다는데 벽에서 자꾸 귀신같은 바람이 나오더래 조상 대대로 벽돌 쌓고 마감을 쳐서 어떤 비바람도 끄떡없다는데 말이야 창이나 문을 내지 않은 불편을 게으른 유전자의 특혜로 알면 살기가 편하대 벽이 기운 방향으로 흐르던 물의 궤적이나 수해 때 집을 할퀴고 물어뜯은 큰물의 내력도 다 혈통이래 철모르고 핀 코스모스, 웅덩이에 빠진 구름도 조상의 음덕으로 여기고 우아하게 가라앉히래 오빠가 그랬잖아 상상은 현실을 초라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엄마한테 말하니까 오빠 같은 새끼를 집안 퉁소라고 한다는 거야 수재였던 오빠가 시집만 들고 다니는 걸 보면 틀린 말도 아닌 것.. 2023. 5. 20.
송용탁 시인 / 구우 송용탁 시인 / 구우 날숨조차 비명이었어 더 이상 숨은 해를 잡으려 목을 공중에 매달거나 범람하는 기분을 손목에 모으는 꿈도 빗속을 달리는 기억을 쫓아 첨벙거리거나 맨살이 갈라지는 마른 날 위해 우산의 살을 모두 발라버린 날 나는 매일 훌륭하게 무럭무럭 죽어가고 있었어 폭우 속을 달리는 사람처럼 헝클어진 생각을 동여매지도 흔들리는 신발들 모두 완성하지 말아야 했어 나비매듭을 풀고 날아가는 사람처럼 가끔 구름 사이 반짝, 내 옆면을 자르는 눈부심을 기억해 다만, 생리도 해 본 적 없는 네가 내 피를 가지고 뭘 할 수 있을까 혼자 놀다 지치면 나눠줄게 흐르는 것들은 어디서 끝나는 걸까 그 많던 비의 줄기들 모두 어디에 모여 웅크리고 있을까 썩지 않는 마음 같아서 저기 도망치는 관객들과 비를 연기하는 사람이라.. 2023. 5. 20.
정진규 시인 / 슬픔- 알 44 외 2편 정진규 시인 / 슬픔- 알 44 몸은 튜브야, 오늘 아침 새 치약의 뚜껑을 열면서 몸은 튜브라는 믿음이 왔어 열심히 짜내자는 생각을 했어 내가, 나를 짜내자는 생각을 했어 이젠 네가 나를 짜낼 생각을 그만두었으니까 그렇게 되었으니까 우리들의 사랑이 이젠 그리움의 경영만으로 족하게 되었으니까 그래야 하니까 伏地不動 그래야 하니까 (웬일일까, 그 많은 소들이 오늘 아침 일시에 그 뽀얀 젖들을 내놓지 않고 있다는 기별이 왔다 음악을 틀어줘도 伏地不動, 기별이 없다고 했다 동무의 목장이 큰 걱정이다) 물론 슬프지, 슬픔은 슬픔으로 밀고 갈 수밖에! 정진규 시인 / 비누 비누가 나를 씻어 준다고 믿었는데 그렇게 믿고서 살아왔는데 나도 비누를 씻어 주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몸 다 닳아져야 가서 닿을 수 있는.. 2023. 5. 20.
김경선 시인 / 미스 물고기 외 2편 김경선 시인 / 미스 물고기 가게 문을 열면 풍경소리가 들린다 아침 일찍 물고기가 운다 수문이 열리고 꼬리를 흔드는 물고기 한 마리 마른 허공에 강물을 풀어놓고 첨벙 뛰어 오른다 수선집 문이 열리고 딸랑딸랑 파문이 인다 주인보다 먼저 인사를 하는 미스 물고기 그녀의 반경은 10cm 쇠종의 시계추처럼 묶여 헤엄을 친다 노처녀로 늙은 주인 여자의 반경은 5m 여섯 평 가게에 묶여 미싱을 돌리는 미스 김 종일 페달을 밟고 달려도 늘 제자리다 어서 오세요 정말 멋져요 딱 맞아요 뻐끔뻐끔 그녀의 입에서 물방울이 쏟아진다 종일 그녀는 같은 말을 되풀이 한다. 손님이 뜸해지면 오래 전 아가미에 가두어둔 강물소리에 젖어 추억에 잠긴다 지지난해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만난 물고기 어느 강물을 거슬러 올랐는지 비늘이 헐었다 .. 2023. 5. 20.
남진우 시인 / 타오르는 책 외 3편 남진우 시인 / 타오르는 책 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 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이 먹어치우는 글자들 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 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검게 그을려 지워지는 문장 뒤로 다시 문장이 이어지고 다 읽고 나면 두 손엔 한 움큼의 재만 남을 뿐 놀라움으로 가득 찬 불놀이가 끝나고 나면 나는 불로 이글거리는 머리를 이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곤 했네 그 옛날 내가 읽은 모든 것은 불이었고 그 불 속에서 난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 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 단단한 표정의 책들이 반질반질한 표지를 자랑하며 내게 차가운 말만 건넨다네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내 .. 2023. 5. 20.
​김태경 시인​ / 정전과 자정과 자전 김태경 시인 / 정전과 자정과 자전 암흑에 빠져들게 될지도 모르는데 따뜻하게 손잡아줄 뭔가가 올 것처럼 걷고 또 걸으면서 방벽을 닦아주면 눈물을 머금고도 눈물로 길을 적신 누군가의 불 꺼진 두 눈동자 보이는데 그늘이 밴 육체가 뒤돌아선 너일지라도 검정색은 빛깔과 무관하지 않으니까 내일이 될 이 순간 널 뒤에서 끌어안으며 두려움을 고치려는 별빛을 곱씹는데 밤거리 돌고 또 돌게 될지도 모르겠는데! 계간 『시와 사람』 2023년 봄호 발표 김태경 시인 서울에서 출생. 2014년 ≪열린시학≫ 평론 등단,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첫 시집 『액체 괴물의 탄생』. 평론집『숲과 기억』이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이며,​ 〈객〉 동인. 2023. 5. 20.
박소란 시인 / 소녀 외 3편 박소란 시인 / 소녀 ​ 한쪽 눈알을 잃어버리고도 벙긋 웃는 입 모양을 한 인형 ​ 다행이다 인형이라서 ​ 오늘도 말없이 견디고 있다 소녀의 잔잔한 가슴팍에 안겨서 ​ 소녀는 울음을 쏟지 않고 아픈 자국을 보고도 놀라지 않지 슬픔은 유치원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것 ​ 갈색과 녹색처럼 헷갈리기 쉬운 것 ​ 스케치북 속 흐드러진 풍경은 갈색 철 지난 이불에 파묻혀 앓는 엄마 얼굴은 녹색 짙은 녹색 아무도 놀러 오지 않는 방 ​ 고장난 인형이 캄캄 뒤척이다 잠든 방은 어여쁜 분홍색, 좁다란 창에 묶여 휘늘어진 어둠의 리본처럼 ​ 혼자서 가만히 색칠하는 소녀 ​ 다행이다 소녀라서 이대로 잠시 빨갛게 웃을 수 있어서 ​ ​ ​ ​ ​ 박소란 시인 / 울음의 방 ​ 불현듯 슬프다 너무 오래 울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2023. 5. 20.
이갑수 시인 / 항아리 외 2편 이갑수 시인 / 항아리 넓은 들판 깊은 골짜기를 헤매던 동물들도 배설하는 동안에는 뚱뚱한 항아리처럼 몸을 잔뜩 구부린다 잘 빚은 조각품 같다 그때 항아리에서 반죽된 거름을 내놓으며 버리고 가는 대지와 신성하게 교접한다 밥 씹어 죽으로 만들어 새끼에게 먹이는 어미들처럼 말없는 세상은 대체 어느 책에서 이런 지혜를 배웠길래 곰삭은 젓갈마냥 잘 익은 김치마냥 거친 들판의 풀들과 야생의 생고기들을 이렇게 담갔다가 먹기 좋은 반찬으로 빼가는 걸까 그리고 또 때가 되면 마음속 깊은 곳간 열어 그 항아리를 깊이깊이 묻어두는 세상은 이갑수 시인 / 내가 만난 나무 그것은 퍽 오래 전의 일 어쩌면 내 생년월일 이전의 일일는지도 몰라 이 집으로 들어오기 위하여 나보다 먼저 많은 이들도 머리를 부딪힌 듯 벌써 많은 기억의 .. 2023. 5. 19.
박남철 시인 / 목련에 대하여 1 외 2편 박남철 시인 / 목련에 대하여 1 많은 승객과 함께 플랫폼에 들어서는 기차를 보고 역사 저 너머 전봇대 옆에서 개 한 마리가 짖고 있다. 개는 짖기를 마쳤다는 듯 이번에는 전봇대 옆에다 오른쪽 뒷발을 들고 무슨 짓을 하고 있다. 그러더니 개는 왼쪽 뒷발을 들어 자신의 귀때기를 세차게 몇 번 때리고는 온몸을 한번 부르르 떤 다음 땅바닥을 킁킁 냄새 맡으면서 쭐레쭐레 어디론가로 가고 있다. 많이 사나운 개이다…… (쩝……) 박남철 시인 / 사자獅子 -모교의 교정에서 내 앞발에 박힌 이 깊숙한 가시를 핥다가 나는 이따금 부릅뜬 눈을 들어, 핥 야 이 개새애끼들아 내 머리, 오 이 구름같은 불 내 머리 내 이 머리에 온통 뒤덮인 이 저주받은 이 성난 갈기, 핥 야 이 개애자식들아아아 ---- 박남철 시인 / 명.. 2023. 5. 19.
김겨리 시인 / 꽃의 자세 외 2편 김겨리 시인 / 꽃의 자세 철개지 듬성듬성 핀 꽃들의 꽃대가 다ㄴ자다 수직에 매달려 수평의 꽃을 피우기 위해 ㄴ의 각도를 유지하며 절벽을 움켜쥔 악력. 직립에서 횡립으로 진화될 수밖에 없기까지 노란꽃은 간절함 붉은꽃은 절규의 은유 꽃은 피는 게 아니라 견디는 거라는 듯 꽃말이 신중한 꽃들은 빛깔이 꼿꼿하다 추락을 견디기 위해 관절이ㄴ자로 휘어질 때 뿌리는ㄱ자의 갈고리가 되어 얼마나 오래 절벽에 매달려 있어야 했을까 목덜미에 부리를 묻고 외발로 서서 꿈을 꾸는 새들처럼 낭떠러지에 뿌리내린 꽃들의 악착, 부서진 시멘트 틈 사이로 드러난 철근과 기둥에서 불거져 나온 구부러진 못과 골다공증을 않는 어머니 무릎도ㄴ의 자세이다 농도와 체위는 다르지만 통증의 접미사가 된 무색무취로도 멀리 도약하기 위한 도움닫기 자세.. 2023. 5.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