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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천학 시인 / 목수의 아내 외 2편 권천학 시인 / 목수의 아내 ​ 아침마다 아내는 공이눈 박힌 소나무 도마 위에 생포된 일상을 올려놓고 무른 살 속의 뼈를 발라낸다 ​ 아침마다 아내는 때 절은 문설주에 기대어 서서 어제 세운 굽은 기둥을 뽑으라고 한다 ​ 아침마다 아내는 연장주머니를 챙겨주면서 곧은 못을 단단히 박아야 한다고 속삭인다 그리고 밤마다 은밀하게 무덤의 집을 짓는다 ​ 권천학 시인 / 유명한 무명시인 ​ 시인 초년병 시절, 한 선배 시인에게 '유명한 무명시인'이 되겠다고 말했었다 '니가 뭘 몰라' 묘하게 웃던 선배는 그 후 세상 속으로 들어가 이름이 주렁주렁해졌다 ​ 그 말이 씨가 되어 나는 지금도 '중견'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하게 붙여지는 은둔과 칩거의 무명시인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무명으로 남는 일이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을 .. 2023. 5. 24.
여정 시인 / 비가 외 2편 여정 시인 / 비가 비가, 하루종일 내린다. 비가, 사람들의 발목을 자르고, 비가, 사람들의 무릎을 자르고, 비가,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키 큰 나무들만 머리통만 바꼼히 내밀고, 비가, 키 큰 나무들의 머리통을 출렁출렁 씹어 삼키는 비가, 고층 빌딩의 허리를 자르고, 비가, 고층빌딩도, 숲은 산도, 출렁출렁 씹히고 씹히는 나날들, 비가, 별을 삼키고, 비가, 태양을 삼키고, 비가 무지개여 안녕..... 여정 시인 / 셋방에는 셋방에는 해, 하면 달, 하고 달, 하면 해, 하는 부부가 산다 셋방에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고 비마저 내리는 날 사물들은 투명한 날개를 움직이며 힘차게 날아오른다. 천둥소리 들리는 벽, 벼락맞은 거울, 셋방에는 불, 하면 물, 하고 물, 하면 불, 하는 부부가 깨진 거울 .. 2023. 5. 24.
김옥종 시인 / 첫눈 김옥종 시인 / 첫눈 첫눈이 마지막 눈인 것같이 포자가 폄석(砭石)처럼 갑옷의 표피를 입은 단풍나무의 심장을 관통할 때 혈맥에서 쏟아내는 그리움이 고로쇠 수액이다 어떤 것들에게서의 피의 맛은 창백한 실연의 봄이기도 하였다 병스메를 몇 병을 더 먹어야 상처가 아물 수 있을까 음악 다방에서 멜라니 샤프카의 '가장 슬픈일'을 몇 번 이나 더 들어야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렇게 첫눈이 오는 날 심장을 꺼내 눈밭에 차갑게 헹군다 살아서 더는 내려놓을 수 없는 당신을 웹진 『시인광장』 2023년 4월호 발표 김옥종 시인 1969년 전남 신안 지도에서 출생. 2015년 《시와경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민어의 노래』 『잡채』 출간. 한국인 최초 k-1 이종격투기 선수. 현재 광주에서 전업 요리사로 활동 중. .. 2023. 5. 24.
강형철 시인 / 오이풀 외 2편 강형철 시인 / 오이풀 눈꺼풀 끝에 따뜻한 잠이 해일이 되어 몰려와 자갈 사이 스며드는 모래알처럼 뼛속으로 스며들겠다 아우성친다 내가 일해서 사 입은 속옷 창밖 보름달은 창호지를 희게 두들기며 어두운 하늘 끝에 보람이라는 낯선 말을 뉘어주고 하루 일들도 이불 깃에 속삭이며 나와 더불어 눕는다 이번 대목엔 웃으며 돌아가자 문지방에 손톱글씨로 적힌 말은 내 잠을 지키는 벙어리 등불 어른거리며 고라실 논두렁 끝에 돋아나던 오이풀이 춤추며 온다 때릴수록, 밑둥을 꺾어 손등을 후려칠수록 푸른 멍 뒤흔들며 향기를 뿜어주던 오이풀 강형철 시인 / 내 방엔 쓰레기통이 없다 버릴 것 추려 버리고 지닐 것 정돈하여 차곡차곡 쌓아둘 마음이 없다 누군가 내 방에 들어와 정돈을 하면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작자임을 금방 알겠지만 .. 2023. 5. 24.
이향지 시인 / 꽃에서 달까지 외 2편 이향지 시인 / 꽃에서 달까지 꽃이 얼음 같고 꽃병이 유리고기 같다 신기해서 팔을 저으면 꽃병이 산란한다 꽃잎 먼지 속으로 숨도 안 쉬고 유리꽃이 다시 모인다 신기해서 꺾어 보면 내 손에 피가 난다 꽃병이 독 같고 꽃이 방아깨비 같을 때까지 유리창을 밀고 간다 초승달을 끌어다 그믐달에 엎치는 바람 낑긴 달을 뽑으려고 팔을 당기면 꽃병이 다시 산란한다 꽃이 달 같고 꽃병이 가을 강물 같을 때까지 유리창을 밀고 온다 -2014년 시집 『햇살 통조림』에서. 이향지 시인 / 파꽃북채 파꽃 피어 있을 동안의 춤이다 나비 날갯짓 잦을수록 파밭 공중에 매운 신기루 뜬다 파꽃 북채 매운 젖꼭지에 매달려 흡,흡,날개를 떨고 있는 나비의 몰두 극소량의 꿀과 매운 파꽃북채 맞바꾸는 거래 파꽃도 달다 파꽃도 꽃이다 둥둥 소리.. 2023. 5. 24.
김정란 시인 / 새로운 죽음 외 3편 김정란 시인 / 새로운 죽음 속살이 차올라요 피 철철 빠져나가고 상처 벌어졌던 자리에서 오늘은 아침 내내 은종이 울었어요 은종이 창창창 울리면서 이상하지요 그게 어떤 다른 살을 불러와 휘휘 뿌려댔어요 굉장히 차가운데 따뜻하고 그런 향내나는 이상한 없는 있는 바닷가 솔바람 냄새나는 눈 같은 몸 말예요 없는 몸도 있는 몸인 걸 어느새 난 알게 되었거든요 내가 팔 벌려 그 몸 껴안아요 바다 멀리에선 죽은 사람들이 돌아와요 그들의 썩은 살이 너덜너덜 깃발처럼 흔들려요 갈매기들도 고개를 돌려요 그럼요 그건 사람의 일이잖아요 난 내 상처 구멍이 넓어지는 말 구멍이라고 사람들에게 가는 말 구멍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 구멍을 확성기로 쓴답니다 여어 여기예요 그래요 나도 많이 아팠어요 삶을 있는 대로 미련하.. 2023. 5. 23.
이진심 시인 / 고해성사 외 1편 이진심 시인 / 고해성사 당신은 내게 너무도 잘 속아 주었다 제대로 속아 주려고 했던 단단히 속아 넘어간 사람처럼 당신이 결국은 나를 속였다 어두운 기도실에 엎드려 두 손을 촛불처럼 모아 쥐고 간구했다 겨우 손가락으로 당신의 얼굴을 읽었듯이 마음으로 더듬거려 당신을 새겨 넣었듯이 앞 못 보는 자, 이렇게 자신의 얼굴도 읽지 못해 얼굴을 읽혀 버렸다 더듬더듬 나아갔다 당신이 나를 속였듯이 내가 나를 속였듯이 그렇게 벽에 붙은 스위치를 지나친다 지금은 환하게 불 켤 수 없다 아직도 내가 너무 어둡다 이진심 시인 / 자궁 외 임신 마취가 덜 깬 탓일까 철제침대는 삐끄덕삐끄덕 신음소리를 내고 물 위에 붉은 꽃잎들처럼 커튼의 그림자 이 방 천장을 흘러다닌다 자궁의 문이 너무 단단하게 닫혀 있어 왼쪽 나팔관, 그 .. 2023. 5. 23.
김숙영 시인 / 비의 감정 김숙영 시인 / 비의 감정 가끔, 위에서 아래로 출몰하는 시퍼런 비수가 있어요 깊고 진한 관계와 체념 사이 우리의 뒷모습이 장맛비처럼 생생해요 안락한 속삭임이 속임수로 변해가고 나무가 바람의 숨결을 놓아버린걸 휘어진 비의 감정은 알까요 내가 바라는 건, 안개비처럼 가늘게 스며들거나 우연처럼 녹아내리는 우기(雨期)가 되어 주세요 여우비 같은 감각을 받아들이고 싶은데 한순간 사라질 꿈 같은 이야기가 빗소리처럼 멈추지 않고 있어요 내 안의 얼룩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등에서 울음이 흘러내려요 밤을 껴안았던 장대비를 기억하나요 어제는 하늘에서 한 몸이 된 붉은 달이 오늘은 소란스러운 이별을 밀어내고 있어요 말소리가 밖으로 달아나던 열대야 속 여름 그렇게 우리는 소나기를 퍼붓곤 돌아섰어요 그래서 차라리 나는 바다.. 2023. 5. 23.
김행숙 시인 / 커피와 우산 외 2편 김행숙 시인 / 커피와 우산 “우산을 두고 갔네. 걘 늘 정신이 없지. 그 대신 매일같이 체중계에 올라가 진지한 표정으로 제 무게를 달아본다고 해. 조금 빠지고 조금 찐다고 해도 살이야말로 존재의 확고한 고정점이지.” 그래서 우린 살을 꼬집어보곤 하잖아. “내게 「커피와 담배」는 진정한 옛날 영화야. 꽤 유명한 배우들이 여럿 카메오로 출현했었지. 아는 얼굴이 잠깐씩 비춰지는 거야. 그러면 모든 게 우연처럼 느껴져. 커피 한 잔, 담배 두 개비면 뭐든 충분했다는 기분이 들지. 우리가 카페에서 담배를 피우던 시절은 이제 전생이 되어버렸어.” 그러니까 향수란 것은 유령의 감정과 비슷할지도 모르겠어. 이런 비닐우산은 투명하고 가벼워 유령의 손에 쥐여주면 딱 좋을 것 같다. 유령도 비에 젖을 때가 있겠지. “우산.. 2023. 5. 23.
서이교 시인 / 마루 외 1편 서이교 시인 / 마루 누구라도 움직이면 사이가 됩니다 햇빛이건 고양이건 모자이건 어디서부터 온 건지 볕이 뜨겁습니다 고양이가 졸린 눈으로 그늘에 찾아들고 모자가 바람을 밀고 나옵니다 마주 보던 문이 어긋날 땐 찬바람이 쌩하게 불지요 손가락으로 빗금을 만져보고 등으로 볕을 가려주고 발바닥의 안녕을 살펴보며 어두워서 서로가 보일 때까지 기다려 줍니다 나는 그사이에 삽니다 따라가지 않는데 흘러가기도 하고 움직이는데 머물러 있기도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사는 일이에요 귀퉁이가 부서지고 색이 바랠수록 우리는 둥글어지고 낡아지면서 깊은 강이 흐를 테니까 그림자가 마당을 밀고 나가네요 빛에 베인 담장이 어둑해지고 모자가 저녁을 쓰고 옵니다 날이 갈수록 나는 자꾸만 삐거덕거립니다 아는 사실에서 모르는 일이 .. 2023. 5. 23.
서홍관 시인 / 별을 기다리며 외 2편 서홍관 시인 / 별을 기다리며 오늘도 먼지처럼 날아다니는 하루살이 따라 해가 진다. 지구에 올 때 화진포의 청둥오리나 선유도의 산나리꽃으로 태어났더라면 이렇게 무거운 짐은 없었으련만 내가 어느 별에서 왔는지 이제 기억도 나지 않고 다시 돌아갈 희망도 없다 그래 지구에 내려서 행복했던 순간도 없진 않았지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 해도 여전히 나는 고통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갈 것이다 서홍관 시인 / 달랑게 비오는 바닷가에서는 우산이 없어도 좋았다 모래사장에는 비를 맞으며 달랑게들이 집을 짓더니 집집마다 들어가 등불을 켜고 모래 속에 만든 안식처를 찾아줄 귀한 손님을 기다린다 서홍관 시인 / 새가 떠난 자리 외로워서 숲에 들어와 낙엽되어 앉아 있을 때 맑은 눈 맞추며 앉아 있던 박새 포르릉 떠나버린 나뭇가지.. 2023. 5. 23.
최찬희 시인 / 칸나의 여름 외 1편 최찬희 시인 / 칸나의 여름 도로를 이탈한 여름이 만발하고 흩어진 빨강조각 줄기에 떠다니고 증발된 칸나의 이파리 표정을 잃어간다 불꽃의 꼬리가 현기증으로 그려지는 지난밤 불었던 비바람 투명해지는 꽃송이 끝에 젖어 든 그늘 그믐달을 삼킨다 긁혀진 손목을 훔쳐간 입맥들 토해놓은 가시를 노을이 물고 가듯 커튼을 걷어가면서 오늘이 지나간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4월호 발표 최찬희 시인 / 한밤의 콜라주 구겨진 심장이 번식을 시작하고 불안한 안녕은 언제나 새로워라 박재된 불빛 속에서 가위를 꺼내볼까 얼굴에 그려진 어둠을 오려내고 구두가 벗겨진 맨발을 잘라내어 비워진 초승달처럼 거짓말을 채우지 신문에서 녹아내리는 고요를 꺼내고 있어 구체와 추상이 덕지덕지 남겨진 종이에 미친 듯 당신이 묻어나는 밤이야 -《시.. 2023. 5.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