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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행숙 시인 / 커피와 우산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3.

김행숙 시인 / 커피와 우산

 

 

 “우산을 두고 갔네. 걘 늘 정신이 없지. 그 대신 매일같이 체중계에 올라가 진지한 표정으로 제 무게를 달아본다고 해. 조금 빠지고 조금 찐다고 해도 살이야말로 존재의 확고한 고정점이지.” 그래서 우린 살을 꼬집어보곤 하잖아.

 

 “내게 「커피와 담배」는 진정한 옛날 영화야. 꽤 유명한 배우들이 여럿 카메오로 출현했었지. 아는 얼굴이 잠깐씩 비춰지는 거야. 그러면 모든 게 우연처럼 느껴져. 커피 한 잔, 담배 두 개비면 뭐든 충분했다는 기분이 들지. 우리가 카페에서 담배를 피우던 시절은 이제 전생이 되어버렸어.” 그러니까 향수란 것은 유령의 감정과 비슷할지도 모르겠어.

 

 이런 비닐우산은 투명하고 가벼워 유령의 손에 쥐여주면 딱 좋을 것 같다. 유령도 비에 젖을 때가 있겠지. “우산은 커피 한 잔 값이면 살 수 있어. 그 돈으로 담배 한 갑을 살 수도 있지. 우산과 커피와 담배는 모두 비와 썩 잘 어울린단 말이야.”

 

 “그렇다면, 길 건너 편의점에 이 커피를 들고 가서 우산으로 바꿔 올 수 있는 사람, 있어? 우산을 물고, 빨고, 태워, 연기로 날려버릴 수 있는 사람, 여기, 누구, 있어? 그럴 수 없다면, 우산과 커피와 담배의 값이 같다는 게 무슨 소용이람. 결국 우리는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는 거야.” 하나를 가지기 위해 내가 포기한 것들을 말해줄까?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라네.

 

 이 카페로 걔가 다시 돌아왔다. 우산을 찾기 위해 너는 뭘 잃어버렸니? 누구에게 버림받고 비닐우산 하나를 지키려는 거니? “오늘은 정말이지 비를 맞고 싶지 않아. 비를 맞으면 죽고 싶을 거야.” 비는 아까 그쳤어. 그렇지만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것 같다, 그치? 하늘빛, 너의 얼굴빛……

 

 


 

 

김행숙 시인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내 기억이 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

 사람처럼 내 기억이 내 팔을 늘리며 질질 끌고 다녔다, 빠른 걸음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촛불이 바람벽에다 키우는 그림자처럼 기시감이 무섭게 너울거렸다

 사람보다 더 큰 사람그림자, 아카시아나무보다 더 큰 아카시아나무그림자

 그러나 처음 보는 노인인데…… 힘이 세군, 내 기억이 벌써 노인을 만들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생각을 하는 누군가가 나를 돌보고 있었다

 

 기억이 나를 앞지르기 시작했

 

 


 

 

김행숙 시인 / 이 세계

 

 

이것을 이 상자에 넣었으므로 저쪽 상자엔 넣을 수 없지*

 

이것이 네 신발이야

걷고 뛰어라, 상자가 충분히 커다랗다면 저쪽 세계를 기웃거릴 이유가 없지

쫓아가는 경찰도

쫓기는 도둑도 모두 죽어라 뛰어간다

상자를 살짝 흔들면 경찰이 쫓기고 도둑이 죽어라 쫓아간다, 옷만 바꿔 입었을 뿐인데

밤이 오면 너는 신발을 성경책처럼 가슴에 품고 잠이 드네

내 아기, 세상모르게 잘 자라, 모든 강물이 다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넘치는 일이 없단다**

 

나는 신발 공장의 일개 노동자

새 신발을 새 상자에 넣는 일을 한다네

상자 속에, 상자 속에, 상자 속에, 상자 속에······ 하, 이것은 끝이 없네

이것이 깊고 깊은 어둠이야

어둠 속으로/ 손을 넣어 잘 찾아봐, 이것이 네 신발이야

 

* 황정은 「디디의 우산」 창비 2019 p.21,

** 「전도서」 1:7

 

 


 

김행숙 시인

1970년 서울에서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과 및 同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박사학위). 1999년《현대문학》에〈뿔〉외 4편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 『사춘기』 『이별의 능력』 『타인의 의미』 『에코의 초상』 『적막한 손』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가 있음. 제8회 웹진 『시인광장』 올해의좋은시상(2014) 수상. 현재 강남대학 국문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