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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이교 시인 / 마루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3.

서이교 시인 / 마루

 

 

누구라도 움직이면 사이가 됩니다

햇빛이건 고양이건 모자이건

 

어디서부터 온 건지 볕이 뜨겁습니다

고양이가 졸린 눈으로 그늘에 찾아들고

모자가 바람을 밀고 나옵니다

마주 보던 문이 어긋날 땐 찬바람이 쌩하게 불지요

 

손가락으로 빗금을 만져보고

등으로 볕을 가려주고

발바닥의 안녕을 살펴보며

어두워서 서로가 보일 때까지 기다려 줍니다

 

나는 그사이에 삽니다

따라가지 않는데 흘러가기도 하고

움직이는데 머물러 있기도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사는 일이에요

귀퉁이가 부서지고 색이 바랠수록 우리는 둥글어지고

낡아지면서 깊은 강이 흐를 테니까

 

그림자가 마당을 밀고 나가네요

빛에 베인 담장이 어둑해지고

모자가 저녁을 쓰고 옵니다

 

날이 갈수록 나는

자꾸만 삐거덕거립니다

아는 사실에서 모르는 일이 되어갑니다

오늘이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죽은 새와 내게서 날아간 새

서 있는 나와 그런 나를 두고 가는 나에 대하여

그러나 오늘과

그래서 오늘의 사이를 삐거덕대며 오래 걸어 보는 것입니다

 

 


 

 

서이교 시인 / 파랑과 파랑 사이에 나비가 있고

 

 

상자를 열자 장미꽃이 피었다

흔들리는 불빛이 밤을 빛내고

바닥에 엎드린 아이가

바다 위에 나비를 그리고 있다

 

나비를 꽃 위에 놓지 않고

바다에 놓은 이유를 생각한다

상자 속 바다는 나비의 세계

 

햇빛이 날개를 쏘아대고

파도가 몸을 말며 달려온다

나비는 바람을 타지 못하고

그 사이에 산다

 

물속에도 공중이 있다는 사실은

경험자만이 믿는 이야기

 

발은 낯설고 무릎의 방향이 바뀐 채

느리고 슬픈 춤이 이어진다

나비의 말이 자꾸 지워지고

지워진 말들이 날아오르는 흉하고 기이한 세계

 

아이가 그린 나비가 날개를 버리고서야

파랑에서 파랑으로 날아오른다

공중에 뼈를 세우고

세운 뼈들 사이를 날아간다

 

상자에 가득 찬 건 기대가 아닌 최선

언젠가 넣어둔 상자 속 바다

정오의 하늘에 점하나가 빙글거린다

 

파랑과 파랑 사이에 나비가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4월호 발표

 

 


 

서이교 시인

전남 순천 출생. 본명: 서미숙.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 과정 수료. 2023년 《문학뉴스》 & 《시산맥》 신춘문예 등단. 세계태권도연맹 시범단 연출 감독. 캘리그라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