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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숙영 시인 / 비의 감정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3.

김숙영 시인 / 비의 감정

 

 

가끔,

위에서 아래로 출몰하는 시퍼런 비수가 있어요

 

깊고 진한 관계와 체념 사이

우리의 뒷모습이 장맛비처럼 생생해요

 

안락한 속삭임이 속임수로 변해가고

나무가 바람의 숨결을 놓아버린걸

휘어진 비의 감정은 알까요

 

내가 바라는 건,

안개비처럼 가늘게 스며들거나

우연처럼 녹아내리는

우기(雨期)가 되어 주세요

 

여우비 같은 감각을 받아들이고 싶은데

한순간 사라질 꿈 같은 이야기가

빗소리처럼 멈추지 않고 있어요

 

내 안의 얼룩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등에서 울음이 흘러내려요

 

밤을 껴안았던 장대비를 기억하나요

 

어제는 하늘에서 한 몸이 된 붉은 달이

오늘은 소란스러운 이별을 밀어내고 있어요

 

말소리가 밖으로 달아나던 열대야 속 여름

그렇게 우리는 소나기를 퍼붓곤 돌아섰어요

 

그래서 차라리 나는

바다와 나무, 숲, 호랑지빠귀를 애인이라 할래요

 

웹진 『시인광장』 2023년 4월호 발표

 

 


 

김숙영 시인

충북 괴산 출생. 2019년 《열린시학》 신인작품상으로 등단. ‘채낚기’로 2021년 15회 바다문학상 대상,  ‘별지화’로 1회 천태문학상 대상, 8회 전국 계간 문예지 우수작품상 수상. 시집 『별들이 노크해도 난 창문을 열 수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