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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정란 시인 / 새로운 죽음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3.

김정란 시인 / 새로운 죽음

 

 

 속살이 차올라요 피 철철 빠져나가고 상처 벌어졌던 자리에서 오늘은 아침 내내 은종이 울었어요 은종이 창창창 울리면서 이상하지요 그게 어떤 다른 살을 불러와 휘휘 뿌려댔어요 굉장히 차가운데 따뜻하고 그런 향내나는 이상한 없는 있는 바닷가 솔바람 냄새나는 눈 같은 몸 말예요 없는 몸도 있는 몸인 걸 어느새 난 알게 되었거든요 내가 팔 벌려 그 몸 껴안아요

 

 바다 멀리에선 죽은 사람들이 돌아와요 그들의 썩은 살이 너덜너덜 깃발처럼 흔들려요 갈매기들도 고개를 돌려요 그럼요 그건 사람의 일이잖아요

 

 난 내 상처 구멍이 넓어지는 말 구멍이라고 사람들에게 가는 말 구멍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 구멍을 확성기로 쓴답니다 여어 여기예요 그래요 나도 많이 아팠어요 삶을 있는 대로 미련하게 다 쓰느라구요 여어 이리 오세요 우리 같이 있어요

 

 난 썩은 살들을 껴안고 입맞추며 안녕 하고 인사한답니다 왜냐하면 난 산 채로 썩는 게 어떤 건지 알거든요 난 죽은 사람들에게 말해요 오늘은 은종소리가 들렸어요 라고요 우리 이젠 아프지 말아요 라고도요 우린 사랑하잖아요 라고도요 우린 죽음을 거쳐서 죽음을 건너서 죽음 바깥에서 얼마든지 오고 가잖아요 라고도요

 

 나는 또 말했지요 나 하나의 생이 뭐 그리 대단하겠어요 다만 정성으로 한 생 살 뿐이에요 그뿐이에요 그리고 다시 오는 생을 위해서 내 썩는 살까지 다 쓰는 거지요 그래서 내 생을 환한 신작로로 만드는 거지요 수천 명부의 귀신들 조금씩 진화하며 조금씩 미망을 걷어내며 자유로이 들락거리는 우주의 길목으로 말예요

 

 봄비가 내리기 시작하데요 들어봐요! 귀신들이 고요고요 속살대며 내 방안에 가득 들어차는 소리 사이사이 은종 창창창 맑은 눈물 소리내며 울리고, 울리고……

 

 


 

 

김정란 시인 / 오백살 먹은 마녀와 나

 

 

무엇이든지 있는 없음에 대해서

지독히 시끄러운, 쿠당당대는 정적에 대해서

그것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서

 

언제나 입을 쫑끗거리는 어떤

쭈그렁바가지 할망구에 대해서

 

나는 아주 뾰족한 오백살 먹은 마녀이다

그녀는 자기를 뜯어먹으며 다시 태어난다

 

나는 문턱 앞에서 망설이지 않는다

 

그녀는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말한다:

나는 꽃이야, 나는 똥이야, 운운......

 

나는 그녀의 말없음표에 편승한다

(물론, 그 사이에 살살 살면서)

 

나는 그녀의 혓바닥을 물어뜯고

그리고 잡아늘린다 세월아 네월아

 

그것은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하다

 

 


 

 

김정란 시인 / 슬픔의 바다

 

 

난 내가 혼자 건너가야 할 이 생의 바다를 그렇게 불러요

슬픔 또는 내가 할 수 있는 바의 다함의 바다라고

 

이젠 알아요 왜 당신이 그토록 내 눈앞에

완강히 옆 모습으로만 나타났던지

 

그것이 운명이 내게 던진 도전의 기호라는 걸

 

한 때는 당신이랑 같이 그 바다를 건너가고 싶었어 정말로 간절히

이승에서 그저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듯이 그렇게

 

이젠 알아요 내가 이 바다를 혼자 다 건너야 저 건너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듯이 당신을 만나리라는 걸

내가 나의 당신을 여의어야 그의 당신을 얻는다는 걸

 

거기 그의 땅에 한 송이 꽃이 아니라 천만 송이로 피어있는 당신을

내가 나로 가지리라는 걸 이 생에서 오래 참고 오래 기다린 뒤에

이 슬픔의 바다를 다 건넌 뒤에 그 때에 내가 진실로

사랑을 알게 되리라는 걸

 

 


 

 

김정란 시인 / 슬플 때는 바람처럼 꽃처럼

 

 

슬플 때는 바람처럼 꽃처럼 가만히

삶의 옆얼굴에 손을 대어 본다

그리고 들여다보면 손금 속에는 작은 강물이 흘러

 

랄랄라 랄랄라 숨죽여 노래하듯 울고 있는

눈물 젖은 날개 상한 깃털들 그 강물 속에 보이네

청이도 홍련이도 민비도 죄 모여 앉아서

가만가만 그 깃털들 말리고 있어 가슴이 저려서

 

갸웃이 고개 숙이고 조금씩 조금씩만 걸어가지

 

슬플 때는 바람처럼 꽃처럼 가만히

삶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갸웃이 바라본 그것

얼마나 가슴저리게 아름다운지 얘기해 줄까

 

 


 

김정란 시인

1953년 서울 출생. 평론가, 번역가.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졸업, 프랑스 그르노블 III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2003년부터 상지대학교 문화컨텐츠학과 교수로 활동. 1976년 김춘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를 선보임. 시집  『다시 시작하는 나비』 『매혹, 혹은 겹침』 『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뒤돌아보네』 『스·타·카·토· 내 영혼 등. 평론집 『비어 있는 중심-미완의 시학』, 사회 문화 에세이집 『거품 아래로 깊이』 등을 펴냄. 1998년 백상출판문화상(번역부문) 수상. 2000년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 현재 상지대 인문사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