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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향지 시인 / 꽃에서 달까지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4.

이향지 시인 / 꽃에서 달까지

 

 

꽃이 얼음 같고

꽃병이 유리고기 같다

 

신기해서 팔을 저으면 꽃병이 산란한다

 

꽃잎 먼지 속으로

숨도 안 쉬고

유리꽃이 다시 모인다

 

신기해서 꺾어 보면 내 손에 피가 난다

 

꽃병이 독 같고

꽃이 방아깨비 같을 때까지

유리창을 밀고 간다

 

초승달을 끌어다 그믐달에 엎치는 바람

 

낑긴 달을 뽑으려고 팔을 당기면

꽃병이 다시 산란한다

 

꽃이 달 같고

꽃병이 가을 강물 같을 때까지

유리창을 밀고 온다

 

-2014년 시집 『햇살 통조림』에서.

 

 


 

 

이향지 시인 / 파꽃북채

 

 

파꽃 피어 있을 동안의 춤이다

나비 날갯짓 잦을수록

파밭 공중에 매운 신기루 뜬다

 

파꽃

북채

매운 젖꼭지에 매달려 흡,흡,날개를 떨고 있는

나비의 몰두

 

극소량의 꿀과 매운 파꽃북채 맞바꾸는 거래

 

파꽃도 달다

파꽃도 꽃이다

둥둥 소리 없는 북소리에 실려 날아가는 파 꿈

그 매운 눈물에 허장성세는 없다

 

작은 날개들의 지분에 묻어

높은 하늘로 흩뿌려진다 해도

파꽃 발밑에는 날아가지 못한 파 씨가 더 많다

 

나비 발에 익은 까만 파 씨 다 털고 나면

파꽃북채도 자루가 시든다

파밭 둘레엔 맵디매운 숨소리만 남는다

 

-2014년 시집 『햇살 통조림』에서.

 

 


 

 

이향지 시인 / 흙의 건축

 

 

한 알갱이가 한 화분 속에서 한 덩어리 되어 한 뿌리를 살리는 것이다

 

한 방울이 한 뿌리로 스며 한 송이를 피우는 것이다

 

한 덩어리 속에서 한 알갱이는 가만히 잊어져야 더 좋은 것이다

 

-2014년 시집 『햇살 통조림』에서.

 

 


 

이향지(李香枝) 시인

1942년 경남 통영 출생. 부산대학교 가정학 학사. 1989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괄호 속의 귀뚜라미』 『구절리 바람소리』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 『내 눈앞의 전선』 『내 눈앞의 전선』 『햇살 통조림』. 2003년 제4회 《현대시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