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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형철 시인 / 오이풀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4.

강형철 시인 / 오이풀

 

 

눈꺼풀 끝에 따뜻한 잠이

해일이 되어 몰려와

자갈 사이 스며드는 모래알처럼

뼛속으로 스며들겠다 아우성친다

 

내가 일해서 사 입은 속옷

창밖 보름달은 창호지를 희게 두들기며

어두운 하늘 끝에

보람이라는 낯선 말을 뉘어주고

하루 일들도 이불 깃에 속삭이며

나와 더불어 눕는다

 

이번 대목엔 웃으며 돌아가자

 

문지방에 손톱글씨로 적힌 말은

내 잠을 지키는 벙어리 등불

어른거리며 고라실 논두렁 끝에

돋아나던 오이풀이 춤추며 온다

때릴수록, 밑둥을 꺾어

손등을 후려칠수록 푸른 멍 뒤흔들며

향기를 뿜어주던 오이풀

 

 


 

 

강형철 시인 / 내 방엔 쓰레기통이 없다

 

 

버릴 것 추려 버리고

지닐 것 정돈하여 차곡차곡 쌓아둘 마음이 없다

 

누군가 내 방에 들어와 정돈을 하면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작자임을 금방 알겠지만

만원버스처럼, 빼곡한 지하철처럼

꼿꼿하게 서 있는 책들이 그 사람 일생의 사연이고

동전, 성냥갑, 붓펜은 물론 갓 나온 문학잡지, 고장난 전축이

모두가 내 내력임을 어쩌랴

 

수북하게 쌓인 담배 재떨이는 내 폐부의 실상

답장을 미뤄둔 채 모아둔 연하엽서는 내 사랑의 채무

 

방에는 전기난로의 코발트선이 뜨겁게 달아올라

영원히 정리되지 않을 내 방과 내 생을 부끄럽게 한다

살이라도 지지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이 정체

 

 


 

 

강형철 시인 / 그리움은 돌보다 무겁다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는

당신이 사랑하는 나조차

미워하며 질투하였습니다.

이제 당신이 가버린 뒤

고생대 지나 빙하기를 네 번이나 건너왔다는

은행나무에 기대어

견딘다는 말을 찬찬히 읊조립니다.

무엇이 사라진다는 것인가요

당신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내가 지워진 것도 아닌데

심연으로 가라앉는 돌멩이

앞서 깊어가는,

저기 그리움이 보입니다.

 

 


 

강형철 시인

1955년 전북 군산(옥구) 출생. 숭실대 철학과와 동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졸업. 오월시 동인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해망동 일기> < 야트막한 사랑>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 <환생>. 평론집 <시인의 길 사람의 길> < 발효의 시학>. 숭의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