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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여정 시인 / 비가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4.

여정 시인 / 비가

 

 

비가, 하루종일 내린다. 비가, 사람들의 발목을 자르고,

비가, 사람들의 무릎을 자르고, 비가,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키 큰 나무들만 머리통만 바꼼히 내밀고,

 

비가, 키 큰 나무들의 머리통을 출렁출렁 씹어 삼키는 비가,

고층 빌딩의 허리를 자르고, 비가,

 

고층빌딩도, 숲은 산도, 출렁출렁 씹히고 씹히는 나날들,

 

비가, 별을 삼키고, 비가, 태양을 삼키고, 비가 무지개여

안녕.....

 

 


 

 

여정 시인 / 셋방에는

 

 

셋방에는

해, 하면 달, 하고

달, 하면 해, 하는

부부가 산다

 

셋방에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고

비마저 내리는 날

사물들은 투명한 날개를 움직이며

힘차게 날아오른다.

천둥소리 들리는 벽,

벼락맞은 거울,

 

셋방에는

불, 하면 물, 하고

물, 하면 불, 하는 부부가

깨진 거울 속에서

살을 섞고 있다

 

해와 달의 신음소리

불과 물의 신음소리

정우와 난구가 부딪치는 소리

사이

기형아의 울음소리 들려온다

 

 


 

 

여정 시인 / 자모의 검

 

 

 혹자가 말하길, 입속은 자객들의 은신처란다. 그들이 즐겨 쓰는 무기는 '영혼을 베는 보검'으로 전해 오는 자모의 검이란다. 을씨년스런 날이면 자객들은 검은 말을 타고 허허벌판을 가로질러 어느 심장을 향해 힘차게 달려간단다. 천지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 어느 귓가에 닿으면 그들은 어김없이 이성의 칼집 을 벗어던지고 자모의 검을 빼어든단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 한 영혼의 목을 뎅거덩 자르고 나면 자객 들은 섬뜩한 미소로 조위금을 전하고 또다른 심장을 향해 말 달려간단다. 그날에 귀머거리는 복 있을진 저, 자객들의 불문율에 있는 '귀머거리의 목은 칠 수 없다'는 조항에 따름이라.

 

 혹자가 말하길, 자모의 검에 찔린 사람들은 귀부터 썩어간단다. 귀가 썩고 뇌가 썩고 심장이 썩고, 색 고 썩어 생긴 가슴의 커다란 구멍으로 혹한기의 바람이 불어대고 수많은 까마귀떼의 날갯짓이 장대비 처럼 내린단다. 그 부리에 생살이 뜯기고 새하얀 뼈를 갉히며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단다. 그날 에 수다쟁이는 화 있을진저, 더 많은 까마귀떼를 불러들임이라.

 

 자객의 말발굽 소리 요란한 날이면 너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두 손으로 귀부터 틀어막고 묵직한 바 위 뒤에 숨어 최대한 몸을 낮춰라. 그리하면 자객들이 탄 검은 말들이 너희를 비켜가리니, 자모의 검일 망정 결코 너희를 해(害)치 못하리라. 귀 있는 자들은 들어라, 이 말로 더불어 너희가 그날에 '복 받았 다' 일컬음을 받을지니, 부디 그날에 너희에게 복 있을진저, 혹자의 말이니라.

 

 


 

여정 시인

1998년 《동아일보》신춘문예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벌레 11호』(문예중앙, 2011)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