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권천학 시인 / 목수의 아내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4.

권천학 시인 / 목수의 아내

 

아침마다 아내는

공이눈 박힌 소나무 도마 위에

생포된 일상을 올려놓고

무른 살 속의 뼈를 발라낸다

아침마다 아내는

때 절은 문설주에 기대어 서서

어제 세운 굽은 기둥을

뽑으라고 한다

아침마다 아내는

연장주머니를 챙겨주면서

곧은 못을 단단히 박아야 한다고

속삭인다

그리고 밤마다

은밀하게

무덤의 집을 짓는다

 


 

 

권천학 시인 / 유명한 무명시인

 

시인 초년병 시절, 한 선배 시인에게

'유명한 무명시인'이 되겠다고 말했었다

'니가 뭘 몰라' 묘하게 웃던 선배는 그 후

세상 속으로 들어가 이름이 주렁주렁해졌다

그 말이 씨가 되어

나는 지금도

'중견'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하게 붙여지는

은둔과 칩거의 무명시인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무명으로 남는 일이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을 안다

'무명'은 이루었지만

아직 유명을 이루지는 못했다

내가 한 내 말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이제 유명해질 일만 남았는데

어떻게 해야 유명해지는 지를 몰라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다. 하지만

주렁주렁한 이름 대신

시가 주렁주렁해 지는 일

더 어려운 그 일에 매달려 여전히

고집 부리듯, 변명하듯

여전히 고집 부리듯, 변명하듯

세상의 변두리에서 쌉쌀하게 살며

아직도 덜 뜬 시의 눈을 뜨게 하려고

아직도 덜 뜬 나의 눈을 닦아내곤 한다

 

 


 

 

권천학 시인 / 중년

 

이름만 들어도

아름다운

병이 들고 싶어

풀섶

어디메쯤

가을 벌레 한 마리 기르면서

더듬이 끝으로 오는

새벽

찬란한

이슬로 맺혀

꽃의 심장을 무너뜨리는

햇볕에 찔려

아프게 죽으리니

이름만 들어도

향기로운

들꽃이고 싶어

떨려오는 바람결에

말갛게 살다가

시샘 없는 빛깔로 남아

꽃잎이던 기억마저 버리고

밤마다 승천하여

별이 되리니.

 

 


 

권천학 시인

현대문학에 시 '지게' '지게꾼의 노을'로 데뷔. 여원에 단편소설 '모래성' 당선, 여성중앙에 단편소설 <끊임없이 도는 풍차> 당선. 서울신문, 관악 문화 신문 등 컬럼니스트 역임. 2010년 <오이소박이>로 경희해외동포문학상 대상 수상. 시집 <그물에 갇힌 은빛 물고기> <청동거울 속의 하늘> <나는 아직 사과씨 속에 있다> <가이아부인은 와병중> <고독 바이러스>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등. 계간문예 '다층' 편집동인. 한국전자문학도서관 웹진 '블루노트'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