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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중식 시인 / 일관성에 대하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4.

김중식 시인 / 일관성에 대하여

 

 

시대가 깃털처럼 가비야운데

날개 달린 것들이 무거울 이치가 없다

나비가 무거울 이치가 없다

나비는 썩은 수박에도 주둥이를 꽃나니

 

있는 곳에서 있는 것을 먹으려면

쓰레기더미에 기생할 때가 있나니

먹고 산다는 것이 결국 기생한다는 것이 아니냐

남들이 버린 열정과 시든 꽃도 거기에 다 있나니

 

나비는 파리보다도 가비얍다

매 행동마다 필사적인 파리에 비하면

깊이도 없이 난해한 나비다

높이도 없이 현란한 나비다

 

나는 장자가 나비꿈을 꾸는 꿈을 꾸었다

자리를 뜨자마자 순결이 되는 나비

발을 터는 순간 결백이 증명되는 나비

내가 나비보다 무거울 이치가 없다

 

 


 

 

김중식 시인 / 아아

 

 

자다가도 일어나 술을 마시는 이유는

경의선의 코스모스에서 치명적인

냄새를 맡았기 때문.

최초의 착란,

그 순간 지진이 있었고

붉은 태양이 시간이 흐른 뒤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던 그이가

세상 단 한 사람만을 미워하게 되었기 때문.

잊기에는 생이 짧다는 것을.

 

 


 

 

김중식 시인 / 우물 하나둘

 

 

욕심 같은 두레박으로 퍼내도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을 들여다보면

물에 비친 내 얼굴

퍼낼수록 불안처럼 동요하는 내 얼굴

가벼운 빗방울에도 일그러진다

그냥, 들여다보면

절망 덩어리조차 서서히 가라앉히는 우물인데

고개를 돌리면

또 다른 한 삶의 세상인데

우리는 자꾸 무엇인가를 펴내려 한다

퍼낼수록 깊어지는 것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르며

부르면서도 자꾸 무엇인가를 퍼내려 한다

 

우물가 큰 그늘

드리운 버드나무의 밑동을 치니까

몸 전체가 쓰러진다

단 한 번 쓰러지면서 단 한 번 신음하는 버드나무를 보니까

사소한 일들이 사소해 보였다

 

잎새처럼 앙앙거리는 우리들이 정말 사소해 보였다

큰 그늘 드리우고

단 한 번 쓰러질 때까지 신음하지 않던 버드나무가

단 한 번 쓰러지면서

고통의 우물을 메꾸었다

고통의 밑바닥을 가는 사람만이 고통의 우물을 메울 수 있다면

우리는 삶을 운명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비록, 아무리 메꾸어도 메꾸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김중식 시인

1967년 인천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1990년 《문학사상》에 「아직도 신파적인 일들이」 등 몇 편의 작품이 추천되어 시단에 등단. 현재 『경향신문』에서 근무하고 있다. 시집 『황금빛 모서리』 『울지도 못했다』가 있음. 산문집 『이란-페르시아 바람의 길을 걷다』,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