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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진심 시인 / 고해성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3.

이진심 시인 / 고해성사

 

 

당신은 내게 너무도 잘 속아 주었다

제대로 속아 주려고 했던

단단히 속아 넘어간 사람처럼

당신이 결국은 나를 속였다

 

어두운 기도실에 엎드려 두 손을 촛불처럼

모아 쥐고 간구했다

 

겨우 손가락으로 당신의 얼굴을 읽었듯이

마음으로 더듬거려 당신을 새겨 넣었듯이

앞 못 보는 자,

이렇게 자신의 얼굴도 읽지 못해 얼굴을 읽혀 버렸다

더듬더듬 나아갔다

당신이 나를 속였듯이 내가 나를 속였듯이

그렇게 벽에 붙은 스위치를 지나친다

지금은 환하게 불 켤 수 없다

아직도 내가 너무 어둡다

 

 


 

 

이진심 시인 / 자궁 외 임신

 

 

마취가 덜 깬 탓일까

철제침대는

삐끄덕삐끄덕 신음소리를 내고

물 위에 붉은 꽃잎들처럼

커튼의 그림자 이 방 천장을 흘러다닌다

 

자궁의 문이 너무 단단하게 닫혀 있어

왼쪽 나팔관,

그 벗어난 길 위에 집을 지어버린 것일까

이제 내 몸은 폐광이다

괴어 놓은 버팀목들은 툭툭 분질러졌다

정전이 되어 버렸다

 

나는 서서히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침대는 연못처럼 나를 빨아들인다, 꿀꺽

나를 먹어 버린다

여기 연못에 누웠던 여자들의 삐끄덕삐끄덕

신음소리가 나를 가라 앉힌다

 

-시집 <맛있는 시집>에서

 

 


 

이진심 시인

1966년 인천출생.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업. 1992년 11회 <동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불타버린 집 > <맛있는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