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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자 시인 / 벌판의 꽃나무 김유자 시인 / 벌판의 꽃나무 봄에는 너무 많은 꽃이 핀다 꽃피지 않을 테다 결심하는 나무 잎만 무성한 나무, 잎 떨구고 줄기만 자라는 나무 나무만 남아도 나무인 나무 그런 생각도 생각하지 않는 나무 앞에 나는 서있다 몸을 떠나 먼 곳에서도 바라보는 몸 빛의 채찍이 목련나무를 시간은 내 몸을 착취한다 잎 속에서 밀려나오는 나를 본다 붉은 얼굴의 나에게 어이, 꽃나무 이제 그만 가, 너 때문에 생각이 돋고 꽃 피려고 해 나는 그만 생각하지 않는 나무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벌판 한복판에 나혼자라는 생각이 든다 봄엔 밖이 집안보다 따듯하다 나가고 싶지 않았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4월호 발표 김유자 시인 충북 충주 출생. 200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고백하는 몸들』 『너와 나만.. 2023. 5. 25.
노명순 시인 / 햇빛 미사 외 3편 노명순 시인 / 햇빛 미사 무덤 밖 파란 잔디 위로 걸어 나갈 수 있을까? 머리 속까지 뻗어오는 풀뿌리 한 줄기 빛이 내 몸에 닿을 수만 있다면 동맥 속은 무색투명한 피로 풀려 심장은 발딱거리기 시작하고 온몸엔 따뜻한 기운이 돌아올 텐데 나는 여전히 몸을 잔뜩 옹송거리고 저 건너 겨울 길에서 서성이고 있다 나를 큰소리로 불러볼까? 그냥 모르는 척 할까? 이쪽 길로 건너오겠어요? 이곳은 봄인데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고 잠자리를 한 일이 없는 것 같은 낯선 사람 ‘나와 나’ 내 안에서도 우리는 타인이다 햇살이 텅 빈 몸 안으로 들어와 목이 터지도록 노래 부르고 싶은 시간. 노명순 시인 / 눈부신 봄날 눈부신 봄날에 눈물 범벅 꽃 범벅 꽃 피면 환하다가 꽃 지면 깜깜하다 이렇게 한 세상 가는구나 봄날이 가는구.. 2023. 5. 25.
전봉건 시인 / 석류 외 2편 전봉건 시인 / 석류 여름이 두고 간 산을 누가 보았던가 와 있는 가을의 피를 누가 보았던가 다만 十月 한낮 하늘 꼭대기 햇덩이 살 한 점 피 한 방울 아무도 모르게 떨어지더니 저렇게 금빛 나는 석류 알마다 살로 피로 터지는 극채색이다 전봉건 시인 / 뼈저린 꿈에서만 그리라 하면 그리겠습니다. 개울물에 어리는 풀포기 하나 개울 속에 빛나는 돌멩이 하나 그렇습니다 고향의 것이라면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금도 똑똑하게 틀리는 일 없이 얼마든지 그리겠습니다. 말을 하라면 말하겠습니다. 우물가에 늘어선 미루나무는 여섯 그루 우물 속에 노니는 큰 붕어도 여섯 마리 그렇습니다 고향의 일이라면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금도 생생하게 틀리는 일 없이 얼마든지 말하겠습니다. 마당 끝 홰나무 아래로 삶은 강냉이 .. 2023. 5. 25.
김도연 시인 / 세 개의 세계 김도연 시인 / 세 개의 세계 세 개의 사과, 세 개의 사건, 세계의 희망 그것은 세계의 꿈 이브의 잠든 입술 마르틴 루터의 심장 폴 세잔의 소파에 흐트러진 사과와 오렌지 북극곰의 미래 코로나에 갇힌 밀실의 몽상 내 입술의 우울 세 개의 사과 세 개의 사건을 훔치고 싶다 그것은 세 개의 세계 웹진 『시인광장』 2023년 4월호 발표 김도연 시인 1968년 충남 연기에서 출생. 2012년 《시사사》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엄마를 베꼈다』(시인동네, 2017)가 있음. 2023. 5. 25.
김선아 시인 / 귀인 김선아 시인 / 귀인 귀인이 나타났다. 가시 없는 희귀종 장미 전문가라 했다. 접근금지 밀실로 모셨다. 평탄한 길인가 맘 놓고 뛰다보면 쐐기풀 섬, 성공가도인가 질러가다보면 설산 잔도. 이런 좌표가 내 오랜 지병이었고 핏줄 찔러대는 가시였다. 귀인은 삼칠일을 기다리라 했다. 무릎뼈 그만 주저앉을 지경이었으나, 나는 탑돌이 하듯 밀실 주위를 빙빙 돌았다. 드디어 삼칠일 되는 날, 뜨거운 접근금지 족쇄를 확 열어젖혔다. 온통 장미꽃무늬와 향수로 얼룩져 있었다. 귀인은 손톱 밑에 숨겨왔던 장미가시로 벽을 뚫고 멀리 사라진 후였다. 무늬와 향수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고군분투하며 장미꽃을 지켜낸 이는 가시였다. 가시가 귀인이었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4월호 발표 김선아(金善雅) 시인 1955년 충남 논산에.. 2023. 5. 25.
이생진 시인 / 까치와 까마귀가 외 2편 이생진 시인 / 까치와 까마귀가 먼저 까치가 짖더니 뒤 이어 까마귀가 짖는다 여러 마리가 연달아 짖는다 백와 흑의 파로워(follower)들이다 그 소리를 검색해보니 공갈과 협박 내가 떠돌며 쓴 시가 모두 가짜란다 가짜라는 뜻이나 알고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오늘은 이상하게 까치와 까마귀에게 당하는 기분이다 걸어온 길이 겨우 1km가 채 안 되는 짙은 안개 속 은행나무는 손에 쥔 것 하나 없이 털어버리고 겨울에 덮을 나뭇잎 하나 가진 것이 없다 900년을 살아온 은행나무도 저렇게 빈손으로 서 있는데 까치와 까마귀가 나를 향해 거침 없이 짖는 소리는 떠돌며 쓴 시가 모두 가짜라는 것이다 오늘은 이상하게 그런 기분이다 그들이 뒤따라오며 내 행동을 지켜본 듯이 나를 파헤친다 까치는 찢어발기는 소리이고 까마귀는.. 2023. 5. 25.
김윤희 시인 / 밀회 외 4편 김윤희 시인 / 밀회 다 나가고 없는 집에 용케 알고 그가 온다 문밖 망보고 있던 샛서방같이, 열린 뒷문으로 엉큼하고 재바르게 문 걸어 잠그고 다가앉는다 은근짜 돌쇠 밀어내지 못하도록 사나이같이 팔뚝으로 제압한다 이런 밀회 퍽 자극적이다 시 그가 오는 날이다 김윤희 시인 / 첫눈 오늘도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소식 끊긴 지 석 달 열흘 그 가을은 이제 겨울이 되었다 아직도 아무 소식은 없지만 첫눈 오는 오늘도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내리는 눈은 머리 꼭대기를 지나 가슴으로 뜨겁게 쌓이고 가슴에 쌓인 눈물 차갑게 녹아서 물이 되고 드디어 볼 수도 없이 날아가 버리지만 오늘도 나는 잃어버린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김윤희 시인 / 관절 관절의 촉수가 귀신처럼 현명하여 말하기를 대체로 그가 시키는 대로.. 2023. 5. 25.
김혜천 시인 / 세 번째 시간 김혜천 시인 / 세 번째 시간 태어나 죽는 것이 시간이라면 창조에서 시작되어 심판 날에 멈춘다면 절망이겠다 슬픔이겠다 ​ 시간의 터전은 마음 원운동을 하듯 현재를 살면서 기억 속에 어제가 있고 기대 속에 미래가 있다 ​ 참 마음은 천만겁이 지나도 옛 이 아니며 아직 다가오지 않은 만년의 미래가 곧 현재라 했던 함허 득통의 일갈처럼 시간은 실체가 아니어서 뛰어넘을 수 있다 관계 속에서 일상적이고 어제와 내일이 오늘로 모아진다 순간(점)이 늘어나면서 직선으로 나아가지만 밑바닥이 뚫려 있어 확장하면서 거기서 서로 뒤엉켜 끝없이 현재로 태어난다 반복적인 순환 속에서 순간이 부화하여 얼굴이 되고 새롭게 새롭게 흐르는 역동적인 공간 정지된 공간에서도 흐름이 있어 순간은 영원 속에 포함된다 두 영역이 뒤섞이는 영원의.. 2023. 5. 24.
장인수 시인 / 물갈퀴 외 2편 장인수 시인 / 물갈퀴 새떼들은 수백 번씩 물 속으로 잠수했다 잠수하는 새떼 중에는 총각도 있었을 것이다 골지고 비릿한 저수지의 자궁을 만졌던가 아직 불길 한 번 일지 않았을 자궁을 만졌던가 저수지의 내부에는 얼마나 많은 물갈퀴 자국이 몸부림치며 찍혔다가 소멸했을 것인가 둑길을 길게 걸어나온 물갈퀴는 그의 것이었을까 혼자서 하늘로 날아올라가 울음을 우는 물갈퀴 저 혼자 저렇게 뜨거워진 울음을 이 지상에서 나는 아직 받아본 적이 없다 장인수 시인 / 울음 농사 개구리가 울음 농사를 짓고 있다 무논 속의 하늘과 구름에게 울음모를 심고 있다 무논의 물소리를 마시며 크는 울음모를 심고 있다 논바닥은 울음교실, 울음하늘, 울음노래방 논바닥은 온통 울음곳간 개구리비가 쏟아진다. 판초를 입어야 할 것이다 개구리울음속.. 2023. 5. 24.
김대호 시인 / 저녁 오마주 김대호 시인 / 저녁 오마주 저녁 검문소는 속 깊은 울음 끝자락에 있다 터지는 속을 지나고 울음을 통과해야지 나타나는 검문소 나는 검문소 앞에 내용 없이 서서 살아온 날짜들을 세어본다 지독하고 때로는 지루한 낮과 밤들 커다란 편지봉투에 담기고 싶었다 산 채로 어디론가 배달되어 누군가에게 읽히고 싶었던 것 저녁은 내게 신앙 기도하고 낮추고 도망칠 수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바람의 유언을 들으며 동절기를 견디곤 했다 유통기한 지난 희망을 안고 살았다 저녁이 더욱 촘촘해지면 물 샐 틈 없는 어둠이 온다 어둠은 저녁의 유언을 밤새 건너편으로 옮긴다 그 건너편 아침이 도착하면 유언으로 읽히는 저녁의 유충들은 햇빛 속에서 반짝인다 다시 저녁이 올 때까지 환한 빛에 자신을 숨긴다 길도 없는 길을 걸어 다시 저녁이 .. 2023. 5. 24.
진혜진 시인 / 우리의 목책공 진혜진 시인 / 우리의 목책공 머무릅시다 목책보다 더한 장벽으로 그때나 이때나 들어설 수 없는 장벽이 둘러쳐져 있으니 변할 게 없다는데 변한 게 많아 생각 없다는데 생각이 많아 닿을 수 없이 멀어진 거리입니다 지금은 함께 살기를 결의한 것이 함께 죽기를 각오한 것이 죽기 살기였습니다만 물과 바람과 태양이 출렁였으니 이해 부탁드립니다 이전과 이후가 휘날리는 이곳에서 기다림은 없고 무관한 이유만 가득한 이곳에서 알 듯 말 듯 한 사람처럼 다 안다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조금 전이나 오랜 후나 우리는 파란이 되고 파장이 될 것입니다 우주의 블랙홀보다 캄캄합니다만 불 꺼진 입간판만 가슴속에서 덜렁거립니다만 기다립시다 지금은 사람과 사람의 브레이크 타임 오늘의 우리를 가장 많이 소비하게 된다 해도 웹진 『시.. 2023. 5. 24.
김중식 시인 / 일관성에 대하여 외 2편 김중식 시인 / 일관성에 대하여 시대가 깃털처럼 가비야운데 날개 달린 것들이 무거울 이치가 없다 나비가 무거울 이치가 없다 나비는 썩은 수박에도 주둥이를 꽃나니 있는 곳에서 있는 것을 먹으려면 쓰레기더미에 기생할 때가 있나니 먹고 산다는 것이 결국 기생한다는 것이 아니냐 남들이 버린 열정과 시든 꽃도 거기에 다 있나니 나비는 파리보다도 가비얍다 매 행동마다 필사적인 파리에 비하면 깊이도 없이 난해한 나비다 높이도 없이 현란한 나비다 나는 장자가 나비꿈을 꾸는 꿈을 꾸었다 자리를 뜨자마자 순결이 되는 나비 발을 터는 순간 결백이 증명되는 나비 내가 나비보다 무거울 이치가 없다 김중식 시인 / 아아 자다가도 일어나 술을 마시는 이유는 경의선의 코스모스에서 치명적인 냄새를 맡았기 때문. 최초의 착란, 그 순간.. 2023. 5.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