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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생진 시인 / 까치와 까마귀가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5.

이생진 시인 / 까치와 까마귀가

 

 

먼저 까치가 짖더니 뒤 이어 까마귀가 짖는다

여러 마리가 연달아 짖는다

백와 흑의 파로워(follower)들이다

그 소리를 검색해보니

공갈과 협박

내가 떠돌며 쓴 시가 모두 가짜란다

가짜라는 뜻이나 알고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오늘은 이상하게 까치와 까마귀에게 당하는 기분이다

 

걸어온 길이 겨우 1km가 채 안 되는 짙은 안개 속

은행나무는 손에 쥔 것 하나 없이 털어버리고

겨울에 덮을 나뭇잎 하나 가진 것이 없다

900년을 살아온 은행나무도

저렇게 빈손으로 서 있는데

까치와 까마귀가 나를 향해 거침 없이 짖는 소리는

떠돌며 쓴 시가 모두 가짜라는 것이다

오늘은 이상하게 그런 기분이다

 

그들이 뒤따라오며

내 행동을 지켜본 듯이 나를 파헤친다

까치는 찢어발기는 소리이고

까마귀는 둔기로 내리치는 소리다

그래서 나도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놈들아 시에 진짜가 어디 있니 입이나 다물어라”

그러고는 얼른 ‘건방진 것들’ 하고 웃었다

오늘은 이상하게 까치와 까마귀가

나를 물고 늘어지는 기분이다

 

 


 

 

이생진 시인 / 근하신년

 

 

서독까지 250원

<근하신년>이라고 찍힌 활자 밑에

이름 석 자 적는다

아직 살아 있다는 신호등

네게 이르지 못한 불빛이

아직 꺼지지 않고 있다는 표시

해마다 눈오는 12월

그때쯤에서 생각나는 사람

우표 값이 250원

비행기표 값이 그렇게 싸다면

벌써 찾아갔지

 

올해도 <근하신년> 그 밑에

이름 석 자 적고

그날부터 잊기 시작하는 사람

 

 


 

 

이생진 시인 / 가셰 박사의 초상

 

 

화가는 청진기를 귀에 꽂지 않고 눈에 꽂는다

첫인상으로 구도를 잡고

원근을 끌어다가

색을 칠한다

화가는 눈이 청진기다

내가 화실을 기웃거리는 것은

눈에 꽂은 화가들의 청진기 때문이다

 

가셰 박사는 고흐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자기와 흡사한 진동에 머리를 갸울인다

고흐가 보기에도 자기 증세와 비슷한 가셰 박사

그는 60을 넘긴 정신과 의사다

해군 모자를 쓰고

눈에 낀 푸른 애수가

압생트 성분이 강한 디기탈리스 꽃에 안겨 있다

빈센트의 발작은 압생트 과음 때문이라는데

세상을 노랗게 적시는 독성

고흐는 그 시대를 대변하는 정신병의 기록을

가셰 박사의 얼굴에 담으며 편지를 쓴다

‘나는 한 세기가 지난 후에도

유령으로 보이는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

 

가셰는 고흐의 그림을 좋아했으나

가난에 시달리는 고흐의 그림을 사지는 않았다

어찌 보면 그림을 거저 얻으려는 얌체

자기 초상화를 두 개 그려서 하나 달라는 얌체다

자기 초상화를 그리는 고흐에게 자기 딸

마르그리트의 초상화도 그리라는 선심을 썼지만

딸이 고흐를 사랑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100년 후 유령처럼 보이는 초상화

그 대상이 가셰다

가셰는 의술로 유명하기보다

고흐가 그린 초상화로 유명해진 의사다

 

* 가셰 박사의 초상: 고흐가 자살하기 수주일 전에 그린 그림

 

 


 

이생진(李生珍) 시인

1929년 충남 서산 출생. 국제대학 영문과. 1965~1969년 김현승 시인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으로 등단. <산토끼> <바다에 오는 이유> <그리운 바다 성산포> <섬에 오는 이유> <외로운 사람이 등대를 찾는다> <혼자 사는 어머니> <서귀포 70리길> 등 시집 31권, 수필집 <아무도 섬에 오라고 하지 않았다> <걸어다니는 물고기> 등. 윤동주문학상, 2002.상화시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