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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윤희 시인 / 밀회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5.

김윤희 시인 / 밀회

 

 

다 나가고 없는 집에

용케 알고 그가 온다

 

문밖 망보고 있던

샛서방같이, 열린 뒷문으로

엉큼하고 재바르게 문 걸어 잠그고

다가앉는다

은근짜 돌쇠

밀어내지 못하도록 사나이같이

팔뚝으로 제압한다

이런 밀회 퍽

자극적이다 시 그가 오는

날이다

 

 


 

 

김윤희 시인 / 첫눈

 

 

오늘도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소식 끊긴 지 석 달 열흘

그 가을은 이제 겨울이 되었다

아직도 아무 소식은 없지만

첫눈 오는 오늘도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내리는 눈은 머리 꼭대기를 지나

가슴으로 뜨겁게 쌓이고

가슴에 쌓인 눈물 차갑게 녹아서

물이 되고 드디어

볼 수도 없이 날아가 버리지만

 

오늘도 나는 잃어버린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김윤희 시인 / 관절

 

 

관절의 촉수가 귀신처럼 현명하여

말하기를

대체로 그가 시키는 대로 한다면

흐린 오늘 일진은 말짱

꽝이다

 

나가지 마라

만나지 마라

 

세상에 층계 지우는 축지법은

 

 


 

 

김윤희 시인 / 만월

 

 

늦은 밤 고장 난

가로등 고쳐준

골목길 만월

 


 

 

김윤희 시인 / 저질

 

 

요즘 나의 절실한 화두는

'저질'이다 비싼 밥

먹고 여기저기 기웃거렸으니

한 사흘 굶어야겠다

 

 


 

김윤희(金閏喜) 시인

1939년 경남 진주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 졸업. 196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겨울방직》 《소금》 《오직 눈부심》 《설국》 《성자멸치》 《오아시스의 거간꾼》 등이 있음. 계간 <시와시학> 제14회 시와시학상 작품상 수상. 2015. 제23회 공초문학상. 현재 한국 여성문학인회 자문위원, 한국시인협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