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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노명순 시인 / 햇빛 미사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5.

노명순 시인 / 햇빛 미사

 

 

무덤 밖 파란 잔디 위로 걸어 나갈 수 있을까?

 

머리 속까지 뻗어오는 풀뿌리

한 줄기 빛이 내 몸에 닿을 수만 있다면

동맥 속은

무색투명한 피로 풀려 심장은 발딱거리기 시작하고

온몸엔 따뜻한 기운이 돌아올 텐데

 

나는 여전히

몸을 잔뜩 옹송거리고 저 건너 겨울 길에서

서성이고 있다

나를 큰소리로 불러볼까?

그냥 모르는 척 할까?

이쪽 길로 건너오겠어요? 이곳은 봄인데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고 잠자리를 한 일이 없는 것 같은 낯선 사람

‘나와 나’ 내 안에서도 우리는 타인이다

 

햇살이 텅 빈 몸 안으로 들어와

목이 터지도록 노래 부르고 싶은 시간.

 

 


 

 

노명순 시인 / 눈부신 봄날

 

 

눈부신 봄날에 눈물 범벅 꽃 범벅

꽃 피면 환하다가 꽃 지면 깜깜하다

이렇게 한 세상 가는구나

봄날이 가는구나

 

어머니 숨 거두기 전

마지막 봄 보여 드리려고

풋솜처럼 가벼운 몸을

포대기 둘러 들쳐 업은 동네 골목

 

눈부시게 봄날이 간다

눈부신 봄날이 가는구나.

 

 


 

 

노명순 시인 / 입춘

 

 

초록배낭을 짊어진 한 사나이가

아지랑이표 담배를 물고

햇살 당겨 불을 붙이며

 

하얀 눈이 희끗희끗한 산 중턱에 걸터 앉는다

 

 


 

 

노명순 시인 / 서천

 

 

누군가 빨간 수박 반쪽을 먹다가

서산 골짜기 위에 걸쳐 놓았다

참 달디 달게 생겼다 마침 갈증이 나던 차에

아삭아삭 단물 흘리며 마저 먹어 버리려고

손을 뻗어 수박을 집으려고 하는 순간

어두운 하늘이 나보다 먼저 순식간에 먹어치워 버린다

먹으며 흘린 수박물만 서산 위에 붉게 번져 젖는가 했더니

곧 말라 버린다, 깜깜한 어둠이다

더욱 목이 탄다.

 

 


 

노명순(魯明順) 시인

전북 익산 출생. 1989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따뜻하다> <서천> <눈부신 봄날> 등. '서천지' 동인. '미래시' 동인. 전동아방송 성우, 시극 공연 다수. 2011년 <한국시문학상 특별상>. 2010.11.11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