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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녀 시인 / 양들의 사회학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5.

김지녀 시인 / 양들의 사회학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 울타리를 칩시다

우리 정원이 다 망가졌어요

창문처럼 입들이 열렸다 닫혔다

교회 십자가 하나 세워도 좋을 법한 초원 위에서

양들이 풀을 뜯어 먹는다

눈과 눈 사이가 넓구나

얼굴 옆에 깊이를 알 수 없는 두 눈이 귀처럼 달려

양들은 눈이 어둡다

큰 눈은 잘 들을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렇습니까?

전 그냥 결정되면 알려주세요

그대로 따라갈게요

양 한 마리가 갑자기 달려 나간다

그 뒤를 따라 우르르 쫓아가는 것은 양들의 습성

벼랑인 줄 모르고

와르르 떨어져 죽는 줄 모르고

아이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상관없다는 표정

털이 계속 자라니까 신경 쓰여 못 살겠어

일 년에 한 번씩은 온몸의 털을 깎아야죠

그것이 문화인의 자세니까

누가 먼저 할까요?

 

초원은 고요하다

이마는 순하고

양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김지녀 시인 / 나의 잠은 북쪽에서부터 내려온다

 

 

북쪽을 모르면서

북쪽이 그리웠다

 

나는 감염된 계절이에요 팔과 다리를 오므리고 한 덩어리의 어둠으로 녹아가는 중입니다

크고 검은 고래의 뼈를 생각합니다 아늑한 동굴입니다

 

얼마나 남았을까요?

나는 벤젠처럼 냄새가 없어요

창문을 열어놓고 자는 버릇을 고칠 수가 없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을 지우면서

휘파람을 불면서 아래로

더 아래로, 추락하는 꿈속에서

찬바람이 불어, 나를 모르는 사람의 눈동자에서

 

충혈된다는 것은 출구가 없다는 것

 

빗속에서도 젖지 않고 메말라가는 곳

그런데 나는, 언제까지 뻗어가야 하는 동굴일까요?

 

닫힌 서랍 속에서

북쪽의 태양이 길어지고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만 태어나고

 

북쪽을 모르면서

북쪽이 그리웠다

 

나는 조금 더 어두워졌다

 

* 릴케, 『말테의 수기』

 

 


 

 

김지녀 시인 / 모딜리아니의 화첩

 

 

목이 계속 자란다면

액자의 바깥을 볼 수 있겠지

 

눈동자가 없어도

밤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어

 

웃는 입이 없어

조용해진 세계에서

 

얼굴과 얼굴과 얼굴의 간격

 

목이 계속 자란다면

무너질 수 있겠지

 

붉은 흙더미처럼 나의 얼굴이

긴 목 위에서 빗물에 쓸려 나가네

꼿꼿하게 앉아서

갸우뚱하게

 

 


 

김지녀 시인

1978년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 성신여대 국문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 제1회 '세계의문학 신인상' 을 수상하며 등단.  시집으로 『시소의 감정』 『양들의 사회학』이 있음. 제20회 편운문학상 시부문 우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