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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주석희 시인 / 반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5.

주석희 시인 / 반지

 

 

팥배나무가 꽃을

아침과 저녁

허공에 불러내는 동안

 

산수유 열매가

아이의 자전거 바퀴를 굴린다

 

쇠창살 담장에

덩굴장미

이제껏 숨겨 놓았던 패를

또 한 장 펴 보이며

 

무참하게 번지는

한판 대결을 통첩한다

 

공원 화장실 앞 붓꽃이

최근에 터득한 편년체로 봄을

가까스로 기록하는데

 

아이의 자전거에서 노인의 손에서

반짝이는 햇빛

오후를 견디는 자전거 바큇살

 

손가락 사이로

손가락 사이로 해가 지는

 

깜박, 희미하게

붓꽃이 저녁을 마저 기록하며

약속을 지키는, 오월

 

 


 

 

주석희 시인 / 붉은 사막의 표정

 

 

사막의 여우가 낙타 발자국을 세며 따라간다

느릿느릿 태양과 낙타와의 거리

여우는 낙타의 그림자를 밟지 않는다

붉은 능선과 달개비 꽃 짓이겨 놓은 하늘빛 사이

하루를 견딘 저녁이 찾아온다

 

그녀가 여우에게 구운 소시지를 던져준다

먹이를 구걸하는 타성의 눈빛과

메마른 그녀의 이마가 모닥불 속에서 끝없이 타오른다

튀어 오르는 불티 곤두박질치는 유성

모래바람이 수없이 묻어버린 낙타의 눈빛 같다

해가 진 쪽으로 연기가 풀어지고

심중을 향한 질문이 사막의 별빛으로 오롯이 돋아난다

호기심을 부풀리며 이방인의 체취를 밟아온 여우가

담요에 파묻힌 여우에게 가만히 귀를 건넨다

불야성에 지친 도시의 여우가 오래전에 잃어버린

본연의 목소리에 매달리듯 귀를 묻는다

 

바람이 분다

사막의 새벽은 변심한 여자의 입술처럼

낯설고 싸늘하다

하룻밤 여우들의 욕망이 불타버린 자리에서

새하얗게 재가 날린다

첩첩 붉은 새벽이 표정을 바꾼다

 

 


 

주석희 시인

1966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 (본명 주영숙). 계간 《포엠포엠》 2013년 겨울호에 〈이타적  언어〉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2019 경기문화재단 문예진흥기금 수혜. 시인학교詩냇물 회원. 한국작가회의 詩분과 회원. 2015년 중봉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이타적 언어』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