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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봉건 시인 / 석류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5.

전봉건 시인 / 석류

 

 

여름이

두고 간 산을

누가 보았던가

와 있는

가을의 피를

누가 보았던가

 

다만

十月 한낮

하늘 꼭대기

햇덩이

살 한 점

피 한 방울

아무도 모르게

떨어지더니

 

저렇게

금빛 나는

석류 알마다

살로 피로

터지는

극채색이다

 

 


 

 

전봉건 시인 / 뼈저린 꿈에서만

 

 

그리라 하면

그리겠습니다.

개울물에 어리는 풀포기 하나

개울 속에 빛나는 돌멩이 하나

그렇습니다 고향의 것이라면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금도 똑똑하게 틀리는 일 없이

얼마든지 그리겠습니다.

 

말을 하라면

말하겠습니다.

우물가에 늘어선 미루나무는 여섯 그루

우물 속에 노니는 큰 붕어도 여섯 마리

그렇습니다 고향의 일이라면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금도 생생하게 틀리는 일 없이

얼마든지 말하겠습니다.

 

마당 끝 홰나무 아래로

삶은 강냉이 한 바가지 드시고

나를 찾으시던 어머님의 모습

가만히 옮기시던

그 발걸음 하나하나

조용히 웃으시던

그 얼굴의 빛무늬 하나하나

나는 지금도 말하고 그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한 가지만은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것만은

내가 그리질 못하고 말도 못합니다

강이 산으로 변하길 두 번

산이 강으로 변하길 두 번

그러고도 더 많이 흐른 세월이

가로세로 파놓은 어머님 이마의

어둡고 아픈 주름살.

 

어머님

꿈에 보는 어머님 주름살을

말로 하려면 목이 먼저 메이고

어머님

꿈에 보는 어머님 주름살을

그림으로 그리려면 눈앞이 먼저 흐려집니다.

아아 이십 육년

뼈저린 꿈에서만 뫼시는 어머님이시여.

 

 


 

 

전봉건 시인 / 작은 지붕 위에

 

 

작은 지붕 위에 내리는 것은 눈이고

작은 창틀 속에 내리는 것은 눈이고

작은 장독대에 내리는 것도 눈이고

눈 눈 눈 하얀 눈

눈은 작은 나뭇가지에도 내리고

눈은 작은 오솔길에도 내리고

눈은 작은 징검다리에도 내리고

새해 새날의 눈은

하늘 가득히 내리고

세상 가득히 내리고

나는 뭔가 할 말이 있을 것만 같고

어디론가 가야 할 곳이 있을 것만 같고

한 사람 만날 사람이 있을 것만 같고

장갑을 벗고 꼭 꼭 마주 잡아야 하는

그 손이 있을 것만 같고

 

 


 

전봉건(全鳳健) 시인(1928~1988)

1928년 평남 안주 출생, 숭인중학교. 평양 숭인중학교 졸업 후 월남. 1950년'문예'에 시 '원(願)' '사월(四月)' '축도(祝禱)' 등 미당과 영랑의 추천으로 등단. '예술시보' '문학춘추' 등 편집 실무, '현대시학' 창간 및 주간, 자유문협 상임위원, 문총 중앙위원, 한국시인협회 간사 및 중앙위원 역임. 제3회 한국시인협회상, 대한민국 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 시집 : '사랑을 위한 되풀이' '춘향연가' '속의 바다' '북의 고향' '돌' '트럼펫 천사' '기다리기'. 1988년 영면,(향년 59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