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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그리스도교 영성사] 프란치스코 수도회 영성

by 파스칼바이런 2009. 11. 5.
[그리스도교 영성사] 프란치스코 수도회 영성(1)

 

[그리스도교 영성사] 프란치스코 수도회 영성

(1)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

 

 

구즈만의 성 도미니코와 동시대 인물인 프란치스코 역시 이 시대의 위대한 성인이자 개혁가였다. 성인의 전기를 처음으로 쓴 첼라노의 토마스는 전기 제23장에서 성 도미니코가 성 프란치스코에게 했다는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형제님, 형제님의 수도회와 우리 수도회는 하나가 되어 교회 안에서 하나의 같은 생활 양식을 살았으면 합니다』

 

이런 말을 한 데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 왜냐하면 두 수도회는 설립 당시부터 대단히 비슷한 기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복음적 청빈과 설교의 직무에 있어서는 동일했던 것이다. 도미니코와 프란치스코는 복음적 기준에 따라 충실히 살아가고 있었으므로 그 당시 교회의 부패를 없애려고 노력하였고 이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가르쳐 자신들처럼 복음의 기준에 따라 살도록 가르쳤다.

 

당시 복음의 가르침은 거의 모든 곳에서 무시되고 있었다. 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은 재산에 관심이 많았고 고위 성직자들은 세속적 권한에 치중하고 있었다. 이러한 부패와 빗나간 삶을 바로 잡으려는 시도들은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회개에 대한 가르침도 무시되었다. 일부 개혁가들은 세속적인 힘에 의존하려고 하였다. 그 당시 브레쉬아의 아르놀드라는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일부 개혁가들은 폭력에 의지하려 하였고 또 다른 사람들은 빗나간 신심을 강조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알비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 프란치스코가 제시한 삶의 방식은 과거의 수도적 삶과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서 뜻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다. 그는 대단히 순박하고 소박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증진시키려고 애썼다.

 

성 프란치스코는 1181년 경 이탈리아의 아씨시에서 태어나 그의 나이 26~27세 되던 1207년 경 부유하고 무질서한 생활에서 회개하여 가난과 회개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기도와 극기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2년 뒤 11명의 동지들(제자들)을 모아 규칙을 주어 지키게 하였다. 그 규칙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구두 인정을 받았다. 이 규칙은 가난과 겸손 그리고 교회의 권위에 온전히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강조는 복음적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이상적인 방법인 동시에 그 당시 발도파나 다른 이단에 물들었던 영성을 바로 잡기 위해서도 필요한 조처였다.

 

프란치스코는 회심한 다음에는 동지들을 모으기 전에 이미 마태오 복음 10장 9~10절(『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 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에서 가르치고 있는 절대적 가난의 교훈을 가능한 한 글자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세월이 한참 지난 후 공동체가 성장했을 때 사도직을 하는 수도회가 어느 정도 가난을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엄격한 가난을 완화시키는 방안을 정당화하려 할 때 프란치스코는 『누구든지 단순한 욕구를 만족시키면 안락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프란치스코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운동, 즉 프란치스코적 운동은 유럽 전역으로 크게 전파되었고 원초적인 가난의 정신도 다소 완화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의 이상과 관련된 재미있는 문제들이 많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다. 가난에 대한 복음의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 사는 것이 가능한가? 프란치스코는 근원적으로 정주하지 않는 탁발 설교가들의 집단이나 어떤 조직된 단체를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가 생각한 것은 하나의 수단이었는가 아니면 목적인가? 혹은 그가 수단과 목적을 구분하지 못한 오류를 범했는가? 이러한 점이나 이것과 관련된 주제에 대해서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으나 그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그 수도회의 후원자였던 우골리노 추기경은 프란치스코가 구상한 가난에 대한 규칙이 너무나 엄격하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교회의 권위는 성 프란치스코가 구상한 방식의 수도원 승인을 꺼려하였다.

 

성 프란치스코와 그 수도회의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다. 1212년과 1214년 프란치스코는 이슬람 교도들을 회두시키기 위하여 중동으로 가려는 무모한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1219년에 계획이 성사되어 술탄 앞에서 강론을 하였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아탈리아로 돌아와야만 했다. 1212년 성인은 글라라에게 수도복을 주고 「가난한 글라라회」라는 제 2회를 창설하였다.

 

 

1220년 프란치스코는 수도회의 최고 장상직을 사임하였다. 베드로 수사가 총장이 되었으나 그 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엘리아스 수사가 그 뒤를 이었다. 1220년에 있었던 총회는 수도회 안에서 처음으로 위기를 맞게 되었는데 여기서 규칙을 새롭게 승인하고 공포했으나 우골리노 추기경은 프란치스코에게 교황청의 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규칙을 다소 완화하도록 권하였다. 이리하여 1223년 총회에서 새 규칙을 만들어 교황 호노리오 3세가 이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여 그 해 11월에 공포하였다.

 


 

 

[그리스도교 영성사] 프란치스코 수도회 영성

(2)

 

 

성 프란치스코는 1226년 10월 3일 지상의 삶을 거룩하게 마치고 귀천하였다. 그러자 10년이 지난 후 규칙을 개정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가난 서원을 엄격히 지키자는 회원들과 완화하자는 회원들로 갈라지게 되었다. 가난을 엄격히 지키자는 소위 「영성파들」은 1257년부터 1274년까지 총장을 지낸 성 보나벤투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난을 수도회와 교황께 대한 순명보다도 더 위에 놓고 고수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애덕보다도 가난을 더 중히 여기고 있었다. 이리하여 장기간 가난의 서원으로 인해 문제가 생기자 1909년 교황 비오 10세는 교황 서한을 발표하여 성 프란치스코의 후예들을 세 수도회로 나누는데 인정하였다. 이들은 작은 형제회(O.F.M.)와 꼰벤뚜알(O.F.M.Conv.)과 카푸친(O.F.M.Cap.)으로 갈라졌으나 이들 모두 프란치스코 성인을 동일한 창설자로 모시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의 초기 이상이 다소 변형된 모습을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설교의 사도직과 탁발 수도회의 고수이다. 수도자들은 초기부터 창설자의 모범을 따라 순회 설교자들이었다. 설교자들에게는 기본적인 학식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들은 창설자의 뜻에 따라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그 후 수도자들은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자 교구 사제들의 반발이 심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파리 대학교 옆에 집을 마련하여 기거하면서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다시 교구 사제들의 심한 공격을 받았으나 성 토마스와 성 보나벤투라의 덕분으로 수도자들의 신분은 인정을 받았고 교황청의 도움을 받아 교황 알렉산데르 4세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이들의 학문 연구는 성 보나벤투라, 빠도바의 성 안토니오 그리고 요한 둔스 스코투스 등 위대한 학자들에 의해 고조되었다. 이들 중에서도 보나벤투라 성인은 레오 13세의 표현처럼 『신비가들의 왕자』라는 칭호만큼 그의 학문적 업적은 위대하다. 그를 일컬어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제2의 창설자라고도 한다. 그만큼 그의 영성적 업적은 지대한 것이다. 그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그들은 서로 차이점이 많았으나 서로 가까운 친구였다. 그들의 신학 접근 방식도 달랐다. 성 토마스가 주지적이고 분석적이었다면 성 보나벤투라는 주의적이고 신비적이었다.

 

성인에 대하여 위대한 현대 신학자 이브 꽁가르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성 보나벤투라에게 있어서 신학은 은총의 산물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소통의 결론처럼 여겨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성 보나벤투라에게 있어서 신앙과 나타남 사이에 있는 것이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 신학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순수 지적인 선물만은 아니다. 그것은 죽은 신앙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의한 살아있는 신앙이고 덕행의 실천이며 하느님과 사랑의 일치를 위한 염원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 토마스의 신학이 성 보나벤투라의 신학과 다른 점을 알 수 있다. 성 토마스는 신학을 신앙의 확신에 대한 성장으로 본다. 이 확신들이 인간의 이성과 합치하여 지식의 체계로 세워진다. 신학도 다른 모든 것처럼 하느님의 섭리하심으로 성장 발전하여 초자연적 신앙 안에 뿌리를 내리게 되나 그것은 엄격히 말해서 이성적으로 세워지는 것이다』

 

다른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성 보나벤투라의 업적은 베드로 롬바르도의 명제론을 주석한 데 있다. 성인이 쓴 업적들은 어떤 의미에서 이 작업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의 학설의 기본적 성격들은 할레스의 알렉산데르와 성 아우구스티노의 학설을 따른 전통에 있다. 그의 학문적 작업은 수도회 창설자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으로 들어가 세라핌 천사와 같이 사랑이신 하느님을 직관하고 그것을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권위에 순종하였고 신학자들을 존경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였고 늘 조용하고 평정된 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삶으로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을 실천하였고 뛰어난 학구심으로 학자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온화한 성품으로 인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성인의 영적 학설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그는 이 점에서는 성 토마스와 일치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강생의 목적은 구속에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의 중심이시다. 그리스도인 영성의 기초는 겸손에 있다. 그리스도인 완덕의 본질은 애덕이다. 이는 지혜처럼 완성되는데 신비적 은총들과 연관이 있다. 관상은 사랑과 지혜의 완성이다. 이는 보는 것보다는 하느님을 정답게 체험하는 데 있다. 이는 온전히 수동적이며 어떤 형태의 탈혼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성 보나벤투라는 월등히 뛰어남(excessus)이라고 하였다.

 

성 보나벤투라는 수도회를 창설자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에 따라 쇄신하기 위하여 일생동안 사부의 정신에 따라 살았다. 복음적 권고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특별히 가난의 정신을 강조하였고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설교하고 고해성사를 주며 관상 생활을 통하여 완덕에 이르려고 노력하였다.

 


 

  축일 10월 4일 성 프란치스코(Franc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