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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발자취를 찾아서

by 파스칼바이런 2010. 3. 17.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발자취를 찾아서]

 

카를 보이티야, 교황이 되다

  

더 많은 이들 만나려 쉼 없이 해외순방

  

  

- 1989년 세계성체대회를 위해 한국을 찾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땅에 입을 맞추고 있다. 그는 발을 딛는 나라마다 그 땅에 입을 맞추고

축복하며, 되도록 많은 이들을 만나려 노력했다.

  

  

그리워하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복자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가톨릭신문은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을 맞아 교황으로서의 그의 생애를 돌아보고, 이탈리아 로마 내 그의 숨결이 닿은 곳을 찾아가본다.

  

104차례, 129개국을 사목 방문한 교황, 공산국가 출신의 첫 교황, 1385명의 시복시성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운 교황.

파격과 새로움을 보여준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작점에는 굳센 신앙과 굳은 믿음이 있다.

  

  

카롤 보이티야, 교황이 되다

  

1978년 10월, 교황 요한 바오로 1세가 선종했다. 슬픔을 뒤로 미룬 채 다음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시스티나 성당에는 전 세계 추기경들이 몰려들었다.

그 해 10월, 교황선거가 열렸고 이미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그'가 교황으로 선출됐다. 시스티나 성당에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 유년 시절의 요한 바오로 2세.

10월 21일, 폴란드의 어린 소년이었던 카롤 보이티야가 바티칸 광장에 섰다. 수많은 군중들이 그를 보고 '빠빠(교황)'라고 외치며 성호를 긋는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군중들과 대관식에서의 첫 만남이었다.

  

이탈리아인이 아닌 공산국가 폴란드에서 날아온 교황.

낯설어하고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교황은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한다.

가톨릭대사전은 당시 교황의 이 말을 두고 이탈리아인이 아닌 교황에 대해, 교회가 안고 있는 현재의 어려움에 대해, 전쟁과 핵 위험과 테러리즘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전임 교황들과는 다른 행보를 걷는다.

교황관을 쓰지 않고 성 베드로광장에서 소박한 취임식을 연 것이다.

그의 이러한 소박함은 청년기 때 보냈던 다양한 인생경험에서 우러나왔다.

  

그처럼 다양한 인생을 경험한 이도 드물었다.

크라쿠프의 야겔로니카 대학에서 폴란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그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자 솔베이 화학공장의 근로자로 일했다. 채석장에서 돌을 깨고 운반하며 발파작업을 했고, 수질 정화부로 일하기도 했다.

  

교황이 돼서도 그는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사람들을 찾았다.

그 대상은 신자와 비신자로 나뉘지 않았다. 갈라진 형제들을 만났고, 공산국가의 수장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으며, 타종교인들과도 스스럼이 없었다.

   

  

- 1978년 10월 교황 취임식에서의 요한 바오로 2세. 그는 교황관을 쓰지 않고

소박한 모습으로 취임식에 임했다.

  

  

전 세계와의 만남

  

1979년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를 열기 위해 멕시코에 발을 딛자 요한 바오로 2세는 땅에 입맞춤하고 많은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다.

이 모습을 시작으로 그는 발을 딛는 나라마다 그 땅에 입을 맞추고 축복하며 되도록 많은 이들을 만났다.

  

1984년 우리나라를 찾았을 때도 그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순교자의 땅'을 외치며 한국 땅에 입을 맞췄으며, 서울과 대구 등 다양한 곳을 방문해 최대한 많은 이들을 만나려고 노력했었다.

  

멕시코를 방문했던 교황은 1979년 후반 폴란드, 아일랜드, 미국, 터키 등을 잇달아 방문했으며, 초인적인 의지로 해외순방을 계속했다.

이러한 와중에도 그는 스키와 하이킹, 카누 등을 즐기며 강건함을 드러냈으며, 더 많은 이들과 더 많은 만남을 이어가기 위해 쉼 없는 달리기를 시작했다.

  

이러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여정은 그의 말과 생각, 행동으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취임 초기, 몰려든 기자들에게 그는 자신의 생각을 또렷하고 분명하게 전했다.

  

“교황은 바티칸 안에 죄인처럼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초원의 유목민들부터, 수도원의 수사나 수녀들까지 모든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또 모든 가정을 방문하고 싶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발자취를 찾아서]

 

몸소 보여준 진정한 용서의 삶

  

신변위험 무릅쓰고 신자들 가까이서 만나길 원해

 

- 일반 시민들이 교황을 만나볼 수 있는 장소인 성 베드로광장.

이곳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많은 추억과 이야기를 남겼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떠났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이곳에서 그를 기억하며 그리워한다.

 

바티칸 성 베드로광장은 일반시민들이 교황을 만나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다.

일반알현을 통해 이뤄지는 이 장소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많은 '추억'과 '이야기'를 남겼다.

그 가운데 1981년 교황이 터키의 한 청년에게 저격당한 후 병상에서 사투하며 그를 용서했던 일은, 우리가 성 베드로광장에 서면 요한 바오로 2세를 자연스럽게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군중을 가로지른 총성

  

- 저격 직전 아기를 안고 있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모습이 담긴 시복식 포스터.

 

'탕! 탕!'

  

군중을 가로지른 총성과 함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쓰러졌다.

1981년 파티마의 동정마리아 축일이었던 5월 13일, 일반알현 중 저격당한 것이다.

불과 3m 거리였다. 당시 교황은 평소처럼 일반알현에 참석한 한 아기에게 강복하고 있었으며, 아기를 엄마에게 건네주고 저격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아기와 교황의 모습은 이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복식을 알리는 포스터의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현지 언론은 지금은 20살이 된 아기를 인터뷰하기 위해 미국까지 찾아가 그의 부모와 그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성 베드로광장에서 교황을 향해 총을 겨눈 이는 터키 출신의 메메트 알리 아그자라는 24살의 청년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를 태운 차는 전속력으로 사이렌을 울리며 곧바로 병원으로 달렸다.

  

복부와 손가락에 큰 상처를 입고도 다행히 교황은 목숨을 건졌지만, 병상에서 총상과의 사투를 계속해야 했다.

응급수술을 받아 고비를 넘긴 교황은 저격사건이 일어난 지 나흘 후, "나는 나를 저격한 형제를 위해 기도하며 그를 진심으로 용서했다"고 말했다.

  

5월 18일은 교황의 61회 생일이기도 했다.

생일을 5일 앞두고 저격당한 교황이 자신을 쏜 청년을 용서한다고 말한 것이다.

저격범의 총탄에 쓰러졌던 교황은 결국 두 번에 걸친 대수술과 93일간의 입원, 장기간의 요양을 통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당시 교황의 곁을 지켰던 경호원들은 교황의 경호를 수행하며 겪는 어려움에 관해 고백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1978년 교황에 즉위한 직후 측근들에게 자신이 신자들과 보다 완전하고 자유로운 접촉을 원한다고 말한 것이다.

저격과 같은 신변상의 위험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무엇보다 신자들과의 긴밀한 접촉이 그의 염원임을 강조했다.

예견된 신변의 위험이었고, 교황은 위험을 감수하며 신자들과 끊임없이 만나기를 원했다.

  

저격범의 어머니 무제이엔 아흐자도 요한 바오로 2세에게 편지를 보내 아들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호소했다.

  

“제 아들이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성격이 불안정하고 공격적이 됐습니다.

당신(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은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대변하는 분이시므로 자비로써 제 아들을 용서해 주실 수 있습니다.”

  

교황은 그를 진심으로 용서했고, 교도소에 찾아가 '무엇이 진정한 용서인가'라는 용서의 정의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1981년 10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바티칸 사상, 유례없는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저격사건

이후 처음으로 성 베드로광장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 쓰러지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저격 당시 모습.

    

성모 마리아와 요한 바오로 2세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17년 5월 13일 파티마 성모발현을 목격한 2명의 목동에 대한 시복식 미사 후 한 메시지를 발표했다.

메시지는 '파티마 제3의 비밀이 자신이 암살범에 피격된 사건을 예언한 것'이라는 공식발표였다.

파티마 성모 발현 83년만에 공개된 '제3의 비밀'은 역대 교황과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등 극히 일부에게만 간직돼 온 것이다.

  

교황은 당시 가까스로 생명을 건진 후 자신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한 것은 성모 마리아의 손길이라고 여러 차례 언급해왔다.

또 1982년 저격 1주년이 되던 날에는 파티마를 순례하고, 당시의 총탄을 파티마의 성모에게 봉헌하기도 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떠났지만, 성 베드로광장에는 여전히 군중들이 모여 있다.

관용의 지도자, 행동하는 교황, 사랑과 평화의 요한 바오로 2세를 군중들은 그리워하는 것이다.

  

교황 취임식에서 머리를 숙이고, 알현을 통해 그에게 강복 받기를 원했던 성 베드로광장의 군중들.

그의 선종으로 광장에 운집해 묵주알을 돌리며 진심으로 슬퍼했던 군중들과, 그의 복자됨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모자를 벗어 흔들던 군중들. 성 베드로광장과 교황,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군중들의 모습이 아련히 교차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발자취를 찾아서]

 

아시아에서 새로운 교회의 희망 찾다

  

2000년 대희년과 함께 교회의 문도 활짝 열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99년 12월 24일 자정, 로마 성 베드로대성당 문을

개방하며 대희년 개막을 선포하고 있다.

 

1995년 1월 1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마닐라에서 열린 FABC(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 제6차 총회 연설 가운데 이러한 말을 남겼다.

‘제일천년기’에는 십자가가 유럽 땅에 심어지고, ‘제이천년기’에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심어졌던 것처럼, ‘제삼천년기’에는 광대하고 생동적인 이 대륙(아시아)에서 신앙의 큰 수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교황이 그토록 기대했던 제삼천년기의 문이 열리고도 10년이 더 흘렀다.

 

제삼천년기 교회의 문을 열며

  

1981년 총성과 함께 쓰러져 사투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건재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여러 곳에서 되도록 많은 사람을 만나기를 원했던 교황은 여러 나라의 사목순방 끝에 대희년인 2000년을 맞았다.

2000년, 기쁨이라는 뜻의 대희년과 함께 제삼천년기 교회의 문도 활짝 열렸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9년 12월 24일 자정, 성베드로대성당의 청동문을 있는 힘껏 열어 젖혔다. 주교좌성당인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의 문에도 희년의 흔적을 남겼다.

  

교황은 오래 전부터 제삼천년기 교회를 준비해왔다.

그가 쓴 1994년 11월 10일 ‘제삼천년기’라는 제목의 교서를 보면, 그가 구원의 기쁨에 온 인류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교회의 준비를 구체적으로 제시했음을 알 수 있다.

  

교황은 그가 쓴 여러 저서에서 순교성인 스타니슬라오 주교의 순교이야기를 담은 헌시의 내용을 자주 언급하고는 했다. 그 마지막 부분은 이러하다.

  

“첫 세기가 끝을 고하고 두 번째 세기가 시작됩니다.

한 시대의 설계도를 우리 손 안에 쥡시다. 분명 다가올 한 시대의 설계도를!”

  

교회의 제삼천년기 설계도는 과연 무엇일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희년이 가져다 준 새로운 설계도를 손 안에 쥐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애썼다. 그가 쥐려고 했던 손 안의 설계도는 ‘지난날 교회의 과오에 대한 인정과 사과’로 먼저 이뤄지는 듯했다.

  

그는 우선 지난 세기 동안 이뤄진 교회의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세상과 화해의 길을 모색했다. 그는 「제삼천년기」 교서에서도 희년은 무엇보다 주님의 은총의 해, 죄와 벌의 용서의 해, 상반된 집단 사이의 화해의 해, 다양한 회개와 성사적·성사외적 참회의 해라고 했다.

  

희년의 기쁨 또한 무엇보다 죄의 용서에 기초한 기쁨, 회개의 기쁨이라고 말했다.

용서에 이르기 위해서는 진지한 양심성찰부터 시작돼야만 했다.

  

2000년, 베드로대성당에서 용서의 날 예식을 거행하며 그는 갈릴레이(지동설을 주장해 당시 교회의 재판을 받음) 사건을 비롯한 가톨릭교회 구성원들이 지나온 역사에서 잘못한 일들에 대해 ‘하느님의 용서’를 간절히 청했다.

 

제삼천년기의 또 다른 열쇠

  

- 대희년에만 열리는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대성당의 청동문.

‘AD2000 대희년,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계신다’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이 적혀 있다.

 

회개와 반성과 함께 제삼천년기 설계도의 열쇠 하나는 또 다른 곳에 있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전 세계 복음화의 새로운 산실로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그 열쇠를 찾고자 했다. 「제삼천년기」에서 교황은 2000년 간 지속돼 온 교회의 선교사명이 각 대륙에서 맺은 결실을 시대별로 이야기한다.

  

실제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즉위한 1978년 이래 2002년까지 신자 증가율을 보면, 아프리카의 경우 무려 150%의 신자 증가율을, 아시아가 74%, 오세아니아가 49%를 기록했으며, 아메리카의 경우 라틴 아메리카의 신자 증가율에 힘입어 45%를 기록했다.  5%를 기록한 유럽의 경우와 비교되는 수치다.

  

수없이 이뤄진 여러 차례의 사목순방 가운데서도, 그가 아시아 대륙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제삼천년기 보편교회의 희망은 놀라운 복음화율을 보인 아시아 대륙에 달려있었던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 희망을 예견했고, 그 희망을 위해 평화와 화해를 전하며 지칠 줄 모르고 달려 나갔다.

그 사목순방의 여정 가운데 그가 우리나라를 두 번이나 찾았던 것은 제삼천년기 교회에 대한 희망의 열쇠를 우리 손에 쥐어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축일 10월 22일 복자 요한 바오로 2세(John Paul 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