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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한국을 사랑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by 파스칼바이런 2010. 3. 17.

한국을 사랑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한국 정부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선처를 요청하다

  

 

 

한국 평화 빌었던 ‘평화의 교황’

  

  

 

  

- 김대중 전 대통령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복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유독 한국과 인연이 많은 교황이었다. 가톨릭신문은 그가 남기고 간 발자취 가운데 한국과 쌓은 다양한 인연을 소개한다.

  

그는 아시아에서 희망의 등불이 돼가는 한국교회를 사랑했으며, 순교자의 피가 씨앗이 된 우리 신앙의 열매를 더욱 영글게 했다.

  

1980년 5월 18일, 당시 광주민주화운동을 벌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사형선고가 떨어졌다. 계속되는 민주화운동으로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을 때였다.

  

그의 사형선고는 5·18 민주화운동을 배후조종해 사회불안을 조장했으며,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그는 어쩐 일인지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미국 망명 등을

거쳐 사면됐다.

  

광주민주화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하며 민주주의를 위해 투신했던 김대중은 이후 당대표와 대통령을 역임하며 정치적 행보를 계속해나갔고,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김대중의 사연은 그렇게 단편화되는 듯했다.

  

하지만 2005년, 광주일보가 국가기록원 대통령 기록관에 정보공개를 청구해 받은 자료를 통해, 요한 바오로 2세가 1980년 12월 11일, 주한 교황청대사관으로 김 전 대통령의 감형을 요청하는 서신을 제5공화국

정부에 보낸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참으로 ‘평화의 교황’이었다. 평화를 위한 그의 노력은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로 계속해서 뻗어나갔다. 전임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교황’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줬다.

  

포클랜드 전쟁과 걸프전이 발발했을 때도 그는 평화를 역설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유고슬라비아와 루안다의 절망적 상황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세계 평화를 위한 그의 가시적 움직임이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씨에 대해 순수하게 인도적 이유로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이후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서신이 오갔고, 김 전 대통령의 형량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또다시 2차 서신(1981년 2월 14일)을 보내 “각하께서 신속히 배려해 주신데 대한 감사를 드린다

”며 “훌륭한 한국 국민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고 전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의 대통령에게 서신을 보낸 것은 그가 한국을 방문한 1984년 이전의 일이었다. 그는 한국을 오기 전부터 순교자의 땅인 이 땅에 관심을 가졌고, 김 전 대통령의 선처를 호소하기에 이

르렀던 것이다.

  

2000년, 김 전 대통령은 바티칸을 방문해 직접 교황을 알현하고 북한 방문을 권유했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또한 긍정적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한국의 평화를 진심으로 빌어주었던 교황, 대통령에게 보낸 그

의 서신은 한국과의 인연 가운데 첫 시작이었다.

  


 

 

시성식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다

  

 

“마음은 이미 한국 땅에 …”

  

 

- 1984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103위 시성식.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한국의 인연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선처 요청에서 끝나지 않는다. 1984년 그가 처음 우리나라를 찾은 가운데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및 103위 시성식이 열렸기

때문이다.

  

당시 행사에서 사회자의 감동에 찬 목소리는 아직도 우리의 귓가에 생생하다. ‘순교자의 땅’에 입 맞추며 한국을 찾은 교황의 모습을 통해 우리나라에도 첫 성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지극히 공경하올 교황 성하, 자모이신 성교회는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와 바오로 정하상 외 101위 한국 순교자들을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이 성인으로 받들어 공경할 수 있도록 성하께서 친히 성인 명

부에 올려주시기를 청원합니다.”

  

바티칸에서와 같이 ‘비바 빠빠’(교황이여, 영원하라)를 외치며 한국교회 신자들은 교황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한국어 발음을 미사경본에 일일이 표기해 미사를 봉헌할 만큼 한국 신자들을 배려했던 교황 요한 바오

로 2세는 제대에 함께 무릎을 꿇고 103위 순교자들이 성인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교황은 1984년 5월 6일 증거의 날에 시성식을 봉헌하고, 3일 오신 날, 4일 화해의 날, 5일 나눔의 날 등을 통해 한국에서의 일정을 마쳤다. 방한 중 그는 40만여 명이 모인 부산 노동자들과의 만남에서 개발독재에

인권을 침해당한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줄 것을 촉구했으며,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젊은이와의 만남 때 민주화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혔던 젊은이가 수감시절 자신의 양말을 풀어 엮은 십자가를 교황에

게 선물하기도 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을 방문하기 전부터 한국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표해 두근거리는 마음과 한국교회 신자들에 대한 사랑을 내비쳤다.

  

“며칠 있으면 오래 그리던 여러분을 찾아 로마를 떠나 한국으로 먼 길을 나서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 마음이 이미 한국 땅에 가 있다’고 할 만큼 여러분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5월 22일, 오혜민 기자]

  


 

 

1989년 세계성체대회, 다시 한국을 찾다

  

 

두 번의 방한, 높아진 한국교회 위상

  

 

  

- 1989년 세계성체대회를 위해 한국을 다시 찾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및 103위 시성식에 참석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시 한 번 순교자의 땅 한국을 밟는다. 아무리 수많은 나라를 순방한 교황이라고 하지만, 한 나라를 연이어 두 번 이상 오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나 1989년 10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주제로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서울에서 열리면서, 이뤄지기 힘들 것만 같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두 번째 방한도 함께 이뤄지게 됐다. 이로써 평신도에서부터 시작된 한국교회가 걷는 큰 성장의 발걸음이 전 세계에 드러나게 됐다. 연이은 교황의 방한으로 한국 땅의 복음화율도 가파르게 성장했다.

  

세계성체대회의 장엄미사가 봉헌된 장소는 또다시 여의도 광장이었다.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및 103위 시성식의 열기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성체의 신비’가 다시 한 번 이 땅에 재현되는 순간이었다.

  

제44차 세계성체대회에서는 기도회, 학술 심포지엄, 젊은이 성찬제 등 행사가 다채롭게 이뤄졌다. 장엄미사에는 전 세계 108개국에서 온 200여 명의 주교단과 2000여 명의 사제단, 65만 명의 국내외 신자들이 참례했다.

성체 안에 하나되기,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성체 신비의 생활화를 다짐하는 가운데 한국 신자들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있었다. 그는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하게 된데 큰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며 성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국교회 103위 순교자 시성식을 위해 한국을 처음 방문한지 5년 만에 제44차 세계성체대회의 폐막미사를 거행할 수 있게 된 은총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신자들의 일치는 그리스도 안에 가장 깊은 근원이 있으며, 성찬례 안에 가장 충만한 성사적 표현이 있습니다.”

  


 

 

2000년 이후 한국에 보냈던 관심과 위로

  

 

지하철 참사 · 태풍피해 때 위로 전해

 

  

- 교황은 1984년과 1989년 두 차례 사목순방 이후에도 한국에 대한 애정을 지속적으로 표현했다. 특히 대구 지하철 화재참사 등 재난이 있을 때마다 피해자들을 위해 깊은 애도의 뜻을 밝혔다. 사진은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합동 영결식에서 대구대교구 맹봉술 신부가 분향하는 모습.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및 103위 시성식, 19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로 두 차례 한국을 찾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시 바티칸으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전 세계를 사목순방하며 자신의 뜻을 잃지 않았지만, 순교자의 땅 한국에 보내는 그의 사랑은 지속적이었다.

  

한국교회를 사랑했던 교황은 한반도의 통일과 북한교회에 대한 관심도 잃지 않았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던 당시 역사적 회담의 성공을 기원하는 특별 메시지를 보냈으며,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가 주관한 ‘한끼 굶으며 북한동포를 돕자’라는 운동에는 스스로 동참하기도 했다.

  

또 2002년 태풍 루사가 닥쳐왔을 때는 ‘한국인들의 고통을 함께 슬퍼하며, 용기를 내 일어서기를 기원하는’ 메시지를 보냈으며, 2003년 2월 대구지하철 화재사고, 같은 해 9월 태풍 매미에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한국에 재난이 닥쳐올 때마다 연대를 표현하고, 관심과 진심을 아끼지 않은 셈이다.

  

대구지하철 화재참사가 일어난 직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유가족들과 대구시 당국에 깊은 애도의 뜻을 전했다. 당시 교황청 국무원 장관 안젤로 소다노 추기경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희생자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하고, 슬픔에 쌓인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위안이 깃들기를 기원했다”고 전했다.

  

태풍 매미로 인해 인명과 재산에 막대한 피해가 났을 때도 그는 위로 전문을 보내 한마음으로 슬퍼했다. ‘한국에서 태풍 매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을 느낀다’는 말로 메시지를 시작한 교황은 당시 주교회의 의장 최창무 대주교에게 정부와 구조작업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의 뜻과 연대의 마음을 전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후 파킨슨씨병으로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며 2005년 선종 때까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직접적 메시지를 전달받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난 그의 노력이 한국교회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한국교회를 사랑했던 교황,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을 우리는 한마음으로 기뻐한다.

 

[가톨릭신문, 2011년 6월 12일, 오혜민 기자]

 


 

축일 10월 22일 복자 요한 바오로 2세(John Paul 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