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평화의 사도 복자 반열 올랐다

by 파스칼바이런 2010. 3. 17.

평화의 사도 복자 반열 올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선종 뒤 가장 빠른 기간인

6년 1개월 만에 온 세계 환호 속 시복 교령 발표

  

  

- "성인 되소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가 1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 주례로 거행된 시복식에서 전 세계인들의 축하와 환호를 받으며 복자 반열에 올랐다. 이로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가 시복시성절차법을 시행한 이래 가장 빠른 기간인 6년 1개월 만에 복자가 됐다. [CNS]

  

  

평화의 사도, 세기의 선교사, 젊은이의 벗, 고통의 증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세계의 환호와 기쁨 속에 복자 반열에 올랐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1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선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 시복미사를 주례하고, 폴란드 출신의 카롤 보이티와를 로마교구와 폴란드교회의 복자로 공식 선포했다. 이로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가 시복시성절차법을 시행한 이래 가장 빠른 기간인 6년 1개월 만에 복자 반열에 올랐다. ▶ 관련기사 6~9면

  

이날 시복식은 로마교구 총대리 아고스티노 발리니 추기경의 시복 청원에 이어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하느님의 종 요한 바오로 2세 시복 교령을 발표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시복 교령이 발표되자 성 베드로 대성전 2층 중앙 발코니에 걸려 있던 복자 요한 바오로 2세의 대형 초상이 모습을 드러냈고, 성 베드로 광장과 그 주변 일대는 환희와 감격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교황은 시복미사 강론을 통해 "갈망하던 그날이 빨리 왔는데, 그것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라며 "요한 바오로 2세는 복되십니다!"하고 외쳤다.

  

교황은 또 새 복자 요한 바오로 2세가 1978년 이곳에서 거행된 착좌미사에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 문들을 활짝 여십시오'라는 잊을 수 없는 말을 했다며 "폴란드의 이 모범적인 아들은 위대한 인간적 카리스마가 수반된 신앙과 사랑, 사도적 용기로써 전세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교회에 속하는 것을,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도와줬다"고 말했다.

  

교황은 특히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느님과 긴밀한 일치에 바탕을 둔 깊은 겸손으로 교회를 이끌 수 있었고, 육체가 쇠약해지면서도 한층 더 멋진 메시지를 세상에 전했다"며 하늘에서 하느님 백성의 신앙을 지탱해 달라고 간구했다.

  

미사 후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전 안 중앙 제대 앞에 안치된 요한 바오로 2세 새 복자 관 앞에서 기도를 바치며 참배했다. 이어 추기경단을 시작으로 주교단과 사제단 등이 차례로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입장해 참배했다.

  

복자 요한 바오로 2세의 관은 순례객들 참배가 모두 끝나고 나면 성 베드로 대성전 안 성세바스티아노 경당 제대 지하에 영구히 안장된다.

  

이에 앞서 4월 30일 저녁 8시부터 로마 시내 전차경기장에서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을 준비하고 경축하는 전야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약 30만 명이 전차경기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1부 요한 바오로 2세의 삶, 2부 빛의 신비로 3시간 가량 진행된 전야제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인간적 면모를 기리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재위기간에 로마교구와 전 세계에 미친 엄청난 영향을 되새기는 자리가 됐다.

  

또 시복식 다음날인 2일에는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청 국무원장 타르치시오 베르토네 추기경 주례로 시복 감사미사가 거행됐다.

 

 [평화신문, 2011년 5월 8일, 로마=이창훈 기자]

  


 

 

[시복식 참관기]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허영엽 신부

  우리들 가슴에 다시 살아난 그분

  

  

- 복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복식의 젊은이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복식에 참여한 세계 각국 젊은이들의 열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시복식에는 일반 순례객들에게 비표가 따로 발급되지 않았다. 그래서 순례객들은 선착순으로 시복식 미사가 거행되는 성 베드로광장에 입장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시복식 참가를 위해 전날부터 성 베드로 광장 주변을 가득 채워 밤을 지샜다.

  

많은 이들은 요새 유럽 젊은이들이 교회를 멀리한다고 걱정한다. 그러나 이번 시복식에서 보여준 젊은이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기적 그 자체였다. 시복식에 참여한 젊은이들의 숫자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발적 참여는 정말 대단했다. 이 모든 것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통해 보여준 하느님의 기적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잘 알듯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젊은이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각별했다. 세계 청년대회를 시작 때부터 계획하고 이끈 것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였다. 그는 교회의 미래가 젊은이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시복식 미사 중 교황 베네딕도 16세도 "요한 바오로 2세는 우리 교회의 모든 유산을 미래의 젊은이에게 전할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고 강조했다.

  

개인적으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대구에서 그분에게 사제품을 받아 이번 시복식 참가에 의미가 깊었다. 시복식에 참여하는 동안 나의 생각은 내내 과거로 날개짓을 했다. 당시 서품식 중 성인호칭기도를 할 때 내가 엎드린 바로 그 머리맡에서 교황님께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는데, 교황님이 성가대의 성인호칭기도에 맞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평화의 인사를 할 때 '평화가 당신에게 있기를' 하시며 포근하게 안아주셨다. 시복식 미사 동안 그분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편안한 미소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내 기억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때 우리나라 청년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그때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 아주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분과 만남의 열기는 무척이나 뜨거웠다. 지금도 그때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기억날 정도다. 마치 수많은 군중 속에서 나에게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한국 방문 때의 교황님

  

그때 교황님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악을 선으로 갚으십시오. 만약에 세상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묻거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십시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강론을 통해 복음을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게 전달하셨다. 그래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사람들 마음 속에 오래 큰 울림으로 남는 것 같다. 요즘 젊은이들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그리워하며 환호하는 것도 어린 시절 자신들 마음 속에 뿌려주신 복음의 씨앗 덕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평화의 사목자

  

특별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의 사도로 기억된다. 본인 스스로도 평화를 위한 사목자라고 강조하셨다. 실제로 그는 재임 기간 중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에 대한 열망을 심어줬고 화해와 용서를 이끌어냈다. 나는 하느님께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우리 시대에 보내주신 것을 기적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지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그리워하고, 그의 삶을 열망하는 것도 또 하나의 기적이 아닐까. 시복식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묵상하며 마치 초대교회의 예수님 부활 사건을 목격한 증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은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번 성지순례 안에서 나는 매일매일 기적을 체험했다고 생각한다. 기적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 안에서 찾을 수 있는 하느님 은총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번 성지순례에 참여한 한 순례자의 말이 감동을 준다.

 

[평화신문, 2011년 5월 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축일은 10월 22일

시복 감사 미사, 내년 5월 1일까지 봉헌할 수 있어

  

  

[바티칸시티=CNS] 5월 1일 복자로 선포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축일은 로마와 폴란드 교구들에서 해마다 10월 22일에 지내게 된다고 교황청이 11일 발표했다. 이는 복자 축일은 해당 복자가 살았거나 활동한 지역에서만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은 예외적으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 감사 미사를 2012년 5월 1일까지 드릴 수 있다. 시복 감사 미사는 복자 축일 거행과 마찬가지로 해당 복자가 살았거나 활동한 지역에서만 드릴 수 있지만 요한 바오로 2세의 경우 전세계 교회가 인정하고 있다는 예외적 성격을 고려해 모든 신자들에게 허용했다.

  

감사 미사는 지역 교회 주교가 알맞은 날짜와 장소를 택해 거행할 수 있다. 수도회의 경우 수도회 장상이 이를 정할 수 있다. 그러나 감사 미사는 2012년 5월 1일까지로 한정된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축일을 10월 22일로 정한 것은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후 전례 예식을 통해 공식 착좌한 날이 1978년 10월 22일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내용의 교황청 경신성사성 교령은 교황청 기관지 '로세로바토레 로마노'에 게재됐다.

  

교령에 따르면, 로마 교구와 폴란드 모든 교구들은 전례력에 요한 바오로 2세 축일이 자동적으로 삽입된다. 그러나 그 밖의 지역에서 요한 바오로 2세의 축일을 지내려면 주교들이 교황청에 공식 허가 요청을 해야 한다. 이는 전세계에서 기념하는 성인 축일과는 달리 복자 축일은 해당 지역에서만 기념하기 때문이다.

  

교황청의 특별한 허가를 받지 않고 본당이나 성당 이름을 요한 바오로 2세로 지을 수 있는 곳은 로마 교구와 폴란드 교구들에 한정된다. 또 교황청의 특별한 허락을 얻어 10월 22일을 요한 바오로 2세 축일로 지내는 교구에서도 성당이나 본당 이름을 요한 바오로 2세로 지을 수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복 이모저모

전 세계 한마음으로 “이제는 성인”(Santo Subito)

  

 

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은 전 세계인의 축제였다. 시복식이 열린 바티칸과 로마시내는 물론, 교황의 고향 폴란드에서는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야외스크린을 통해 시복식에 함께했으며, 필리핀과 멕시코 등 여러 나라의 신자들도 한마음으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을 지켜봤다. 바티칸은 시복식이 이뤄진 올해 5월부터 1년 동안을 ‘축제의 해’로 지정하고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을 경축하기로 했다.

 

  

-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복자로 선언함과 동시에

성베드로성당 외벽에는 자애로운 미소를 띤 새 복자의 대형 초상화가 드리워졌다.

  

  

◎… 시복의 축제 열기가 한창인 바티칸 안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사람들은 폴란드 신자들이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고향 폴란드 신자들은 시복식 전부터 최소 100만 명 이상이 바티칸을 찾을 것으로 예상돼 전 세계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폴란드 신자들은 국기를 손에 흔들며 요한 바오로 2세의 이름을 연호했고, ‘이제는 성인(SANTO SUBITO)’이라는 현수막을 들고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성을 기원했다. 또 민속의상을 입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는 등 폴란드인 교황의 시복을 온마음으로 축하했다.

  

 

  

- 시복 전야에 열린 철야기도회에서 순례객들이 ‘이제는 성인(SANTO SUBITO)’

이라는 현수막을 들고 기도를 바치고 있다.

  

  

◎… 로마시내 대형본당들은 성베드로광장에 미처 입장하지 못한 신자들을 위해 초대형 스크린을 설치, 시복 전야미사와 시복식을 생중계했다. 특히 4월 30일 시복 전야미사 후 각 성당은 종을 울려 시복에 대한 기쁨을 나타냈으며, 신자들이 함께 모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을 바라는 철야기도회를 열었다. 시복 전야미사에 참례했던 신자들은 바티칸까지 행진하며 각 성당을 순례했다. 또 2만5000명이 바티칸을 떠나지 않고 시복식이 열리는 다음날까지 성베드로광장과 산타안젤로성 사이에서 잠을 청하며 교황의 시복을 염원했다.

  

 

  

- 성베드로광장에서 거행된 시복식에 미처 입장하지 못한 이들은

대형 스크린을 통해 예식을 지켜봤다.

  

  

◎… 시복 전야행사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생전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개인비서였던 스타니슬라프 드지비츠 추기경은 “어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무덤을 방문했는데 마치 그가 우리 가운데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며 “그는 항상 기도하셨고, 12년 동안 그의 비서로 일하며 느낀 것은 그의 인생 자체가 성인의 삶이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 바티칸 거리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모습을 담은 포스터와 깃발, 다양한 기념품들이 넘쳐났다. 교황의 생전 말씀을 적은 시복식 포스터와 함께 교황상본과 엽서, 묵주, 기념주화, 티셔츠, 찻숟가락, 십자가, 달력 등이 줄을 이었으며 순례자들은 기념품을 사기 위해 상점 앞에 줄을 섰다. 교황의 생전 사목방문 모습을 담은 화보집과 DVD도 판매됐다. 화보집에는 104차례, 129개국을 순방한 다양한 교황의 모습과 함께 1984년과 1988년 당시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모습도 수록돼 있다.

  

 

  

- 바티칸 거리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모습이 담긴 다양한 기념품들이 넘쳐났다.

  

 

‘비바 파파!’ 기쁨과 감격의 순간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 현장을 지켜 보기 위해 1일 시복식이 거행된

성베드로광장과 화해의 길(Via della Conciliazione)에 1만여 명의

순례객들이 모여 들었다.

 

  

- 시복 선언 직후 요한 바오로 2세의 기적으로 파킨슨씨병에서 회복된 프랑스 마리시몽 피에르 수녀(오른쪽)와 마지막 순간까지 간호했던 폴란드 토비아나 수녀가 요한 바오로 2세의 혈액이 담긴 은제성유물함을 봉헌하고 있다. 이 혈액은 복자의 선종 전, 수혈에 대비해 채혈된 것이다.

  

   

  

- 폴란드 전통의상을 입은 남녀가 시복식 미사에 쓰일 성찬 전례 예물을 들고

입장하고 있다.

    

 

  

- 시복식에 참석한 순례객들이 복자 탄생의 기쁨에 감격해 하고 있다.

    

 

  

-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성베드로성당 안 중앙 제대 위에 안치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관을 참배하고 있다. 이 관은 지난달 29일 안장돼 있던 성베드로성당 지하에서 시복식을 위해 옮겨졌으며, 시복식 후 순례객들의 참배가 끝난 뒤 성세바스티아노경당에 안치할 예정이다.

    

 

  

- 시복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도를 말해주듯, 로마 서점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관한 다양한 책이 진열돼 있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전시회장 입구. 하늘에 떠 있는 듯한 책 모형이 이색적이다.

  

 

  

- 성인과도 같았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생전의 모습을 그리워 하던 순례객들은

시복식 전야에 철야기도회를 열고 교황의 시복을 염원했다.

  

[가톨릭신문, 2011년 5월 8일, 로마(이탈리아) 오혜민 기자]

 


 

 

복자 요한 바오로 2세는 성덕의 증거자

일생을 통해 말과 행동으로 믿음 · 희망 · 사랑의 내적 거룩함 증언

  

  

- 여름 집무실에 있는 카스텔간돌포에서 기도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연도 미상).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은 교황으로서 이룩한 업적 때무이 아니라 일생을 통해

보여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덕 때문이다. [CNS]

  

  

[바티칸시티=CNS] 교회 관리들이 계속 강조하고 있듯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복되는 것은 교황으로서 업적 때문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그리스도교 덕을 실천한 방법 때문이다.

  

바티칸의 시성 관련 전문가들이 증인들을 인터뷰했을 때 조사한 핵심은 업적이 아니라 성덕이었다. 그렇다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영성적 특징은 무엇일까. 교황이 평생 실천한 것은 기도와 신심, 강한 사제 소명 의식,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신앙에 의지함 같은 영성적 가치들이었다. 이런 가치들은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이 되기 이전이나 교황이 된 이후에도 한결같이 일생을 통해 이룩한 핵심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카롤 보이티와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에서 시험을 겪었다. 9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3년 후에는 하나뿐인 형을 성홍열로 잃었다. 20살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12시간을 꼬박 그 옆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슬픔을 삼켰다고 친구들은 전했다.

  

사제 성소 또한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연극 배우 생활과 채석장 인부 생활을 하고, 시를 쓰고 유다인들을 피신시키는 활동 등 다양한 경험을 하고 특히 2차 세계 대전이라는 비극적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해 동안에 형성된 것이다.

  

매일 미사에 참례한 카롤 보이티와는 마리아 신심을 키웠고 열심히 기도하고 묵상했다. 조국 폴란드가 독일에 점령당했을 때 보이티와는 얀 티라노브스키라는 평신도가 이끄는 로사리오 기도 모임에 매주 참석했다. 보이티와는 나중에 멘토가 된 티라노브스키를 통해 16세기 스페인의 대신비가 십자가의 요한을 알게 됐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에 비밀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생이 된 보이티와는 수도 생활에 매료돼 두 차례나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 청원을 했지만 "당신은 더 큰 일을 하게 돼 있다"는 말로 거절을 당했다.

  

사제품을 받고 나서는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에게 관심을 쏟았고, 청년 사목은 일생의 관심사가 됐다.

  

보이티와 신부는 1958년 38살에 보좌주교가 됐다. 폴란드 역사상 최연소 주교였다. 6년 후 크라쿠프 대주교가 된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그는 종교자유에 관한 선언 및 사목헌장 같은 문헌의 초안 작성을 도왔다.

  

1978년 요한 바오로 1세가 첫 번째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됐을 때,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은 교황직에 대해 "교황직은 위대한 일이지만 더욱 엄청난 십자가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몇 주 후 교황직의 '십자가'는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 자신에게 돌아왔다.

  

마리아 신심이 각별했던 교황은 1981년 5월 13일 파티마의 성모 축일에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모하메드 알리 아그차의 총탄에 쓰러졌다. 중상이었고 회복은 더뎠다. 교황은 나중에 자신의 치유를 성모 마리아의 도움으로 돌렸다. 그리고 몇 년 후 포르투갈의 파티마 성모성지를 방문, 자신의 몸에 박혔던 총탄을 파티마 성모상 관에 두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개인 기도 생활은 치열했다. 교황은 아침 미사를 드릴 때면 깊이 묵상에 잠겨 있었고, 몇 시간씩 성체조배와 관상기도에 몰두하기도 했다. 로사리오를 즐겨 바친 교황은 마침내 빛의 신비를 추가했다.

  

교황은 또한 참회와 고행도 진지하게 실천했다. 밤새도록 맨바닥에 두 팔을 펼치고 누워 지냈으며, 사제나 주교를 서품하기 전에는 단식을 했고 자기 몸을 때리는 편태 같은 고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으로, 교회는 모델이 되는 교황이 아니라 모델이 되는 그리스도 신앙인을 제시하고 있다. 현실 세상에 내적 거룩함을 증언한 그는 말과 모범으로 사람들에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실천하도록 자극했다.

 


 

축일 10월 22일 복자 요한 바오로 2세(John Paul 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