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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복

by 파스칼바이런 2010. 3. 17.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복 : 제1편 산토 수비토

온 인류에게 복음과 희망 선포한 '평화의 사도'

  

  

- 2005년 4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신이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옮겨지는 것을 지켜보는 추모객들이 흐느끼고 있다.

  

  

제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오는 5월 1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 주례로 복자품에 오른다. 이날 시복식에는 세계 각국에서 수백만 명이 몰려들 전망이다.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과 평화방송ㆍ평화신문도 한국 순례단을 구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복식에 참가한다.

  

사랑과 평화와 화해ㆍ일치의 사도이자 행동하는 순례자였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재위기간 중 특히 1984년과 1989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할 만큼 한국교회와 한국인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의 시복을 앞두고 한국교회에 대한 그의 사랑과 삶, 업적 등을 되돌아보는 특집 기획을 마련한다.

  

  

"산토 수비토(Santo Subito, 즉시 시성을)" "산토" "산토" "산토 수비토" ….

 

지난 2005년 4월 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재위기간 1978년~2005년) 선종 소식을 듣고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몰려든 군중이 한 목소리로 연호한 구호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5월 한국을 방문해 103위

순교 성인 시성식을 주례하고 있다.

 

 

세상 모든 이를 사랑했고, 온 인류로부터 사랑받은 '위대한 평화의 사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그가 선종한 지 6년이 지난 오는 5월 1일 성 베드로 광장 '바로 그 자리'에서 그를 위한 전 지구인의 "산토 수비토" 함성이 울려 퍼진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그는 누구인가

 

'세기의 목자''시대의 예언자''행동하는 순례자''화해와 일치의 사도''위대한 영혼' 등으로 불리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재위 26년 5개월 동안 '평화의 사도'이자 '행동하는 교황'으로서 전 인류로부터 사랑받았다.

 

인류 전체를 위해 매일 매순간 하느님께 당신을 바쳤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원하는 이들이 있으면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 위로와 희망을 준 착한 목자였다.

  

또 자신을 피격한 암살자를 찾아가 먼저 용서하고, 지난 세월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범한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하고 먼저 화해를 구한 겸손한 사도였다. 악과 죽음의 문화에 한치 양보없이 항거해 오직 '선과 평화로써' 사회주의 붕괴와 냉전 종식을 안겨준 '정의의 반석'이기도 했다.

 

 

그는 아울러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주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며 그 행복을 온 인류가 나누기를 희원한 '참 신앙인'이었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을 두 차례나 방문하는 등 우리 민족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여줬다. 사진은 1999년 10월 대희년 기념 연주회를 로마에서 가진

한국순교자현양회합창단 단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교황.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20년 5월 18일 폴란드 바도비체에서 태어났다. 카롤 요제프 보이티야란 이름으로 평범하게 성장한 그는 8살 때 어머니를 잃었지만 독실한 신앙심을 지닌 아버지의 보살핌으로 축구를 좋아하고 시와 연극을 사랑하는 활달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사제성소를 깨달은 그는 1946년 11월 1일 사제품을 받고, 1958년 주교품에 올랐다. 이어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크라코프대교구장으로 임명됐으며 3년 뒤 1967년 6월 26일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한 그는 1971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상임위원으로 임명되면서 자연스럽게 세계 교회의 중심에 자리하게 됐고, 1978년 10월 16일 제264대 교황으로 선출됐다. 독일 출신 제218대 교황 하드리아노 6세(1522~1523)에 이어 455년 만에 비이탈리아인 교황이었고, 54살에 교황직에 오른 비오 9세(1846~1878) 이후 가장 젊은 교황이었다.

 

58살의 나이로 1978년 10월 22일 사도좌에 착좌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재임기간 중 해외 사목방문을 104차례나 해 '순례하는 목자''흰옷의 사도'라 불렸다.

 

또 보편교회의 목자로서 교황 직무에 충실해 15차례 주교 시노드를 소집하고 14편의 회칙을 비롯해 수많은 문헌과 강론, 연설 등을 통해 가톨릭교회의 신앙과 윤리적 원칙을 공고히 하고, 시대가 요청하는 사회적 가르침을 제시했다.

 

새 천년기를 맞이하고서도 인류 사회에 여전히 전쟁과 폭력의 어둠이 가시지 않자 교황은 2002년에 '묵주기도의 해'와 2004년 '성체성사의 해'를 잇따라 선포하고 묵주기도 '빛의 신비'와 '자비의 날' '세계청년대회' 등을 제정, 인류를 위해 교회가 가야할 올바른 길을 제시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한국, 한국 천주교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인과 한국천주교회를 각별히 사랑했다. 그는 1980년대 두 차례나 한국인의 벗으로서, 평화의 사도로서 한국을 방문해 말과 행동으로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한민족을 위한 위대한 선교사이자 희망의 증인임을 드러냈다.

  

-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해 1984년 5월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대구 시민운동장에서 사제서품식을 주례하고 새 사제들을 안수하고 있다.

  

  

1984년 5월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벗이 있어 먼데서 찾아오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한국어 인사말로 큰 감동을 주었다. 그는 시성식을 바티칸에서 거행하는 전통을 깨고 서울에서 거행했고, 기적 심사를 면제하면서 한국의 복자 103위를 성인 반열에 올렸다.

 

교황이 직접 한국 주교단에게 권유해 개최한 1989년 제44차 세계성체대회에 참석해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하고 우리말로 인사, 한국민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현했다.

 

교황의 두 차례 방한은 한반도 전역에 화해의 싹을 틔우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그리고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이 교회를 찾아 한국 천주교회의 복음화율이 급성장하는 기적과 같은 선물을 안겨줬다.

 

교황은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 국민들이 진정한 자유와 정의, 신성한 인권 존중을 토대로 오랜 숙원인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를 기원했고,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한국 천주교회에 충심어린 연대감을 표시했다.

  

교황은 아울러 "아시아인 선교는 같은 아시아인인 한국교회가 맡아야 한다"고 주문하면서 한국교회에 필요한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은 영원한 한국교회 후원자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복 - 제2편 삶과 신앙

그리스도와 인간 사랑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 2004년 로마의 한 본당을 사목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갓난 아기를 안고 입맞추며 축복하고 있다.

  

  

○…1933년 13살 터울의 의학도 형인 에드문드가 성홍열로 스물여섯에 숨졌다. 어머니를 잃은 지 4년 만에 닥친 비극이었다. 집 앞에 쓸쓸히 홀로 서 있는 13살의 카롤 요제프 보이티야를 본 이웃 아주머니가 애처로워 그를 껴안고 "형이 죽다니! 불쌍한 카롤"하며 위로해줬다. 카롤은 여인의 위로에 감사를 드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하느님의 뜻인걸요."

  

보이티야는 어린시절 신부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1927년은 미국 조종사 찰스 린드버그가 대서양 무착륙 단독 비행을 최초로 성공해 세계가 떠들썩했다. 보이티야는 사람들에게 "폴란드인이 제2의 린드버그가 될 수 있어도 교황은 될 수 없잖아요. 저는 그래서 신부가 되지 않을 거예요"하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회갑도 되기 전에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기적이 일어났다. 폴란드인인 그가 교황이 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2월 18일. 21살의 보이티야는 삶의 전환점을 맞는다. 심장병을 앓던 아버지가 갑작스레 죽은 것이다. 아버지 시신 옆에 꿇어앉아 무려 12시간 동안 기도하고 묵상한 보이티야는 마침내 삶을 온전히 바쳐 사제로 봉사하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교황이 된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제의 길로 부르신다는 것을 감지하면서도 나는 그것이 오늘날 이 자리에까지 이끄시기 위한 것임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1946년 11월 1일 사제품을 받은 보이티야는 2주 후 로마 유학길에 올랐다. 로마로 떠나는 날 한 부부가 갓난 딸의 세례성사를 그에게 청했다. 아기가 감기에 걸린 데다 날씨마저 매서워 그는 부부의 집에 까지 찾아가 세례를 베풀었다. "막 신품을 받고 거행하는 첫 세례성사여서 서툰 점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 달라"는 말로 예식을 시작했다. 순조롭게 세례식을 마친 그는 기차역까지 득달같이 달려가 간신히 열차에 올랐다. 다 해진 그의 여행 가방에는 책과 옷가지 몇 벌, 딱딱한 빵 두 덩이가 전부였다.

  

윤리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보이티야 신부는 늘 가난을 실천하는 겸손한 사제였다. 하루는 집이 털린 한 여 교우에게 침대보와 이불까지 사제관에 있는 물건을 다 줬다. 교우들은 맨 침대에서 이불도 없이 지내는 그를 보고 기막혀했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누구보다도 자연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

신비가였을 뿐 아니라 스포츠를 유난히 좋아했다. 사진은 1984년 겨울 휴가 동안

일행들과 함께 스키를 즐기고 있는 교황.

  

  

○…'말라깽이 주교님'이란 별명이 붙은 보이티야 대주교는 격식을 아주 싫어했다. 특히 그는 주교에게 예를 갖추기 위해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반지에 입을 맞추려는 행동에 무척 곤혹스러워했다. 어느 날부터 보이티야 대주교는 무릎을 꿇는 사람과 똑같이 자신도 무릎을 꿇었다.

  

크라코프대교구장 시절 보이티야 추기경은 큰 잘못을 저지른 한 젊은 사제를 불러 일대일 면담을 하고 그의 과오를 엄하게 나무랐다. 그러고 나서 그 사제를 성당으로 데려가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보이티야 추기경은 그 사제에게 환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 이제 제가 죄를 고백할테니 성사를 주십시오."

  

○…보이티야 추기경은 1978년 10월 16일 바티칸 시스틴성당 콘클라베에서 추기경단이 투표한 111표 가운데 99표를 얻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 즉위했다. 추기경들은 새 교황에게 축하를 보내며 "제3천년기 교회를 인도할 임무에 최선을 다해달라"고 간청했다.

  

새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전 발코니에 서서 "우르비 에트 오르비"(Urbi et Orbi, 바티칸과 전 세계에)라며 라틴말로 전 세계 신자들을 축복하는 관례를 깨고 이탈리아말로 "예수 그리스도님 찬미 받으소서"하고 말했다. 신자들은 "항상 찬미 받으소서"하고 화답했다. 이어 새 교황은 "제가 여러분께 여러분 나라의 말로, 아니 우리의 말로 인사하고자 합니다. 제가 실수하면 여러분이 고쳐 주십시오"하고 말했다. 그러자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으로서는 '부자'였지만 개인적으로는 한 푼도 소유한 적이 없었다. 그의 방은 칸막이 나뉜 침실과 서재로 꾸며져 있었고, 서재는 작은 책상과 의자뿐이었다. 그는 매일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소성당에서 30분간 묵상을 하고 7시에 미사를 봉헌했다. 그의 제대에는 전 세계에서 보내온 편지들이 항상 놓여 있었다. 혼수상태에 빠진 17살의 아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어머니의 편지와 자녀가 없는 수많은 부부들 편지, 에이즈 환자의 편지, 위기에 빠진 가족들 편지 등이 늘 있었다.

  

아침식사 후 교황은 서재에서 강론 원고를 작성했고, 11시부터 알현 행사에 참례했다. 점심식사 때는 여러 사람들을 초대해 세상과 교회 얘기를 들었다. 교황은 음식을 조금씩 전부 드셨고, 낮기도 후 테라스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언제나 매주 목요일에는 성시간 기도를, 금요일에는 '십자가의 길'기도를 했고, 고해성사를 보았다.

  

저녁식사 때는 주로 교황청 인사들과 식사를 했고, 식사 후에는 국무원에서 보내온 서류를 검토했다. 그런 다음 개인적 편지를 쓰거나 독서를 한 후 마침기도를 하고 로마 시내를 바라보며 축복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

  

- 1983년 12월 2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형무소에 수감중이던

자신의 저격범 무하메드 알리아그차를 방문, 그를 용서하며 위로하고 있다.

  

  

○…1981년 5월 13일 오후 5시 17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터키의 과격파 청년 알리 아그차로부터 불과 3m 거리에서 총격을 받았다. 5시간 12분에 걸친 대수술 후 교황은 회복되지 않은 쇠약한 몸으로 "저에게 총을 쏜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그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하고 말했다. 교황은 2000년 대희년 때 대통령에게 자신의 저격범인 아그차의 사면을 청하는 서한을 보냈고, 아그차는 석방됐다.

  

저격 사건이 있은 후 교황의 무개차에는 두꺼운 방탄유리가 설치됐다. 1997년 4월 교황이 '유럽의 화약고'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사목방문을 발표하자 측근들은 신변 안전을 염려해 거듭 방문 취소를 간청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성 베드로 광장 말고 다른 곳에서 다쳐본 적이 없습니다. 다들 걱정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가장 큰 관심은 인간의 자유와 생명을 수호하고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는 회칙 「인간의 구원자」 「노동하는 인간」 「사회적 관심」 등 문서를 통해서 뿐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했다.

  

브라질 빈민가의 절망적 모습을 직접 본 교황은 자신의 반지를 빼서 그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었고, 콜롬비아 포퐈얀에서는 원주민을 살해한 주인들을 고발한 인디오 대표가 마이크를 빼앗기고 제지 당하자 다시 그에게 발언 기회를 주기도 했다. 또 한국을 방문해 한센병 환자에게 입 맞췄고, 아프리카에선 에이즈에 걸린 아기를 품에 안았다.

  

○…2005년 4월 2일 토요일 밤 9시 37분. 이날 미사 복음의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요한 20,19)는 말씀처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도 품 안에서 평화롭게 선종했다. 이날 의식이 또렷했던 교황은 기도를 바치고, 교황청 인사들뿐 아니라 아파트 청소부인 프란체스코에게까지 고별 인사를 나누고 비서 신부에게 요한복음을 낭독해 달라고 청한 후 요한복음 9장까지 듣고는 운명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복 :

제3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한국 천주교회

'순교자의 땅' 각별히 사랑한 한국민의 벗

  

 

  

- 1984년 5월 3일 한국을 첫 사목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김포공항 트랩을 내리자마자 엎드려 땅에 입맞추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과 1989년 두 차례 한국을 사목방문해 한국 교회를 축복하고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분단의 아픔을 위로했다. 무수한 순교자들이 진리를 위해 목숨 바친 이 땅을 기도하는 순례자로 밟았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 전통을 깨고 이 땅에서 103명의 성인을 탄생시킴으로써 다시없는 영광의 땅으로 빛나게 했다. 아울러 1989년 제44차 서울세계성체대회 참례차 두 번째 한국을 방문, 강력한 사랑의 메시지를 남겼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두 차례 한국 방문으로 한국 천주교회는 한 자리에서 두 자리 수로 괄목할만한 교세 성장을 이뤘고, '받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회'로 도약했다. 한국 교회가 성장한만큼 한국교회에 거는 교황의 기대도 컸다. 제3천년기를 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평신도 활동이 역동적인 한국 천주교회에 기회 있을 때마다 아시아 복음화에 대한 한국천주교회의 역할을 강조했다. 교황의 두 차례 한국 사목방문 행적과 각별한 한국 사랑에 대해 정리했다.

  

○…교황 방한은 1978년 요한 바오로 2세가 즉위했을 때 김수환 추기경이 사목 방문을 청해 성사됐다. 그의 첫 번째 한국 방문은 1984년 5월 3일부터 7일까지 4박 5일 동안 이뤄졌다.

  

 

  

- 1984년 5월 6일 여의도광장에서 거행된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 시성식에서 100만 신자들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환영하고 있다.

  

  

"90여 시간을 이 땅에 머물렀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그를 통해 흘러나오는 사랑의 물결은 이 땅, 순교자의 터전을 터질듯한 감동으로 파도치게 했다"고 국내 언론들은 보도했다. 또 국외 언론은 "불의와 불신, 반목과 미움, 전쟁과 굶주림이 인간의 존재, 인간 존엄성을 무참하게 짓밟고 있는 지구촌의 현실에서 평화의 보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랑만이 모든 악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다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명백해 보여줬다"고 타전했다.

  

○…103위 순교 성인 시성식은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교황청 밖에서 거행된 시성식이었기에 큰 이슈가 됐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해 시성 대상자인 103위 복자들의 기적 심사를 전격적으로 관면하고, 한국에서 시성식을 거행해 한국민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드러냈다. 교황이 한국을 특별히 사랑한 이유는 나치와 공산 치하에서 고통받은 자신의 조국 폴란드와 한국의 처지가 비슷했기 때문이란 후문이다.

  

- 한복을 입은 신자들이 태극기와 교황기를 흔들며 제44차 서울세계성체대회를 위해

1989년 10월 7일 두 번째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환영하고 있다.

  

 

1984년 5월 3일 한국에 첫 발을 내디딘 교황은 엎드려 땅에 입맞추고 "순교자의 땅, 순교자의 땅"이라고 되뇌었다. 그리고 첫 사목방문지로 절두산 순교 성지를 방문, 순교자들의 피가 씨앗이 되어 자라난 한국 천주교회를 자랑스럽게 세상에 소개했다.

  

○…교황은 1983년 9월께 한국학과 동양철학에 대한 영문판 서적 8권과 우리말 교본을 한국 교회에 미리 요청했다. 방한 몇 주 전부터 매일 우리말 연습을 한 요한 바오로 2세는 유창한 한국어로 "벗이 있어 먼 데서 찾아오니 이 또한 기쁨이 아닌가"하고 방한 인사를 해 한국민에게 큰 감동을 줬다. 또 "저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의 찬란한 문화, 생명과 자연을 존중하는 마음,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한국인들의 끊임없는 의지에 높은 존경을 표합니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교황은 첫 번째 한국 방문 기간에 신학생과 수도자, 주교단, 문화예술인, 외교관, 젊은이들과 만나는 동시에 노동자와 청각장애 어린이, 소록도 한센병 환우들을 특별히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또 광주 민주화 운동 희생자 묘역을 참배하기도 했다. 아울러 미얀마 아웅산 폭발 참사 희생자 유족들을 만나 위로했다.

  

교황은 한국 방문동안 하루 14시간씩 공식 일정을 소화하고, 18차례 연설을 하는 등 강행군 속에서도 늘 거리낌없이 군중에게 다가가 포옹하고 축복해 경호원들을 놀라게 했다. 대구에서 사제서품식을 주례하고 헬기로 부산으로 향하던 교황은 부산 소년원 원생들이 자신이 탄 헬기에 열심히 손 흔드는 것을 발견하고 고도를 낮출 것을 지시했다. 갑자기 교황이 탄 헬기가 경로를 벗어나자 경호기관은 큰 혼란에 빠졌으나 교황을 태운 헬기는 여유롭게 소년원 위를 한바퀴 저공 비행했고, 교황은 창 밖으로 원생들에게 축복했다.

  

○…1989년 10월 4일부터 8일까지 서울에서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열리면서 교황은 또 한 차례 한국을 사목방문했다. 교황은 8일 축제의 날 장엄미사를 주례하면서 또렷한 우리말로 "찬미 예수님" "참 평화의 도구가 됩시다"를 반복했다. 미사가 한창 진행될 때 청명한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선명한 무지개가 피어올라 신자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축복하는 상징"이라며 경이로워 하기도 했다.

  

 

  

- 1984년 5월 4일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이 교황 사진과 환영 현수막을 들고

차분히 교황을 맞이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0년 10월 1일 로마 한인신학원을 방문, 축복식을 주례하고, 2002년 11월에는 한인신학원 부지 90여 제곱미터를 '한국순교성인 광장'으로 조성하는 데 힘을 보탰다. 이에 대해 교회 기관지와 이탈리아 언론들은 "아시아 지역 복음화에 대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높은 관심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교황은 또 한국 신자들을 만나면 늘 한국말로 "찬미 예수님"이라고 인사하고, 우리 민족이 크고 작은 고통을 당할 때마다 세계 교회와 국제 사회에 특별기도를 요청했다. 남북한 화해와 한반도 통일을 위해서도 매일 기도하고, 굶주린 북한 주민들을 돕고자 1996년부터 선종할 때까지 매년 30만 달러 상당의 구호품을 지원했다.

  

아울러 북한에 6차례나 특사를 파견,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한국 주교단 사도좌 정기방문때에도 한반도의 화해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가톨릭 공동체뿐 아니라 북한의 모든 주민들에게 연대를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복 : 제4편(끝) '영혼의 아버지' 주요 어록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

  

  

한 시인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어록들은 믿음과 확신에 찬 고백서이고, 인생의 깊은 철학이 담긴 잠언서이며, 인류애에 불타는 사랑의 시"라고 노래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을 기념한 특집을 마무리하면서 이 시대 '영혼의 아버지'인 그의 어록을 정리했다.

  

  

교회의 사명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문을 여십시오. 그리스도께 문을 활짝 여십시오! 그리스도가 가진 구원의 권능을 향해, 국가의 경계를 허물고 경제, 정치 체제, 문화, 문명, 발전의 다양한 영역의 문을 활짝 여십시오." (1978년 10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즉위식 연설에서)

  

○…"교회는 그에 반대하는 모든 시스템 앞에서 자유를 지키려고 합니다. 오로지 인간을 위한 선택만을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1979년 멕시코 푸에블라 라틴아메리카 주교단 모임 강론에서)

  

○…"교회의 사명이 인간을 중심으로 삼을수록, 다시 말해서 더 인간 본위가 될수록 그 사명은 하느님 본위로 강화되고 실현될 것입니다. …인간이야 말로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따라가야 할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길입니다."(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에서,1980년 11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눈'을 갖고 인간을 탐구할 때에 교회는, 자기가 위대한 보물의 수직자(守直者)라는 각성이 갈수록 더해 가며, 그 보물을 함부로 써 버려서는 안 될뿐더러 끊임없이 키워 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교황 첫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1979년 3월)

  

○…"지성과 마음의 눈으로, 또 신앙의 빛으로 그리스도의 현존의 성사를 보게 하되, 그 현존이 교회의 신비에 의해서 조성되는 것임을 알게 하는 일도 매우 중요합니다."(교황 권고 「현대의 교리교육」에서,1979년 10월)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자기가 태어난 시대의 사람이고 그 시대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역사 안에서 이 시대의 사람들과 나란히 근심과 희망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시대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무시하고 그가 사는 시대에 가득한 고통에 대해 눈과 마음을 닫고서 다른 차원으로 달아나서는 안됩니다."(1996년 세계 젊은이의 날 강론에서)

  

 

  

-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먼저 사랑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 보답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1979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사진은 여름 휴가지에서 산책하고 있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뒷모습.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날마다 기도를 충실히 바치십시오. 그 기도들은 여러분의 믿음을 생명력 있고 활기 넘치게 해줄 것입니다."(1979년 시카고, 신학생과의 만남에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여 주고 예수님을 세상과 나누는 것, 이것이 여러분 일생의 엄숙한 과제입니다."(1984년 5월 5일 한국 사목방문, 성직자ㆍ수도자와의 만남에서)

  

  

젊은이들에게

  

○…"여러분은 나의 희망입니다. …성스러움을 갖는 것을, 성스러워진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2000년 대희년 로마 세계청년대회에서)

  

  

정의와 평화

  

○…"무릎 꿇고 여러분에게 애원합니다. 부디 폭력의 길로 가지 말고, 평화의 길로 돌아오십시오. 정의는 마땅히 실현돼야 하며 나 역시 정의를 믿고, 정의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폭력은 오히려 정의의 역사를 파괴할 뿐입니다."(1979년 9월 아일랜드 사목방문에서)

  

○…"평화란 다른 이를 먼저 생각하고, 올바른 정의를 확립하고, 개인 하나하나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할 때 비로소 주어지는 것입니다."(1995년 10월 1일 유엔총회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을 향한 연설에서)

  

○…"정의 없이는 평화도 없고, 용서 없이는 정의도 없다."(2002년 9월 11일, 9ㆍ11 테러 1주기 강론에서)

  

○…"인간의 역사에서 그리스도를 배제하는 것은 인간에 반하는 행동입니다."(1979년 6월 2일 성령강림대축일 강론에서)

  

○…"로마의 주교이며 베드로의 후계자인 나 요한 바오로 2세는 여기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물과 빵이 없어 아무 죄없이 죽어 간 사람들의 목소리입니다. 이유도 모르는 채 눈앞에서 죽어가는 자식들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어머니 아버지의 목소리입니다."(1980년 5월 세네갈 사목방문에서)

  

-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의 힘은 사람이 두려워하거나 두려워해야 할 어떠한 악보다도 큽니다"(「희망의 문턱을 넘어서」 중에서). 사진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성 목요일 발씻김 예식

도중 신자의 발에 입을 맞추고 있다.

  

  

가정과 생명

  

○…"가정은 인류 공동체의 가장 기초적인 첫 번째 단계다. 그것은 생명과 사랑의 근원이다. 모든 사회, 민족, 국가, 교회의 운명은 바로 가족 안에서 참된 삶과 사랑이 실천되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달려 있다."(1983년 10월 22일 반포한 '가정권리헌장'에서)

  

○…"생명을 선택한다는 것은 모든 종류의 폭력에 대한 거부를 뜻합니다.…아무리 큰 죄를 저지른 범죄자라 할지라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인정해줘야 합니다."(1999년 1월 미국 사목방문에서)

  

  

화해와 일치

  

○…"일치운동에 대한 투신은 마음의 회개와 기도에 바탕을 둬야 합니다. 마음의 회개와 기도는 과거의 기억들을 반드시 정화시켜 줄 것입니다."(회칙 「하나되게 하소서」,1995년)

  

○…"오늘 로마 교회의 교황인 나는 교회가 비가톨릭교도들에게 가했던 잘못에 대해 모든 가톨릭 신자들의 이름으로 용서를 구합니다."(2000년 3월 12일 대희년 '용서의 날' 미사 강론에서)

  

  

교황직

  

○…"'교황'이니 '성하'니 '영적 아버지'니 하는 표현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비롯됩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에서 오는 것입니다.…교황의 한 가지 특별한 임무는 이 진리를 고백하고, 로마 교회, 나아가 모든 교회와 모든 인류와 전세계에 이 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1993년 10월 교황 즉위 15주년 이탈리아 TV 인터뷰에서)

  

○…"형제여, 이 땅에서 서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느님 앞에 나갈 수 있겠소?"(암살 직후 저격범 알리 아그차에게 쓴 친필 서한에서)

  

○…"주님, 제 삶의 길에서 어떤 형태의 부르심을 받든 기꺼이 응답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2003년 10월 22일 교황 재위 25주년 미사 강론에서)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유언 중에서)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유해 한국에 오다

“사랑으로 말씀 실천하신 분 유해 기리며 그 삶 따릅니다”

  

  

- 팔로티회 원장 장화기 신부가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유해가 든

성광을 선보이고 있다.

  

  

생전에 자가수혈 대비해 채취한 혈액

팔로티회 본원·양덕원 피정집에 안치

매주 금요일 친구예절 등 예식 거행도

  

  

이번 한국에 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유해는 생전 자가수혈에 대비해 채혈된 혈액으로 지난 5월 바티칸에서 열린 시복식 때 봉헌된 유해와 같은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유해를 한국에 들여온 장화기 신부(팔로티회 원장)는 유해를 폴란드에서 가져왔으며, 현재 유해는 팔로티회(천주교 사도직회) 경기도 분당 본원과 강원도 양덕원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피정집에 모셔져 있다고 밝혔다.

  

장화기 신부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과 1989년 한국을 두 번이나 찾았고 그만큼 우리나라를 특별히 사랑하셨던 분”이라며 “그의 유해가 그가 사랑했던 이곳, 한국에서도 함께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모셔왔다”고 전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유해를 전달받기 위해 장 신부는 우선 폴란드 크라코프대교구장인 스타니슬라우 드지비츠 추기경에게 문의했으며, 올해 7월 유해 신청서류를 쓴 직후 폴란드행 비행기에 탑승한 것으로 알려졌다. 폴란드를 방문한 그는 ‘이것이 진정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유해’라는 서명을 담은 서류와 함께 유해를 안고 한국에 돌아왔다.

  

- ‘이것이 진정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유해’라는 확인 서명을 담은 서류.

  

  

팔로티회는 지난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을 맞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유해 성전 안치식을 열었으며, 현재 분당 팔로티회 본원의 매주 금요일 미사에서 요한 바오로 2세에 관한 강론과 함께 유해 친구예절을 거행하고 있다. 양덕원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피정집에서도 요한 바오로 2세의 유해를 찾는 신자들을 위해 소규모로 기도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장 신부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말씀을 몸으로, 사랑으로 행하신 분”이라며 “유해를 공경하는 올바른 길은 유해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니라 유해를 통해 성인과 함께 기도하고 성인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2005년 선종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올해 5월 1일 자비주일, 선종 6년 만에 시복돼 ‘교회 역사상 가장 빠른 기간의 시복’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또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및 103위 시성식에 참석하기 전, 수업을 통해 한국어를 배울 만큼 한국에 대한 사랑이 깊었으며, 19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에도 참석하는 등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가톨릭신문, 2011년 11월 6일, 오혜민 기자]

 


 

축일 10월 22일 복자 요한 바오로 2세(John Paul 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