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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이달의 성인] 성 요한 에우데스(1601-1680)

by 파스칼바이런 2010. 3. 27.

축일 8월 19일 성 요한 에우데스(John Eudes)

신분 / 신부, 설립자, 설교가

활동연도 / 1601-1680년

같은이름 / 에우데스, 외드,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존

 

 

성 요한 에우데스(Joannes Eudes)

 

성 요한 에우데스(Joannes Eudes)는 1601년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ie)의 아르장탕(Argentan) 근교 리(Ri)라는 마을의 유복한 가정에서 외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4세 되던 해에 캉(Caen)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결혼하기를 바라는 양친의 소망을 뿌리치고 1623년에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였다. 파리(Paris)와 오벨빌리엘에서 수학한 그는 1625년 12월 20일에 사제로 서품을 받은 뒤 노르망디 지역에서 본당 사목에 전념하였다.

 

1625년과 1631년에 노르망디 지역을 급습한 전염병의 희생자를 돌보기 위해 활약하기도 했던 그는 이 시기에 설교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또한 얀센주의(Jansenism)의 강력한 반대자로서의 명성도 획득하였다. 그밖에도 고해성사 등의 성무 활동을 통해 다양한 계층의 신자들과 교류하였다.

 

오라토리오 회원으로서 사목활동에 종사하던 요한은 당시에 나타난 교회의 악한 표양을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또한 점차 성직자 교육을 등한시하던 오라토리오회의 활동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었으며, 만약 각 성당의 사제가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본당 사목 활동은 단지 일시적인 성공만을 할 수 있을 뿐이라며 성직자 교육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한 타락한 여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사목에도 흥미를 보여, 1641년 평신도였던 장 드 베르니에르(Jean de Bernieres)와 가스통 드 렌티(Gaston de Renty)와 함께 성체회, 성모 방문 수녀회의 도움을 받아 캉에 '회개한 죄인들을 위한 보호소'를 세웠다.

 

요한은 1643년에 오라토리오회를 떠나 캉에서 새로운 사제회를 설립하였다. 그가 창립한 사제회는 재속 사제회로서 교구 신학교에서 성직자 양성과 본당 선교 활동을 통해 신자들에 대한 사목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오라토리오회 총장과의 불화 등의 이유로 그의 새로운 사제회는 오라토리오회와 얀센주의자들로부터 큰 도전을 받아 교황청의 인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1650년 쿠탕스(Coutance)의 주교가 교구 내에 신학교를 설립해 달라고 요청하여 활기를 띤 이 사제회는 1851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후 '예수 마리아 수도회'로 공식 명칭을 정하였으며 '에우데스회'(the Eudists)로도 불린다. 또 같은 해 2월 8일 교구 주교로부터 캉에 개설한 보호소를 새로 구성해 '착한 목자회'로 승인을 받았으며, 1666년에 공식적인 수녀회로서 교황의 인가를 받았다.

 

이 수녀회는 주로 '타락한 여성들'을 위한 구제 활동을 전개하였다. 요한은 1653년에 리지외(Lisieux)에, 1659년에는 루앙(Rouen)에, 1666년에 에브뢰(Evreux)에, 1670년에는 렌(Rennes)에 신학교를 세웠다.

 

오늘날 그가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예수 성심의 환시를 체험하고 그 신심을 전파시킨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Margarita Maria Alacoque, 10월 16일)처럼 예수 성심의 신심을 전파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는 후에 예수 성심의 공경과 신심이 전파되고 축일이 제정되도록 하는데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성모 성심 공경의 보편화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성 요한 에우데스는 1909년에 시복되었으며, 1925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인들의 발자취] 성 요한 에우데스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에 헌신 - 축일은 8월 19일

  

성 요한 에우데스는 1601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에서 출생했다. 24세 때 사제 서품을 받은 요한은 사람들의 영혼 구령에 특히 전념했다.

 

그의 고향 노르망디 지역에 악성 페스트가 만연, 많은 주민들이 이에 감염되고 있을 때 그는 병자들과 임종자들을 간호하는 등 눈코 뜰새 없이 바쁜 활동을 하였다. 이같은 재화로 인심이 흉흉하고 신심이 퇴폐한 감이 있게 되자 요한은 묵상회 등 신심행사를 지도하면서 10여 년간 선교활동에 봉사했다.

 

어떤 주교는 요한에서 『이태리와 프랑스에서 훌륭한 강론을 많이 들었지만 이같이 심오하게 가슴에 와닿는 내용으로 강론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다』며 그의 뛰어난 강론술을 칭찬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 교회는 이단 때문에 많은 시련을 겪고 있었다.

 

요한은 이제 시급한 대책으로 신자들을 지도할 착한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고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성심회를 조직했다. '에우디스트'라 불리우는 이 회원들은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성심 뺏지를 달고 다녔다.

 

요한은 또 윤락여성들의 구원에 힘썼으며 회개한 여성들의 복지를 위해 '착한 목자의 사랑의 회'를 설립하는 한편 '예수의 공경할 성심에 헌신'이란 종교서적을 저술키도 했다. 교황 레오 13세는 요한을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에 대한 전례적 헌신의 작가로 인정했다.

  


 

 

프랜시스의 수도자들에게 성심에 대해 말하는 성 요한 에우데스(Joannes Eudes)

 


 

 

 

[이달의 성인] 성 요한 에우데스(1601-1680)

 윤 클레멘트 신부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에 대한 신심을 증진시키고, 사제들을 교육시키는 예수 마리아 수도회, 윤락여성들을 구제하는 착한 목자 수녀회를 설립한 그는 프랑스 노르망디의 아르자탕 근교의 리(Ri)라는 마을에서 유복한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4세에 부모의 소망에 따라 칸(Caen)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하지만, 결혼하여 세상에서 출세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소망을 멀리하고, 1623년에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한다.

 

그는 파리와 오벨빌리에에서 공부하는데, 1625년 12월 20일에 24세의 나이로 오라토리오회의 사제로 서품을 받는다. 서품 후 그는 노르망디 지역에서 본당사목에 전념하는데, 1627년과 1631년 사이에는 창궐한 흑사병에 걸린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는 흑사병이 유행하는 동안은 들판에 있는 커다란 통 속에서 살았는데, 이 시기에 또한 설교자요 고해신부로서 명성을 얻는다. 그는 몇 주일부터 몇 달에 이르기까지 백여 개의 본당을 다니면서 설교를 하기도 한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서 실천해 가기 위한 많은 영적인 꿈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들 중 하나가 사제들의 교육과 덕성을 위한 신학교였다. 그는 이 꿈의 실현을 위해 교회의 장상들 - 리슐리에 추기경, 교구 주교, 수도회 총장 등 - 에게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속한 수도원의 원장이 그의 계획에 찬성하지 않자, 그는 기도하고 조언들을 들은 후, 자신이 속한 수도원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그는 ‘에우디스트회’라는 수도회를 설립하는데, 일명 ‘예수 마리아회’로서 교구신학교에서 일하며 성직자 양성에 헌신하게 한다. 그는 노르망디 지역에 여러 개의 신학교를 설립하지만, 로마의 인가를 얻지는 못한다. 어느 부분, 그가 재치 있게 시도하지 않은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가 신학교에서 올바른 교회 정신, 좋은 정신을 가진 미래의 성직자 양성에 헌신학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던 얀세니즘(Jansemism, 1640년에 얀센이 원죄, 자유, 은총 등을 극단적으로 주장한 신학사상)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또한 거리의 여성들을 위해 일하는 ‘착한 목자 수녀회’를 설립하는데, ‘불상한 이들이 원하는 것은 경건한 성당이 아닌 깨끗한 집이다’라는 마들렌 라미의 말에 큰 감명을 받은 영향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한 그의 마음 속에는 거룩함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마리아의 성심(聖心)이 중심이었다. 후일 그는 ‘예수성심과 성모성심의 아버지’로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선포되는데, 그에게 있어서 성덕(聖德)은 모든 사람들 - 성직을 준비하는 사람들, 본당의 신자들, 흑사병에 걸린 사람들, 거리의 매춘 여인들 등 - 이 하느님 사랑에로 온전히 마음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는 예수성심과 성모성심의 거룩함을 향해 모든 이들이 본받고 나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일생을 통해 온갖 정열을 기울이면서 다양한 사목(司牧)과 일들을 하였다. 더욱이 그는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Margaret, Mary Alacoque, 1647-1690)과 더불어 처음으로 예수성심과 성모성심의 공경과 전파에 노력과 심혈을 기울였던 한 사제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