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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예수의 기도, "행동 없는 성찬례는 성체에 대한 모독"

by 파스칼바이런 2011. 8. 5.

예수의 기도, "행동 없는 성찬례는 성체에 대한 모독"

[하나 되어 다시 읽기-5]

 

2011년 07월 27일 (수) 13:25:16

하나 되어  .

 

   

▲ 유성기업 노동자들을 위한 현장미사가 공장사옥 앞에서 봉헌되고 있다.(사진/한상봉기자)

 

 

최근에 현장미사가 줄지어 봉헌되고 있다. 지난 용산참사에서처럼, 지금은 두물머리 비닐하우스 안에서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미사가 500일 넘어 봉헌되고, 국회  앞에서도 정의구현사제단이 매주 월요일 저녁마다 미사를 봉헌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한진중공업 앞에서 해고노동자들을 위해서, 제주 강정에서도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미사가 연일 봉헌된다. 이들 미사에 참석하는 신자들은 천정이 따로 없는 현장에서 바치는 기도가 막힘없이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 전달되리라 믿고 있다.  좀 더 아름답고 정의로운 세상을 향한 갈망과 투신을 여기서 우리는 발견한다. 그러나 한편에선 왜 사제들이 성당이 아닌 다른 곳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불경을 행하냐고 타박한다. 이 물음에 벌써 20여 년 전에 <하나 되어>에 실렸던 이 글이 좋은 대답을 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편집자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기도할 때 정직하고 성실하며, 단순히 외적인 형식과 전례, 떠들썩한 모임에 치우치지 말고 실제 생활과 관련된 심각한 자세로 하기를 바랐다. 즉 진정한 기도가 되려면 행동과 반드시 연결되어야 했다. 예수는 위선적인 기도를 반대했다. 그는 기도를 많이 하거나 자주 하는 것을 별로 믿지 않았다. 심각한 목표가 없는 기도를 경고했다. 또 예수는 기도할 때 거룩한 장소나 때, 제의, 예식, 말씀 혹은 어떤 특별한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거룩한 기도란 성실하고 흠 없으며 온전한 기도라고 예수는 믿었다.

 

 

 

참 사제는 자신을 제물로 봉헌한다.

 

성찬례에서 우리는 기도하는 예수를 본다. 그 기도는 식사 때에,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 한 기도였다. 그 예식은 유대인들 모두가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축제와 같은 것이었다. 거기에는 제의를 입은 사제도 없었고 거룩한 성작도 없었다. 예수가 그 기도 때에 가져온 특별한 것이라곤 총체적인 인간해방, 그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인간해방에 대한 그의 투신뿐이었다.

 

그러므로 첫 번째 성찬례는 회당이나 성전의 예식하고는 거리가 먼, 동료 인간들을 위하여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투신이 핵심요소였다. 이 투신 전에 예수가 한 이야기는 그러한 투신과 봉사와 형제애로 가득찬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사제는 희생자였다. 예수의 사제직에서 특별한 것이 있다면 희생자로서 봉사와 첫 번째 제물로 자신을 바친 것이다.

 

예수는 성찬례를 단 한 번 거행하였다. 성찬례는 심각한 의미와 생각 없이 쉽게 되풀이되고 늘려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에게 있어 첫 번째 성찬례는 너무나 의미가 깊었기 때문에 두 번 봉헌할 필요가 없었다. 한번 생명을 바쳐서 모든 의미를 이미 채웠기 때문에, 자신을 다시 봉헌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이 성찬례는 그의 제자들과 나아가서는 온 인류의 해방을 위한 그의 전적인 자기희생을 알려주는 전주곡이요 상징이요 최고의 기도였다.

 

투신하지 않는 교회가 성찬례를 거창하게 꾸민다.

 

우리는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이러한 투신과 심각함 없음을 메꾸려고 온갖 다른 종류의 방법을 쓰고 있지 않나 성찰해야 한다. 예를 들어, 미사참례를 수없이 많이 한다거나, 요란스럽고 사치스러운 겉치레로 성찬례를 거행하는 큰 성전들을 짓는다거나, 아름다운 음악과 장식, 거대한 군중들을 모은다거나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성찬례가 사람들을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해방에 투신하도록 이끌지 못한다면, 이러한 외적인 모든 것들은 단순히 방해물이요 힘의 낭비이며 성찬례의 참 의미를 감소시키는 도구가 될 뿐이다. 실상 이런 것들은 투신이 부재하다는 표시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신을 부르고 있는 사람들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개선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매주일 수년간 성찬례를 거행하고 있는지 질문해 보아야 한다. 도시에서 부유한 이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심연에 다리를 놓는 노력도 그 결과로 나타나지 않는 52차례의 주일 성찬례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성찰해 보아야 한다. 성찬례는 일치의 성사가 아닌가? 바오로 사도 자신도 성찬례에 참여하면서 일치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이들을 심하게 꾸중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귀중하게 받지 않는다면 심판을 받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까?”

 

성찬례에 대해서 이렇게 이해한 바오로 사도는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코린토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잘못에 대해서 준엄한 비판을 했다. 그는 성찬례가 사람들 사이에 마음과 그 재물의 진정한 나눔이기를 바랐고, 성찬례를 거행하는 공동체가 한 몸이 되기를 원했다. “우리가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1코린 10,16-17) 바오로 사도는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니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1코린 11,27)

 

성찬례는 보다 큰 사랑과 자기일치, 사람들 사이에 공동체를 형성하게 하므로 영적인 음식이다. 오늘날 성찬례는 사람들 사이에 사랑과 정의를 위한 효과적인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성찬례는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의 고통에 응답하게 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의 고통은 자주 성찬례에서 특별한 위치와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에 생겨나기도 한다. 성찬례를 하면서 사람들 사이에 실천되는 사랑과 사회정의를 위한 행동이 동시에 수행되지 못하는 것은 성찬례에 대한 모독이다. (출처/하나 되어 198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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