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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김대건 사제

우리 벗아, 생각할지어다 : 김대건 신부의 서한

by 파스칼바이런 2011. 12. 21.
[신앙 유산] 우리 벗아, 생각할지어다 : 김대건 신부의 서한

[신앙 유산] 우리 벗아, 생각할지어다 : 김대건 신부의 서한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머리글

 

한 사람의 생각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그와 대화를 해보면 된다. 만일 대화가 어렵거나 불가능할 경우에는 그가 남긴 글을 보면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글을 통해서 글쓴이와 간접적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이 대화에 의해 그의 진심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김대건 안드레아는 우리 교회사에 등장하는 첫 번째 한국인 사제였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서는 그를 ‘수선(首先 : 첫 번째)  탁덕’(鐸德 : Sacerdos 즉 사제의 음역)으로 불러왔다. 그는 한국 순교 성인 중 대표적 인물로 인정받고 있으며, 한국 성직자의 사표(師表)로 공인된 바 있다.

 

이러한 김대건의 생각을 밝혀 내고 그의 가르침을 이어받는다는 것은 오늘의 우리 교회에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오늘까지도 우리 교회는 순교의 전통을 자랑하고 있으며, 거기에 정신적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김대건은 모두 25편의 서한을 남겼다. 이 서한은 모두 1842년에서 1846년에 이르기까지 4년 8개월에 걸쳐 쓰여진 것이다. 김대건은 서한을 통해 자신이 보고 느낀 바를 자신의 스승이요 장상인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그는 순교하기 직전 조선인 신도들에게도 한글로 된 편지를 남기어 목자로서의 정을 전해 주고자 했다.

 

우리가 김대건 성인의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바로 이 서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는 서한 이외에 다른 저술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글을 펴내기에는 너무나 젊은 나이에 순교에의 길을 걸었다.

 

김대건은 누구인가?

 

오늘날 남한 사회에서 국민 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면 누구나 김대건에 대해서 배운 바 있다. 국민 학교 사회 교과서에 그가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교과서에 그가 수록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출중한 행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와 함께 그를 교과서에 수록시키고자 했던 선배 연구자들의 숨은 노력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는 교과서에 실리기 어려웠을지 모르겠다.

 

김대건(1821~1846년)은 한국 천주교회사의 초창기에 신앙에 입교한 가문의 출신이었다. 그의 증조 할아버지인 김진후는 교회 창설 직후에 천주교에 입교했다. 김진후는 1805년 지방 관헌에게 체포되어 10여 년 동안 충청도 해미(海美)의 감유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816년 옥사하여 순교했다. 이때를 전후하여 김진후의 가문은 급속히 몰락했으며 그 후손들은 고향에서조차 삶의 터전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1827년 일곱 설을 지낸 김대건은 그의 아버지 김제준, 그리고 할아버지 김택현을 따라 경기도 용인군 골배 마실로 옮기게 되었다. 그들 일행은 파락(破落)을 거듭하다 향리를 떠나야 했던 유민(流民)들과 진배없었다. 그들은 지방의 소작농보다도 못한 처지였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버림받은 민초(民草)였다. 그의 조상이 양반이었다는 사실은 아련한 추억에 속하는 일이었고, 이제 그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양민일 수밖에 없던 존재였다.

 

그러나 그들은 여느 유민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믿음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믿음에 자부하고 있던 믿는 이의 무리였다. 그러기에 그들은 새로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문전 옥답(門前沃畓)을 버릴 수 있었고, 깊은 산골의 거친 땅을 일구려고 불편한 허리를 기꺼이 추스렸던 것이다. 그들은 믿음 없는 고대광실(高臺廣室)에서의 삶보다는 허름한 초막에서 십자가의 삶을 택하고자 했다.

 

바로 이러한 결단의 정신과 경건한 문화 전통은 소년 김대건에게도 전수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신학생으로 선발될 수 있었고 이 선발을 자진하여 수용할 수 있었다. 그는 1836년 마카오에 가서 신학 공부를 시작했고 1845년 8월 17일 중국 샹하이(上海) 부근에 있는 진자강(金家港)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서품 직후 조선에 입국하여 본격적인 선교 활동에 뛰어들었다. 또한 박해에 처한 신도들을 위로하며, 기쁜 소식의 전파를 위해 불철주야로 노력했다. 그는 순교의 땅 조선에서 부모의 뒤를 이어 순교자의 삶을 살고 순교자의 믿음을 키우다가 순교자가 되고자 했다. 또한 그는 믿음에 목마른 이들에게 감로수를 마련해 주기 위해 선교사의 영입을 서둘렀다. 바로 이 일을 준비하다 그는 체포되었고 1846년 9월 16일 26세의 젊은 나이로 1년 남짓한 사제 생활을 마감하고 새남터 모래밭에서 목이 잘려 순교했다. 이로써 그는 천상의 성인들과 한 무리를 이루게 되었고, 복자로, 성인으로 선포될 수 있었다. 1984년 그의 시성식이 거행된 곳은 그 새남터가 바라보이는 여의도 광장이었다. 시성식 이전부터도 그는 우리 교회사에서 드러나게 순교 전통을 표상하는 인물로 이해되어 왔으며, 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서 계속되고 있다.

 

김대건이 남긴 글

 

김대건은 그의 은사인 르그레주아(Legregeois) 신부 및 리브와(Libois) 신부에게 라틴어로 된 여러 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조선교구의 교구장이었던 페레올(Ferreol) 주교에게도 편지를 통하여 조선 교회가 처해 있는 상황 및 자신의 관찰내지는 활동 사항에 관해 보고하고 있다. 또한 그는 조선인 신도들에게도 사목 서한적 성격을 가진 글을 옥중에서 작성해 보냈다.

 

이러한 그의 글을 통해 우리는 성인 김대건의 생각을 알 수 있고 그와의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그가 남긴 편지를 통해서 우리는 그의 희생적 삶과 종교적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단편적인 글들을 통해서 그의 생각을 확인하고 거기에서 믿음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김대건은 부제 서품을 받은 후 조선에의 입국을 시도했다. 그는 이때의 상황을 그의 스승 리브와 신부에게 보고한 바 있다. 여기에서 그는 “눈이 사방에 길길이 쌓여 산천이 모두 하얗고 싸늘한데 …… 읍을 향하여 나가면서 발자국소리까지 없이하려고 신을 벗고 맨발로 걸어갔다.”고 말했다. 또한 그가 서울에 도착한 이후에도 교우들의 호기심 많음과 말조심이 없음을 염려하여 아무도 임의로 찾아오지 못하게 하고, 자신의 귀국을 자신의 어머니에게까지도 비밀로 하도록 엄중 부탁하였다. 이러한 편지를 통하여 우리는 그의 자기 희생적 선교열과 지도자적 신중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감옥에 갇혀서도 비밀리에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그의 스승과 주교에게 보낸 유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조선의 교회 상황에 대한 염려와 함께 자신의 굳은 신앙을 드러내 주었고, 교회의 발전을 기원했다. 그리고 그는 조선의 교우들에게 어머니로부터 배운 우리말로 편지를 써서 굳은 신앙을 간직하도록 절절이 당부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신도들에게 “우리의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라고 말하며 우리의 신앙을 확인시켜 자신의 주었다. 그리고 그는 신도들을 “우리 사랑하는 제형(諸兄)들아!”라고 따뜻이 부르고 있다. 그는 신도들을 자신의 벗으로, 자신의 형제로 보듬어 안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형제애가 스며 있는 이 편지는 우리 교회의 사랑스럽고 소중한 정신적 유산이다.

 

마무리

 

오늘의 우리는 성인 김대건의 순교를 높이 상찬하고 있다. 그의 축일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미사 때 그를 기억하고 있다. 그의 이름을 따르는 수도 단체가 생겼으며, 그의 이름을 빌려 학교가 세워졌다. 병원의 이름에서도 심지어는 일반 회사의 명칭에서도 그의 이름은 쉬이 볼 수 있다. 또한 새로이 입교한 많은 형제들이 그를 주보로 모시고 자신의 본명을 “대건 안드레아”로 정하며 기뻐한다.

 

그러나 벗아, 생각하고 생각해 볼지어다. 우리는 그의 이름만 기억했지 그의 사상을 밝히고 그의 영성을 드러내기 위해 과연 무엇을 했는가? 그는 성인으로 높임을 받고 있지만 그에 관한 학술적인 논문 한편 제대로 발표된 것이 있는가? 김대건 성인의 행적에 관한 종합적인 사료집(史料集)이 한 번이라도 나온 적이 있는가 말이다. 아마도 우리는 김대건의 이름과 이 그름이 의미하는 영광을 훔치려는 파렴치한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파렴치한이 아니라면 성인 김대건과의 깊은 대회를 그침 없이 시도해야 하며 그의 생각을 밝히려는 작업을 무엇보다도 앞세워야 한다. 그 다음에 학교와 병원에, 회사나 건물에 그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김대건 성인에 관한 종합적 연구에 대한 뜻 있는 이들의 관심이 아쉬울 뿐이다.

 

[경향잡지, 1991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