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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김대건 사제

[한국교회 사제열전] 1. 김대건 신부 (상)

by 파스칼바이런 2011. 12. 21.
사제의 해에 돌아보는 한국교회 사제들

사제의 해에 돌아보는 한국교회 사제들

 

[한국교회 사제열전] 1. 김대건 신부 (상)

신앙 껴안고 형장의 이슬로

 

 

 

▲ 성 김대건 신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 1984년 성인품에 올라

 

한국교회 사제 수가 최근 5000명을 넘어섰다. 신자도 500만 명을 훌쩍 넘겼다. 세계 어느 나라 가톨릭교회와 비교해봐도 자랑스러운 우리 자화상이다. 이땅에 복음이 전파된 것이 불과 230여 년 전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 거저 주어지는 것이 있을까. 모진 박해 속에서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던 순교자들과 묵묵히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 신앙 선조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제의 해'를 지내면서 오늘의 한국교회를 일군 사제들의 삶과 영성을 조명하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첫 번째 사제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7월 5일)의 주인공 성 김대건 신부다.

 

한국교회 첫 사제 김대건 신부는 기해박해(1839년) 및 병오박해(1846년) 순교자 78위와 함께 1925년 7월 5일 로마 성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이어 60년 후인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한국교회는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이 되던 1946년 김 신부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정하고, 축일을 그가 시복된 날인 7월 5일로 정했다. 일반적으로 성인이 세상을 떠난 날을 축일로 정하는 관례를 깬 것이다. 이후 한국교회는 이 대축일을 7월 5일과 가장 가까운 주일로 이동해서 지낸다. 마침 올해는 7월 5일이 주일이어서 이동할 필요가 없다.

  

성 김대건 신부의 삶

 

김대건은 1821년(순조 21년) 충청남도 솔뫼에서 김제준(이냐시오)ㆍ고 우르술라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재복(再福). 김대건은 1827년 정해박해로 경기도 용인 골배마실로 피신할 때까지 이곳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신앙심 깊고 총명했던 김대건은 1836년 4월 부활절 무렵 골배마실 근처에 있는 은이공소를 방문한 모방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고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다. 김대건은 앞서 신학생 후보로 선발된 최양업ㆍ최방제와 함께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1837년 6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있는 마카오에 도착했다. 국내에서는 박해 때문에 신학 공부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충남 솔뫼성지

 

김대건이 신학생으로 부름받은 데는 증조부 때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집안 내력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증조부 김진후(비오)는 10여 년 옥고를 치른 끝에 순교했고, 조부 김택현은 신앙을 지키고자 고향을 떠나 낯선 산골 골배마실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결단을 내렸다.

 

1839년 서울 서소문에서 순교한 부친 김제준은 1984년 김대건과 함께 성인품에 올랐다. 이밖에도 순교자들로 일가를 이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김대건 집안은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다. 이처럼 뿌리 깊은 천주교 집안에서 자라난 김대건이 기꺼이 성소를 받아들이고 모방 신부를 따라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김대건은 최양업ㆍ최방제와 마카오 신학교에서 6년간 사제양성 과정을 밟았다. 안타깝게도 최방제는 1838년 마카오에서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842년 최양업과 함께 중국 요동땅 소팔가자(小八家子)로 옮겨 학업을 이어간 김대건은 1844년 12월 이곳에서 부제품을 받았다.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은 고향을 떠난 지 8년 만인 1845년 1월 평북 의주를 거쳐 국내에 들어왔다. 우리나라에서 선교사가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김대건은 중국에서 조선 입국을 기다리고 있는 조선교구 제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셔오고자 배 한 척을 사서 그해 4월 30일 중국 상해로 출발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17일 상해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았다. 한국교회 첫 번째 사제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귀국길에 오른 김대건은 폭풍을 만나 제주도 인근에서 표류했다가 1845년 10월 12일 전북 나바위에 무사히 상륙한 뒤 서울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 5월 서해 바다길을 통한 선교사 영입 방법을 찾아보라는 주교 지시에 따라 서해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에 편지와 지도를 건낸 김대건은 6월 5일 백령도 인근에서 체포됐다. 김대건의 사목활동은 아쉽게도 반년 만에 멈춰야 했다.

 

포도청에서 엄한 문초와 혹독한 고문을 받은 김대건은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이튿날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했다. 불과 스물여섯 살의 젊은 나이였다. 모래사장에 가매장됐던 그의 시신은 경기도 미리내와 용산 성직자 묘지를 거쳐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 성신교정에 안치됐다.

 

[평화신문, 제1026호(2009년 7월 5일), 남정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