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성 김대건 사제

[한국교회 사제열전] 1. 김대건 신부 (하)

by 파스칼바이런 2011. 12. 21.
사제의 해에 돌아보는 한국교회 사제들

사제의 해에 돌아보는 한국교회 사제들

 

[한국교회 사제열전] 1. 김대건 신부 (하)

 삶의 나침반 '마리아 신심'

 

 

▲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새남터(서울 용산구 소재)에 세워진 새남터성당.

 

 

지난 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대건 신부의 사제생활은 1년 남짓에 불과했다. 꽃을 피우기도 전에 꺾이고 만 셈이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김 신부의 사목활동과 관련된 기록은 거의 없다. 다행히도 김 신부는 20여 통에 달하는 서한을 남겼다. 서한은 모진 박해 속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굳센 신앙을 잃지 않고 순교의 칼날을 받아들인 김 신부의 신앙관을 잘 보여준다. 서한을 중심으로 김 신부의 영성을 살펴본다.

 

임자 하느님

 

김 신부가 하느님을 얼마나 깊이 믿고 따랐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서한부터 읽어보자.

 

"온갖 세상 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 없고, 비록 주은(主恩)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領洗) 입교하여 주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이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效驗)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배주배은(背主背恩)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得罪)하면 아니 남만 어찌 같으리요."(마지막 서한에서)

 

죽기 직전 남기는 유언만큼 그 사람의 진면목을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군문효수형을 당하게 된 김 신부는 다음과 같은 최후 증언을 남겼다. 천주와 영생에 대한 믿음이 절절하다.

 

"나의 마지막 시간이 다다랐으니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인과 연락한 것은 나의 종교를 위해서이고 나의 천주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내가 죽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행복하려면 천주를 믿으시오."

 

김 신부는 독특하게도 하느님을 '임자'라고 불렀다. 하느님은 주인이고, 그리스도인은 주인의 뜻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종에 불과하다는 생각에서다. 하느님을 자신의 삶을 주관하는 절대적 존재로 받아들인 김 신부가 하느님을 배신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느님께서 자신과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믿고, 모든 것을 그분께 의지하고 도움을 청함으로써 인격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살았던 이가 성 김대건 신부다.

 

순교 영성

 

김 신부는 순교자를 천상으로 개선한 용사로 받아들이면서 순교의 열망을 키웠다. 그는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가 19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사실을 전하는 서한에 이렇게 적고 있다.

 

"오! 이분들은 참으로 찬란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용맹하게 싸워 승리를 얻은 후, 황제의 붉은 옷을 몸에 두르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천상 성소로 개선 용사로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그는 또 순교를 앞두고 쓴 서한에서 "주님의 자비에 온전히 맡기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거룩한 이름을 고백할 힘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라며 순교의 용기를 주시길 하느님께 간청했다.

 

김 신부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순교로 출발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가 무수한 수난을 받고 순교로써 교회를 세웠듯이 교회도 수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 신부는 이런 사실을 신자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시련을 견디는 신자들에게 서로 위로하고 한몸 같이 형제애를 나누며 마음을 굳게 먹고 박해에 임하도록 권고했다. 순교는 하느님 앞에서 참으로 영광스럽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순교로써 자신의 믿음을 증언했다.

 

선교 열정과 마리아 신심

 

사제품을 받은 뒤 순교할 때까지 기간이 워낙 짧아 선교에 많은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지만 선교 열정만큼은 남달랐다. 사제품을 받기 전부터 조선 선교에 대한 강한 열망을 드러낸 김 신부는 한국교회 첫 번째 사제로서 자신의 선교 사명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다음은 그가 복음 전파에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옥중 서한 일부다.

 

"저의 손과 발, 목과 허리는 단단히 묶여 있어서 걸을 수도 앉을 수도 없고 누울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또 저를 구경하러 모여든 군중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였습니다. 저는 밤의 일부를 그들에게 천주교를 전교하는 데 보냈습니다. 그들은 제 말을 관심 있게 들었습니다."

 

다른 초창기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김 신부도 각별한 마리아 신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 관한 기록이나, 그가 직접 쓴 서한을 보면 마리아께 의탁해 그분의 전구를 구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다음은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가 김 신부의 마리아 신심을 묘사하는 대목이다.

 

"…김 신부가 조선에 돌아올 때 라파엘호 나침반 노릇을 한 것은 성모 마리아였다. 마리아 성화가 늘 돛대 밑에 펼쳐져 있었고, 낮에는 그에게 보호를 구하고 밤에는 그에게 호소했다…"

 

[평화신문, 제1027호(2009년 7월 12일), 남정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