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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묵상글 모음

내 머리가 누구인지 잊지 맙시다

by 파스칼바이런 2012. 1. 1.
내 머리가 누구인지 잊지 맙시다

내 머리가 누구인지 잊지 맙시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 가정 축일)

 

 

우리가 다 아는 웃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해 볼까요?

 

한 번은 아버지가 목욕탕에 가서 “아이고 시원하다. 너도 들어와 봐라.”라고 하였습니다.  아이는 들어갔다가 시원하기는커녕 매우 뜨거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믿을 놈 아무도 없네.”라고 했다가 아버지에게 엄청 맞았던 아이입니다.

아버지는 호빵을 사서 아이에게 하나 주고 자신은 두 개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배부르지?”라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솔직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 먹어서 배부르면 두 개 먹은 놈은 배 터지겠네.”

그래서 또 맞았습니다. 맞으면서 아들이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그래 때려라, 니 새끼 죽지, 내 새끼 죽냐?”

 

한 번은 아빠와 엄마가 싸웠습니다.

엄마가 항상 아빠에게 지지 않으려고 대들었기 때문에 아빠도 격해져서 아내를 때리려 하였고 아내는 욕을 해가며 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빠는 문에 서 있던 아들에게, “그년 어디로 갔니?”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며, “그년 저리로 갔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이런 우스운 이야기는 상황만 다를 뿐 우리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얼마 전 한 부모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상담을 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부모님도 성당에 다니시는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도 답답해서 성당까지 찾아온 것입니다.

큰 아이가 학교에 안 간다는 것입니다.

아예 휴학이나 자퇴를 하라고 해도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아이가 사귀는 자퇴한 여자 친구가 있는데 자퇴만은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여자 친구 말은 따르면서도 학교는 가기 싫어서 이도저도 아닌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이에겐 부모님이란 안중에 없습니다.

오직 자퇴한 자신의 친구들과 그 중에서도 여자 친구가 자신의 전부입니다.

자신보다 어른인 누구와도 의사소통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이해하는 것은 친구들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이보다도 부모님께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이들은 어쨌거나 부모를 보고 배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존중하고 순종하는 집안이었는데도 아이가 그렇게 되었다면 정말 탐구대상일 것입니다.

남편이 하느님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었다면 자녀들이 적어도 자신의 친구들이 아닌 부모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쯤은 배웠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남아있는 것 중 ‘동물적 본성’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어미가 새끼를 가지면 수컷은 할 일을 다 했기 때문에 필요성이 없게 됩니다. 암컷 사마귀는 교미가 끝나면 수컷을 잡아먹기까지 합니다.

수컷을 남겨두어야 할 때는 자신은 알을 품어야 하고 수컷이 음식을 가져다주어야 할 때입니다.

이런 본능은 종족보존이 생존의 가장 큰 이유이기 때문에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도 이런 현상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여자는 자녀를 출산하면 자녀에 대한 애정이 커지고 반면 남편에 대한 애정은 줄어듭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그 여성은 아직 동물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이 동물과 같이 종족유지를 가장 큰 목적으로 사는 동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신이 그렇게 동물적으로 산다면 자녀 또한 그런 모습으로 자라납니다.

새로운 씨를 받아줄 여자, 혹은 새로운 씨를 줄 남자 친구에게 모든 애정이 쏠릴 것은 당연하고, 안 된 일이지만 조금 있으면 늙어서 사라질 부모에 대한 애정이 사라질 것은 뻔한 사실입니다.

동물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동물적인 대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동물이 아니고, 가정은 사랑을 바탕으로 구성된 공동체입니다.

만약 가정이 좋은 것이 아니라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 가정을 만들어주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가정은 사랑이 이루어지는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이고, 그래서 자녀들에게도 가장 완전한 사랑의 학교입니다.

 

그런데 그 가정의 모델은 삼위일체 하느님입니다.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엔 ‘질서’가 있습니다.

아드님이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듯이 아내는 남편에게 그렇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성령님을 주시듯이, 남편도 아내를 위해 생명을 바칩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그리스도는 당신의 생명인 ‘피와 물’을 교회에 성사의 모습으로 주십니다.

 

문제는 이 질서를 깨뜨릴 때 시작됩니다.

하와는 아담을 보지 않고 유혹자를 보고 그를 더 사랑합니다.

그의 말을 따르고 남편의 뜻과 더 나아가 하느님의 뜻도 거스릅니다.

물론 아담도 자신의 머리가 하느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더 사랑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카인입니다.

카인은 세상과 돈을 더 사랑하여 부모의 뜻을 버리고 자신의 동생을 죽입니다.

 

그러나 성 가정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어른이 될 때까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하느님이시지만 부모에게 순종합니다. 부모를 정해준 것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남편에게 순종합니다.

이스라엘을 떠나자면 떠나고 다시 돌아오자면 돌아옵니다.

예수님께서 12살 때, 예수님을 성전에서 발견하고도, “아버지와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다.” 하시며, 항상 남편은 자신의 위에 놓습니다.

 

요셉은 성모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더 사랑합니다.

이것이 요셉이 정결할 수 있었든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아담과 같이 하와 먼저 바라보지 않습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정배인 아내 마리아를 하느님의 뜻에 따른 가장으로서 보호하고 이끕니다.

이것이 성 가정입니다. 아버지에겐 믿음이 있고, 어머니에겐 사랑이 있으며, 자녀에겐 순종이 있습니다.

우리 모든 가정이 성 가정의 모범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고, 또 죽어서도 모두 하늘나라에서 다시 모일 수 있기를 빕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수원교구 오산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