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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묵상글 모음

더 이상 질문할 것이 없다면

by 파스칼바이런 2012. 1. 1.
더 이상 질문할 것이 없다면

더 이상 질문할 것이 없다면

 

 

철학자, 강신주 교수의 장자에 대한 TV특강에서, 그는 먼저 장자의 문제의식을 가장 잘 표현하는 이런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모자를 팔던 송나라 상인은 조금 더 개방적인 나라인 월나라로 모자를 팔러 갑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그 곳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몸에 문신을 하고 다녀서 모자를 쓰지 않는 풍습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송나라 상인은 그 곳에 계속 머물러야 할지, 아니면 다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이야기의 끝입니다.

장자는 모든 사람이 이 송나라 상인의 처지에 놓여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송나라 상인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냥 자신의 나라로 되돌아가면, 송나라 상인은 더 이상 월나라에 대해 알 수가 없습니다.

 

사실 알지 못한다는 것은 관심이 없다는 것이고 관심이 없다는 것은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장자가 쓴 또 다른 예화가 바로 우물 안 개구리인데, 관계를 넓혀가지 않는다면 이런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살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신의 존재를 실현시켜주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내가 아닌 다른 세계나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누구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대학교 후배이고 이름과 나이까지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 음식이라도 먹으러 가서 그 사람이 좋아하겠거니 하고 시켰는데, 그것을 먹지 않고 남기는 것을 보면 송나라 상인과 같이 그 사람과의 관계를 진전시켜야 할지, 아니면 돌아가야 할지 갈등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를 알지 못하면 끝까지 남자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통해서 자신이 남자임을 알게 되고, 여자는 남자를 사랑할 때 비로소 참으로 여자가 됩니다.

결혼한 여자는 임신을 하게 되는데, 그런 모든 경험들은 관계 맺지 않으면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음을 알 수도 또 체험할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나 자신은 나와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로 온전히 실현됩니다.

 

따라서 우물 안 개구리로 남지 않고 세상을 알고 자신도 알기 위해서는 내가 접하는 모든 것들과의 관계를 거부하지 말아야합니다.

나를 가장 잘 알고 내 자신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처럼 나와 가장 상반되는 것을 지닌 상대와 관계를 맺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여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남성성을 실현했다고 해서 참 인간으로서의 자기를 실현한 것일까요?

인간의 남성성과 여성성은 인간 전체를 말해주지는 않습니다. 한 일부분인 것입니다.

 

혹은 모든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인간관계들로 내 온전한 자신을 실현할 수 없는 유일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죽음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실 인간이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도 많은데,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입니다.

만약 사후세계가 존재하게 된다면 인간은 이 세상 저 편에 있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그 누구와 관계를 맺지 않으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사는 참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참 인간으로서 살 수도 없게 됩니다.

 

인간은 인간과 상반되는, 즉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영원성을 지닌 존재와 관계를 맺기도 하는데 이것이 종교입니다.

인간이 신과 관계를 맺게 될 때 영원성 앞에서 겸손해지고 돌아가야 할 곳을 알게 되고 죽음이란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참다운 자아를 실현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와 전혀 다른 월나라에 와 있습니다.

이 월나라에 대해 알아가야 할까요, 아니면 그냥 내가 살던 송나라로 돌아가야 할까요? 장자는 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보고 그 분이 메시아임을 바로 알아봅니다.

그러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합니다.

왜 다른 아기와 다를 바 없는 그 한 아기를 보고 그 분이 하느님이면서 사람이시라는 것을 그렇게도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제가 비행기를 타고 유럽에서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간 일이 있었습니다.  공항에 한 한국 자매님이 나와 계시기로 되어있었습니다.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이지만 우리는 이름표도 없이 어렵지 않게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서로에 대한 정보, 즉 성별, 나이, 외모 등을 대충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마치 왕처럼 대단하게 올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시메온은 메시아가 가난하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서 많은 고통을 당하셔야 하고 또 그 어머니 또한 그런 고통을 당해서 사람들의 생각이 드러나게 될 것이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보들을 종합해 본 결과 메시아를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누구도 미리 알고 있지 않다면 상대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아는 것도 눈이 정보를 수집하여 뇌에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알아야 보이는 것이고, 보이면 참다운 관계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미 알아가면서 관계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에 대해 끊임없이 알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알려고 하는 만큼 그 분은 자신에 대해 더 털어놓을 것이고, 그만큼 깊은 관계를 맺게 되면, 그만큼 온전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질문하게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냥 아는 정보만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이것이 내가 상대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관계를 갖고 싶어 하는지의 차이입니다.

상대에 대해 더 알기 위해 질문을 던지기를 그만 둘 때, 관계도 거기에서 더 이상 진전이 없게 됩니다.

오늘도 하느님에 대해 조금 더 알려고 또 다른 질문을 던지는 우리 모두는 다른 누구보다도 하느님께 더 가까워지려 하고, 그래서 더 참다운 인간으로서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수원교구 오산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