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신자들의 기도 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자들의 기도가 지닌 기능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이를 성찬례 안에 복구시키도록 했다. “‘공동 기도’ 즉 ‘신자들의 기도’를 특히 주일과 파공 축일의 강론 다음에 복구시키도록 해야 한다”(전례 헌장, 53항). 신자들은 이 기도를 통해서 세례 사제직 (일반 사제직)을 수행하며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의 명칭에 대해서 아직 일반적으로 ‘신자들의 기도’(oratio fidelium)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전례 헌장에서 사용한 ‘공동 기도’(oratio communis)라는 이름이나 ‘보편 지향 기도’(oratio universa1is)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기도의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이름은 ‘보편 지향 기도’라고 할 수 있겠다.
1. 전례 회중의 기도
신자들의 기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많은 옛 문헌들은 사도 바오로가 디모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여기에서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해서 간구와 기원과 간청과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고 권하는 바입니다.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시오. 그래야 우리가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면서 아주 경건하고도 근엄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1디모 2,1-2a)고 권고하고 있다. 전례 헌장은 바오로 사도의 이러한 권고를 반영시키고자 하는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양식과 내용의 다양성을 지니고 있는데도 폭넓은 ‘가톨릭적인’ 관심과 보편적인 염려는 이 기도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 전례가 지니고 있는 항구한 원칙을 발견한다. 지역 교회가 드리는 기도이지만 그것은 온 교회 안에서 드리는 기도라는 사실이다. 선택된 온 가족을 위하여 공동의 아버지와 한 분뿐이신 주님께 드리는 간구 안에 구체적인 그리스도 공동체와 보편 교회의 연대 또는 유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표현된다.
신자들의 기도가 이러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면 형식주의적인 예식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보편 교회는 지역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완성시켜 나가는 데에 목표로 삼고 있는 이상(理想)이요 형상(形相)으로서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신자들의 기도’ 안에서 만나는 지역 교회의 구체적인 필요성은 보편 교회라는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기 위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는 결코 자신만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다. 치쁘리아노 성인이 주의 기도 해설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리스도 백성은 세상 안에서 “온 백성이고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례를 ‘교회의 기도’라고 정의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교회’는 물론 보편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지역 교회를 완전히 제외시키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지역 교회 없이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지역 교회로서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지역 교회는 어떤 특정한 장소와 시대라는 제한된 조건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온 교회를 표상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 교회는 온 세상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성찬례를 거행하는 회중은 지역 공동체의 모임만이 아니라 교회의 신비를 드러내 주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교회는 하느님과 인류 앞에서 온 교회에 대한 책임을 지닌다. 그 교회는 구체적으로 수행해야 할 거룩한 직무를 지니고 있는 ‘살아 있는’ 신자들로 구성된 하느님 백성이다. 그러기에 이 기도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자신들을 참되게 ‘교회’로 이해한다.
보편 교회를 위한 지역 교회의 기도인 신자들의 기도는 그 내용에 이러한 독특한 위치를 표현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시대성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특성을 포함하고 있는 기도가 될 때에만 신자들의 기도는 세례 사제직을 수행하는 참으로 살아 있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포기할 수 없는 진리이다.
신자들의 기도가 지역 교회의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그 회중을 구성하고 있는 신자들의 언어와 표현 방식에 적합한 것이어야 하고, 그들의 삶과 관심과 희망, 염려와 고통 그리고 기쁨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교회 공동체들과 온 교회의 사람들과 상황과 필요가 그 기도 안에 드러나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온 인류에 대한 구원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지역 교회가 바치는 구체적인 기도의 지향들은 그 기도를 바치는 공동체의 문제들을 넘어서 신자들이 살아가고 그들의 신앙을 전해야 하는 인류 공동체의 문제들을 포용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자들의 기도는 교회 내부에 제한되지 않고 온 인류를 향한 ‘보편 지향 기도’가 된다. 교회의 신비 안에서 각 교회 공동체가 자신을 주님의 몸으로 이해한다면 주님을 대신하여 온 인류의 짐을 대신 지고 구원하는 공동체로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완수할 것이다. 교회의 기도는 이렇게 구원하는 사명을 수행하는 구원의 차원에서 바쳐질 때에 참된 ‘전례 회중’의 기도가 될 것이다.
2. ‘신자들의 기도’와 하느님의 말씀
전례 전통은 신자들의 기도를 ‘말씀의 전례’의 한 부분으로 간주한다. 그것은 말씀하신 하느님께 회중이 드리는 응답이다. 전례의 회중은 주님의 말씀에 노래와 기도로 응답한다. 그러므로 들은 성서의 말씀과 기도의 지향은 훌륭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성서의 말씀은 강론으로 해설되고, 기도로써 신자들에게 대변화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이 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그리스도 공동체는 기도한다.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놀라운 일들을 들은 교회는 하느님께 충실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강론은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깨닫게 하고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일깨워 준다. 그 깨달음과 응답이 신자들의 기도 안에서 표현된다. 이렇게 해서 말씀의 선포와 응송, 강론과 신자들의 기도가 밀접한 주제적 연관성 안에서 말씀의 전례를 구성한다. 신자들의 기도는 그 미사에서 들은 하느님 말씀에서 직접 따온 말마디로 하거나 적어도 주제가 일치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이렇게 신자들의 기도를 바침으로써 교회는 신자들에게 이 세상의 필요와 지향을 하느님의 계획에 비추어 생각하게 하는 습관이 몸에 배게 한다. 또한 그것은 기도의 차원을 말씀이 지니고 있는 교리 교수의 차원으로 들어 높이는 효과를 내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믿음의 내용(Lex credendi)과 실천(Lex orandi)이 하나가 된다. 믿는 것을 기도하며 기도하는 것을 믿는다. 또 반대로 기도하며 믿고 믿으며 기도한다. 이 둘 사이에 분리는 생각할 수 없다.
신자들의 기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기도를 참으로 그리스도교적으로 풍요롭게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기도 양식의 모범을 부활 성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부활 성야 미사의 말씀의 전례 때, 매 독서 후에 사제가 바치는 기도는 바로 방금 들은 말씀에 응답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모범을 기초로 하여 신자들의 기도를 바치는 습관을 들여야 할 것이다.
신자들의 기도의 직무를 수행하는 신자들은 들은 말씀의 주제를 잊어버리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바치는 기도가 ‘보편 지향 기도’이냐 아니냐는 판단 기준은 바로 말씀에 부합하느냐 아니냐가 될 것이다. 말씀과 밀접한 주제의 연관성을 가지고 기도할 때 우리는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교회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말씀의 진리를 표현하는 기도가 바로 ‘교회의 기도’이다.
[경향잡지, 1994년 10월호] |
'<가톨릭 관련> > ◆ 전례 & 미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례상식] (06) 전례 주년 (0) | 2013.05.17 |
---|---|
[전례상식] (05) 신자들의 기도 ② (0) | 2013.05.16 |
[전례상식] (03) 축복 예식 (0) | 2013.05.14 |
[전례상식] (02) 그리스도인의 삶과 전례 ② (0) | 2013.05.13 |
[전례상식] (01) 그리스도인의 삶과 전례 ① (0) | 2013.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