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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전례 & 미사

[전례상식] (09) 주님의 현존에 관한 말씀 ②

by 파스칼바이런 2013. 5. 20.

 

 

(9) 주님의 현존에 관한 말씀 ②

 

 

7) 이스라엘에게 주님의 특별한 현존은 성전에서 이루어졌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 가운데에 현존하셨는데, 먼저는 장막 안에, 그 다음에는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세운 성전 안에 사셨다. 우리는 이러한 현존을 머물러 사시는 하느님의 현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명령하셨다. “내가 너희 가운데에 살 수 있도록 내가 있을 성소를 지어라”(탈출 25,8).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는 일을 마치고 외쳤다.

 

“주님께서는 어두운 구름 속에 사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께서 영원히 사실 수 있도록 당신의 거처를 하나 세웠습니다”(1열왕 8,12-13). 성전에 있는 계약의 궤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주님의 현존을 볼 수 있게 하는 표징이었다(1사무 4-6; 2사무 6; 1열왕 8). 하느님의 이 현존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만나주는 곳이다. “그곳은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 주는 곳이다. 거기에서 나의 영광을 나타내어 거룩한 곳이 되게 하리라”(탈출 29,43).

 

열심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현존하시는 주님께 땅의 첫소출을 바치기 위하여 성전에 올라갔다(신명 26,1-11). 희생제물들은 사제들의 손으로 ‘주님 앞에’(탈출 29,11.42) 바쳐졌다. 레위기는 성전에 주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체험해 온 백성의 예배생활을 정확하게 규정하고 있는 예식서이다. 그 백성은 친교의 희생제사로 주님과 일치하고 희생된 숫염소의 피로써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빌었다. 그 밖에 여러 가지 예물을 바쳐 하느님의 다스리심에 감사했다. 그들은 주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드리는 예배 안에 현존하시며 당신 백성과 함께 계셨다.

 

8)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현존하셨다. 이것은 거룩한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더욱 특별한 현존방식이다. 주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을 만나러 오셨다. 히브리인들의 하느님은 보는 하느님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데에 특징이 있다. 그래서 구약의 종교는 직관적인 명상의 종교가 아니라 들음과 믿음의 종교였다. 시나이산에서 있었던 계시는 하느님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이다(신명 4,12.15 참조).

 

주님께서는 이미 ‘선조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말씀을 건네셨다. 또 불붙는 떨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 선조들의 하느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탈출 3,6). 거룩한 산에서는 주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며(탈출 19,3 이하) 당신 백성에게 계명을 주셨다(탈출 20,1 이하).

 

이 계명을 우리는 주님의 ‘열 가지 계명(십계명)’이라고 한다(신명 4,13; 10,4). 주님께서는 모세 다음에도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 백성에게 계속 말씀하셨다. 성서는 이것을 일러서 주님께서 예언자들의 입에 당신의 말씀을 담아주셨다고 표현한다(신명 18,18; 예레 1,9). 에제키엘은 하느님께서 백성에게 하신 말씀이 적혀있는 두루마리를 하느님께 받아 삼켰다(에제 3,1 이하).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사람들이다(에제 2,7; 3,4 참조).

 

주님께서는 창조적이고 힘있는 말씀을 하시며 이스라엘에 현존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은 빈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직접 활동하시는 표시이다. 시편의 저자는 주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하늘을 만드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시편 32,6). 이러한 확신은 이사야에게서도 발견된다. 비가 하늘에서 떨어져 땅을 적시어 결실을 내게 하지 않고서는 되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 돌아오지는 않는다”(이사 55,10-11). 이처럼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뜻을 이루시면서 이스라엘에 현존하신다. 어떤 일을 시작하고 끝내는 것은 바로 이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신명기의 저자는 이야기를 종합적으로 마감하면서 몇 차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주님께서는 명령의 말씀으로 이스라엘에 현존하신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하느님의 법으로 교육을 받고 인도되었다. 신명기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백성의 자랑을 이야기한다. “너희는 그것들을 성심껏 지켜야 한다. 그것을 보고 다른 민족들이 너희가 지혜있고 슬기롭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 모든 규정을 듣고, ‘정녕 지혜있고 슬기로운 백성은 이 위대한 민족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4,6). 하느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신명 30,15 이하). 생명의 말씀을 지니신 주님께서는 백성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명령하시는 지존하신 주님으로 이스라엘에 현존하신다.

 

9)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주님의 현존은 다만 복을 내리고 만나고 믿을 만한 분으로 보이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언자들은 주님의 현존도 마지막 때를 위한 약속 안에서 이해했다. 그것은 당신 백성이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그 백성 가운데에 계신 하느님의 새롭고 영원한 현존이 될 것이다. 에제키엘은 “이스라엘과 유다 가문의 죄악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지 너는 아느냐? 주님께서 이 나라를 내버리고, 돌보지도 않는다고 하며 온 나라에 유혈참극을 벌인 것들, 부정부패로 이 수도를 채운 것들”(9,9)이기에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떠나실 것이라고 경고하며, 주님께서는 앞으로 새 예루살렘의 새 성전에 머무르실 것이라고 선포한다. “너 사람아, 여기는 나의 옥좌가 있는 자리다. 내 발판이 놓인 자리다. 나는 여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영원히 머물 것이다”(43,7).

 

하느님의 새로운 현존은 이제 새 예루살렘에서 계속될 것이다. 이 도시의 이름은 이제부터 “주님께서 여기에 현존하신다.”(야훼 삼마 : 48,35)는 상징이 될 것이다. 이사야도 새롭게 정화된 시온에 계실 하느님의 현존을 말하고 있다.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고 심판하는 입김과 쓸어가는 바람으로 피에 물든 예루살렘을 속속들이 깨끗하게 하시리라. 그때 주님께서 시온산 전역과 모인 회중 위에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솟아오르는 연기와 환한 불길로 나타나시리라”(4,4-5). 또 이사야는 유다 왕국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도래할 희망의 표징을 예고한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7,14). 이렇게 해서 주님의 현존은 이제 ‘처녀’에게서 태어나리라고 약속된 아기와 관련된다. <계속>

 

[경향잡지, 1996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