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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기도문

주요기도문 해설 - 10 삼덕송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11.

 

 

삼덕송

 

 

신덕송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진리의 근원이시며

그르침이 없으시므로

계시하신 진리를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굳게 믿나이다.

 

망덕송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자비의 근원이시며

저버림이 없으시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주실

구원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나이다.

 

애덕송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근원이시며

한없이 좋으시므로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나이다.

 

 

"덕(德)" 이란 죄를 피하고 착한 일을 오랫동안 되풀이해서 이루어진 좋은 습관을 말한다.  덕행에는 여러 가지 있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사람을 직접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이 신덕(信德). 망덕(望德), 애덕(愛德)이다. 그래서 이것을 향주덕(向主德)이라고도 한다.  "송(誦)"은 외워 바친다는 뜻이다.

 

신덕송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드러내는 기도문이다. 우리가 믿되, 한번 기분이 좋아서 기분에 따라 믿는 것이 아니고, 확실한 믿음의 근거를 두고서 믿지 않을 수 없게 된 습성을 신덕이라고 한다. 이 신덕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주시는 은혜로 되는 것이다.  전 세계 10억이나 되는 신자들이 한결 같이 빵 형상으로 된 성체(聖體)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어떻게 사람의 힘이라고 하겠는가? 우리가 구령하기에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신덕이다.  왜냐하면, 확실한 믿음이 없이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진리의 근원이시며

그르침이 없으시므로

이 말씀에서 우리가 믿어야 할 이유를 찾게 된다. 즉 하느님은 모든 진리(眞理)의 근원(根源)이시고 그르침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을 믿게 되는 것이다. 믿는 것은 아는 것과 다르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이 지구가 해를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고, 다만 그것을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권위를 보고서 믿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것도 우리가 그 교리 내용을 다 알아듣기 때문이 아니며, 그것이 우리 구미에 맞기 때문도 아니다.  오직 하느님께서는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진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진실의 권위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이다.  이것이 곧 믿음이다.  진실하신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우리를 속이지도 않으시고 또 스스로 속을 수도 없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권위를 보아서 믿는다.

 

계시하신 진리를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굳게 믿나이다.

여기서는 우리가 믿되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하는 대답을 가르쳐 준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계시하신 진리" 이다.  "계시(啓示)"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진리를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과 성전을 통해서 우리에게 직접 하늘나라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을 계시라 하고, 이 계시된 진리(眞理), 즉 참 진리의 길을 교회가 권위 있게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교리를 교회는 틀리지 않게 한결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을 곧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알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이를 받아들인다.

 

 

망덕송

 

우리가 하느님을 희망하고 바라는 덕을 망덕(望德)이라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믿을 때는 반드시 어떤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걸고 믿게 된다.  그러므로 망덕송은 신덕의 내용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자비의 근원이시며

저버림이 없으시므로

우리가 망덕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말한다.  왜 우리가 희망을 걸고 믿는가 하면, 하느님은 자비의 근원이시고 우리를 저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약속하신 대로 해주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주실

구원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나이다

우리가 무엇을 희망하고 바라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여기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당신의 은혜를 주시겠다고 했으니, 약속하신 대로 이 은혜를 주실 것을 바란다. 하느님의 은혜가 없이 우리의 힘만으로는 구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 세상이 지난 다음 후세에 가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즉 천국의 영원한 복락을 주실 것을 간절히 바란다. 하느님께서는 이 두 가지를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사람들은 흔히 주겠다고 약속만 하고 주지 않는 수가 있으나, 하느님은 절대로 그렇지 않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 온 희망을 걸고 굳게 바라야 한다.  바라지도 않는 자에게는 하느님께서 은혜를 주실 리 없기 때문이다.

 

 

애덕송

 

하느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사랑"이란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도 이르기를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사랑을 드러내는 애덕송(愛德誦)은 모든 덕행의 중심이 아닐 수 없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근원이시며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할 첫째 이유이다. 하느님은 모든 사랑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한없이 좋으시므로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며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좋으시기에 사랑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둘째 이유 이다. 꽃밭에 피어있는 꽃이 아름답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흘러나온, 아름다움의 샘이신 하느님께서는 과연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 하는 것이다.  "마음을 다하여" 하는 것은 마음속으로부터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뜻이다.  진심으로 사랑하되 누구보다도, 부모보다도, 형제보다도, 애인보다도, 국가보다도, 세상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최대로 사랑한다는 뜻이다.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나이다.

하느님 다음으로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한 둘째 번 대답이다. 첫째는 하느님을, 둘째로는 사람을 사랑하겠다는 뜻이다. 왜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의 물건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의 물건은 이 세상 만물 이다. 그중에서 가장 귀한 것은 천사와 사람인데, 이것을 우리는 다른 것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집주인을 사랑한다면 그 집안의 모든 가족들도 동시에 사랑하게 되는 것과 같이 하느님을 사랑하니까 하느님의 한 가족이 될 사람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집주인에 대한 사랑과 다른 가족들에 대한 사랑이 같아서는 안 되듯이, 사람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같아서는 안 되고 구별이 있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함은 자기 몸과 똑같이 사랑하란 말은 아니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마태 7, 12) 하신 말씀대로, 우리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고,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남에게 베푸는 정도로 남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신. 망. 애덕 중 신덕과 망덕은 이 세상에서만 있을 수 있고, 천국에 가면 안개같이 사라진다. 그러나 천국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니까, 애덕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Ⅰ고린 13, 13) 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