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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축일 & 성인

축일 6월 19일 성 로무알도(Romuald) / 951?-1027년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13.

축일 6월 19일 성 로무알도(Romuald)

ST. ROMUALD or St. Romualdus, Abbas

San Romualdo Abate

신분: 은수자, 수도원장

활동연도: 951?-1027년

같은이름: 로무알두스, 로무알드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의 오스티네 귀족 출신인 성 로무알두스(Romualdus, 또는 로무알도)는 부친의 살인 사건 때문에 클라세의 산 아폴리나레 수도원으로 피신하였다가, 20여세 때에 그곳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더욱 엄격한 생활을 하려고 수도원을 떠나 베네치아(Venezia) 교외에 살던 마리누스(Marinus)라 부르는 은수자의 제자가 되었다.

 

978년경 베네치아 공화국의 총독인 성 베드로 우르세올루스(Petrus Urseolus, 1월 10일)가 마리누스와 성 로무알두스를 쿡사(Cuxa)로 데리고 와서 베네딕토 회원이 되게 하자, 이들은 수도원 가까운 곳에 은둔소를 짓고 은수자로 살았다. 그 후 그는 부친이 회개하여 수도자가 되었음을 알고 부친을 만나기 위하여 이탈리아로 갔으며, 이때 오토 3세 황제는 그를 산 아폴리나레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 나 그는 이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2년 뒤에 사임하고는 페레움(Pereum) 교외에서 은수생활을 하였다. 그 후 헝가리의 마자르인(Magyars)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다가 강제로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고령에 따른 질병으로 인하여 1027년 6월 19일 파비아노 교외의 발 디 카스트로(Val di Castro)에서 운명하였다. 그가 세운 다섯 개의 은둔소들 가운데 카마돌리에 세운 것은 후일 카말돌리회의 모원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Gregorius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가톨릭 홈에서)

 


 

 

 

성 로무알도 아빠스

 

로무알도는 '영광과 권세'란 뜻이다. 젊은 시절을 헛되이 보낸 로무알도는 자기 아버지가 재산 때문에 결투를 하다가 친척을 죽이는 것을 보았다. 공포에 질린 그는 이탈리아의 라벤나 근처에 있는 수도원으로 피했다.

 

3년 후에 몇몇 수사들에게서 그는 안정되지 못한 성덕을 추구한다는 깨우침을 받고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는 그 후 30년간을 수도원과 은수자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온 이탈리아를 돌아다녔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순교로써 자신의 생명을 그리스도께 바치기를 갈망한 그는 교황의 허락을 받아 헝가리에 복음을 전하러 갔다. 그러나 그는 도착하자마자 병에 걸렸으며 그 병은 그가 선교 활동을 하려고 애를 쓸 때마다 재발했다. 또 어떤 때는 지독한 영적 무미 건조함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시편 23편 "나는 너를 가르쳐 네 갈 길을 배우게 하고 너를 눈여겨보며 이끌어 주리라."(8절)는 구절을 읽으며 기도하던 중 놀라운 빛과 영감을 얻게 되었는데 이것은 평생 그를 떠나지 않았다.

 

그 뒤에 수도원에서 머물던 그는 방탕한 생활 때문에 자기에게서 꾸지람을 들은 어떤 젊은 귀족으로부터 수치스러운 죄명으로 고발을 당했다. 놀랍게도 그의 동료 수사들은 그 고발을 믿었다. 그는 엄격한 참회 행위를 해야 했고 미사를 드리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공동체에서 격리되었다. 6개월 동안의 침묵 끝에 그는 더 이상 그런 불의한 판결에 복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세운 수도원들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토스카나에 있는 카말돌리(주인의 이름인 Campus Maldoli를 따서)수도원이다. 여기서 그는 수도공동체와 은수 생활을 결합시켜 카말돌리의 베네딕토 수도회를 세웠다.  그의 아버지는 나중에 수도자가 되어 방황하다가 자기 아들의 격려를 받고 충실한 삶을 살게 된다.

 

그리스도는 훌륭한 지도자로서 우리를 완전한 성덕으로 부르신다. 지금 이 순간 남자와 여자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절대적인 헌신과 활력에 넘치는 영성, 철저한 회개에 도전하라고 촉구한다. 우리가 그들의 생활을 본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특수한 상황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개방하라는 그 부르심에로 돌아서지 않기 때문이다.

 

로무알도가 살고 있던 수도원에 폴란드의 한 공작의 아들이 있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대신하여 멋진 말 한 필을 로무알도에게 선사했다. 그러나 로무알도는 그 말을 나귀와 바꾸더니 자기는 나귀에 타는 것이 그리스도와 더 가깝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성바오로수도회 홈에서)

 


 

  

성 로무알도 은수자

 

로무알도의 일생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무한하다는 것과 죄인이라 해도 진실로  통회하고 은총이 인도하심에 잘 따른다면 얼마든지 완덕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표시해 주는 좋은 예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라벤나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귀족이었지만 그들의 생활 상태는 온전히 비그리스도교적이어서 아들 로무알도도 이를 모방하여 어려서부터 마음의 순결을 잃어버리고 부모와 같이 무질서한 생활을 했으나 신앙만은 여전히 보존하고 있었다. 이것은 불량한 사람으로서는 대단히 드문 일이다.

 

그는 종종 말을 타고 인기척 없는 고요한 곳에 가서 교회에 위반되지 않은 생활을 하고 싶다든가 혹은 성인과 같은 완덕의 생활을 하고 싶다든가 하는 충동을 받은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한 번 타락한 구덩이에서 여간해서는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무서운 사건이 일어났고, 그 기회에 하느님의 은총은 그의 회개를 재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건이란 것은 그의 부친 세르키오가 사소한 일로 친척의 한 사람과 불목이 되어 결국 결투로서 그를 찔러 죽인 일이다. 그때 청년이었던 로무알도는 동반인으로 억지로 부친과 같이 가게 되어 상대자의 비참한 죽음을 보자 마음 깊이 충격을 받고 라벤나 교회의 클라세 수도원에 가서 40일간 살인죄를 범한 부친과 그리고 그곳에 참석한 자기를 위해 속죄의 고행을 하기 시작했다. 속죄가 끝나 마음이 진정된 후 로무알도는 다시 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가려고 하니 산 수사는 그를 온전히 회개시키려는 결심을 하고 열심히 수도원에 들어갈 것을 권했다.

 

그러나 그는 여간해서 들으려 하지 않으므로 그 수사는 마지막으로 "그러면 우리의 교회의 보호자인 성 아폴리나리오를 만나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좋습니다. 그와 같이 하면 수사가 되리다: 하고 약속했다.

 

그 날 밤 로무알도는 수사에게 인도되어 교회에 갔다. 그리고 기도하고 있으려니까 과연 성인이 발형하셔서 몇 개 되는 제대를 하나 하나 돌아본 후 다시 자기 무덤으로 사라졌다. 다음 날 밤도, 그 다음 날 밤도 똑같았다. 이와 같이 하여 로무알도는 완전히 개심하고 수도원에 들어갈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수도원에 들어갈 때 그는 겨우 21세였지만 처음부터 모든 일을 정성껏 행하며 특히 기도와 극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수도원에는 세속적 정신이 충만하여 수도자들도 그리 열심하지 않았으므로 로무알도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여러 차례 이를 충고했지만,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그를 미워하게 되고 그중에는 그를 죽이려고 한 사람까지도 있었다.

 

다행히 하느님의 보호로 그는 그런 사실을 알고 스스로 자원하여 그 수도원을 떠났다. 그러나 그대로 세속에 다시 돌아간 것은 아니고, 완덕에 도달할 열망으로 베네치아 교회에 살던 마리노라는 은수자의 제자가 되었다. 978년경 베네치아의 대통령인 베드로 오르세올로가 세속을 떠나 마리노와 로무알도에게 의논하여 프랑스 그잔에 있는 성 미카엘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 마리노와 로무알도도 그 수도원 부근에 초가를 마련하고 종전의 엄격한 생활을 계속하는 한편 농업에도 종사했다.

 

그 무렵 로무알도는 여러 가지 시련을 당했다. 과거의 연상이 그를 괴롭혔고 악마도 내외로 그를 보채었다. 그러나 그는 번민이 아무리 심하다 하더라도 잘 참으려 굳은 신뢰로써 기도하며 모든 것을 죄의 보속으로 다 바쳤다. 그러므로 그의 덕은 날로 진보하는 동시에 그의 부친 또한 회개의 은혜를 얻어 수도원에 입회했다.

 

아버지에게는 수도원 생활이 너무 엄격했음이지 오래지 않아서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것을 안 로무알도는 급히 이탈리아의 아버지에게 돌아와 정성을 다해 위로하고 권면하여 인내로써 수도원에 머무를 것을 간고히 애원했다. 부친도 그의 말에 순응하여 세속에 돌아갈 것을 단념하고 수도 생활을 계속하다가 오래지 않아 선종했다고 한다.

 

그 후 수년간은 로무알도에 있어서 대단히 복잡한 시대였다. 그는 이탈리아 국내에서 이곳저곳 조용한 곳을 찾아 다녔다. 적당한 곳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가 일단 자리를 잡고 초막을 지어 놓으면 어느새 또 못살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가 거처하는 곳을 알게 되면 상방에서 지도를 받으러 사람들이 조수(潮水) 같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제자로 삼아달라는 사람도 있었고 우리의 수도원장이 되어 달라는 수사들도 있었다. 로무알도는 이런 생활보다 인간을 떠나 고요한 곳에서 경건히 하느님을 섬기기를 더 원했던 것이다.

 

966년, 독일의 황제 오토 3세는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에 자기의 보호 하에 있는 클라세 수도원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곳의 무질서함을 보고 개혁할 결심으로 이에 적당한 인재를 수도자들에게 선택하라고 한 결과 누구를 막론하고 로무알도를 원했다. 그러므로 황제는 친히 성인을 방문하고 그 중대한 책임을 맡아 주기를 간청하므로 그도 할 수 없이 승낙하고 그곳에 갔으나 그의 허다한 노력에도 허사였다. 그리하여 그는 주교와 황제에게 청해 다시 조용한 자기 거처로 돌아왔다.

 

그에게 위로가 된 것은 수명의 제자들의 열심한 생활이었다. 그 중에서도 후에 러시아에서 전교하다가 순교한 보니파시오와, 헝가리에서 전교하다가 동시에 순교한 요한과 베네딕토 이 3인은 특별히 뛰어났다. 보니파시오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로무알도는 그곳으로 급히 가려고 까지 생각했으나 그때 마침 중병으로 누워 있었으므로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그 후 로무알도는 어떤 부자에게서 카말돌리라는 한적한 토지를 기부 받아 그곳에 제자들을 위한 수도원을 설립하고 동시에 카마돌리회를 창설했다. 이수도원은 오늘날까지 계속 그 엄격한 생활양식을 지켜오고 있다. 로무알도는 시도리오 산상에도 한 수도원을 설립했는데 그곳에 방탕한 생활을 한 귀족 출신의 한 청년이 들어왔다. 이 청년은 회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스승의 권면과 책망에 대해 원망하며 로무알도도 자기와 같이 남몰래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없는 사실을 들어 나쁜 소문을 퍼뜨렸다.

 

사람들은 이것을 사실로 믿고 대노하여 로무알도를 교수형에 처하든가 혹은 그의 초막을 태워버리든가 하라고 모두 흥분했다. 그는 미사를 지내는 것 까지 금지되었다. 로무알도는 묵묵히 그러나 수치를 인내하며 이에 순종했다. 그러나 어떤 때는 하느님 친히 발현하셔서 미사를 지내라고까지 하셨다. 그는 나이가 많아 임종이 가까운 줄을 알았다. 그래서 하루는 홀로 있고 싶다며 수도자들을 모두 내보냈다. 평소 고독을 즐겼던 그는 임종 때에도 하느님과 홀로 임종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그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제자들이 방에 가서 보니 스승은 이미 고요히 임종한 상태였다고 한다. 때는 1027년 6월 19일이었다. 

 

(대구대교구 홈에서)

 


 

 

성 베드로 다미아노가 쓴 [성 로무알도의 생애]에서

(Cap. 31 et 69: PL 144, 982-983. 1005-1006)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자기를 버렸다.

 

로무알도는 파렌초시 근처에서 3년간 살았다. 첫해에 수도원을 세우고 아빠스를 두는 공동체를 설립했다. 남은 2년 동안 은수 생활을 했다. 여기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그를 높은 완덕의 경지로 올려 성령의 감도하에 미래에 생길 여러 가지 일들을 예견하고 지성의 빛으로써 신구약의 많은 숨은 신비들을 깊히 파고 들어갔다. 그는 자주 하느님을 관상하는 중에 탈혼에 빠져 한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하느님께 대한 표현할 수 없는 불타는 열정으로 여러 가지 짧은 기도를 부르짖곤 했다.

 

"사랑하는 예수여, 꿀보다 더 달콤한 주님이시여, 표현할 수 없는 나의 갈망이시여, 성인들의 기쁨이시여, 천사들의 즐거움이이여."

 

성령의 감도를 받아 순수한 기쁨 가운데 그가 부르짖는 애원은 우리 인간의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성인은 어디에 거처하려 할 때마다 자기 방에다 제대와 함께 작은 기도소를 만들고 두문불출하면서 아무도 거기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여러 은수처에서 거처한 후 이제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발디카스트로에 세웠던 수도원으로 되돌아갔다. 그 곳에서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아무 두려움 없이 기다리는 동안 작은 기도소가 딸린 방을 따로 만들고서 거기에 들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침묵을 지키고자 했다.

 

은수처가 만들어져 그 곳에 들어가 은거하려 할 때, 그는 점점 심해지는 육신의 고통으로 괴로움 당하기 시작하고 병으로 인한 것보다는 연로한 탓으로 기력이 쇠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모든 기력을 잃고 고통이 더욱 심해지며 호흡이 가빠졌다.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할 때, 함께 있던 두 형제를 보고 밖으로 나가 방문을 닫으라고 말한 후 새벽에 아침기도를 바치려 갈 때 다시 들리도록 했다. 형제들은 마지못해 나가기는 나갔지만 성인의 병세가 걱정이 되어 잠자리로 들지 않고 그들의 스승이 갑자기 세상을 떠날까 염려하여 몰래 방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얼마동안 거기에 숨어 있은 후 문에다 귀를 기울여 들어 보았으나 몸이 움직이는 소리도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으므로 성인께 죽음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문을 열어젖히고 급히 뛰어 들어갔다. 불을 켰을 때 이미 그의 복된 영혼은 천상으로 이끌려 올라간 채 누워 있는 거룩한 시신을 보게 되었다. 이 진주는 이제 위대한 임금님의 궁전에서 영예로운 자리를 채우고 있다.

 

 (가톨릭 굿뉴스 홈에서)

 


 

 

 

초기 로무알도와 까말돌리회의 영성

 

베드로 다미아노는 참된 은수생활이 어떻게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도와 사막의 성 안또니오를 혼합한 것인지를 즉 은수자는 이기적이지 않고 참으로 이웃을 위한 사랑의 삶을 살며 은수처의 독방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 뿐만 아니라 가장 완전한 금욕생활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참된 은수생활은 집단 은수처이다. 즉 함께 사는 은수자들이다. 로무알도는 규칙에 따라 생활하는 합리적인 은수자들의 사부이다.

 

로무알도는 972-3년경 이태리 라벤나의 끌라세에 있는 성 아폴리나레 끌뤼니 베네딕도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당시 끌라세 수도원은 거의 개혁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로무알도는 아빠스의 허락으로 마리노라는 수도승과 함께 고독한 삶의 스승과 제자 관계라는 동방의 모델에 따라 살고자 수도원 밖 라벤나 근교로 갔다.

 

까말돌리는 약 1023년경으로 추정되는 로무알도가 설립한 마지막 공동체이거나 혹은 마지막 공동체들 중 하나였다. 로무알도는 다른 사람들 특히 공동체 형제들의 지원과 한 장상의 지도 혹은 규칙의 안내 없이 생활하는 다른 고독한 사람들(은수자 또는 독수자들)의 구원에 관심을 가진 탁월한 '고독자'였다. 로무알도는 황홀경, 예언적 언사, 성서에 대한 이해, 그리고 눈물의 은사와 같은 신비적 은사들을 받았다. 타박꼬(Tabacco)는 눈물을 동반한 기도는 교부/중세 전통 안에서 뿐만 아니라 로무알도의 영성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주장한다. 로무알도에게 있어 은수처의 고요 속에서 통회와 기쁨의 눈물은 하느님께 대한 기도이며 하느님 현존에 대한 증거이다.

  

작은 규모

 

보다 엄격한 고독과 침묵, 그리고 단식을 기초로 한 로무알도의 삶의 체제는 참회의 금욕적인 영역에 있어서는 고대 에집트 독수도승 생활을 모방하였고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성 베네딕도 규칙 준수를 충실히 언급하였다. 베네딕도회 세계 안에서 이 개혁운동은 베네딕도회 수도승 생활에 대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성 베네딕도 규칙서의 영향력을 고독으로 나아간 사람들에게로 확장하고자 하였다. 까말돌리 연합회는 교황 파스칼 2세(r. 1099-1118) 아래서 형성되었다. 그의 교서 'Ad hoc nos'(1105)와 'Gratias Deo'(1113)는 그 연합회를 까말돌리 하의 수도원들과 은수처들의 자립 연합체로서 설정하였다.

 

로무알도 운동의 지지자로 분별되는 몇가지 요소들이 있다. 즉 성 베네딕도 규칙, 한 장상 밑에 은수자들과 회수도자들의 연합, 침묵, 단식, 기도, 고독 등. 거의 모든 로무알도 공동체들을 특징 짓는 현상 중 하나는 그것이 상대적으로 작다는 점이다. 그렇게 하라는 규정은 없었지만 대부분의 로무알도 공동체들이 작았다는 사실은 로무알도 영성의 구체화된 실재에 대한 어떤 것을 이야기 해준다.

  

고 독

 

고독은 확실히 성 로무알도 자신의 마음과 정신에 가장 본질적인 중심이었던 로무알도 개혁운동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었다. 로무알도는 수도승적 환경 위에서 새로운 어떤 것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은수자들이 '함께', '홀로' 그러나 한 장상에 대한 순명과 규칙 하에 살 수 있는 어떤 것을 개발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로무알도 하에서 함께 생활하는 회수도자들과 은수자들은 로무알도 영성에 고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은수자인 한 장상에 대한 순명 아래 놓여졌다. '사랑의 특권을 위하여'(pro privilegio amoris)라는 Tabacco에 의한 이 단순한 말은 로무알도 영성에 대해 언급되어야 할 핵심을 가리킨다. 즉 고독한 자들의 작은 무리는 사랑의 특권(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수도승적 형제애의 관계 안에서 그 사랑을 나눔)을 위하여 결속되었다. 왜 고독한가? 로무알도의 추종자들은 두 가지 주된 이유로 인하여 고독에로 나아갔다. 그것은 즉 '하느님과의 대화'와 '악마와의 공개적인 싸움'을 위해서였다. 고독은 로무알도 영성에 있어 의지적인 순교가 된다. 악마와의 만남은 확실히 고독한 자가 추구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그것은 고독을 강조하는 로무알도 영성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사 도 직

 

우리는 라벤나의 성 로무알도의 삶과 증거 안에서 관상과 활동 간의 상호작용을 볼 수 있다. 로무알도 시대에 로무알도의 고독한 자들이 모이고 봉사했던 많은 작은 교회들과 성당들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13-14세기 까말돌리회의 초기 동안에도 까말돌리 은수자들과 회수도자들에 의해서 지원받은 많은 병원들과 빈민 수용소들이 있었다. 까말돌리 설립 50년 이내에 쓰여진 복자 루돌프의 회헌은 은수자들이 사도적 직무를 수행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 이후의 까말돌리 회헌은 이 권고를 특별히 손님 사목과 병자 간호의 영역에로 확대하였다. 로무알도와 초기 까말돌리 영성은 모두 이 사도적 관심을 강조하고 있다. 로무알도는 수도승 생활 안에 활동과 관상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이해하였다. 로무알도 유형의 은수생활은 어떤 다른 넓은 형태의 은수생활 보다도 더 세상에 개방적이다. 그러나 로무알도 수도승 생활은 또한 세상과 그 방식들을 거부하는데 있어서는 가장 분명한 태도를 취한다. 즉 세상에 개방하지만 세상에 휘말리지는 않고, 세상 안에 토대를 두지만 세상에 의해서 매몰되지는 않는다.

  

삼중의 선익

 

로무알도/까말돌리 수도승 영성 안에서 고독과 사도직 활동 간의 관계는 성 로무알도와 초기 그의 추종자들이 동방 선교에 관심을 두고 있는 독특한 문맥에 초점을 둠으로써 보다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

 

"오토 황제는 로무알도가 은수처로부터 보다 열심한 어떤 형제들을 뽑아 폴란드로 보내 거기서 그들이 이교도 지역 근처 그리스도교 지역의 아름답고 격리된 장소에 하나의 수도원을 세울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면 삼중의 이득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즉 하느님을 찾아 수도승 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수도원(cenobium), 살아계신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보다 성숙된 수도승들을 위한 황금의 고독, 그리고 모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와지고 그리스도와 결합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한 이교인들의 복음화가 그것이다."(V5F2: 114-5)

 

안셀모 조반니(Anselmo Giabbani)는 이 삼중의 선익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전개한다. 그 수도원(cenobium)은 양성, 수도승적 훈련과 규율의 장소가 된다. 그것은 또한 병자간호와 손님환대를 위한 장소이다. 은수처는 관상적 기쁨과 의지적 금욕과 그리스도 안에서 전례거행의 삶 속으로 보다 깊이 몰입하기 위한 장소이다. 수도원과 은수처가 까말돌리에서와 같이 함께 위치해 있을 때 그 둘의 관련성은 수도서원의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먼저 수도원 안에서 시작하고 준비가 되었을 때 은수처로 나아간다. 이 모델은 요한 가시아노의 작품들 안에서 발견된다. 비록 로무알도가 개혁과 지도가 요구되는 고독한 자들을 향해 개혁활동의 주된 관심을 기울였다 할지라도 그는 또한 로무알도 운동의 일부가 되었던 수도원들을 설립하고 개혁하였다. 로무알도 개혁 안에서 은수처에로 나아가기 위한 예비단계로 간주된 '수도 공동체 안에 머물음'이란 개념은 부르노가 로무알도 은수생활을 그 자신의 섹슨족의 종교심성과 게르만적인 동기들과 혼합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로무알도 자신은 수도원의 이점들과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은수생활을 더 선호하였다. 로무알도는 자신을 끌라세(Classe) 혹은 페레오(Pereo)의 아빠스가 되게 하려는 오토 황제와 황실의 계획을 거부하기까지 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은수생활을 하기를 더 원하였고, 조직된 은수생활의 확산을 위해 공동체들을 설립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은수생활에 대한 로무알도의 체험은 끌라세(Classe), 발디까스트로(Valdicastro), 시트리아(Sitria), 몬떼 아미아따(Mount Amiata)에서 만족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공격하고 감옥에 가두고 죽이려 하거나 혹은 몰아내려고 한 아빠스들과 수도승들을 거슬러 싸웠다.

 

수도원과 은수처의 혼합은 까말돌리회 수도승 생활의 구조적인 토대가 되었다. 로무알도의 체험은 분명 은수적 체험과 더 관련이 있다. 로무알도 사후 그 후예들의 삶과 까말돌리 역사는 은수자적 영성과 회수도자적 영성을 모두 포함한다. '공동체 설립'과 '영혼 구원'이 언제나 로무알도의 활동을 위한 동기들이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갈망은 10-11세기 은수자들의 특성이었다. 로무알도를 따르는 수도승들은 그들이 서로 나눈 사랑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들이 바탕을 두었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그들의 은수자적 경향의 뚝 위로 넘쳐흐르기 시작하였다. 성 로무알도는 그 자신의 확신과 소명을 거부하지 않고 삼중의 선익을 위한 길을 내기에 충분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였다.

 

초기부터 까말돌리 영성은 수도승 생활 안에 활동과 관상 간에 존재해야 하는 미묘하지만 필요한 균형에 대해 알고 있었다. 까말돌리의 복자 루돌프는 1080년과 1085년의 까말돌리 회헌에서 라파엘과 레아(Leah)의 모습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이미 까말돌리 역사에서 활동과 관상이라는 곤혹스러움은 하나의 논점이 되었다. 열렬한 사랑과 수도적 열성은 매일의 수도승적 회개와 친교 안에서 그 자체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선교활동과 순교에 대한 개방성 안에서와 같이 여러 다양한 공동체 설립 안에서 넘쳐 흐른다. 은수생활 전통에 낫설지 않게 초기 로무알도/까말돌리 영성은 수도승 생활 안에 활동과 관상으로부터 생겨나는 문제들로 인해 분규를 일으키게 되었다.

 

로무알도 수도승 생활을 떠받쳐 주고 있는 영성은 관상적이고 베네딕도회적이며 수도승적 영성이었다. 그러나 로무알도와 초기 까말돌리 영성은 그것의 독특성을 조건지운 어떤 역사적 요인들을 체험하였다. 스도승적 증거에로의 그 소규모 접근으로부터 나온 그 독특성은 고독 속에서 특히 은수적 고독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집중하였고 상호간에 또한 세상과 나누어져야 하는 수도승의 하느님 사랑에 토대를 둔 강한 친교로써 특징지워졌다.

 

Peter-Damian Belisle, "Primitive Romualdian/Camaldolese Sprituality", CSQ 31(1996), 413-429 요약정리.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새로 보는 교회사] 교회 개혁기에 나타난 은수생활

구본식/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관장 ‧ 신부

 

 

문란해진 독신제

 

긴 박해가 끝나고 하느님의 신비에 참여하기 위해서 정결을 찬양하며 금욕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이렇게 정결의 덕이 부각되면서 성직자들은 금욕에 대해서 찬양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독신이 가장 좋다는 교부들의 말씀에 따라 스스로 결혼생활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처음으로 사제 독신제를 의무화한 것은 306년 스페인의 엘비라 지방 시노드에서였다. 이 시노드에서 그 지방 성직자들은 독신의 의무를 지켜야 한다고 결정하였고,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모든 성직자의 의무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로 로마제국의 행정과 법이 살아있을 때까지는 독신생활의 정신과 법이 대체로 잘 지켜졌다.

 

성직자 독신의 근거는 교부들의 저서나 전례서에 나타나고 있는데 대략 다섯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성체성사를 통한 자녀 생산의 영적 아버지상(象)과 고해성사를 통한 영적 중개자로서 그 역할에 적합하고, 둘째, 다른 사람에게 절제된 생활과 순결을 가르칠 때 설득력이 있기 위해서 스스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 구약의 사제직과 같이 성체성사의 사제직 역시 고귀하므로 정결하게 자신을 유지해야 하며, 넷째,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의 신비를 관리하는 이이가 때문이며, 다섯째, 육적인 아버지가 된 사람은 복음선포에 알맞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잘 지켜지던 독산제가 10세기와 11세기에 들어와서 많은 부분이 해이해졌다. 그 첫 번째 원인은 사회혼란에 있었다. 당시에는 모든 사회문명이 변질되어 사회규율이나 현상이 뒤흔들리고 있었다. 또한 봉건제와 사유교회 제도로 인해 평신자들이 교회를 소유하고, 성직자를 임명하는 권한을 가지는 따위가 독신생활이 문란해진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성직자들에 대한 교육이 미비했다든가, 성소가 없는 이들을 교회직무에 임명했다는 것도 이유가 되었고, 결혼한 사제가 성무집행만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서 농사나 가축을 치는 등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입고 먹고 살 방도가 없었던 상황도 또 다른 이유가 될 수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교회규율이 지켜지지 않는 데서 많은 문제가 파생됐다. 단순히 성직자가 여자를 거느렸다는 문제만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생긴 자식들 또는 교회의 재산관리, 거기서 생기는 사목의 공백들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에도 교회규율을 어길 때 주어지는 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벌을 적용시킬 수 있는 권위와 힘이 부족하다는 게 또한 문제였다. 경건한 주교들이 시노드를 열어 사제직의 쇄신을 위해 노력했지만 근본적으로 성직임명의 권한이 평신자들에게 있어 법을 지키도록 할 권위가 형성되지 않았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그레고리오 개혁의 핵심요인은 바로 교회의 자유였다. 교회가 자신의 고유임무인 복음전파를 하려면, 우선 교회 지도자들인 성직자들 임명에 대한 자유가 먼저 정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개혁 교황들이 교회쇄신 시노드를 열어 교회 안의 문제로 사제들의 윤리생활을 바로잡으려는 데에도 바로 이런 뜻이 있었다. 개혁의 시발은 독일제국의 안정과 교회의 안정을 바라는 훌륭한 독일황제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지만, 교황들의 개혁의지를 따라준 사람들은 바로 다름아닌 개혁 수도원들의 수사들이었다. 특히 그레고리오 개혁과 동시에 나타난 새로운 정신의 수도생활이 생성되어서 전통 수도원의 형태와 아울러 성직매매와 사제들의 쇄신을 위해 열성을 다하여 노력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10세기에 새롭게 일어난 은수생활은 바로 그 개혁의 의지를 밑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은수생활의 부흥

 

은수생활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은 이탈리아 반도였다. 그들은 외딴 움막이나 동굴 또는 숲속이나 산중턱에서 살았다. 이들 은수자들은 완전히 고립된 지역에 외따로 떨어지거나 또는 어떤 움막에서 동료들과 모여 살면서 지속적인 기도와 엄격한 고행의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이웃 사람들한테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예언도 하고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일정한 장소에 머물지 않고 여기저기 옮겨다녔는데, 이는 단순히 장소를 옮기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이들의 기행과 덕행이 널리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자 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때로는 도시로 내려와서 사람들을 훈계하고 회개를 권하고는 다시 산이나 숲으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일정기간 수도원에 들어가서 공동기도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수도원을 떠날 때는 그들의 모범을 따르는 사람들을 데리고 나오기도 하였다.

 

이들의 정신과 활동은 황제들의 교회개혁과 선교정책과 맞아떨어져 황제 오토 3세나 하인리히 2세의 보호를 받았다. 황제들은 그들을 환대하면서 슬라브족의 선교에 나서기를 청하였는데, 이 은수자들이 바로 선교사가 되었고 선교지에서 순교하는 순교자들이 되었다. 은수자들의 정신은 바로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정신과 일치해 있었던 것이다. 많은 성인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두 분 성인을 소개해 본다.

 

성 로무알도

 

성 로무알도는 라벤나 공작가 출신으로, 라벤나 근처의 베네딕도회에 들어갔으나 자신이 바라는 이상을 발견하지 못한 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은수자 생활을 하다가 카탈로니아의 한 수도원장을 만나 그의 수도원에서 몇 년을 지냈다. 거기서 은수자의 대부들의 생애를 공부하고 특히 카시아노의 저서를 읽고서 은수생활의 형태를 정리하면서 일종의 규칙을 만들게 되었다. 그에게 은수생활은 수도생활의 완성이었다. 수도원과 은둔처는 서로 가까이 있어야 하고, 수도원에서 얼마간의 수련기를 끝낸 수도자들은 은둔처에서 더욱 엄격한 침묵과 고행, 기도생활을 하도록 했다. 은수자들은 서로 떨어진 자기만의 움막을 가지고 살면서도 식생활은 공동으로 하였는데, 그 음식도 살 수 있을 정도로만 먹었다.

 

이런 원칙 아래 로무알도는 라벤나 등지에 수도자와 은수자들이 섞인 조금은 무질서한 집단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이러한 혼합집단이 많아지면 그곳에 장상을 임명하고 다른 곳에 가서 같은 집단을 만들곤 하였다. 1027년경에는 주변의 주교들의 도움으로 카말돌리에 은둔처를 만들고 이곳에서 다른 은둔처들을 관리하도록 했다. 로무알도 성인은 클뤼니 수도원처럼 여러 나라에 같은 체계의 은수생활을 퍼뜨려 영향력이 지속하는 체제를 마련했다. 이 체제를 유지하는 데는 후계자 베드로 다마아노의 힘이 컸으니, 그는 로무알도 성인의 방식대로 은수생활을 하였고, 로무알도 성인이 죽은 뒤에는 카말돌리의 은수자들이 성직자들의 쇄신과 교회쇄신을 위하여 노력하도록 힘썼다.

 

성 요한 구알베르토

 

성 구알베르토의 생애는 교회를 개혁하는 일로 일관되었다. 그레고리오 개혁 시대에 산 분으로 교회정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도 성 로무알도처럼 처음 수도원 생활은 실패하였다. 피렌체 근처의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그곳 수도원장이 성직매매를 하는 사람이었다. 구알베르토는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자 그곳을 나와 진정한 수도원을 찾기 위한 순례생활을 하였다.

 

그 뒤 성 로무알도가 세운 카말돌리에서 생활을 하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공동생활과 은수생활이 혼합된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온다. 그때 은둔처의 장상이 그한테 새로운 수도체계를 세워보기를 권하였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1037년에 성직매매(Simonia)와 니콜라이즘(Nicolaism ; 아마도 요한묵시록의 17장의 탕녀에 대한 심판에서 유래하며 성직자들의 여러 가지 폐단 즉 과음, 화려한 의상, 노름과 여자 거느림 따위를 총체적으로 말한다.)을 추방하려는 은수자들이 모인 발롬브로사였다. 여기서 교회를 정화하고자 쇠퇴한 수도원을 뛰쳐나온 사람들과 공동생활을 바라는 사람들을 만나 1049년에 그들의 책임자가 된다. 발롬브로사의 이상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부들과 성 바실리오와 성 베네딕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이었다.

 

교회정화를 위한 그의 노력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여러 개혁가들과 연대해서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 방향은 교회를 혼탁하게 하는 사람들과 공개적으로 투쟁하는 거였는데, 당시 성직을 매매하는 피렌체의 주교와 투쟁하여 그를 몰아내는 등의 일이 그것이다. 두 번째 방향은 성직자들이 교회법 안에서 살도록 독려하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사도적 규율에 따라 살도록 성직자들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었다. 공동체로 살면 시모니아와 니콜라이즘에 빠진 사람들한테서 그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상을 주변의 주교들이 받아들여서 개혁을 추진하였다.

 

발롬브로사의 새로운 체계는 교회 개혁운동의 일환이 되었고, 개혁 교황들이 따르고자 하는 본이 되었다. 구알베르토는 수도원 체계와 영성과 교회 안에서 수도원의 역할들을 바꾸었으나, 원칙으로는 성 베네딕도의 규칙에 입각한 생활을 하였다.

 

수도자들은 침묵과 고행 생활을 하며 사목생활을 피했다. 그들은 세상과는 멀리 떨어져 그야말로 가난과 혼인한 사람처럼 생활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것처럼 가난한 사람이 되어서 아주 형편없는 집에서 살고, 옷은 지독하게 남루하고, 먹는 것은 너무나 부실하였으며 수입이라곤 전연 없이 육체 노동을 하며 살았다. 이런 엄격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일정기간의 시험을 거쳐 이 시험기간이 지나야 수도자로 받아들여졌으며 수련자의 자리는 없었다. 발롬브로사의 수도자들이나 카말돌리의 은수자들은 서원하지 않은 봉사수사의 도움없이는 자신들의 고행생활을 지속할 수 없었다. 이들 봉사수사들이 필요한 물품구입이나 수도원의 물건을 파는 일 따위로 세상과 교류를 담당하였던 것이다.

 

성 로무알도는, 여러 은둔처가 독자적으로 지내면서 똑같은 위치에서 자율적으로 살면서 서로를 구속하는 것은 사랑에 따른 이유에서만 용납되도록 하였다. 하지만 성 구알베르토는 자신의 사후에는 오직 이 사랑의 구속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고 발롬브로사를 모(母) 수도원으로 하여, 발롬브로사의 수도원장이 전체 예속 수도원의 목자나 판관 또는 장상이 되며, 해마다 전체 수도원의 장상이 모이게 하였다. 또한 일년에 몇 번씩 모(母)수도원이 예하 수도원을 방문하여 모든 수도자들이 관습을 잘 지키는지 사목하게 하는 법적 체계를 만들었다.

 

사회의 혼란으로 생긴 교회법의 문란과 사람들의 욕심으로 생긴 잘못된 체제는 개혁으로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된다. 이때 많은 사람들 특히 개혁 교황들과 주교들이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그들의 뒤에서, 밑바닥에서, 후원한 이들은 바로 수도생활의 개혁가들이었다. 이때 비로소 여러 가지 교회영성과 수도정신이 쇄신되고 새로운 제도가 탄생하는 것이다.

 

[경향잡지, 1995년 3월호]

 


 

 

 

 


 

성화속의 성 로무알도(Romuald) 아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