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보 및 지식>/◈ 음 악 관 련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지휘자

by 파스칼바이런 2016. 3. 19.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지휘자

 

 

생몰 : 1908년 4월 5일 (오스트리아) ~ 1989년 7월 16일

데뷔 : 1929년 모차르트테움 대강당 연주회

경력 : 1976 잘츠부르크 이스터 페스티벌 창설

        1956 빈 국립 오페라단 음악감독

        1956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예술감독

        1954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지휘자

        1929 독일 울름오페라극장 지휘자

 

 

지휘자 카라얀의 교훈

 

흔히들 19세기를 피아니스트의 시대라고 하고 20세기를 지휘자의 시대라고 합니다. 슈만과 브람스, 쇼팽과 리스트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들어 기억할 만한 19세기의 대표적인 작곡가들은 대부분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고 그 시대 청중들의 관심과 애정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20세기가 도래하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오케스트라가 점점 커지면서 지휘자의 역할이 중요해졌고 사람들의 관심도 지휘자에게로 모아지게 되었습니다. 20세기를 통털어 가장 위대한 지휘자 한 사람을 말하라면 쉽지 않겠지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지휘자라면 단연 카라얀을 첫 손가락에 꼽아야 할 것입니다.

 

카라얀은 늘 새로운 관심과 변신으로 20세기 클래식 음악의 판도를 바꾸어놓았고 그 때문에 숱한 찬사와 더불어 그에 못지 않은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지는 베를린 필과 빈 필, 오페라 극장의 쌍벽이라 할 수 있는 스칼라 극장과 빈 국립 가극장을 혼자 움켜쥐었고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열리는 세계 최고의 음악 축제인 잘츠부르크 음악제까지 지배했던 그는 오케스트라의 제왕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대부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카라얀이 세상을 떠나면서 지휘자가 군림하던 시대도 막을 내렸고 지금은 그 어떤 오케스트라도 독재자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휘봉 하나로 세계 음악계를 지배했던 황제 카라얀

 

카라얀의 신화가 가능했던 가장 큰 원인은 다른 무엇보다 그의 음악적인 능력에서 찾아야겠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었고 어떤 면에서는 사업가적인 감각과 경영자적인 리더쉽이 더 두드러져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구보다 변화의 흐름을 감지하고 그에 대응하여 변신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카라얀은 중요한 시기마다 승부사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결단과 모험을 감행했고 그때마다 그 자신은 물론 클래식 음악의 흐름까지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푸르트뱅글러가 세상을 떠나자 단원들의 투표 결과, 그토록 원하던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제안 받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종신 지휘자를 요구하는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결국 이를 관철시킴으로써 카라얀은 이후 30년이 넘는 긴 세월 베를린 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음악계를 지배하는 제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카라얀에게도 컴플렉스가 있었으니... 바로 짧은 키!

 

요트와 승마는 물론 스포츠카 운전과 비행기 조종까지 즐겼을 만큼 속도와 경쟁을 좋아했던 그는 절대 절명의 위기를 오히려 일생일대의 호기로 반전시킬 만큼 위기관리 능력이 뛰어났는가 하면 순간을 포착하는 순발력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한 때 연주활동이 금지되는 시련에 부딪혔지만 이 때 찾아온 음반사 EMI의 프로듀서 월터 래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적극적으로 음반작업에 뛰어들었습니다. 푸르트벵글러를 비롯한 그 시대 대다수의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음반작업에 회의적이거나 부정적이었던 상황을 생각하면 그의 선택이 얼마나 모험적인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래그가 음반 녹음을 위해 만든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음반을 내놓기 시작했고 활동에 대한 제재가 풀린 다음에도 음반에 대한 관심과 노력을 더욱 키워나갔습니다. 나중에 도이치 그라모폰과의 작업이 많아지면서 EMI와의 사이에서 묘한 입장에 놓이기도 했지만 끝내 어느 한 쪽과의 독점 계약을 피함으로써 항상 더 좋은 조건을 선택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특별 주문 제작한 911 터보 RS. / 911 turbo 중에 RS형은 카라얀만을 위해 단 한대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중요한 시기마다 그의 선택이 모두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의 선택을 후회하거나 변명하지 않는 자신감 또한 그의 남다른 장점이기도 합니다. 한 때 나치당에 입당한 전력이 평생 그를 괴롭혔지만 그 스스로는 아헨 가극장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다시 당시로 돌아가서 같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보다 더한 일이라도 했을 것이라는 말까지도 했을 정도입니다.

 

1980년 소니의 회장 아키오 모리타를 만나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가능성을 감지한 카라얀은 오페라 마술피리를 최초로 디지털로 녹음했고 이듬해 4월 15일 잘츠부르크 부활절 음악제에서 카라얀은 모리타, 그리고 필립스의 간부들과 함께 새로 출시하게 되는 CD의 규격을 발표하게 됩니다. 잘 알려진 대로 시디를 개발한 필립스와 소니는 카라얀에게 한 장에 담게 되는 녹음의 분량이 어느 정도가 적당할지에 대한 의견을 물었습니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두 장의 엘피에 나누어 담아야 하는 것이 늘 불만이었던 그는 합창교향곡을 한 장에 담을 수 있는 정도를 제안해서 결국 74분으로 정해졌다고 하지요. 카라얀은 이엠아이와 그라모폰을 오가며 수많은 음반을 냈습니다. 에스피와 레이저디스크까지 포함하면 그의 생전에 판매한 그의 음반만도 1억1500만장이 넘습니다.

 

 

 

음악을 CD로...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가능성을 이끈 카라얀

 

 

1989년 여류 클라리네티스트 자비네 마이어의 입단 문제로 불거진 단원들과의 불화로 끝내 베를린 필을 사임하게 된 카라얀은 그해 잘츠부르크 인근의 별장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단원들과 사적으로 만나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던 카라얀은 어쩌면 그런 지나친 자기 관리로 말미암아 화를 키웠을지도 모릅니다. 작은 키와 짧은 하체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연주를 녹화한 영상물에서 허리 아래를 찍지 못하도록 할 만큼 스스로의 이미지 관리에도 철저했던 그였지만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는 없었나 봅니다.

 

드보르자크 5번 3악장베를릴 필 카라얀

 

 


 

 

거장 혹은 독재자. <불꽃의 지휘자 카라얀>

2012.08.08. 09:00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동일한 이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82년 창단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베를린 필에는 단 여섯 명의 상임지휘자가 있었을 뿐이다. 카라얀은 종신 상임지휘자로 34년 동안 베를린 필을 이끌었다. 그 이후 클라우디오 아바도에 이어 사이먼 래틀이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카라얀은 명성만큼이나 악명도 높다. 가장 매력적인 지휘자 중 한 명이지만, 가장 공격을 많이 받은 지휘자이기도 하다. 예찬자들에게는 멋쟁이 천재 지휘자였으나 비판자들에게는 꾸민 냄새가 풍기는 가식이 심한 지휘자이기도 했다.

 

포스터로 많이 팔리던 카라얀의 모습.

 

카라얀은 많은 일들을 타협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밀고 나갔다. 독선적이었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거의 노망에 가까울 정도로 자기밖에 몰랐던 인물이기도 하다. 게다가 돈에 관한 집착도 심했다. 지휘를 하지 않을 때면 스키, 요트, 스포츠카, 헬리콥터 등 극 부르주아적인 스포츠와 여가를 즐기는 것도 비판의 대상 중 하나였다. 젊은 시절 나치에 동조했다는 전력도 카라얀의 이력을 어둡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그러나 카라얀은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20세기 클래식 역사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슈퍼스타였다. 많은 이들이 지휘자 하면 카라얀을 떠올리곤 했다. 인기가 높아지는 만큼 그에 비례해서 비판도 높아졌다. 그는 클래식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을 냈으며, 가장 많은 음반을 팔아재꼈다. 음반 산업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것이다. CD 몇 장이라도 있는 집치고 카라얀이 지휘한 클래식 음반이 없는 집이 없을 정도였다. 카라얀은 자기 모습을 찍은 사진을 문방구에서 포스터로까지 팔았던 유일한 지휘자일 것이다. 멋지고 날카로운 모습으로 찍은 사진들. 학교 앞 문방구까지 장식하면서 카라얀의 음악을 들어보지 못한 학생들까지 포스터를 사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그만큼 그의 명성은 대중적이었다.

 

 

 

 

<불꽃의 지휘자 카라얀>(페터 윌링 저, 김희상 역, 21세기북스)은 만만한 책은 아니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묵직한 책이며, 음악에 대한 전문용어들도 적지 않다. 1970년생인 음악평론가 페터 웰링은 한 번도 카라얀을 만난 적이 없다. 그래서 더더욱 남겨진 음반과 객관적인 사료들을 바탕으로 카라얀이라는 전설적 인물의 실체와 음악 세계에 구체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카라얀에 앞서 양대 거장이 있었다. 독일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이탈리아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였다. 젊은 카라얀에게 두 지휘자는 위대한 존재였다. 두 사람의 스타일을 벗어나서 지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젊은 시절 카라얀은 빈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팔스타프>를 관람한 적이 있다. 밀라노 스칼라 극장을 초대해서 공연한 이 무대에서 지휘를 한 사람이 토스카니니였다. 카라얀은 말한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내 인생을 뒤흔들 정도의 감동과 충격을 안겨준 사람은 바로 토스카니니다. (p45)

 

카라얀은 두 명의 위대한 지휘자를 타산지석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그들과는 다른 길을 모색했다. 1930년대 말 카라얀은 이미 자신의 스타일을 독자적으로 확실히 만들어낸다. 그는 독일 음악계의 실력자이자 선배인 푸르트벵글러와 타협하기보다는 전투를 원했던 모양이다. 푸르트벵글러가 쟁취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룩하기 위한 평생의 욕구는 젊은 시절부터 시작된다.

 

무엇보다도 서른이라는 나이로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벵글러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쏠리지 않고 곡 해석의 자립성을 확실히 한 것, 즉 그만의 미학을 정립한 것이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p90)

 

 

<마술피리> 음반.

 

 

저자는 <마술피리>를 예로 들면서 카라얀과 푸르트벵글러 사이의 차이를 명확히 설명한다.

 

카라얀과 푸르트벵글러 음악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사실 아주 미세한 차이 때문이다. 같은 작품을 녹음한 카라얀의 음반과 푸르트벵글러의 그것을 비교해보라. 똑같이 빈 필하모니를 지휘한 곡들을 메트로놈을 가지고 들어보자. 푸르트벵글러의 연주는 뒤로 가면서 조금씩 늦어지는 경향이 있다. ....... 푸르트벵글러는 결말 부분의 화음에 리타르단도를 강조해준다. 곡에 묵직한 무게가 실리는 효과를 빚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는 지휘자의 간섭이 지나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쉽다. 반대로 카라얀은 같은 부분을 부드럽게 끌어올렸다가 놓아버린다. 음의 파동이 자연스럽게 퍼져나가게 하는 효과를 빚기에 사람들은 이것을 지휘자의 해석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바로 이렇게 해서 카라얀의 연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곡이 가볍고 경쾌하게 들리는 것이다. (p91~92)

 

토스카니니와는 베르디의 <운명의 힘>을 놓고 비교한다.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변화무쌍한 강약의 차이를 별로 주목하지 않는 것이 토스카니니의 연주다. 게다가 탄식이라는 모티브의 마지막 음이 계속 이어지는 활 동작의 반복 속으로 성급하게 빠져버리고 말기 때문에 마치 급하게 털어낸 것만 같은 인상을 심어준다. 카라얀은 이 곡을 토스카니니보다 느리게 시작한다. ....... 카라얀의 의도적인 불일치는 속삭임과 탄식을 더욱 극적으로 대비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첫 악장이 담고 있는 강약의 변화를 카라얀은 핵심만 간략하게 묘사하고 그대로 놓아버린다.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은 더 높은 옥타브를 갖는 전혀 다른 음색으로 장식한다. 이제 청중은 고조된 흥분 속에서 다음에 무엇이 올지 짐작을 한다.

 

카라얀의 음반이 토스카니니의 그것보다 훨씬 더 부드럽게 들리는 것은 이런 차별성 때문이다. 80세의 이탈리아 지휘자가 그려내는 것이 잿빛 스케치라면, 젊은 카라얀은 생동감이 묻어나는 화려한 채색화라 할 수 있다. (p93)

 

물론 몇몇 음반만을 놓고 절대 비교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저자인 페터 윌링은 이런 시도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음악이 보이게 만들고, 들리는 것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구체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카라얀은 1973년 말러의 <교향곡 5번>을 취입했다.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 <베니스의 죽음>에서 교향곡의 아다지에토가 대중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카라얀은 음반작업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콘서트도 끊이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스튜디오 녹음을 더 선호한 편이다. 자기가 뜻하는 바대로 음반을 만들려면 그쪽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카라얀은 청중과 소통하는 것을 과히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어느 누구도와도 소통하려 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고립된 상태에서 자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어쩌면 카라얀은 자기는 좋은 음악을 연주했으니 ‘당신들은 그냥 알아서 들어라’ 라는 식의 강요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고압적인 명령을 내리는 것을 서슴지 않았던 카라얀의 행동을 감안하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격은 무척이나 비사교적이었다. 타인과의 소통을 불안해하거나 꺼리지 않았나 하는 부분이 여러 면에서 드러난다. 소통을 원치 않는 지휘자. 참으로 말이 안 되는 표현일 수 있다. 지휘자는 누구보다도 악단과 소통을 해야 하는 게 아니던가. 그런데 카라얀은 베를린 필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면서 가장 높은 경지로 끌어올렸다. 대단한 독재다.

 

 

카라얀!!!

 

그러나 모든 것은 끝이 있게 마련이다. 1988년 마지막 날 카라얀은 베를린 필하모니와 송년 음악회를 연주하며 18세의 피아니스트 카신을 소개했다. 젊은 음악가를 발굴해서 소개하는 마지막 자리였다. 1989년 초 카라얀은 빈 필하모니와 뉴욕을 방문해서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연주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상에서 내려온 카라얀은 에이전트인 윌포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건 내가 아냐. 대체 누가 한 건지 모르겠네. 어쨌거나 나는 아니야.” 카라얀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음을 카라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4월에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에서 마지막으로 베를린 필을 지휘했다. 건강도 나빴지만, 단원들은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내비쳤다. 7월 16일 카라얀은 아니프의 자택에 소니의 회장이자 친구인 오가 노리오와 함께 있었다. 홈비디오 판권을 놓고 대화를 하다가 물을 한 잔 달라고 해서 마셨다. 몸이 조금 나아진 것 같다고 했으나 고개가 바로 돌아갔다. 그는 결국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 이후 이어지는 이 책의 마지막 두 페이지는 카라얀의 얼마나 엄청난 존재였던가를 역으로 느끼게 한다.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부분적으로 요약해서 적는다.

 

사실 카라얀의 죽음은 음악계를 짓누르던 체증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했다. 베를린에서는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필하모니의 새 상임지휘자로 초빙하면서, 카라얀 미학이 자랑하던 독단과의 단절이 이루어졌다. ...... 때마침 베를린에서는 1989년 가을 아바도와 함께 새로운 시대가 막을 올리면서 같은 해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역사의 대변혁이 일어났다. 그야말로 절묘하고 상징적인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

 

이 새로운 세상에서 독재자 카라얀은 곧 옛 시대가 남긴 퇴물로 사람들의 기억에 아로새겨지고 말았다. ..... 예술가 카라얀이라는 이름은 그만큼 빠른 속도로 잊혀졌다. ...... 설혹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가절하와 비웃음 그리고 증오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의 돌연한 변화로 카라얀이 그 생생한 구체적 영향력을 잃어버렸다 해서 그가 남긴 모든 것을 지워버려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특히 카라얀이 남긴 음악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캐물어 들어가는 논의는 아직도 시작되지 않았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 하기야, 카라얀이 죽던 해 세상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새로움의 추구와 희망도 이제 역사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때가 온 것이 아닐까? 정밀함과 엄격함이라는 미학을 끝까지 밀고 나간 사람이 남긴 필생의 업적을 재발견해서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토론할 때가 말이다. (p566~567)

 

<불꽃의 지휘자 카라얀>에서 독자들은 카라얀의 다양한 면모를 볼 수 있다. 좋은 부분은 물론, 나쁜 부분까지 가감 없이 적어 놓았다. 그렇게 해서 20세기의 전설 중 하나인 카라얀의 실체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클래식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필독할 만하다.

 

그 외에 몇몇 중요한 사람들이 있다. 카라얀에게 영향을 끼친 이들이다. 무대 연출까지 하면서 오페라를 지휘하고, 자신이 지휘하는 장면을 연출해서 영상으로 만들어야 했으니 영상에 전문가가 아니었던 카라얀은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1934년 카라얀은 잘츠부르크에서 악극 <파우스트>에서 피아노 반주를 맡으면서 연출자 막스 라인하르트를 본 적이 있다. 가까워지지는 못했으나 카라얀은 라인하르트가 연출 지시를 내리는 광경을 보면서 넋을 잃을 정도였다고 한다.

 

저 위대한 연출가에게 어떤 특별한 인상을 받았는지 곰곰이 돌이켜보면 난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게 해준 사람은 라인하르트다. 그는 나에게 있어 유일하게 연출이라는 것이 무언인지 표본을 보여준 사람이다.

 

나는 라인하르트가 마치 한밤중에 자유자재로 산책을 하듯 배역에 맞는 배우를 고르는 것을 보고 등이 오싹할 정도로 감명을 받았다. 그는 한눈에 척 보고도 배우의 발전 가능성을 정확히 읽어냈다. 또 그가 택한 배우는 연출자가 원하는 지점까지 어김없이 도달했다. 의견 차이로 갈등을 벌이는 일은 결코 없었다. 생각의 다름으로 주먹다짐을 하지 않고도 라인하르트는 조곤조곤 자신이 구상한 것을 힘들이지 않고 설득했다. (p48~49)

 

 

카라얀과 앙리 조르주 클루조.

 

1965년 카라얀은 자신의 첫 필름을 앙리 조르주 클루조에게 연출을 의뢰해서 촬영했다. 하지만 다섯 번의 촬영 끝에 두 사람의 공동 작업은 깨지고 말았다. 이 실패는 카라얀이 다른 분야에서라도 자기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과 일하면서 명령을 받아야 하는 입장에 처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을 찍을 때 클루조의 연출은 오로지 카라얀의 손에 집중했다. 카라얀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힘줄이 불거진 자신의 손이 과히 아름답지 않다고 여긴 탓이다. 카라얀은 못마땅했지만 감독의 지시를 군말 없이 따랐다. 클루조의 연출이 틀린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후일 카라얀이 직접 연출을 하면서 클루조의 연출 기법을 따르지는 않았으나 그에게서 받은 인상과 경험은 많은 도움이 되었던 듯하다. 카라얀이 후일 클루조에게 감사의 편지까지 쓴 걸 보면.

 

제가 가지고 있던 강박관념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신 선생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촬영 작업만 놓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작업 전반에 걸쳐 선생이 제게 주신 도움은 실로 컸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를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여생 동안 당신에게 큰 빚을 지고 살아가야만 하겠군요. (p450~451)

 

[출처] 거장 혹은 독재자. <불꽃의 지휘자 카라얀>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