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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로 변신한 최태민이 박근혜 짚차 타고 나타나

by 파스칼바이런 2016. 11. 5.

목사로 변신한 최태민이 박근혜 짚차 타고 나타나

이단 연구가 故 탁명환씨 기록

2016.11.03 14:19

 

 

“청와대 무단출입한다고 자랑

영애 이름 팔아 재벌들 돈 뜯고

손주 과자값으로 100만원 수표를

朴 권세 업고 경찰국장에게도 호통

70년대 9억원대 건물 매입하기도”

“최씨 재산 국고 환수해야 한다 여론 비등”

 

 

1976년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대한구국선교단 야간진료센터를 방문, 최태민 총재(오른쪽)와

얘기를 나누는 장면. 가운데는 박근혜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 한국일보 자료사진

 

 

“초라한 원자경 교주였던 이가 지금은 자신이 근혜양과 함께 일한다며, 청와대를 무단 출입한다고 했다.

 

그가 타고 온 짚차는 바로 근혜 양의 것이었다.” (탁명환 국제종교문제연구소장)

 

최태민씨가 과거 청와대를 무단 출입한 일을 자랑했다는 기록이 나왔다. 사이비 교주였던 최씨가 돌연 거물급 인사로 대우 받으며 도시자, 경찰국장, 재벌 등에게 호통을 치는가 하면 재벌에게 돈을 걷어 건물을 사들였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최씨의 딸이자 ‘비선실세 국정농단’ 핵심인물인 최순실씨에게 제기된 혐의도 청와대 행정관의 차량을 이용하고, 검문 없이 청와대를 드나들었으며, 재벌 기업을 상대로 강제모금을 벌였다는 점 등이다. 박근혜 대통령과의 친분을 등에 업은 최씨 부녀가 약 40년의 시차를 두고 꼭 닮은꼴의 국기문란 행각을 반복한 셈이다.

 

이 기록은 사이비종교 비판, 고발에 앞장 선 이단연구가 탁명환(1937∼1994) 국제종교문제연구소장이 집필해 월간 ‘현대종교’ 1988년 4~6월호에 총 3회에 걸쳐 게재한 ‘부끄러운 권력의 시녀 목사들’ 제하의 원고다. 부제는 ‘대해부: 구국선교단, 구국십자군’이다. 탁 소장은 1973년 5월 한 사이비 교단에서 “만병통치”를 운운하며 낸 광고를 보고 대전 보문산 골짜기로 찾아가 최태민씨를 처음 만났고 이를 기록했다.

 

당시 최씨는 칙사, 원자경을 자처하며 “벽에 둥근 원을 색색으로 그려놓고 그것을 응시하면서 ‘나무 자비 조화불’이란 주문을 계속 외우면 만병통치하고 도통의 경지에 이른다고 주장했다”는 것이 탁 소장의 기억이다. 이후 최씨가 먼저 만남을 청하기도 했다. 1974년 서울 이대 앞 제과점에서 탁 소장을 만난 최씨는 자신이 “영세계 칙사관의 대사 자격으로 한국에 왔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월간 ‘현대종교’ 4~6월호에 실린 '부끄러운 권력의 시녀 목사들' 원고는 과거 최태민이 칙사를 사칭하던 사이비 교단 영세계(영세교)가 낸 광고를 싣고 있다. 현대불교 원고 캡처

 

그런 그가 돌연 목사이자 ‘대한구국십자군의 총재’를 자처하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듬해인 1975년이다. 보도를 본 탁 소장이 전화를 걸어 “혹시 원자경씨 아니냐”고 묻자, 당황한 최씨가 “지금 좀 만나자”고 했다. 곧 이어 약속 장소에 “위풍당당하고, 야무지고, 건강한 모습으로 뭔가 자신감에 넘치는” 최씨가 나타나 당시 영애(令愛)이던 박 대통령과의 친분, 청와대 무단출입 사실 등을 자랑했다는 것이다.

 

월간 '현대종교’ 1988년 4월호 일부.

 

신학교 문턱도 밟지 않았지만 최씨는 ‘목사’로 승승장구했다. 탁 소장은 “(선교단의)멸공단합대회 때마다 박근혜양은 빠짐없이 참석해 모습을 드러냈고 각급 기관장들은 물론 고위공무원, 국회의원들이 모두 들러리를 섰다”며 “그것이 후일 최태민씨가 도지사나 경찰국장에게 전화로 호통을 칠 정도로 세도를 부리는 계기가 됐다”고 썼다.

 

박정희 대통령이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구국십자군의 활동을 일부 묵인한 것은 반공교육과 기독교계 통제를 위해서였다고 탁 소장은 분석했다. 구국십자군은 목사들에게 멸공연수강좌를 하고, 집총군사훈련까지 시켰다. 이렇게 영향력을 키운 최씨가 재벌들에게 불법모금을 해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는 사무실에 앉아서 재벌급 기업인들에게 전화다이알을 돌리는 것이 일과였다. 항상 검은 안경을 끼고서 오만하게 앉아 재벌들에게 전화질을 하면서 꼭 근혜양을 팔았다. ‘명예총재인 영애께서 필요로 하는 일이다. 협조부탁한다’고 하면, 재벌들은 모두 꺼벅 죽는 시늉까지 했다. 최씨는 그 엄청난 돈을 챙겨 아현동 고개에 있는 서울신학대학 건물(당시 9억원 상당)을 매입했다.”

 

하지만 정작 최씨가 10ㆍ26 이후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는 “돈 문제는 전부 박근혜 양이 아는 일이라고 잡아떼고 책임을 떠다 밀어버렸다”는 내용도 기록에 담겼다. 당시 세간에는 “최씨가 가끔 손주들에게 과자 값이라고 쥐어 주는 돈이 100만원짜리 수표였다”는 등의 소문이 파다했다. 탁 소장은 “내용을 잘 아는 사람들은 마땅히 이런 비리가 밝혀져야 하며, 그의 재산은 국가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며 “최씨의 정체도 살필 겨를 없이 막강한 배경이 뒤에 있다는 말에 허겁지겁 뛰어들어 놀아난 성직자들도 회개하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태민씨가 당시 청와대를 자유롭게 오갔다는 의혹이 제기 된 것은 처음이 아니다. 2007년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이 연 대선 예비후보 검증청문회에서 박근혜 당시 후보는 ‘최 목사가 박 후보의 이름을 팔아 비리를 저지르고 청와대를 무상출입해 당시 중앙정보부가 조사를 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경호실 비서실이 있고 출입증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청와대 무상출입이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KBS가 공개한 대한구국선교단 구국기도회의 영상에 최태민씨와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 영상은 1975년 5월 4일 열린 기도회를 촬영한 것이다. KBS 영상 캡처

 


 

최태민

 

출생일 : 1912년 05월 05일

사망일 : 1994년 05월

직업 : 특수단체인

관련 인물/단체 최순실(딸)  

 

경력

1975 대한구국선교단 총재

1973 신생종교 영생교 본부 설립

1958 전국불교청년회 부회장

- 대한예수교 장로회 해동총회 책임자

 


 

무당들 벌벌 기던 큰무당 원자경, 2년 뒤엔 '십자군' 총재

[중앙일보] 2016.11.03 16:08 백성호 기자

 

 

신흥종교·이단 전문가 탁명환씨 생전에 쓴 최태민 숨겨진 이야기

 

신흥종교·이단문제 전문가인 탁명환(1937~94) 소장이 최태민(1912~94)을 처음 만난 것은 1973년이었다. 당시만 해도 그의 이름은 ‘최태민’이 아니라 ‘원자경’이었다. 계룡산 주변에 산재한 신흥종교 문제를 파고들던 탁 소장은 대전일보에 실린 광고를 보고 대전 보문산 골짜기에 있던 감나무집(대전시 대사동 196)을 직접 찾아갔다. 탁 소장은 거기서 원자경을 만났다. “거기에서 머리가 시원스럽게 벗겨진 문제의 칙사님인 원자경씨를 최초로 만났다”고 탁 소장은 본지가 단독 입수한 자료에 기록해 두었다. 88년 탁 소장이 ‘최태민과 구국선교단·구국십자군’을 해부한 기록이다. 탁 소장이 만난 최태민, 그의 숨겨진 이야기를 2회에 걸쳐 싣는다.

 

1975년 5월 22일 구국십자군 창군을 앞둔 멸공단합대회에서 최태민이 대표로 선서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탁 소장은 “원자경이 살던 감나무집의 벽에는 둥근 원이 색색으로 그려져 있었다”고 했다. 원자경은 “그걸 응시하며 ‘나무자비 조화불’이란 주문을 계속 외우면 만병통치는 물론이고 도통의 경지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당시 광고를 보고 찾아온 이들은 수십 명이었다. 신흥종교의 교주들도 있고, 무속 잡인들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모여서 원자경이 설한 ‘영세계 원리’를 청강했다고 한다.

 

협치보다 ‘마이웨이’ 고집…수렁에 더 빠져든 박 대통령

 

대전 보문산 감나무집서 73년 대면 / 벽엔 둥근 원 색색으로 그려져 있어

“나는 영의 세계에서 온 칙사” 주장 / 무당들 사이 “영력 대단하다” 소문

서울서 다시 만난 최태민 위풍당당 / “근혜양과 일해 청와대 무단출입”

주변에 그의 ‘무당’ 과거 털어놓자 / 중정 이모 과장 “몸조심하라” 경고

 

원자경(최태민)은 자신을 ‘영세계에서 온 칙사’라고 소개했다. 1973년 대전일보에 원자경이 냈던 광고.

 

이후 원자경은 거처를 대전시 선화1동사무소 앞으로 옮겼다. ‘영세계 칙사관’이란 간판도 내걸었다. 원자경은 자신이 영의 세계에서 온 칙사(메신저)라고 주장했다. 이때만 해도 그에게는 ‘목사’라는 직함이 없었다. 오히려 ‘무속인’에 더 가까웠다. 그는 대전일보(1973년 5월 13일자 4면)에 ‘영세계에서 알리는 말씀’이란 광고를 싣고 예식장을 빌려 ‘영세계 원리’를 전하며 사람을 모았다. 광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세계 주인이신 조물주께서 보내신 칙사님이 이 고장에 오시어 수천년간 이루지 못하며 바라고 바라든 불교에서의 깨침과 기독교에서의 성령강림, 천도교에서의 인내천. 이 모두를 조물주께서 주신 조화로서 즉각 실천시킨다 하오니 모두 참석하시와 칙사님의 조화를 직접 보시라 합니다.’

 

탁 소장은 대전 시내로 옮긴 원자경의 거처도 수차례 찾아갔다. 원자경은 거기서도 벽에다 둥근 원을 그려 놓고 사람들에게 ‘나무자비 조화불’을 외우면서 응시하게 했다. 여기서 탁 소장은 원자경이 무당을 상대하는 광경을 보고 ‘한 가지 특이한 일’이라며 이렇게 기록했다. ‘잡신을 섬기는 무당이 원 교주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고 벌벌 긴다는 사실이다. 처음 만난 무당도 그에게 절을 하고, 그의 치료를 받으면 신기(神氣)가 떨어져 무당업을 폐업하고야 만다는 사실이다.’ 탁 소장은 “그에게 소위 ‘영력(靈力)’이 어느 정도 있는 게 사실”이라며 그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의 역사와는 다르다고 했다. 일종의 대(大)무당인 셈이다. 74년에는 원자경에게서 전화가 왔다. 탁 소장과 원자경은 이화여대 앞 제과점에서 만났다. 이날 원자경은 “한민족에게 특별한 사명이 있다. 나는 영세계 칙사관의 대사 자격으로 한국에 왔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 뒤로도 몇 차례 더 만난 뒤 두 사람은 서로 연락이 끊겼다.

 

정국은 유신체제로 접어들었다. 75년 교계 신문에는 일제히 ‘대한구국십자군’ 기사가 실렸다. 총재의 이름은 ‘최태민(崔太敏)’이었다. 탁 소장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얼굴은 낯이 익었다. 다만 검은 안경을 쓰고 있는 게 예전과 달랐다. 최태민은 다름 아닌 원자경이었다. 탁 소장은 그 길로 서울역 뒤편의 빌딩에 있던 대한구국십자군 본부를 찾아갔다. 전화를 하자 최태민은 당황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통화를 한 뒤에 두 사람은 신세계백화점 옆 D다방에서 만났다. 탁 소장은 “대전에서 보던, 이대 앞에서 만났던 초라한 원자경 교주가 아니었다. 위풍당당하고, 야무진 모습으로 뭔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최태민은 “지금은 박 대통령의 영애 근혜양과 함께 일한다. 청와대를 무단출입한다”고 말했다. 또 자신이 타고 온 지프차도 근혜양의 것이라고 했다.

 

1975년 9월 5일 청와대에서 최태민(오른쪽 셋째)을 비롯한 구국선교단 일행이 박정희 대통령과 박근혜 큰 영애를 만나고 있다. 당시 최태민은 탁명환 소장에게 “청와대를 무단출입한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탁 소장은 원자경의 놀라운 변신에 할 말을 잃었다. 이후 탁 소장은 “최태민의 전신은 원자경”이라는 걸 몇몇 사람에게 말했다. 그러자 금세 엄청난 반응이 왔다. 중앙정보부 종교담당 책임자였던 이모 과장이 어떻게 알았는지 “몸조심하라”며 경고성 협박을 해 왔다. 이뿐만 아니었다. 최태민은 탁 소장이 지방 출장을 갔을 때 직접 연구소로 찾아와 편지를 써 놓고 갔다. 탁 소장은 그 편지의 내용도 기록해 두었다. 요점은 이렇다. (맞춤법은 편지 원문 그대로 표기)

 

‘탁소장! 生(최태민 자신을 가리킴)은 탁소장 아시다싶히 무슨 교단과 교리를 갖고 선교단을 이끌고 감이 아니고 순수히 반공단체 이온데 근래 탁소장이 구국선교단과 生에 대하여 모함을 한다는 말을 목사들한테서 전해 듣고 심히 불쾌했읍니다 … 이곳에 심방했다가 부재중이기에 돌아갑니다. 일차 상면을 원합니다. …’

 

최태민은 ‘목사’ 직함을 쓰고 있었다. 10만원을 내면 목사 안수를 받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신학 교육을 받지 않은 최태민은 헌금을 내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한다. 탁 소장은 “측근으로부터 (최태민이) 예장 종합총회 조현종씨로부터 안수를 받았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후 최태민과 알력 때문에 제주도에서 (목사 안수를 준) 조씨가 경찰에 구속됐다. 최태민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다. 당시 최태민의 세도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막강한 것이었다”고 했다.

 

당시 최태민이 꾸린 조직은 ‘십자군’을 표방했다. 명칭도 ‘구국(求國)십자군’이었다. 구국십자군은 모두 카키색 군복을 입고 어깨에 십자가 모양의 별을 달고 다녔다. 언뜻 보면 군 장성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탁 소장은 이에 얽힌 일화도 하나 소개했다.

 

천안에 있는 모 목사가 구국십자군 군복에 십자가 별을 달고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다. 당시 제3한강교를 지나기 전에 지방에서 올라온 차량은 헌병의 검문을 받아야 했다. 헌병은 버스에 올라 검문을 하다가 중장 계급장을 어깨에 단 사람을 발견했다. 앞에 가서 거수경례를 하고 물었다. “장군님, 실례합니다. 검문을 하겠습니다.” 3성 장군이 설마 고속버스로 이동할까 싶어 수상하게 여겼던 터였다. 그러자 그 목사는 화를 벌컥 내며 “새까만 졸병 새끼가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검문을 하겠다는 거야?”라며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그래도 헌병은 굽히지 않고 목사를 차에서 하차시키고 검문을 했다. 조사 결과 구국십자군 지역사령관으로 밝혀졌다. 탁 소장은 “그 사건 이후 구국십자군이 어깨에 달던 십자가별이 없어졌다”고 밝혔다.

 

최태민이 목사 두 명을 대동하고 탁 소장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최태민의 과거는 당신들보다 내가 더 잘 안다”고 말한 탁 소장은 몇 가지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첫째 목사직을 사퇴하고 평신도로 돌아갈 것, 둘째 칙사론 교리의 주장 중지, 셋째 평신도로서 교회에 출석할 것 등이었다. 동행한 목사 중 한 사람이 “탁 소장! 말조심하시오. 지금 이분이 어떤 분이시라고? 함부로 말이면 다하는 거요. 그런 식으로 하면 탁 소장 신상에 좋지 않아요”라며 협박을 했다. 탁 소장은 “진짜 목사가 가짜 목사를 비호하고 두둔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고 했다. 당시 ‘가짜 목사’ 최태민 주위에는 유신 치하에서 권력에 편승하려는 ‘진짜 목사’들도 적잖이 있었다.

 

◆ 탁명환 소장

1937년 생. 개신교계 신문사 기자로 일하다 신흥종교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연구소를 세우고 신흥종교와 이단문제 전문가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단·사이비 종교에 대한 고발과 폭로로 테러와 암살 위협, 협박이 끊이지 않았다. 85년에는 차량 폭탄 테러를 당했으며, 94년에는 대성교회 광신도의 테러로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차남 탁지원 소장이 ‘월간 현대종교’를 맡고 있다.

 

정리=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최태민 “큰 영애께서…” 전화 돌려 재벌 돈 뜯는 게 일

[중앙일보] 2016.11.04 02:55 백성호 기자

신흥종교·이단 전문가 탁명환씨 생전에 쓴 최태민 숨겨진 이야기

 

 

백성호 기자

 

 

1975년 6월 21일 ‘구국십자군 창군식’에 최태민 총재(왼쪽에서 둘째)와 큰 영애 박근혜 명예총재가 참석했다. [중앙포토]

 

 

차지철 경호실장 ‘최태민 동향’ 보고 “무단출입 막아야” 대통령에게 건의

육영수 여사 1주기 추모예배도 주관

 

최씨, 행사 열 땐 큰 영애 꼭 참석시켜

딸 결혼식엔 재계·관료들 인산인해

건설사 접근, 계약 따주고 커미션도

10·26 시해 사건 후 최씨 본격 수사 최, 영애 앞세우고 발뺌해 흐지부지

 

탁명환 소장

 

육영수 여사는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문세광의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이후 청와대에는 냉기가 돌았다. 안주인을 잃었기 때문이다. 최태민(1912~94)은 이 틈을 파고들었다. 신흥종교·이단문제 전문가 탁명환(1937~94) 국제종교문제연구소장은 “난데없는 장문의 편지가 근혜양에게 발송되었다. 그것은 모친을 잃은 근혜양에 대한 위로와 격려의 글이었고, 구구절절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적인 입장의 글이었다”고 했다. 당시에도 이에 대한 루머가 있었다. 탁 소장은 “그런 인연으로 최씨는 근혜양을 만나게 되었고 일설에는 최씨가 육 여사를 근혜양의 꿈에서 만나게 해준다는 루머까지 나돌았다”고 밝혔다.

 

이때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최태민의 거취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세하게 보고했다. 가급적이면 접촉하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희망하는 방향으로 보고서가 작성됐다고 한다.

 

이즈음부터 최태민은 청와대를 무단출입하기 시작했다. 탁 소장은 “당시 중앙정보부에서는 최태민에 대한 의견이 엇갈려 있었다”고 했다. 탁 소장이 최태민의 정체를 밝히려고 하자 중앙정보부의 모 과장이 찾아와 “그 사건을 파헤치면 신상에 좋지 않다. 영애가 관련된 일이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신상에 유리하다”고 협박한 뒤 돌아갔다. 그래서 탁 소장은 때를 기다렸다.

 

그런데 얼마 후에는 중앙정보부의 다른 파트에서 찾아와 “최태민씨를 조사하게 됐으니 자료를 좀 넘겨달라”고 탁 소장에게 요청했다. 탁 소장은 거절했다. “언제는 재미없다고 협박하더니, 이제는 때려잡겠다고 하는 의도가 뭔가?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그따위 수사 방침을 어떻게 내가 믿겠는가”라고 반박했다. 대신 최태민(원자경)의 교리 책인 『영세계의 칙사론』을 건네주었다. 그 책에는 ‘최태민이 영세계의 칙사로서 한국에 파견된 대사와 같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탁 소장은 “(정권 내부에서도) 최태민에 대한 의견이 갈렸지만, 근혜양의 의견을 지지하는 편이 우세하여 최씨는 계속 득세했다”고 기록했다.

 

74년은 엄혹한 유신 시절이었다. 당시 기독교계는 박정희 유신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저항 세력이었다. 최태민이 총재를 맡았던 대한구국십자군의 창설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탁 소장은 “최태민이 박 대통령의 영애 근혜양을 만나면서부터 당시 저항 세력이었던 기독교계의 저항을 희석시켜 보려는 의도에서 대한구국십자군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체제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꼈던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기독교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차에 근혜양을 통해 최태민씨의 구국선교단 십자군사령부의 창설 건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76년 2월 구국선교단 무료야간진료센터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 최태민. [현대종교]

 

알려진 것처럼 박 대통령이 최태민을 무조건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체제 유지 차원에서 대한구국십자군을 활용한 측면도 분명히 있었다. 최태민은 75년 4월 구국선교단을 창설한 뒤 총재가 됐다. 5월에는 멸공단합대회를 개최했다. 목사들을 선발해 집총군사훈련도 시켰다. 50기로 나누어 무려 5000명을 훈련시킬 계획이었다. 6월에는 서울 종로구 순화동에 있던 배재고등학교 교정에서 구국십자군을 창설했다. 창군식에는 큰 영애도 참석했다.

 

경호원의 삼엄한 경비 속에서 창군식이 거행됐다. 구국십자군은 최태민 총재와 박근혜 명예총재 등 임석상관을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이후에도 최태민이 주최하는 대회에는 각급 기관장들은 물론 고위 공무원과 국회의원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손자에게 과자값 100만원 수표 쥐여줘”

 

탁 소장은 그 이유로 ‘큰 영애의 빠짐없는 참석’을 꼽았다. 탁 소장은 “그것이 후일 최태민씨가 도지사나 경찰국장에게 전화로 호통을 칠 정도로 세도를 부리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 구국십자군은 전국적으로 20만 명을 목표로 했다”고 했다. 최태민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목에 힘을 준 최태민은 항상 검정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다. 탁 소장은 “고려 말 괴승 신돈처럼 홀연히 나타난 최태민 총재는 구국선교단과 구국여성봉사단을 운영하면서 돈을 물 쓰듯 했다”고 밝혔다. 당시 최태민의 아들이 인천에 살고 있었다. 최태민은 집도 사주고 돈도 풍족하게 주었다고 한다. 가끔 손주들에게 과자 값이라고 쥐여 주는 돈이 100만원짜리 수표일 때가 있어 지켜본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는 소문도 돌았다. 탁 소장은 이 일화를 소개하며 “그 당시(70년대 중반) 100만원은 10년 지난 지금(88년)으로 친다면 1000만원도 족히 넘는다. 이것이 사람들이 과장해서 하는 말이라고 친다 하더라도 얼마나 돈을 물 쓰듯 하면서 살았으면 그런 말이 나왔을까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당시 최태민의 딸이 결혼을 했다. 결혼식장에는 경제계와 정부 관리 등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많은 하객이 몰렸다. 탁 소장은 “이것은 권력의 냄새만 피워도 쉬파리처럼 몰려드는 당시 권력형 종이호랑이의 단막극을 여실히 입증하는 생생한 표본”이라며 “최태민은 ‘구국’에는 구호뿐이지 사실은 축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는 사무실에 앉아서 재벌급 기업인들에게 전화 다이얼을 돌리는 것이 일과였다”고 증언했다.

 

그 대목을 탁 소장은 이렇게 표현했다. “항상 검은 안경을 끼고서 오만하게 앉아 재벌들에게 전화질을 하면서 꼭 근혜양을 팔았다.” 이어서 탁 소장은 “(최태민이) ‘명예총재인 영애께서 필요로 하는 일이다. 협조 부탁한다’고 하면 상대편에서 꼼짝 못했다”고 밝혔다.

 

최태민의 사냥감은 대기업뿐만 아니었다. 탁 소장은 최태민의 측근으로 있다가 탈퇴한 간부의 증언을 빌려 “최태민이 건설 관계 회사에도 전화를 걸거나 찾아갔다. 공사 계약을 따내는 일이나 납품 등을 알선하고 커미션을 받아 챙기는 수법으로 축재를 했다”고 밝혔다.

 

당시 최태민 주위에는 기독교 목회자들이 많이 몰렸다. 최태민 자신은 신학 교육을 받지 않은 ‘가짜 목사’였지만, 그의 주변에는 기성 교단에 소속된 ‘진짜 목사’가 꽤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나중에 소속 교단의 교단장까지 지낸 인물도 있다.

 

탁 소장은 그들의 명단을 일일이 기록했지만, 이름 석 자 중 가운데 글자는 ‘O(동그라미)’로 표기했다. 그러면서 탁 소장은 “비록 당사자들의 명예를 위해 성명을 밝히지 않으나 역사의 기록과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운 줄 알아야 하며, 하나님과 역사 앞에 권력의 시녀인 꼭두각시 놀음을 한 것은 회개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이 사건이 실제로 기독교 역사에 실명으로 기록될 때가 올 것이다”고 적었다.

 

“최씨 주변에 기성 교단 목사도 많아”

 

실제 최태민이 창설하고 총재를 맡은 대한구국선교단과 대한구국십자군의 서울본부 주요 간부 명단을 보면 예장합동·예장연합·기성·예장통합·오성·예감·침례교·감리교 등 기성 교단 소속의 목사들이 꽤 많았다. 그만큼 구국선교단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고 육영수 여사 1주기 추모예배 순서지’. [현대종교]

 

 

75년 8월 14일에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의 묘소에서 ‘고(故) 육영수 여사 1주기 추모예배’가 열렸다. 탁 소장이 보관한 ‘고 육영수 여사 추모 예배 순서’지를 보면 행사의 주최가 다름 아닌 ‘대한구국선교단·대한구국십자군 총사령부·대한구국선교단여성후원회’로 돼 있다. 최태민의 영향력이 그만큼 컸다. 당시 추모예배 현장에 대해 탁 소장은 “최태민은 목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기독교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순서에서 제외되고 근혜양 주변에서 맴돌았다”고 서술했다.

 

최태민은 자신을 찾아오는 목사들에게 “교인들을 통해 돈이 될 만한 건수를 물어오면 그것을 해결하고 돈을 받아 선교회 사업에 쓰겠다”고 말했다.

 

권력을 이용해 민원을 해결하고 수수료를 챙기는 식이다. 탁 소장은 “실제 김모 목사가 1번 타자로 교인들에 수소문해 건수를 물고 들어갔다. 최태민은 그걸 해결하려고 여기저기에 로비 활동을 했다.

 

그러나 만사가 그렇게 수월치만은 않은 법이다. 오히려 상대편에서 법적 소송을 걸고 나오자 불리해진 것을 알고 최태민은 재빨리 손을 뗐다. 그리고 모든 책임을 김모 목사에게 떠넘겼다. 결국 김 목사는 구속됐다”고 했다.

 

이 과정을 모두 지켜본 강모 전도사가 욕을 하며 “이 X새끼야, 건수 물어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불리하니까 오히려 상대방을 충동질해 목사를 구속시켜 버려. 빨리 빼내지 않으면 재미없다”며 길길이 날뛰어도 최태민은 아무런 대꾸를 못했다고 한다. 그 후 강 전도사는 구국선교단을 탈퇴해 ‘최태민 타도’에 앞장섰다고 탁 소장은 전했다. 또 탁 소장은 “최태민은 돈이 되는 일이면 어디든지 개입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는 10·26 사건이 터졌다. 최태민에 대한 수사도 시작됐다. 당시 신촌과 청계천 호텔에 수사본부가 차려졌다. 그런데 최태민은 큰 영애를 ‘방패막이’로 삼았다. 탁 소장은 “수사본부에서 한 달간 수사를 했다. 거액의 행방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데 최태민은 예금통장 등 모든 걸 근혜양에게 책임을 돌리고 발뺌했다. 수사진은 대통령의 자녀에 대한 예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수사 결과도 발표하지 못하고 말았다”며 “최태민이 여기저기에 숨겨놓은 재산을 찾아내 국가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13대 국회에서 국정조사권이라도 발동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탁명환 소장이 28년 전 『현대종교』에 최태민에 대해 쓴 글의 서두는 마치 ‘최순실 국정 농단 시국’을 겨냥한 것처럼 읽힌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누군가 정권무상(政權無常)이란 말을 한 적이 있다. 권력이란 무상한 것이요, 허무한 것이다. 한 세대가 지나가면 아무리 당대에 위세를 떨치고 나는 새라도 떨어뜨릴 듯싶던 권력도 쇠잔해 가게 마련이다.”

 

탁 소장은 “그런 무상한 정치 권력에 아부하고 야합하는 종이호랑이들”을 강하게 질타하며 ‘최태민의 정체’를 폭로했다.

 

정리=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최순실 총체적 국정개입 의혹 42년 인연

 

 

박근혜 대통령이 1979년에 새마음봉사단 총재 자격으로 축사를 했던 ‘제1회 새마음제전’. 이날 행사 개회 선언을 한 최순실 당시 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장(단국대 대학원 1년)이 한양대 운동장에서 박 대통령과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당시 박 대통령은 27세, 최순실은 23세였다. [사진 JTBC 화면 캡처]

 

 

박근혜 대통령은 25일 대국민사과에서 최순실(60)씨와의 관계를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이라고 언급했다. 무슨 뜻일까.

 

박 대통령과 최순실 어떤 관계

최태민, 육 여사 서거 뒤 위로편지 5녀 최순실 말벗 해주며 가까워져

1979년엔 새마음제전 밀착수행도

 

10·26 이후 18년 은둔시절 동안 아버지 측근, 만나도 모른 척할 때

곁에 남아준 최씨와 긴밀 관계 유지

 

1997년 국회의원 당선 정계 입문 때 최씨 남편 정윤회 ‘비서실장’ 역할

 

1979년 10·26 사태 이후 박 대통령은 97년 말 정계에 나오기 전까지 18년간 긴 은둔 생활을 했다. 박 대통령은 이 시기에 쓴 일기에서 “지금 상냥하고 친절했던 사람이 나중에 이(利)에 기가 막히게 밝은 사람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덧없는 인간 사이다”고 적었다. 서울의 한 호텔 엘리베이터 안에서 박정희 대통령 시절 장관을 지낸 한 인사가 박 대통령과 마주치고도 모른 척 한 날 쓴 것이었다. 결국 박 대통령의 언급은 18년간의 은둔기에 최씨와 특별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음을 시사한다.

 

“꿈 많은 대학 시절,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그분을 처음 만났다.”(87년 잡지에 실린 최씨의 기고문)기사 이미지

 

 

1976년 어느날 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대한구국선교단의 야간진료센터를 찾아가 최태민 선교단 총재(오른쪽)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가운데는 당시 선교단 명예총재인 박근혜 대통령. [중앙포토]

 

박 대통령과 최씨의 인연은 육영수 여사가 서거(74년)한 이후 2~3년 새 맺어진 것으로 보인다. 40년 가까이 됐다는 것이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최씨보다 최씨의 아버지 최태민씨 를 먼저 알았다. 『김형욱 회고록』에는 육 여사가 피살된 뒤 최태민씨가 영애인 박 대통령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편지를 계기로 박 대통령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최태민씨는 꿈에 나타난 육 여사의 메시지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 주기 위해 길을 비켜 주었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1912년 황해도 출신으로 일제시대 경찰 업무를 했다는 최태민씨는 해방 이후 승려가 됐다고 한다. 70년대 초 불교·기독교·천도교를 종합했다며 ‘영생교’를 세우고 교주가 됐다. 영생교 간판을 내린 뒤인 75년 4월 ‘대한구국선교단’을 설립해 다음달 개최한 ‘구국기도회’, 6월 ‘대한구국십자군’ 창군식 등에 박 대통령이 참석한다. 76년 박 대통령은 최태민씨가 여러 단체를 통합해 만든 ‘새마음봉사단’의 총재가 됐다. 그러나 최태민씨는 77년 9월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보고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에게 비위 혐의 등으로 직접 신문을 당했으나 사법 처리는 면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10·26 사태 뒤 재판부에 제출한 항소이유보충서에 포함된 ‘구국여성봉사단과 연관한 큰영애의 문제’라는 문서에서 “이 문제가 10·26 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이지만 중요한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최태민씨의 5녀인 최순실씨는 새마음봉사단 대학생 회장으로 박 대통령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최근 한 인터넷 매체는 새마음봉사단이 주최한 79년 ‘제1회 새마음제전’ 행사에서 최씨가 박 대통령을 밀착 수행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공개했다.

 

79년 독일 유학을 떠났다가 85년 귀국해 교육 사업을 하면서 육영재단 이사장이던 박 대통령과 재회했다. 당시 최씨는 네 살 위인 박 대통령의 말벗을 해주며 언니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성한 전 미르재단 사무총장도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9월 카니발 차량 안에서 최씨가 박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스스럼없이 ‘언니’라 불렀다”고 주장했다.

 

최태민씨가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은 건 전두환 정권 때인 86년 이후 육영재단 운영을 둘러싸고 박 대통령과 동생 박근령씨가 마찰을 빚으면서다. 근령씨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최태민·최순실씨의 전횡을 문제 삼았고 근령씨는 “사기꾼 최태민을 엄벌해 최태민에게 포위당한 언니 박근혜를 전직 국가원수 유족 보호 차원에서 구출해 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청와대에 제출했다. 최태민씨는 94년 만성 신부전증으로 사망했다.

 

 

정윤회씨. [중앙포토]

 

박 대통령은 97년 말 정계에 입문했고 이듬해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당선했다. 이때 최순실씨의 남편 정윤회씨가 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비서실장’으로까지 불리던 정씨는 2004년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당 대표가 된 지 2년 만에 뒷선으로 물러났다. 이후 2006년 박 대통령이 유세 도중 커터칼 테러를 당했을 때엔 최씨의 언니가 병간호를 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최씨 모친의 팔순 잔치에 참석해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가족여행도 같이 간 것으로 알려진다. 또 박 대통령 당선 후 ‘문고리 3인방’으로 불리는 이재만·정호성·안봉근 보좌관도 최씨 부부가 추천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 취임 이후엔 청와대를 자주 드나들며 박 대통령을 만났으며 박 대통령의 옷과 액세서리, 순방 일정 등을 챙기기도 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의 측근인 여권 고위 관계자는 “대통령이 여성인 만큼 남에게 쉽게 얘기하기 어려운 의상·건강·미용 등의 상담과 부탁을 하는 과정에서 최씨에게 점점 더 밀착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최태민씨는 목사 안수를 정식으로 받았는지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목사라는 호칭은 쓰지 않고 씨로 표기합니다.

 

특별취재팀 임장혁·문희철·채윤경·정아람·정진우 기자 im.janghyuk@joongang.co.kr

 


 

최태민 불광동 단칸방뿐” 40년 뒤 세 딸 재산 3000억대

[중앙일보] 2016.11.01 07:13 문희철 기자

 

 

문희철 기자

 

최순실씨의 언니 최순득씨가 남편 장석칠씨와 공동 소유한 대지면적 951.9㎡(289평)의 삼성동 승유빌딩. 현 시세로 290억원대인 이 빌딩을 최씨는 1985년 매입했다. [사진 김춘식 기자]

 

최순실(60)씨의 자매로는 언니 최순득(64)씨와 동생 최순천(58)씨가 있다. 이들 세 자매가 최소 3000억원가량의 자산을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패밀리 비즈니스의 요체는 부동산 투자였다. 하지만 재원이 투명하지 않다. 영세교 교주였던 부친 최태민씨가 번 돈이 종잣돈으로 활용됐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일각에선 검찰 특별수사본부가 돈의 흐름을 철저히 조사해 부정한 돈이라면 환수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언니 최순득 삼성동 290억 / 최순실은 신사동에 150억 동생 순천 청담동 200억 빌딩

80년대 20~30대 나이에 빌딩 투자 시작해 재산 축적

아버지가 횡령 등 모은 돈 딸들에게 흘러갔을 수도

 

중앙일보가 이들이 보유한 부동산·법인 등기부등본을 조사한 결과, 최순실씨는 2002~2015년 서울 강남구 역삼동·신사동과 경기도 하남시 등지에서 빌딩 세 채를 갖고 있다가 매각해 167억원을 받았다. 2003년엔 신사동 미승빌딩을 구입했다(현 시세 150억원). 독일의 호텔·주택을 포함해 현재 부동산 자산만 약 200억원 이다. 최순실씨의 언니인 최순득-장석칠씨 부부의 가장 큰 재산은 시세가 290억원대인 서울 삼성동 승유빌딩이다. 이 부동산을 담보로 13차례 은행 대출을 받아 현금을 융통했다. 현재도 KB국민은행으로부터 약 50억원을 대출한 상황이다. 이들 부부는 도곡동의 고급 빌라(35억원 상당)를 최근 매물로 내놨다.

 

동생인 최순천씨는 200억원대 청담동 빌딩을 담보로 11차례 대출을 받아 자산을 불렸다. 대출 잔액은 54억원으로 추정된다. 서울 서초구와 광주시에 각각 100억원대 빌딩을 보유하고 있다.

 

 

부동산을 지렛대 삼아 최씨 자매들은 다양한 사업에 손을 댔다. 언니 최순득씨는 강남에서 가구점을 운영했다. 그의 남편 장석칠씨도 부동산 임대를 주업으로 하는 S기업을 1987년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다.

 

동생 최순천씨는 2012년 에스플러스인터내셔널이란 회사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다. 남편 서동범씨는 아동복 업체인 서양네트웍스 대표다.

 

2013년 1월 초 이 회사 지분 일부를 1980억원에 매각해 속칭 ‘대박’을 쳤다. 400억원대 부동산을 비롯해 총 2400억원대 자산을 보유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에 대해 최순천씨의 아들인 서현덕 서양네트웍스 전략기획이사는 “우리 집안은 사업을 열심히 해서 재산을 형성했다”며 “이모(최순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빌딩을 매입한 자금의 출처다. 최태민씨는 70년대 초반만 해도 재산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93년 월간중앙 11월호에는 청와대 관계자가 “74년 최태민 일가는 불광동 단칸방에 전화기도 없이 빈곤하게 살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랬던 최씨 일가는 불과 10년 만에 각각 80억~290억원대 안팎의 빌딩을 매입한다. 85년 최순득씨는 현재 시세 기준 290억원짜리 삼성동 승유빌딩을, 최순실씨는 신사동 엔젤빌딩을 샀다(※2008년 매각). 최순천씨는 88년 반포동에 상가건물(현 시세 99억원)을 매입해 현재도 갖고 있다. 이 건물엔 남편인 서씨가 운영하는 서양네트웍스 온라인 쇼핑몰을 광고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당시 세 자매의 나이는 20대 후반~30대 초반이었다. 한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최순천씨가 청담동 서양빌딩(현 시세로 200억원대)을 89년 매입했을 때의 나이는 불과 서른한 살이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최태민씨가 축적한 자산 일부가 세 자매의 부동산 구입 자금으로 흘러 들어간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최태민씨는 80년 2억2000만원(현재 화폐가치 40억400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금되기도 했다. 또 최씨 일가는 박근혜 대통령이 몸담았던 여러 기관에서 그림자처럼 함께했다. 최순실씨는 육영재단 산하 근화원 업무에 관여했고, 장석칠씨는 박 대통령이 명예총재였던 대한구국봉사단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또 이들의 배다른 오빠인 조순제씨는 영남대에서 이사를 지냈다.

 

87년 육영재단에서 근무하던 직원들은 “최순실씨가 지나치게 재단 운영에 깊이 관여했다”며 집단행동을 했고, 88년 영남대에선 조순제씨와 관련한 문제로 이사진이 퇴진을 결의했다. 인과 관계는 명확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최태민씨의 자녀들은 현재 모두 강남의 부동산 부자로 자리 잡았다.

 

글=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사진=김춘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