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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 -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8. 6. 24.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 (1) 마지막 날 스승이 남긴 뜻은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

(1) 마지막 날 스승이 남긴 뜻은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 / 김형수 신부 옮김

 

 

신약성경은 예수님께서 지상의 삶을 마무리하기 전날 저녁,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했던 중요한 만찬을 여러 번 보도한다. 네 복음서(마태 26,17-30; 마르 14,18-26; 루카 22,7-38; 요한 13,1-17.26 참조)와 코린토 1서(11,17-34 참조)에서 그 만찬을 보도한다. 이 다섯 번의 만찬 보도는 유사점과 함께, 뚜렷한 차이점도 보인다.

 

바오로 사도는 성찬례 자체를 넘어, 이 성찬례가 내포하는 종말론적 성격까지 다룬다(이 점에 관해서는 마태 26,26 이하 참조). 반면 공관 복음서의 저자들은 최후의 만찬을 예수님의 마지막 삶과 연결해서 이해하며, 이 만찬을 파스카 축제와 연결하여 보도한다. 그들이 서술한 내용에는 ‘성찬례 제정 장면’과 ‘유다의 배반’이 함께 등장한다.

 

요한 복음이 전하는 내용은 공관 복음과 다소 차이가 있다. 요한 복음에는 성찬 제정문에 나오는 ‘주님을 기억하라’는 명령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카파르나움에서 성찬례에 관해 약속하는 말씀이 나오는 6장에서 이 점을 언급한다(요한 6,22-71 참조). 반면에 최후의 만찬 장면에서 요한 복음이 강조하는 것은 ‘세족례’와 ‘유다의 배반’이다. 또 요한 복음에만 나오는 고별 담화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통해, 당신의 파견과 운명을 통해 무엇을 의식하셨는가 하는 점이 드러난다. 요한은 대가(大家)의 입장에서 보도 전체를 기술한다. 다시 말해 요한은 구체적 사건과 그 사건을 거치면서 갖는 영적 상태를 신적 의미와 연결시켜, 직접 일어나는 현재를 저편으로 향하게끔 촘촘히 엮어 준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몇 가지 사건과 말씀을 좀 더 가까이에서 살펴보자.

 

두 스승이 보낸 삶의 마지막 저녁

 

요한 복음에 나오는 본문의 말씀을 다루기 전에 먼저 세계 정신사의 두 가지 사건을 떠올려 보자. 이 두 사건은 겉으로 보면 요한 복음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요한 복음과 마찬가지로, 두 사건은 두 명의 영적 스승(붓다, 소크라테스)이 죽음을 앞둔 자리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유언하는 장면이다. 두 스승은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제자들에게 나눠 준다. 하지만 그 두 사건을 요한 복음과 비교해 보면 차이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 차이점에서 요한 복음이 말하는 고유한 점을 살펴볼 수 있다.

 

두 가지 사건 가운데 하나는 복음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기원전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사건은 불교의 창시자인 붓다(석가모니)가 임종 전에 제자들과 함께 모여 그들에게 전해 준 말이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유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너희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에만 충실할 것이며, 다른 것에는 집착하지 마라! 너희는 홀로 살아갈 것이며, 너희 각자가 스스로 얻게 된 깨달음과 다짐한 결정을 따라야지, 스승의 가르침에 매이지 마라. 스승이 떠나면 결국 너희 각자는 자신의 의지력으로 모든 것을 체득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어떤 것도….”

 

두 번째 사건은 붓다가 죽은 뒤 100년 뒤에 일어난다. 바로 소크라테스의 생애 마지막 날에 있었던 일이다. 해가 지면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받아마셔야 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아침부터 감옥에 와서 온종일 스승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날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그는 제자들과 토론하였고, 자신이 정신적으로 무엇을 추구하는지 설명했다. 더불어 확신을 가지고 죽음을 맞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증언했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육체적 죽음은 오히려 본래의 것으로 돌아가는 통로가 될 것이며, 본래의 것은 정신이 인식함으로써 또 좋은 것을 행함으로써 얻게 되는, 누구도 파괴할 수 없는 생명이다. 하지만 각자는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이것을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해 각자는 자신의 양심을, 고유하고 성숙된 정신의 능력을 따라야 한다.

 

예수님, 그분은?

 

이제 세 번째 사건인 요한 복음의 고별 장면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이 사건 역시 스승이 자신의 제자들과 마지막 날을 보내는 이야기다.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스승과 함께 한없이 충만하게 보낸 시간이 드디어 마지막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작별하는 그 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주하고 계셨다. 그분은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왔으며 하느님이 바로 당신의 아버지라는 의식을 지니고 계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원하는 대로 행하는 인물로서 그들에게 말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원에서 오는 전권을 지니고, 스승이며 주님으로서 제자들에게 말했다(요한 13,13 참조). 그분만 홀로 알고 있으며 행할 수 있기에, 그분은 당신에 관해 “나는 길이다”(요한 14,6 참조)고 말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질문, 곧 하느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알려 주신다. 이 점을 우리는 인간의 단순한 본성으로 알 수 없다. 예수님만 이 점을 의식하셨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이 영원으로부터 “아버지의 품 안에”(요한 1,18), 곧 삼위일체 공동체의 영원한 내면에서 사신다고 말한다. 바로 이 점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말씀의 의미를 ‘사랑’이라고 이름 붙이셨다. 신약성경에서 ‘사랑’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일종의 신비스러운 말이다. 이 사랑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단순히 아주 친근한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파악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원한 심연에서 우리 인간을 당신의 ‘마음’ 가까이에 있도록 결정하시어, 하느님의 이 마음은 역사에서 예수님의 운명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설명해 준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오셨다. 복음에서 예수님에 대해 보도하는 첫 번째 말씀은 다음과 같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 ‘나라’는 단순한 가르침이나 윤리가 아니라, 이 나라가 현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정말 가까이 계시며, 이것은 숨을 쉬는 것을 비롯한 우리의 모든 행위가 하느님의 의지 안에 있다는 뜻이다.

 

복음을 듣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이 현실성을 받아들인다면, 하느님 나라가 그들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말할 수 없다. 복음을 듣는 이들이 그 나라를 다가오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성령 강림으로 일어난 사건은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를 깨닫게 해 준다.

 

[성서와 함께, 2013년 7월호(통권 448호)]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

(2) 마지막 날 예수님이 남긴 뜻은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 / 김형수 신부 옮김

 

 

복음이 예수님에 관해 알려 주는 세 번째 보도는 그분이 세상의 죄를 속량하셨다는 것이다. 태초에 선조들은 하느님께 불순종했고, 그 후 모든 인간은 그 죄를 반복하여 짓게 되었다. 말하자면 각자가 짓는 죄는 하느님 창조의 아름다움을 항상 수포로 돌아가게 하여, 자기 마음을 혼란케 하며 정신을 흐리게 하는 어둠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당신의 것으로 짊어지고 속량하셨다.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만 속량하신 것이 아니라, 혼란스럽고 악에 물든 세상에서 매 순간 호흡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분의 삶 전체가 하나의 속량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분의 오심을 받아들였더라면, 모든 것은 구원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고 요한 복음사가는 전한다.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첫 번째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마태 16,21).

 

예수님의 마지막 저녁

 

이렇게 해서 결국 마지막 날 저녁이 찾아왔다. 그분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는 저녁이었다. 제자들과 함께 있던 그분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제자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 방 안의 분위기는 어떠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마음을 열고 이 구절을 읽는다면 당혹스러울 것이다. 제자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을 보면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제자들이 지금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는 것은 그들의 능력을 넘어선 문제였던 것 같다. 그들이 잇달아 취한 행동을 보면 그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그들은 모두 도망쳐 버렸다. 분명히 그들이 예수님을 배신해서라기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일 것이다. 그들이 비겁해서가 아니라 그 사건의 의미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도망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자.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감싸는 깊은 고독을 느끼게 된다. 그분은 홀로 계셔서 마음이 지쳤다. 제자들 가운데 앉아 계시지만, 그분은 ‘변함없이 존재하시는 하느님’으로 계신다.1) 그러므로 그분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은 그때마다 거룩한 힘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 신비스럽지만 두려움을 주는 고독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세상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분은 고독에 갇히게 된다. 하느님께 속해 있지만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것을 고집하는 세상 안에 하느님이 고립되어 계신 것이다(요한 1,11 참조).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주실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을 유다인이라면 누구나 하던 저녁식사에서 주려 하신다. 이 만찬으로 우리의 생명이 유지되고 우리는 서로에게 속하는 친밀한 공동체가 되며, 신적인 것을 만나게 된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모든 만찬은 희생 제물과 연결되어 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만찬을 당신 주권 앞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맹세로 받아들이셨고, 이 만찬으로 당신 백성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셨다. 이런 이유로 공동체는 음식을 먹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때 모든 만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 희생 제물이 특별히 부각된다. 이 제물은 파스카의 희생 제물인 ‘어린 양’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 양의 피로 이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희생 제물로 어린 양을 바쳤다(탈출 12,5 참조).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 신비에 당신을 투영하신다. 다시 말해 그분은 내일 죽게 되지만 당신의 죽음으로 세상의 죄를 속량할 살아 계신 분이다. 그뿐 아니라 지상에서 그분의 삶 전체가 속량이었다. 그분의 삶은 십자가상의 죽음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분의 ‘살과 피’ 곧 그분의 거룩한 생명이 바로 희생 제물이며, 그분 자신이 제자들에게 양식이었다. 이를 마태오 복음사가는 다음과 같이 보도한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6-28).

 

이 만찬에서 일어난 일이 얼마나 엄청난지, 그래서 혹시라도 이 사건에 대해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건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자의식에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결국 그분을 믿고 경배할 수밖에 없게 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생명의 음식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 생각하실 수 있었다면, 당신이 생명과 죽음 너머에 있다는 것을 하느님처럼 아시지 않았겠는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당신을 내주신다면, 당신의 본질에는 어떤 혼란과 증오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심오하게 아실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힘 안에 살고 계시기에, 그분이 생명의 힘으로 하시는 행위는 모든 본성적 척도를 능가하는 내밀한 확실성에 이를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이것이 바로 마지막 만찬에서 이르는 맑고 투명한 의식, 더욱이 무한한 힘을 지닌 흠 없이 순수한 의식이다.

 

그 밤에 일어난 일은 단순히 스승이 제자들과 보내는 마지막 저녁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이처럼 순수한 의식에 이르게 하는 사건이다. 이렇게 스승은 죽음을 맞게 되지만, 죽음에서 일어나 부활하신다. 그리고 50일이 지난 뒤에는 성령께서 내려오시어 하느님의 영이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다. 그 영은 거룩한 역사를 이끌어 가며, 고독과 당혹스러움 속에서 일어난 마지막 저녁의 그 사건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신앙인을 이끌어 줄 것이다.

 

1) 이는 탈출 3,14에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 이름으로 계시하신 ‘야훼’ 곧 “나는 있는 나다”를 가리킨다. 예수님도 하느님의 신성을 지니셨음을 의미하는 말이다(역자 주).

 

[성서와 함께, 2013년 8월호(통권 449호)]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

(3)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뜻은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 / 김형수 신부 옮김

 

 

요한 13장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저녁에 행하신 신비스러운 행위를 보도하고 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하신,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요한 13,12)는 질문은 우리에게도 해당한다. ‘예수님께서 한 일을 우리도 깨닫는가?’

 

신앙인들은 서로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 우선 생각할 수 있는 대답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어 그들이 제자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가르치시려 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서로 돕는 존재이므로 제자들도 서로 도와주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가르침이 당시에 어떤 상황과 연관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에 저녁 식사에 초대된 사람은 식사하러 가기 전에 몸을 씻고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하지만 그는 맨발에 샌들을 신고 갔기 때문에, 나귀를 탈 수 없을 때는 가는 도중에 발이 금방 더러워지고 말았다. 이렇게 더러워진 발로 초대받은 곳에 도착하면, 오늘날처럼 식탁에 앉는 것이 아니라 비스듬히 누워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깨끗하지 못한 발이 드러나 그만큼 품위가 손상되었다. 그래서 초대한 집의 종이 문 앞에서, 입장하는 손님들의 발을 씻어 주었다. 하지만 제자들의 공동체에는 그런 봉사를 하는 이가 없었다. 그들 중 한 명이 그 일을 해야 했는데, 제자 중에 아무도 그 일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신앙인들이 어떤 태도로 서로 대해야 하는지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 당신이 나서서 발을 씻어 주는 일을 수행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은 예수님께서 직접 세족례를 하신 이유로 충분하지 않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설명이 예수님의 본래 의도가 아니라고 즉시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이런 실천적 삶의 지혜를 주시려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이 아니다.

 

제자들은 다른 이들을 섬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본래 의도하셨던 의미를 밝히기 위해 복음서 안으로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보자. 추측건대 예수님의 제자 무리에서, 누가 다른 이보다 스승에게 더 가까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한 번뿐 아니라 여러 번 수면 위로 떠올랐던 것 같다. 이는 ‘하느님 나라’라는 말에서 표현된, 다가오는 새로운 질서에서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 상황을 마태오 복음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마태 20,20-21).

 

그리고 루카 복음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사도들 가운데에서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는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4-27).

 

두 복음의 내용으로 볼 때, 요한 복음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그분의 행동은 제자들이 스스로를 높다고 여기지 않아야 하며, 어떤 존경도 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다른 이들을 섬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일 것이다. 이 겸손에 대한 가르침이 전면에 부각되지는 않지만, 그 가치를 보존하고 있다. 스승이 보여 준 모범이 제자들에게 항상 남아 있게 하려고 그분은 모든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종이기를 자청하시어 당신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표현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앞선 설명보다 심화된 이 표현은 아직 예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의미에 도달하지 못한 것 같다.

 

발 씻김은 신비 예식이다

 

그렇다면 이제 세 번째 가능성을 살펴보자. 우선 이 사건에 대해 오랫동안 숙고하고 본문을 반복하여 읽는다면, 불현듯 분명해지는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신비 예식’이다. 발 씻김 사건의 전체 과정은 앞서 본 것처럼 단순히 윤리적 가르침을 각인시킬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어떤 신비를 계시한다. ‘이 사건의 내용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이 신비의 답이 있다.

 

사도 바오로가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는, 이 행위에 대한 주석처럼 예수님에 대한 인상을 표현하는 본문이 등장한다. 이 구절은 매우 의미심장하여 이 본문이 원래 그 사건을 향해 쓰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리 2,5-9).

 

[성서와 함께, 2013년 9월호(통권 450호)]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

(4) 참된 겸손이란 무엇인가?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 / 김형수 신부 옮김

 

 

바오로는 요한과 달리 비범한 능력으로 필리 2,5-9을 쓰면서 ‘하느님의 마음’에 침투한다. 이 대목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말씀은 영원에서부터 아버지 곁에 계셨으며, 하느님의 모습으로, 곧 영원한 통치자와 동등한 아들로 계셨다. 그분은 존재하는 것을 ‘강도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셨다.’”

 

우리는 자기 소유를 잃어버릴까 봐 매 순간 두려워하는 반면, 그분께서는 우리처럼 존재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보지 않으셨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당신께 속하기 때문이다. 강도가 그분께 속한 것을 부당하게 가지려 했다면, 그분께서는 온 힘을 다해 그것을 지키려 하셨을 것이다. 한마디로 그분께서는 그것을 정당하게 가지셨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셨다.

 

그분께서는 이제껏 들어 본 적이 없는 일을 하셨다. 본래 지닌 주인의 신분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종의 신분을 취하고 종이 하는 봉사를 하셨다. 그러자 엄청난 변혁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리 2,9).

 

무엇이 진정한 겸손인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며 말씀하시려는 것은 무엇인가? 겸손이다. 이 겸손은 우리가 결코 생각지 못하는 곳에 있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 있는 겸손’이다.

 

겸손을 말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그것을 말하려면 몰이해와 저항의 벽을 통과해야 하는데, 어느 시대든 우리는 이 장벽과 부딪힌다. 니체는 이 장벽을 통과하지 못해 진정으로 저항하고 분노하며 많은 이에게 겸손에 대해 말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겸손에 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겸손은 빈약하여 덕을 행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이들, 불리한 자들, 노예들의 태도이다. 반면에 진정한 인간 존재는 의기양양하다. 니체에 의하면 진정한 귀족은 누구에게도 허리를 굽히지 않는 주인의 신분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이러한 가치관을 변질시키고, 삶을 빈곤함에서 규정한다고 보았다.

 

실제로 니체가 말한 것처럼 느끼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겸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교의 현실에서 겸손이 부당하게 왜곡되어 서술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보지 못한다면, 니체가 옳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겸손인가? 그것은 힘의 덕이다. 강한 사람만이 참으로 겸손할 수 있다. 진정 강한 사람은 강요받지 않고 자유롭게 섬기며 자기보다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이 앞에서 고개를 숙여 자유로워진다. 하지만 이러한 겸손은 결코 인간에게서 생겨나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생겨난다. 맨 처음 겸손을 보이신 분은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너무 크셔서 그 어떤 힘도 그분에게 해를 입힐 수 없기에 겸손하실 수 있다. 다시 말해 위대함은 하느님의 본질이지만, 그분께서는 그 위대함을 겸손으로 격하시키실 수 있다.

 

하느님의 창조에서 드러나는 겸손

 

여기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자. 하느님께서는 언제 처음으로 겸손을 드러내셨을까? 그분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다. 흔히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 행위에서 그분의 권능과 자비를 본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인간이 파악할 수 없을 만큼 크고 풍부하며 놀랍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위대함을 언제나 드높일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유한하게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당신보다 더 작은 것을 창조하시는 일이 과연 그분에게 가치 있는지 물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확실히 어리석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어리석은 짓은 현명한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데 도움을 준다. 하느님의 창조물은 당연히 유한한 것뿐이다. 무한한 것을 창조하면 창조주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분께서는 왜 유한한 것을 창조하셨을까?

 

이 물음을 살펴보기 위해 인간 존재로 돌아와 보자. 우리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분께서 우리를 현실에 존재하게 하셨다는 것을 당연한 듯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고, 그래서 그분께 진정 감사드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확신한다면, 우리 ‘현존재(現存在)(자기를 인간으로 이해하고 있는 주체로서의 존재자)는 그분께서 우리를 당신을 닮은 본래 모습으로 있게 하신 것과 다르지 않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인간의 ‘현존재’가 얼핏 ‘하느님과 이 세상’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좀 더 고심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과 세상’에서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숙고해 보면, 우리 현존재에게 하느님은 여전히 이 세상의 근거로 남아 계신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첫 번째로 창조된 존재라고 우쭐대면서도 하느님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문제’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을 현존재라고 표현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정식에 불과하다. 이렇게 본다면, 하느님이야말로 아무런 문제없이 참으로 자명하신 분이며, 오히려 인간이 문제투성이다.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모든 것’이 ‘거기’ 자기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충분히’ 존재하시기에 모든 것이 존재한다. 그분께서 존재하시기에 무엇도 ‘부족하지’ 않다. 그렇다면 그분께서는 당신의 지배 아래에 있는 것을 왜 창조하셨을까? 그분께서 선하시기에 보잘것없는 것이 존재하도록 의도하셨다는 교의적 대답에 너무 성급하게 다다르지 말자. 자칫하면 우리가 이 대답의 의미를 편협하게 받아들여 존재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현존재를 위해 있는 것처럼 왜곡하여 이해할 수 있다.

 

그분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은, “거기 있어라” 하고 말씀하시어 모든 것을 당신 밖으로 내놓아 단순히 있게 하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이 창조하여 있게 한 모든 것 안에 당신의 사유, 곧 당신의 힘을 불어 넣으셨다는 점이 중요하다. 창조 작업을 완성하신 후에 당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굽어보시고 “참 좋았다”(창세 1,31) 하고 분명히 말씀하시듯, 그분께서는 유한한 것도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증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이러실 수 있을까?

 

[성서와 함께, 2013년 10월호(통권 451호)]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

(5) 세족례, 겸손하신 하느님의 마음으로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 / 김형수 신부 옮김

 

 

세족례를 보도하는 요한 복음의 구절에서 ‘하느님의 겸손’은 신비로 가득차 있다. 아직 ‘하느님의 겸손’이 드러나지 않아 어둠에 묻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심으로 물으신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요한 13,12) 그런데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밖에 없다. “아니요, 주님. 저희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신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마음을 지니셨는지를 보여 준다. 하느님은 위대하시고, 한없이 거룩한 생명으로 가득 차 계시며, 그토록 강한 주님으로 존재하는 분이시기에, 당신 영예 중 어떤 것도 손상하지 않은 채 유한한 세상을 창조하실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좋은 상태로 있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물을 수 있다. 그 대답은 ‘하느님께서 계시다’이다.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이 사실만 중요하며,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이 있기를 원하셨다. 그것은 세상이 그분에게 중요하며, 언젠가 반드시 깊이 연관되어야 한다는 것(그리스도를 생각할 때)을 의미한다. 그분에게는 세상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그분은 유한한 존재를 창조하신 뒤, 그 존재가 유한한 자유를 갖도록 원하셨다. 그러나 이 자유는 당신의 자유처럼 절대적 거룩함으로 보증되지 않고 악에 노출되어 있다. 악에 처한 인간이 자신의 자유로 무엇을 했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행하신 창조에 아주 가까이 계신다. 심지어 그분은 악하게 될 가능성을 지닌 사람이 되시어 당신 피조물의 죄를 짊어지실 정도로 가까이 계신다. 그분은 볼품없이 떠돌아다니는 순회 설교자의 모습으로, 알려지지 않은 아주 작은 땅에 불과한 팔레스티나에 오셨다.

 

위대하실 뿐 아니라 우리 이성의 능력에 기반을 둔 모든 척도를 깨부수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다. 이 하느님을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행위를 통해 일어나는 사건에서 하느님을 이해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사건의 배후에 계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엄청난 ‘가치의 전도(顚倒)’가 일어난다. 이는 의기양양한 우리의 자부심이 초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만 가졌다고 자부하는 권력과 독창성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이 하느님의 눈앞에서는 초라하기 짝이 없게 된다. 그분은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희는 이 일을 깨닫겠느냐?”

 

우리는 이 물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교가 진정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쓰는 말 가운데 ‘겸손’에 해당하는 말이 없는 듯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지니신 마음가짐’이라는 말의 참된 의미가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드러나야 한다. 그다음에야 이 말의 참뜻이 구체화될 수 있는 말로 드러날 것이다. 이 말은 보잘것없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리스어로 ‘겸손한 마음가짐’, 독일어로 ‘기꺼이 도와주려는 마음’을 의미한다. 이 마음을 믿지 않을 때, 우리는 이 마음을 볼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이 사실을 숙고할 때에야 하느님께서 얼마나 모든 것을 심사숙고하여 헤아리시는지 분명해진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헤아리시는 마음에 달려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생각할 때, 대개 모든 위대함을 넘어서 있으며 영광 속에서 옥좌에 앉아 계신 분으로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그분도 당신에 대해 어떻게 말할지 강조하여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요한 13,13). 이는 그분이 영원하신 성부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마태 28,18)은 분으로, 무엇이든 잘 알고 계시며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으신다. 따라서 그분 안에는 나약함도 두려움도 없다. 반면 ‘주님’으로 불리는 하느님 안에는 우리가 ‘겸손’이라는 말 말고 다른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하느님의 마음에 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하느님 마음의 비밀은 겸손

 

하느님의 마음 안에 있는 겸손은 신비로 가득 찬 예수님의 행위에서 드러나며, “너는 이것을 이해하느냐?” 또는 “너는 교만에 가득 차 있지 않느냐?”라고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육체의 교만, 정신의 교만, 권력의 교만에 빠져 있는지 묻는 것이다. 그런 교만에 빠져 있다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에게 오신 분이 맨 처음에 “회개하라”, 곧 “다르게 생각하는 법을 배우라”고 호소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우리도 지닐 수 있다는 점을 ‘사려 깊게 숙고하라’는 뜻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 안에 무성하게 자란 덤불에 다가가서, 불손한 것과 왜곡된 것과 초라한 것을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한다. 떡 하니 버티고 서 있지만 사실 거짓으로 꾸며진 오만함을 치워 버려야 한다. 이는 결국 겸손이라 불리는 진리를 배우기 시작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당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신 그 마음과 같은 마음을 지니라’(필리 2,5 참조)고 바오로 사도가 촉구했을 때 의미한, 바로 그 겸손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강하게 이끌어 주신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1월호(통권 452호)]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

(6) 포도나무의 비유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 / 김형수 신부 옮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포도나무의 비유는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관계를 드러내 보인다.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며 그것을 꾸준히 심화시키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며 그 의미를 이해했다. 그리하여 그분은 제자들의 정신적 생명의 인도자로 그들 곁에 계신다. 이 해석은 분명히 옳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일까? 비유에 담긴 호소력에서 이 비유가 더 깊은 의미를 품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성경의 어떤 구절도 그 구절만으로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이 위치한 전체 맥락에서 의미가 어떻게 확장되는지 봐야 한다. 요한이 첫째 서간에서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1요한 2,5)이라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명을 행한다는 뜻이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1요한 2,5)라고 말한 것은, 우리가 그분에 대해 생각하고 그분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는 의미뿐 아니라,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도 의미한다. 나아가 거기에 덧붙여 다른 것도 의미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1요한 4,12)는 개념상 지속적 신뢰나 심리적 영향을 의미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 실제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바오로도 언급한 바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2코린 5,17). 이는 하느님의 정신이 그 사람에게서 활동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일어나는 것은 어떤 생각이나 가르침, 마음뿐 아니라 실제이기도 하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이 말씀은 그분의 힘에 사로잡혀, 그 힘에 의해 실제로 새롭게 변화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이제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 저녁에 만찬을 거행하셨고, 카파르나움에서 그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그분은 만찬을 거행하시며 믿는 이들에게 음식이라는 신비한 형상으로 당신을 내어 주신다. 그분은 음식 안에 살아 계시며, 음식을 통해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신다.

 

전체적 면에서 살필 때, 인간은 밖에서부터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자기 존재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면에서부터 밖을 향해 자기 존재가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여러 종류의 내면성이 있다. 육체의 성장은 육체 기관의 내면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감정은 심리적 내면성에 따라 움직인다. 그 안에 사유하게 하는, 진리를 경험케 하는 정신적 내면성이 있고, 윤리적 결정을 단행하는 인격의 내면성도 있다.

 

나아가 바오로가 말하는 것처럼, 더 깊은 내면의 영역 곧 영적 또는 성령의 영역이 있다. 그곳이 그리스도께서 믿는 이들 안에 살아 계신 영역이다. 이 영역은 인간의 본성에서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세례와 믿음을 통해 새로운 탄생의 신비로 이 영역을 만드셨다. 그분 스스로 인간의 이 영역 안에 들어오시며, 심리학에서 말하는 것보다 더 깊이 그 사람의 내면이 되신다. 만일 신앙과 신뢰가 사라진다면 이러한 내면성도 사라지며, 그 결과 어떤 생명의 영역을 상실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 된다.

 

이러한 인간의 내면성에서 포도나무의 비유가 드러나며, 성찬의 복음이 말하는 의미가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 안에 살아계신다는 의미이다. 우선 그분은 어디에나 계시며 모든 것을 꿰뚫어 들어가시듯 내 안으로 꿰뚫고 들어오시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아가 그분은 나를 창조하셨다. 그러나 이 ‘하셨다’는 과거형은 우리가 봤을 때 그렇다. 본래 그분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여전히 창조하고 계신다. 말하자면 그분의 손길이 나를 무(無)에서 빼내어 붙들고 계신 것이다. 만일 내가 내 존재의 한계 끝에 도달한다면, 그분의 손길을 느낄 것이다. 그분은 나에게 창조적으로 부르는 호칭인 ‘너’라고 말씀하시어, 있는 그대로 ‘나’로서의 나를 인격적 존재가 되도록 붙들고 계신다. 나아가 그분은 나를 사랑하시며, 당신의 은총으로써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다. 세례와 신앙으로 그분은 내 안에 태어나셨고 나도 그분 안에 태어났다.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신비

 

비유는 이러한 내면적 신비가 개별 인간, 특히 훌륭한 신앙인에게 열려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며 통치하시는 하느님의 깊은 뜻이 모든 사람에게 침투하는 것이다. 포도나무 전체에서 가지가 자라듯, 하느님의 깊은 뜻에서 신앙인 각자의 생명이 성장한다. 바오로의 비유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신앙인을 통해 움직이시며, 그들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에 뻗어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신비에 가득 찬 단일성을 형성한다. 이는 한 몸이 지닌 단일성과 동일하다. 이 단일성에 많은 지체가 속하지만 그 지체들은 개별적이다. 거룩한 포도나무,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몸의 단일성은 교회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깊은 내면을 지배하신다. 포도나무에서 덩굴이 자라 나오고 몸에서 지체가 자라 나오듯, 교회에서 신앙인 각자가 자라게 된다.

 

믿는 이들은 그들이 받은 신비와 더욱 깊이 결합되어야 한다. 매일 바치는 주님의 기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주일에 교회에 가지만 그 외에는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이러한 깊이를 의식하고 거기에 머물러야 한다. 그 내면성은 사랑으로 보호받지 못하면 메말라 버린다. 따라서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 살아 있는 것이 메마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2월호(통권 453호)]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

(7) 우리가 받은 그리스도의 평화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 / 김형수 신부 옮김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주권으로, 동시에 깊은 내면성으로 말씀하신다. 이제 그분에게서 몇 가지 점을 이해해 보자.

 

‘평화’는 무엇인가?

 

평화의 의미는 평화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 물어봄으로써 더 잘 알 수 있다. 악이 선보다 더 눈에 띄고, 파괴되는 것은 건설되는 것보다 더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화가 아닌 것은 무엇인가?

 

인간 각자는 자기만의 고유한 본질을 지니며, 이 본질로부터 우리 현존재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이 성장한다. 각자는 자기 삶을 형성하며 자기 일을 하고 자기의 업적을 창조한다. 그렇지만 관건은 나 개인이 아니라 인간 현존재 전체에 대한 이해이다. 이렇게 무수히 다양한 각자의 행위에서 전체가 성장해야 한다. 하지만 각자는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가’라고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이 질문에 대해 그때마다 ‘나’를 향해서는 ‘그렇다’고 응답하는 반면, 타인을 향해서는 ‘아니요’라고 대답하곤 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날 때, 그것도 사리분별과 습관을 통해 고유한 ‘삶의 방식’이 형성되기 전에 처음 만날 때, 그가 다른 이에게 보이는 최초의 감정은 도대체 무엇일까?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정되는, 초세기부터 유래한 용어가 있다. 바로 ‘타인’이다. 인간을 더 정확하게 알아볼수록, 아니 오히려 자신을 더 깊이 알게 될수록 타인이라는 말은 우리를 더욱 압박한다. 그 결과 ‘타인’은 우리에게 낯선 자, 원수, 악인으로 다가온다.

 

비록 우리가 악을 행할 가능성을 지니긴 했지만, 타인에 대한 감정을 고칠 때 비로소 평화를 향한 길이 열린다. 예수님께서는 삶의 보편된 지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 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이 말씀은 엄밀히 보자면 혁명의 시발점이다. “타인도 ‘나’이고 세계의 중심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식하라. 그리고 너의 마음, 너의 시야, 너의 태도에 타인이 등장할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하라. 다시 말해 그 사람 안에서 ‘형제’를 보라.”

 

또 그분께서는 신비로운 진리를 알려 주셨다. 그것은 우리가 타인에게 행하는 모든 것이 그분께 행하는 것이 된다는 내용이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를 이끄신다(마태 25,35 이하 참조). 이제 ‘타인은 적이다’라는 본성적인 말은 ‘타인이 바로 나다!’라는 말로 변화한다. 우리가 이 문장을 의미 없이 죽은 문자로만 남겨두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도록 만들려면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듯이 타인 안에도 계신다. 그럴 때 모든 것이 변화한다.” 이로써 우리가 ‘본성’이라고 부르는, 이기심에 반하는 질서는 사랑의 질서가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이다.

 

참된 평화는 그리스도에게서 온다

 

인간은 스스로 평화롭지 못하다. 인간이 마음속에 품은 여러 가지 욕망은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참되게 펼치는 것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순이다. 따라서 욕망들은 서로 대치하며 마주하고 있다. 인간이 구체적 일을 하는 어떤 시점에서 실제 원하는 것은, 자기 안의 나태함으로 인해 무기력해지곤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고유한 자아 안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혼란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나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깊이 알고 계신다. 우리가 자신에게 마음을 쓰는 것보다 더 마음을 쓰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사시며, 당신의 거룩한 의지와 당신의 창조력으로 우리의 선한 자아를 치유하여 하나가 되게 하고 평화를 이룩하신다.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7). 이 말씀의 배후에는 사도 바오로의 깊은 체험이 있다. 바오로는 갓 태어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파괴하기 위해 광포한 모습으로 무절제하게 신자들을 쫓아갔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주님에 의해서 바닥에 내던져졌다. 그러나 곧 주님에 의해 새 인간으로 태어났다.

 

집요하게 의로움에 대한 욕망을 좇던 그는 자기 힘으로 욕망의 혼란에서 벗어나는 데 실패했다. 그가 저지른 폭력이 욕망을 고조시키지만 결국 폭력으로 인해 욕망이 추구하는 것을 망쳐 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로마 6장에서 밝히듯, 그는 자신을 통해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으며, 구원은 은총의 신비를 통해서야 비로소 주어진다는 것을 안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체험한다.

 

그분이 누구신지 우리는 올바로 말할 수 없다. 체험해야만 그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하느님께서는 이런 체험을 원하는 이에게 당신을 선사하신다. 다시 말해 그분께서 사람의 가장 내적인 마음을 건드리실 때, 그는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분의 모든 건드림은 비록 그 건드림이 미약하다 하더라도 그분 자신을 내주시는 행위이다. 급기야 하느님은 ‘하나이며 모든 것’이시기에, 그분을 소유하는 이는 모든 것을 소유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께 당신 자신을 베풀어 달라고 청하려 한다. 그러면서 평화를 위해 서로 노력한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듯 자신과 관계를 맺는데, 이 관계는 깊이 상응한다. 우리가 본래의 자아, 시간성이 아니라 영원성의 관계에서 규정된 자아를 이해하게 된다면 말이다. 이렇게 온갖 차이와 대립이 있지만 나는 형제자매와 연대한다. 그래서 나에게 그들은 더 이상 낯설지도 않고 적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이로써 내가 그들에게 행하는 것이 내게서 성취된다. 내가 타인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거나 평화를 이룩하는 것은 바로 나에게 적대감을 가지게 하거나 평화를 이룩하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성서와 함께, 2014년 1월호(통권 454호)]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

(8) 유다의 배반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 / 김형수 신부 옮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 보게 하였다.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요한 13,21-30).

 

이 복음 구절을 읽은 후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의문 중 하나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오랫동안 그분과 함께하여 그분의 인격에서 나오는 빛의 광채를 발견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으며, 그분의 신적 권능이 실현되는 것을 목격한 제자들 중 하나가 스승을 적에게 팔아넘기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어쩌면 스승은 적들이 자신을 없애 버리려 한다는 것을 그 제자에게서 미리 알았어야 하지 않는가? 나아가 ‘그 제자 외에도 모든 이가 그분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의문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당연히 ‘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표현될 수 있는 개인의 깊은 공감 의식이 깔려 있다.

 

제자들의 기대와 달랐던 메시아의 참모습

 

제자들이 공생활을 통틀어 예수님에게 가진 기대를 투영하는 상(像)은 구약성경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 말씀에 따르면 그분은 특히 로마인을 의미하는 적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어 예루살렘에 왕좌를 세우고 다윗 임금처럼 통치해야 했다. 그러나 제자들이 바라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분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나라’가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말하는 ‘하느님의 왕국’과 다른 의미를 지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분은 정치적이거나 전의에 불타는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것, 하느님의 적들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평화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 평화는 자신을 버리는 것과 사랑에서 나온다.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 18,1)라는 질문에서 우리는 제자들의 생각과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예컨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 20,21)라고 말한 구절은, 큰 위력으로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매우 강렬한 희망으로 제자들의 공동체가 동요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나아가 우리는 돈을 맡고 있던 유다가 부정직하게 돈을 착복한(요한 12,6 참조) 사실을 알기 때문에, 유다가 특별한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보면 제자들 모두 그분을 배신한 셈이다. 위험이 닥친 순간에는 모든 것이 불안정해지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러한 점을 꾸밈없는 어투로 말한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르 14,50). 그러나 베드로는 마음의 동요를 드러낸다.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마르 14,29). 베드로의 이 맹세는 다른 맹세를 통해 예수님을 부인하는 말로 바뀐다.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마르 14,71). 이것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으며, 배신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답이다.

 

거기에 사도들이 경험한 인간적 나약함까지 더해진다. 베드로는 격렬한 성품과 무분별함을 지니고 있었다. 토마스는 까칠하고 회의적이었으며, 야고보와 요한은 잘 참지 못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당시에 일어난 사건으로 돌아간다면, 제자들은 자기 성격 때문에 아주 쉽게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갈’(마태 26,31 참조)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2).

 

신앙의 밤에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주님에 대한 신뢰뿐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도 주님을 배신할 위험에 처해 있지 않은가? 사도들이 한 일은 우리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바로 공공연하게 만연한 무신론이 몇 가지 사항을 말해 준다. 이 시대는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믿지 않는 이들이 쓴 휘황찬란한 미래에 대한 책들이 출간되고 있다. 한 공동체에서 온갖 회의주의와 냉소주의의 관점으로 자신의 신앙을 매우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나올 수 있다. 거대한 정치 권력과 연결되어 신을 부정할 뿐 아니라 증오하는 일이 확산된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는가? 비록 인간 정신의 역사가 신앙에 등을 돌리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우리 각자는 신앙 안에 신실하게 머무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느님의 은총은 분명히 내 안에 있다. 삶의 여정에서 나는 신앙의 깊이와 따스함을 느끼지만, 신앙이 나에게 어떤 것도 말해 주지 않는 시기도 닥쳐온다. 신앙이 나를 어떻게 이끄는지 느끼는 시기에 오히려 신앙은 나를 압박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신앙이고 뭐고 간에 나를 가만 좀 내버려 둬!’라고 말한다면, 이는 큰 유혹임에 틀림없다. 신앙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모습과 신앙의 확고한 신뢰가 축 쳐진 어깨처럼 맥없어져 버릴 때, 제멋대로 하려는 위험을 느낄 때 우리는 다음을 상기해야 한다. ‘조심해! 너는 지금 성경에서처럼 제자들이 있던 그때(“때는 밤이었다”), 그 상황에 있는 거야.’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우리 내면이 ‘밤’처럼 어두워질 때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오직 한 가지,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확신과 주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이다.

 

[성서와 함께, 2014년 2월호(통권 455호)]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

(마지막 회) 하느님을 증오하다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 / 김형수 신부 옮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요한 15,18).

 

마지막 날 저녁에 예수님께서는 “어둠이 권세를 떨칠”(루카 22,53) 다가오는 ‘밤’을 미리 보셨고, 어떤 두려움이 당신을 기다리는지 아셨다. 그런데 구원을 가져오시는 분이 어떻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는가? 인간이 자신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증오할 수 있는가?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을 증오할 수 있을까?

 

우리 마음에는 본래 자기 존재를 지배하는 근원적 법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을 향하도록 우리를 창조하신 주님,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 쉬기까지 어쩔 줄 몰라 하나이다”(《고백록》 1권 1장). 그러나 같은 마음에서 모순도 생긴다. 인간은 창조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려 한다. 자신을 하느님의 손길에서 나온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자신의 존재, 영혼, 인격을 하느님에게서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말도 못하는 자연의 원초적 근원에서 나와 자랐다고, 동물의 생명에서 출현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인간의 고집은 거룩한 근원의 법을 질식시킬 정도로 완고하며 돌처럼 굳어 있다. 결국 하느님을 증오하기에 이른다.

 

하느님께서 선하신 것은 분명하다. 깊이 숙고한다면 ‘진리’, ‘정의’, ‘사랑’, ‘순수’ 같은 말들이 근본적으로 그분을 가리키는 이름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말들은 사유의 결정적 힘을 통해 더없이 풍부하고 완전하며, 단순한 그분의 충만한 가치를 여러 윤리적 가치로 투영한다. 태양빛이 프리즘을 통해 다양한 색깔의 스펙트럼으로 분산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은 본래 그분의 영광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이 영광 안에서 모든 가치의 총체가 영원한 실재로 존재한다.

 

한 사람을 알고 있다고 하자. 누군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본다면, 그 사람을 특징짓는 답을 떠올릴 수 있다. 엄격하다든지 온화하다든지, 정의롭다든지 질투심이 많다든지, 의심이 많다든지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졌다든지…. 그러나 우리는 그에 대해 이런 식으로 규정하는 것을 넘어 단순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감지한다. 그것은 ‘그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존재가 보여 주는 특징은 어떤 개념과도 상응하지 않는다. 이 고유함이 하느님 안에도 있는데, 바로 거룩함이다. 거룩함은 우리 마음을 궁극적 경외와 고요로 데려가며, 이 거룩함에 의해 건드려지는 곳에 하느님께서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내밀한 마음에서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흔적을 감지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하는가? 오히려 그분을 생각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와 반대로 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니체가 “신은 나에게 맛이 느껴지게 다가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유럽인은 세상을 가득 채운 무신론을 생각해 냈다. 하느님을 거역하려는 방자한 의지가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하느님을 정말 증오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분은 박해받을 수 있을 뿐아니라, 사람들이 그분과 그분의 것을 세상에서 몰아내려고 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을 증언하시는 분으로, 곧 하느님의 현현으로 세상에 계신다. 인간은 그 증언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인간은 사랑할 수도 있지만 차가운 마음을 지닐 수도 있으며, 나아가 증오할 수도 있다. 누구나 적어도 한 번쯤은 증오에 이르기 전에 나타나는 마음의 징후를 느꼈을 것이다. 그분을 드러내 놓고 지지해야 할 때 당황하는 것이 이 징후에 속한다. 나아가 이 징후에는 불편한 심기와 분노와 저항 같은 감정도 있다. 이 감정은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의 모습이나 말씀 앞에서도 슬며시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이 감정이 언제 증오로 변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의 반이 이 증오로 넘쳐 흐르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려면

 

사도 바오로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겪은 것처럼,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는 특정한 체험을 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 체험을 통해 그분은 모든 것에 대한 척도로서 우리 의식 안으로 들어온다. 사랑은 활활 타오르는 불과 같기도 하지만, 침묵 가운데 진지함이 될 수도 있고, 평온한 상태에서 애쓰는 것일 수도 있다. 많은 이에게 사랑은 어떤 것을 드러내어 표명하고 싸우는 데서 표현된다. 다른 이들에게는 일상의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 표현된다. 그들은 여가를 즐기는 대신 일하고, 자신을 위해 돈을 수중에 지니는 대신 다른 이들을 돕는 데 쓰며, 유혹에 굴복하는 대신 저항한다. 이렇게 사랑하는 데는 사람수만큼 많은 방법이 있다. 증오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사랑은 그리스도가 항상 중심에 계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랑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자 척도라는 것, ‘그분이 허락하시기 때문에’ 늘 그렇게 사랑이라는 생명의 행위를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순식간에 일어나는 섬광이나 은은한 열기와 같은 엄청난 사랑의 체험을 선물로 받은 이는 그 선물에 대해 감사하고, 이를 잘 보존하여 결실을 풍성히 맺게 해야 한다. 반면에 그러한 체험을 하지 못한 이는 일상의 삶을 진지하게 영위해야 한다. 이는 그분에 대해 알고 숙고하고,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이해하려 하고, 고통을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보편적 의미를 지닌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 행위이다. 곧 모든 것은 바로 여기 내가 처한 상황에서 나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분은 내 안에서 어떤 것이 서서히 자라고 있다고 신뢰하도록 해 주신다. 그것은 고요하고 맑고 진지하며 벅찬 위로를 준다.

 

그분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느끼는 은총을 주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아니라 그분에게 달렸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그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4년 3월호(통권 456호)]

 


 

 

 

* 로마노 과르디니(1885-1968년) 신부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성장하고 활동한 신학자요 종교 철학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글은 그의 책 《Johanneische Botschaft》(Herder, 1966)의 일부를 김형수 신부가 옮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