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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2) -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8. 6. 22.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2)

갑오년 새해에는 흙을 가까이!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신학교 운동장에는 엄동설한에도 파란 잔디가 돋아 있다. 2014년 새해를 푸름으로 맞이하는 것은 눈으로 볼 때 상쾌한 일이지만, 그 파란 잔디는 사실 인조 잔디다. 작년 여름에 축구장을 건설하면서 인조 잔디가 과연 신학교에 적합한지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잔디 사이에 깔리는 폐타이어 가루 같은 발암 물질이 건강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하자, 업자들은 그것은 과거지사일 뿐 지금은 규소로 만든 소재를 사용하기에 인체에 해가 전혀 없다고 설명했다. 학생들이 굵은 마사토로 된 울퉁불퉁한 땅에서 축구를 하다 넘어지면 심하게 다치는 일이 생기므로, 인조 잔디를 깔아 학생들을 보호하고 운동장의 먼지 발생을 억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거친 토양이라도 학생들이 흙을 밟고 사는 것이 바람직하고, 흙먼지 또한 나쁠 것이 없다는 자연주의 논리가 힘을 잃었다. 그래서 신학교에 인조 잔디 축구장이 생겨났다.

 

과거에 ‘아스팔트 킨트’(아스팔트 거리에서 사는 아이)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된 적이 있다. 흙을 밟지 못하고 평생 아스팔트 위에서 살아야 하는 도시인의 처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인조 잔디 킨트’도 아스팔트 킨트의 연장선상으로 보인다.

 

흙에 대한 이야기는 창세 2,2에 처음 나온다. 이 흙(adamah) 가운데 부식토가 있다. 숲 속에 떨어지는 나뭇잎은 땅에 사는 벌레들(1㎡당 1000마리)과 모든 종류의 곤충과 기생충과 박테리아와 원생동물에 의해 분해되어 부식토가 된다. 부식토 1g에는 십억 마리 이상의 미생물이 살고 있다. 이 미생물이 없다면 나뭇잎이나 죽은 식물이 분해되지 않고 점점 쌓여 숲을 짓누르고 말 것이다. 부식토가 1cm 형성되는 시간은 환경에 따라 50년에서 400년이 걸린다.

 

현대 토양학은 입자 크기를 기준으로 흙을 모래(0.05-2mm), 미사(0.002-0.05mm), 점토(0.002mm 이하)로 구분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점토다. 흙이 점토 상태에서 수분을 머금어야, 뿌리를 통해 수분과 양분을 흡수하는 식물이 등장할 수 있게 된다.

 

창세 2,5의 “들풀 한 포기도 돋아나지 않았다”라는 말은 흙이 점토 상태에 이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땅에는 아직 들의 덤불이 하나도 없고, 들풀 한 포기 돋아나지 않았다. 여기서 들풀은 곡식을 의미할 것이다. 3,18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들의 풀을 먹으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들에서 농사를 지은 곡식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들풀 한 포기 나지 않은 이유는 흙을 일굴 사람이 없어서다. 덤불이 없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아직 비를 내리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조된 점은 흙을 일구는 데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라는 책을 쓰셨다. 교황은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에서 사람을 빚으셨다는 창세 2,7이 인간의 지위에 대한 겸손과 위로를 가르친다고 설명한다. 사람은 암흑의 세력으로 구성된 악마적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좋은 흙으로 빚으신 존재다. 모든 사람이 흙의 먼지에서 왔다는 사실은 인종주의나 엘리트주의와 같은 차별주의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인간의 근원적 평등을 일러 준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넬슨 만델라(1918-2013년)의 고난에 찬 삶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주의 철벽을 허문 평등사상의 위대한 증언이었다.

 

사람이 흙에서 왔다는 사실은 사람과 땅의 깊은 관계를 드러낸다. 사람이 진흙에서 빚어졌다는 것은 고대 문명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바빌론의 창조 설화는 마르둑이 티아맛이라는 신을 죽여 그 신의 살과 피를 진흙과 섞어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집트 신화에서도 신(숫양)이 도기용 가마에서 사람을 빚어 냈다고 말한다. 아프리카에서는 하부의 신 겔라(Guéla)가 그의 입에서 나온 진흙으로 사람을 창조했다고 한다. 여신 여와가 흙으로 사람을 빚어 낸다는 중국 신화도, 프로메테우스가 강물에 흙을 반죽해 사람을 만들었다는 그리스 신화도 사람의 기원을 흙과 관련시킨다.

 

집회 39,26은 사람이 사는 데 꼭 필요한 것 중에 철을 지적한다. 여기서 철은 철기구를 만드는 재료이기도 하지만, 철분은 요오드, 아연, 구리, 망간, 칼슘과 함께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다. 흙은 이러한 기본 요소를 사람에게 제공하고, 사람의 인분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비료가 된다.

 

사람과 동물의 공동 기반이 바로 흙과 삼림이다. 오늘날 생태계의 위기는 육지 면적의 20%에 해당하는 지역이 사막화된다는 사실에서 더욱 고조된다. 1억 5천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사막화로 인해 땅을 버리고 이주한다. 가장 피해가 큰 아프리카에서는 대륙의 73%가 황무지가 되었고, 중국에서 사막화된 지역의 넓이는 한반도의 20배가 넘는다.

 

토양의 유실과 사막화 문제는 인구 증가와 함께 식량 문제로 연결된다. 지금 세계 인구가 70억 명을 넘어섰고, 2050년에는 93억 명이 될 것이라 전망한다. 식량 자급을 위해서는 토양을 보존하고 삼림을 육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960년부터 1990년까지 열대우림의 20%가 벌목되고,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 삼림의 33%가 개간되어 사라졌다. 그 결과 공기를 정화하는 능력이 현저히 감소하고 부식토를 배양할 수 있는 조건이 열악해졌다.

 

갑오년 새해에는 흙을 가까이하고 싶다. 나무를 심고 가꾸며 정성껏 보살펴 주고 싶다. 한평생 흙 속에, 바람 속에 살다 가신 법정 스님의 ‘흙 가까이’라는 아름다운 시 몇 소절을 읽으며 흙을 가까이하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흙을 가까이 하라.

흙에서 생명의 싹이 움튼다.

흙을 가까이 하라.

나약하고 관념적인 도시의 사막에서 벗어날 수 있다.

흙을 가까이 해야

삶의 뿌리를 든든한 대지에 내릴 수 있다.

 

시멘트와 철근과 아스팔트에서는

생명이 움틀 수 없다.

비가 내리는 자연의 소리마저

도시는 거부한다.

그러나 흙은 비를, 그 소리를 받아들인다.

흙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인간의 마음은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정결해지고 평온해진다.

 

어디 그뿐인가

구두와 양말을 벗어 버리고

일구어 놓은 밭흙을 맨발로 접촉해 보라.

그리고 흙냄새를 맡아 보라.

그것은 순수한 생의 기쁨이 될 것이다.

 

(법정, ‘흙 가까이’ 중에서)

 

[성서와 함께, 2014년 1월호(통권 454호)]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에덴 동산과 제주도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2014년 청마(靑馬)의 해를 준비하기 위한 신학교 상주 신부들의 연수회가 지난해 12월 26일부터 29일까지 제주도에서 있었다. 공항에 늘어선 종려나무들은 늠름한 자태로 열병식을 하여 제주도를 찾은 육지 사람들을 반겨 주었다. 갈매기 떼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창밖으로 보이고, 정원에 종려나무가 늘어선 함덕 바닷가에 숙소를 마련한 우리에게 제주도는 영락없는 남국(南國)이었다. 눈 덮인 한라산의 위용과 300개가 넘는 오름, 거센 바람과 까맣게 그을린 돌과 씩씩한 해녀들이 있는 제주도는 육지에 사는 우리의 답답함을 씻어 줄 가까운 이국(異國)인 셈이었다. 제주도에 올 적마다 “우리나라에 제주도가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는데, 이번에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틀간 치열한 토론과 회의를 한 뒤 셋째 날 오전에 섭지코지 바닷가를 산책했다. 진눈깨비가 섞여 몰아치는 거친 바람 속에서 붉은 화산재로 만들어진 고운 흙을 밟으며 해안을 따라 걷는데, 문득 수면 위로 피어오른 해무의 기묘한 장관에 넋을 잃고 말았다. 바다를 가득 채운 해무의 선명하고 다양한 문양이 신비한 해상 왕국을 연출하는데, 휴대전화 카메라로는 도무지 잡히지 않아 그 영원한 찰나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깊이 새겼다. 이렇게 우리는 해무와 비바람과 붉은 흙속에 새겨진 제주도의 아름다움에 전율하며 그 평화로움에 젖었다.

 

산책을 마치고 일본인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민트 레스토랑에서 마신 화이트 와인의 풍미는 섭지코지와 현대 문명의 절묘한 조화였다. ‘그래, 여기까지.’ 인간이 자연을 상대로 벌일 수 있는 호사는 ‘여기까지’라고 여겨졌다. 그 이상의 파괴와 건설은 제주도의 자연을 망가뜨리고 제주도를 탐욕의 섬으로 전락시킬 것 같았다. 그러나 평화로운 자연을 사랑하는 우리의 소박한 바람이 개발과 경제 논리의 거대한 파고에 어찌 맞설 수 있겠는가! 더욱이 개발 논리가 안보와 만날 때 그보다 막강한 이데올로기가 어디 있겠는가!

 

오후에 찾아간 강정마을은 새로운 사태를 보여 주고 있었다. 강정마을은 1km에 걸쳐 펼쳐진 구럼비 바위와 함께 제주도의 가장 중요한 문화재 보호 구역이다. 이어도에 빨리 갈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강정마을을 해군기지로 선정하여 바위를 깨고 항공모함과 크루즈선이 정박할 수 있도록 거대한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밖에서 볼 수 없게 가림막으로 현장을 가린 채 공사가 한창이었고, 그 주변으로 현수막들만 외로운 주장을 토해 내고 있었다.

 

“4·3에서 인간이 학살을 당했다면 강정에서는 자연이 학살당한 것이다.” “강정아, 너는 비록 이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지만 너에게서 온 나라에 평화가 시작되리라!”(강우일 주교 강론에서) ‘바람이 분다’라는 시를 쓰기도 한 영화감독 조성봉은 “강정은 바람이다. 파괴에 맞선 생명의 바람이다. 전쟁에 맞선 평화의 바람이다. 권력과 자본에 맞선 역사의 바람이다. 우리 모두의 바람이기도 하다”라고 썼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을 새긴 현수막도 여러 개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자신의 안위만을 신경 쓰느라 폐쇄적인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멍들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원합니다.”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이 이어도와 그 주변의 해상 교역로, 수산 자원을 수호하기 위한 국가 안보 차원의 전략적 결정이라는 정부의 주장에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맞서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그곳에 해군기지가 들어서야만 동북아의 평화를 지킬 수 있는 것인지, 정치와 외교로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나는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사랑하고 끔직한 4·3 사건을 겪은 제주 사람들을 생각하며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한다. 물론 해군기지는 예정대로 건설될 것이다. 민간 차원의 반대와 염원이 그 공정(工程)을 가로막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제주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미사는 날마다 오전 11시에 바쳐진다. 문정현 신부님은 민주화 보상 기금으로 산 자그마한 땅에 평화 센터를 짓고 앞으로도 평화를 위해 가르치고 기도할 것이라고 한다.

 

‘제주의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기도문’은 “풍성한 바다로 저희를 축복해 주신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아름다운 오름과 돌과 숲으로 제주를 빚어 주신 하느님, 찬미받으소서!”라고 시작한다. 그리고 “주님, 이 제주가 세상에 참된 평화를 실현하는 낙원이 되게 하여 주소서!”라고 끝을 맺는다.

 

제주도를 평화의 낙원으로 만들고자 하는 기도문에는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향수가 들어 있다. 창세 2,8은 주 하느님께서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를 꾸미시어 당신께서 빚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고 말한다. 에덴 동산은 어느 곳이라고 지정할 수 있는 특정 장소라기보다 하느님의 은총이 지배하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생명과 평화가 만개한 곳이 에덴이요 인간의 죄로 그것을 잃어버린 상황이 실낙원이다. 에덴이 이상적인 까닭은 창세 1,29-30에 따라 하느님께서 온갖 나무를 자라게 하시고 탐스럽고 먹기 좋은 그 열매를 먹게 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따 먹지 못하게 하셨는데, 이 금령이 생명을 지키는 생명선이 된다.

 

에덴 동산 이야기는, 모든 것의 시작에 온전한 생명과 평화가 있었지만 불순종으로 그 생명과 평화를 잃어버린 상실의 신화로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의 창조는 이 실낙원에서 다시 시작된다.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는 ‘토후 보후(tohu-bohu)’의 상황(창세 1,2 참조)은 광야와 사막의 모습이기도 하다(예레 4,23; 이사 45,18 참조). 그러나 이사야서는 하느님께서 광야로 오시어(이사 40,3 참조) 광야가 과수원이 되고 숲으로 여겨질 것이라고 말한다(이사 32,15 참조).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짐승과 함께 지내시어 광야를 메시아의 평화가 이루어지는(이사 11,6 이하 참조) 복낙원으로 변화시키셨다(마르 1,13 참조). 하느님의 창조는 이처럼 실낙원을 복낙원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지속된다.

 

한국 현대사에서 4·3 사건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은 제주도가 실낙원이 되는 사건이다. 그러기에 ‘제주의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기도문’은 제주도를 다시 생명과 평화가 넘실대는 낙원으로 복원시켜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고 아울러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참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하여 저희가 물질적인 탐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주시고 자연을 무분별하게 훼손하지 않게 하여 주시며 인간들이 의지하는 군사력이 결코 이 땅의 평화를 지켜 주는 보증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성서와 함께, 2014년 2월호(통권 455호)]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불완전한 만남의 시작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입춘(2월 4일)과 더불어 청말 띠의 해가 본격적으로 봄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다. ‘말띠 여자는 드세다’는 속설처럼 띠의 동물과 사람의 운세를 연결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우리나라의 단군 신화에서 곰은 단군의 어머니이다. 시베리아의 북방 민족(한티족 · 에벤족 · 에벤키족)은 곰을 형제요 자매로 여기면서 신성시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동물과 인간의 연대성은 열두 동물의 띠 개념으로 여전히 우리 의식에 화석처럼 남아 있다.

 

사실 창세기도 동물을 인간의 짝으로 고려한 적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창세 2,2-25은 하느님, 인간, 동물(자연)의 상호 관계를 그린다. 여기에 생태신학의 밑그림이 담겨 있다. 생태신학의 세 가지 축은 하느님, 인간, 자연이다. 창세기 저자는 동물을 신성시한 토템 신화를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벗겨 낸다. 하느님은 모든 관계의 근원이요 시작이다. 하느님은 창조주로서 인간과 자연을 만나신다.

 

인간이 만나는 첫 번째 현실은 에덴 동산을 일구고 돌보는 노동이다. 하느님께서 흙에서 온갖 탐스러운 나무를 자라게 하시면 사람은 동산을 일구고 돌보는 일을 한다. 동산을 돌보는 원칙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동산의 나무 열매를 먹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인간이 먹어야 산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결핍을 의미한다. 이 결핍은 관계를 통해 채워진다. 사람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먹을거리로 생존한다. 자연은 인간에게 생명의 공급원이다. 그러나 그 공급을 선물로 허용하는 질서를 하느님께서 세우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창세 2,16). 생명은 먹을 것을 받아들이면서 꽃을 피운다. 결핍이 선물로 충족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두 번째 명령은 선물에 제한을 두는 내용을 담는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창세 2,17). 모든 것에서 따 먹을 수 있되 모든 것을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허용과 금기는 인간에게 결핍을 충족시키는 복의 기회요 한계에 대한 자각의 계기다. 선물이라는 복은 이 한계를 받아들이는 데서 지속되는데, 이것이 에덴 동산을 일구고 돌보는 방식이다.

 

하느님께서 불러 주신 ‘너’

 

인간의 자의식은 자신을 상대로 받아 주는 타인의 존재를 통해 생겨난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시고 처음으로 ‘너’라고 불러 주셨다. ‘너’라는 2인칭 단수 동사는 생명을 배려하고 양육하는 긍정적 명령과 금기의 명령 안에서 발설된다. 아담은 하느님의 말씀 앞에 서 있는 자신을 가장 원초적인 현실로 의식한다. 창세 2장이 제시하는 인간의 근원적 현실은 바로 하느님과 나의 관계이다. 하느님께서는 절대적 ‘나’로서 인간을 ‘너’로 불러 주신다. ‘나’라는 절대적 주체는 오로지 하느님이시다. 마르틴 부버가 발견한 나와 너의 인격적 관계의 근원은 하느님께서 아담을 ‘너’라고 불러 주신 그 원초적 만남에 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아담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담의 무반응과 무응답은 저마다 아담의 처지에서 하느님께 드려야 할 응답의 빈자리로 남아 있다.

 

동물은 인간의 협력자?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창세 2,18)고 말씀하셨다. ‘좋지 않음’의 이유는 바로 ‘홀로 있음’이요, 인간에게 관계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고립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흙으로 만든 온갖 생물을 인간에게 데려가셨다. 인간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대로 이름이 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언어 능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생명과 달리 인간에게만 주어진 하느님의 생명의 숨이 언어 능력을 드러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창세 2,7.19 참조). 인간은 생물에게 이름을 붙여 주어 그들과 부드러운 지배 관계를 맺는다. 부드러운 지배는 첫 번째 창조 이야기처럼(창세 1,29-30 참조) 두 번째 창조 이야기도 사람의 먹을거리로 식물이 주어진 조건(창세 2,16 참조)에서 비롯한다.

 

이 부드러운 지배는 생물의 이름을 불러 그 고유한 위치를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성립된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생명들에게서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했다(창세 2,20 참조). 언어를 갖지 못한 생명체와 소통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알맞은’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kenegdô는 ‘상대자로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어원으로 볼 때 neged는 ‘마주 대하다’를 뜻한다. 마주 대하여 상대를 인정하고 상대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관계를 의미한다. 인간은 동물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다. 그러나 동물이 인간을 그렇게 대하기란 어렵다.

 

하와는 아담의 협력자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깊은 잠에 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어 여자를 지으시고 여자를 사람에게 데려오셨다. 사람이 여자를 보고 난 반응이 놀랍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아담의 이 감격적 토로는 실로 성경에서 처음 나오는 ‘사랑 고백’이라 할만하다. 이어서 아담은 여자의 이름을 부른다. “남자에게서(’îš) 나왔으니 여자(’iššâ)라 불리리라”(창세 2,23). 아담은 하와를 통해 남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자각한다. 하와의 탄생은 아담과의 근원적 동질성과 성적 이질성을 통해 남자의 정체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아담의 고백은 하와의 응답 없는 독백으로 그치고 만다. 게다가 아담은 하와에게 2인칭 ‘너’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담은 상대자(kenegdô)로 창조된 하와를 너로 대하지 않은 것이다. 아담도 하와를 상대로 자신을 ‘나’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단수 1인칭 소유격을 사용하여 자신의 뼈와 살에서 나온 하와를 지칭할 뿐이다. 나아가 아담은 하와를 만드신 하느님의 업적도 언급하지 않는다. 자신에게서 비롯된 일부처럼 하와를 소개한다.

 

바로 여기에 관계의 불완전함이 존재한다. 갈빗대(tsēlā‘)는 한면(side)을 가리키는데, 아담은 자신의 한 면을 상실하는 대가로 자기 상대역을 만났으나, 하와는 여전히 그의 일부분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하와를 ‘너’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아담의 ‘나’라는 주체성도 성립되지 못한다.

 

아담을 너라고 불러 주신 하느님께서는 아담의 응답을 듣지 못했고, 동물의 이름을 불러 준 아담은 동물의 답을 듣지 못했으며, 하와를 너라고 부르지 않고 자신의 일부로 소개한 아담은 하와와 대화하지 못했다. 창조의 처음부터 관계의 불완전함이 존재한 것이다. 아마도 이는 아담과 하와가 장차 금단의 열매를 따먹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고, 앞으로 세상에 폭력이 들어오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다음 호에서는 이러한 소통의 부재가 낳은 결과를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4년 3월호(통권 456호)]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에덴의 동쪽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봄기운이 대지를 감돌아 하늘로 피어오른다. 낙산 마루의 나무들에 아기 손 같은 새순이 돋아난다. 창조의 신비가 축제처럼 도처에 번진다. 창조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요 은총이다. 세상에 온통 하느님의 사랑과 복이 현현한다. 이 은총의 꽃비에는 법칙이 존재한다. 하와와 아담의 이야기는 창조 질서의 법칙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간이 누리는 가장 원초적 복은 ‘먹는 일’과 ‘성적 결합’이다. 그런데 복에는 제한이 있다. 아담과 하와는 성적 결합으로 한 몸이 되었다고 한다. ‘한 몸’은 일치의 상태를 가리키면서도 구별이 없어진 혼융의 상태를 의미한다. 아담이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창세 2,23)이라고 외친 것처럼 하와를 자신의 일부로 환원하는 것이 성적 결합이다. 본래 한 몸이었는데 다시금 한 몸이 되는 것이 부부의 성적 결합인 셈이다.

 

기실 창조란 분리의 과정이 아니던가! 하느님께서는 꼴을 갖추지 못한 혼돈에서 빛과 어둠을 가르시고 궁창의 위와 아래를 가르셨다.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었다는 것은,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가 주장하는 ‘자웅동체설’의 성경 버전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너’라고 불러 주셨듯, 하와를 아담의 상대자(kenegdo)로 삼아 주셨다. 개체의 탄생은 자유의 출현과 상호 존중의 인격적 만남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성적 결합은 한 몸의 원초적 기억을 상기시킬 뿐 아니라 상대방을 내 안에 동화시키는 파괴의 특성도 지닌다. 그 중심에 남자가 있다. 하와는 이미 자신의 이름을 상실하고 아담의 아내로 불린다(창세 4,25 참조).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점은 부부의 결합에 결핍이 없음을 의미한다. 수치심(bushah)은 지연이나 늦어지는(boshesh) 상황과 관련이 있다. 탈출기에서는 모세가 늦어지자 백성이 기다렸고(탈출 32,1 참조), 판관기에서는 시스라의 귀환이 늦어지자 그의 어머니가 기다렸다(판관 5,28 참조). 만남과 결합은 만족을 주고, 기다림은 초조함과 근심을 준다. 기다림의 가장 애절한 대상은 나의 상대자이다. 그러나 성적 결합은 상대자를 나의 일부(한 몸)로 만들어 버려 자기중심적 일체감과 자아의 확장을 경험케 한다. 여기서 타인을 나의 일부로 소유하려는 전체주의적 발상이 시작된다. 이처럼 성적 결합은 분리되기 전의 한 몸으로 복귀하려는 근원적 동작이요 만남이 주는 혼융의 향연이다.

 

이런 현상은 먹는 일에서도 발생한다. 하느님께서는 먹는 복을 주셨다. 에덴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먹고 즐기라는 것이 첫 번째 법이다. 즐거움과 기쁨이 하느님의 최초 율법인 셈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즐김과 동화의 과정에 한계가 있다고 금령으로 제시하셨다. 그렇다면 왜 금지가 필요한가? 존재는 욕망이며 욕망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자들은 욕망의 장례 예식을 치러야 한다고 말한다. 금령을 통한 인간 능력의 제한은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를 보여 준다. 먹을거리는 혀를 자극해 기쁨을 주고 육체의 활력으로 이어지면서 심리적으로 대상을 내 것으로 만드는 철저한 소유의 과정으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먹는 행위는 음식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체화 작용이기에 세상을 온통 먹을거리(소유의 대상)로 봐서 탐욕을 일으키게 하는 근원적 동기가 된다. 아기가 모든 것을 입에 넣으려는 행위가 이 점을 상징한다. 재물에 대한 한계 없는 탐욕은 먹어서 내 것을 만드는 섭생의 왜곡되고 변형된 형태이다.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는 행위는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선과 악을 아는 열매를 먹음으로써 내가 선과 악 자체가 되고, 선과 악의 기준을 내 안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선과 악의 결정 기준을 정하려는 유혹, 이것이 창세기가 지적하는 인간의 교만(Hybris)이요 원죄의 실상이다. 그것은 자신을 하느님으로 착각하는 환상일 뿐이다. 명정(酩酊), 곧 만취 상태가 환상을 만들어 낸다. 환상에 빠진 인간은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고 절대상태를 추구한다. 마약은 나르시즘적 자아도취를 강력하게 일으키는 물질이고, 나치즘은 히틀러의 자아도취적 기만과 환상주의가 만든 만취의 종교이다.

 

유혹자 뱀은 들짐승 가운데 가장 영리한 동물로 소개된다. 들은 들짐승의 폭력과 위협, 죽음과 투쟁이 존재하는 무법 지대다. 에덴은 평화와 질서의 세계다. 본문은 에덴과 동물의 세계를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뱀으로 대표되는 세계는 본시 아담의 본질적인 면이 아닌가? 인간은 여섯째 날에 동물과 함께 창조된 존재이다. 뱀은 아담 안에 숨겨진 동물성의 상징인지도 모른다.

 

뱀의 유혹은 다른 말로 전능에 대한 유혹이다. 이는 전체주의 형태로 나타나는, 권력을 향한 인간의 의지이다. 그러기에 초인이 되고 싶은 인간, 신이 되고 싶은 인간, 절대 권력을 지향하는 인간에게 뱀의 유혹은 너무나 달콤하다. 뱀은 본질상 다신론자(多神論者)이다. 그의 미끼는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각자에게 고유한 법이 있고 자신이 자기 영역의 주인이라는 이야기다. 상대주의가 판을 치는 현대에 뱀의 유혹은 사람들에게 인간 능력의 위대함을 고취시키며 다가온다. 그러나 절대 진리의 보편적 원칙이 없을 때, 개별적 원칙은 힘겨루기를 통해 패권주의와 전체주의로 치닫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아담과 하와의 죄에 대한 책임은 평화가 갈등과 전쟁으로 바뀌는 저주로 나타났다. 자연과 인간이 적대 관계가 된다.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창세 3,17). 인간과 동물의 전쟁이 시작된다.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 남자와 여자의 전쟁이 불붙게 된다.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창세 3,16).

 

그러면 남자의 노동과 여자의 산고 등 인간 삶의 고달픔이 과연 저주인가? 에덴의 동쪽에서의 삶은 선과 악의 도가니 속에서 하느님의 법에 따라 헤쳐 나가야 할 가시덤불이다. 세상은 에덴에 비해 삶의 방식이 달라졌을 뿐 인간의 삶은 이어지고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도 계속된다. 뱀은 여전히 인간을 유혹하는 악한 경향으로 다가온다. 뱀이 지닌 숫자의 가치(nahash=50+8+300=358)는 메시아(mashiha=40+300+10+8=358)와 같다. 뱀은 그리스도의 적이고 그리스도는 뱀의 적이다. 에덴 동산과 에덴의 동쪽은 동일한 실재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 성과 음식을 통해 주신 생명의 축제를 교만과 탐욕으로 저주의 향연이 되게 할 것인가? 아니면 창조주 하느님 안에서 사람, 동물, 식물, 하늘, 땅, 바람, 물이 서로를 소중히 여기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우주적 공동체를 이룰 것인가?

 

[성서와 함께, 2014년 4월호(통권 457호)]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카인과 아벨 이야기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프랑스 철학자 로제 다두엥은 ‘태초에 폭력이 있었다’라고 창세기를 소개한 바 있다. 늘 제기되는 질문은 ‘왜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만 굽어보셨는가’이다. 토마스 뢰머는 《모호하신 하느님》에서 하느님이 아벨의 제물을 더 좋아하시는 데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편애를 설명할 유일한 근거는 하느님의 자의성이며,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탈출 33,19)는 말씀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뢰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불공평함을 체험하는데, 그것이 바로 ‘카인의 경험’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 해석이 과연 본문이 의도하는 바일까?

 

먼저 성경 본문은 카인이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로 태어났음을 강조한다. 하와는 카인을 낳고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 아이를 얻었다”(창세 4,1)고 말한다. 직역하면 “내가 하느님과 함께(’et) 남자를 얻었다”이다. 성경은 남자 아기를 남자(’ish)로 표현한 적이 없으므로, 여기서 ‘남자’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비롯하였다는 창세 2,23을 염두에 두고 쓰였을 것이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를 얻은 하와가 남자의 어머니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드러내는 독백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카인은 처음부터 불공평을 체험한 것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어머니의 자랑과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특권적 지위를 누린 것이다.

 

그러면 왜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제물을 굽어보지 않으셨는가? 카인이 농부이고 아벨이 목자라는 직업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구약성경은 땅을 부쳐 먹고 사는 농경 생활을 가치절하하거나 유목 생활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유목 생활을 거쳐 약속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안정된 농경 생활을 하기를 희구하였다. 더욱이 최초의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땅을 일구는 농부였기에 농부가 오히려 이상적 직업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농경 생활과 유목 생활에는 인간의 두 가지 삶의 태도가 담겨 있다. 농부는 일정한 땅과 집을 소유하는 소유주로 살아간다. 반면 목자(牧者)는 끊임없이 이동하는 삶에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성경이 목자의 생활 방식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면 이러한 비집착성과 개방성, 하늘을 향해 열린 마음과 초월을 향한 비상한 감수성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휴일이나 주말이 되면 광야에 나가 도시생활에서 잃어버린 무한과 영원의 그림자를 다시금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유혹하여 광야로 인도하시고 그의 가슴에 대고 말하리라고 한다(호세 2,16 참조). 하느님의 유혹이 이루어지는 곳, 하느님을 만나기에 적합한 곳은 도시가 아니다. 자기 실존의 헐벗은 모습으로 무한한 하느님의 음성을 가슴으로부터 엿듣는 광야인 것이다. 유목 생활의 또 다른 장점은 생명과 늘 만난다는 것이다. 유목민의 광야에서는 생명과 교감이 이루어지지만, 도시에서는 기계화와 전산화로 비생명체와 상대하게 된다.

 

이러한 생활 방식의 차이가 제물을 바치는 태도의 차이로 나타났다.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굳기름을 바쳤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제사를 지낼 때 수확의 맏배를 바쳐야 했다(탈출 22,28-29; 34,19-20 참조). 그것은 인간이 먼저 하느님께 첫 소출을 정성껏 바치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왔다.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 사람은 하느님의 것을 훔친 도둑과 같다고 하는 탈무드의 이야기와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카인은 소출의 맏물을 바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것의 일부를 바쳤을 뿐이다. 하느님을 우선시하고 하느님이 삶의 전부인 아벨과 하느님이 자기 삶의 일부만 차지하는 카인의 차이가 결국 하느님의 선택을 결정한 것이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결과가 하느님께 돌아간다.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창세 4,10). 아벨의 피는 땅에 뿌려져 땅을 오염시키고 소출은 반으로 줄어들었다. 아벨의 피가 땅을 오염시켜 카인이 에덴의 동쪽 땅으로 쫓겨났듯, 카인의 후예로 산 이스라엘 역시 땅을 잃을 것이다. 탈무드는 기원전 578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유로 살인, 우상 숭배, 부정한 결합을 들었다.

 

한편 카인이 뿌린 아벨의 피는 복수로 나타난다. 왜 복수를 아벨의 ‘피들’이라고 말할까? <미쉬나>에 의하면 아벨의 피와 그에게서 탄생했을 후손의 피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련하여 아우슈비츠의 한 생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600만 명의 희생자 외에도 더욱 공포스러운 일은 그들에게서 태어났을 유다인 어린이들, 그 후손이 함께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인간의 잘못으로 수많은 미래 가능성이 죽임을 당한다. 오늘날 낙태가 그 대표적 예에 속한다. “하나의 생명을 구하면 마치 세상의 생명을 구한 듯하고 하나의 생명을 죽이면 마치 세상의 생명을 죽인 것과 같다”는 탈무드의 말은 곰곰이 새겨봐야 한다.

 

카인은 마침내 에덴의 동쪽으로 추방당한다. 그는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여 에녹을 낳는다. 도시를 건설하고 아들의 이름을 빌어 그 땅을 ‘에녹’이라고 부른다. 에녹이라는 이름은 본시 ‘hanokh’이고, ‘교육하다, 개시하다’는 뜻을 가진다. 카인은 과거의 죄와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공간인 인간의 도시를 건설하고자 한다. 유다인은 스탈린그라드, 알렉산드리아, 티베리아 등 사람의 이름을 도시 이름에 갖다 붙이는 것을 꺼린다. 인간 중심의 이름 부여보다 신적 프로그램이 담긴 이름을 자주 사용한다. 예컨대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다.

 

카인과 아벨, 그 이름에서부터 미래의 운명이 예고되어 있었다. 히브리어 ‘카나(qana, 창조하다)’에서 파생된 카인이란 이름은 ‘대장장이, 장인’을 의미하며, 장차 인간 문명의 창시자가 될 것을 암시한다. 아벨은 히브리어로 ‘hebel ’이며, ‘수증기, 연기, 허무’를 뜻한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인간의 한계를 잘 보여 주는 이름이다. 목자 아벨은 하느님 중심의 삶을, 농부 카인은 인간 중심의 삶을 대표한다. 카인의 이야기는 폭력이 인간 중심의 삶에서 발단하였고 인류 문명이 폭력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성경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하느님과의 관계에 비하면 그 다음이다. 창세기가 말하는 죄의 기원은 아담이나 카인의 경우 모두 하느님과의 관계에 놓여 있다. 모든 것의 중심인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졌을 때,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훼손된다. 창세기 저자는 하느님의 관점에서 세상과 인간의 창조, 죄의 기원과 그 결과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4년 5월호(통권 458호)]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대홍수와 노아의 계약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홍수’는 고대 근동 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홍수를 인구 문제와 관련하여 설명한 가장 오래된 역사 기록은 <아트라하시스 서사시(Atrahasis Epic)>이다. 이는 기원전 17세기 바빌론의 서기관 쿠 아야(Ku-Aja)가 1245절로 구성한 기록이다. 이 서사시에 홍수가 일어난 원인이 나와 있다. 신들이 자신들의 노동을 덜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지만, 인간의 수가 크게 늘어나 소음으로 시끄러워지자 홍수로 인간을 멸망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창세기는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와 달리 창조된 인간을 신들의 노동 대리역이 아닌 하느님의 선물로 설명한다. 홍수를 인구 조절을 위한 신적 통제 수단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악이 땅에 만연되어(창세 6,5 참조) 하느님께서 심판을 내리셨다고 이야기한다. 자연 현상을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윤리적 차원에서 해석한 것이다. 그러면 악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홍수 설화에 앞서 거인족 이야기가 등장한다. 거인족(나필족)은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이다. 클라우스 베스터만은 하느님의 아들들은 어떤 신적 존재가 아니라 우월한 권력을 가진 특권층의 인간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파라오(창세 12,10-20 참조)나 다윗(2사무 11장 참조)처럼 권력을 가진 자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마음대로 여자를 취하는(창세 6,2 참조) 등 욕망대로 움직일 때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도록 처벌하신다는 것이다. 거인족 이야기는 인간의 교만, 자기 강대성, 힘에 의한 타인 지배라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보여 준다.

 

결국 대홍수가 일어난 원인은 인간의 악이 세상에 많아진 탓이다(창세 6,5 참조). 구체적으로 세상이 타락하여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기(창세 6,11 참조) 때문이다. 폭력은 카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인간의 폭력이 홍수로 인한 심판의 근본 이유라면 과연 폭력의 기원은 무엇일까?

 

창세 1,22에서 물고기들과 새들은 번성하여 바다의 물과 땅 위를 채우도록 하느님께 복을 받았다. 인간 역시 번성하여 땅을 채우도록 복을 받았는데, 땅 위에 사는 짐승들은 ‘번성하라’는 말씀도 하느님의 복도 받지 못했다. 이러한 불공평한 축복을 가장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방법은 동물의 복이 인간의 행위 결과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동물에게 땅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의 과일을 식량으로 주셨다(창세 1,29-30 참조). 이러한 초식 생활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의 짐승들을 지배하라는 사람의 소명에 근본적 제한을 가한다. 인간은 동물에게 일을 시킬 수는 있어도 먹기 위해 그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동물에 대한 지배’는 폭력적 수성(獸性)을 풀의 연약함으로 무마하는 이른바 ‘부드러운 지배’이다. 그것은 폭력이 걸러지고 서로 죽이지 않는 평화로운 공존을 가리킨다. 이 질서가 깨진 것이 폭력의 기원이며, 홍수는 폭력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었다.

 

노아가 홍수 기간 동안 먹은 식량은 창세 1,29-30의 기준에 따라 풀(식물)이었을 것이다(창세 6,21 참조). 노아가 방주에 들인 동물은 홍수 기간 내내 살아서 종류별로 방주에서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창세 8,19 참조). 노아가 초식의 계명을 온전히 지킨 것이 그가 의인이라 불린 이유일 것이다.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대홍수로 인간이 죽고 노아의 가족만 살아남았으나 그 후손이 나중에 바벨 탑을 만들어 하느님을 거스른다면 홍수의 심판은 결국 무의미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도 인간이 악을 저지르는 것은 심판으로도 근절할 수 없는 생래적(生來的) 현상임을 인정하신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창세 8,21)고 다짐하신다.

 

이처럼 생명이 악의 현실보다 소중하고 생명의 축복이 죄에 대한 징벌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생명은 창조의 근원적 복에 속하기에 하느님께서는 홍수가 끝나자 노아와 계약을 맺으신다. 이 계약으로 자연과 역사의 새로운 출발(창세 9,1-17 참조)이 가능해진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약의 표지는 무지개다. 그것은 태초의 혼돈 위를 비추는 우주적 질서와 안정성을 반복하여 확인시키는 상징이다.

 

최근에 상영된 영화 [노아]에서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노아에게 선과 악의 이중성을 부여했다. 노아는 하느님의 뜻이 인간을 멸절하는 데 있다고 이해하여 며느리 일라가 낳은 두 손녀딸을 죽이려 하였으나, 차마 해치지 못하고 살려 줌으로써 인류의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노아에게 선은 인간이 없는 유토피아적 세상을 위하여 인간을 멸절하는 것이었으나 인간의 후손을 허용하여 악을 선택하였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어긴 이 선택으로 노아는 자책하였으나 노아가 자손을 축복할 때 무지개가 떠올라 오히려 하느님의 뜻이 인류 구원임이 드러난다. 노아는 하느님의 뜻을 반대로 이해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생래적으로 악한 면이 있음을 인정하시어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라는 창조 질서를 확인하게 하신다. 추위와 더위, 밤과 낮이라는 창조의 이중적 질서는 선과 악의 이중성을 지니고 사는 인간의 모습과 맞물려 있다. 선과 악의 기로에서 아담이 지식 나무의 열매를 따 먹는 악을 선택했다면, 노아는 하느님께서 주신 초식을 지속하는 선을 선택했다.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노아의 아버지 팔뚝에 감긴 뱀 껍질이 노아의 팔뚝에도 감기는 모습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이는 노아와 그의 후손이 겪어야 할 악의 유혹을 상징한다.

 

한편 폭력의 재발을 막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신다. 그분은 창세 1,28에서처럼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시며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라는 소명을 주신다(창세 9,1 참조). 그리고 창세 1,29과 달리 육식이 허용된다. 그러나 동물의 생명을 상징하는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창세 9,3-4 참조). 살의 죽임과 먹음은 허용하되 피의 섭취는 금기시키는 이른바 ‘노아의 법’이 공표된 것이다.

 

창세기는 동물의 생명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결국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는 폭력의 확대 현상을 시사한다. 생명 존중의 뿌리는 사람의 생명뿐 아니라 모든 생명 특히 동물의 생명을 존중하는 데 있음을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우리에게 들려준다.

 

지난 4월에 발생한 여객선 세월호 참사로 온 국민이 슬픔과 자책감을 느끼고 있다. 이 사건은 생명을 경시하는 사회 풍조에서 배금주의에 빠진 어른들의 행태가 만들어 낸 전형적 인재(人災)다. 노아의 대홍수를 이겨 낸 생명의 힘과 하느님의 복을 믿기에 이 참극을 통해 생명 존중 의식이 각성되어 모든 생명이 존중되는 사회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성서와 함께, 2014년 6월호(통권 459호)]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탈향(脫向)의 실존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일흔다섯 살이었다”(창세 12,4). 그 나이에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어딘지도 모를 미지의 장소로 향하게 한 힘은 어디서 온 것일까?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을 통해 큰 민족을 일으켜 주겠다고 약속하셨다(창세 12,2 참조). 아브람의 위대함은 사라이의 불임이 가져온 좌절과 체념에 머물러 있지 않고, 75세의 나이에 새로운 미래를 향해 과감히 투신한 데서 드러난다. 그 투신은 하느님의 주도권에 대한 절대 순명의 결과였다. 아브람의 나그네 길은 탈향(脫向)의 실존,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탈출한 것인가? 그것은 ‘토후 보후’와도 같은 현재의 카오스 상황이다. 어디로 향한 탈출인가? 그것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느님께서 보여 주실 약속의 땅을 향한 나섬이다. 하느님의 약속의 말씀은 아브람의 심연에 새로운 빛을 창조하게 하고, 아브람은 이 빛이 인도하는 곳을 따라 탈향의 실존대로 살아간다. 아브람은 여전히 자식이 없었지만 하느님의 거듭된 약속(창세 12,2-3; 13,14-16; 15,5 참조)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의인으로 인정받았다(창세 15,6 참조). 그의 의로움은 도덕적 자질이기보다 믿음의 덕성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과 맺은 두 번째 계약에서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시고, 계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행하라고 요구하신다(창세 17,11 참조). 어찌 보면 할례는 살에 새겨진 하느님 주권의 표지이다. 후대의 생명을 가능케 하고 자기 생명의 역동성이 근거하는 가장 힘차고 민감한 부분에 계약의 표지가 새겨져, 하느님께서는 생명의 탁월한 주권자로 드러나신다. 그 징표는 무엇보다 생명의 출산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나이가 백 살이고 사라의 나이가 아흔 살인데 아직 약속의 자식은 태어나지 않았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때로 그들의 희망에 대해 쓴웃음을 짓기도 한다(창세 17,17; 18,12 참조). 그러나 아브라함은 포기하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나 그것이 하느님의 약속이기에 믿었다.

 

마침내 출생한 이사악은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온 이유였고, 자손이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을 것이라는 약속(창세 15,5 참조)이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아브라함의 삶은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창세 1,28)라는 하느님의 원초적 프로그램이 실현되는 과정이었다. 하느님의 창조 계획이 아브라함을 통해 구현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사명에 대해 두 가지 관전 포인트가 있다. 하나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질 미지의 땅에 대한 약속이요 다른 하나는 하늘의 별처럼 많으리라는 자손에 대한 약속이다. 땅과 자손은 긴밀히 연결된다.

 

그렇다면 땅이 우선하는가, 자손이 우선하는가? 땅을 강조하는 것은 나중에 가나안 정복을 정당화하고 국가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동기로 작용한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팔레스티나 난민들을 탄압하고 그들과 갈등을 빚는 이유도 땅에 집착하는 시온주의(Zionism) 때문이다. 그러나 자손을 강조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이 되고, 이스마엘을 통해서는 아랍 민족의 조상이 되어 세상의 모든 종족에게 복을 내리는 하느님의 도구가 되리라는 점에서 사해동포주의나 박애주의의 토대가 된다.

 

하느님의 복이 땅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전해진다는 것은, 사도 바오로의 해석으로 명백해진다. 아브라함은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믿는 모든 이의 조상이다(로마 4,16 참조). 아브라함이 믿은 하느님은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이시다(로마 4,17 참조). 그분은 창조와 부활의 하느님이신 것이다. 생명에 대한 원초적 복이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민족의 복으로 연결되고, 마침내 죽은 이를 살리는 부활의 능력을 통해 생명의 영원함으로 확장된다. 아브라함의 탈향의 실존은 바오로에 의하면 믿음을 통하여 부활의 생명으로 나아가는 순례자의 길이다.

 

우리는 여기서 생명의 신비에 전율한다. 카오스에서 창조된 세계의 중심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이 아담까지 이르렀으며 노아의 홍수로 수많은 생명이 사라졌지만, 후손이 없는 아브라함을 통해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후손이 약속되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이며 생명에 대한 축복인가?

 

오늘날 세계에는 영토를 둘러싸고 도처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난민들의 발길을 돌려세우고 쫓아내는 생명 거부 현상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땅에 집착하여 타인의 생존권을 거부하는 것은 자식을 낳아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는 하느님의 축복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별처럼 많아지리라는 하느님의 약속도 거부하는 행위이다. 모든 생명은 살아갈 터전인 땅을 보장받아야 하고, 그러기에 땅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아브라함이 받은 복과 약속이 뜻하는 바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3년 9월 10일 로마의 한 아프리카 난민 수용소를 방문하고 수십 명의 난민과 대화를 나눈 뒤, “교회는 돈을 벌려고 비어 있는 수도원을 굳이 호텔로 바꿀 이유가 없다”며 “이 시설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난민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교황은 2013년 11월에 발표한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감동적인 고백을 한다. “저는 이 땅에서 하나의 사명(mission)입니다. 우리는 빛을 비추고, 복을 빌어 주고, 활기를 불어 넣고, 일으켜 세우고, 치유하고, 해방시키는 이 사명으로 날인된 이들, 심지어 낙인찍힌 이들로 우리 자신을 여겨야 합니다.”

 

자신을 사명으로 자각하는 사람은 자리에 집착하지 않는다. 생명이 땅보다 소중하듯 사명이 직책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니 자신의 존재 자체를 사명으로 자각하기에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단지 말씀에 의지하면서 사명으로 날인된 탈향의 실존대로 살아갈 뿐이다. 아브라함은 불임의 존재로 모든 이의 조상이 된 역설적 사명(mission)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안에 ‘당신의 모상’이라는 DNA를 심어 놓으셨고, ‘자식을 낳아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는 명령어를 집어 넣으셨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생각,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자비를 닮지 않을 수 없다. ‘이 땅에서 사명’이라는 교황의 말씀은 하느님의 모상성을 바탕으로 생명을 번성시키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을 지향하는 생명 친화적 우주에서 생명에 감사하며 그것을 보살피는 일이다.

 

성경의 관점에서는 한 번도 인구수가 문제되지 않았다. <아트라하시스 서사시>는 인구를 조절하는 신의 통제 수단으로 홍수를 묘사하여 고대 근동 사회에서도 식량과 관련하여 인구 문제가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 식량은 땅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노아의 홍수는 인간의 폭력을 심판하는 수단이었을뿐 인구 조절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나아가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아지리라고 하여 생명의 축복이 인구 과잉 문제보다 더 근원임을 보여 준다.

 

하늘의 별만큼이나 자손이 많으리라는 표현은 풍요 다산에 대한 단순한 은유인가, 아니면 언젠가 우주로 탈향하여 살게 될 인류의 미래를 말하는가? 하느님의 약속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하느님께서 강복하신 생명의 신비 속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그렇게 탈향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4년 7월호(통권 460호)]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아브라함의 제사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아브라함의 시련에서 우리는 생명의 시련을 본다. 아브라함의 불임은 생명의 불임이었다. 어떤 이유로든 생명이 생명을 낳지 못하는 것보다 절망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고향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아브라함의 삶은 바로 생명을 찾아 나서는 탈출의 여정이었다. 그 고단한 삶을 떠받치는 힘은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 하겠다”(창세 12,2)는 하느님의 약속이었다.

 

아브람이 큰 흉년 때문에 이집트로 잠시 몸을 피했을 때, 아름다운 아내 사라이를 누이라고(창세 20,12 이복 남매와 비교) 속인 것도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함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약속을 충실히 지키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파라오의 손에서 구해 내셨다. 약속의 절대성 때문에 도덕적 모순은 배후에 가려진다. 아브라함 역시 무모한 정직보다 임시방편의 거짓말을 선택한다. 자기 생명을 지키는 것이 약속의 실현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처럼 후손을 얻기 위해 살아온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은 모든 고난에서 피어난 웃음 그 자체였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토록 소중한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하신다(창세 22,2 참조). 그분은 처음부터 이사악을 지칭하지 않고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창세 22,2)이라고 에둘러 표현하신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은 더없이 소중한데, 그 외동의 운명은 대개 고난과 관련된다. 제물로 바쳐져야 하는 이사악의 운명이 그러하고, 판관 입타의 무모한 맹세로 희생된 그의 외동딸의 운명이 그러하다(판관 11,34 참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린 소리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마르 1,11)에도 고난받는 외아들의 운명이 예고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바치라는 하느님의 이해할 수 없는 말씀에 왜 항의조차 하지 않았을까? 그는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시려는 하느님께 “죄없는 사람을 어찌 죄인과 똑같이 보시고 함께 죽이시려고 하십니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이라면 공정하셔야 할 줄 압니다”(공동번역 창세 18,25)라고 항변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부당한 요구에는 왜 항변하지 않을까? 물론 그 두 가지 에피소드는 서로 다른 상황을 전제한다. 하나는 제물로 봉헌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죄인의 처벌에 관한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살인 혐의 없이 살해가 의식(儀式)을 위해 정당화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사악의 제헌은 가나안 사람들이 벤 힌놈의 골짜기에서 바알 신에게 자식을 불살라 번제로 바치던 풍습(예레 19,5-6 참조)을 반영하는 것일까?

 

에제키엘 역시 제 속에서 나온 첫 새끼까지 우상 제물로 바쳤다(에제 20,25-26 참조)고 당대의 풍습을 비난했다. 그러나 탈출기는 “첫 아들은 모두 나에게 봉헌하여라”(탈출 13,2)고 하면서 맏아들 제헌의 종교적 의무를 부과하지 않는가? 더욱이 2역대 33,6에 의하면 유다의 임금 므나쎄는 벤 힌놈 골짜기에서 왕자들을 불살라 바쳤다. 이 모든 것은 고대 이스라엘에 맏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존재했음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떠나가고 없는 상황에서 외아들로서 맏아들이 된 이사악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야 했던 것일까? 그래서 그는 하느님의 제의적 요구에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던 것은 아닐까? 성경 본문은 이 점에 대해 아무런 답을 주지 않는다. 이사악의 제헌을 명령하시는 하느님과 이의 없이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아브라함의 순종만 강조할 뿐이다.

 

모리야 산으로 향하는 사흘의 긴 침묵을 깨고 이사악이 마침내 아브라함에게 제물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에게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라고 대답한다. 아브라함은 정말 하느님께서 양을 따로 준비해 두셨으리라고 확신했을까? 그렇다면 그의 행동은 일종의 연기란 말인가? 만일 아들이 번제물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아들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 되고 만다. 아브라함은 그 말을 마치고 아들과 함께 걷는다(창세 22,8 참조). 라삐들은 ‘함께 걸었다’는 표현에서 이사악이 아버지의 말씀에 동감하고 순종의 길을 함께 걸어간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사악이 번제에 쓸 나무를 질만큼 장성했기에 그에게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있다고 본 것이다.

 

<미드라쉬>에 의하면 이사악은 당시에 37세였다고 한다. 창세 23,1에서 사라는 127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는 아들이 희생 제물로 바쳐지기 위하여 떠나간 뒤 그 슬픔에 못 이겨 죽게 되었다고 한다. <미드라쉬>는 사라가 90세에 이사악을 얻었으므로 이사악은 사라가 죽던 해에 37세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이사악 제헌은 이사악의 자발적 동의로 이루어진 이사악의 자기 제헌으로 해석되었다. 더욱이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더미에 올려놓을 때 장성한 아들 이사악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본시 번제물에 쓸 동물을 잡을 때 묶지 않고 직접 칼로 도살하는데 왜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묶었을까? 어쩌면 그것은 인간을 희생 제물로 바칠 때 행하는 고유한 예식이었을까?

 

<미드라쉬 랍바>(56,8)에 의하면, 이사악이 “아버지, 나는 아직 젊기 때문에 칼에 대한 두려움으로 내 몸이 부들부들 떨게 되면 당신의 마음이 더욱 아플 것이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 주십시오” 하고 요청했다고 한다. 아브라함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이 눈물이 이사악의 눈 위에 떨어졌다고 말한다.

 

마침내 아브라함이 이사악 위로 칼을 내리치고자 한다. 아브라함이 든 칼에 이사악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이사악의 죽음은 곧 아브라함의 죽음이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죽기를 각오하였기에 이사악은 살아났다. 아니 아브라함이 살아났다. 하느님께서도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마저 아끼지 않을 만큼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셨다(창세 22,12 참조).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아브라함의 미덕이었다. 아브라함의 칼은 신앙의 칼이고, 약속의 성취에 대한 신뢰의 칼이며, 자신의 절망과 아집을 끊어 버리는 칼이었다. 그래서 약속은 새롭게 주어졌다.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창세 22,17).

 

아마도 창세 22장은 어린이를 번제로 바치는 가나안의 풍습을 신앙의 이야기로 변형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한 폭력을 노아의 법으로 금지하신 것처럼(창세 9,6 참조) 인간 번제를 용납할 수 없는 행위로 단죄하신다. 창세 22장은 이사악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생명의 절대 주권자이신 하느님께 조건 없이 생명을 맡겨드리고 생명의 번성을 약속받는 믿음과 순종에 대한 극적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의 제사는 생명이 하느님에게서 오며, 하느님만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보여 준다. 이미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부활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해석하였다(히브 11,19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이 8월 16일 124위의 한국인 가경자(可敬者)들을 복자품에 올린다. 124위 복자는 하느님께 순종하여 아브라함의 제사에 참여한 이들이다. 그들은 “당신의 자애가 생명보다 낫기에 제 입술이 당신을 찬미”(시편 63,4)한다는 고백처럼 생명의 주인에게 다함없는 경외와 찬미를 드렸다.

 

[성서와 함께, 2014년 8월호(통권 461호)]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콜카타, 고통과 사랑의 용광로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인도는 천의 얼굴을 가진 나라다. 저마다의 체험과 관점에서 그려 낸 인도 여행기가 이 점을 말해 준다. 어디 인도뿐이랴! 사람이든 나라든 다양한 모습을 시시각각 다르게 보여 주는 것이 생명 교향곡의 본질이다. 그런데 인도의 경우는 생명의 용틀임이 다르게 느껴진다. 아직도 영향력이 있다는 카스트 제도와 최근 세계인을 경악시킨 끔직한 성범죄로 일그러진 얼굴 뒤에, 수많은 신화와 신전으로 치장된 영적 역사가 겹쳐 있는 것이다. 거리에서 걸인 철학자를 만나 대화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No problem”(문제 없어)을 외치는 릭샤 운전사에 대해 말하는 류시화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도 분명 인도의 단면일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인도의 모습은 가난과 질병과 오염과 소음과 무질서와 무더위까지 가세된 진흙탕이었다. 그런데 그 진흙탕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콜카타[Kolkata, 그동안 영국식의 캘커타(Calcutta)로 불렸으나 인도인에게는 언제나 콜카타이다]는 이미 사진에서 봐 온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구 말대로 현실은 늘 상상한 것 이상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공항에서 도시로 들어가는 길에는 건축 공사가 한창이라 인도 경제의 활력이 보이는 반면, 콜카타의 도심에 위치한 마더 데레사의 ‘사랑의 선교회’가 운영하는 시설 주변에는 세월을 가늠하기 어려울만큼 낡고 시커먼 건물들이 소음과 공해와 인파 속에서 분노의 이빨을 드러내며 서 있었다. 영국이 지배하던 시절 인도의 수도였던 콜카타의 옛 영광은 건물의 뼈대에만 남아 있고 그 외관은 낡음과 썩음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었다(로마 8,20 참조). 인간의 내면이 늘 사랑으로 정화되고 새로워져야 하듯(2코린 4,16 참조), 인간이 만든 도시는 사람의 손길로 정비되고 보수되어야 보존이 가능하다. 자연이든 사람이든 인공물이든, 정지가 퇴화를 낳고 나태가 불모와 무질서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실감케 하는 현장이었다.

 

‘죽어 가는 이들을 돌보는 집’[Nirmal Hriday: Home for the Destitute and the Dying, 본래 칼리 여신에게 바쳐진 건물이었기에 칼리가트(Kalighat)라고도 불린다]을 방문했을 때 여러 사람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봉사하는 한국 수녀님에게 들은 이야기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봉사자들이 선로변이나 길가에서 죽어 가는 이들을 발견해서 그곳으로 데려와 치료하고 보살펴 주는데, 벌레에 파먹혀 신체 일부가 훼손된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파리가 병자의 몸에 알을 낳고 그 알에서 부화된 구더기가 병자의 몸을 양분으로 취해 성충으로 자라는 중에 발견되어 실려 오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이다.

 

게헨나 골짜기가 사람의 시신을 버리는 쓰레기장으로 사용되었을 때, 성경은 구더기가 살을 파먹는 끔찍한 장면을 배경으로 지옥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마르 9,48 참조).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을 구더기가 파먹는 모습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지옥일 것이다. 더욱이 그 구더기가 죽지 않는다는 말씀은 구더기에 의한 완전한 파멸을 의미한다. 생태학의 관점에서 보면 죽은 생명이 구더기의 밥이 되는 것은 먹이사슬의 선순환 관계를 드러낸다. 하지만 살아 있는 생명이 그렇게 처참한 꼴을 당하는 것은 현실에서 발생하는 지옥의 모습일 것이다. 니르말 흐리다이(Nirmal Hriday)는 죽음의 구더기가 활개 치는 현실의 지옥을 사랑으로 치유하는 생명의 신전이었다.

 

구더기가 들끓는 병자를 정성껏 씻기고 그에게 음식을 먹이면 어느새 그가 원기를 회복하고 치유되기 시작한다. 각국에서 온 젊은 봉사자들이 음식을 먹이고 안마해 주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사랑의 감동이 잔잔하게 밀려온다. 무덥고 열악한 콜카타의 환경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환자들을 돌보는 봉사자들에게 위로와 보람은 무엇일까? 그것은 반쯤 죽은 이들이 회복되어 미소를 짓거나 봉사자들을 반기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다. 봉사자들은 병자들을 돌보면서 자신의 상처와 아픔도 치유된다고 말한다.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과 절망의 진흙탕 속에서 사랑과 봉사의 연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이들을 돌보는 시설인 다야 단(Daya dan)에서는 지적 장애나 육신의 장애를 지닌 아이들이 힘겹게 누워 있다가 낯선 방문객이 건네는 손길을 반갑게 잡아 주었다. 작은 얼굴의 절반을 차지할 것 같은 아이들의 까맣고 커다란 눈망울을 바라보면, 그 안에서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 우리의 손을 꼭 잡은 아이들의 눈망울은 잊을 수 없는 형상으로 마음에 새겨진다. 아마도 그 모습을 잊지 못해 일부 봉사자는 해마다 그곳을 다시 찾는 것이 아닐까!

 

콜카타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달랐다. 삶의 불편과 고통이 일상화된 상황에서 봉사자와 수녀들의 사랑이 혼란스러운 도시를 지탱하는 기둥처럼 느껴졌다. 그러기에 봉사자들 사이에 연대의식과 동료애와 친밀감이 자연스레 생겨난다. 거기서 만난 한 아가씨는 장기 봉사자로 일하다가 20년 연상의 단기 봉사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고 말했다. 일상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사랑의 체험이 콜카타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 지금쯤 그녀는 힌두교의 성지 바라나시(Varanasi)로 가서 시신이 떠다니는 갠지스 강을 바라보며 사랑의 가능성과 미래를 헤아리고 있을 것이다. 고통과 가난의 한복판에서 피어나는 사랑은 세상의 기준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열려 있는 순수한 사랑의 발로인 셈이다.

 

이렇듯 콜카타의 니르말 흐리다이에서 만난 세상은 일상의 그것과 차이가 많았다. 세상에서 버림받아 의존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과 그들을 따뜻하게 돌보는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사랑과 생명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러나 버려진 이와 장애인을 돌보는 시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번에 우리나라에서 꽃동네를 방문하는 데 반대한다. 장애인이 재활하고 자립하도록 도와줘야지 수용소에 가두듯 시설에 수용하고 퇴원하지 못하게 하는 행위는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병자나 장애인을 올바로 돌보기 위해서는 재활과 사회 복귀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의 고통과 비참을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동일시하고, 그것을 그저 수용하게 만드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한마디로 꽃동네나 사랑의 선교회의 보호 시설은 병자들을 항구적으로 수용하여 돌보는 것을 지향해서는 안 되고, 그들이 시설에서 나가 새 삶을 일구게 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콜카타에서 만난 이들에게는 재활과 사회 복귀를 말하기에 앞서 생명의 회복과 유지가 우선인 듯 보였다. 그들이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라고 외친 예리코의 맹인처럼, 생명을 지향하는 자세를 적극적으로 보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하며 앉은뱅이 맹인을 일어나 걷게 하시고 당신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되게 하신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것이야말로 온전한 치유요 하느님 앞에 선 온전한 주체의 새로운 탄생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콜카타에서 만난 사람들은 구조적 가난과 질병과 사회적 무관심으로 피 흘리며 쓰러진, 강도 만난 이와 다를 바 없었다(루카 10,30 참조). 그들에게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보여 준 따뜻한 돌봄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니르말 흐리다이와 꽃동네는 생명을 스스로 부지하지 못하거나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이들을 끌어안고 함께 살아가는 곳이다. 강도를 만나 피 흘리는 이가 치유되어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준비 과정은 있어야 한다. 동시에 강도짓이 재발하지 않도록 불의한 사회 구조를 뜯어 고치는 일도 요구된다. 고통은 숙명처럼 감싸 안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의 원인을 개선하거나 제거하는 노력을 함께 기울여야 한다. 콜카타는 고통의 한복판에서 타오르는 사랑의 용광로처럼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사랑의 불씨와 영감을 전해 주고 있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9월호(통권 462호)]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창세기를 읽는 두 가지 관점, 원복(原福)인가 원죄(原罪)인가?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지난 7월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생태신학자 매튜 폭스(Matthew Fox) 신부가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본래 도미니코 수도회의 사제였으나 교황청 신앙교리성성의 제재를 받아 가톨릭교회를 떠나야 했고 1994년에 성공회 사제가 되었다. 신앙교리성성은 폭스 신부가 주장하는 창조 영성이 일원론 또는 범재신론(汎在神論)에 입각하여 창세기에 나타나는 원죄설을 부인하고, 하느님을 어머니로 부르는 여성 생태신학을 전개하면서 동성애를 자연 질서에 속한다고 간주한 점 등을 문제삼았다.

 

매튜 폭스 신부의 주요 저서인 《원복(Original Blessing)》은 죄와 구원을 강조하는 전통 신학에서 탈피하고 복과 창조의 영성을 바탕으로 신학과 전례, 영성을 뒤바꾸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신비주의 전통에서 발견하여 이를 재구성한 거대 담론에 속한다. 폭스 신부는 인류가 생태계의 위기에 처하게 된 종교적 배경과 관련된 것이 타락/속량으로 창조계를 대하는 신학의 오류라고 진단한다. 원죄에 의해 창조계가 타락했다고 보면서 자연을 대상화하고, 인간을 영과 육으로 갈라놓으면서 육을 죄악시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이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득세했다고 판단한다. 이에 따라 자연을 육과 관련하여 대상으로 다루는 과학이 영적 세계를 다루는 신학과 분리되면서 그리스도교는 내면의 세계로 축소되거나 환원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런 이분법적 왜곡을 치유할 길은 창조 중심의 영성을 회복하는 긍정의 길(via positiva)을 받아들이고 세상과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다. 폭스 신부는 세상에 대한 일원론적 관점에서 과학과 신학의 만남, 생태 위기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전 지구의 일치, 정의와 해방의 실천, 여권女權 회복 등을 강조한다. 비관, 냉소, 가학을 우주적 신뢰와 희망으로 극복하자고 제안한다. 그리하여 영 중심에서 몸과 영의 통일된 종교성 회복, 좌뇌(지성) 중심 교육에서 우뇌(감성) 중심 교육을 되살리기 위해 창조 영성을 공동으로 실현하자고 말한다.

 

폭스 신부는 일찍이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제기한 “인류는 왜 바이오 필리아(생명 사랑)보다 네크로 필리아(죽음 사랑)를 선택할까?”라는 질문에 대해 근세 이후 서양 그리스도교가 감사와 황홀을 중시하는 긍정의 길을 버리고 죄와 단절과 내면의 고립 등 부정의 길(via negativa)을 걸어온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지식 중심에서 지혜의 발견으로, 율법에서 복음 중심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절제와 금기에서 에로스를 해방하는 살아 있는 영성이 죽음을 선택하는 문화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폭스 신부는 창세기의 다바르(말씀)가 지닌 창조력과 역동성이 말씀의 신학에 갇혀 생명력을 상실했다고 보고, 현실을 창조하고 변화하는 무한한 힘으로 다바르를 다시 만나고 체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구약의 다바르가 요한 복음서에서 로고스로 번역되었기에, 그 서문을 “맨 처음에 창조력이 계셨다”고 하여 로고스를 창조력으로 해석한다.

 

폭스 신부는 구약성경 학자인 하크(Herbert Haag)의 말을 인용하며 “원죄 교리는 구약성경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고 창세 1-3장에는 특히 없으며 아담의 후손이 조상의 죄 때문에 이미 죄인이 되었다는 생각은 성경과 동떨어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교 역사에 원죄를 도입한 아우구스티노가 원죄는 성(性)을 통해 전달된다고 생각했기에 여성과 성을 폄하하는 시각이 고정되었다고 말한다. 원죄 교리는 결국 자기와 세상을 부정하게 바라보는 자학성, 불안, 부자유를 유발하고 사회적 소외감을 강화한다고 본다. 예컨대 동성애자는 동성애를, 여자는 여성을, 백인 사회의 흑인은 검은 피부를 원죄로 보도록 조장한다는 것이다. 창조 중심의 신비가들은 원복으로 시작하여 삶의 찬미와 복을 강조한다. 원죄 교리를 강조하는 사람은 타락과 구속의 틀에서 세상을 나쁘게 본다는 것이다. 찬미와 황홀이 하느님 체험의 중심에 있는데, 원죄 교리는 그와 반대로 자신에 대한 자긍심의 결여와 세상 부정의 심리를 유발한다고 비판한다.

 

폭스 신부가 강조하는 창조 영성은 창조의 원복, 곧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는 원초적 긍정과 강복에 근거한다. 아브라함 J. 헤셀(Abraham Joshua Heschel)과 함께 “있다는 것인즉 복이다. 산다는 것인즉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환경을 파괴하고 인간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물질만능주의와 생태 위기의 시대에, 창조 영성의 회복은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폭스 신부는 원복과 원죄를 대립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둘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현실을 설명하는 두 가지 보완적 방식이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동산의 과실나무 열매를 먹는 복과 특권이 주어졌다. 선악과에 대한 금령은 피조물로서 그들의 한계를 그어 준다. 복이 지속되기 위한 조건은 하느님과의 관계이고 그 관계는 말씀으로 주어진다. 말씀은 창조력이지만 동시에 제한을 통해 피어나는 창조력이다. 말씀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면 말씀은 길 아닌 것과 진리가 아닌 것의 구별을 통해 생명과 죽음을 갈라놓는 기준이 된다(신명 30,15-16 참조). 인간이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순간, 말씀은 욕망에 한계를 그어 주는 파수꾼으로 작용한다.

 

(sin)와 탓(guilt)은 구별해야 한다. 원죄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상황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자기 욕망의 법칙에 따르고자 하는 죄의 성향이 바로 교회가 가르치는 원죄다. 그러나 탓은 개인의 행동에서 비롯한다. 인간은 죄의 성향에서 아담과 유사할 뿐 아담의 탓을 나누지 않는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다는 것(로마 5,12 참조)은 물리적 죽음이 들어섰다기보다 삶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적대감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아담이 죄를 지으면서 하느님과의 신뢰가 깨진다. 삶의 원초적 복이 망각되어 아담에게 삶은 고통으로 느껴지고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만다. 자식을 낳고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 일이 본시 복이었으나 이제 고통으로 다가온 것이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는 말씀은, 죽음이 자연의 생태 순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복으로 더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삶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한 고통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체험된다는 의미이다. 본래 원초적 복 안에서 세상은 복과 기쁨의 대상이었으나 인간이 탐욕을 부려 복이 저주가 되고 기쁨이 고통으로 바뀌었다. 원복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말씀에 대한 순종이 필요하다. 불순종은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처럼 원복을 지키고 성장하는 말씀의 창조력을 고사시킬 수 있다(마르 4,7 참조).

 

폭스 신부가 한국을 떠나는 날, 나는 그와 점심식사를 하고 공항까지 배웅했다. 그가 나와 동문이라는 연대 의식이 함께하는 시간을 연장케 한 것 같다. 채식주의자인 폭스 신부는 매우 섬세한 영혼의 소유자로 보였다. 그는 1990년대에 춤과 노래와 명상으로 봉헌하는 우주적 미사(Cosmic Mass)를 창시했다. 그는 우주론과 창조 영성과 춤과 노래와 음악과 미술과 자연이 한데 어우러지는 우주적 찬미의 장이 바로 우주적 미사라고 설명했다. 왜 원죄를 부인하느냐는 나의 질문에 폭스 신부는 죄의 현실은 인정하지만 원복을 강조함으로써 잃어버린 창조 영성을 회복하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다. 이제 그는 가톨릭 사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독신의 우주적 사제로 그렇게 창조 영성을 선포하며 살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10월호(통권 463호)]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창조와 해방의 의미로 본 안식일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오경은 히브리어로 ‘토라(Torah)’라고 불린다. 토라는 ‘율법’이라고 번역되지만 본래 뜻은 ‘가르침’이다. 토라를 율법이라고 번역할 때 흔히 복음과 반대 개념으로 알아듣는 경우가 많다. 이는 율법과 복음을 대조하여 전자를 율법주의로 해석한 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토라는 두 가지 사건에 기초한다. 첫째는 ‘창조 사건’이요 둘째는 이집트 탈출이라는 ‘해방 사건’이다. 창조는 하느님의 원초적 복으로 선언되었고, 탈출은 억압에서의 해방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므로 토라의 근본은 복음이다. 창조는 원복의 기쁜 소식이요 탈출은 해방의 복음이다. 이 두 가지 근원적 사건을 바탕으로 토라가 인간에게 주어졌다. 창조 후에 아담에게 허용과 금령(창세 2,16-17 참조)이 동시에 주어졌고, 탈출 사건 후에는 계약의 법전이 주어졌다.

 

특히 그 가르침이 법의 형식으로 집대성되어 ‘십계명’, ‘계약 법전’, ‘성결 법전’, ‘신명기 법전’으로 나타났다. 이런 점에서 토라는 하느님의 복음적 사건과 이에 상응하는 인간의 올바른 길(신명 30,16 참조)을 제시하는 서사적 복음이라 하겠다.

 

유다교가 613개의 계명으로 정리한 토라 가운데 하느님, 인간, 자연을 연결시키는 생태신학적 가르침을 담은 것이 바로 안식일, 안식년, 희년에 관한 규정이다.

 

그럼 안식일에 대해 살펴보자. 안식일법은 십계명(탈출 20,8 참조)과 계약 법전(탈출 23,12 참조), 성결 법전(레위 19,3 참조), 신명 5,12에 등장한다. 그중에 십계명은 사제계 학파의 창조 신학을 배경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고 가르친다.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탈출 20,11).

 

하지만 신명기가 말하는 안식일의 동기는 이와 다르다.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5,15). 그리하여 유배 시대 이후의 창조 신학을 전제하는 탈출 20,8의 안식일 계명이 이집트 탈출을 배경으로 하는 계약 법전(탈출 23,12 참조)과 신명 5,12의 안식일 규정보다 후대에 속한다고 평가된다. 유배 이전의 안식일은 본래 보름날에 해당하는데, 이 단어(안식일)는 항상 달의 초하룻날과 연결되어 등장한다(2열왕 4,23; 이사 1,13; 호세 2,13; 아모 8,5 참조). 안식일은 유배 이전에는 보름날, 유배 이후에는 지금의 이렛날로 정착되었다.

 

계약 법전은 안식일의 본 목적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라고 밝힌다. “너희는 엿새 동안 일을 하고, 이렛날에는 쉬어야 한다. 이는 너희 소나 나귀가 쉬고, 너희 여종의 아들과 이방인이 숨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다”(탈출 23,12).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하여 주신 것처럼 안식일도 모든 이를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날인 것이다. 계약 법전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잘 드러나는데, 약자의 범주에 종뿐 아니라 소나 나귀 같은 짐승이 포함된다. 이로써 계약 법전의 안식일은 동물까지 망라하는 생태신학적 전망을 지닌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으로 유배된 뒤에 사제계 학파는 안식일을 창조의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했다. 안식일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여 하느님 중심으로 안식일의 의미를 전개했다. 창조는 단지 하늘과 땅만의 창조가 아니라 역사의 혼돈에서 이스라엘이 다시금 땅을 회복하고 다스리는 것을 암시한다. ‘안식(shabbat)’은 글자 그대로 ‘쉬다, 일을 그만두다, 파업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하느님의 휴업 또는 파업의 의미는 지대하다. 하느님께서 엿새간의 창조를 마치고 이렛날 쉬신 행위는 우주의 건설을 기념하고 이스라엘을 카오스(혼돈)에서 해방하신 행위를 기념하는 것이다.

 

사제계 학파는 이집트 탈출 사건도 하느님 중심으로 재해석했다. 탈출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은 무엇을 위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내 백성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여라”(탈출 9,1)는 하느님 말씀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사제계 학파는 탈출 사건의 목적이 역사적 해방 그 자체가 아니라 주님께 드리는 예배임을 천명한다. 해방의 사회적 목적이 종교적 목표로 드높여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안식일이 종교 차원에서만 강조되면 율법주의로 흐를 수 있다. 탈출 31,15은 안식일의 거룩함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신 행위를 바리사이들이 단죄한 것도 안식일의 종교성을 강조한 결과이다(마르 3,1-6 참조).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걸어 갈 수 있는 거리도 2천 암마(약 1km)로 제한했다(탈출 16,29; 민수 35,5; 여호 3,4; 사도 1,12 참조). 오늘날에도 유다인들이 회당 주변에 모여 사는 이유는 안식일에 회당까지 걸어 갈 거리 안에 집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승강기 버튼을 눌러서는 안 된다고 교육받은 어느 유다인 할머니가 다른 사람들(비유다인)이 승강기를 타러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탔다는 이야기는 과도한 안식일 규정이 얼마나 형식주의에 빠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유다인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면 모든 토라를 잘 지키는 것과 같고, 안식일을 못 지키면 다른 모든 토라를 못 지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안식일에 관한 에피소드를 하나 더 들어 보자. 20세기의 이스라엘에서 무신론자가 된 어떤 유다인에게 한 라삐가 “너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무신론자 유다인은 “다음날 대답해 주겠다”고 대답했다. 다음날이 되자 그는 라삐에게 “나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라삐가 “왜 바로 대답하지 하루 뒤에 대답했느냐?”고 물으니 그 유다인은 “어제가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 유다인은 하느님을 믿지 않았지만 안식일에 하느님을 부인하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과도한 규정은 율법주의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사제계 학파가 강조하는 안식일의 본래 의미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에 나타나는 원초적 복음이다. 신명기계 학파가 강조하는 안식일은 탈출 사건에 근거하여 자신과 이웃과 동물을 일상의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휴식과 복의 시간이다. 그러기에 안식일은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예배를 드리며 창조와 해방을 경축하는 날이다. 그래서 이사야서는 “네가 안식일을 ‘기쁨’이라고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부른다면 네가 길을 떠나는 것과 네 일만 찾는 것을 삼가며 말하는 것을 삼가고 안식일을 존중한다면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이사 58,13-14) 하리라고 말한다.

 

사제계의 안식일이 강조하는 종교적 차원과 신명기계의 안식일이 강조하는 사회적 차원은 상호 보완되어야 한다. 하느님 없는 안식일은 인간의 휴식에 불과하다. 인간의 사회적 조건을 무시하는 하느님 경배는 율법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주일에 쉬면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이 행복의 십계명”이라고 강조했다. 레위 19,3은 부모 공경과 안식일 준수를 함께 언급한다. 안식일에 쉬는 것은 부모를 모시고 온 가족이 하느님 안에서 함께 보내는 것을 내포한다. 일에 지친 현대인에게 안식일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인 것이다. 이 가족에 동물도 포함될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애완견의 지위를 ‘반려견’이라는 말로 격상했다. 사람과 짐승이 함께 쉬면서 창조와 해방의 기쁨을 나누는 날이 유다인들에게는 ‘안식일’이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일’이다.

 

[성서와 함께, 2014년 11월호(통권 464호)]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자연과 인간의 쇄신을 위한 안식년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안식년(Shemittah)은 안식일과 함께 이스라엘의 독특한 생태 제도이다. 창조의 주기적 활성화를 위해 하느님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안식일이요 안식년이다. 한 주간의 6일, 7년 주기의 6년은 인간과 자연이 활동하고, 이렛날과 일곱째 해는 인간과 자연이 하느님 안에서 쉬면서 자신을 회복하는 시기이다.

 

계약 법전: 탈출 23,11은 일곱째 해를 안식년이라고 부르고 이때에는 “땅을 놀리고 묵혀서, 너희 백성 가운데 가난한 이들이 먹게 하고, 거기에서 남는 것은 들짐승이 먹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법전의 주요 관심사는 땅 주인의 소출 독점을 막고, 가난한 이들과 들짐승이 휴경지에서 자라난 것을 먹게 하는 생명 보호 사상이다. 아울러 소와 나귀가 쉬고 여종의 아들과 이방인이 숨을 돌리게 하는(탈출 23,12 참조) 생태적 배려가 담겨 있다.

 

성결 법전: 성결 법전에 나타난 안식년 규정은 “땅도 주님의 안식을 지켜야 한다”(레위 25,2)에서 드러나듯 종교성이 강조된다. 그래서 안식년은 땅의 주인이신 “주님의 안식년”이요 “땅의 안식년”(레위 25,4.5)이라 불린다. 땅은 주님의 것이므로(레위 25,23 참조) 안식년이 되면 땅도 하느님 앞에서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땅이 휴식하는 가운데 땅에서 나는 것은 땅 주인을 포함하여 남종과 여종, 품팔이꾼, 거류민, 그리고 가축과 다른 짐승이 먹도록 해야 한다(레위 25,6-7 참조).

 

신명기 법전: 신명기 법전은 일곱째 해를 “탕감의 해”(신명 15,9)로 부른다. 채무자의 빚은 7년이 되면 탕감된다. 이웃에게 빚을 준 모든 사람은 그 빚을 탕감해 주어야 한다(신명 15,2 참조). 그러나 외국인에게는 빚을 갚으라고 독촉할 수 있다(신명 15,3 참조). 주님의 탕감령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가난한 이가 없도록 하기 위해 선포된다(신명 15,4 참조). 탕감법은 이스라엘 동족에게만 적용되는 한계가 있지만, 이스라엘에는 더 이상 “가난한 이가 없을 것”(신명15,4)이라는 경제 평등주의를 지향한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이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는 완전한 경제 평등주의를 실현하여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이가 없었다고 한다(사도 4,34 참조).

 

안식년에 대한 강조점은 저마다 다르다. 계약 법전은 가난한 이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고, 성결 법전은 땅의 안식을 강조하는 생태주의를 표방하며, 신명기 법전은 채무자의 빚 탕감을 강조한다. 이 세 가지를 종합하면 안식년은 땅을 놀리는 휴경년이고, 빚을 없애 주는 탕감의 해이며, 땅의 휴경을 통해 종에게 자유를 주는 해방의 해이다.

 

안식년의 실천: 이사 37,30에 안식년에 대한 암시가 나온다. “올해에는 떨어진 낟알에서 난 곡식을 먹고 내년에는 뿌리지 않고 저절로 난 곡식을 먹으리라. 그러나 후년에는 씨를 뿌려서 곡식을 거두고 포도밭을 가꾸어 그 열매를 먹으리라.” 예레미야는 종들의 해방을 언급하는데 이는 안식년의 종 해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탈출 21,1-7; 신명 15,12-18 참조). 바빌론 유배 생활에서 본토로 귀환한 뒤에 느헤미야가 실시한 개혁 중 하나가 바로 안식년을 강력하게 실천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일곱째 해마다 소출과 온갖 종류의 채권을 포기한다”(느헤 10,32).

 

1마카 6,48-54에 의하면 유다인들은 안티오쿠스 4세의 공격을 받아 벳 추르 방어를 포기하고 시온 역시 포기하였다(요세푸스, <유다 전쟁사> 2,4 참조). 그 해가 안식년이어서 디아스포라 출신 유다인들이 남은 식량을 다 먹었기 때문이었다.

 

요세푸스는 요한 히르카누스의 통치 때 유다 민족이 안식년 기간에 공격을 삼가고, 로마 황제 율리우스는 안식년에 연례적으로 행하던 조공을 면제해 주었다고 한다(안티오쿠스 XIV 10:6). 쿰란 공동체 역시 안식년에 토지를 경작하지 않고 빚을 탕감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식년이 가까이 오면 빚을 내기가 어려워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유명한 라삐 힐렐이 프로스불(prosbul, 채권자가 원하는 때에 빚을 갚겠다고 하는 각서)을 발행하여 안식년이 끝나면 빚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생태 환경법으로 본 안식년: 안식년은 땅을 배려하고 땅을 회복시키는 생태 사상의 선구자적 모습을 제시한다. 인간이 안식년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 때, 인간이 땅을 혹사시키고 땅을 오염시키며 착취할 때 땅은 인간을 저버리고 스스로 안식을 취할 것이다. 레위 26,34-35은 땅이 황무지 상태로 남아 스스로 안식을 취하는 땅의 안식년이라는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바빌론 유배 사건을 암시한다.

 

성경에 나오는 안식년이야말로 자연계와 인간의 근본적 연대성을 강하게 일깨워 주는 제도다. 성경은 이미 아벨과 카인 이야기에서 인간의 죄와 땅의 관계를 잘 암시한 바 있다. 라삐들은 아벨의 죄 없는 피가 땅을 오염시켜 땅의 생산 능력이 반감되었다고 말한다. 아담이 죄를 범한 후 인간은 이마에 땀을 흘려 일함으로써 밥을 먹어야 하는데, 카인의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자연계를 오염시키고 노동 조건은 더욱 악화되었다.

 

카인의 죄에 담긴 경제적·종교적·성적 동기를 분석하면, 안식년 제도가 인간의 활동에 대한 일체의 정지를 지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 행위를 중단함으로써 소유에서 해방되고, 안식년 기간 중에 얻어야 할 양식을 오로지 자연에 대한 하느님의 배려에 의존하여 하느님의 주권과 창조 권능에 인간의 생명을 되돌려 드린다.

 

안식년 제도는 존재의 깊은 휴식을 통해 오로지 종교적 주제에 집중할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고, 성적(性的) 유혹에서도 자유로워질 것을 권장한다. 일부 라삐들은 안식년에는 자녀 출산을 자제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식량이 충분하지 않아 자녀를 올바로 양육하기가 쉽지 않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간의 화살은 외적인 곳에서 내적인 곳으로 방향을 바꿔 날아간다. 그러므로 안식년은 한 주기(7년)를 마감하고 새로운 주기로 넘어가는 창조적 쉼의 기간이다. 이로써 자연과 인간은 한 주기 동안 축적한 왜곡과 파괴, 변질과 쇠잔을 일신하고 새로운 면모로 창조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땅과 인간의 쇄신과 새 창조는 안식년 제도를 통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2014년 한 해를 마감하며 끝없는 생산과 소비와 소유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인간과 자연의 해방을 위한 안식년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 보고 싶다.

 

[성서와 함께, 2014년 12월호(통권 46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