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말씀과 함께 걷는다 - 김영선 루시아 수녀

by 파스칼바이런 2018. 6. 20.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욥기] 하느님, 힌트라도 좀 주시죠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에제키엘서]

유배 시기 이스라엘의 파수꾼 에제키엘

김영선 루시아 수녀

 

 

우리는 하루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수많은 선택의 기회를 맞이합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내린 선택과 결단으로 하루의 경험이 빚어집니다. 좋은 경험이 있고, 마음이 씁쓸해지는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 경험을 통해 우리는 조금씩 성숙할 수도, 조금씩 외골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각자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차이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이는 개인의 경험뿐 아니라 한 민족 전체의 역사적 경험에도 해당합니다.

 

한 민족이 경험한 불행한 역사가 그 민족을 반드시 불행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오히려 더 크게 성장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의 역사적 경험이 그 예가 될 것입니다.

 

유다 왕국은 기원전 597년에 바빌론 군대에 의해 포위됩니다. 당시에 나라를 다스린 지 석 달밖에 안 된 여호야킨 임금은 항복을 결정합니다. 그러자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은 성전과 왕궁에 보관된 온갖 보물을 수탈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호야킨 임금과 그의 모후와 왕비들, 고관대작과 기술자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갑니다. 이것이 ‘1차 바빌론 유배’라고 불리는 사건입니다.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은 유배되어야 하는 여호야킨 대신 그의 삼촌 치드키야를 임금으로 세웁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에 유다 왕국은 결국 패망하고 맙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갑니다. 곧 기원전 587년에 일어난 ‘2차 바빌론 유배’입니다. 이때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둡고 고통스러운 체험을 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여러 책은 이 시기의 경험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해석을 담았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서 역시 그러한 책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한 예언자가 이스라엘 백성, 특히 유배된 백성에게 그들의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해야 할지 말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를 비롯한 이스라엘의 여러 현인의 노력은 가장 어둡고 고통스러운 시절을 가장 결실이 풍성한 시절로 변화시켰습니다. 구약성경 대부분이 형성된 때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이제 에제키엘 예언자가 고통스러운 체험 가운데에서 당시의 사람들이 참된 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에제키엘 예언자가 어떤 인물인지 소개하고, 그가 예언자로 부름 받게 된 성소 체험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메시지는 다음 달에 다루겠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누구인가?

 

사제 가문 출신인 에제키엘 예언자는 기원전 597년, 그가 25세였을 때 여호야킨 임금과 함께 바빌론으로 유배된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유배민과 함께 바빌로니아의 니푸르 지역 근처에 있는 크바르 강 가의 텔-아비브 유다인 거주지에 정착했습니다. 유배된 지 5년째인 593년, 에제키엘이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는 나이 30세가 되었을 때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에제키엘의 예언 활동은 기원전 593년에서 571년까지 약 2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 예언자와 동시대인으로 예레미야 예언자의 메시지를 알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독신으로 산 예레미야와 달리 혼인하였지만 그의 아내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직전에 사망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서에 따르면 유배된 이들 가운데 원로 몇 명이 자문을 구하러 그를 찾아오곤 했는데, 이는 그가 유배민 가운데 영향력 있는 사람임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그의 동료 유배민이 에제키엘의 메시지를 언제나 환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몇 년간 실어증에 걸리거나 마비 증상을 보이는 등 비범한 예언적 표징을 보인 것도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배지에서 조국의 멸망을 지켜보면서 동료 유배민에게 하느님의 메시지를 선포한 에제키엘은, 사제요 예언자로서 이스라엘의 두 가지 중요한 전통을 자신의 인격에 통합한 비범한 인물이었습니다. 가차없는 심판을 예고하는 동시에 구원을 선포했고, 환시가면서도 냉철한 논리를 전개하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펴볼 에제키엘 예언자의 독특한 성소 체험은 그와 동시대인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성소 체험

 

에제키엘의 예언 성소는 유배 생활의 체험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유배민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유배민이 겪는 신앙의 위기를 누구보다 깊이 체험했을 것입니다. 사제 가문의 한 사람으로 자기 정체성의 일부인 사제직을 수행할 수 없는 현실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그의 질문은 곧 유배민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상 숭배로 물든 이방인의 부정한 땅에서 과연 하느님을 섬길 방법이 있을까? 유배 생활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왜 우리는 유배되어야 했을까? 하느님께서는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신가? 우리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아직도 유효한가? 유효하다면 어떤 식으로 지속될 수 있을까? 미래의 회복은 가능한가?’

 

그날도 에제키엘은 이런 질문으로 무거워진 마음을 안고 크바르강 가로 나갔습니다. 그가 강 가로 나간 이유는 부정한 땅에서 사는 몸이기에 강물로 몸을 씻고 기도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는 기도 중에 놀라운 환시를 보게 됩니다. 그때는 유배된 지 5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북쪽에서 큰 바람소리와 함께 뭔가 불 같은 것이 날아오는데, 가만히 보니 네 얼굴과 네 날개를 가진 네 생물이 떠받치고 있는, 바퀴 달린 하느님의 어좌였습니다. 이 어좌는 사방 어디든지 움직일 수 있고, 그 위에는 사람의 모습을 한 형상이 앉아 있었습니다. 에제키엘은 이 모습이 “주님 영광의 형상처럼 보였다”(1,28)고 말합니다. 그는 이 영광의 모습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이는 자신이 본 환시를 하느님이라고 해석하였다는 증거입니다.

 

에제키엘은 이 환시를 통해 하느님께서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아직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5년 전이었으므로 예루살렘에 계셔야 할 하느님의 영광이 바빌론이라는 부정한 땅에 나타나셨다는 것은 이방인의 땅에서도 하느님을 섬길 수 있음을 확인한 것이며,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바퀴 달린 어좌는 하느님은 당신 백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함께하는 분이심을 알려 준 것입니다. 이런 인식이 지금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계시였습니다.

 

에제키엘은 어좌에 앉으신 분, 곧 하느님에게서 예언자의 소명을 받습니다. 그 소명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을 불행의 메시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라고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을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자들에게 보내겠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가시가 너를 둘러싸고, 네가 전갈 떼 가운데에서 산다 하더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십니다(2,4.5.6).

 

그리하여 에제키엘은 하느님께서 건네주시는 두루마리를 받아먹습니다. 그는 그것이 꿀처럼 달았다고 말합니다(3,1-3 참조). 그때부터 에제키엘은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3,17)이 되어 앞으로 닥쳐올 하느님의 심판에 대비하도록 유배민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과연 에제키엘은 유배민에게 어떻게 다가갔으며, 그들은 에제키엘의 메시지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성서와 함께, 2015년 1월호(통권 466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에제키엘서]

실어증에 걸린 예언자 에제키엘

김영선 루시아 수녀

 

 

구약성경은 예언자를 일컬어 ‘하느님의 사람’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반드시 지녀야 할 덕목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인지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자기 것을 포기한 사람이겠지요. 만약 하느님의 사람이 자기 것을 추구한다면, 사람들이 주는 영광을 추구한다면,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는 하느님 말씀을 전해야 할 때 어쩔 수 없이 그 말씀의 일부를 적당히 변형하거나 삭제하려 들 것입니다. 또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것을 하느님 말씀인 양 거짓으로 선포할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그는 하느님의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진정한 모범이 되는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서의 특징과 구조

 

에제키엘에게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한 모범을 찾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하느님 말씀을 어떻게 선포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에제키엘 예언서의 특징과 구조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에제키엘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예언서에 비해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대부분의 예언서는 시문으로 저술되었지만 에제키엘서는 산문체로 저술되었습니다.

 

둘째, 에제키엘서에는 예언이 연대순으로 편집되어 있습니다. 기원전 593년에 선포된 첫 예언(1,2 참조)부터 기원전 573년에 선포된 마지막 예언(40,1 참조)까지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편집되지 않은 유일한 예외가 29,17입니다. 여기에는 기원전 571년에 선포된 예언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셋째, 에제키엘의 예언 메시지는 크게 예루살렘 함락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함락 이전에 선포된 1-24장은 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이며,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선포된 25-48장은 이민족에 대한 심판 예언(25-32장)과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구원 예언(33-48장)입니다. 따라서 에제키엘의 예언은 예루살렘 함락 이전에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심판에 관한 것이고,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는 구원에 관한 것으로 확연히 다릅니다.

 

넷째, ‘주님의 영광’에 대한 환시가 예언서의 중심 구조를 이룬다는 점입니다. 주님의 영광에 대한 첫째 환시는 1,1-28에 소개되며, 에제키엘이 크바르 강 가에서 처음 본 것입니다. 둘째 환시는 8-11장에서 소개되며, 에제키엘은 주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셋째 환시는 미래의 성전에 대한 청사진을 소개하는 40-48장의 마지막 부분에 언급되는데, 주님의 영광이 성전으로 돌아오는 것을 목격합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주님의 현존을 뜻하는 사제계의 고유한 용어입니다(탈출 16,7.10; 24,16.17; 레위 9,23; 민수 14,10; 17,7 등 참조).

 

예루살렘 함락 이전에 선포된 심판 신탁

 

에제키엘이 선포한 예언의 구체적 내용 중에 이번 달에는 예루살렘 함락 이전에 선포된 1-24장의 심판 신탁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달에는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선포된 25-48장의 이민족에 대한 심판 신탁과 예루살렘에 대한 구원 신탁을 살펴볼 것입니다.

 

1-24장에 나오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심판 신탁을 에제키엘이 전할 당시, 유배민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본국에 남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에제키엘은 그들을 향해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며, 왜 멸망할 수밖에 없는지 계속 선포했습니다. 이 일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예언직을 시작할 때부터 매우 분명했습니다. 에제키엘은 이 가슴 아픈 심판의 신탁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의 온 존재를 하느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그는 말로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하고야 말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는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자마자 실어증에 걸려 두문불출하게 됩니다(3,25-27 참조). 오직 하느님께서 말씀을 입에 담아 주실 때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그가 실어증에 걸린 기간은 기원전 593년부터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때인 586년까지 6-7년이었습니다. 에제키엘은 예루살렘이 포위될 것을 알리기 위해 진흙 벽돌로 예루살렘이 포위되는 상황을 연출하고(4,1-3 참조), 이스라엘과 유다의 운명을 보여 주기 위해 왼쪽 옆구리로 390일, 오른쪽 옆구리로 40일 동안 누워서 지냅니다(4,4-8 참조). 포위된 사람이 먹게 될 형편없는 음식을 먹고, 유배지에서 부정한 음식을 먹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인분으로 빵을 구워 먹으라는 명령을 듣습니다(4,9-15 참조).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사람들이 겪게 될 운명을 알려 주기 위해서는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아 불태우고 자르고 흩어버리며, 일부만 남겨 옷자락에 묶어 둡니다(5,1-4 참조). 예루살렘의 멸망이 분명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유배 짐을 싸서 벽에 구멍을 내고 도시를 떠나는 시늉을 합니다(12,1-16 참조). 그것도 모자라서 사람들 앞에서 떨며 빵을 먹고 불안과 걱정에 싸여 물을 마십니다(12,17-20 참조). 이것이 앞으로 반드시 닥쳐올 예루살렘의 운명이 될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는데도 곡조차 하지 않습니다(24,15-24 참조). 이는 백성의 기쁨과 영화요 눈의 즐거움이며, 영의 열망인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날 그들 역시 너무나 기가 막혀 울지도 못할 것임을 미리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은 왜 이토록 기이한 행동을 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에제키엘을 예언자로 불러 세우실 때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반항하는 집안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도무지 귀 기울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2,3-8 참조). 그렇다면 예언자는 들으려 하지 않는 그들에게 어떻게 하느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그들의 주의를 끌 수 있을까요? 예언자는 먼저 이런 기이한 행위로 하느님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호기심에서라도 그 행위의 의미가 뭔지 묻습니다(24,19 참조). 에제키엘은 그렇게 해서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혹시라도 그들 가운데 누군가 에제키엘의 경고를 듣고 죄에서 돌아서 하느님께 돌아오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예언자가 해야 할 임무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곳에서 자행되는 ‘우상 숭배’ 때문입니다(6,13 참조). 주님의 영에 사로잡힌 예언자는 환시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으로 옮겨 가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우상 숭배를 목격하고, 불법이 가득한 그곳에서 주님의 영광이 떠나는 것을 지켜봅니다(11,22-23 참조). 이 도성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 의지가 너무나 확고하여 노아와 다니엘과 욥 같은 의인의 중재로도 심판이 연기될 수 없습니다(14,14 참조). 멸망할 예루살렘의 운명과 죄악은 쓸모없는 포도나무(15장 참조)와 부정한 아내(16장 참조), 불충한 임금(17장 참조)에 비유됩니다.

 

에제키엘은 예루살렘이 파괴될 때 비로소 사람들은 그것을 심판하시는 분이 하느님임을 알아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십니다. 에제키엘은 하느님께서 조상들의 죄악 때문에 후손들의 미래를 제거하시는 부당한 분이 아니라 각자 자신이 살아온 삶에 따라 심판하시는 분이며, 회개하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기회를 주시는 분이라고 선포합니다(18,29-32 참조). 어두운 심판의 예언조차 죽음이 아니라 삶을 지향하는 말씀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2월호(통권 467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에제키엘서]

희망을 설계하는 예언자 에제키엘

김영선 루시아 수녀

 

 

하루를 시작할 때 이 하루가 또 어떻게 전개될지 기대와 호기심을 갖게 됩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고, 미리 한 약속이 취소되기도 할 것입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계획대로 펼쳐진 하루란 거의 없었기에 이제는 아예 마음을 활짝 열고 펼쳐지는 사건을 맞이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무대에 올려진 연극 한 편을 보는 듯 하루를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할 것입니다.

 

하루라는 저의 무대에는 여러 주인공이 등장하겠지요. 저는 이러저러한 주인공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스쳐 지나가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붙잡고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어떤 사람은 다음에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과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신지요? 저는 가슴에 꿈을 품은 사람,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꿈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힘이 납니다. 그런 이의 꿈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의 꿈에 힘을 실어 주고 싶은 마음이 불끈 솟아오릅니다. 저도 미래를 향해, 세상을 위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이 달에 소개할 에제키엘 예언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심판 선언과 구원 예언

 

온갖 상징 행위를 통해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했던 예언자가, 일단 예루살렘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꿈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25-48장에는 예루살렘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에제키엘 예언자가 선포한 희망의 메시지가 소개됩니다.

 

예루살렘은 기원전 588년에 포위됩니다. 포위된 지 일 년 반 만에 함락되는데 이스라엘의 멸망이 눈앞에 있을 때부터 선포된 이 메시지에는 놀랍게도 희망이 가득 차 있습니다.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듯 생생한 언어로 표현된 미래를 위한 청사진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화폭에 담아 그려 보임으로써 멸망한 나라의 백성이 된 유배민들에게 미래에 대한 확신을 주고자 합니다.

 

에제키엘서 제2부에 해당되는 25-48장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25-32장은 일곱 이민족(암몬, 모압, 에돔, 필리스티아, 티로와 시돈, 이집트)에 대한 심판 선언입니다. 이는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24장과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에제키엘에게 전달되는 33장 사이에 위치합니다. 이 심판 신탁은 기원전 588년에서 585년 사이에 선포된 것으로 29,17-21만 예외적으로 기원전 571년에 선포되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민족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국가와 민족들의 하느님이시며, 그들을 통치하기 위하여 역사에 개입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는 33장부터 마지막 장인 48장까지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구원 예언입니다. 에제키엘은 이제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해 예언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유배된 이스라엘 백성이 고향 땅으로 되돌아가게 하시고, 그 땅을 영원히 소유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다윗 가문의 임금과 다시 영원한 계약을 맺으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당신의 거처와 성전을 두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가장 깊이 절망한 순간에 가장 농도 짙은 희망을 선포하다

 

에제키엘이 꿈꾸는 미래의 왕국에서는 다윗의 후손이 임금이 되고, 누구도 사나운 짐승의 괴롭힘이나 굶주림, 노예살이와 전쟁의 공포나 수모를 경험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그들의 목자가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34,23-31 참조). 그분께서는 새로운 이스라엘에 새 마음과 새 영을 불어 넣어 주시어 이스라엘은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지닌 정화된 민족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부정에서 해방되고,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깨닫고 회개한 이들로서 에덴 동산처럼 재건된 예루살렘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36,16-38 참조).

 

에제키엘이 본 마른 뼈들에 대한 환시(37장 참조)는 새로워질 이스라엘의 모습을 가장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가능성이라곤 하나도 없던 마른 뼈들이 하느님의 명령으로 서로 결합되고 근육과 살과 피부가 생겨나며, 하느님의 숨으로 마른 뼈들이 모두 되살아나는 모습은 절망의 늪에 빠진 이들에게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더할 나위 없이 강렬하게 전했을 것입니다.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고 말하며 생존 의지를 상실한 유배 공동체를 흔들어 깨웠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영이 공동체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새롭게 살게 해 주실 것이라는 이 선포는 공동체가 새로운 의지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내적 힘을 불어넣어 주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미래를 위해 꿈을 꾸는 자는 다른 이들까지 꿈꾸게 할 수 있습니다.

 

가장 깊이 절망에 빠진 때에 활동한 예언자가 가장 농도 짙은 희망을 선포합니다. 절망의 심연속에 가라앉은 유배민들을 건져 올리려고 희망의 언어를 매우 구체적으로 빚어냅니다. 두루뭉술하고 모호한 말은 내적 힘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에제키엘은 미래의 청사진을 건축가가 하는 것처럼 꼼꼼하게 그려 냅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는 자신의 청사진을 유배민의 가정마다 걸어 두고 싶었을 것입니다. 절망의 언어가 그들의 삶을 헤살할 때마다 그 청사진을 쳐다보게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회복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리다

 

그가 꿈꾸는 회복된 이스라엘의 모습은 이러합니다. 그는 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이름이 적힌 두 나무토막을 하나로 연결하는 상징 행위를 통해 하느님께서 흩어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모두 모아 한 왕국을 만드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회복된 이스라엘은 남북 왕국이 통일되어 다윗 시대처럼 다시 한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37,15-28 참조). 그는 이스라엘의 참평화가 이룩될 날의 비전도 제시합니다. 세상에 잠재된 악이 존재하는 한 한시적일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의 참평화는 마지막 때에 이르러 완성될 것입니다.

 

38-39장은 일종의 묵시문학적 환시인데, 마곡 왕국이 하느님에 의해 파멸되는 마지막 때에 이르러 이스라엘은 완전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40-48장은 에제키엘 예언자가 가장 정성을 들여 만든 회복될 새 예루살렘에 대한 청사진입니다. 이 청사진은 기원전 573년에 환시 가운데 예루살렘의 높은 산으로 인도된 에제키엘이 본 것을 묘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에제키엘은 새 예루살렘에 세워질 성전의 규모와 성전 대문의 구조, 성전 내부의 모습을 자세하게 그려 보입니다. 이 성전에 주님의 영광이 되돌아올 것이며, 이곳에서 일하게 될 레위인들과 사제들의 의무가 무엇인지, 이스라엘의 새 경계와 땅의 분할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후들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규정합니다.

 

새로 세워진 성전의 제단 오른편에서 흘러 나오는 물은 생명수로 그 물이 흘러 들어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살아날 것이고, 그 물이 흐르는 강가 양쪽에 들어선 나무의 열매는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네 강이 흘러나와 온 땅을 적시듯, 예루살렘의 성전 제단은 사방으로 생명이 넘쳐흐르게 하는 곳이 되리라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새로워진 예루살렘은 ‘야훼 삼마’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될 터인데, 이는 ‘주님(야훼)께서 여기에 계시다’는 뜻입니다(48,35 참조).

 

희망을 설계하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만나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제 마음이 벅차올랐습니다. 그의 꿈으로 제 마음이 좀 더 희망에 가까워졌습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3월호(통권 468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아모스서]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김영선 루시아 수녀

 

 

요즘에 많은 이가 다양한 지역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광대무변한지 아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바깥세상뿐 아니라 우리의 내면 세계 역시 넓고 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면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이들은 아주 드뭅니다.

 

내면 세계로 여행을 떠나려면 눈과 귀를 닫을 필요가 있습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정보로부터 차단되면 그때부터 내면 세계가 소리를 내고 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여행의 초보자들이 우선 접하는 것은 그동안 철저히 외면하고 소외시킨 자기 내면의 소리와 모습입니다. 거기에는 결코 자랑할 거리가 못되는 욕심과 계산으로 가득 찬 소리가 있고, 외로움과 소외로 인한 울부짖음, 슬픔과 분노, 불안과 절망의 소리도 있습니다.

 

그런 소리에 조금씩 익숙해지면 점차 어떤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고 어떤 소리는 흘려보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내면 세계의 풍광에 제법 익숙해지고 여러 소리가 점차 고요해질 때가 되면, 그동안 들어 보지 못한 소리와 보지 못한 이미지가 가끔씩 들리고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내면에 하느님에게서 오는 수신음을 잡아내는 통신망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면으로부터 하느님의 소리를 들은 아모스 예언자

 

아모스 예언자는 바로 내면으로부터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는 사자의 포효 같아서 아모스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목양업자요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며 걱정 없이 살던 아모스는 남쪽 유다 사람이지만 자신이 들은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자 북왕국의 성소인 베텔로 갑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사전 경고를 하지 않으신 채 심판을 내리는 분이 아니시기에(3,7 참조), 북이스라엘에 닥쳐올 심판을 예고하고자 아모스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모스는 북이스라엘 땅에서 자행되는 부정을 가차 없이 고발하면서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라고 촉구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이라면 하느님을 올바르게 예배하고, 안식일을 지키며,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동료 이스라엘인을 정당하게 대우하고 정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아모스 예언자는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실상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그들 가운데 법적 정의가 어떻게 상실되었는지, 가난한 이들이 얼마나 착취당하는지, 부자들의 사치가 왜 문제가 되는지 신랄하게 고발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 행실을 고치지 않는 한 하느님의 심판이 내릴 것이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에게도 심판이 될 ‘주님의 날’

 

하느님께서는 아모스 예언자를 파견하시기 전에도 이미 여러 차례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하셨습니다. 하느님은 기근과 가뭄, 마름병과 깜부깃병, 메뚜기 떼를 보내시고, 전쟁과 파괴의 경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거듭된 경고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4,6-11 참조). 그들은 아모스 예언자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모스는 그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닥치게 될 ‘주님의 날’에 대해 말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고 있던 주님의 날이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물리치실 그날, 곧 이스라엘을 위한 희망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모스는 이것을 재해석하여, 주님의 날은 이스라엘에게도 심판의 날이 되리라고 선포합니다. 그날이 오면 이스라엘이 굶주림을 체험하게 될 텐데, 그 굶주림은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데서 오는 굶주림’이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찾아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떠돌아다녀도 찾아내지 못하리라”(8,12)고 경고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다인들이 포로 수용소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던 때에 그들은 정녕 이런 굶주림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절망을 이겨 낼 수 있는 하느님 말씀을 접하고 싶어도 성경책이 없어 그럴 수 없었습니다. 성경책을 소유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유다인들은 말씀에 대한 굶주림을 채우고자 각자 기억하는 성경 구절을 담배 종이에 써서 서로 돌려 가며 읽었다고 합니다.

 

아모스는 주님을 찾는 것이 유일한 살 길이라고 말하며, 선을 추구하고 정의를 실천할 것을 촉구합니다(5,4.6.14-15 참조).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경신례의 형식적 준수가 아니라 이웃을 참되게 사랑하는 것, 곧 사회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번제물과 곡식 제물 대신에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5,24)고 외칩니다.

 

아모스가 본 다섯 가지 환시

 

아모스 예언자는 환시를 통해 이스라엘의 어두운 미래를 보게 됩니다. 아모스 예언서에는 그가 본 이스라엘의 멸망에 관한 다섯 가지 환시가 전해집니다. 메뚜기 떼의 공격을 받는 이스라엘의 모습, 불에 타는 도성의 모습, 다림줄과 여름 과일 한 바구니, 성전의 진동에 관한 환시는 모두 이스라엘이 어떻게 멸망할 것인가를 미리 보여 주는 환시입니다.

 

처음 두 가지 환시를 보았을 때 아모스는 하느님께 간절하게 기도드립니다. “주 하느님, 제발 용서하여 주십시오. 제발 멈추어 주십시오. 야곱이 어떻게 견디어 내겠습니까? 그는 참으로 보잘것없습니다”(7,2.5). 아모스의 중재로 하느님께서는 백성을 심판하려는 의지를 거두십니다. 여기에서 아모스는, 예언자란 하느님의 심판 의지를 백성에게 알려 회개할 수 있도록 이끄는 사람일뿐 아니라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임을 보여 줍니다.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아모스 예언자가 북이스라엘에서 얼마간 예언 활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모스 예언서에 따르면 그는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에 의해 쫓겨납니다.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다시는 베텔에서 예언을 하지 마라. 이곳은 임금의 성소이며 왕국의 성전이다”(7,12-13).

 

이 말은 심판을 경고하는 예언자들의 운명이 어떠한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과연 예언자는 환대가 아니라 반대와 박해를 받는 사람이며, 아모스 예언자의 삶도 그런 면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모스는 자신을 내쫓는 아마츠야 사제에게 이렇게 응답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7,14-15). 그는 자신의 내면을 강하게 울리는 하느님의 소리를 거역할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으랴?”(3,8) 하고 말한 것입니다.

 

예언자가 거듭된 박해와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힘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들은 소리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말씀은 사람을 사로잡아 그를 변모시키며,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불어넣습니다.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는 아모스를 내쫓음으로써 그를 제압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마츠야는 아모스가 선포한 하느님의 메시지를 무효화할 수 없었습니다. 아모스는 베텔에서 쫓겨났지만 베텔과 북이스라엘의 주민은 “이스라엘은 제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가리라”(7,17)는 아모스의 예언대로 아시리아 제국 곳곳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아모스가 베텔에서 활동한 지 반세기가 지나기도 전인 기원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 제국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5,24)는 아모스의 권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변에 정의의 강물이 잘 흐르고 있는지, 혹여 고여서 썩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4월호(통권 469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호세아서]

사랑의 예언자 호세아

김영선 루시아 수녀

 

 

신학교에 다닐 때 한 교수 신부님이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에 관해 이야기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칼 바르트는 “그리스도인은 한 손엔 성경을 들고 다른 한 손엔 신문을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세상 가운데에서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고 전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느님 말씀이 뿌려지고 싹이 터서 열매를 맺을 터전인 세상이 어떤 밭인지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밭에 돌이 많다면 돌을 골라내야 말씀이 쉽게 싹 틔울 수 있을 것이고, 그 밭이 너무 메마르다면 물을 줘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신문이 전하는 세상의 모습은 과연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병들어 있습니다. 염치를 모르는 탐욕과 욕망으로 인간관계가 파괴되고 자연이 훼손되어 가는데, 이를 중단시킬 장치가 사회 어디에도 설치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가중시킵니다.

 

저는 한 손에 들린 신문이 전하는 현실, 또는 행간에 감춰진 실상 앞에서 통탄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손에 들린 성경에서 그 절망감과 맞서 싸울 희망을 길어 냅니다.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그 뜻한 바를 이루지 않고는 결코 헛되이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이사 55,10-11 참조).

 

이번 달에 제가 희망의 샘물을 끌어올리려고 찾아갈 샘터는 호세아서입니다. 호세아가 예언자로서 활동했던 시절이 우리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호세아가 자신의 시대를 향하여 외쳤던 하느님 말씀은 분명 우리 시대에도 울림을 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정치적 혼란기에 등장한 호세아 예언자

 

호세아는 기원전 8세기에 활동한 예언자로 북 왕국 출신입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의 임금 예로보암 2세 때부터 사마리아가 함락되기 직전까지, 곧 북 왕국이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정치 · 경제적으로 제2의 중흥기를 맞이하던 때에 예로보암 2세의 왕좌가 그의 아들 즈카르야에게 계승됩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여섯 달 만에 암살됩니다. 그를 시해한 살룸이 왕위에 오르지만, 그도 권좌에 오른 지 한 달 만에 므나헴에 의해 살해됩니다. 므나헴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아시리아가 팽창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칠 시기였기에 그는 해마다 은 천 탈렌트를 아시리아에 조공으로 바쳐야 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프카흐야는 통치 2년 만에 페카에 의해 살해됩니다. 페카 임금은 시리아의 르친 임금과 동맹을 맺고 아시리아의 팽창 정책을 저지해 보려 하였지만 유다의 아하즈 임금이 아시리아의 티글랏 필에세르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바람에 시리아-에프라임 동맹은 실패로 끝납니다.

 

결국 시리아는 멸망하고, 북이스라엘은 사마리아 성읍을 제외한 모든 도성을 잃게 됩니다. 그리하여 북이스라엘의 많은 유민이 아시리아로 유배됩니다. 페카 임금도 살해되는데 그를 시해한 호세아(엘라의 아들)가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임금이었습니다.

 

이처럼 북이스라엘의 정국이 혼란스러웠던 때에 예언자로 나선 호세아는 백성에게 현실을 직시하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바라보게 합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경험하는 현재의 모든 환란은 그들이 하느님을 저버리고 돌아선 때문이라고 설파합니다. 이스라엘의 성읍들이 범죄의 소굴이 되어 버린 것도, 음모와 살인이 끊어지지 않는 궁정과 외세의 잦은 침입, 우상 숭배와 그릇된 경신례가 만연된 것도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잊고 그들에게 풍요와 안전을 가져다 줄 것으로 보이는 다른 신들을 찾아 나선 까닭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고소장과 오늘 우리의 시대

 

호세아는 이스라엘 주민들을 고발하시는 하느님의 고소장을 제시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주님께서 이 땅의 주민들을 고소하신다. 정녕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신의도 없으며 하느님을 아는 예지도 없다. 저주와 속임수와 살인 도둑질과 간음이 난무하고 유혈 참극이 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땅은 통곡하고 온주민은 생기를 잃어 간다. 들짐승과 하늘의 새들 바다의 물고기들마저 죽어 간다”(4,1-3).

 

이 고소장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그 내용이 우리 시대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신의도 없으며 하느님을 아는 예지도 없다”(4,1)는 말씀은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관계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합니다.

 

4,2은 이것이 어떻게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면 인간관계도 파괴됩니다. 그래서 저주와 속임수와 살인, 도둑질과 간음이 난무하고 유혈 참극이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관계가 파괴되면 그 결과는 고스란히 자연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들짐승과 하늘의 새들 바다의 물고기들마저 죽어”(4,3)갑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심각한 환경 훼손 문제는 단순히 환경을 개선하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과 맺는 관계가 잘못되고 인간관계가 파괴되었다면, 환경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진실과 신의, 하느님을 아는 예지가 없는 이스라엘

 

이스라엘에 진실과 신의, 하느님을 아는 예지가 없다는 말씀이 지적하는 현실은 무엇일까요? 호세아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이상적 혼인 관계에 빗대어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혼인 관계의 표상을 빌어 표현한 첫 예언자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사랑의 예언자’라는 별칭으로 불립니다.

 

이상적 혼인의 3대 특징은 상호성, 항구성, 배타성입니다. 이상적 혼인에서 부부의 사랑은 한쪽 배우자의 일방적 사랑이 아니라 상호적 사랑이어야 하며, 동시에 항구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혼인 서약문에서 부부는 상대방을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사랑하고 존경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또한 부부간의 사랑은 배타적입니다. 배우자와 나누는 사랑은 오직 배우자만을 위한 것으로 다른 누구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신의가 없다’는 지적은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나누어야 할 상호적 사랑에 결핍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한결같은 사랑(헤세드)을 베푸신다면 이스라엘도 신의(헤세드)로 그 사랑에 응답해야 할 터인데,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그 신의를 드리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사랑은 변덕스럽기까지 합니다. 이스라엘에 ‘진리가 없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이 항구하지 못함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진리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메트’는 항구함과 굳건함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또한 ‘하느님을 아는 예지’가 없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안다’는 것은 남녀가 성적으로 결합하여 서로를 깊이 나눔으로써 얻게 되는 상호 이해를 내포하는 것으로, 이러한 앎은 배타성을 요구합니다. 다른 누구와도 이런 동일한 깊이의 앎을 갖지 않을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느님만 배타적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를 두고 호세아는 하느님을 아는 예지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과의 신의를 깨트리고, 그분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망각한 채 달콤한 환상으로 유혹하는 거짓 신들을 찾아 헤맵니다. 그들이 하느님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삶의 본질과도 멀어집니다. 그들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낳는데, 자신에 대한 왜곡된 이해는 왜곡된 관계 맺음을 낳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호세아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에 마주 보게 되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간절하게 호소합니다. 하느님밖에는 다른 구원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멸망해 가는 것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하시는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사자로서 이스라엘이 망각한 하느님의 사랑을 놀라운 방법으로 일깨우게 될 것입니다. 호세아가 전하는 그 사랑에 귀기울이고 감격하여 하느님께 돌아가기 위해 다음 달에도 호세아의 샘터로 물을 길으러 가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5월호(통권 470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호세아서]

사랑을 선포하는 호세아

김영선 루시아 수녀

 

 

구약성경에서 우물은 매우 특별한 장소입니다. 성경의 몇몇 위대한 인물은 자기 배필이 될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사악의 신붓감이 될 레베카를 아람 나하라임의 우물가에서 만나고, 야곱은 라헬을, 모세는 치포라를 우물가에서 만납니다. 고대 사회에서 우물은 적어도 하루에 한두 번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소로 소통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습니다.

 

수도꼭지만 틀면 물을 쉽게 얻을 수 있는 현대인에게 우물가에 대한 기억은 잊힌 것이거나 낯선 이야기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아주 오랫동안 소통의 장소였던 우물이 사라진 명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물을 얻기 위해 물동이를 지고 우물가로 향하던 여인들의 발자국 소리, 그들 사이에 오갔을 이야기와 웃음소리는 이제 기억 속에만 존재합니다.

 

이달에도 호세아의 샘터로 물을 길으러 갈 것입니다. 호세아의 샘터로 나아가는 여정은 과거로 향하는 여행입니다. 기원전 8세기에 활동한 예언자를 만나는 여정이라는 점에서 그러하지만, 잊힌 명소가 되어 버린 우물을 찾아 나선다는 점에서도 그러합니다. 이는 우리 각자의 과거와 만나는 여정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과거를 돌아보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것입니다.

 

“악을 갈아서 불의를 거두어들이고 거짓의 열매를 먹었다”(10,13)

 

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돌아와 신의와 공정을 지키고, 그분께만 희망을 두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역사를 돌아보라고 말합니다(9,10-13,15 참조). 과거의 삶을 그들의 시선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의 시작은 아름답고 생명력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 이스라엘은 광야의 포도송이 같았다. 내가 처음 보았을 때 너희 조상들은 첫 절기의 무화과나무 맏물같았다”(9,10).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싱그러움과 아름다움을 점차 잃어 갑니다. 이집트를 떠나 모압 평원인 바알 프오르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모압의 신들을 섬겼고(민수 25,1-18 참조), 요르단 강을 건너 길갈에 도착하였을 때에도 악행을 저질러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가지가 무성한 포도나무처럼 열매를 잘 맺던 이스라엘이 이방 신들을 위한 제단과 기념 기둥을 세우고, 단과 베텔에서 송아지를 숭배하여 멸망에 이르게 될 길에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기브아에서 행한 이스라엘의 범죄 역시 징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여 백성이 어디에서부터 어긋나게 되었는지 깨닫게 해 줍니다. 나아가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해 꾸신 꿈이 무엇이었는지 상기시킵니다. 이스라엘은 길이 잘 든 암소로 하느님께서는 이 암소에게 쟁기를 끌게 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세상이라는 밭을 갈아 정의의 씨앗을 뿌리고 신의를 거둘 사명을 주실 것입니다. 정의가 비처럼 내릴 때까지 그들은 묵은 땅을 갈아엎게 될 것입니다(10,11-12 참조).

 

그러나 이스라엘은 세상에 정의의 씨앗을 뿌리는 대신 “악을 갈아서 불의를 거두어들이고 거짓의 열매를 먹었”(10,13)습니다. 예언자는 이제 그들이 스스로 행한 악 때문에 망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지난 삶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우리의 원래 모습은 어떠했는지, 언제, 어떻게, 왜 그 모습을 잃게 되었는지 살펴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무엇이었으며, 우리를 위해 간직하신 꿈은 무엇이었는지 자문해 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11,8)

 

11장에 이르면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는 호세아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더 깊은 호소력을 지니게 됩니다. 이제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위해 하느님께서 보여 주셨던 사랑의 역사를 돌아보라고 합니다.

 

우리는 갓난아이였을 때 어머니가 어떤 정성으로 우리를 돌보았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머니가 간간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짐작할 따름입니다. 제 막내 여동생은 첫 아이를 낳고 나서야 비로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주며 키워 준 어머니의 사랑을 절감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호세아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어머니처럼 극진한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돌봐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 이집트에서 불러내시어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품에 안아 주셨습니다. 아이가 아프면 밤새 보살피는 어머니처럼 이스라엘을 돌보셨고, 아이가 마음껏 놀 수 있게 하면서도 혹여 다칠세라 시선을 떼지 않으셨습니다. 젖먹이처럼 들어올려 볼을 비비고, 이유식이 따로 없던 시절에 한 것처럼 음식을 씹어 아이에게 먹여 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실수록 그분에게서 멀어져만 갔습니다.

 

그 이스라엘을 향해 하느님께서 애타게 말씀하십니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11,8).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하는 이스라엘의 행실은 하느님을 분노케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망해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11,9)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회복시킬 것이며, 유배된 이스라엘이 돌아올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11,10-11 참조).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14,5)

 

11장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의 역사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라면, 12-13장은 이방 신과 강대국에 의존하려 한 이스라엘의 배반의 역사를 드러냅니다. 이로써 예언자는 청중이 자신의 배은망덕을 깨닫고 진심으로 통회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 때 우리는 자신의 배반을 아파할 수 있게 됩니다. 호세아는 이를 매우 잘 알고 있었기에 먼저 하느님의 사랑의 역사를 돌아보게 한 것입니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며 그 안에 빼곡하게 수놓인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한 자는, 그 사랑을 모른 채 방황하고 울부짖으며 다른 곳에 눈을 돌렸던 배반의 역사 또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들에게 아무 염려 말고 주님께 돌아오라고 호소합니다. 그들이 진심으로 주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반역만 꾀하던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14,5)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시면 그들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의 삼목처럼 자라게 될 것입니다(14,6-9 참조).

 

그들이 광야 시대의 그 순수한 사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시 아내로 맞이하고 번창하게 하실 것입니다(2,1-3.23-25 참조).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영원한 혼약을 맺으시며, 하느님의 약혼 선물은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이 될 것입니다(2,21-22 참조). 그러면 이스라엘은 그들의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알게 될 것입니다.

 

훗날의 역사는 호세아의 이 간절한 호소가 북이스라엘의 운명을 역전시킬 만큼 결실을 맺지 못했다고 알려 줍니다. 그러나 당신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차마 저버리지 못하고 끝내 사랑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호세아의 놀라운 예언은 이후의 예언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제 우리가 호세아의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야 할 차례입니다. 그 물을 마시고, 그 물로 정화되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6월호(통권 471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미카서]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

김영선 루시아 수녀

 

 

이스라엘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된 사건입니다. 이집트를 떠나 시나이 산에 이르는 여정이 새로운 정체성을 얻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면, 시나이 산을 떠나 모압 평원에 이르는 과정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 배우는 여정이었습니다. 이 여정에서 이스라엘이 얼마나 자주 실패하였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서도 다른 신들을 섬기고, 하느님의 극진한 보살핌을 체험하면서도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에 의존하고자 했습니다. 참된 믿음에 이르는 우리의 여정 역시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참된 믿음에 이르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참된 믿음은, 내 것이라고 움켜쥔 삶의 주도권을 주님께 내어 드리는 때부터 시작됩니다. 삶의 주도권을 주님께 내어 드린 이는 주님께 바라는 것보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더 많이 질문하게 됩니다.

 

이번 호에 만나게 될 미카 예언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단순하지만 명료한 답을 줍니다.

 

이사야 예언자와 동시대인인 미카 예언자

 

기원전 8세기에 활동했던 예언자 미카는 이사야 예언자와 동시대인입니다. 1열왕 22,1-12에 소개되는 이믈라의 아들 미카야라는 예언자와 다른 인물입니다. 이믈라의 아들 미카야가 아합 임금 시절, 곧 기원전 9세기에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다면 예언자 미카는 요탐과 아하즈, 히즈키야 임금 시대에 유다 왕국에서 활동했습니다. 미카의 고향은 모레셋으로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4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성읍입니다. 이것이 미카 예언자의 신상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미카의 활동 시기를 살펴보면 미카 예언자가 경험했을 일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미카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기원전 722년)과 기원전 701년에 일어난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의 공격을 직접 경험했을 것입니다. 산헤립이 남긴 역사 기록에 의하면 히즈키야 임금 시절에 그는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 주변 성읍 46개를 파괴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히즈키야 임금이 더 많은 조공을 바치고 항복함으로써 예루살렘은 겨우 파괴를 모면하였다고 산헤립의 기록은 전합니다.

 

미카의 고향 모레셋은 산헤립의 침공 때 파괴되었을 것입니다. 미카는 자신이 목격한 끔찍한 파괴의 재앙을 유다 왕국에 닥칠 더 큰 위기에 대한 전조로 해석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주민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불의와 우상 숭배를 일삼습니다. 미카는 앞으로 닥칠 하느님의 무서운 심판을 경고하며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미카의 애가 “아, 애달프고 애달프다”

 

미카는 유다에 닥칠 재앙을 경고하기 위해 산헤립의 침공으로 파괴된 성읍들의 실상을 들려줍니다. 폐허가 된 열두 성읍에 바치는 미카의 애가(1,8-16 참조)에는 예언자의 깊은 슬픔이 배어 있습니다. 열두 성읍의 이름과 각 성읍에 닥친 불행을 연결한 미카의 언어유희는 번역될 수 없는 것이기에 독자 여러분을 위해 그의 말투를 조금 흉내내어 보겠습니다.

 

“아, 애달프고 애달프다. 내 백성이 무너지는 모습에 내 억장이 무너지는구나. 미아동의 아이들은 모두 미아가 되어 슬피 울며 거리를 헤매고, 오류동의 주민들은 오류에 빠진 듯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삼성동에는 세 개의 별이 떨어져 쑥대밭 같은 세상이 되었고, 가리봉동 사람들은 갈가리 흩어져 가는구나. 방배동 사람들은 저마다 방을 빼고 이주하여 동네가 텅비었고 명륜동에서는 명륜이 사라져 버렸다. 이는 모두 국회의사당을 들락거리는 이들이 민심은 무시하고 자기네 돈주머니만 신경 쓴 까닭이다. 동네마다 죄악이 넘쳐흘러 한강물을 온통 오염시키는데도 정수기만 있으면 된다고 외치는 저자들 때문에 도시가 죽어 간다. 아, 애달프고 애달프다”(이는 미카의 애가에 대한 단순한 패러디일 뿐, 실제 장소와 그 장소와 관련된 내용은 현실과 전혀 무관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상속 재산을 가로채는 착취자와 정치 지도자들, 다가올 재앙을 부인하며 평화를 외치는 타락한 종교 지도자와 예언자들을 미카는 차례로 비판하며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 때문에 시온은 갈아엎어져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폐허 더미가 되며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수풀 언덕이 되리라”(3,12).

 

이 예언이 예레미야 예언서에도 인용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예루살렘 성전 대문에 서서 회개하지 않으면 성전이 파괴되고 말 것이라고 예언하자 사람들은 그를 죽이려 합니다. 그때 지방의 원로들 가운데 몇 사람이 미카의 예언을 인용하여 예레미야를 변호합니다(예레 26,17-19 참조).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네 하느님과 함께 걸어라 불의와 우상 숭배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된 원인이었지만, 예루살렘은 ‘오므리의 규정과 아합 집안의 모든 행위’를 반복하면서도 그들만은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카는 폭력을 일삼고 거짓을 말하며 부정한 저울로 속이는 유다의 주민을 향해 파멸의 날이 오기 시작했다고 선언합니다. 파멸의 날이 닥치면 그 어떤 노력도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들은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씨앗을 뿌려도 수확하지 못하고 포도를 밟아도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6,11-16 참조).

 

미카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고소장을 제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산들과 언덕들을 법정의 증인으로 초대하며 당신의 자비를 과신하는 백성을 고소하십니다. “내 백성아,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였느냐? 내가 무엇으로 너희를 성가시게 하였느냐? 대답해 보아라”(6,3). 당신께서 이스라엘을 구원의 은총으로 이끌어 주었는데 왜 이스라엘은 그릇된 길을 걷기만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되묻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고 무엇을 가지고 높으신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합니까? … 수천 마리 숫양이면, 만 개의 기름 강이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죄를 벗으려면 내 맏아들을, 내 죄악을 갚으려면 이 몸의 소생을 내놓아야 합니까?”(6,6-7)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미카 예언자가 말합니다.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6,8)

 

이 말은 신앙의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을 모두 아우르는 것입니다. 과연 유다교의 라삐들이 613항에 이르는 유다인의 율법을 가장 훌륭하게 요약한 것으로 이 말을 여겨 온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함께 겸손하게 걷는 일은 이웃을 정의롭게 사랑하는 일과다르지 않습니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는 일은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함께 걷는 자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을 멀리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겸손하게 하느님과 함께 걷는 자는 새로운 하루의 첫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먼저 하느님의 발자국이 어디에 있는지 찾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 걸으며, 그분이 만나게 해 주시는 모든 이를 정의와 신의로 대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경건한 이’, ‘올곧은 이’를 간절하게 찾고 계십니다(7,2 참조).

 

[성서와 함께, 2015년 7월호(통권 472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나훔서] 위로자 나훔

김영선 루시아 수녀

 

 

누구나 어린 시절에 무엇인가에 놀라 겁에 질렸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아이가 공포에 질려 울부짖으면 어머니나 아버지는 아이를 안고 달래면서 아이가 두려워하는 대상을 향하여 혼내거나 쫓아내는 시늉을 합니다. 그러면 아이는 안심하고 울음을 그칩니다. 아이가 두려워하는 대상보다 부모의 힘이 더 크다고 믿는 아이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안심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나훔 예언서를 가만히 읽다 보면 공포에 짓눌린 어린아이를 안심시켜 주는 어머니처럼, 유다 백성에게 용기와 힘을 불어넣어 주려고 애쓰는 예언자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나훔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위로받은 이’인데, 사실상 예언자는 ‘위로를 주는 이’입니다.

 

위로를 주는 이

 

나훔의 메시지가 왜 위로가 되는지 알려면 예언서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3장밖에 되지 않는 비교적 짧은 예언서의 주된 내용은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네베의 멸망에 관한 것입니다. 니네베는 기원전 612년에 바빌론에 의해 파괴되었으므로, 이 예언은 분명히 그 전에 선포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일까요? 3,8-10은 기원전 664년에 이집트의 테베가 아시리아 전성기의 마지막 임금 아슈르바니팔에 의해 침략과 약탈을 당한 사건을 언급합니다. 테베는 완벽하다고 할 만큼의 방어벽을 갖추었고, 에티오피아와 풋, 리비아의 협력을 받는 이집트의 으뜸가는 성읍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시리아에 의해 공략되었다는 사실은 아시리아의 가공할 만한 힘을 온 세상에 드러낸 것입니다. 이미 아시리아의 강력한 영향권 아래 고통을 겪던 유다 백성에게 이 사건은 더욱 큰 절망감과 공포를 안겨 주었을 것입니다. 만약 나훔의 메시지가 이 사건 직후에 선포된 것이라면, 그의 메시지는 분명히 유다 백성에게 커다란 위로와 위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느님 복수하시는 주님”

 

나훔 예언자는 공포에 질려 있는 유다 백성에게 용기와 힘을 불어넣어 주기 위하여 먼저 하느님에 관한 노래(1,2-8)를 부릅니다. 이 노래는 시의 각 연을 시작하는 단어의 첫 글자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나타나는 알파벳 시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알파벳 첫 글자인 알렙에서 열한 번째 글자인 카프까지만 나오는 불완전한 알파벳 시편입니다. 예언자는 이 노래를 통하여 하느님의 놀라운 힘을 상기시키며,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의탁하는 약자의 편이 되시어 약자가 당한 고통을 되갚아 주는 복수의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노래의 첫 구절인 1,2에서 예언자는 하느님을 “질투하시는 하느님, 복수하시는 주님, 복수하시는 주님, 분노의 주. 주님은 당신의 적대자에게 복수하시고, 당신의 원수에게 분노를 쏟으시는 분”(필자 직역)이라고 노래합니다. ‘복수’라는 단어가 한 절 안에 세 번이나 사용될 만큼 하느님의 분노에 찬 복수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언자가 이토록 강력하게 하느님의 복수를 강조하는 것은 아시리아의 지배 아래 고통받는 유다 백성을 위로하고 안심시키기 위함이지 하느님이 그렇게 잔인하고 무서운 분이심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덧붙여 말합니다. 지금 당장 하느님의 복수가 지연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거두신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하느님은 ‘당신께 맞서는 자들을 홍수로 끝장내시고, 당신의 원수들을 저 깊은 어둠으로 쫓아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1,8 참조).

 

예언서의 첫째 단락이 유다 백성의 편이 되어 주시는 하느님의 힘에 관한 노래라면, 둘째 단락(1,9-2,3)은 유다와 니네베에 관한 신탁입니다. 이 단락에는 아시리아에 대한 심판 신탁과 유다를 위한 구원 신탁이 교대로 나타납니다. 1,9-11이 아시리아를 향한 심판 선언이라면 1,12-13은 유다를 위로하는 말입니다. 1,14은 다시 아시리아를, 2,1은 유다를 향한 신탁이고, 2,2은 아시리아의 멸망을 선언하는 말이며, 2,3은 유다를 위로하는 말입니다. 이는 우는 아이를 달랠 때 엄마가 아이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가 아이를 괴롭히는 가상의 원수를 혼내기 위해 어둠을 향해 호통치기를 번갈아 하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이 신탁의 내용을 요약하면 아시리아가 유다에게 저지른 만행은 곧 주님을 거스른 행위이기에 주님께서 손수 나서 그들을 끝장내실 것이며, 유다는 아시리아의 사슬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셋째 단락(2,4-14)은 아시리아의 패망에 관한 예언이고, 넷째 단락(3,1-19)은 멸망한 도성 니네베를 묘사한 것입니다. 이 두 단락은 지금 유다를 괴롭히는 아시리아가 주님의 손에 의해 반드시 멸망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림처럼 그려 보임으로써 유다 백성에게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과 희망을 불어넣어 줍니다. 예언자가 그려 보이는 아시리아의 멸망에 대한 그림에는 아시리아 군대의 잔인함과 위압적 힘을 목격한 이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2,4-7은 니네베를 공격할 주님의 군대에 대한 묘사인데, 이는 수많은 성읍을 공략했던 아시리아 군대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자주색 갑옷과 붉은 방패, 화살막이와 번쩍이는 병거, 날카로운 창은 아시리아 군대의 전형적 특징입니다. 물로 둘러싸인 성읍마저 공략한 아시리아의 수병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공기주머니를 사용하여 지하의 수문을 공략하는 방법으로 성읍을 점령하곤 했습니다.

 

주님의 군대를 묘사하는 이 단락은 하느님께서 아시리아군이 다른 성읍들을 점령할 때 사용한 방법을 그대로 적용하여 니네베를 공략할 것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물로 둘러싸인 도성 니네베는 점령될 것이며, 아시리아 군대가 다른 성읍에서 한 것처럼 그곳의 왕후는 끌려 나가고 시녀들은 이를 두고 슬퍼하게 될 것입니다(2,8 참조). 그 도성에 보관된 모든 금은보석은 약탈당하고, 폐허가 된 도성을 보고 모든 이가 기막혀 할 것입니다. 아시리아 궁정의 최대 오락인 사자 사냥을 위해 사자를 사육하던 사자 굴도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며, 병거는 모두 불에 타고 아시리아의 모든 영화는 사라질 것입니다.

 

멸망한 도성 니네베를 묘사하는 마지막 단락(3,1-19)은 아시리아 군대가 다른 성읍들을 점령하였을 때 행한 잔혹한 행위가 그 도성에 고스란히 재현될 것임을 선언합니다. 도성은 피로 물들어 도처에 살해된 주검이 널리고, 노략질은 그치지 않습니다. 백성은 산산이 흩어지고 귀족과 고관들은 포로가 될 것입니다. 아시리아의 요새들이 다 적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군대가 무력해지면 하늘의 별만큼 많던 상인, 수비병과 관리, 목자와 군관도 사라져 도성은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시리아의 악행에 시달리던 주변 민족들은 아시리아의 멸망을 두고 손뼉을 치며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예언자

 

나훔은 아시리아가 맹위를 떨치던 어두운 시대에 어쩔 수 없이 강자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던 유다 백성이 그 시대를 주님에 대한 굳건한 희망으로 지탱해 갈 수 있도록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예언자입니다. 비록 적들이 사자처럼 크고 두려울지라도 주님께서 기필코 승리하신다는 신앙의 확신을 전한 예언자입니다.

 

과연 나훔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기원전 612년에 니네베는 바빌론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고 아시리아의 영화는 사라졌습니다. 역사의 참된 주인이 누구인지 알 때 우리는 일시적으로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악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악은 종종 그가 사용한 수법대로 멸망한다는 역사의 증언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훔 예언자가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복수의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8월호(통권 473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스바니야서]

득달같이 닥쳐올 ‘주님의 날’

김영선 루시아 수녀

 

 

성경과 그 배경을 충분히 알지 못한 채로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당혹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오늘 함께 읽게 될 스바니야 예언서도 그렇습니다. 예언자는 주님의 날이 득달같이 다가오고 있다고 선포하는데, 그날은 “분노의 날 환난과 고난의 날 파멸과 파괴의 날 어둠과 암흑의 날 구름과 먹구름의 날”(1,15)이라고 말합니다.

 

누가 이런 날을 고대하겠습니까? 우리를 두려움으로 떨게 만드는 이런 날이 ‘주님의 날’이라면 아무도 그런 주님을 맞이하러 나서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바니야 예언자의 메시지를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예언은 특정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그 시대의 사람들을 위하여,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선포된 것입니다. 예언자의 메시지를 이해하려면 스바니야 예언자가 활동한 시대가 어떠했으며, 어떤 사람들에게, 왜 그런 메시지를 선포하였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왜 예언자를 통하여 그러한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셨는지를 알아차릴 때, 비로소 우리는 그 메시지를 지금 내 삶에, 우리 시대의 삶에 적용할 수 있게 됩니다.

 

신앙에 회의적인 백성을 향하여

 

스바니야 예언자가 예언자로 소명을 받게 된 때는 기원전 630년경이었습니다. 유다 임금 므나쎄의 아들 아몬이 임금으로 즉위한 지 2년 만에 반(反)아시리아파 관리들에 의해 살해되어, 여덟 살 난 요시야가 임금으로 등극한 뒤였습니다. 유다 임금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통치하였던 므나쎄(기원전 697-642년)는 아시리아 제국의 팽창 정책의 영향 아래 일관된 친(親)아시리아 정책을 펼쳤습니다.

 

므나쎄의 오랜 통치는 스바니야 예언자가 지적한 대로, 유다에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종교적 혼합주의가 만연하여 아시리아의 천체 숭배가 도입되었고, 암몬족의 신 밀콤을 숭배하는 이들도 있었으며(1,5 참조), 가나안의 신들도 숭배되었고, 거짓 예언자들의 활동과 사제들의 타락도 나타났습니다(3,4 참조). 관리들은 외국의 풍습을 모방하고(1,8 참조), 폭력과 사회 불의가 어디서나 목격되었습니다(1,9; 3,1-3 참조). 사람들은 하느님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고 신앙에 회의를 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은 선을 베풀지도 않고 악을 내리지도 않으신다”(1,12)고 말하며 제멋대로 행동했습니다. “주님에게서 돌아선 자들, 주님을 찾지도 않고 주님에게 문의하지도 않는 자들”(1,6)이 생겨났습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어떤 교훈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않는 자들이 많았습니다(3,2 참조).

 

이렇게 신앙에 대해 회의적인 분위기를 향하여, 스바니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기나 하는가? 그분이 정녕 역사의 주인이신가? 역사는 그저 힘센 자들의 손에 의해 엮이는 것이 아닌가?’ 이런 회의적 질문을 던지는 이들을 향하여 스바니야는 주님께서 당신의 권능을 온전히 행사하실 그날, 주님의 날이 곧 닥쳐 올 것임을 선포합니다. ‘주님의 날’은 이미 예언자 아모스가 선포한 바 있습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아모스가 선포했던 주님의 날 개념을 더욱 확장시킵니다.

 

주님의 날

 

주님의 날은 모든 것이 땅 위에서 말끔히 쓸려 나가는 날, 곧 창조의 붕괴가 이루어지는 날이요(1,2-3 참조), 온갖 악인과 죄인이 심판 받고 멸망하게 되는 날이며, 총체적 전복과 공포와 파멸, 우주적 대이변이 일어나는 때가 될 것입니다(1,14-18 참조). 이때 우상 숭배자와 주님을 멀리한 자들, 폭력과 속임수에 가담한 자들, 외국 풍습에 젖은 자들, 정치 지도자들과 상인들, 살아 계신 주님을 부정하는 자들은 모두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날에는 필리스티아와 모압, 에티오피아와 아시리아, 예루살렘이 모두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2,4-3,8 참조). 주님의 법을 실천하는 정의롭고 겸손한 이들만이 그 화를 면할 것입니다(2,3 참조).

 

스바니야가 선포하는 주님의 날은 무차별 살상의 날이 아니라 세상의 악이 제거되는 날입니다. 그러기에 예언자는 곧 다가올 주님의 날을 대비하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찾아라,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아! 의로움을 찾아라. 겸손함을 찾아라. 그러면 주님의 분노의 날에 너희가 화를 피할 수 있으리라”(2,3) 하며 호소합니다.

 

주님의 날은 어둡고 두렵기만 한 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세상의 죄악과 교만을 제거하시는 그날이 오면 모든 민족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을 섬기고, 그분을 예배하러 밀려들 것입니다(3,9-10 참조).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은 주님 안으로 피신하여 평화와 안녕을 누릴 것입니다(3,12 참조). 그들 가운데는 더 이상 불의와 거짓이 없을 것(3,13 참조)이며, 주님께서 예루살렘 한가운데 계시면서 예루살렘을 두고 기뻐하실 것(3,14-18ㄱ 참조)입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불행과 억압이 영원히 사라질 것(3,18ㄴ-19 참조)입니다.

 

그날에 주님께서는 흩어진 당신의 백성을 모두 불러 모으시고, 그들의 운명을 되돌리시어 세상 모든 민족 가운데서 다시 칭송과 명성을 얻게 해 주실 것입니다(3,20 참조). 그렇게 되면 에티오피아 강 너머에서도 주님을 숭배하는 자들이 선물을 가지고 주님께 경배하기 위해 몰려오게 될 것입니다(3,10 참조).

 

따라서 스바니야 예언자가 선포한 주님의 날은 지구 종말의 날도 아니고 세상과 역사가 끝나는 날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사악함과 불의가 종식되는 날이요, 세상이 정화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시련을 통해 정화된 남은 자들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날입니다.

 

내 생애 마지막 날에는

 

스바니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방관하고 계신다고 여기고 멋대로 불의와 억압을 행사하며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는 이들과, 약하고 보잘것없는 민족을 힘으로 제압하는 나라들을 향하여 그들의 악이 심판받을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질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이 선포는 악으로부터 돌아서서 살 길을 찾으라는 호소와 다르지 않습니다.

 

동시에 예언자는 세상의 불의에 물들지 않고 여전히 하느님께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 하느님을 신뢰하며 하느님의 승리를 고대하는 아나윔(주님의 가난한 이들)을 격려합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그런 날들이 곧 올 것이므로 현재 걷고 있는 길에 충실하도록 격려합니다.

 

이제 스바니야의 메시지는 더 이상 당혹스럽지도 낯설지도 않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하느님의 정의는 어디엔가 꼭꼭 숨어 있기만 한 듯합니다. 너무도 당당하게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행사하면서도 하느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을 우리는 어디서나 마주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주님의 날은 있지도 않을 것처럼 사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바니야가 말한 것처럼, 분명히 선택의 기회가 언제까지나 주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 이상 제 행위를 수정하거나 바로잡을 수 없을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일지 알 수 없기에 매일 준비해야만 합니다. 내 생애의 마지막 때에 내 손에 들려 있게 될 자화상이 어떤 모습일지를 생각하면서….

 

[성서와 함께, 2015년 9월호(통권 474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하바쿡서]

믿음으로써 변화한 하바쿡

김영선 루시아 수녀

 

 

주님을 따르는 여정에 어느 정도 깊숙이 들어서면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걱정에서 풀려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게 여겨져서도 아니고,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해졌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그날에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신다는 깊은 믿음이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대한 걱정에서 풀려난 만큼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을 것입니다(마태 6,33 참조). 하느님을 외면하기에 점점 더 심화되는 세상의 폭력과 악에 대한 염려와 안타까움, 그리고 그 폭력의 피해자가 된 이들에 대한 깊은 연민은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와 양식으로 그들의 삶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오늘 우리가 만나게 될 예언자 하바쿡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하바쿡과 하느님의 대화

 

하바쿡 예언서는 예언자 자신에 대한 정보는 거의 전하지 않습니다. 예언서의 내용을 볼 때, 그가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아시리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국제 무대를 장악한 기원전 7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에 활동했던 예언자라는 것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예언자가 다니엘서의 마지막 부분에도 등장합니다. 다니 14,33-39에 따르면, 추수꾼들에게 나눠 줄 국과 빵을 들고 가던 하바쿡 예언자가 주님의 천사의 손에 정수리가 잡힌 채 다니엘이 갇혀 있던 바빌론의 굴로 날아가서 다니엘에게 음식을 주고 왔다고 합니다. 다니엘에게 음식을 날라다 준 예언자가 왜 하바쿡이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어떤 전승이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하바쿡 예언서를 읽어 보면 다른 예언서와는 무척 다르다는 인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른 예언서가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하신 말씀을 담고 있다면, 하바쿡 예언서는 예언자와 하느님의 대화가 주된 내용입니다. 이 대화의 내용이 하바쿡의 인격을 드러냅니다. 그는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대변하여 하느님께 말씀드립니다.

 

예언자는 악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하느님께 불평과 탄원을 터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탄원을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예언자의 두 차례 불평(1,2-4과 1,12-17)과 하느님의 두 차례 응답(1,5-11과 2장)이 번갈아 나오고, 마지막에 예언자의 기도(3장)가 덧붙여집니다.

 

하바쿡의 불평과 하느님의 심판 선언

 

하바쿡의 첫 번째 불평은, 왜 하느님께서는 의인이 불의를 겪으며 살도록 허락하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언자가 제아무리 폭력과 억압을 고발하고 외쳐도 하느님께서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으시니, 토라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정의가 왜곡되지 않느냐며 하바쿡은 하느님께 따져 묻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답하십니다(1,5-11). 세상의 불의를 단죄하기 위하여 사나운 민족인 칼데아인들을 보낼 것이라고 이르십니다. 칼데아인들이란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지칭하는 것이니, 그 제국의 군대가 곧 들이닥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다른 나라의 땅을 빼앗고 법과 권위를 멋대로 내세우는 난폭한 이들로서 제 힘을 하느님처럼 여기는 죄인입니다. 이들 역시 결국 바람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예언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언자의 두 번째 불평(1,12-17)은, 왜 하느님께서는 악인의 불의를 벌하지 않고 내버려 두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바쿡은,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이스라엘의 악을 심판하고 제거하기 위해 보내신 하느님의 도구임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도구인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실은 이스라엘보다 더 악한 자라고 예언자는 고발합니다. 그리고 악인이 의인을 처벌해도 되는 것이냐고 하느님께 따져 묻습니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행위는 잔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들은 유다인들을 마구 포로로 잡아가고 무자비하게 죽였습니다.

 

예언자의 불평을 들으신 하느님께서 또 답하십니다. 악을 행하는 이들은 모두 스러질 것이며, 오직 의인들만이 성실함을 통해 살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인에 대한 심판 선언은 “불행하여라”라는 말로 시작하는 다섯 가지 불행 선언을 통하여 선포됩니다.

 

첫째 불행 선언(2,6ㄴ-8)은 다른 이의 것을 강탈하는 자를 향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폭력을 휘두른 만큼 그들도 다른 이들의 약탈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둘째 불행 선언(2,9-11)은 탐욕스러운 자를 향합니다. 다른 이에게서 부당한 이익을 취한 이들은 그들이 한 그대로 수치를 입게 될 것임이 선언됩니다. 셋째 불행 선언(2,12-14)은 불의한 자를 향합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이 애써 세운 성읍을 허물고 불의로 자신들의 성읍을 세웠지만 그들의 성읍 역시 허물어질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넷째 불행 선언(2,15-17)은 무법자를 향합니다. 다른 이를 모욕하고 굴욕을 안겨 준 그들 역시 같은 폭력의 피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 불행 선언(2,18-20)은 우상 숭배자를 향합니다. 그들은 우상 숭배의 헛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결국 불의와 폭력을 행한 자는 모두 주님의 현존 앞에서 할 말을 잃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하바쿡의 기도

 

마지막에 소개되는 예언자의 기도는 본래 하바쿡 예언자의 작품인지 혹은 후대에 덧붙여진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주어진 문맥에서 이 기도를 해석한다면, 예언자는 하느님의 힘을 보여 달라고 간청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듣고 알았던 주님의 명성과 그 업적을 이 시대에도 경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윽고 예언자는 환시 가운데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옛부터 알았던, 파란 산에서 올라오시는 크고 두려우신 하느님, 당신의 기름부음받은이, 곧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몸소 올라오시는 하느님을 뵙습니다. 거대한 물결이 출렁이는 바다를 짓밟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고 예언자는 그분을 신뢰한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고백에는 가슴 아픈 현실에 대한 그의 시선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화과나무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는 딸 것이 없고 밭은 먹을 것을 내지 못할지라도 우리에서는 양 떼가 없어지고 외양간에는 소 떼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3,17-18). 예언자의 기쁨은 현실이 만족스럽기 때문에 솟아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의 현실은 결코 기뻐할 만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서 이루실 미래의 모습을 앞당겨 체험하면서 현실을 이겨 낼 힘을 길러 냅니다. 예언자는 실의에 빠진 유다 민족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세상의 악에 절망하지 않도록 독려합니다. 하느님의 선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므로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오히려 사랑과 정의에 충실하게 살아가라고 권고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굳건한 신뢰로 변화된 예언자 하바쿡은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도 기쁨의 샘물을 길어 냅니다. 기쁨이야말로 악의 우울함을 이기는 최대의 무기입니다. 하바쿡 예언자는 말할 것입니다.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승리하실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0월호(통권 475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오바드야서]

에돔의 멸망을 예언한 예언자 오바드야

김영선 루시아 수녀

 

 

예언서를 읽을 때 가장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 중 하나는 이민족들에 대한 심판 선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이 모두 멸망하리라는 선언은 마음 편하게 들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과연 이스라엘만을 편애하는 하느님이신가요? 다른 나라, 다른 민족들의 존재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분이신가요? 이런 의문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오바드야 예언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짧은 책인 오바드야 예언서는 에돔이라는 나라의 멸망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에 미치는 하느님의 주권

 

오바드야 예언서의 구체적인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예언서에 나오는 이민족들에 대한 심판 선언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은가 하는 질문부터 먼저 다루어 보겠습니다. 이 질문은 원수에게 잔인한 복수를 해달라며 청원하고 있는 여러 시편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시편 58은 자기 원수 입 안의 이를 부수어 달라고, 원수가 녹아내리는 달팽이처럼, 유산된 태아처럼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다른 민족이 모두 멸망하리라는 예언자의 예언이나 원수들을 모두 죽여 달라는 시편 시인의 청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만약 성경 저자와 반대편 입장에 있는 사람이나 민족들이 이런 말씀을 듣는다면, 그런 것이 성경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또 다른 질문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우선, 이민족들의 멸망을 선언하는 예언 신탁의 청중은 누구였을까요? 예언자는 그 말씀을 원수가 듣도록 발설했을까요? 예를 들어, 오바드야 예언자가 에돔이 멸망하리라는 신탁을 에돔인들 앞에서 선포했을까요? 아니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선포했을까요? 원수를 망하게 해 달라는 시편 저자의 청원은 원수를 향한 것이었을까요? 또는 하느님을 향한 것이었을까요?

 

예언자의 심판 신탁이나 시편 저자의 간절한 청원은 원래 원수를 향하여 발설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청중을 대상으로 선포된 것입니다. 성경의 원래 저자들은 성경이 오늘날처럼 온 세계의 모든 민족이 읽는 책이 되리라고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본래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쓰였고, 이스라엘 청중을 향하여 선포된 것이었습니다.

 

이민족들에 대한 예언자의 심판 선언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선포된 것이라면, 이런 신탁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이런 신탁은 어떤 효과를 꾀하고자 선포되었을까요? 이 심판 신탁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하느님의 주권이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고 온 세상에 미치고 있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처한 현실에서 확인하기는 어려웠을지라도 하느님의 정의가 분명하게 활동하고 계심을 확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괴롭힌 원수들을 하느님께서 응징하시리라는 신탁은 분명히 그들에게 커다란 위안을 안겨 주었을 것이며, 하느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지속적인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에돔의 죄악

 

이민족들에 대한 심판 신탁이 지닌 이런 효과를 염두에 두고 오바드야 예언서를 읽어 보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통하여 오바드야 예언자가 에돔에 대한 심판 신탁을 발설하게 된 배경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이민족들이 야곱의 재산을 끌어가고 낯선 자들이 그의 대문으로 쳐들어가 예루살렘을 두고 제비를 뽑던 그날”(11절), “그 재난의 날”(12절), “내 백성의 재앙의 날”(13절)과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표현들은 모두 기원전 587년 바빌로니아 제국의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던 때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오바드야 예언자가 고발하는 에돔의 죄악은 에돔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뻐하며, 형제 국가로서 유다를 돕기는커녕 불행을 겪는 유다를 약탈한 일입니다(12-14절 참조).

 

에돔인들은 네부카드네자르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 바빌로니아와 협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다의 그달야 총독이 암살된 후 바빌로니아인들이 유다 지방에 대해 특별한 군사적, 행정적 조치를 하지 않고 방치했던 시기에 유다 남부의 네겝 지방으로 이주하여 헤브론과 벳 추르 사이에 정착하였습니다.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제 에사우의 후손들이 사는 나라로서, 다윗과 솔로몬 임금이 다스리던 기원전 10세기에 유다의 속국이었습니다. 유다의 여호람 임금 때에 에돔은 유다로부터 독립하였습니다(2열왕 8,20 참조).

 

원래 유다의 속국이던 나라가, 유다와 형제 관계에 있던 나라가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원수의 편에 섰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에게 잊을 수 없는 수치이자 모욕으로 기억되었습니다. 그래서 에돔에 대한 원한과 심판 선언은 오바드야 예언서뿐만 아니라 다른 곳(시편 137,7; 이사 34,5-7; 63,1-6; 예레 49,7-22; 애가 4,21; 에제 25,12-14; 요엘 4,19; 아모 1,11-12; 말라 1,2-5)에서도 나타납니다. 시편 137의 저자는 에돔의 죄를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에돔의 자손들을 거슬러 예루살렘의 그날을 생각하소서. 저들은 말하였습니다. ‘허물어라, 허물어라, 그 밑바닥까지!’”(시편 137,7)

 

역사에서 사라진 에돔

 

오바드야 예언자는 에돔이 자신의 안전과 지혜를 믿고 교만해 있지만 멸망의 운명을 피하지 못하리라고 선언합니다. 에돔은 대부분이 산악 지대이고 쉽게 방어할 수 있는 동굴이 많아 안전할 것으로 믿고 교만해 있지만, 주님의 날이 오면 에돔은 그 행실대로 보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15절 참조). 주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는 그날이 오면, 주님의 정의가 세상의 민족들을 제 행실대로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환난을 피한 이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재건되고, 유배 갔던 이들이 돌아와 에돔이 살던 땅까지 차지하며 살게 되리라고 예언자는 선포합니다.

 

예언자가 말한 대로 에돔은 현재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기원전 300년경 아랍에서 올라온 나바테아인들이 에돔 지역을 차지하고 왕국을 세웠는데, 그들의 수도가 유명한 페트라입니다. 에돔인들이 유다의 네겝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나바테아인들의 압력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유배 이후 시대에 유다의 네겝 지역이 이두메아로 불리게 된 것은 에돔인들이 그곳에 정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두메아 지역은 기원전 2세기의 마카베오 전쟁 당시 유다에 병합됩니다. 기원전 130년경에 요한 히르카노스는 이두메아인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시켜 유다교로 개종시킵니다. 헤로데 대왕은 바로 이곳 이두메아 출신입니다. 에돔 지역을 차지했던 나바테아 왕국은 기원후 106년에 로마제국에 병합됩니다. 이렇게 하여 에돔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에돔이라는 한 나라가 오바드야의 예언 때문에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돔에 대한 오바드야의 심판 신탁은 하느님의 정의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선포한 것이었고, 역사는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악도 영원하지 못합니다. 예언자의 말을 믿고 기억한다면 우리 또한 우리를 둘러싼 악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바드야 예언자는 오늘 우리 곁에서 다시 한 번 선포할 것입니다. 에돔으로 표상되는 악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성서와 함께, 2015년 11월호(통권 476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하까이서]

하까이 예언자와 함께 보내는 송년의 밤

김영선 루시아 수녀

 

 

1년을 함께 걸어온 이 꼭지의 제목은 ‘말씀과 함께 걷는다’입니다. 말씀과 함께 걷기 위해서는 말씀이 발자국을 어디로 내딛는지 주의 깊게 지켜보아야 하고, 말씀이 발자국을 먼저 내딛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말씀을 따라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심상(心象)은 하까이 예언자가 유배 후 공동체에 전달하고자 하였던 메시지와 깊이 연관됩니다. 둘 다 삶의 우선권을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점을 깊이 생각해 보도록 초대합니다.

 

삶의 우선순위

 

하까이 예언자가 활동했던 때는 바빌론 유배 이후 시기입니다. 하까이서와 즈카르야서, 요엘서와 요나서, 말라키서, 그리고 제3이사야서가 유배 후의 상황을 반영하는 예언서입니다.

 

유배 이후 시대의 주된 관심사는 성전과 공동체의 재건이었습니다. 기원전 539년에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키루스 황제가 바빌로니아에 유배 와 있던 민족의 귀환을 허락하는 것으로 유배 시기는 종결됩니다. 유배민의 귀환에 관한 정보는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유배 이후에 공동체는 재건의 주도권을 누가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배를 가지 않고 그 땅에 계속해서 살았던 사람들은 귀환민의 정착을 환영하지 않았고, 귀환민은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을 재건 과정에 참여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에즈라기에 의하면 이런 갈등으로 인하여 첫 번째로 귀환한 무리가 재건할 성전의 기초는 마련하였지만 성전 재건은 한동안 중단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하느님 집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지어 왔지만 아직 마치지 못하였습니다”(에즈 5,16) 기원전 520년경 즈루빠벨 총독 때 가서야 성전 재건 작업이 다시 시작되었고, 기원전 515년에 성전이 완공됩니다. 우리는 이 성전을 ‘제2성전’이라고 부릅니다.

 

하까이는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1세가 다스리던 시절에 유다에서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하까이 예언서에는 그가 기원전 520년에 선포한 예언 메시지 네 가지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예언의 수신자는 즈루빠벨 총독과 예수아 대사제입니다. 그의 첫 번째 메시지(1,2-15ㄱ)는 아직 성전이 재건되지 않았던 때에 선포되었습니다. 예언자는 유다 공동체가 현재 겪고 있는 빈곤과 흉작은 영적인 혼수상태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며, 만약 그들이 신앙의 열성을 되찾고 성전 건축에 힘쓴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성전의 현존이야말로 땅이 번영하는 데 필수 조건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당시의 유다 백성은 의식주가 해결되어야만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하느님을 섬기면 의식주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은 성전 재건보다 저마다 자기 삶을 재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였습니다. 그들은 ‘판벽으로 된 집’을 짓고, ‘제 집을 돌보는 일’에 골몰하였습니다(1,4.9 참조). 판벽으로 된 집이란, 먼저 돌로 집을 지은 후 그 벽을 널빤지로 덧댄 집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값비싼 고급 저택을 말합니다. 또 그들은 땅을 개간하여 씨를 뿌리고 수확을 늘리고자 고심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가뭄이 들이닥쳐 소출은 형편없었습니다. 그들의 상태는 깨진 독에 물 붓는 격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처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1,6). 하까이 예언자는 이들에게 삶의 우선 순서를 바로잡으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일, 곧 주님을 찾는 일을 먼저 한다면 다른 모든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까이 예언자의 독려를 받고 즈루빠벨 총독과 예수아 대사제는 성전 재건 작업을 착수하게 됩니다(1,14 참조).

 

예언자가 궁핍한 처지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백성에게 던지는 일갈(一喝)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가진 물질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물질을 주시는 하느님 때문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고 있습니까?

 

성전 재건과 새로운 시작

 

예언자의 둘째 메시지(1,15ㄴ-2,9)는 즈루빠벨과 예수아, 그리고 온 백성에게 주어진 것으로 초막절 축제의 마지막 날에 내린 말씀입니다. 옛 성전의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지금 그들이 짓기 시작한 성전은 ‘있으나마나 한 것’(2,3 참조)으로 여겨질 만큼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예언자는 그들에게 용기를 내어 성전 짓는 일을 계속하라고 독려합니다. 지금은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장차 ‘세상의 부가 이 성전으로 흘러들어오게 될 것’(2,7-8 참조)이며, “이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2,9)고 예언자는 말합니다.

 

예언자의 셋째 메시지(2,10-19)는 기원전 520년 12월 중순에 내린 것으로, 다시 한 번 성전 건축을 장려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공동체에 성전이 없다면 그 땅은 여전히 부정한 채로 남아 있게 됩니다. 예언자는 성전을 짓기 시작하기 전에 그들의 소출이 형편없었던 것, 마름병과 깜부깃병과 우박이 농사를 망치게 했던 것도 다 땅이 부정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언자는 성전의 기초가 놓인 날부터 그들의 소출이 다시 늘어나게 된 사실에 주목하게 합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께서 그 땅의 부정을 씻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성전과 더불어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도록 주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2,19 참조).

 

예언자의 마지막 메시지(2,20-23)는 즈루빠벨에게 내린 것으로 이상적인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왕국의 권세를 없애실 것이며, 즈루빠벨을 인장 반지처럼 만드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2,23 참조). 여기에서 인장 반지란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다윗의 후손이 임금의 자리에 다시 오르는 결정적인 구원의 시기가 도래하리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면서 하까이 예언자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올 한 해 동안 나는 내 삶의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해 보려고, 인생의 갖가지 짐을 홀로 져 나가려고, 너무 큰 긴장을 안고 살지 않았는가? 혹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내가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그 주님께 삶의 주도권을 드리며 살았는가? 내 삶이 조금 더 정리된 뒤에 주님을 찾겠노라고 헛되이 약속하며 내 삶에만 골몰하지 않았는가? 아니면 늘 나와 함께하시지만 때로는 보이지도 않고 찾을 수도 없는 주님께 시선을 고정해 보려고 조금은 더 애써 보았던 한 해였는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든지 주님은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주님의 말이다”(1,7.13). 일 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내 시선이 어디에 있었든지 주님은 늘 우리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 주님께 한 번쯤은 시선을 고정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그리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제대로 돌려 드리는 새로운 한 해를 설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2월호(통권 47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