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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1) -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8. 6. 21.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1)

하느님, 자연 그리고 인간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신학교에는 울창한 숲이 있다. 서울 성곽과 고목들에 둘러싸여 사는 남다른 행복에 늘 감사하면서도 나에게는 거대한 나무가 가득한 원시림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특히 캘리포니아 북부에 위치한 레드우드 국립공원은 내가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였다. 그곳에는 고대 자이언트 세쿼이아의 사촌 격인 레드우드가 100m 이상 치솟아 있다.

 

캘리포니아가 원산지인 적갈색의 미국 삼나무 레드우드는 가장 성장이 빠른 생명체로 꼽힌다. 묘목은 화창한 날씨에서 매년 1.8m씩 자라고, 3세기를 거치면 100m 이상의 거목으로 자라난다.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의 나무 생물학자 토드 도슨은 가장 높은 레드우드의 키를 137m까지 측정했는데, 안개가 많은 곳에서는 더 높이 자랄 수 있다고 한다. 수령이 2천 년 이상인 레드우드도 있단다. 레드우드의 밑동을 파내고 그 안을 자동차가 통과하게 한 모습을 찍은 사진은 이 나무가 얼마나 거대한지 보여 주는 예다.

 

지난여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가톨릭 성령 쇄신 25주년 대회 일정이 끝난 뒤, 나는 마침내 레드우드 공원을 찾아갔다.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하여 십여 시간을 달린 긴 자동차 여행의 피로는 레드우드가 모습을 드러낸 유레카 지역에 이르자 눈 녹듯 사라졌다.

 

아치를 이룬 거대한 나무들의 환영을 받으며 나는 그들의 세계에 들어섰다. 태평양의 습기와 안개를 먹고 사는 레드우드의 숲에는 신비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시선을 압도하는 거대한 나무들과 두꺼운 껍질에 담긴 수천 년의 역사가 깊고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어 내 몸과 마음을 씻어내고 나를 태고의 성전으로 이끌어 주었다. 도무지 햇살을 받아들일 수 없는 무성한 나무들의 지붕 아래에서 나는 외부 세계와 격리되었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거대한 나무들은 자연의 성전을 떠받치는 기둥인 듯했다. 레드우드는 땅과 하늘을 이어 주는 사다리처럼 하늘을 향해 드높이 솟아 있었다. 참으로 형언할 길 없는 외경畏敬과 감동으로 나는 레드우드 숲을 순례하였다.

 

우리는 왜 나무를, 숲을, 나아가 원시림을 동경할까? 아담과 하와가 살던 에덴 동산의 숲이 우리의 기억 속에 태고의 원형으로 자리하고 있어서일까? 인류의 먼 조상이 오랫동안 숲의 나무 위에서 살았기 때문일까? 그리하여 우리가 여전히 원시의 나무와 숲을 그리워하는 것은 창세기의 에덴 이야기와 인류 진화의 역사가 남긴 아득한 과거에 대한 기억 때문일까? 숲은 어머니의 넉넉한 치마폭처럼 우리를 감싸고 돌보아 준다. 숲에서 우리는 존재의 안정과 편안함을 느낀다. 숲이 본시 우리 조상에게 삶의 터전이었기에 그러했으리라!

 

대지가 어머니라면 숲은 어머니의 치마폭이다. 정작 레드우드 숲은 하늘을 가린다. 어머니의 치마폭에 감싸인 아이가 세상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숲은 안정과 편안함을 주되 땅에 집착하게 한다.

 

그런데 하늘을 향한 나무들의 기립 자세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거대한 기둥 사다리들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쩌면 야곱의 사다리처럼 못내 태양을 그리워하고 하늘을 기리는 애절한 몸짓은 아닐까?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창세 28,17)라는 야곱의 고백처럼, 레드우드의 드높은 정상에 오르면 우리도 하늘 세계에 들어설 수 있을까?

 

오늘날 현대인은 자연과의 연대성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자연의 신비에 둔감하다. 자연을 단지 놀이나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자연을 즐기는 것과 자연과 연대성을 느끼며 사는 것은 같지 않다. 전자는 자연을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고, 후자는 자연을 내 몸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태도이다.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고 대상화하는 과정은 철학적·과학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인간이 진리의 준거를 자기 의식 안에서 찾으려는 데카르트의 성찰(‘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후, 서구의 근대 철학은 육체와 분리된 정신주의로 나아가고 자연과 분리된 인간중심주의로 발전하였다. 또 인간의 정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물질로 환원하는 물질주의로 귀결되었다. 아울러 인간 지성은 과학을 발전시키고 그것이 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지면서 기술은 소비를 자극하고 확대시켰다. 인류의 무분별한 개발과 과소비가 자연을 파괴하고 ‘지구 온난화’라는 생태계의 위기를 가져왔다.

 

오늘날 인류에게 닥친 생태계의 위기 앞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0년 1월 1일 세계 평화의 날 메시지로 ‘창조주 하느님과의 평화, 모든 조물들과의 평화’를 발표한 바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9년에 발표한 회칙 <진리 안의 사랑> 51항에서 “교회는 모든 이가 창조의 선물로 받은 이 땅과 물과 공기를 수호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면 성경은 생태 문제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성경은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느님께서 친히 창조와 구원의 역사에 개입하여 피조물 전체를 구원으로 인도하신다. 그러기에 성경은 하느님과 자연과 인간이라는 세 가지 근본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와 구원 또는 창조와 새 창조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에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집중적으로 그려져 있다. 하느님께서 역사를 통해 당신을 계시하시고 마침내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육화 구도에서 인간은 창조와 구원의 정점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인간 중심적 구원관을 근거로 자연을 경시하거나 착취해도 무방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성서적 인간 중심주의를 거슬러 모든 생명이 차별 없이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심층생태학(deep ecology)도 결코 옳지 않다. 성경은 인간의 구원을 통하여 모든 피조물이 구원되리라(로마 8,19-21 참조)고 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자연, 인간이라는 삼중 연기(緣起) 구조에서 인간의 길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일이다. 인간이 창조와 구원의 섭리 아래 자신의 길을 간다는 것은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며 하느님의 뜻대로 자연과 다른 인간을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 연재할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는 하느님, 자연, 인간의 삼중 관계에서 올바른 생태 질서와 정의가 무엇인지 새겨 보고자 한다. 종전의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벗어나 자연계의 모든 존재가 깊이 관련되어 영향을 주고받으며 의존하고 있다는 생태적 연대성의 전망을, 창세기를 필두로 성경 전체를 통해 그려 볼 것이다. ‘생태계’가 본시 먹이사슬의 연대 구조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므로 성경에 나타난 섭생(攝生)의 문제도 중요하게 살펴볼 것이다. 먹는 문제야말로 생명이 스스로를 유지하고 다른 생명과 연대하는 생태 질서의 근간이다. 우리는 이 문제가 성경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 살펴볼 것이다. 또 생태신학이 포함하는 생태 시대의 하느님, 성령, 로고스, 생명, 여성 등 다양한 주제를 헤아려 볼 것이다. 신약에 이르러서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와 그 실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담긴 생태신학적 의미를 살펴보고, 마침내 ‘생태신학적 그리스도론’의 전망을 그려 볼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월호(통권 442호)]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하느님과 무(無)로부터의 창조(無)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창세기의 첫 구절은 아무런 전제 없이 하느님을 언급한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존재는 전제되어 있고 그분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창조의 하느님으로 나타난다. 창조는 과연 무엇으로부터 이루어졌는가? 2마카 7,28은 하느님께서 “이미 있는 것에서 그것들을 만들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없는 데에서 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연역된 개념이 바로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이다. 이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가 공히 가르치는 창조 교리이다.

 

창세 1장은 무(無)로부터의 창조를 직접 말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하면서도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한 땅과 심연이 있었음을 전제하는 모양새다. 그래서 어떤 원초 물질에서 하늘과 땅이 비롯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많은 철학자가 주장했듯이 일부 현대의 창세기 주석가들도 창조는 기존의 원초적 물질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창세기 저자는 이 원초적 물질조차 하느님께서 만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 의존하기 때문이다. 2마카 7,28에서 도출된 ‘무(無)로부터의 창조’ 개념이 창세 1장을 올바로 이해하는 해석의 기준이 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동사 bara(창조하였다)의 두 번째 의미인 ‘분리하다’가 하느님의 창조를 이해하는 다른 단서를 제공한다. 유다교 신비주의자들인 카발리스트들은 동사 bara가 ‘밖으로’를 뜻하는 부사 bar와 연계되어 있다고 본다. 따라서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당신 밖으로 내보내셨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창조가 분리의 과정이라면, 창조는 무(無)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이고 하느님과 분리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쩌면 무(無)란 무한과 구별할 수 없는 인간 지성의 한계를 가리키는 단어일 수 있다.

 

그런 의미로 무(無)는 하느님 안에 있었고 사실 무無가 하느님이었다고 유다교 신비주의자들은 말한다. 그들은 무(無)로부터의 창조를 하느님으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Deo)로 바꾸어 쓰기도 한다. 본시 세상은 하느님 안에 있었는데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당신 밖으로 내보내셔서 세상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

 

카발라(Kabbalah) 전통은 세상의 창조를 어머니가 배 속의 아이를 세상에 내보내는 것에 비교한다. 시편 90,2은 “산들이 나기 전에, (하느님이) 땅과 세상을 낳기 전에”라고 하여 창조를 출산의 언어로 표현한다. 세상 창조에 이어 이스라엘 백성의 창조도 출산의 언어로 표현된다. 신명 32,18은 하느님을 의미하는 “바위가 이스라엘 백성을 낳았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태어난 사건을 출산과 양육의 언어로 표현하는 대목은 여럿이다(이사 42,14; 44,24; 45,10; 46,3; 49,15 참조).

 

어머니가 자식을 자기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자식이 자기와 다른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어머니와 자식이 서로 다르듯 창조주 하느님과 피조물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 그러나 이 다름 때문에 성경은 하느님과 세상을 계약의 관계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어머니가 자식의 고유성과 자율성을 존중하고 배려하듯 하느님께서도 피조물의 고유성과 자율성을 존중하고 배려하신다.

 

성경이 말하는 창조는 만물이 신에게서 유출되었다는 유출설과 다르다. 고대 근동의 창조 신화에서 말하는 바, 세상이 신의 죽은 몸에서 태어났다는 탄생설과도 매우 다르다. 세상을 하느님의 몸으로 이해하는 생태 신학자 맥페이그(S. McFague)의 범신론적 발상도 성경에 어울리지 않는다. 성경은 하느님과 피조물의 근본 차이를 강조한다(이사 45,21; 46,5; 예레 10,6-7; 49,19; 시편 35,10; 50,21; 86,8 참조).

 

창조가 하느님과 분리되는 과정이라면 구원은 하느님과 다시 만나는 과정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분리되어 계시되 세상을 돌보신다. 분리가 하느님의 초월(멂)을 체험하는 순간이라면 돌봄은 하느님의 내재(가까움)를 체험하는 시간이다. 하느님과의 멂과 가까움을 상징하는 공간이 바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하늘과 땅이다.

 

지난 호에서는 작년 여름에 방문한 레드우드 숲의 체험을 나누었다. 숲의 체험은 땅의 체험이다. 땅은 하느님과의 가까움을 느끼는 영역이다. 땅에서 우리는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둘러싼 자연 환경을 만나면서 이 모든 것을 돌보시는 하느님을 가깝게 느낀다. 그다음 내가 보고 싶은 곳은 하늘이었다. 하늘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광야다. 나는 하늘을 우러를 수 있는 드넓은 대지로 발길을 돌렸다.

 

모하비 사막의 끄트머리, 밸리어모에 자리한 성 안드레아 분도 수도원 지역에는 여호수아 나무가 산재해 있다. 이 이름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 팔을 뻗은 모습과 나뭇가지의 모양새가 닮았다 하여 붙여졌다. 낮에는 43도에 이르는 태양의 열기에 갇혀 있다가 밤에는 별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탈출이 이곳 광야에서 날마다 이루어진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은하수와 책에서 본 별자리들이 고향처럼 우리를 반겨 준다. 사실 우리는 모두 별들의 후예가 아닌가! 어쩌면 그것은 탈출이 아니라 귀환이요 복귀인 셈이다. 숲이 없는 광야는 이처럼 우리를 땅에서 벗어나 하늘을 향하도록 이끌어 준다.

 

솔로몬은 일찍이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1열왕 8,27)라고 고백하였다. 하느님께서 여러 개의 하늘을 만드셨으나(창세 1,1 참조), 솔로몬의 지혜는 하늘 위의 하늘에도 계시지 않는 하느님의 신비를 꿰뚫어 본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환시가들은 천상 세계를 여행하고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묵시문학의 형태로 전해 주면서도 하느님을 직접 뵈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사도 바오로도 세 번째 하늘까지 올라가서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2코린 12,4 참조). 하지만 그는 말씀을 들었지 하느님을 뵌 것은 아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초월성은 여러 개의 하늘로도 담아 내지 못한다. 그런데도 하늘은 하느님의 존재와 그분의 초월성을 가리키는 탁월한 표지이다. 하늘이 우리에게 영원한 동경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밤의 천상 여행이 나에게 가져다 준 것은 우주에 대한 귀속감이었다. 우주 만물은 나에게 신비로 드러났다. 나를 포함하여 세상이 온통 신비이다. 세상이 하느님께 낳음을 받았다(시편 90,2 참조)는 사실로 말미암아 세상은 창조주 하느님의 더 큰 신비를 드러내는 성사가 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성사인 이 자연을 우리가 어떻게 만날 것인가’라는 생태윤리의 문제이다.

 

[성서와 함께, 2013년 2월호(통권 443호)]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루아흐,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을 잇는 생명의 고리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구약성경은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을 전일적이고 통합적으로 볼 수 있는 여러 관점을 제공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루아흐(ruah)’이다. 바람, 공기, 숨, 영 등 다양한 의미가 히브리어에서는 루아흐라는 한 단어로 표현된다. 루아흐는 본래 바람 소리나 숨 쉬는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이다.

 

바람 또는 숨

 

루아흐는 우선 바람을 가리킨다(코헬 1,6; 1열왕 18,45; 2열왕 3,17; 시편 148,8; 예레 49,36; 에제 37,9 참조). 이 대기를 움직이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그분께서 바람을 곳집에서 끌어내시고(시편 135,7; 참조 예레 10,13) 바람의 무게와 물의 양을 정하신다(욥 28,25-26 참조). 이는 비의 법칙과 뇌성 번개의 길을 정하시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이처럼 뇌우를 동반하는 바람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팔레스티나처럼 건조한 지역에서 농사를 짓는 사회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이스라엘의 곡물 생산과 과일 재배는 겨울 우기 때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편서풍의 습윤한 대기가 만들어 내는 강우량에 온전히 의존한다. 루아흐가 일차적으로 대기의 흐름이나 바람을 가리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대기를 숨으로 들이마신다. 생명이 루아흐에 의존한다는 이야기는 무엇보다 창세 2,7에 잘 나타난다. “주 하느님께서 흙(아다마)의 먼지(아파르)로 사람(아담)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너샤마 하이임)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시편은 생명의 원리인 루아흐를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 적용하여 언급한다(시편 104,29-30 참조). 그러나 하느님께서 당신의 숨결(루아흐)과 입김(너샤마)을 되돌리시면 모든 육체는 죽어가고 사람은 먼지(아파르)로 돌아간다(욥 34,14-15; 참조 시편 146,4). 죽을 때 루아흐는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 돌아간다(코헬 12,7 참조).

 

이처럼 대기의 바람과 동물의 숨을 가리키는 루아흐는 하느님의 존재와 활동을 드러내는 탁월한 장소이다. 루아흐는 하느님에게서 왔고(민수 11,31 참조) 하느님의 신성을 담고 있다. 루아흐는 인간이 조절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거룩하다. 그래서 루아흐는 하느님의 바람 또는 ‘주님의 바람’(호세 13,15)이라고 불린다. 무엇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콧구멍(‘아프’를 성경은 ‘노호’라고 번역함)에서 나오는 루아흐로 물을 모으고(탈출 15,8 참조) 루아흐를 일으키시어 바다가 그들을 덮치게 하셨다(탈출 15,10 참조). 주님의 루아흐가 이스라엘을 바다에서 구원한 것이다.

 

한편 루아흐는 우기에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뇌우의 바람을 가리키기도 한다(시편 107,25 참조). 이런 대기 현상은, 하느님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살아가는 삶을 보장해 준다. 그것은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 활동을 드러내는 주요한 표지였다.

 

하느님의 루아흐

 

창세 1,2에 의하면, 하느님의 루아흐가 심연 위를 감돌고 있었다. 여기서 루아흐는 자연 현상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존재와 활동을 가리키는 신성한 것이다.

 

루아흐가 본시 대기 현상인 바람과 이를 호흡하는 숨결을 의미하였으나, 창세 1,2의 경우처럼 영(spirit)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한다. 흠정역 성경(KJV), 개정 표준역 성경(RSV), 루터 역 성경(LUT), 그리고 한국 천주교 공용 《성경》은 창세 1,2의 하느님의 루아흐를 하느님의 영으로, 새개정 표준역 성경(NRSV)과 예루살렘 성경(FBJ)은 하느님의 바람으로, 불어 공동번역 성경(TOB)은 하느님의 숨결로 번역한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뽑은 이들에게 사명과 말씀을 주시고자 루아흐를 보내는 경우에는 영으로 번역한다. 판관(판관 3,10; 6,34; 11,29; 13,25), 메시아(이사 11,2; 61,1), 예언자(이사 42,1; 44,3; 48,16; 59,21; 63,11; 에제 2,2; 3,12.14.24; 8,3; 36,27; 요엘 3,1.2; 미카 3,8; 하까 2,5; 즈카 4,6; 6,8; 7,12)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루아흐는 모두 영으로 번역한다.

 

인간의 루아흐

 

루아흐가 사람에게 적용되면 숨결 외에도 영, 마음, 정신, 기, 용기, 노기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창세 41,8; 45,27; 탈출 6,9; 35,21; 민수 5,14; 11,17.25; 14,24; 16,22; 27,16; 신명 2,30; 34,9; 여호 2,11; 5,1; 판관 8,3; 15,19; 1사무 1,15; 30,12; 1열왕 10,5; 21,5; 이사 19,3; 25,4; 31,3; 33,11; 예레 3,14; 10,14; 에제 3,14; 37,5; 하바 2,19; 즈카 12,1; 시편 31,6; 32,2; 34,19; 76,13; 104,29; 욥 6,4; 7,7; 코헬 7,9 등). 인간은 숨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고 숨을 바탕으로 영, 마음, 정신, 기, 용기, 노기로 표현되는 현실을 경험한다. 대기로서의 바람과 공기, 이를 호흡하는 숨결의 결과로 이어지는 내적 상태에 이르기까지 루아흐는 매우 통합적인 현실을 지칭한다.

 

이처럼 성경은 루아흐를 통해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한다. 하느님도 자연의 대기 현상도 그 공기를 마시고 사는 인간 생명과 다른 생명체도 다함께 루아흐를 통해 연결된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공기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다른 생명체와 전혀 다를 바 없다.

 

루아흐는 무분별한 인간 중심주의를 거부한다. 인간과 동물은 루아흐를 지닌다는 점에서 평등하다. 우리는 하늘 아래 살아 숨 쉬는 모든 살덩어리에 속하기 때문이다(창세 6,17; 7,15 참조). 루아흐에는 영과 육의 경계가 딱히 없다. 살들의 숨이 곧 살들의 영이다(민수 16,22 참조). 루아흐는 육신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몸의 생기 그 자체이다. 하느님께서 루아흐를 주고 유지시키시기에 루아흐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루아흐이다. 그래서 창세 6,3은 “사람들은 살덩어리일 따름이니, 나의 영이 그들 안에 영원히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아침에 마시는 공기는 늘 신선하게 느껴진다. 나무가 많은 신학교의 산책로에서 들이마시는 아침 바람은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이 신선한 바람을 들숨과 날숨으로 몸에 넣어 통과시키면 밤새 죽어 있던 몸이 눈부시게 깨어난다. 몸이 깨어나면서 시들했던 몸에 생기가 돋고 영도 함께 깨어난다.

 

전문가들은 지구의 대기 환경이 심각하게 오염되었다고 경고해 왔다. 조속히 개선되지 않으면 지구 생명체에 미칠 영향은 상상하기 힘들다고 한다. 성경은 공기와 우리의 숨결/영, 그리고 하느님의 숨결/영이 모두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루아흐의 다양한 어법을 통해 보여 준다. 우리가 대기를 맑게 유지하고 보존해야 하는 이유도 우리와 뭇 생명의 루아흐, 그리고 하느님 생명의 루아흐가 온전히 소통하기 위해서다.

 

[성서와 함께, 2013년 3월호(통권 444호)]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루아흐, 다바르, 자연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루아흐와 다바르

 

하느님께서 세상과 소통하시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루아흐’와 ‘다바르’(말씀)가 그것이다. 루아흐는 참으로 신묘하다. 공기가 크게 움직이면 바람이 되고, 공기가 인간 안에 들어오면 숨이 되고, 공기가 인간의 내면과 교감하면 정서적으로 체험된다. 나아가 하느님의 루아흐는 공기를 비유 삼아 이루어진 유비적 표현이면서도 대기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루아흐가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이어 주는 소통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야훼(Yahweh)’ 라는 하느님의 이름과도 연관된다. 야훼라는 이름의 어원은 be동사인 하야(hayah)에서 비롯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럴 경우 탈출 3,14에 근거해서 야훼는 ‘있는 분’을 의미하거나 ‘있게 하시는 분’, 곧 창조주를 의미한다. 그러나 야훼라는 이름의 최초 의미는 ‘바람이 불다’를 의미하는 동사의 어근 h-w-y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야훼라는 이름은 ‘바람을 일으키는 분’으로 해석할 수 있다. 탈출 19,16-18에서처럼 야훼의 신현(神現)이 폭풍과 같은 기상 현상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 이름의 어원이 바람과 관련 있다는 견해를 뒷받침한다(탈출 15,10 참조). 루아흐가 일종의 의성어로 바람을 가리킨다고 할 때, 루아흐는 인간의 통제를 넘어 하느님만 관장하실 수 있는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한편 하느님의 루아흐는 인간의 내면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전기 예언서에서 하느님의 루아흐가 사울에게 들이닥치자(삼손의 경우 판관 14,6.19; 15,14 참조) 그는 황홀경에 빠져 딴사람으로 바뀌고 예언을 한다(1사무 10,6.10 참조). 당시에 예언자들은 황홀경에 빠져 수금과 손북, 피리와 비파를 연주하며 예언하였다(1사무 10,5 참조). 고대 가나안 종교에서 발견되는 이런 현상은 ‘신내림’이라는 무속 체험과 유사하다. 그러나 후기 예언서에서는 황홀경 현상을 나쁘게 평가하고, 이를 거짓 바람 또는 헛것으로 비판하는 경향이 나타난다(예레 5,13; 이사 41,29 참조).

 

그러면 하느님의 루아흐를 체험했는지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사 59,21은 주님의 영(루아흐)과 주님의 말씀을 연계시킨다(에제 2,2; 3,24; 11,5 참조). 물론 황홀경 체험에도 예언이 있긴 하다. 그러기에 식별 기준은 말씀의 내용과 그 실현 가능성(신명 18,22; 이사 55,11 참조)이 된다. 후기 예언서는 영의 능력을 사회적 공정과 정의 실현(미카 3,8; 이사 11,1.4.6 참조), 그리고 윤리적 판단과 심판에 연결시킨다(이사 4,4; 33,11 참조). 인간이 하느님의 영을 체험하면,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방향으로 이끌리게 된다(에제 36,27 참조). 이렇게 영과 말씀은 서로 필요로 하고 서로 보완한다.

 

창조적 소통 수단인 다바르

 

루아흐가 하느님, 인간, 자연을 소통하는 상징적 실재였듯, 다바르도 하느님께서 세상과 소통하는 상징 수단이다. 하느님은 무엇보다 말씀으로 소통하는 분이시다. 그분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우상들과 완전히 다른 분이시다(시편 115,5; 135,16; 예레 10,5; 참조 1열왕 18,26-29).

 

하느님께서 말씀을 건네시는 대상은 인간과 자연이다. 하느님께서는 땅과 하늘(창세 1,22; 시편 50,4; 이사 1,2; 45,8; 하까 1,11), 뱀(창세 3,14)과 큰 비(욥 37,6)와 번개(욥 38,35)에게 말씀하시고 하늘의 별들을 이름으로 낱낱이 불러 주신다(이사 40,26; 시편 147,4 참조). 또 하느님께서는 땅에게 명령하시어 싹과 과일나무를 돋게 하신다(창세 1,11 참조).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한 하늘이 이제는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창공은 그분 손의 솜씨를 알리며(시편 19,2 참조) 만물이 하느님을 찬미한다(시편 66,1-4; 96,1.11-12; 97,1; 98,4-9 참조). 하느님과 소통하는 피조물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며 소통한다(시편 19,4-5 참조).

 

세상이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창조가 우연이거나 임의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말씀은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고 역사를 섭리로 이끌어간다(시편 147,15-19 참조). 사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역사는 하느님의 말씀이 심긴 모판이다. 말씀이 예언자의 입에 담겨(예레 1,9; 15,16; 신명 18,18 참조) 육의 형체로 드러나고, 자연은 말씀을 품어 맺은 결실로 나타난다. 인간과 세상은 말씀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에 속해 있다. 그러기에 세상은 하느님의 뜻이 무진장 묻혀 있는 밭이라 할 수 있다.

 

루아흐, 말씀, 자연 그리고 생태신학

 

루아흐와 말씀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고 소통하며 섭리로 이끄시는 두 가지 방식이다. 루아흐는 무엇보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힘이다. 바람을 일으키고 생명을 일으키며 예언자를 일으키는 힘이다. 말씀은 이 힘에 방향을 부여하고 목표를 제시한다. 말씀은 세상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려 주는 이정표이다. 말씀은 하느님에게서 힘을 받아 살아가는 피조물들에게 삶의 방식을 알려 주는 생명의 지도이다. 그래서 말씀이 없는 루아흐는 맹목적 힘이거나 헛것이 된다.

 

반대로 루아흐 없는 말씀은 피가 말라 버린 박제요 영혼 없는 형체가 된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루아흐 안에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지혜서가 말하듯이 불멸의 영이 만물 안에 들어 있고(지혜 12,1 참조), 피조물은 말씀에 끊임없이 응답하며 존재하고 창조주 하느님을 찬미한다. 성경에 따른 이러한 통찰을 바탕으로 생태신학의 몇 가지 원리를 도출할 수 있다.

 

첫째, 우주는 온통 하느님의 루아흐로 가득한 신성한 존재이다. 하느님의 불멸의 영이 함께하기에 세상은 신성하고 경이로운 존재이다. 근대의 자연과학적 세계관은 세상을 비신성화하고 단순한 물질적 대상으로 격하했다. 하지만 하느님의 루아흐를 간직한 우주는 그 자체가 축제이고 찬미이며 신비이다.

 

둘째, 과학적 자연주의는 세상의 시작과 마침을 말할 수 없다. 우주의 목표를 설정하기도 어렵다. 이 모든 것은 인간 밖에서 오는 말씀으로만 밝혀질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세상을 이해하는 유일한 열쇠이다.

 

셋째, 하느님, 인간, 세상은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을 이어 주는 고리는 바로 루아흐요 말씀이다. 우리는 루아흐의 순환성과 말씀의 지향성에서 세상과의 관계를 고찰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라는 보금자리는 하느님의 루아흐와 말씀으로 양육되는 생명의 연속된 그물망이다. 이 생명의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우리는 하느님의 루아흐 안에서 그분의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고 실천해야 한다.

 

넷째, 루아흐의 능력을 과신하여 미망에 빠지고 말씀의 종말론적 실현을 열망한 나머지 자연의 질서를 무시하는 무모한 열광주의가 그리스도교 안에 늘 있어 왔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질서는 무분별한 신비주의와 종말론적 조급증을 식별하게 해 주는 지혜의 보고이다. 그리스도교 안에 자생하는 소종파(예컨대 신천지 교회) 현상에 대해, 균형 잡힌 생태신학은 강력한 백신 역할을 할 수 있다.

 

자연은 루아흐 안에서 말씀의 실현을 향해 나아간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생명의 네트워크에 속한 인간은 자연에서 얻은 지혜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며 현실화하는 창조 과정에 참여한다.

 

[성서와 함께, 2013년 4월호(통권 445호)]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창세기와 빅 히스토리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최근에 빅 히스토리(Big history)에 관한 관심이 늘고 있다. 빅 히스토리는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이야기 방식이다. ‘거대사(Big history)’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서적들은 우주의 기원에서 출발하여 생명의 출현과 인간의 진화, 그리고 문명의 탄생과 발전으로 이어지는 문명사를 기술한다.

 

거대사의 가장 전형적 사례는 바로 창세기이다. 창세기는 세상의 창조, 인간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성조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인간의 보편적 역사와 이스라엘의 전(前) 역사를 함께 이야기한다. 오경의 첫째 권인 창세기는 따로 떼어서 이해할 수 없고 오경 전체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창세기와 탈출기 그리고 레위기에 이르기까지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이 편집한 자료를 ‘사제계 문헌’이라고 부른다. 사제계 문헌의 시작은 창세 1-11장의 세상 창조다. 이는 창조주 하느님을 위해 성소를 짓는 이야기(탈출 25-40장 참조)에서 절정에 이르고 레위기의 성결법(레위 17-27장 참조)으로 종결된다. 사제계 문헌은 유배지 바빌론에서 본토로 귀환한 뒤에 최종 편집되었다. 이 문헌은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의 신원과 소명을 창조 질서의 관점에서 가장 포괄적이고 심오하게 제시한다.

 

창세 1,1은 하느님의 존재를 이미 전제하고 그분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소개한다. 하느님께서는 “보시니 좋았다”고 일곱 번이나 말씀하시며(창세 1,4.10.12.18.21.25.31 참조)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을 강복하셨다. 창세 1장은 세상의 창조와 인간의 창조를 연속된 과정으로 제시한다. 창세 2,4은 창조 때 이루어진 하늘과 땅을 ‘생성(toledot)’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톨레도트’는 하늘과 땅의 생성뿐 아니라 아담과 노아 등 성조의 출생에도 적용된다. 이로써 사제계 학파는 창조를 하늘과 땅의 생성에 이어 인간의 지속적 탄생(toledot)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후손들의 족보를 소개한다(창세 2,4; 5,1; 6,9; 10,1; 11,10; 11,27; 25,12; 25,19; 36,1; 37,2 참조).

 

그러기에 사제들은 카오스(혼돈)에서 이루어지는 창조 과정에서 인간 구원의 역사를 읽는다. 그들은 카오스의 한복판에서 질서를 만들어 가시는 창조의 하느님이 역사의 질곡에서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신다고 고백한다. 하늘과 땅의 창조는 역사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느님만이 자연과 역사의 주인이시기에 그분의 창조 행위에서 자연과 역사는 엿새 동안의 창조와 이렛날의 안식을 통해 주기적으로 거듭난다. 원초적 혼돈과 결부된 역사의 질곡도 창조 질서를 제의적으로 갱신하는 제사를 통하여 극복된다. “보시니 좋았다”는 하느님의 원초적 강복이 이를 가능케 한다. 그리하여 창조는 원초적 창조(creatio originalis)에서 출발하여 주기적으로 갱신되는 새로운 창조(creatio nova)로 이어지고 시간상 쉼 없이 이루어지는 지속적 창조(creatio continua)로 나아간다.

 

한편 사람과 동물과 식물의 관계는 우선 먹을거리로 규정된다(창세 1,29-30 참조).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동물의 먹을거리로 풀과 나무와 열매만 허용하시어 동물에 대한 인간의 폭력을 금지시키시고, 인간에 대한 동물의 위협도 거부하신다. 그러나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차자(창세 6,11-13 참조) 하느님께서는 노아의 방주에 탄 피조물만 제외하고 모든 살덩어리를 홍수로 멸망시키신다. 폭력이 인간과 하느님, 나아가 피조물과 하느님의 관계를 단절시켰다면, 홍수는 이에 대한 하느님의 응징이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아들들을 강복하시고 짐승의 피를 먹지 말라는 금령과 더불어 방주에 함께 있던 생물을 포함하여 노아와 계약을 세우셨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생물과 맺은 영원한 계약을 기억하겠다고 약속하시고 무지개를 계약의 표징으로 삼으셨다(창세 9,15-16 참조). 세상에 퍼져나간 노아의 자손들의 족보(toledot)는 만백성이 모두 노아의 후손이라는 사제계 학파의 보편주의를 드러낸다.

 

그 뒤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신다(창세 17장 참조). 그의 후손 가운데 야곱(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장차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될 것이다(탈출 6,2-8; 29,45-46 참조). 그들은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사제들의 나라를 세우고 거룩한 민족(탈출 19,6; 참조 레위 19,2)이 되어 하느님께 성막을 지어 바치게 될 것이다(탈출 25-40장 참조). 창세 1-11장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엘로힘(Elohim)’으로 불리고 성조들에게는 ‘샤다이’(shadday, 전능한 하느님: 창세 17,1; 탈출 6,3 참조)로 나타난다. 하지만 성조들의 하느님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야훼’라는 이름으로 계시되어(탈출 3,15 참조) 창조주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동일한 분이심이 드러난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세상의 창조주라는 것을 알고 고백하는 민족이요, 성소(聖所)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만나는 사제의 백성(탈출 19,6 참조)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소명은 홍수가 나기 전, 세상에 넘치던 폭력으로 무너져 버린 하느님과의 친교를 예배를 통해 복원하는 것이다. 사제계 문헌에 의하면 예루살렘과 다시 세워진 제2성전이야말로 세상 한복판에 자리한 예배의 중심지이다. 시온이 모든 민족들에게 예배의 중심지가 되리라는 기대가 유배 이후의 예언서(이사 2,3; 66,18.20 참조)에도 자주 등장하지만, 그것은 단지 종말론적 약속의 차원에서 언급될 뿐이다. 그러나 사제계 문헌은 시온 중심의 예배를 세상 창조 때부터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소명으로 묘사하여 예언자적 전망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사제계 문헌은 인간의 폭력으로 끊어진 창조주 하느님과의 소통을 민족의 소명으로 알고 비폭력주의를 지향한다.

 

이 비폭력주의가 초식(草食)을 이상향으로 삼고 차선책으로는 피의 섭취를 금기시하면서 동물과 평화롭게 공존하기를 지향하게 한다. 어쩌면 하느님과의 친교, 다른 피조물과의 소통을 소명으로 삼는 사제계 문헌의 보편주의적 전망은 아마도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하에 살아가던 이스라엘이 자신의 신원을 새로운 정치·종교 상황에서 이해한 결과였을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하느님 야훼는 다른 민족들도 하늘과 땅의 창조주로 숭배하는 한 분 하느님으로 동일시되었고, 제2성전에서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사는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서 보편적 차원을 지니게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야훼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는 거룩한 민족, 사제의 백성으로 불린 이스라엘의 특수성과 만백성을 위한 보편성을 매개하는 탁월한 자리가 되었다.

 

우리가 사제계 문헌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 문헌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근원적으로 창조 역사와 연계시키고 다른 피조물들, 특히 식물과 동물과 땅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소명을 강조하는 생태주의적 세계관과 윤리관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생태신학은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의 삼중 관계를 창조부터 이스라엘의 역사 이야기에 이르는 성서적 빅 히스토리 안에서 논의해야 한다. 창조와 구원의 포괄적 이야기가 생태신학의 자리인 것이다. 다음 호부터는 창세 1-11장의 기원사를 필두로 사제계 문헌에 담긴 생태신학적 전망과 관점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성서와 함께, 2013년 5월호(통권 446호)]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창조와 진화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올해 4월 하순의 어느 날, 우리나라를 방문한 생태신학자 데니스 오하라 교수(캐나다 토론토 대학교)가 신학생들에게 생태신학과 생태영성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하라 교수는 생태신학의 논의가 비록 지구의 생태 위기에서 촉발된 것이 사실이지만, 생태 위기가 없더라도 생태신학은 그 자체로 존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였다.

 

생태신학은 인간이 지구 생태계를 파괴한 결과 생명체가 멸종 위기에 직면하였다는 현실 인식에서 출발하여 이에 대한 신학적 · 사목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탄생하였다. 하지만 이에 앞서 생태신학은 우주와 인간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보고 우주적 연대성의 관점에서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려는 새로운 신학적 성찰의 결실이다. 138억 년 전 아주 작고 밀도가 높은 양자 에너지에서 시작된 우주 이야기에서 가장 마지막에 출현한 생명체인 인간이 지구상의 다른 것과 연결되어 있고, 이 모든 것이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생명을 지탱하고 있다는 통찰에서 생태신학이 전개되는 것이다.

 

강연이 시작되기 전에 나는 오하라 교수, 이재돈 신부와 함께 4월의 생기로 가득한 신학교의 낙산 마루에서 떨어지는 꽃비를 맞으며 즐겁게 산책하였다. 나는 따스한 햇살과 훈풍과 흩날리는 꽃비와 우리 세 사람의 황홀한 만남이 있기까지는 138억 년에 걸친 기나긴 우주적 인고의 역사가 필요했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이 맥락에서 볼 때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명제는 인간과 외부 세계를 갈라놓는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이고 매우 주관적인 관념론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우주의 모든 요소와 더불어 하나의 생명으로 존재하고, 생명의 지구적 발현을 온몸으로 느끼며 생명의 충만함을 감격과 감사로 음미하고 있다는 사실 위에 굳건히 서 있다. 그러기에 이 생태 시대에 우리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우주가 존재하기에 내가 존재한다’로 바꾸어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난 호에서 나는, 빅 히스토리(Big History)가 우주의 기원과 인간의 역사를 통합하여 인간과 우주를 이해하려는 시도라고 할 때, 창세기가 당대의 빅 히스토리였다고 말한 바 있다. 빅 히스토리나 우주 이야기를 말하고자 할 때는 통합적 사고가 방법론으로 요구된다. 자연과학과 인문학, 그리고 신학의 경우에는 자연과학과 인문학과 계시 진리를 종합하면서 우주 안에서 인간을 보고 인간 안에서 우주를 이해하는, 상호 연계적이며 전일적인 사고방식이 요구된다.

 

창세기의 세상 창조 이야기는 사실 오늘날의 과학적 우주 이해와 맞지 않아 보인다. 먼저 엿새에 걸친 창조 이야기가 138억 년의 우주 역사와 맞지 않다. 사흗날에 창조된 땅과 식물이 나흗날에 나타난 별들보다 먼저 창조되었다는 것도 큰 모순이다. 그래서 창조 신앙과 진화론은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이질적 세계관이기에 서로 관련하여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창조와 진화를 전일적이고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

 

창조는 혼돈(tohu bohu) 가운데 질서가 출현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엿새간의 창조는 매우 질서 있게, 그리고 단계를 높여가며 진행된다. 여기서 ‘가르다(badal)’는 동사와 ‘종류(min)’라는 명사가 자주 사용된다. 동사 ‘가르다’(창세 1,4.6.7.14.18 참조)는 혼돈 상태에서 창조되는 사물의 질서를 드러내고 ‘종류에 따라’(창세 1,11.12.21.24.25 참조)라는 표현은 수많은 생명의 다양한 질서를 가리킨다.

 

식물은 빛과 어둠의 가름, 물과 뭍의 가름 다음에 출현한다. 동물 역시 빛 물체에 의한 빛과 어둠의 가름 다음에 나타난다. 바로 여기에 두 가지 의미 있는 전망이 드러난다. 첫째 하느님의 가름, 곧 분리 행위야말로 자연의 조성과 생명의 자율성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물을 갈라 땅이 드러나도록 하셨고, 땅에게 푸른 싹과 과일 나무를 돋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물의 분리로 생성된 땅이 그 위에 온갖 생명을 가능케하는 조건이 된다. 구분하고 분리하는 과정에서 생명의 개체성이 확보되고 생명의 자율성이 보장된다.

 

하느님께서는 물에서도 생물이 우글거리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마치 땅과 물에 내재한 자연적 힘에게 말씀을 건네시어 식물과 동물을 생성하도록 만드시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분리는 창조적으로 작용하여 물질에서 생명으로, 단순한 생명에서 복잡하고 다양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일련의 진화 과정을 가능케 한다. 성경은 자연계를 맹목적이며 기계적인 발전 과정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이 법칙이 되고 하느님의 섭리가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진화와 돌연변이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두 번째로 지적할 점은 빛과 어둠이 분리된 뒤(창세 1,4.18 참조), 식물(창세 1,11 참조)과 동물(창세 1,20 참조)이 각각 출현했다는 것이다. 이는 생명이 바로 빛과 어둠이 갈마드는 과정을 통해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빛으로 말미암아 식물이 땅에서 돋아나고 빛물체들로 말미암아 동물이 물과 땅에서 번성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어둠은 무엇을 의미할까? 창세 1장을 쓴 사제들은 어둠의 현실이 생명의 또 다른 모습인 점을 간파하였다.

 

빛과 어둠은 생명과 죽음의 또 다른 모습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혼돈에서 피어난 생명이 겪어야 하는 환란과 고난,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바로 빛과 어둠이 분리되어 서로 갈마드는 자연의 순환 질서에 따른 것이다.

 

성경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창조를 설명하려는 창조론자들은 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창세기의 저자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학적 언어로 창조를 설명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창조를 주도하시되 땅과 물에게 생명을 낳도록 자율성과 목표를 부여하셨다고 기록한다. 이처럼 창조에는 종류대로 다양한 생명체가 출현하여 번성할 수 있도록 자율성과 함께 목표가 주어져 있다.

 

한편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를 주장하는 것도 성경의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파란만장한 우주 드라마에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아담 이야기에서 보듯, 피조물이 지닌 자유의 여백과 미래에 대한 불가 예측성은 지적 설계로 표현되는 당위성과 계획성에 들어맞지 않는다. 차라리 우연처럼 보이는 수많은 자연발생적 사건에서 회고적으로 하느님의 손길과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우주 이야기에 더욱 잘 어울린다. 냉정해 보이고 우연적이며 맹목적으로 보이는 다윈의 ‘자연 선택 이론’이 하느님의 섭리와 모순된다고 볼 이유가 없다. 사실 자연 선택에 작용하는 하느님의 섭리는 마침내 역사의 종말에 가서나 밝혀질 것이다.

 

일찍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진화론이 가설 이상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인정하였다. 창조는 하느님의 놀라운 자유와 사랑이 빚어내는 신비이고, 진화는 하느님과 피조물이 함께 만들어 가는 창조의 과정이다.

 

[성서와 함께, 2013년 6월호(통권 447호)]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피조물의 불완전함에 대한 하느님의 긍정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신학교에 녹음이 우거지고 있다. 가슴을 설레게 한 봄의 연두색 향연도 막을 내리고, 짙어 가는 녹색의 물결이 낙산의 숲을 채우고 있다. 이렇게 성큼 여름이 다가왔지만 북핵 문제와 북한 동포의 비참한 실상은 우리 마음을 여전히 얼어붙게 한다.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하는 자연 재해도 녹색의 캔버스에 커다란 흠집을 남긴다.

 

이렇게 자연과 역사는 아름다움과 추함,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지닌다. 조화와 행복, 모순과 갈등이 혼재하는 자연과 역사의 한복판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보여 준다. 이런 의미로 자연도 하느님의 성사(聖事)이고 역사 또한 하느님의 성사다. 성경은 자연과 역사의 의미와 목표를 일러 주는 불후의 이정표다.

 

하느님께서는 창세 1장에서 ‘보시니 좋았다(tob)’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과연 좋음의 의미와 조건은 무엇일까?

 

창조와 구원

 

첫날, 어둠은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된다. 하느님께서는 어둠을 좋게 보시지 않고 어둠의 한복판에 빛을 만드시고 빛에 대해서만 좋았다고 하셨다. 시편에도 창조를 암시하는 대목이 여럿 있다. 시편 74,13은 하느님께서 바다를 당신 힘으로 뒤흔드시고 물 위에서 용들의 머리를 부수었다고 표현하여 창조를 혼돈의 세력에 대항하는 신화적 전투로 묘사한다. 창조는 하느님의 최초의 구원 행위이다(시편 74,12-17 참조).

 

그러나 창세 1장은 하느님과 용의 전투 같은 신화적 요소를 제거하였다.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혼돈과 심연에 질서를 부여하셨다. 혼돈과 무질서에서 질서 있는 세상, 코스모스(cosmos)가 출현하는 일련의 과정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장차 약속의 땅에 이르는 구원의 역사와 겹친다. 자연 질서의 출현과 역사적 구원의 과정이 바로 창조이다. 그러므로 태초의 혼돈과 싸워 얻은 창조의 기적은 구원의 기적이다(폴리쾨르). 창조와 구원의 단일성을 확인시켜 주는 말씀이 바로 “보시니 좋았다”(창세 1,4)이다.

 

창조와 유한성

 

창조는 시간과 공간의 창조에서 시작한다. 하느님께서는 첫날 빛을 만드시고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빛을 낮이라 부르고 어둠을 밤이라고 부르셨다. 여기서 시간이 발생하였다. 하느님께서는 궁창을 만드시어 이를 하늘이라 부르셨고 뭍을 땅으로,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여기서 공간이 출현하였다.

 

시간은 변화를 일으킬 조건을 부여하고, 공간은 개체가 출현할 자리를 제공한다.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에서 사는 것이 모든 피조물의 조건이자 한계이다. 피조물은 시간의 화살을 타고 있다는 점에서 생명의 유한성을 갖고, 몸을 가진다는 점에서 장소의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창세 1장의 저자는 피조물의 한계를 긍정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피조물의 한계에 대한 긍정이 더욱 잘 드러나는 대상은 바로 혼돈의 흔적인 어둠이요 심연의 흔적인 바다이다. 어둠은 빛과 함께 밤과 낮의 주기적 시간에 통합되고, 심연은 하늘과 땅의 질서에 통합된다.

 

이처럼 창세 1장은 세상의 양면성을 통합한다. 밤과 낮이 질서 있게 교차하며 하루가 구성된다. 사제계 학파가 생각하는 창조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창세 1,31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참 좋았다’고 긍정하셨는데, 성경은 한 번도 자연이 완전하다고 암시한 적이 없다.

 

사실 자연 그 자체는 불완전하다. 자연에는 불완전한 것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심연이요 어둠이다. 좋다는 말은 미학적 아름다움이나 내적 효율성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의 기대에 부합하도록 무질서에서 질서가 생겨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창조의 과정에서 하느님의 창조 목적과 실현 사이에 여전히 간격이 있다.

 

‘보시니 좋았다’는 하느님의 말씀은 한처음의 완전함을 기리는 회상의 말이 아니다. 혼돈과 심연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질서의 출현을 긍정하고 강복하는 말씀이다. 그것은 점진적으로 발생하는 피조물의 다양성과 복잡화의 구조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시선이다. 현재 상황이 완전하지 않은데도 ‘좋았다’고 긍정하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에서 비롯한다. 하느님의 창조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창조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과정에 놓여 있는 피조물의 죄와 한계를 구원의 역사, 곧 지속적인 창조의 역사를 통하여 용서하고 치유하실 것이다.

 

창조적 구분과 통합

 

둘째 날, 하느님께서는 궁창을 창조하고 물을 위와 아래로 갈라놓으신 다음 ‘보시니 좋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확실히 성경은 창조 과정에 반드시 구분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밤과 낮, 남자와 여자 등 물리적·생물학적 구성 요건이 바로 구분이며 분리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성경은 이 개별화에 필요한 구분이 갈등적·차별적 분열로 나아가는 것을 경계한다. 일반적으로 분리는 갈등과 반목, 마침내 전쟁으로 치닫는 파괴적 과정으로 나아가기 십상이다. 특히 남녀 차별, 계층 갈등, 인종 차별이 사회적 불안과 갈등을 증폭시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구분은 개별성을 최대한 존중하되 개별적 주체가 전체의 화합과 일치를 추구하는 공동 지체성의 구분이다. 그것은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 개념과도 같다(1코린 12,27 참조). 구분과 통합 또는 분리와 일치의 두 긴장은 태초에 하느님께서 원하신 창조질서이다.

 

창조의 단일성과 창조의 다양성이 바로 창조의 신비다. 이런 의미로 하느님께서는 둘째 날 창조 후에 ‘보시니 좋았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어 구분과 분리가 생명의 출현에 꼭 필요하지만, 그것이 자칫 분열과 갈등을 일으켜 마침내 전쟁으로 나아가는 폭력적 · 파괴적 행보를 밟지 않도록 경고하신 셈이다.

 

자연과 역사는 인간이 사는 집이다. 집이 완전하지 않고, 더욱이 사는 이가 관리를 잘못한 탓에 물이 새고 지붕이 날아가더라도 하느님께서는 보시니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창세 1장의 위대한 낙관주의는 자연과 역사의 불완전함을 보시고도 ‘좋았다’고 말씀하신 하느님의 위대한 긍정과 강복에 근거한다.

 

[성서와 함께, 2013년 7월호(통권 448호)]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우주는 생명을 지향한다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지난 현충일에 지인들과 함께 북한산에 올랐다. 여름이 시작되었는데 비봉 부근에서 라일락 향기가 흩날리고 있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라일락이 군락으로 펼쳐져 있지 않은가! 덕분에 우리는 여름의 초입에서 봄의 향기에 흠뻑 취하는 호사를 누렸다. 곳곳에 깔린 소나무에서는 초록의 옷을 입은 여리디여린 솔방울들이 우리의 시선을 놓아 주지 않았다. 초록빛의 잎사귀를 가만히 바라보면 초록색 안에 다양한 빛깔이 살포시 숨어 있었다. 일행 중의 한 사람이 시인처럼 중얼거렸다. “아, 하느님은 초록이라는 팔레트 안에 온갖 색깔을 섞어 놓았네.” 푸른 생명으로 뒤덮인 북한산 자락에서 우리는 생명의 신비에 감동하며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파란 지구의 출현은 우주가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우리는 과학자들이 들려주는 우주 이야기를 통해 하느님의 창조 이야기를 더욱 맛깔나게 느낄 수 있다. 우주의 출현과 전개 과정에 아주 미세한 조정(fine tuning)이 있었는데, 이 미세 조정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지혜)에 의한 것이다.

 

빅뱅 우주론에 의하면 138억 년 전(플랑크 우주 망원경이 보내 준 자료에 의하면 우주의 시작이 종전의 137억 년보다 8천만-1억 년 더 오래되었다고 한다) 시간과 공간, 물질과 에너지 등 모든 것이 수조(數兆) 도에 이르는 뜨거운 점에서 시작하여 순식간에 분리되었다고 한다. 태초에 기본 입자인 쿼크와 렙톤이 생겨났고, 이 둘이 결합하여 양성자와 중성자가 형성되었다. 양성자와 중성자가 융합하여 원자핵이 만들어졌는데, 이 결합 과정에서 양성자와 중성자는 질량 일부를 포기해야 했고 이것이 빛이 되어 우주로 보내졌다. 양자 세계의 창조를 위해 본질적 희생이 필요했고 이 창조에 빛이 동반된 것이라고 브라이언 토머스 스윔은 아름답게 해석한다(《우주 속으로 걷다》, 24쪽 참조). 그리하여 수소와 헬륨 원자핵과 전자들은 태초의 빛의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이 빛을 ‘우주 배경복사’라고 부른다. 우리는 월킨스 마이크로파 관측위성(WMAP)이나 플랑크 우주 망원경이 보내 주는 우주 배경복사에 대한 사진들을 통해 빅뱅 이론에 의한 우주 초기의 상황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우주는 초당 71킬로미터 속도로 팽창하고 있다고 한다. 이 속도는 팽창하는 에너지 곧 암흑 에너지와 끌어들이려는 중력 에너지의 기막힌 조절로 결정되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우주 전체 에너지 가운데 별 · 은하 · 행성 · 가스 등 우리가 정체를 알고 있는 물질은 4%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암흑 물질(24%)과 암흑 에너지(72%)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주의 팽창 속도가 백만분의 일 퍼센트만 느렸으면 우주는 수축 과정을 거쳐 붕괴했을 것이고, 반대로 백만분의 일 퍼센트만 빨랐어도 우주는 단순한 먼지로 확산될 뿐 생명이 탄생할 지구를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우주 상수’라 불리는 이 놀라운 미세 조정으로 우주는 생명을 품는 생명 지향적 우주가 될 수 있었다.

 

여기서 생명 창조를 향한 중요한 과정이 발생한다. 전자와 양성자가 결합하여 전기적으로 중성인 원자가 만들어지고, 원자의 출현으로 별이라는 새로운 구조가 우주에 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별의 탄생은 수소와 헬륨의 구름이 중력에 의해 수축되면서 시작된다. 별은 생명체를 구성하는 기초 재료를 만들어 내는 핵융합 용광로라고 할 수 있다. 생명체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무거운 원소들과 특히 비옥한 화학 성분을 갖는 탄소가 필요하다.

 

원자들이 수축하고 충돌하여 온도가 높아지면 핵융합이 일어나 수소 원자가 헬륨 원자로 변환한다. 별 내부에는 중력에 의한 붕괴와 핵융합에 의한 팽창으로 긴장이 조성되고 불안정한 방식으로 균형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별이 수소를 다 소모하여 핵융합이 중단되면 중력에 의한 붕괴가 일어난다. 수축된 별의 중심핵이 뜨거워지면 헬륨이 탄소로 융합되고, 탄소는 산소로 융합되기까지 폭발이 반복되면서 더 무거운 원소가 생성된다. 마침내 초신성이 폭발하는 과정에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원소의 핵이 창조된다. 마그네슘, 칼륨, 인, 탄소, 금 등의 원소가 생성되어 장차 지구 행성과 그 안에 사는 생명체를 구성하게 된다. 초신성의 폭발은 우주에서 파괴를 통해 창조를 보여 주는 가장 극적인 장면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를 구성하는 탄소 원자는 이처럼 별의 내부에서 만들어졌다. 폴킹혼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죽은 별의 재에서 만들어진 것이다(《쿼크, 카오스, 그리고 기독교》, 53쪽 참조). 우리 태양계에서 지구만이 생명의 요람이 되었다. 태양은 빛의 원천이다. 태양은 매초 4백만 톤의 질량을 에너지로 변환시킨다.

 

지구에 단순한 세포가 처음 나타난 때는 약 38억 년 전이다. 약 20억 년 전에 핵을 가진 더 복잡한 세포가 나타났고, 이 생명 나무의 끝자락에 인간이 출현했다. 생명의 출현이 가능한 이유를 일리야 프리고진은 ‘자기 조직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지구 생명체는 자기 조직화를 거듭하는 심오한 우주 패턴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자기 조직화는 상호 교류로 이루어진다. 생명의 상호 교류를 입증하는 가장 놀라운 현상이 바로 광합성이다. 광합성은 생명이 태양 빛을 이용하여 푸른 지구를 만들어 내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작용이다. 엽록소는 빛을 흡수해 초록색을 띠고 에너지를 만들어 생명의 원동력이 되게 한다. 광합성은 산소를 배출하여 대기와 물을 정화함으로써 하늘과 바다를 푸르게 하였다. 광합성이 없다면 산소도 오존도 없을 것이다. 오존층이 없으면 차단되지 않은 자외선이 지표면의 물을 산소와 수소로 분해할 것이고 그러면 바다도 형성될 수 없을 것이다(닉 레인, 《생명의 도약》, 109쪽 참조).

 

이렇게 지구에 푸른 생명이 나타날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이 참으로 절묘하게 갖추어졌다. 지구가 태양에서 1억 5천만 킬로미터가 떨어져 있다는 적절한 거리 때문에 지구의 온도는 생명이 탄생하는 데 적합했고, 목성의 중력이 소행성들의 위협에서 지구를 보호해 주었다. 그리고 지구의 크기는 달처럼 작지 않아 적절한 중력으로 산소를 머금은 멋진 대기권을 만들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지구에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조건을 미세하게 조율한 결과였다. 마침내 지구에 생명이 넘쳐나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번식하고 번성하여 바닷물을 가득 채우고 새들도 땅 위에서 번성하라”(창세 1,22 참조)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다양하고 풍요로운 생명의 바다에서 다른 생명과 함께 유영하는 존재다. 왜 생명이 이토록 강하고 아름다운가? 그것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생명 지향적으로 우주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우주의 목표는 생명의 출현과 풍요로운 번성이다. 왜 생명은 그토록 집요하게 자신의 유전자를 전해 주고자 하는가? 바로 하느님께서 바다와 땅을 채우라고 생명에게 복을 내려 주셨기 때문이다. 이 용솟음치는 생명의 향연에 참여하는 우리는 우주를 창조하신 생명의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더욱 애틋한 마음으로 뭇 생명을 돌봐야 하지 않겠는가!

 

[성서와 함께, 2013년 8월호(통권 449호)]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우주 안에서 인간의 위치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영화제로 유명한 프랑스의 도시 칸느 앞에는 섬이 두 개 있다. 그중 하나가 ‘성 오노라(Honorat)’ 섬이다. 그곳에 자리한 레헹스 수도원의 이름을 본떠 ‘레헹스(L´erins)’ 섬이라고도 불린다. 400년대 초부터 오노라 성인이 그 섬에 정착하여 수도 생활을 시작한 뒤로 무려 1600년에 걸쳐 수도승들의 역사가 지속되고 있다.

 

학생 때 와 보고 20년 만에 다시 찾은 레헹스 섬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수도승 22명은 새벽 4시 반부터 주님을 찬미하는 노래로 새벽을 일으켜 깨우고 섬의 하루를 시작한다. 해가 떠오르기 전 검푸른 하늘을 여행하던 초승달이 울창한 종려나무 사이로 마지막 얼굴을 내비친다. 그때 우뚝 솟은 성당의 종탑이 신비로운 빛을 발하면 차마 눈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 꼼짝없이 붙들리고 만다. 차라리 그 자리에 붙박이로 서서 떨어지는 초승달을 보내고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것이 주님께 봉헌하는 또 다른 기도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실 그곳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성당에 가만히 앉아 주님을 찬미하기가 힘들(?) 정도다. 낮에는 그냥 해안 길을 따라 거닐면서 기도하고, 밤에는 별을 헤며 찬미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다가 시간경을 바치러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평생 주님을 찬미하며 살아온 수도승들의 화음과 기도가 소박하고 견고한 고딕식 성당의 돌들과 어우러져 천상의 찬미가로 들려온다.

 

레헹스 섬의 또 다른 특징은 40헥타르에 달하는 전체 면적에서 8헥타르의 포도원을 수도승들이 경작하여 양질의 포도주를 생산한다는 점이다. 수도승들은 육체노동으로 자급자족하는 시토 수도회의 정신에 따라 ‘기도하고 일하라(Ora er labora)’는 베네딕토 성인의 규칙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아간다.

 

이처럼 레헹스 섬은 드넓은 포도원, 소나무와 다양한 수종으로 이루어진 울창한 숲, 지중해의 쪽빛 해안(Cote d´Azur) ^ 이 조화를 이루는 청정 지역이다. 아울러 인간의 노동과 기도, 온갖 새와 벌레(당연히 모기를 포함하여), 나무, 돌, 흙, 바람, 물 등이 어우러져 창조주를 찬미하는 생태 공동체이다.

 

하느님, 자연, 인간이 함께 어우러지는 이 섬의 하루는 일상을 넘어 영원의 시간으로 영혼에 새겨진다. 프랑스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평생 헌신한 엠마누엘라 수녀님(1908-2008년)도 이곳이야말로 영적 원천을 제공하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장소 중 하나라고 칭송하였다.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에서 창조의 신비를 묵상하지만, 사실 창조의 절정은 인간이 아닌가! 인간이 우주에서 가장 경이로운 피조물이 아닌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탄성부터 터져 나온다. 부모와 자식의 만남과 연인의 만남이 그렇다. 마르셀 파뇰(Marcel Pagnol) 원작의 영화 [파니(Fanny)]에서 파니는 아이의 아빠가 멀리 떠나고 없는 절망적 상황에서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태어난 아이를 보고 ‘이 세상의 경이(le merveille du monde)’라고 감탄한다. 성경의 아담도 잠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하와를 봤을 때 크게 감동하여 부르짖는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엿샛날, 곧 마지막 날에 인간을 창조하셨다. 인간이 창조의 절정이자 목표인 것이다. 생태계의 모든 생명이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심층 생태학(Deep Ecology)은 성경의 이런 인간관을 인간 중심주의 사고의 산물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사제계 문헌은 분명히 말한다. 인간은 창조의 마지막 날에 매우 특별하게 창조되었다고! 그 특별함은 인간이 하느님과 비슷하게 그분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데에서 드러난다. 이 비슷함(demut)과 모상성(selem, 라틴어 imago)을 하느님과 겉모습이 유사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흔히 지적하듯이 하느님께서는 형상으로 우상을 만들지 말라(신명 4,16 참조)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제키엘이 하느님의 모습을 사람의 형상(1,26; 참조 다니 7,13)으로 묘사한 것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상상력이 지닌 가능성이자 한계였을 것이다. 하느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그렸다는 주장(신인동형론, anthropomorphism)과 반대로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을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이라는 주장(신형상론, theomorphism)은 동전의 양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느님 체험에 대한 인간 표상의 한계를 넘어서 하느님과 인간을 유사하게 만드는 근본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라는 복수형의 어법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누구를 상대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일까? 왕실에서 사용하는 위엄의 복수(pluralis majestatis)는 히브리어 문법에 나타나지 않는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내부 의논 과정이라는 그리스도교의 해석도 창세기 차원에는 적용될 수 없다.

 

유다교 라삐 전통에 따른 세 번째 해석은 이러하다. 하느님께서는 천상회의에서 네 천사와 의논하셨는데, 각각의 천사는 진리와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대표한다. 평화와 진리는 인간이 만들어 낼 파괴와 거짓을 염려하여 인간 창조를 반대했지만, 정의와 사랑이 이를 찬성하면서 결국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네 가지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통해 실현하시려는 가치이다.

 

마지막 네 번째 해석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창조될 인간과 함께 의논하신다는 것이다. 이때 인간은 하느님의 파트너인 셈인데, 피조계 전체를 상대로 진리, 사랑, 평화, 정의를 구현하는 파트너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왜 인간을 당신과 비슷한 모습으로 만드시고, 그것도 의논하는 상대로 인간을 선택하여 만드셨는가에 대한 최종 답변이 될 것이다.

 

프랑스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는 <미래를 위한 생태학적 도전과 과제>(2012년)라는 문헌에서 인간의 역할을 하느님의 창조 계획에 참여하는 ‘공동 창조자’로 표현하였다. 한편 창세 2,15에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에덴 동산을 일구고 돌보게 하시어 피조계의 관리자 또는 청지기로 삼으셨다고 묘사한다. 공동 창조자라는 표현이 인간에게 과도할 수 있지만, 창세 4,1은 하와가 하느님과 함께 남자아이를 얻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생명이 생겨나는 과정에서 하느님은 인간의 동반자요,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에 참여하는 공동 창조자다. 나아가 인간은 이성의 능력과 삶의 의지를 창조적으로 사용하도록 우주 안에서 매우 특별한 소명을 지니고 있다. 다음 호부터는 공동 창조자로서 인간이 받은 소명에 대해 살펴보자.

 

[성서와 함께, 2013년 9월호(통권 450호)]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채식에 의한 원초적 생태 질서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이다. 몽고의 대초원에서 말들이 풀을 뜯고 미국의 거대 목장에서 소들이 한가하게 풀을 뜯는 장면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풀은 아낌없이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고 동물은 싱싱한 풀을 실컷 먹고 배설한다. 그 퇴비로 비옥해진 땅에 또 새로운 풀이 돋아나 생태계는 아름다운 순환을 반복한다.

 

사실 먹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창조하시고 생명이 번성하도록 복을 내려 주셨다. 생명은 다른 생명을 취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이어 가고, 자신도 다른 생명에 이바지한다. 먹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모든 생명이 동일할 것이다. 소는 온종일 풀을 뜯으며 행복해한다. 식사는 생명을 주고받는 자리이다.

 

나는 밥을 먹으면서 황홀해할 때가 있다. 유학 시절, 한국 음식을 정말 오랜만에 먹었을 때 밥과 김치와 불고기가 뿜어내는 냄새와 맛에 매료되곤 했다. 지금도 밥을 먹으면서 황금빛 들녘에서 넘실거린 벼의 싱싱한 생명이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우리는 음식을 눈으로 만나고 냄새와 맛으로 만난다. 음식을 섭취하는 과정이야말로 다른 생명과 소통하는 생태계의 가장 근원적 질서다. 우리도 소처럼 천천히 음식을 씹으며 그 맛을 음미하고 생명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재배와 유통, 요리에 이르기까지 음식이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에서 노고를 아끼지 않은 이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더 좋을 것이다.

 

식사 시간에 침묵을 지키는 수도승들의 전통은 공기, 물, 음식 등 다른 피조물과의 동화를 경험하도록 이끌어 준다. 하느님 안에서 음식을 먹는 식사 시간이야말로 하느님, 인간, 자연이 한데 어우러지는 가장 친밀한 일치의 시간이다.

 

먹는 것과 함께 동화(同化)의 또 다른 형태는 성적(性的) 결합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라”(창세 1,28 참조)고 말씀하신 다음, 먹을거리를 언급하신 것(창세 1,29 참조)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먹는 것과 성적 결합은 생명 현상의 두 근간이다. 성적 결합으로 생명이 탄생하고, 먹어서 생명이 유지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먹으라고 하셨는가?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는 온갖 푸른 풀을 양식으로 준다”(창세 1,29-30).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들을 다스리는’(창세 1,28 참조) 권한을 주셨다. 그러나 이 다스림의 특권은 두 가지 제한을 받는다.

 

첫째,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라”고 복을 내려 주셨지만 다른 생명도 번성하도록 복을 주셨다. 피조물 전체에 대한 강복(창세 1,31 참조)은 인간 중심주의를 제한한다. 토마스 베리는 모든 창조물에게 세 가지 기본 권리가 있다고 선언하였다. 존재할 권리, 자신의 목적을 이룰 권리,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취할 권리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권리가 모든 피조물에게 같은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인간의 권리를 갖는 반면 숲과 동물은 그만의 고유한 권리를 갖는다. 모든 권리는 상대적이며 제한적이다. 그러기에 모든 생명은 서로를 인정하여 함께 번성하도록 협력해야 한다.

 

둘째, 인간이 본래 채식을 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은 에덴 동산의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흙에서 자라게 하시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 외에는 모든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를 따 먹도록 아담에게 허락하셨다. 따라서 동물은 채식하는 인간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고, 인간도 채식하는 동물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평화가 있고,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부드러울 수밖에 없다. 그 부드러운 지배가 인간과 동물이 상호공존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왜 하느님께서 인간과 동물에게 채식을 창조 질서로 부여하셨을까? 풀이나 열매를 먹는 것은 개체성을 소멸시키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풀과 열매는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개체적 생명이 스스로 증식한 결과이다. 뿌리와 줄기가 남아 있는 한 그 결실은 철 따라 반복하여 재생산된다. 식물은 모든 생태계의 근간이다. 식물이 없으면 지금의 생태계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식물이 있기에 곤충이 존재할 수 있고 또 척추동물과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 주기적으로 아낌없이 베푸는 식물이 있기에 생태계는 선순환을 이룰 수 있다. 개체는 사라지지 않으면서 열매와 풀로 동물과 인간을 양생시키는 식물 덕분에 생태계는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다고 창세기는 그리고 있다.

 

그러나 채식에 의한 생태 질서는 무너지고 말았다. 개체적 생명을 죽이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성경은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말한다(창세 6,11 참조).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인간이 동물을 죽여 먹이로 취하고, 때로는 동물도 인간을 죽여 먹이로 삼으면서 폭력이 세상을 채운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폭력이 세상에 들어왔는가? 이 문제는 아담과 카인의 이야기에서 다룰 것이다.

 

채식에 의한 생태계의 평화 회복이라는 주제는 이사야서에 다시 나타난다.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으리라”(이사 65,25; 참조 11,7). 그러나 이 현상은 종말론적으로 이루어질 미래의 꿈이다. 여기서 늑대와 새끼 양은 폭력적 인간(제국주의 세력 같은)과 비폭력적 인간(고난받는 주님의 종 같은)을 상징하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모든 생명의 개체적 존엄성을 강조하는 성경은 보편적 채식에서 죽임이 없는 생태계의 질서를 보았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고 이를 먹을거리로 내놓으신 까닭은 채식으로 생태 질서를 회복하시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채식주의를 창조 질서에 따른 올바른 생태적 삶으로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노아의 홍수 이후에 인간에게 육식을 허용하시기 때문이다(창세 9,3 참조). 중요한 것은 채식의 의미를 성찰하는 일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무엇을 먹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 있다(We are what we eat). 개체적 생명을 죽여 얻은 고기를 먹는 사람이 생명을 죽이지 않고 채식하는 사람보다 폭력성을 띨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와 불교와 힌두교의 수도승이 육식을 하지 않으려는 것도 인간의 동물적 폭력성(성적 충동 포함)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성서와 함께, 2013년 10월호(통권 451호)]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하느님의 모상과 부드러운 다스림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창세 1장은 우주 창조부터 인간 창조에 이르기까지 거대사의 품격으로 하느님의 계시를 전한다. 이번 호에서는 하느님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시각을 제시하는 거대사의 서문격인 창세 1장을 종합해 보자.

 

원초적 축복

 

창세 1장에는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후 ‘보시니 좋았다’고 하신 표현이 일곱 번 등장한다. 사제계 저자는 하느님께서 창조의 순간마다 당신이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 감탄하시는 모습을 그린다. 하느님께서는 창조 행위 중에 잠시 멈춰 바라보신다. 당신에게서 비롯하였으나 당신과 구별되는 피조 세계를 바라보고 음미하신다. 하느님께서 느끼신 놀라움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은 좋으시다’고 노래할 때 사용한 표현으로 그려진다. ‘주님은 좋으시다(선하시다)’는 표현은 시편 100,5; 106,1; 136,1; 1역대 16,34에 나타난다. 하느님의 창조에는 바라보는 동작이 수반된다. 이 바라봄에서 자신과 구별되는 타자와의 관계에 여백이 생긴다. 그리고 타자에게서 느껴지는 신뢰와 경탄이 그 여백을 채운다. ‘보시니 좋았다’는 하느님의 말씀은 피조물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원초적 축복이다.

 

인간의 소명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후 ‘좋았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일부러 생략한 것은 아닐까?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는 복수의 어법과 관련 있지 않을까? 라삐 전통은, 인간이 본래 불완전하게 창조되어 하느님과 함께 자신을 만들어 가야 하기에 ‘만들자’라는 복수 용법을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만들자’의 주체는 하느님과 인간이며 인간은 처음부터 자신을 만들어 가야 하는 소명을 받은 것이다. ‘보시니 좋았다’는 말씀의 생략은 인간의 책임과 소명에 대한 하느님의 염려를 반영하지 않을까?

 

하느님의 모상으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진술에 이어, ‘땅을 지배하고 뭇 생명들을 다스리라’(창세 1,28 참조)는 말씀이 인간에게 과제로 던져진다. 하느님의 모상과 인간의 다스림은 문맥상 깊은 관련을 지닌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보편적 다스림에 인간이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인간이 뭇 생명을 다스리는 방식은 초식(草食)으로 제한된다(창세 1,29 참조).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타자의 생명을 죽이지 않고 다스린다는 점에서 부드러운 지배를 의미한다(폴 보셩). 이는 인간이 뭇 생명을 만나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그 안에 이 세상을 부드럽게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숨어 있다.

 

하느님의 부드러운 다스림

 

하느님께서는 영과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영이 태초의 물 위에 감도는 모습은(창세 1,2 참조), 유다인들의 성경 주석에서 어미 새가 새끼 위를 빙빙 도는 모습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어머니가 자식을 돌보듯 하느님의 영이 만물을 보듬는다. 보듬음은 생명의 원리요 생명을 기르는 방식이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고대 근동의 창조 신화인 <에누마 엘리쉬>에서 마르둑이 반역적인 신들과 전쟁을 하고, 죽은 신의 시체에서 세상을 만들었다는 폭력적 창조 과정과 전혀 다르다. 혼돈과 공허에 질서를 부여하고 무질서에서 질서와 생명을 이끌어 내는 원리는 전쟁이나 폭력이 아니라 부드러운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주에 조용히 울려 퍼지고, 조용한 울림이 세상을 변화시키며 세상에 균형과 질서를 부여한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과 더불어 어둠과 빛이 갈마드는 하루가 탄생한다. 어둠은 하루에 통합되고 빛과 더불어 일상을 만드는 한 축이 되어 서로 다른 것들이 공존하며 다양성을 빚어 낸다.

 

하느님의 부드러운 다스림은 역사를 이끌어 가는 원리이기도 하다. 지혜 12,18은 가나안인들이 만행(지혜 12,3-5 참조)을 저지르는데도 하느님께서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아주 부드럽게 다스린다고(meta polles pheidous dioikeis) 말한다. 이 부드러운 다스림이야말로 하느님의 힘이다(지혜 12,18 참조). 하느님의 힘은 그분께서 만물을 소중히 여기시고(지혜 12,16 참조) 만물을 돌보시는 데에서(지혜 12,13 참조) 드러난다.

 

하느님의 부드러운 다스림은 말씀의 자기 조절 기능과 대화 방식으로 나타난다. 말씀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카오스적 힘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기능을 갖는다. 하느님의 부드러운 힘은 어둠과 밤의 존재를 용인하면서 창조주의 전능을 제한하고 조절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말씀에 의한 부드러운 다스림은 대화의 기본 구조를 지닌다. 대화는 타자를 존중하고 타자를 참여시킨다. 반대로 폭력은 참여와 대화를 거부한다.

 

카인은 아벨을 죽일 때 아벨과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창세 4,8 참조). 카인이 아벨과 대화했다면 그를 죽일 수 있었을까? 반대로 하느님께서는 카인과 끊임없이 대화하신다. 카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미리 경고하고 타이르시고, 카인이 아벨을 죽인 다음에는 카인에게 말을 건네며 그의 생명을 지켜 주신다. 이처럼 말씀에 의한 다스림은 부드럽다. 말씀이 사라질 때 폭력과 죽임이 판을 친다. 유다 서간(10-11절 참조)은 카인의 길을 따라 걸은 이들을 ‘지각이 없는 짐승(hos ta aloga zoa)’에 비유한다. 짐승은 소통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대화가 없는 인간은 짐승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안식

 

하느님께서는 하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창세 2,2 참조). 이 쉼이 하던 일을 다 이루게 한다. 창조의 완성과 하느님의 쉼이 상응한다. 쉼이 없다면 창조는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쉼(sabat)은 중단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하던 일을 멈춰 당신의 창조 능력에 방점을 찍으셨다. 안식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창조 행위를 조절하고 스스로 한계를 긋는 행위이다. 안식은 하느님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채우려는 의도를 포기하게 하고, 피조물에게 자율권을 부여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모든 업적을 바탕으로 뭔가를 하고자(la asot) 쉬셨다(창세 2,3 참조). 뭔가의 주체와 대상은 무엇인가? 아마도 하느님의 안식은 인간에게 소명과 자율성이 주어지는 탁월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마르 2,27 참조)이 이 수수께끼 같은 본문의 해답이 아니겠는가?

 

고등학교 시절, 치열하게 문학을 추구한 친구의 시 제목이 떠오른다. “11월의 태양이 어미 닭의 체온으로 있을 때.” 하늘을 향해 솟구치던 생명이 땅에 떨어져 뒹구는 11월의 모습은 처연하다. 강함과 약함이, 생명과 죽음이 갈마드는 심연에서 새끼를 보듬으려는 어미 닭의 부드러운 날갯짓. 거기서 우리는 심연 위를 감도는 하느님의 영의 이미지를 보고(창세 1,2 참조), 멸망의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애절한 마음을 읽는다(마태 23,37-38; 루카 13,34-35 참조). 이처럼 부드러운 배려가 하느님의 모습이고, 그것은 그분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뭇 생명을 만나는 방식이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1월호(통권 452호)]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피로 사회와 안식일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2013년 한 해도 저물어 간다. 저마다 올해의 성적표를 받아 들고 새해를 준비한다. 내가 일한 회사의 실적을 평가하고 개인의 성과를 계산하면서 이 한 해의 끄트머리를 마감한다. 모든 것을 양으로 판단하는 성과 사회의 모습이다.

 

작년에 출간된 《피로사회》라는 책이 많은 이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이유도 우리 모두 성과 중심의 사회, 곧 피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21세기의 사회가 부정과 제한과 금지의 ‘규율 사회’에서 긍정과 자유와 탈규제의 ‘성과 사회’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규율 사회는 규율과 의무를 내세워 타인을 착취하지만, 성과 사회에서는 ‘뭐든 할 수 있다’는 주문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착취한다. 스스로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되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자신을 착취하는 것이 성과 사회의 인간상이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성과 사회에서는 ‘너는 할 수 있다’는 정언만이 사회를 지배할 뿐, 사실 이 시스템의 지배자는 없다. 타인은 나의 소비 대상이 되고 경쟁 대상은 결국 자신으로 귀결된다. ‘너는 할 수 있다’는 명제를 수행하는 외로운 자기 착취는 끝내 나를 만족시켜 나를 이길 수 없으므로 결국 피로의 극단에 이르고 마침내 죽음으로까지 내몰리게 된다.

 

고립된 성과 사회에서는 최고경영자도 실업자도 다 같이 피로와 소진과 우울증에 빠져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자살하기도 한다. 자신을 착취하는 것은 실직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라 성과에서 오는 자기만족의 나르시시즘 때문이다. 성과가 스스로를 억압하여 실적의 노예로 만든다.

 

사회적 약자와 분배 정의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20 대 80, 1% 대 99%의 승자 독식 구조를 비판한다. 그러나 이 또한 성과 사회의 다른 면에 불과하다. 독식하는 승자도 만성 피로와 과잉 긍정의 주문에 사로잡혀 희생자가 되고 만다.

 

결국 피로 사회는 성과주의에 중독되어 타인을 대상화하고 자신마저 소외시켜 우울증, 자기 부정, 급기야 죽기까지 이끄는 자본주의의 간계이다.

 

우리가 피로한 것은 경쟁 구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지만, 그 무한 경쟁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다 같이 피로하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저자는 피로 사회의 문제가 노자의 무위(無爲) 자연 사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자연이 무위이기만 할까? 피로 사회의 근본 원인은 인간으로 하여금 실적과 성공으로 내닫게 하는 자연스러운 충동과 경향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피로 사회도 사실은 자연이 낳은 산물이요, 자연의 한 모습이 아닌가! 유교의 유위(有爲)에 반대하여 무위자연을 주창한 노자의 가르침이 위대하긴 하지만, 피로 사회의 문제가 과연 무위 사상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유위도 무위도 다 자연의 모습인데….

 

창세기는 유위와 무위를 아우르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준다. 창조주 하느님은 일하는 하느님이시다(요한 5,17 참조). 자연은 일하시는 하느님의 산물이기에 자연에 속한 모든 존재는 하느님처럼 노동한다. 모든 생명에게는 자기 증식이 지상 과제다. 치열한 생존 경쟁도 번식하고 번성하라는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과정에 속한다.

 

하느님의 안식, 곧 휴업 또는 파업의 의미는 더할 수 없이 크다. 창조가 이루어진 7일은 ‘일’과 ‘쉼’이라는 두 가지 모습으로 완성된다. 쉼이 없다면 완성도 없다.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쉬면서 자기의 본래 모습을 바라본다. 6일의 시간은 유위의 자아로 활동하는 시간이요, 제7일은 자신에게 돌아와 무위의 자아를 회복하는 시간이다. 안식일은 생산성을 지향하는 피로 사회의 유위의 엿새를 마치고,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더불어 쉬는 무위의 시간이다. 스스로 유위에 도취되어 자기를 착취하는 것이 피로 사회의 본질이라고 할 때, 하느님께서는 실적과 자아도취의 굴레에서 인간을 해방시키신다.

 

<탈무드>는 하느님께서 만나와 인간의 얼굴을 통해 안식일을 강복하셨다고 말한다. 만나는 말씀이라는 영적 양식이며, 인간의 얼굴은 기능주의적 인간 모습에서 벗어난 자신의 고유한 인격적 모습을 의미한다. 그것은 숫자가 아니라 이름으로 표현되며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인간을 가리킨다.

 

생명은 선물이면서 과제이다. 유위의 6일은 과제로 사는 시간이되 무위의 이렛날은 선물로 사는 시간이다. 생명은 본질상 선물이다. 그래서 이사야서는 “네가 안식일을 ‘기쁨’이라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부른다면 …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이사 58,13-14) 하시리라고 말한다.

 

창조의 기쁨을 누리는 날이 바로 안식일이다. 존재와 생명을 복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날이다. 자신을 끊임없이 착취하는 현대인은 아무에게도 인정과 축하를 받지 못하고 자기 공허 속에서 우울증을 앓는다고 한다. 그러나 안식일에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6일의 노동도 칭찬받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인정받는다. 인간적인 모든 상대평가가 사라지고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된다.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 참조).

 

안식일은 즈카 14,7에 의하면 ‘낮도 밤도 없는 날’이라고 불린다. 이날이 바로 메시아의 날이라고 말한다. 안식일은 이 영원한 안식과 광명의 세계에 대한 징표요 예시이다. 안식일은 영원의 상하에서 다른 6일을 지켜보는 날이다. 영원한 생명의 시각에서 생명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지켜보는 날이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이루실 창조의 완성을 그려 보며, 지금 내가 하는 일의 소중함과 그 한계도 함께 바라보는 날이다.

 

타자가 사라진 나르시시즘의 갯벌에서 자기 착취의 덧에 사로잡힌 피로 사회의 인간에게 영원한 타자는 하느님이시다. 나를 만들고 받아 주시는 하느님이 피로 사회에 대한 근원적 해답이다. 그 영원한 타자를 중심으로 그분이 만드신 생명들은 서로를 지켜보고 인정해 주는 따뜻한 타자가 될 수 있다. 타자는 나에게 소비의 대상도, 무한 경쟁의 대상도, 적도 아니다. 생존과 영속성을 향한 무한 경쟁도 영원의 상하에서 보면 다 살고자 하는 생명들의 안타까운 몸짓이 아닌가!

 

그래서 안식일에는 사람만 쉬지 않고 동물도 쉰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자기 착취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안에서 깊은 휴식을 취하고 존재의 기쁨을 향유한다.

 

저물어 가는 2013년을 하느님의 안식 안에서 훈훈하게 보내면 좋겠다. 다가오는 새해도 그분의 영원한 빛과 생명 안에서 맞이하고 싶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2월호(통권 4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