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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말씀과 함께 걷는다 - 김경랑 귀임마리아 수녀

by 파스칼바이런 2018. 6. 18.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욥기]

하느님, 힌트라도 좀 주시죠

김경랑 귀임마리아 수녀

 

 

욥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두고 사탄과 내기하신 줄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하느님께서 귀띔이라도 좀 해 주셨더라면! 인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저자도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시편 90,10)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욥처럼 어떤 방식으로든 고통을 겪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도 잘 낫지 않는 질병으로 벌써 2년 넘게 고생하고 있습니다. 원인을 잘 모르기에 다 나을 때까지 참고 기다릴 뿐이죠. 제가 인내를 배울 수 있도록 주님께서 그리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원인 모르는 고통을 하느님 안에서 잘 견딜 때 신앙이 온전히 드러납니다. 지금 저는 잘 참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욥기는 42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론인 1-2장과 결론인 42,7-17은 설화를 담은 산문입니다. 이 산문의 틀 안에 시적 대화가 삽입된 형식으로 운문이 펼쳐집니다(3장-42,6). 욥기의 주요 부분은 사실상 운문에 속하는 여러 말씀입니다. 그러나 설화 내용은 운문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입니다. 산문에 나오는 욥은 믿음이 강하고 의로운 사람이지만, 운문에 나오는 욥은 하느님께 자기의 무고함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욥기는 구성 형식과 내용이 달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욥이 고통을 하느님에게서 받았다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욥기는 기원전 이천 년대 말기 근동 지방의 현인들에게 구전되어 오다가 왕정 시기에 히브리어로 옮겨지고, 유배를 겪은 한 시인이 고통당하는 욥의 이야기로 엮은 것으로 봅니다(《주석 성경》 1364쪽 참조).

 

1,1 우츠라는 땅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욥이었다. 그 사람은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였다.

 

머리말인 1,1-2,13에서 첫 단락(1,1-5)은 욥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줍니다. 1,6-2,13에는 하늘과 땅이 교차되는 다섯 개의 장면이 나오죠. 저자는 전설을 들려주듯 도입부를 시작합니다. 욥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쓰는 이름이 아니라 서부 셈족의 흔한 이름 중 하나입니다. 욥은 요르단 동편 우츠의 반유목민 족장으로 “동방인들 가운데 가장 큰 부자였다”(1,3)고 합니다. 욥은 아들 일곱에 딸을 셋 두었으며, 재산으로 양과 낙타가 각각 칠천 마리, 삼천 마리나 있습니다. 7은 완전수인데 3을 더하면 10이라는 완전수가 나옵니다. 성경에서 10은 많다는 뜻이며, 많은 자녀와 재산은 하느님의 복을 상징합니다. 낙타는 이동 수단, 겨릿소는 농경 생활, 양은 목축 생활을 엿보게 합니다. 그 밖에 당시 자가용처럼 이용하던 나귀도 오백 마리나 있습니다. 욥의 많은 재산은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이나 야곱의 재산에 비길 수 있습니다.

 

1,1에서 욥의 인격이 묘사된 ‘흠 없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탐(tam)’이라 합니다. 이는 ‘완전한, 옳은’이라는 뜻이며 언제나 도덕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올곧다’는 말은 ‘야샤르(yashar)’인데, ‘의롭다’는 뜻의 그리스어 ‘디아코노스(diakonos)’로 번역되었죠. 따라서 욥의 의로움은 ‘올곧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나의 종”(1,8)이라는 ‘최고의 칭호’(E. 머피)를 부여하시고, 이 세상에 다시없는 사람으로 두 번이나 인정하십니다(1,8; 2,3 참조). 그의 자녀들은 풍요롭게 지냈는데(1,4 참조), 욥은 혹시 죄를 지었을지도 모르는 아들들(딸들이 아닌)을 하나하나 불러다가 그들을 위해 제물을 바칩니다(1,5 참조).

 

1,9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욥에게 난데없이 시련이 찾아옵니다. 사탄(적대자)이 하느님께 응수합니다. 어떤 대가가 있어 욥이 하느님을 경외한다는 것이죠. 그가 하느님의 보호를 받아 많은 자녀와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1,10 참조). 이런 사탄의 냉소적 판단은 고대 종교의 핵심에 속합니다(J. L. 크렌쇼). 욥기에서 사탄은 정체가 불확실한 모습으로 관찰자 역할을 합니다. 사탄은 욥에게서 하느님의 울타리를 없애고 그의 모든 소유를 앗아가면 욥이 달라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1,11 참조). 하느님께서는 사탄의 말이 그르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욥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허락하십니다(1,12 참조). 욥을 믿으시는 하느님의 두 차례 모험이 시작됩니다. 욥은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습니다. 1,13-20에서 묘사되는 재난은 하느님의 불(벼락)과 큰 바람, 땅에서 일어나는 이민족들의 침략으로 두 번씩 교차되어 나타납니다. 욥의 모든 울타리가 하나씩 무너져 가고 그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재앙임을 알리는 단조로운 두 구절이 반복됩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1,15.19).

 

2,10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제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하루는’(1,6.13; 2,1)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하느님께서 욥의 뼈와 살을 치도록 허락하신 후(2,5 참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사탄이 하느님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욥에게 고통을 주러 갔다는 뜻입니다. 사탄은 욥을 발바닥에서 머리 꼭대기까지 고약한 부스럼으로 쳤습니다(2,7 참조). 이 모습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다”(2사무 14,25)는 것과 대조됩니다. 욥은 잿더미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종기와 고름이 난 몸을 긁습니다. “하느님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이렇게 불평할 만도 한데 욥은 초인이 된 듯 모든 고통을 받아들입니다.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제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2,10).

 

하느님과 사탄의 게임은 하느님의 승리로 끝나는 듯합니다. 사탄의 목적은 욥이 하느님을 저주하도록 하는 것이었죠. 사탄은 하느님께서 욥의 소유와 뼈와 살을 치면 틀림없이 욥이 하느님을 저주하리라 장담했습니다(1,11; 2,5 참조).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옛날 하와가 뱀의 말을 믿는 바람에 하느님께서 거짓말쟁이가 되신 것처럼(창세 3장 참조), 고통을 못 이긴 욥이 하느님을 저주했다면 욥을 믿으신 하느님께서 사탄에게 당하는 꼴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행동으로도 입술로도 죄를 짓지 않아(1,22; 2,10 참조) 하느님께 승리를 안겨드립니다. 욥을 바라보신 하느님의 시각이 틀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아내가 문제가 됩니다. 그가 사탄 편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사탄의 속셈이 욥의 아내가 한 말로 드러난 것 같습니다. 흔히 ‘처자식을 다 잃었다’고 하면 극심한 고통을 연상하게 되는데 욥의 아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있네요. 살아 있는 아내가 욥에게 고통을 줍니다.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그 흠 없는 마음을 굳게 지키려 하나요?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려요”(2,9). 그러나 욥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2,10)라고 속 깊게 말합니다. 욥의 아내가 한 말은 도전하는 욥의 태도에 연결 고리가 됩니다. 욥의 불행이 친구들에게 전해집니다(2,11 참조). 욥을 찾아온 세 친구는 그의 몰골이 너무도 비참하여 멀리서 이레 동안 바라보면서도(레위 13,45 참조) 말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2,13 참조). 그들은 욥의 독백(3장 참조) 후에 4장부터 순서대로 링에 올라갈 것입니다.

 

결론 부분(42,7-17)은 ‘하느님의 종’ 욥이 회복되고 더 큰 복을 누리는 상선벌악으로 끝납니다. “그 뒤 욥은 백사십 년을 살면서… 늘그막까지 수를 다하고 죽었다”(42,16-17)고 쓰인 것으로 봐서 욥은 젊었을 때 고통을 겪었네요. 긴 수명도 하느님의 복을 상징합니다. 친구들은 욥이 하느님께 기도를 드린 후에야 용서를 받습니다. 친구들이 하느님께 무엇을 잘못했는지, 욥이 항의와 탄원을 하는데도 어째서 하느님께서 그를 인정하였는지(42,8 참조)는 다음호에서 알아보겠습니다.

 

욥기는 우리가 겪는 고통의 문제를 다루지만 원인이나 해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고통을 당하는 한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게 해 줍니다. 우리도 욥처럼 하느님 안에서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면 자기 삶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무엇이 가장 고통스러운지, 어떻게 그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있는지 욥기를 묵상하며 함께 기도하는 한 달이 되었으면 합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월호(통권 442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욥기]

꼭대기까지 올라간 욥

김경랑 귀임마리아 수녀

 

 

욥이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산문에서 보이던 욥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네요. 예레미야 예언자가 자기 생일을 저주한 것처럼(예레 20,14-18 참조) 욥도 생일을 저주하고(3,1 참조) 울부짖기 시작합니다(3,11.20 참조). 욥은 마술이라도 걸어(3,8 참조) 달력에서 생일을 지우고 싶어 합니다(3,3 참조). 또 탄생의 빛이 어두워져 일식까지 그 어둠에 놀라 소스라치기를 바랍니다(3,5 참조). 빛을 창조하신 하느님(창세 1,3 참조)과 반대로 “차라리 암흑이 되어”(3,4) 버리라고 외칩니다. 죽기를 바랄 만큼 극심한 고통에 욥은 혼란에 빠집니다(3,26 참조). 빛과 생명은 그에게 더는 희망과 기쁨을 주지 않게 되었습니다(3,9.24 참조).

 

23,3 아, 그분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알기만 하면 그분의 거처까지 찾아가련마는.

 

“그분께서 내 앞을 지나가셔도 나는 보지 못하고 지나치셔도 나는 그분을 알아채지 못하네”(9,11). 욥은 몸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큰 고통을 겪습니다. “어둠 앞에서 멸망해 가고 내 앞에는 암흑만 뒤덮여 있을 따름”(23,17)이라는 탄식은 하느님 부재를 겪는 위기의 표현입니다. 어둠과 극심한 절망에서 영적 위기에 처한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다가 하느님과 같아지고 맙니다. 저도 힘든 시간을 보낼 때 아무리 참고 기도해도 고통이 사라지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현존하시는 하느님이 제게는 안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참 어둡고 캄캄했습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속담처럼 욥의 탄식을 듣고 있던 세 친구는 그를 이리저리 털기 시작합니다. 결국 욥을 위로하러 온 셋이 한 사람을 두고 다투는 꼴이 되죠. 대화는 테만 사람 엘리파즈(4-5장; 15장; 22장 참조), 수아 사람 빌닷(8장; 18장; 25장 참조), 나아마 사람 초파르(11장; 20장 참조)와 욥이 번갈아 말을 주고 받는 세 개의 순환 형식으로 짜여 있습니다. 3장과 29-31장은 저주를 담은 욥의 탄식(독백)이고, 이 사이에 친구들과의 대화(4-27장 참조)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저주(29-31장 참조)에서는 하느님께 자신의 무죄함을 인정받고자 하는 욥의 심정이 잘 드러납니다(31,35 참조). 욥이 무고 선언을 한 것은 도무지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친구들 때문입니다. 세 차례의 담론 중에 초파르의 마지막 말이 생략되었죠? 이것은 편집 과정에서 그의 말이 욥의 말로 바뀌었으리라 봅니다(J. L. 크렌쇼). 24,18-25; 26,5-14; 27,13-23은 욥의 말로 부적절하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은 인과응보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4,7-11; 5,6; 8,11 참조). 연장자로 테만에서 온 엘리파즈는 욥이 너무 많은 악(22,5 참조)을 저질렀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고 합니다. 욥에게 ‘인간이 하느님보다 의롭지도 결백하지도 않으며’(4,17 참조), ‘죄 없고 올곧다면 멸망하지 않으니’(4,7 참조) 자신처럼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고 충고합니다(5,8 참조). 참 신심 깊은 사람이죠? 그러나 그의 말은 욥에게 상처를 줄 뿐입니다.

 

도전받지 않을 전통적 가르침(A. F. 캠벨)을 지닌 엘리파즈는 종교적 신념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천막 끈이 끊어지고 지혜도 없이 죽어 간다’(4,21 참조)거나 ‘집안이 삽시간에 뿌리가 뽑힌다’(5,3 참조)는 말로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욥에게 심한 고통과 충격을 줍니다. 인간을 낮추고 하느님을 높이는 데 익숙해져 있는 엘리파즈는(J. L. 크렌쇼) ‘하느님께서 꾸짖으시는 자는 행복하니 훈계를 물리치지 말라’(5,17 참조)고 하며, “아프게 하시지만 상처를 싸매 주시고 때리시지만 손수 치유해 주신다”(5,18)는 보편적 종교 상식으로 잘난 체를 합니다.

 

엘리파즈와 같은 견해를 가진 빌닷은 하느님께서 욥의 악을 제거하시기 위해 심판을 내리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지난 세대를 들먹이며 욥의 아들들이 죄를 지었거나, 그의 결백과 옳음에 문제가 있거나, 하느님을 잊고 악행을 했다(8,4.6.8.20 참조)고 봅니다. 그는 ‘여인에게서 난 자가 결백할 수 없다’(25,4 참조)고 하며 꺼진 등불, 나무의 메마름, 질병과 죽음 등이 하느님의 심판이고 악을 없애는 수단이라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초파르는 자신이 무고하다는 욥의 주장에 대하여 깨달음에는 양면이 있다고 합니다(11,6 참조). 그는 하느님께서 ‘욥의 죄를 잊기로 하셨다’고 주장하며 자기 생각대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넘겨짚습니다.

 

요컨대 욥이 겪는 고통은 죄 때문(엘리파즈)이고, 여인에게서 난 자는 누구도 무죄할 수 없기에 욥에게도 죄가 있으며(빌닷), 하느님께서 스스로 의롭고 올곧다는 욥에게 더 적은 벌을 주셨다(초파르)고 합니다(A. F. 캠벨). 이러한 견해가 하느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는 원인이며 하느님께서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시는 이유입니다(42,8 참조). 사람이 머리를 쥐어짜 봐야 하느님의 생각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께 지혜를 청해야 합니다.

 

13,7 자네들은 하느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고 그분을 위하여 허위를 말하려나?

 

욥으로서는 정말 미치고 펄쩍 뛸 노릇입니다. 욥은 “하느님을 제 손에 들고 다”(12,6)닌다며 친구들의 태도를 꼬집습니다. 또 자신의 고통을 전통 이론에 꿰맞추고 상상으로 죄를 만들어 내는 친구들에게 대꾸합니다. “거짓을 꾸며 내는 자들, 모두 돌팔이 의사들”(13,4)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네들은 유식한 백성이네. 자네들이 죽으면 지혜도 함께 죽겠구려”(12,2). 욥은 비정하게 삶의 원리와 원칙만을 앞세우는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마음이 점점 더 굳어집니다.

 

욥은 하느님께서 ‘흠이 없건 탓이 있건’ 무죄한 자와 죄인들을 똑같이 멸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9,22 참조). 그가 당하는 고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에 무죄한 이들의 절망을 비웃으신다(9,23 참조)고까지 합니다. 이러한 욥의 말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창세 18,23) 욥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르셨다고 주장합니다.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욥은 하느님께서 악의 세력들과 결탁하셨다(9,13 참조)고까지 생각하기에, 결국 하느님은 악을 행하시는 분이 되고 맙니다.

 

욥의 주장대로라면 하느님은 욥의 적대자이십니다. 그는 절대 통치자이신 하느님의 능력을 알고 결코 하느님을 따를 수 없다(12,14-25 참조)는 것을 알기에 하느님과의 시비가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정당함을 입증하고 대변해 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입니다(16,18-21; 17,3 참조). 욥기에서 시비를 가릴 때 쓰인 히브리어 리브( )는 ‘싸우다, 변론하다’는 뜻으로 모두 열한 번(동사 일곱 번; 명사 네 번) 나옵니다. 이러한 욥에게 하느님께서는 “네가 나의 공의마저 깨뜨리려느냐? 너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나를 단죄하려느냐?”(40,8)고 꾸짖으십니다.

 

19,25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7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욥은 시비를 가려 줄 ‘고소인’(샤팟 shaphat)을 원하다가 하늘의 ‘증인’(에드 ed)이 계심을 확신하고, 마침내 자신을 되찾아 줄 살아계신 ‘구원자’(가알 )를 요청하기에 이릅니다(9,15; 16,19; 19,25 참조). 욥기에서 중개자의 개념은 “우리 둘 위에 손을 얹을 심판자”(9,33)라는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욥이 무죄함을 주장하다가 드디어 꼭대기까지 올라갔습니다. 하느님과 욥 자신을 일컫는 ‘우리 둘’이라는 표현은 욥이 하느님과 같은 자리에 서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심판자’는 히브리어로 야카흐( )인데, ‘중개하다, 공의를 베풀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니 욥이 직접 ‘중개자’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네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중개자’(리스 )는 영어로 mediator입니다. 이 말은 32장 이후에 혜성처럼 등장하는 이스라엘 사람 엘리후가 사용합니다(33,23 참조). 욥의 무고 선언(31장 참조) 이후 하느님의 답변(38-41장 참조) 사이에 이스라엘 사람 엘리후의 이야기(32-37장 참조)가 나옵니다.

 

마침내 나타나신 하느님께서 질기고도 긴 욥의 고통을 어떻게 해방시켜 주실지는 다음 호에서 계속 보기로 하겠습니다. 욥이 고통 중에 하느님을 알아 가는 과정에서 겪는 영적 위기는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그럴수록 주님을 사랑하며 믿고 따르는 지혜로 힘겨운 시간을 견디어 내야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2월호(통권 443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욥기]

하느님의 특별 지도

김경랑 귀임마리아 수녀

 

 

“아, 제발 누가 내 말을 들어 주었으면! 여기 내 서명이 있다. 이제는 전능하신 분께서 대답하실 차례! 나의 고소인이 쓴 고소장은 어디 있는가?”(31,35) 하느님! 자, 법으로 해결해 봅시다. 욥은 과감하게 하느님을 소환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바로 응답하시지 않고(31,40 참조) 엘리후라는 사람이 나섭니다. 엘리후는 옛 이스라엘에서 매우 흔한 이름으로 ‘그는 나의 하느님’이라는 뜻이고 바라크엘(‘하느님께서 축복하셨다’: 32,2 참조)이라는 아버지의 이름도 언급되네요. 이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화를 내었습니다(32,2 참조). 욥이 스스로 ‘하느님보다 의롭다’ 하고, 세 친구가 대답할 말도 찾지 못한 채 욥을 단죄하였기(32,3 참조) 때문이었습니다.

 

32,6 그리하여 부즈 사람 바라크엘의 아들 엘리후가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32-37장의 엘리후의 담론이 없다면 하느님의 응답(38,1 참조)으로 바로 이어져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엘리후의 담론은 독립적으로 편집되어 삽입되었다고 추측합니다. 이 담론은 실제로 욥과 대화한 내용이라기보다 먼저 욥의 말을 인용하며 하느님을 변호하려 합니다. 네 단락으로 구성된 엘리후의 담론은 매번 ‘엘리후가 말을 하였다’(32,6; 34,1; 35,1; 36,1 참조)로 시작됩니다. 지혜 전통에서 고통의 문제를 풀어보려는 엘리후는 자신이 ‘하느님을 대신하는 사람이고 완전한 지식을 갖추었다’(36,2-4 참조)고 합니다. 엘리후의 대담함은 다음에서 잘 드러납니다. “가련한 이를 그 고통으로 구하시고 재앙으로 그 귀를 열어 주십니다”(36,15).

 

엘리후는 욥이 이미 하느님께 불경의 죄를 지은 범죄인이므로 무죄를 주장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35,2-3 참조)고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욥을 원수로 여기시며(33,8-11 참조) 권리를 박탈하셨다’(34,5 참조)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을 비꼬는 것으로 여깁니다(34,7 참조). 엘리후가 말하는 ‘범죄’(33,9; 34,6.37; 35,6)는 반역이나 폭동을 저지른 ‘죄’(민수 14,18 참조)에도 사용합니다. “나는 죄가 없는데 하느님께서 내 권리를 박탈하셨네”(34,5)라고 인용된 욥의 말에서 ‘죄가 없다’는 표현은 보통 법적 시비를 가릴 때 재판관이나 하느님에게만 쓰는 ‘정의, 곧음’을 의미합니다. ‘권리(히브리어로 미쉬파트)’는 ‘법, 판단, 판결’을 의미하는데 ‘옳다, 정직하다’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미쉬파트는 욥기에서 23번이나 나옵니다. 이러한 용어의 쓰임으로 보아 욥이 법적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하느님과 겨루어 보려 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엘리후의 눈에 욥이 명백하게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감히 하느님과 겨루다니요!

 

엘리후의 담론은 창조주 하느님을 자연의 질서와 세계에서 바라보도록 이끕니다. 그의 담론은 주님의 발현을 은연중에 준비하는 듯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엘리후가 사용한 용어로 주님의 창조 질서를 묘사하신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엘리후도 하느님도 양쪽 다 기상 현상을 언급합니다. 예를 들면 눈(37,6; 38,22), 구름(36,29; 37,11.16; 38,34), 얼음(37,10; 38,29), 비(36,27; 37,6; 38,26.28)와 같은 공통 표현으로 하느님 중심 세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깨달을 수 없이 위대하시고 그분의 햇수는 헤아릴 수 없”(36,26)다는 엘리후의 말은 세계가 자기 중심으로 놓여 있는 욥에게 하느님 중심으로 시야를 옮기도록 땅과 시간, 빛을 창조하실 때 어디 있었느냐고 물으시는(38,4.12.19 참조) 하느님의 질문과 병행을 이룹니다. 또 엘리후의 질문(37,15-20 참조)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시는 내용과 같습니다(38,1-39,30; 40,2.8.24; 41,1-7.10-14 참조). 창조하신 세상을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권능과 전능하신 그분의 지혜는 욥을 압도하는데, 엘리후가 욥에게 하는 질문은 하느님께서 욥에게 하실 질문을 예상하게 합니다.

 

엘리후는 앞에서 전개된 욥기의 궁극적 질문인, 인간에게 감추어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지혜(28장 참조)에 대해 결론을 맺으려 시도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빛 속에 계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찾을 수 없고 그분은 ‘권능과 공정’(37,23)이 뛰어나고 정의가 넘쳐 사람들이 경외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를 지혜롭다는 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으십니다”(37,24). 엘리후는 욥이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여긴다는 듯, 이 마지막 말로 욥에게 일격을 가하고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38,2 지각없는 말로 내 뜻을 어둡게 하는 이자는 누구냐? 3 사내답게 네 허리를 동여매어라.

 

마침내 하느님께서 맹위를 떨치는 거센 바람과 같은 폭풍 속에서 말씀하십니다(38,1 참조). 폭풍은 구름, 연기와 같이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용어입니다. 이 폭풍은 욥이 귀로만 들었던 하느님의 소문을 잠재웁니다(42,5 참조). 하느님께서는 욥을 대화의 상대자로 인정하십니다. 창조된 세상에 대한 하느님 말씀(38-41장 참조)은 욥의 고통스러운 상황과 아무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다만 새로운 눈과 열린 마음으로 자신의 처지를 보고 고통스러운 한계 상황에서 인생의 조건과 삶의 터전을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창조에 대한 장엄한 묘사는 일부분(pars pro toto)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업적을 다양하게 묘사하여 하느님을 새롭게 인식하고 참 지혜를 얻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아울러 인간 역사에 어둠의 큰 힘을 발휘하는 존재로 알려진 브헤못과 레비아탄(40장 참조)이라는 두 짐승에 대한 묘사는 알레고리적 표현입니다. 결국 이 두 짐승도 창조의 질서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존재들을 다스리는 큰 능력이 있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찬양의 노래는 여러 시편(139, 148 등)에서도 발견됩니다.

 

42,5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6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전통 신앙에 젖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우주를 공정하게 다스리시고 불의하지 않으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에, 욥을 참회의 길로 이끌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모순되는 현실 상황에서 기존의 신앙을 지키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하느님의 신비적 차원을 무시하고 검증 가능한 것과 보이는 것만으로 신앙을 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온갖 노력을 다 했어도 모순되는 상황과 불합리한 고통을 인간의 지혜로 이해하거나 설명하여 한 인간을 참회의 길로 들어서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욥은 하느님과 직접 대면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느님께 항변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과 독대하고 나서야 자신의 정당함을 입증하려는 필사의 노력이 참으로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특별 지도로 거둔 놀라운 성과입니다.

 

42,3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욥이 할 말을 잃고 침묵할 수밖에 없던 이유(40,3-5 참조)는 세상이 인간의 합리적 방식으로만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도토리가 큰 나무에 달리고 수박이 땅 위에 있는 작은 넝쿨 사이에서 달리는 것은 도무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토리가 수박같이 크다고 생각해 봅시다. 바람에 도토리가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상상이 가죠? 욥은 우주 만물을 지배하시는 하느님을 대면하고 난 뒤, 모순 속에서 지혜를 깨닫게 됩니다. 욥이 겪은 고통의 모순은 말로 설명할 수 없기에 하느님 안에서 그것을 수용해야 한다고 알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욥은 고통 중에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보게 될 코헬렛의 저자는 어떠한 대답도 책망도 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침묵으로 고통스러워합니다(L. 크렌쇼).

 

그러기에 시편의 저자들은 하느님께 인간의 모든 두려움과 열망, 고통과 탄식 등을 바치도록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다음 호에서는 시편을 읽으며 하느님의 지혜를 찾아보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3월호(통권 444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시편]

어떻게 찬양의 노래를 올려야 할까요?

김경랑 귀임마리아 수녀

 

 

“할렐루야!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를”(시편 149,1).

 

오래전에 어떤 분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상담을 하고 싶다고 저를 찾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고통이 너무 커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들어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야기를 끝낼 무렵 그분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 듯 고맙다고 한 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겠다며 기쁘게 돌아갔습니다. 희한하게도 주님께 마음의 고통을 다 털어 내고 나면 감사할 일이나 찬미할 일이 생기나 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비유하여 노래한 우리나라의 시조 가운데 김삿갓(김병연)의 ‘상경(賞景)’이 있습니다.

 

一步二步三步立(일보이보삼보립)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가다가 서니

 

山靑石白間間花(산청석백간간화)

산은 푸르고 흰 바위 사이사이 꽃이 피었네

 

若使畵工模此景(약사화공모차경)

화공에게 이 경치를 그리게 한다면

 

其於林下鳥聲何(기어림하조성하)

숲 속의 새소리는 어찌 하려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웅장한 자연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사람의 감성은 다르지 않나 봅니다.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거대한 하느님의 화폭에 담긴 아름다운 자연은 절로 탄성을 자아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에 대한 열렬한 마음으로 자연스레 나오는 외침이 “할렐루야!”입니다. 이것은 장엄하고 놀라운 위엄과 거룩하신 하느님을 자랑하고 칭찬하는 환호 소리입니다. ‘할렐루야’의 기본 의미는 하느님께 받은 영광과 사랑을 하느님께 반사하여 거울처럼 비춰(shine) 다시 올려 드리는 것이며, 마음 깊은 곳에서 찬양을 드리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 ‘할렐’과 같은 의미를 지닌 동사는 ‘터힐라’인데, 그 밖에도 약간씩 의미상 차이가 있는 ‘야다, 바락, 자마르, 쉬르’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할렐루야’는 165회, 시편에는 모두 99회 나옵니다. 시편에는 찬양 시편이 35편 있으며 113-118, 135-136, 146-150편과 같이 할렐루야가 나오는 시편을 ‘할렐 시편’이라 부릅니다.

 

찬양 시편의 주제는 매우 다양합니다. 창조주 하느님을(8; 19; 104; 148 참조),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역사의 주님을 찬양하며(33; 103; 113; 117; 145; 146; 147 참조), 구원에 대하여(100; 111; 114; 149 참조), 왕권에 대하여(93 참조) 찬양하는 것 외에도 짧은 영광송(Doxology)이 있습니다. 그리스어의 doxa(영광)와 logia(말)에서 유래한 Doxology는,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말을 일정한 격식에 따라 만든 글입니다.

 

찬양 시편은 대개 찬양으로 여길 수 있는 본문 곧 노래, 신앙고백, 기도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찬양 시편의 구조를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서론(주제), 본론(주요 부분), 결론(종결)으로 구분합니다. 찬양 시편의 중요한 특성은 공동체의 전례(제의祭儀)에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8,4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5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앙생활에서 찬양은 경외심을 가지고 사랑과 정성으로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아 주님을 높여 드리는 도구입니다. 시편 8에서 시인은 하느님의 창조 세계인 우주가 너무 광대해서 인간의 능력으로는 다다를 수 없고 거기에서 오는 주님의 뜻을 다 헤아릴 길이 없기에, 다만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초라한지를 노래합니다(8,4.10 참조). 따라서 저자는 그저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8,5)라고 노래합니다.

 

그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영광으로 인간이 창조 질서를 유지해 나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상기시킵니다(8,6 참조). 이 시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아이들이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라고 외쳤기 때문에 수석 사제와 율법 학자들이 불쾌해하자, “아기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찬양이 나오게 하셨습니다”(마태 21,16)는 말씀으로 대답하신 시편이기도 합니다(8,3 참조).

 

33,1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올곧은 이들에게는 찬양이 어울린다. 2 비파로 주님을 찬송하며 열 줄 수금으로 그분께 찬미 노래 불러라. 3 그분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를. 환성과 함께 고운 가락 내어라.

 

시편 33은 자연계를 창조하며 인간의 역사를 지배하시는 분으로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올곧은 이들에게는 찬양이 어울린다”(33,1)는 구절은 찬양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이어야 하는지 알게 합니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전례 때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곧이어 나오는 34편과 차이가 있지만 알파벳 순으로 이루어진 시로 시편의 독특성을 보여 줍니다. 또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판관 5장 참조)와 유사하기 때문에 무척 오랜 역사를 지닌 시편으로 간주합니다(P. C. 크레이기).

 

33,2에는 ‘비파와 열 줄 수금’이라는 두 가지 악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수금은 히브리어로 ‘키노르’라고 하며, 비파는 가죽으로 만든 통에 줄을 엮은 옛날 악기로 ‘네벨’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열 줄(아소르) 비파(네벨)’로 나옵니다. 공교롭게도 수금이 열 줄이고 비파가 보통 네 줄이기에 번역에 문제가 생깁니다. 두 악기는 시편에서 찬양 반주에 사용되는 모든 악기를 상징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두 악기의 차이를 영성적으로 해설합니다. 즉 열 줄 비파는 아래에 울림통이 있고 수금은 윗부분에서 울리기 때문에 각각 세상에서 살면서 겪는 고통스러운 시기와 평화로운 시기를 의미하며, 인간은 슬플 때도 기쁠 때도 모두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석합니다.

 

100,1 온 세상아, 주님께 환성 올려라. 2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환호하며 그분 앞으로 나아가라. 3 너희는 알아라, 주님께서 하느님이심을. 그분께서 우리를 만드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이어라. 4 감사드리며 그분 문으로 들어가라. … 그분을 찬송하며 그 이름을 찬미하여라. 5 주님께서는 선하시고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며 그분의 성실은 대대에 이르신다.

 

히브리어에는 ‘감사하다’는 말이 따로 없고 ‘찬양하다(야다)’는 말에 그 뜻이 완전히 내포되어 있습니다(C. 베스터만). 따라서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에는 감사도 담겨 있습니다. 시편 100은 시편 자체에 감사하다는 말이 없어도 ‘감사(토다)를 위한 시편’(100,1)이라는 표제가 달린 찬양 시편입니다. 히브리어로 ‘토다’는 ‘감사의 희생 제사’도 의미하는데, 훗날에 희생 제사를 드리는 ‘찬양의 노래’가 되었다고 추측합니다(F. 크뤼제만). “온 세상아, 주님께 환성 올려라.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100,1-2)로 시작하는 이 짧은 시편은 하느님께 드리는 7중의 흠숭과 찬양을 요청하고 있으며, ‘주님이 임금’이심을 노래한 90-99편의 후속편으로 보기도 합니다.

 

시편 89에서는 다윗 왕실의 멸망과 주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잃었던 불행이 주님 탓이 아니라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며 그분의 성실은 대대에 이르신다”(100,5)는 마지막 구절에서 ‘하느님의 성실(에무나토)’이 얼마나 확실하신지 알려 줍니다. 이 시편에서 ‘성실(에무나)’은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아마도 시편 100에 실린 일곱 편의 찬양은 89에 일곱 번 드러난 하느님의 성실함에 대한 응답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을 섬겨라”(2,11; 106,32 참조)는 권고에서 주님을 섬기는 일은 종이 주인을 섬기는 일, 신을 섬기는 일, 권력을 가진 사람이 하느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즉 주님만을 하느님으로 알고 받아들이라는 요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올곧고(33,1 참조) 성실하게 섬기는 이들(100,2 참조)을 통해 찬미와 찬양을 받으십니다. ‘주님께 드리는 새로운 노래’(149,1)는 제2이사야(이사 42,10 참조)가 노래한 것처럼 하느님의 성실한 사랑으로 구원된 백성이 지극한 감사를 올려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주님께 우리의 새 노래를 들려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결론이 나왔네요. 바로 올곧고 성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진정한 찬양을 드리도록 애써야 하겠습니다. 다음 호에서는 시편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어떻게 지금 여기에서 살아 있게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4월호(통권 445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시편]

그럼에도 하느님의 자비가!

김경랑 귀임마리아 수녀

 

 

3·1, 6·25, 8·15. 이 숫자들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나요? 한국 사람이라면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독립 운동과 해방, 쓰라린 동족상잔의 비극을 기억하는 날이라는 것을 압니다. 어느 민족도 고통스러운 역사를 반복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한유(韓愈)는 “사람으로서 고금의 도리에 통하지 않는 자는 의복을 입은 소나 말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역사를 돌아보고 미래를 다짐하고 준비하는 일은 개인이나 민족에게 큰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특히 하느님 안에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기술한 존 브라이트가 “이스라엘 민족은 종교와 관련 없이 역사를 생각할 수조차 없다”고 하였듯이, 그들의 역사는 특이하게도 하느님 안에서 살펴봐야 그 빛을 발하는 것 같습니다. 구약성경의 구석구석에는 역사의 반추가 담겨 있습니다. 존 브라이트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끊임없이 하느님 안에서 되새겨 본 흔적을 발견하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미래에 대한 최선의 예언자는 과거이다.”

 

시편에서도 이스라엘의 역사를 엿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 예가 시편 78; 105-106; 135-136 등입니다. 78편은 이스라엘 민족의 지난날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 열거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일을 곱씹는 회고적 반성이 나옵니다(78,33-39.65-72 참조). 격언이라는 뜻의 ‘마스킬’이라는 표제가 달린 이 시편에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이 시편은 이집트에서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느님의 능력과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실패를 노래합니다. 광야 사건을 통한 불신앙의 회고는 또 다른 하느님의 구원 계획인 시온과 다윗의 선택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시편 전체는 오경의 전승과 광야 전승과 연관되어 있는데, 이러한 내용이 신명기의 정신과 엮여 담긴 때는 북왕국이 멸망하고 상당한 시일이 지난 뒤라고 추측합니다.

 

78,1 내 백성아, 나의 가르침을 들어라. 내 입이 하는 말에 너희 귀를 기울여라.

 

귀를 기울이도록 촉구하는 ‘가르침’(78,1.5.10)은 토라로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법이자 규정입니다. 시편 저자는 하느님께서 주신 토라의 명령들을 소개하고 이스라엘의 지난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주고자 합니다(78,6 참조). 하느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보여 주신 순수한 은총을(78,12-16.23-28.44-55 참조)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거부하고 반항했는지 전해 줍니다(78,17-20.30-43.56 참조).

 

시편 저자는 자기네 역사에 휘몰아친 불행이 하느님께서 내리신 마땅한 심판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78,33-35.58-67 참조). “이에 주님께서 들으시고 격노하시니 야곱을 거슬러 불길이 타오르고 이스라엘을 거슬러 분노가 솟아올랐다”(78,21). 그들이 “하느님을 믿지 않고 그분의 도우심에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78,22)입니다. ‘도우심에 의지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아만’인데 ‘신뢰하다, 확신하다, 의존하다’는 뜻을 지닙니다.

 

78,24 그들 위에 만나를 비처럼 내려 먹게 하시고 하늘의 곡식을 그들에게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여정 중에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만나를 비처럼, 고기를 먼지처럼, 날짐승을 바다의 모래처럼 내리셨다”(78,24.27 참조).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마타르’는 ‘비가 오다’는 뜻으로, 주님께서는 가나안의 신 바알처럼 풍요로운 ‘비’를 내려 주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은총이 비처럼 내릴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을 시험하였고(78,18.41.56 참조) 그분께서는 그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내리셨습니다(78,31. 33.60-62 참조). ‘기억하다, 생각나게 하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자카르’입니다. 하느님의 기억은 은총과 구원으로 드러나지만(78,39 참조) 인간의 기억은 망각으로 드러납니다(78,11.42 참조). 광야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을 적에게서 구하신 그날”(78,42)의 하느님을 기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두드러집니다.

 

시편 저자는 이집트에서 일어난 하느님의 기적과 표징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억되지 않는’ 지워진 역사처럼 되어 버렸다고 기술합니다. 따라서 가나안 정착 초기에 하느님의 심판을 피해 갈 수 없었음을 시사하며, 주님의 장막이 세워졌던 ‘실로를 버리셨다’(78,60 참조)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시온과 다윗을 선택하시어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구원하시려고 잠에서 깨어나셨다고 합니다(78,65 참조). 죄의 역사에도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거두지 않으십니다. 시편 저자는 이 점을 잊지 말라고 하며 믿음으로 계명을 지키라고 권고합니다. 불신앙의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하니까요. 78편은 신약성경에도 복음과 서간에 여러 번 인용되거나 암시되었습니다(마태 13,25; 1코린 10,7.18; 1요한 1,1-4; 요한 6,31; 묵시 16,4 참조).

 

106,1 주님을 찬송하여라, 선하신 분이시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긴 회개의 기도로 이루어진 106편도 역사적 서술의 교훈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찬양과 애가의 형식이 혼합된 이 시편은 이스라엘 패망의 역사와 유배기 이후의 신앙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명령형으로 나오는 첫 절의 성격으로 보아 이 시편의 저자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대표자로 보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이 시편을 여러 차례 인용하였습니다(로마 1,23-28 참조). 106편은 의도적으로 105편 다음에 놓습니다(W. Zimmerli). 105편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에레츠)’에 대한 하느님 약속의 진실성을 드러내고 있다면, 106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불성실했음을 전하며 다시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희망을 두자고 노래합니다. 두 시편을 대조해 보면, 당신을 믿지 않는 이스라엘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을 확실히 깨닫고 주님께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6,2 누가 주님의 위업을 말할 수 있으며 그 모든 찬양을 전할 수 있으리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찬양할 처지가 못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지 못했기에 조상들처럼 죄를 지었다고 고백합니다(106,3.6 참조). 그리고 이스라엘이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해 징벌을 내리신 것이라고 합니다(106,6-46 참조). 이 역사 시편은 하느님께서 현재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다시 주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선한 것, 좋은 것, 누리는 것’을 뜻하는 ‘토브’는 1절과 5절에서 미래를 향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106,47ㄴ의 ‘찬양’ 또한 하느님의 용서로 미래에 이루어지리라고 암시됩니다(Leslie C. Allen). 시편 저자는 하느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여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인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고, 주님의 용서만이 그들이 다시 찬양할 수 있게 한다고 말합니다(106,1.47 참조). 그러기에 136편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1-26절 참조) 이스라엘 역사를 구원과 자비로 이끄신 주님을 다음과 같이 노래할 수밖에 없었나 봅니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좋으신 분이시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136,1). ‘자애(헤세드)’는 주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묘사할 때 쓰이는 용어로 ‘은총, 변함없는 사랑’의 의미가 있습니다.

 

역사 시편을 통해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죄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미래를 알려거든 먼저 지나간 일을 살펴라.” 명심보감의 말처럼 내 삶의 은총을 돌아보는 일은 주님 안에서 앞날을 도모하는 뜻 깊은 일입니다. 다음 호에서는 지혜 시편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새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5월호(통권 446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시편]

냇가에 심긴 나무

김경랑 귀임마리아 수녀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1,2-3). 수녀원 입구에 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따라 생긴 작은 개울이 하나 있습니다. 밭 가장자리에 심긴 옥수수는 잎이 건조하고 줄기가 약해 보이는데, 냇가에 심긴 옥수수는 푸르고 튼튼할 뿐 아니라 옥수수 알도 잘 영글어 갑니다. 시원한 물 한 잔이 감사한 계절이 찾아왔습니다. 흐르는 물가나 그늘 아래에 앉아 시편을 벗 삼아 주님께 기도해 보십시오. 그 순간 여러분은 “물가에 심긴 나무”(예레 17,8)와 같은 지혜 교사이자 현자가 되는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의 저자들은 생명수를 길어 올리듯 가르침을 되새겨(1,2 참조) 주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여러 시편 중에 37, 39, 49, 73 등이 ‘지혜 시편’에 속하는데, 이는 지혜문학의 주제인, 의인들이 받을 보상과 악인들이 받을 심판에 대한 전통적 문제와 하느님의 정의에 관하여 숙고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나쁜 사람인데 잘 살고, 착한 사람인데 힘들게 사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간혹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이러한 상황이 나오면 속상합니다. 시편의 저자들도 세상의 불합리한 문제를 하느님 안에서 고민하고, 가르침(토라)의 전통 위에서 참된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37,39 의인들의 구원은 주님에게서 오고 그분께서는 곤경의 때에 그들의 피신처가 되어 주신다.

 

시편 37의 저자는 악을 저지르거나 불의를 일삼는 자들 때문에 격분하거나 흥분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1절). 성공은 피상적인 것으로 뿌리가 깊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삽시간에 사라지고 시험이 다가오면 푸성귀처럼 시들어 버립니다. 악인은 의로운 자들과 같이 “푸른 월계수처럼 뻗어”(35절) 가도 이내 사라져 버립니다. 이 시편과 비슷한 구절이 잠언에서도 자주 발견됩니다(잠언 23,17; 24,1.19 참조). 저자는 “의인이 가진 적은 것이 악인들의 많은 재산보다 낫다”(16절)고 하며, “악인들의 팔은 부러지지만 의인들은 주님께서 받쳐 주신다”(17절)고 합니다. 따라서 주님 안에서 길이 살기 위해서는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27절)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올바른 것을 사랑하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을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시편 37에서 악인들이 일시적으로 잘 되어 가더라도 하느님께 마음을 두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 의로운 사람들은 승리하게 마련이고 악인들 사이에서 구원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며 희망의 격언으로 끝을 맺습니다(37,40 참조). 시편 37은 알파벳 시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시편의 이러한 형식은 연결된 문자의 흐름을 이용하여 학생들이 그 구절을 외우기 쉽게 하려는 교육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P. C. 크레이기).

 

39,13 저는 당신 집에 사는 이방인, 제 조상들처럼 거류민일 따름입니다.

 

시편 39에서는 악인들의 번성 때문에 괴로워하는 개인의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욥 21,7-16 참조). 저자는 악인이 자기 앞에 있는 동안 입에 재갈을 물리겠다고 결심하는데(2절 참조), 악인이 성공했다는 표현이 없어도 그 앞에서 침묵을 결심하는 것은 그의 처지와 상황이 불합리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자는 ‘살 날이 얼마인지, 사람은 모두 한낱 입김 혹은 그림자’(5-7절 참조)라는 표현으로 인간 존재의 무상함을 드러내며, ‘살아갈 날’을 매우 작은 단위인 ‘뼘’(손 너비)에 비유합니다. 그러나 악인 앞에서 억지로 입을 다물었던 저자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하신 일임을 깨닫고 진정한 침묵을 하게 됩니다(10절 참조). 인생은 매우 짧고 모순과 불합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에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저자는 하느님과의 연속성이 이 세상에서 드러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저는 당신 집에 사는 이방인, 제 조상들처럼 거류민일 따름입니다”(39,13).

 

49,16 하느님께서는 내 영혼을 구원하시고 저승의 손에서 나를 기어이 빼내시리라. 셀라

 

죽음을 주제로 다루는 시편 49은 코헬렛과 욥기에 나오는 교훈적 주제와 비슷합니다. 저자는 수수께끼를 풀 만큼 숙고하며(5절 참조) 누구나 겪는 이 문제를 ‘천하거나 귀하거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3절 참조) 지혜의 말씀 안에서 들으라고 합니다. 이 시편의 저자는 지혜 교사로서 인생 문제에 대한 질문에 대답해 주려고 노력합니다. 사람들은 가진 자들의 권세에 위협을 받을 때 “불행한 날에 왜 원수들을 두려워해야 하는가?”(6절 참조) 하고 묻습니다. 지혜 교사는 ‘자기 재산을 믿고 재물이 많음을 자랑하여도 영혼의 값이 너무 비싸 하느님께 몸값을 치를 수 없고’(7-8절 참조), 흙으로 빚어진 사람(아담)은 오래가지 못하여 짐승의 운명과 다를 바 없다고 합니다(13절 참조). 저자는 지혜로운 이들도, 어리석거나 미욱한 자도 함께 사라지기에(11절 참조) 재산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또 “누가 부자가 된다 하여도, 제집의 영광을 드높인다 하여도 불안해하지 마라. 죽을 때 모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17-18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부자가 자신을 위해 재산을 모아도 영혼이 세상을 떠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2,19-21 참조). 이 지혜 교사는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대상은 부(富)와 권력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시는 주님이라고 알려 줍니다(잠언 1,7 참조).

 

위의 두 시편에 나오는 ‘셀라’가 시편에서 모두 71번 나옵니다. 이 용어가 시편 전체에 걸쳐 흩어져 나오는 것은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다는 것을 뜻합니다. ‘셀라’는 보통 제목을 가진 시편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주로 반주에 맞춰 노래로 불렸다고 추측합니다.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이 용어를 디아프살마(διάψαλμα)로 해석합니다. 그 뜻은 ‘쉼’이나 ‘간주곡’ 또는 ‘더 큰 소리로’입니다.

 

“제 몸과 제 마음이 스러질지라도 제 마음의 반석, 제 몫은 영원히 하느님이십니다”(73,26). 시편 73의 저자는 하느님을 배반할 지경에 이르렀던 경험을 언급합니다. “하마터면 발이 미끄러지고 걸음을 헛디딜 뻔하였으니”(2절)라고 하였는데, 이는 어느 누구도 유혹과 악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의 저자도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이들과 함께하지 않은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했나 봅니다(1,1 참조). 이 시편에서는 악인들이 잘될 때 불편한 감정과 마음의 위기를 잘 묘사하였는데, 핵심 용어로 보이는 ‘마음(레브)’이라는 단어가 6번 나옵니다(M. 부버). 또 ‘정녕’이라는 말이 세 번(1, 13,18절 참조) 나오는데, 이는 히브리어의 ‘아크’라는 부사입니다. 변하지 않는 확신을 나타내며 ‘아무리 그렇더라도(the great nevertheless)’라는 의미를 지닙니다(M. E. 테이트). 따라서 모든 상황이 반대가 되더라도 하느님은 선을 행하시고(1절 참조) 악인들이 잘되어 갈지라도 악인들이 가는 길을 거절했다고 합니다(13절 참조).

 

시편의 저자는 악인이 겉으로 잘사는 것처럼 보여도(4-12절 참조) 주님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길에 세우시고 그들을 멸망으로 떨어지게”(18절) 하시리라 확신합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현존에서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리라는 것을 믿음으로 깨닫고 하느님의 인도에 모든 것을 내맡깁니다(23-24절 참조). “제 몸과 제 마음이 스러질지라도 제 마음의 반석, 제 몫은 영원히 하느님이십니다”(26절).

 

세상의 이치가 흐르는 물처럼 순리대로 정의롭게 이루어지거나 우리의 바람대로 되지 않더라도 마음의 반석이신 주님께 마음을 두며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다음 호에서는 탄원 시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6월호(통권 447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시편]

나의 아픔을 시편으로

김경랑 귀임마리아 수녀

 

 

혹시 종종 흥얼거리는 옛 노래가 있나요? 노래에 담긴 가사의 뜻을 새겨보세요. 세월이 흘러도 똑같죠? 러시아 태생의 미국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시편 교향곡’을 작곡하면서 시편의 뜻이 달라지지 않도록 라틴어 시편을 합창곡의 가사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신앙을 주님의 가르침에 응답하는 노래로 엮어 후손에게 전하였습니다. 탄식과 찬양, 감사와 청원을 일정한 곡조에 담아 내용이 변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시편은 기도 양식으로 되어 있어 우리가 하느님을 찾고 또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으실 때 응답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90,2 영원에서 영원까지 당신은 하느님이십니다.

 

구전된 많은 시편 중에 성경에 수록된 시편은 기원전 200년에서 150년 사이에 최종 형태를 갖춘 것으로 찬양보다 탄원의 내용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시편집의 명칭을 ‘찬양가들의 책(터힐림 tehillim)’이라고 부르는 것은 ‘찬양하라’는 말이 시편에 150번 이상 나오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시편은 그리스어로 ‘프살모스(Psalmos)’라 하는데 ‘현악기를 손으로 뜯다’는 뜻입니다. “새벽 암사슴 가락으로”(22편) 또는 “나리꽃 가락으로”(45편)처럼 알 수 없는 표제가 붙어 있는 시편은 악기 연주와 관련되어 보입니다. 시편 가운데 일흔세 편은 다윗의 시로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솔로몬을 지혜의 권위자로 여기듯, 다윗을 훌륭한 시편 저자이자 권위자로 여깁니다(2사무 23,1; 집회 47,8 참조). 다윗은 고통받는 의인, 용서받은 회개자, 메시아의 예형으로 많은 시편 저자가 그의 영향을 받았습니다(《주석 성경》 1475쪽). 시편과 관련한 이로 다윗 외에 코라(42-49; 84-85; 87-88편 참조), 아삽(50; 73-83편 참조)의 이름도 등장합니다.

 

6,4 주님, 당신께서는 언제까지나 … 5 돌아오소서.

 

시편에서 개인 탄원 시편은 거의 4분의 1을 차지합니다. 인간은 아무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없기에 기뻐하기보다 자주 한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탄식과 탄원의 뜻을 사전에서 찾으면, 탄식은 ‘근심이나 원망 따위로 한탄하여 숨을 내쉬는 것’이고, 탄원은 ‘억울하거나 딱한 사정을 하소연하며 도와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근심하거나 원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억울하거나 딱한 사정을 하느님께 하소연하며 도와 달라고 청할 때 기도가 됩니다. ‘왜’, ‘어찌하여’, ‘언제까지나’라는 표현과 질병, 억울함, 고소, 억압, 통회에 관한 탄식은 탄원 시편에 나타나는 기본 틀입니다. 인간은 해결할 수 없는 본질적 한계에 직면할 때 주님을 찾고 도움을 청합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는 쇠약한 몸입니다. 저를 고쳐 주소서, 주님, 제 뼈들이 떨고 있습니다. … 주님, 당신께서는 언제까지나 … 돌아오소서, 주님, 제 목숨을 건져 주소서”(6,3-5)라는 탄원처럼 아픈 이의 호소가 탄원 시편의 기초가 됩니다.

 

6,9 내게서 모두 물러들 가라, 나쁜 짓 하는 자들아.

 

탄원 시편은 대부분 악인들에게 당하는 고통을 호소합니다. 시편 전체의 서두 역할을 하는 1-2편은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언급합니다. 시편에서 알려 주는 의인은 악인의 길을 가지 않아야 합니다. 시편에서 악인의 길을 가는 자는 세 부류로 구분됩니다. 그들은 악하거나 불충한 자, 조롱하거나 냉소하는 자, 오만한 자입니다. 탄원 시편에는 질병이나 죄 때문에 겪는 내적 고통뿐 아니라 악의 길에 들어선 세 부류 사람들에게서 받는 외적 고통이 드러납니다. “내게서 모두 물러들 가라, 나쁜 짓 하는 자들아”(6,9)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악인들 때문에 더 고통을 받은 듯합니다. 시편 22의 저자 역시 악인들의 조롱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를 보는 자마다 저를 비웃고 입술을 비쭉거리며 머리를 흔들어 댑니다”(22,8; 참조 42,4.11).

 

22,24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탄원 시편에도 찬양과 감사와 청원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22,1)로 시작하는 익숙한 시편에서, 1-23절까지는 고통스러운 탄원이 이어지고 24절 이하는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22,24)와 같이 반전된 내용이 있습니다. 이 시편은 이사야 예언서의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와 유사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묵상하게 합니다. 하일러(F. Heiler)는 “기도는 공포와 희망이라는 두 가지 감정의 산물이며 하느님께 굴복하여 탄원할 때 탄원 기도 안에서 분위기의 반전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탄원에서 찬양으로 분위기가 바뀌는 것은 기도 중에 영혼의 영적 상승이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간주합니다. 하느님께 탄원하는 영혼은 기도 중에 탄식과 물음, 간구, 체념, 연약과 신뢰의 표현, 감사, 찬양, 바람같은 내면의 변화를 겪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편 기도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엮어 온 삶의 역사를 간접적으로 체험합니다. 그 체험은 개인의 삶에 신앙으로 스며들게 됩니다. 시편으로 기도할 때 겪는 내면의 변화는 우리를 역동하는 내적 인간으로 성장시키고 공동체가 내적으로 성장하는 데 토대가 됩니다.

42,9 내 생명의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네.

 

42편도 개인 탄원 시편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주님께 아뢰는 내적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저자는 뭔가 소중한 것을 잃고 나서 하느님을 찾고 그분의 응답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42,2-3).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시인은 악인들의 빈정거림과 핍박 때문에 더 고통을 받습니다(42,4.10.11 참조). 영광스러운 분의 초막, 환호, 축제를 기억하는 부분은 바빌론 유배 시절의 슬픔을 묘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42,5 참조). 시인은 자신의 극심한 고통을 영혼이 녹아내린다거나 신음한다(42,6 참조)거나 악인들의 모욕으로 뼈들이 으스러진다(42,11 참조)고 표현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느님께 바라라. 나 그분을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42,12)고 노래하여 주님을 신뢰하며 자신을 위로합니다.

 

143편의 시인은, 자신의 얼이 다하여 가니 주님께 얼굴을 감추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며(143,7) 하느님께 ‘성실(에무나)’과 ‘의로움(체다카)’을 요청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누구도 의로울 수 없다고 하면서도(143,2 참조)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원수들 때문에 겪는 곤경에서 건져 달라고 호소합니다. 시인은 주님의 뜻을 따르고 주님 영의 인도로 바른길을 가기를 원합니다(143,10 참조). 시편에는 ‘길(데렉)’이라는 표현이 66번 나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바른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22,20 저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우리는 사는 동안 기쁨과 행복뿐 아니라 고통과 슬픔, 괴로움을 경험합니다. 인생에 단맛이 있으면 쓴맛도 있습니다. 그것이 삶인가 봅니다. 우리가 시련을 겪을 때 시편은 많은 위로와 힘을 줍니다. 시편을 읽고 묵상하노라면 이미 누군가 나를 위해 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 같아 놀랍니다. 시편만큼 인간 삶의 자리를 잘 표현한 성경도 없을 것입니다. 시편은 저에게 늘 주님의 길을 밝혀 주고 마음의 길을 찾게 해 줍니다.

여러분도 아픈 마음을 시편에 담아 기도해 보세요. 속도 후련해지고 어느덧 주님과 가까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미흡하지만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시편에 대한 소개를 마칩니다. 다음호부터는 잠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7월호(통권 448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잠언]

콕 찌르는 생명의 말씀

김경랑 귀임마리아 수녀

 

 

잠언은 한자로 바늘 잠(箴)에 말씀 언(言), 말 그대로 ‘콕 찌르는 말씀’입니다. 침은 아픈 부위에 혈을 통하게 하여 낫게 합니다. 잠언의 짧은 말씀은 무딘 우리 마음에 침을 놓아 주님 안에서 영적 순환을 원활히 할 수 있게 합니다. 사전에서 잠언은 ‘가르쳐서 훈계하는 말’ 또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교훈이 되는 짧은 말’이라는 뜻입니다.

 

8,30 나는 그분 곁에서 사랑받는 아이였다. 31나는 그분께서 지으신 땅 위에서 뛰놀며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

 

잠언은 모두 31장입니다. 10-31장이 먼저 쓰였고 문학적 성격이 다른 1-9장(지혜시)은 나중에 기록된 것으로 봅니다. 잠언에서 지혜는 스스로 자신을 소개하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알려 주며(8장 참조), 여인으로 묘사되어 독특한 특성을 드러내기도 합니다(9장 참조). 표제와 내용의 분류로 보면 잠언은 네 개의 큰 수집물(1-9장; 10,1-22,16; 22,17-24,22; 25-29장)과 다섯 개의 작은 수집물(24,23-34; 30,1-14; 30,15-33; 31,1-9; 31,10-31)로 구성됩니다. 잠언은 이집트의 <아멘 엠 오페의 교훈>이나 메소포타미아의 <아히칼의 지혜> 같은 문헌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혜의 가르침을 담은 짧은 구절은 늘 있어왔습니다. “은에는 도가니, 금에는 용광로 사람은 그가 받는 칭찬으로 가려진다”(27,21)는 말씀은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알 수 있고 시간이 흘러야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명심보감의 구절과 비슷합니다.

 

히브리어로 잠언은 ‘비슷하다, 지배하다’는 뜻의 ‘마샬‘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그리스어 성경에서 잠언은 ‘파로이미아이(paroimiai)’라고 하는데, ‘비슷한 두 가지 생각이나 상징적인 것을 비교(parable)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마샬’은 대중 격언과 문학적 금언, 속담, 알레고리 등 다양한 문학 형태로 발전되어, 정확히 풀이하기가 곤란하여 폭넓은 의미를 지닌 ‘격언’으로 정의합니다(L. E. 머피).

 

잠언은 주로 교훈으로 윤리적 가르침이 많으며,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리를 짧은 문장에 담고 있습니다. 잠언의 목적은 “지혜와 교훈을 터득하고 예지의 말씀을 이해하며 현철한 교훈과 정의와 공정과 정직을 얻게 하려는 것”(1,2-3)입니다. 히브리어로 지혜는 ‘호크마’ 교훈은 ‘무사르’입니다. 교훈은 훈계나 징계로 체벌을 포함하기도 합니다(13,24; 19,18 참조). 잠언의 저자는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엄중히 경고합니다(5,23 참조).

 

잠언의 짧은 문장 형태에는 신중하게 선택된 몇 마디로 많은 것을 전하려는 속성이 있습니다(J. L. 크렌쇼). 또 잠언의 명쾌한 시적 특성은 대구법(병행법, parallelism)의 형태에서 잘 드러납니다. 대구법에는 “의로움의 길에는 생명이 있지만 악인의 행로는 죽음에 이른다”(12,28)와 같이 두 행이 반대 의미를 지닌 ‘반의적 대구법’과, “집은 지혜로 지어지고 슬기로 튼튼해진다”(24,3)처럼 두 행이 비슷한 의미를 지닌 ‘동의적 대구법’이 있습니다. “현인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이라 죽음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한다”(13,14)는 하나의 의미에서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나아가는 ‘점층적 대구법’입니다. 동일시하는 것, 대조, 유사성, 무익한 것, 분류, 가치, 인간 행동이나 성격의 결과 등의 다양한 내용은 잠언을 특징짓는 대구법 외에 적어도 일곱 가지 형태가 있음을 드러냅니다(J. L. 크렌쇼).

 

“내 아들아, 아버지의 교훈을 들어라. 어머니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마라”(1,8)는 말씀처럼, 잠언은 부모가 자녀에게 올바르게 살도록 교훈을 주는 내용이 간결하게 다듬어져 전승된 것으로 봅니다(12,8; 14,21; 16,32 참조). 또 “먼 땅에서 온 기쁜 소식은 타는 목에 시원한 물과 같다”(25,25), “옛 경계선을 밀어내지 말고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지 마라”(23,10) 같이 일상생활에서 관찰하고 숙고하여 얻은 격언도 있습니다. 더불어 “임금 앞에서 악인을 없애야 왕좌가 정의로 굳건해진다”(25,5)는 특별한 신분이나 계급 사회, 고위 관리들의 왕궁 생활을 보여 주는 다양한 신분 지혜와 관련된 격언입니다.

 

3,18 지혜는 붙잡는 이에게 생명의 나무 그것을 붙드는 이들은 행복하다.

 

현인들은 삶에서 드러나는 건강, 장수, 부와 영광을 선한 가치로 평가하였습니다(3,16 참조). 잠언의 저자들은 시편이나 욥기처럼 의인의 죽음이나 사후 세계에 대한 희망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나무’와 ‘생명의 샘’에 대한 빈번한 표현(11,30; 13,12.14; 15,4 참조)은 잠언의 방식대로 인간 생명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의로운 이’(11,30), ‘이루어진 소망’(13,12),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혀’(15,4)는 생명의 나무에 대한 은유입니다. 다양한 유형 가운데 잠언의 ‘생명의 나무’(창세 2,9; 3,22 참조)는 인간이 지혜롭게 사는 길을 알려 줍니다. 여기서 생명의 나무는 창세기의 신화적 배경이 아닙니다(L. E. 머피). 오히려 지혜의 가르침을 따라 잘 사는 것과 행복을 나타내는 은유입니다. 잠언에 따르면 누구든지 주님을 경외하며(1,7 참조) 살아갈 때 생명의 나무를 얻고 행복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생명의 나무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나무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바로 생명의 샘이고 생명의 길이며 지혜로운 이가 가는 길입니다(1코린 1,18-25 참조).

 

히브리어로 ‘길’은 ‘데렉’인데 ‘삶이나 행동 방식, 어떤 행위의 경로나 자취’를 뜻합니다. 잠언의 현인들은 지혜의 길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나에게 너무 이상한 것이 셋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넷 있으니 하늘을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길 바위 위를 기어 다니는 뱀의 길 바다 가운데를 떠다니는 배의 길 젊은 여자를 거쳐 가는 사내의 길이다”(30,18-19). 여기서는 현인들도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길’이 네 번이나 묘사됩니다. ‘길’에 대한 개념은 이스라엘 민족이 주님을 섬기는 길을 찾아 광야에서 40년을 방랑하고, 나라를 잃고 유배 생활을 했기에 큰 의미를 갖습니다. “현인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이라 죽음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한다”(13,14)는 말씀에서 하느님을 섬기기 위한 올바른 길 안내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길은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사람의 발걸음은 주님께 달려 있으니 인간이 어찌 제 길을 깨닫겠는가?”(20,24)

 

모든 사람이 지혜롭지는 않습니다. 잠언에서 어리석은 사람을 빗댄 “말에게는 채찍, 나귀에게는 재갈 우둔한 자의 등에는 매”(26,3)라는 표현은 법구경에도 나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온갖 궁리에도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하고 스스로 칼이나 몽둥이를 불러 그 갚음에는 반드시 해를 입는다.” 잠언에는 우둔한 사람(26,1-12 참조)의 어리석음을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 말로 묘사합니다(W. O. E. 외스털리). 교육받지 않은 순진한 사람(페티), 원래부터 어리석은 사람(크실), 완고한 사람(에윌), 어리석음을 고집하는 사람(사칼), 거친 사람(바아르), 야수적이고 사악한 사람(나할), 이성을 잃은 광인(훌렐), 자기 주장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어리석은 수다쟁이(레츠). 이러한 어리석음이 콕 찌르는 침 한 방으로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혜로운 자는 교육받지 않은 순진한 사람을 제외하고 위에 열거된 어리석은 자를 멸시하였습니다. 잠언의 현인들에 따르면 지혜로운 이는 생명의 길을 통해 안전한 삶으로 나아가지만, 어리석은 자는 파멸의 길로 갑니다(J. L. 크렌쇼).

 

생명의 길을 가고 싶습니까? 일상생활에서 잠언의 짧은 교훈 말씀을 새기며 산다면 지혜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8,1 참조). 다음 달에도 잠언의 지혜로운 말씀을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8월호(통권 449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잠언]

하느님의 약속

김경랑 귀임마리아 수녀

 

 

잠언은 짧은 경구로 사람을 크게 흔들어 놓는 촌철살인의 특징을 지닙니다. 잠언의 말씀은 오랜 세월을 거쳐 그 삶의 자리를 넓혀 왔습니다. 그렇게 광범위한 배경을 지녔기에, 잠언의 말씀은 성격상 매우 다양한 삶의 자리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또 끊임없이 새로운 삶의 자리에 적용될 수 있다는 유익함도 지닙니다.

 

잠언의 연구는 1-9장을 다루느냐 10-31장을 다루느냐에 따라 주제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1-9장은 부모, 지혜, 교사들의 훈계에 관한 내용과 지혜의 강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명시하는 10,1-22,16은 가장 오래된 376개의 잠언으로 통일성 없이 엮여 있습니다. 이 잠언들은 주로 도덕적 삶을 다루며 주님의 이름을 자주 언급하여 종교적 색채를 나타냅니다. 22,17-29,27은 현인들의 잠언입니다. 그중 25-29장은 “유다 임금 히즈키야의 신하들이 수집한 것”(25,1)으로 보이는 127개의 오래된 잠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30-31장은 아구르의 잠언, 수잠언, 르무엘의 잠언이 모여 있습니다.

 

1,2 이 잠언은 지혜와 교훈을 터득하고 예지의 말씀을 이해하며 3 현철한 교훈과 정의와 공정과 정직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잠언 1,1-7은 1-9장의 서론으로, 잠언 전체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를 잘 드러냅니다. 중심 구절 1,3에 언급된 정의(체데크), 공정(미쉬파트), 정직(메샤림)은 도덕적이며 공동체적인 특성을 지닙니다. 1,1-7에는 생활에서 지혜로 드러나는 다양한 용어가 나옵니다. 즉 포괄적이고 지적인 가치를 지닌 지혜(호크마)와 훈계(무싸르), 문학적으로 표현한 잠언(마샬), 비유(멜리짜), 수수께끼(히다), 실천 덕목으로 드러나는 현명(하스칼), 분별(오르마), 신중(메지마), 영리함(타흐불) 같은 용어입니다. ‘얻게 하려는’이라고 번역된 말은 ‘얻다(receive)’라는 히브리어 라카흐에서 나온 용어로 지혜 언어에서 매우 적극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는 가르침과 교훈 및 훈계로 얻게 되며 공동체의 삶을 위한 것입니다. 페르시아 속담에 “지혜를 얻고자 애쓰고 힘쓰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이다. 자신이 그것을 이미 찾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애쓰고 힘써야 하며, 지혜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힘써 얻은 지혜는 지혜로운 사람들을 통해 함께 살아가는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구현됩니다.

 

3,1 내 아들아, 너는 내 가르침을 잊지 말고 너의 마음이 내 계명을 지키게 하여라.

 

잠언에는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이 받은 약속이 많이 나옵니다. 주님의 가르침과 약속은 “내 아들아”(2,1; 3,1)로 시작하는 3,1-12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 경외함을 깨닫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찾아 얻으리라”(2,5)는 구절에서 보듯, 주님의 약속은 2,1-8에서 지혜를 찾는 이들에게 이미 주어졌는데, 가르침과 약속이라는 주님과의 관계로 다시 반복됩니다. 주님의 약속은 신명기에 자주 나오는 전문용어(미츠오트: 명령들)로 쓰였으며 강한 권고의 특성을 지닙니다. 그러나 토라의 명령이 아닌 지혜 교사의 명령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R. E. 머피).

 

3,1-12에는 주님의 가르침과 그에 따른 약속이 여섯 번 이어집니다(B. K. 월키). 주님의 가르침으로는 계명을 지키고, 자애(헤세드)와 진실(에메트: 충절)을 떠나지 않는 것, 주님을 신뢰하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지 않는 것,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가르침을 물리치지 않는 것입니다(3,1.3.5.7.9.11 참조). 이에 대한 약속은 장수와 수명,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받는 호의와 호평, 곧은 앞길에 대한 약속, 몸에 약(healing) 또는 뼈에 활력소(건강), 부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3,2.4.6.8.10.12 참조). 이렇듯 가르침에 따른 약속이 있기에 “내 아들아, 주님의 교훈을 물리치지 말고 그분의 훈계를 언짢게 여기지 마라”(3,11)고 하신 말씀이 더 힘 있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잠언에서 언급하는 이러한 약속은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혜와 부활의 은총 안에서 이뤄집니다(1코린 1,18-2,16 참조). 오리게네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지혜이시므로, 현인(賢人)들은 저마다 지혜에 대해 제 능력껏 그리스도께 참여합니다.”

 

1,7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이다. 그러나 미련한 자들은 지혜와 교훈을 업신여긴다.

 

잠언에 따르면 주님을 경외하고 그 가르침을 듣고 따르는 이들은 부모에게 순종합니다(1,8-9 참조). <효경(孝經)>에도 사람의 행위 가운데 효(孝)보다 큰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맹자는 사람마다 부모를 부모로 섬기며, 어른을 어른으로 모시면 천하가 태평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하늘 뜻을 즐기는 사람은 천하를 편안하게 하고, 하늘 뜻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나라를 편안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부모와 현인들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나오므로, 조상의 전통에서 가르침을 얻고 터득한 사람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으로 지혜롭게 살아갑니다. 그러니 잠언의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권고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너의 예지에는 의지하지 마라”(3,5).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다”(16,9). “어떤 지혜도 어떤 슬기도 어떤 조언도 주님 앞에서는 가치가 없다”(21,30).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여길 때 그 지혜가 어디서 오는지 살피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시작과 지식의 근원이 주님을 경외하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 바로 현인입니다(1,7; 9,10 참조).

 

31,30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칭송을 받는다.

 

‘훌륭한 아내에 대한 칭송’(31,10-31 참조)을 통하여 묘사되는 지혜는 1-9장과 연계하면서 드러납니다(E. 쳉어). 지혜는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는 여인으로 묘사되고(1,20-33; 8,6 참조), 훌륭한 아내는 “지혜와 자상한 가르침이 그 입술에 배어 있다”(31,26 참조)고 말합니다. 이렇듯 잠언의 시작과 마침을 ‘여성’의 이미지로 묘사하는 것은 남성이 주로 이 말씀을 읽었기 때문입니다(A. 마인홀드). 여인으로 묘사하는 지혜 중에 ‘지혜로운 여인’이 단연 으뜸입니다. 잠언에는 여인의 이미지가 네 가지로 묘사되는데 지혜로운 여인(8,1-36; 9,1-6 참조), 우둔한 여인(9,13-18 참조), 배우자로서의 여인(5,15-19 참조), 낯선 여인(2,16-19; 5,1-14 참조)입니다. 이와 같이 지혜를 의인화하면 인격적으로 드러나기에 우리가 더욱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1,1-7에서 살펴본 지혜와 관련된 여러 용어가 31,10-31의 훌륭한 아내의 모습에서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훌륭한 아내의 삶은 마침내 칭송을 받게 되며 주님 앞에서 잘 사는 사람들의 본본기가 되고, 지혜를 사랑하는 법과 지혜롭게 사는 법을 깨우쳐 줍니다. 이처럼 잠언의 저자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지혜롭게 살아가기를 권고하며 그에 따른 주님의 약속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잠언에는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 곧 주정꾼(23,29-35 참조), 게으른 사람(10,4-5; 24,30-34 참조), 부정하거나 타락한 사람(26,23-28 참조)도 나옵니다. 이들은 지혜와 무관하게 살기에 그 반대되는 것에 끌려다닙니다. 가끔 전통 속에서 낯익은 격언들도 지혜의 중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논어>에 ‘지자요수(智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혜를 얻은 사람은 물이 흐르듯 만물의 이치를 깨닫고, 산이 움직이지 않듯 세상의 헛것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교부 니네베의 이사악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혼은 덕행을 실천하는 데 무관심해질 때 그 반대되는 것에 이끌리고 만다.”

 

교부 오리게네스는 “지혜의 거룩한 신적 아름다움은 지혜를 명상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를 사랑하도록 초대한다”고 하였습니다. 잠언이 들려주는 지혜의 말씀을 명상하며 지혜를 사랑하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길을 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다음 호에서는 코헬렛의 지혜로운 말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9월호(통권 450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코헬렛]

풀잎에 맺힌 이슬 같은 인생

김경랑 귀임마리아 수녀

 

 

친구들과 뛰어 놀던 한 아이가 제게 작은 물건 하나를 맡겼습니다. 놀다 보니 손이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믿는 이들의 인생이란 이 아이처럼 거추장스러운 것을 주님께 맡기고 자유롭고 기쁘게 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적당한 때에 그분께서 맡긴 것을 돌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우리에게 기쁘게 살아가라고 권고합니다(11,8 참조). 이러한 권고는 코헬렛 전반에 걸쳐 골고루 나타납니다.

 

코헬렛은 성문서의 다섯 두루마리(머귈로트) 중 하나로 초막절에 읽는 책이었습니다. ‘코헬렛’이라는 제목은 수수께끼 같은 이 책의 특징처럼 색다릅니다. 코헬렛은 ‘소집하다, 모으다’는 뜻을 지닌 ‘카할’에서 나온 말로, 이 책에 일곱 번 나오며 ‘말씀의 수집자’, ‘집회의 소집자’라는 뜻을 지닙니다. 대략 기원전 3세기에 쓰인 코헬렛은 모두 12장으로 서론과 결론에 나오는 두 편의 시(1,2-11; 11,7-12,8 참조)가 두 개의 기본 단위인 1,12-6,9과 6,10-11,6을 둘러싸고 있습니다(A. G. 라이트). 두 개의 중심 부분에는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 ‘알 수 없다’, ‘깨닫지 못한다’ 등 서로 다른 후렴구가 나옵니다. 사물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좋아하는 저자는 “일의 끝이 그 시작보다 낫고 인내가 자만보다 낫다”(7,8)처럼 ‘A보다 B가 더 낫다’는 형식으로 ‘토브(좋은)’를 사용하여 자신의 지혜를 드러냅니다(W. 짐머리).

 

이 밖에도 저자의 감정이나 생각을 드러내는 수사학적 질문이 매우 많습니다. 저자의 표현은 학교나 가정에서 배우고 알게 되는 지혜나 지식에 저항하는 듯 보입니다. 지혜의 정신이 지성의 결과로 잘 드러난 욥기나 잠언과 달리 코헬렛은 인간의 지혜나 지식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코헬렛은 이집트의 교훈집에 뿌리를 둔 ‘왕의 유언(royal testament)’이라는 문학 형식을 사용하는데, 솔로몬 임금의 현실 이해를 표현하는 문학 작품에 반영되어 있습니다(J. L. 크렌쇼). 저자는 ‘현인’(12,9)이었고 ‘예루살렘에서 다스리던 이스라엘의 임금’(1.12)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는 “하늘 아래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지혜로 살펴 깨치려고 내 마음을 쏟았다”(1,13)고 하는데, ‘살펴 깨치려고’는 히브리어로 ‘다라쉬’와 ‘투르’ 두 단어입니다. ‘다라쉬’는 일반적 탐구를 말하며, ‘투르’는 정탐과 같은 특별한 조사를 뜻합니다. 저자는 지상에서 의미 있는 행동을 철저히 탐색한 결과로 “모든 것이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1,14)이라 확신합니다. ‘바람을 잡는 일’이란 현실상 불가능할 뿐 아니라 아무런 가치나 이익도 없다는 뜻을 강조한 것입니다.

 

1,2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이 말씀은 전통 가르침과 매우 다르며 창세기의 ‘보시니 좋았다’는 창조 신학의 기초를 흔듭니다. 본래 토라의 가르침은 세상과 인간의 삶을 긍정하고 하느님을 경외하며 살도록 안내합니다. 그러나 코헬렛은 시작(1,2 참조)과 끝(12,8 참조)에 허무의 최상급을 사용하여 세상을 부정한 후, 비로소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라’(12,13 참조)고 합니다. “너무 의롭게 되지 말고 지나치게 지혜로이 행동하지 마라”(7,16)라든가 “선만을 행하는 의로운 인간이란 이 세상에 없다”(7,20)라는 구절은 정통 신학의 가르침과 너무 달라 참으로 당황스럽습니다. 경험적 성찰을 토대로 한 코헬렛의 이 말씀은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지 말라는 것이나(R. N. 와이브레이) 과장된 의와 지혜를 피하라는 가르침으로 여기기도 합니다(T. 크뤼거). 코헬렛의 저자는 전통 내용을 담은 본문 속에 자신의 신학적 신념이 담긴 본문을 적절히 삽입하여 정경 문서가 되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J. 블렌킨솝).

 

2,17 그래서 나는 삶을 싫어하게 되었다. 태양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이 좋지 않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이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이전의 현자들이 인간의 삶을 최고의 선으로 여긴 것과 매우 다릅니다. 죽음은 현자들이 추구하는 모든 의미와 수고해서 얻은 것을 부질없게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운명’(9,2)으로 번역된 코헬렛의 핵심 용어 중 하나인 ‘미크레’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불시의 사건을 의미하며 ‘죽음’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R. E. 머피). 저자는 현실에서 만나는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같은 ‘미크레’를 가지고 있기에 모두 같은 운명에 따라 살아간다고 합니다(2,14; 3,19; 9,2 참조). “모두 같은 운명이다. 의인도 악인도 착한 이도 깨끗한 이도 더러운 이도”(9,2). 코헬렛의 저자는 사후 세계에 대해 모르며, 그곳에서 받을 보상이나 징벌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는 입증하기 어렵고 인간의 지식으로 깨달을 수 없는 불확실한 점에 대해 갈등을 겪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11,9-10; 12,1-7 참조).

 

코헬렛에는 자주 반복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허무, 태양 아래서, 하늘 아래서, 유익이 없다, 같은 운명, 몫, 하느님의 선물, 수고, 모든). ‘반복’이라는 모티브는 저자의 신학을 드러내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자주 사용되는 말들 중에 ‘헤벨(헛되다)’은 책 전체에 서른여덟 번이나 나옵니다. 이는 ‘실체 없음’, ‘인간의 삶에 대한 덧없음’, ‘인간의 우매함’이라는 세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D. B. 밀러). ‘태양 아래서’라는 말은 스물아홉 번이나 반복되며 시공간의 제한을 갖는 상징적 이미지를 지닙니다. 태양의 공간적 이미지는 하늘에서 뜨는 위치에서 기인합니다. 해는 뜨고 지는 시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때(에트)라는 시간 개념으로도 설명됩니다(3,1-9 참조). 따라서 ‘태양 아래서’, ‘하늘 아래서’라는 말은 ‘땅 위에서’라는 말과 대비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세상에서 고생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R. E. 머피).

 

3,11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인간 세상에서 부정적 경험을 하고 삶을 철저히 탐구한 저자는 다음의 다섯 가지를 확신합니다(J. L. 크렌쇼).

 

첫째, 죽음은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합니다. 인간의 숨이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희망이 없다면 삶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하고 말합니다(4,1-3; 6,1-6; 7,2 참조). 둘째, 지혜는 그 목표를 성취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미래를 알지 못하기에 지혜를 지녀도 인생은 안전하지 못합니다(3,11; 7,13-14; 8,17; 9,13-16 참조). 셋째,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입니다. 행운은 누구에게도 생기지 않고 인간은 제때에 일어나는 사건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뿐이며,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때 하느님의 끊임없는 활동은 허무합니다(1,13; 3,18; 11,5 참조). 넷째, 세상은 비뚤어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악인도 오래 살고 완전한 선도 없기 때문입니다(7,16-17.20 참조). 다섯째, 쾌락은 인간을 끌어들이는데 이는 보상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상을 베풀어 주지 않고 선한 행동을 장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5,18-19; 9,7; 11,9-10 참조).

 

코헬렛을 살펴본 결과 저자는 진리 안에서 비판적 태도를 취하며, 세상에 사는 인간은 매우 불안하고 세상의 모든 가능성이 철저히 주님의 손안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오직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만으로 살 뿐이라고 합니다. 코헬렛은 우리가 주님께 선물로 받은 ‘기쁨(시므하)과 필요해서 소유한 ‘몫(헬레크)을 잘 구분하라고 권고하며,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겸허하게 살아갈 지혜를 지니라고 선포합니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시편 127,1). 풀잎에 맺힌 이슬 같은 인생(草露人生)은 덧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거처는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안에 있으니 허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몫을 받고, 그분께서 허락하신 기쁨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시편 73,25-26; 로마 8,32 참조). 다음 호에서는 ‘노래 중의 노래’ 아가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0월호(통권 451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코헬렛]

오늘을 즐겨라

김경랑 귀임마리아 수녀

 

 

“카르페 디엠, 오늘을 즐겨라. 소년들이여, 삶을 비상하게 만들어라.” 이 말은 피터 위어(Peter Weir) 감독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에서 키팅 선생님(로빈 윌리엄스 분)이 학생들에게 한 명대사입니다. 그는 좀 더 적극적으로 젊음을 즐기라고 권합니다. ‘오늘을 즐기라’는 뜻의 라틴 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호라티우스의 시 구절 중 한 부분입니다.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오늘을 즐겨라,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

 

‘오늘을 즐겨라’는 코헬렛의 중심 교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손수 만드신 세상을 보시고 ‘참 좋다’고 하셨습니다(창세 1,31 참조). 흙으로 빚어진 인간은 하느님께서 ‘보시고 좋아하신’ 세상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존재입니다. “그렇다, 사람이 많은 햇수를 살게 되어도 그 모든 세월 동안 즐겨야 한다”(11,8). 코헬렛에 따르면 삶의 즐거움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5,18-19 참조)입니다. 그러나 11,8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은 “어둠의 날이 많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입니다. 이는 기쁨에 대한 반전과 긴장을 가져오는 당부입니다. ‘명심해야 한다’는 본래 ‘자카르’로 ‘기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반전과 긴장은 11,9에서도 반복됩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코헬렛의 저자는 헛되고 허무한 삶(11,10 참조)에도 기쁨이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노고로 먹고 마시고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것(2,24; 3,13; 5,17-18 참조), 살아 있는 동안 즐기며 행복을 마련하는 것(3,12; 8,15 참조), 머리에 향유를 바르고 깨끗한 옷을 입고 기뻐하며 빵을 먹고 기분 좋게 술을 마시며 사랑하는 여인과 인생을 즐기는 것(9,7-9 참조) 등은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삶이 즐거울 때 심판의 때를 기억하도록 촉구하여, 인생의 기쁜 순간에 언젠가는 마지막 순간이 온다는 것을 알고 의롭게 생활하라고 권고합니다. 삶의 즐거움은 ‘어둠의 날’과 ‘심판’ 사이에 놓여 있어, 어둠의 날과 심판으로 말미암아 헛되고 헛된 연기처럼 사라질 날들을 오히려 뜻깊게 지내라고 합니다.

 

12,2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11,7-10이 젊음과 즐거움을 강조한 반면, 12장은 노년을 언급하여 대조를 이룹니다. 12,1-7은 어둡고 쓸쓸한 분위기지만 인간의 말년을 한 폭의 그림으로 묘사하여 시문학의 절정으로 손꼽힙니다. 이 말씀의 특징은 일련의 절망과 암울한 심상(imagery)으로 상징적 의미를 효과 있게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M. 폭스는 12,1-8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R. E. 머피). 메멘토 모리는 ‘너는 죽을 존재임을 명심하라’는 뜻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 병사들이 적군의 시체와 전리품을 쌓아 놓고 축배를 들며 외친 승리의 구호였습니다. 승리의 술잔을 들고 있는 자신도 언젠가 죽을 처지가 되니 항상 죽음을 생각하자는 뜻입니다.

 

한나라의 한신(韓信)이 강을 등지고 진을 쳐서(배수진 背水陣) 병사들이 물러서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싸우게 하여 조나라의 군사를 물리쳤다는 이야기에서 보듯, 죽음은 삶을 더 생기 있게 하는 배수진 역할을 합니다. 12,1-7은 노년과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며 11,8에서 언급한 어둠의 날들에 대해 길게 묘사하는데, 이는 ‘오늘을 즐기라’는 권고를 더 확실히 받아들이게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년과 죽음은 오늘을 더 알차고 힘 있게 살도록 하는 배수진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수난과 죽음을 배수진으로 삼아 살아 계신 동안 삶의 모든 것을 내주셨습니다.

 

12,1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지혜문학 중 이곳에서만 ‘창조하다(바라)’가 명사 기능을 하는 분사형 ‘너의 창조주’로 묘사됩니다. 이는 ‘한처음’에 사람이 받은 ‘목숨’ 또는 ‘생명(루아흐)이 그것을 주신 분께 돌아간다는 것(12,7 참조)을 알게 하고, ‘루아흐’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깨닫게 합니다. 따라서 기쁨을 간직한 ‘젊음의 날’에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것은 ‘어둠의 날’을 연상하게 하는 ‘노년의 때’와 대조됩니다. 이 말씀에는 창조주 안에서 삶을 시작하고 마치게 되는 인생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게 이끄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교부 존자 베다는 코헬렛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의 삶은 수레바퀴입니다. 태어난 날부터 죽는 날까지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지상의 삶은 수레바퀴 같습니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12,1).”

 

12,5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리에는 조객들이 돌아다닌다.

 

인생의 마지막을 묘사하는 이 표현에서 ‘영원한 집’은 12,3-5을 묶어 주는 표현입니다. ‘영원한 집으로 간다’는 말은 죽음을 의미하는 완곡어법입니다. 저자는 이미 “모두 한곳으로 가는 것. 모두 흙으로 이루어졌고 모두 흙으로 되돌아간다”(3,20)거나, “그가 온 것처럼 그는 그렇게 되돌아간다”(5,15)거나, “그런 다음 죽은 이들에게로 간다”(9,3)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영원(올람)’이라는 말은 인간의 감각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시간적 개념을 의미합니다. ‘집’은 지상에서 사는 동안 머무르는 특정 장소가 아니라 공간적 개념을 의미합니다. 영원한 집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태양 아래서’, ‘땅 위에서’ 시공간의 제약을 받고 사는 인간이 시공간의 제약이 없는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12,7)는 뜻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모이라, μοîρα)’에 얽매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는 동안 자신이 받은 몫에 따라 즐겁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코헬렛의 견해입니다(M. 헹엘).

 

12,6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7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는 현상은 은줄에 매달린 금으로 된 등잔대가 파괴된다는 뜻입니다.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는 것은 삶의 종말과 죽을 운명에 대한 은유로 여겨집니다. 저자는 종말이 다가오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권고합니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먼지(아파르)’는 구약성경에 열두 번 사용되는데, 코헬렛에 두 번 쓰였습니다(3,20; 12,7 참조). 코헬렛의 저자는 먼지와 무덤과 영원한 집을 하나의 의미로 사용합니다. 땅의 먼지로 만들어진 사람은 하느님께 ‘생명(루아흐)’을 얻고(창세 2,7 참조), 그 생명은 다시 하느님께 돌아갑니다(창세 3,19 참조).

 

어느 날부터 오르막길과 계단이 두렵고 엘리베이터가 반갑다면 창조주 하느님께 큰 걸음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카르페 디엠’과 ‘메멘토 모리’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의미로 연결됩니다. ‘오늘을 즐기라’는 말과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가라’는 말은 ‘지금 여기(here and now)’를 위한 명령입니다. 모든 시작은 끝과 맞물려 있으며 끝은 시작을 위한 원동력이 됩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우리가 주님께 받은 삶을 알차게 누릴 수 있도록 지혜를 알려 줍니다.

 

겨울을 준비하는 가을은 사실 봄을 향한 내면의 준비 기간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천국에 이르는 길에 마중 나오시기 전에 우리 생활을 더 지혜롭게 가꾸고,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내면을 좀 더 알차게 엮어 가야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1월호(통권 452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아가]

천사들이 부르는 노래

김경랑 귀임마리아 수녀

 

 

아가(雅歌)는 사랑의 노래입니다. 히브리 성경에서는 아가의 제목을 ‘노래 중의 노래(Song of songs)’, ‘최고의 노래’, ‘가장 아름다운 노래(쉬르 핫쉬림)’라 했습니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아가를 묵상하면서 자신이 천사 무리 가운데 섞인 채 기쁨에 넘쳐 때때로 “당신의 향유 내음은 싱그럽고 저는 당신을 쫓아 달려갑니다”(아가 1,3-4 참조) 하며 노래하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아가는 모두 8장입니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합창단이 번갈아 노래하는 형식인데 다섯 번에 걸친 만남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아가는 우여곡절 끝에 연인이 사랑을 이루는 과정을 노래한 책입니다. “솔로몬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1,1)인 아가는 구약의 다섯 축제 두루마리(머귈로트) 중 하나로 파스카 축제 때 낭독되었습니다. 그러나 아가에는 하느님 이름이나 규정, 계명 또는 율법과 같은 구약성경의 중요한 가르침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의 중요한 축제 때에 읽힌 까닭은 아가에 드러난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해석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속에 품은 뜻을 설명하는 우의적(allegory)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아가의 독특한 말씀을 이해하도록 돕는 몇 가지 해석 방법이 있습니다. 가나안의 풍요 제의로 사용한 신들의 혼인을 노래한 제의(祭儀)-신화적 방법이나 드라마 또는 극적(劇的) 방법, 고대 근동에서 널리 유행한 혼인식 축가나 사랑 노래의 수집물로 보는 문자적 방법 등입니다. 아가의 노래들을 고대 근동의 수집물로 여기는 이유는 아가의 표현 중 사랑의 심부름꾼인 ‘비둘기’(1,15; 4,1; 5,12)와 여신처럼 ‘산 위의 사자들 사이에 머무르는 애인’(4,8 참조)이 시리아-메소포타미아 문화에서, ‘나리꽃’(2,1-2; 5,13; 6,2-3; 7,3)과 ‘나리꽃 사이에서 풀을 뜯는 사슴’(4,5 참조)이 이집트 문화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L. S. 쇤베르거). 4,13의 ‘정원(파라다이스)’과 3,7의 ‘가마(클리네)’ 같은 어휘는 페르시아에서 차용한 말로 여기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방법이 있어 어느 관점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리 알아들을 수 있기에 균형 잡힌 시각과 풀이가 필요합니다. 아무래도 교회의 전통과 교부들이 선호한 우의적 방법이 아가를 이해하는 데 좀 더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1,7 내 영혼이 사랑하는 이여, 내게 알려 주셔요. 당신이 어디에서 양을 치고 계시는지

 

아가의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합니다. 사랑의 내면에는 그리움이 있습니다. 아가에서 여인은 남자를 가리킬 때 ‘내 영혼이 사랑하는 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사용된 ‘사랑’은 히브리어로 ‘아하브’라고 하는데 구약성경에서 208회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헤세드’와 달리 인간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영혼’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네페쉬’입니다. 이는 단순히 영혼을 의미하기보다 인간 모습 전체와 인간의 호흡을 총망라한 뜻입니다(H. W. 볼프). 따라서 아가의 여인이 자신의 전 존재로 사랑하는 이를 찾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사랑하는 주님을 찾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2,8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며 ‘연인의 소리’를 예민하게 듣습니다. 그리워하는 사람을 기쁨에 차서 산을 뛰어오르고 넘어오는 가젤이나 영양으로 묘사합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예언자가 유배지에서 이스라엘에 회복의 희망을 알리는 소식을 전하는 모습과 유사합니다(이사 52,7 참조). 교부 대(大) 그레고리우스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뛰어오른다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뛰어오르신 것이며, 하늘에서 태(胎)로, 태에서 구유로, 구유에서 십자가로, 십자가에서 무덤으로, 무덤에서 하늘로 오르신 것이고, 진리께서는 우리도 당신을 뒤따라 달리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뛰어오르셨는지를 알려 주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뛰어오르셨듯 우리도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면 주님을 향해 힘차게 달려 나갈 수 있습니다.

 

2,11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12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왔다오. 우리 땅에서는 멧비둘기 소리가 들려온다오.

 

꽃은 생명과 행복을 상징하고, 겨울이 지나고 장마가 걷힌 것은 죽음과 불모를 이기고 생명이 승리한 것을 나타냅니다(H. 링그렌). 어둡고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낸 뒤, 새 생명이 소생하고 활기차게 움직이는 것은 사랑의 힘 덕분입니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회개와 새 삶을 예언한 호세아서와 이스라엘의 귀향과 행복을 노래한 제1이사야서에도 반복되어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호세 14,6).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이사 35,1-2).

 

3,1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아가는 세 번째 만남(3,1-5,1 참조)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하는 이들이 마침내 만납니다(3,4 참조). 혼례가 성사되고(3,6-11 참조), 남자는 여인의 아름다움에 반해 신부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4,1-7.11 참조). 이 아가의 서사시는 히브리인들이 지닌 미(美)의식의 특징을 잘 드러냅니다(H. W. 볼프). 또 이 시는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호세 2,21)든가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이사 62,5)와 유사합니다.

 

6,9 나의 비둘기, 나의 티 없는 여인은 오직 하나 그 어머니의 오직 하나뿐인 딸 그 생모가 아끼는 딸. 그를 보고 아가씨들은 복되다 하고 왕비들과 후궁들은 칭송한다네.

 

이 노래는 사랑의 관계가 얼마나 유일한지 깨닫게 해 줍니다. 그뿐 아니라 서로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이제 사랑하는 연인들은 서로 그리워하고 있을 때나(2,16 참조) 만났을 때에도 “나는 내 연인의 것, 내 연인은 나의 것”(6,3)이라고 노래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대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1코린 3,23)라고 말합니다. 또 주님과 우리의 사랑에 대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갈라놓을 수 없다’(로마 8,35 참조)고 하며,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갈라 2,20)이라고 말합니다.

 

마침내 아가에서 드러난 여인의 아름다움은 천상의 무리(별들)를 거느린 위엄 있고 장엄한 모습과 경이로움으로 드러납니다. “새벽빛처럼 솟아오르고 달처럼 아름다우며 해처럼 빛나고 기를 든 군대처럼 두려움을 자아내는 저 여인은 누구인가?”(6,10) 아가에서 여인을 가장 화려하게 칭송한 이 표현을,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 돌려 드립니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8,6). “큰 물도 사랑을 끌 수 없고 강물도 휩쓸어 가지 못한답니다”(8,7). 보잘것없는 인간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죽음처럼 강합니다. 주님이신 그분은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기꺼이 세상에 오셨습니다(필리 2,6-11 참조). 예수님께서 세상의 무엇으로도 휩쓸어 가지 못하는 위대한 사랑으로 기꺼이 오시기에, 우리 안에서는 날마다 거룩한 탄생(聖誕)이 이루어집니다.

 

교부 카루스의 테오도레투스는 솔로몬의 세 작품인 잠언, 코헬렛, 아가가 계단이 셋인 층계와 같다고 했습니다. 먼저 잠언 말씀에 따라 옳은 행실로 마음을 정화하고, 코헬렛에서 항구하지 못한 것의 덧없음을 깨달은 다음, 아가를 통해 영원한 것들을 약속하는 신랑을 갈망하며 마침내 그에게 날아오른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 아름다운 천사들의 노래를 날개 삼아 주님께 훨훨 날아가면 좋겠습니다. 다음 호에서는 지혜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2월호(통권 453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지혜서]

삶을 빛나게 하는 지혜

김경랑 귀임마리아 수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세상을 받쳐 주는 세 가지 기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라삐 가말리엘은 체육, 문학, 음악을 중요하게 여긴 그리스 사상의 영향으로 진리, 정의, 평화를 중시했습니다. 대사제 시몬은 세상이 토라, 하느님에 대한 섬김, 자비를 행하는 것 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탈무드는 세계가 진실, 법, 평화의 세 토대 위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지혜서는 지혜, 생명, 정의가 세상을 받치는 세 기둥이라고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성경 가운데 가장 나중에 쓰인 지혜서는 지혜문학 중에서 ‘지혜’라는 명칭을 지닌 유일한 책이자, 영혼의 불멸성을 말해 주는 중요한 책입니다. 지혜서는 처음부터 그리스어로 쓰였습니다. 이 책은 기원전 100년에서 기원후 50년 사이에 헬레니즘의 중심지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레니즘 교육을 받은 유다인이 솔로몬의 이름에 권위를 두고 썼다고 봅니다.

 

‘지혜’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이치나 도리를 잘 분별하는 정신 능력과 슬기’입니다. 슬기는 ‘사리를 밝혀 잘 처리해 가는 능력’을 말하는데, 지혜나 슬기는 우리 삶에서 꼭 필요한 정신 능력이라 하겠습니다. 지혜는 그리스어로 ‘소피아(σοφια)’, 라틴어로는 ‘사피엔시애(Sapientiae)’입니다.

 

지혜서는 모두 19장이며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느님 계획 안의 인간의 길’(1,1-6,21 참조), ‘지혜 예찬’(6,22-11,1 참조), 이집트 탈출에 대한 회고적 찬가인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11,2-19,22 참조)입니다.

 

이 세 단락은 둘째 부분인 예찬(Encomium)에 의해 구분됩니다. 이는 ‘지혜의 본성’(7,22ㄴ-8,1 참조)을 중심으로 기술됩니다. ‘예찬’은 설득력 있는 웅변술로 그리스의 문학 유형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문학 유형은 당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던 젊은이들에게 지혜의 덕과 가치, 지혜의 중요성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사례를 나열하거나 구절을 병행하며 비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방법도 당시 유행하던 헬레니즘 문학 형식에서 도입한 것입니다(7,16; 8,7 참조). 뿐만 아니라 유다교 전통 문학 형식인 미드라쉬 유형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10,1-19,22 참조).

 

이렇듯 지혜서에서 유다교와 헬레니즘 두 전통의 세계관과 문학에 대한 지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유다교에 관심을 가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궁정의 구성원들에게 이 지혜서를 통해 회개를 촉구하려 했다’(E. 쳉어)는 설이 최근 주목받고 있습니다.

 

1,1 정의를 사랑하여라.

 

이는 지혜서 전체를 꿰뚫는 핵심 주제입니다. 저자는 가르침을 받으려는 염원이 지혜에 대한 사랑이고, 그 사랑은 법을 지키는 것이며, 법을 따르는 것은 불멸을 보장받기에(6,18 참조) “정의는 죽지 않는다”(1,15)고 말합니다. “지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퍼져 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8,1)하기 때문에 “세상의 통치자들”(1,1)은 정의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정의’는 그리스어로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입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 ‘체다크’와 같습니다. 체다크는 이집트의 마아트(Ma’at) 신학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E. 쳉어). 마아트는 고대 이집트 종교에서 태양신 레(Re)의 딸이며 지혜의 신 토트의 아내입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마아트를 진리와 정의의 화신이라고 여겼습니다. 또 올바르고 정의로운 세계 질서의 여신으로서 죽은 자의 심판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정의(체다크)’의 개념은 ‘마아트’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곧 체다크는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이며, 사회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드러납니다. 지혜는 정의의 내면이기에 지혜가 없으면 정의도 없습니다(S. 슈뢰어). 지혜서에 따르면 체다크는 하느님에게서 오기에 실현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가르쳐 주는 덕목인 ‘노고에 따른 덕, 절제, 예지, 정의, 용기’를 배워야 합니다. “사람이 사는 데에 지혜보다 유익한 것”(8,7)은 없기 때문입니다.

 

7,26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이다.

 

지혜서에서 말하는 지혜는 그 자체로 하느님의 영원한 빛을 반사합니다. 저자는 이를 바탕으로 지혜의 특성을 스물한 가지 나열하는데, ‘21’은 7의 3배수로 완전수를 의미합니다(J. L. 크렌쇼). “지혜 안에 있는 정신은 명석하고 거룩하며 유일하고 다양하고 섬세하며 민첩하고 명료하고 청절하며 분명하고 손상될 수 없으며 선을 사랑하고 예리하며 자유롭고 자비롭고 인자하며 항구하고 확고하고 평온하며 전능하고 모든 것을 살핀다. 또 명석하고 깨끗하며 아주 섬세한 정신들을 모두 통찰한다”(7,22-23). 이 말씀 중에 지혜가 ‘자유롭다’는 말은 그리스어 ‘아콜루토스(ἀκωλύτωϛ)’로 방해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평온하다’는 말은 ‘아메림노스(ἀμέριμνοϛ)’로 근심이 없음을 뜻합니다.

 

지혜서에서 드러나는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로 인간과 매우 가깝습니다. 저자는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이고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이어서 어떠한 오점도 그 안으로 기어들지 못한다”(7,25)고 합니다. 이러한 지혜가 거룩한 영혼에게 들어가 하느님의 벗이 되고 예언자가 되게 합니다(7,27 참조). 그러기에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1,1)는다면 주님의 지혜로 하느님의 벗이 됩니다.

 

5,15 그러나 의인들은 영원히 산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보상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그들을 보살피신다.

 

지혜서의 주요 사상 중에 또 하나는 ‘영혼 불멸’입니다. ‘예찬’을 둘러싼 첫째 부분과 셋째 부분은 의인과 악인에 대해 말합니다. 저자는 의인들이 의롭게 살아도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상선벌악의 결과는 죽은 뒤에나 드러나기에 살아 있을 때의 희망이나 보상을 내세로 미루는 경향을 보입니다. 따라서 코헬렛에서 말한 ‘인생을 즐기라’(코헬 9,7 참조)는 삶의 방식은 악인들에게서나 보게 되는 것이므로 단호히 거부됩니다(2,6-9.21 참조). 죽음에 대해서도 이스라엘의 전통 개념이 깨집니다. 이는 의인이 일찍 죽더라도 안식을 얻게 되며,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는다는(3,7-8 참조)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나아가 지혜서는 죽은 이들의 심판을 최초로 언급합니다(4,20-5,23 참조). 2,12-16에서 악인들은 의인들의 태도에 분노합니다. 이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난당하기 전의 음모와 매우 유사합니다. 악인들은 불행한 사람들의 의로움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들을 괴롭히며, 자신들의 힘을 정의라 하고 약자들을 내리누르려 합니다(2,10-11 참조).

 

악인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의인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자신을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탓하기 때문입니다(2,12 참조). 또 자기를 상스러운 자로 여기고 자기의 길을 부정한 것처럼 피하기(2,16 참조) 때문입니다.

 

악인들이 의인들을 수치스럽게 죽이기로 결정한 이유는 그들이 한 말 때문입니다(2,17-20 참조).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의인들을 버려두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의인들은 영원히 산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보상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그들을 보살피신다”(5,15).

 

여기에서 ‘영원히’라는 그리스어 ‘아이오나(αἰῶνα)’는 매우 오래 지속되는 시간을 말합니다. ‘살다’라는 그리스어 ‘자오(ζάω)’는 죽음에 반대되는 육체적 삶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죽지 않고 살기를 바라시며, 하느님의 창조 활동이 구원을 가져온다는 의미입니다(E. 쳉어).

 

논어에 ‘지자불혹(知者不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40년이나 살았으면 지식이 아닌 지혜를 쌓아 놓았으므로 세상의 유혹에 강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남은 생애의 삶을 빛내기 위해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7,26)인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를 청해야겠습니다.

 

다음 호에서는 지혜를 청하는 기도와 선조들을 이끌어 준 지혜에 대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1월호(통권 454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지혜서]

참된 동반자, 지혜

김경랑 귀임마리아 수녀

 

 

넓은 바다나 사막에서는 신기루 현상이 일어납니다. 수평선 아래에 있거나 산에 가려진 물체가 보이기도 하고, 반대로 사라져 안 보이는 수도 있습니다. 북극권 이상(以上)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본다거나 숨이 가빠지는 ‘파타 모르가나(Fata Morgana)’ 현상을 겪는다고 합니다. 인생에서도 삶의 질이 달라져, 보이지 않아야 할 것이 보이거나 잘 보여야 할 것이 안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 바른 길의 인도자나 동반자가 있다면 헛 것을 따라가지 않겠지요.

 

9,11 지혜는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기에 제가 일을 할 때에 저를 지혜롭게 이끌고 자기의 영광으로 저를 보호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섭리’(프로노이아 πρóνοια, 14,3; 17,2 참조)로 당신의 자녀들을 이끄시어 어떠한 위험이 닥쳐도 보호해 주십니다. 솔로몬은 임금으로서 백성을 지혜롭게 이끌고(9,11 참조) 자신이 하는 일이 주님께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또 의로운 재판을 할 수 있도록(9,12 참조) 거룩한 하늘에서 지혜를 파견해 달라고 청합니다(9,10 참조). 9,11의 동사 ‘이끌다’는 그리스어로 ‘호데게오(ὁδηγέω)’라 합니다. 이는 구약성경에서 광야의 여정 중에 주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주셨다는 데 쓰였습니다(신명 1,33 참조). 신약성경에서는 성령께서 이끌어 깨닫게 하시고(요한 16,13; 사도 8,31 참조) 목자이신 어린양이 생명의 샘으로 이끌어 주신다고 할 때 사용되었습니다(묵시 7,17 참조).

 

창세기의 성조들은 어려운 순간마다 그들 곁에서 고생을 함께 나누던(9,10 참조) 지혜로 보호와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집트 탈출의 역사에 나타난 지혜의 충실성은 거룩한 예언자를 통하여 빛을 발하였습니다. 지혜는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 여정 중에 이스라엘과 동행하면서 신앙의 백성을 이끌었습니다. 이에 지혜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모든 일에서 당신 백성을 들어 높이시고 영광스럽게 해 주셨으며 언제 어디에서나 그들을 도와주시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19,22).

 

9,10 거룩한 하늘에서 지혜를 파견하시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어좌에서 지혜를 보내시어 그가 제 곁에서 고생을 함께 나누게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제가 깨닫게 해 주십시오.

 

이 구절은 솔로몬이 지혜를 청하는 기도에서(9,1-18 참조)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요한 1,14-18 참조). 솔로몬은 주님에게서 지혜가 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됨을 알고 있기에(9,6 참조) 주님의 어좌에 자리를 같이한 지혜를 달라고 청합니다(9,4 참조). 또 하느님의 아들딸을 다스리고(9,7 참조) 거룩한 산에,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는 장소인 성전을 짓고 제단을 만들라고 분부하셨음을 강조합니다(9,8 참조). 솔로몬은 임금의 자격으로 백성과의 관계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유지해야 할 의무를 지녔습니다.

 

다음의 두 구절이 지혜서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3,9). “곧 은총과 자비가 주님께 선택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들을 돌보신다는 것이다”(4,15). 여기에 쓰인 형용사 ‘거룩한’은 그리스어로 ‘호시오스(ὅσιοϛ)’입니다. 하느님의 최상의 법 가운데 한 부분으로 올바름과 헌신적 생활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거룩함을 뜻합니다.

 

거룩함을 뜻하는 또 다른 그리스어는 ‘하기오스(ἅγιοϛ)’인데, 이 용어는 인간의 두려움에서 유래한 제의적 개념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이나 사물의 상태를 말합니다. 지혜서에서는 주님의 돌봄과 거룩함에서 벗어나 지혜롭지 못한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다음의 말씀을 명심하라고 합니다. “두 가지 이유로 그들에게 형벌이 내릴 것이다. 우상들에게 정신을 빼앗겨 하느님을 잘못 생각하였기 때문이고 거룩한 것을 무시하면서 거짓으로 불의한 맹세를 하였기 때문이다”(14,30).

 

지혜가 세상 안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능력으로 빛을 발하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들은 주님께 선택된 은총을 누릴 뿐 아니라, 드러난 것은 물론 감춰진 것에서까지 만물의 이치를 깨닫게 됩니다. 또 지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창조한 그 세상을 돌보시는 분임을 알게 해 주며, 균형과 조화로 세계 질서를 이룹니다. 무형의 물질로 세상을 창조한(11,17 참조)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위대한 창조의 힘과 능력을 드러내시고, 사람에게 심오한 인지 능력을 주시어 세상을 거룩하고 의롭게 관리하도록 하셨습니다(9,3 참조).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말씀으로 만드시고 인간을 당신의 지혜로 빚으시고(9,1-2 참조), 무엇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지 배워 아는 사람들을 지혜로 구원하셨습니다(9,18 참조). 이로써 지혜는 창조와 구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지혜의 훌륭함을 통찰한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묻고 답합니다. “예지가 능력이 있다면 만물을 지어 낸 장인인 지혜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 것이 어디 있겠는가?”(8,6) “사람이 사는 데에 지혜보다 유익한 것은 없다”(8,7). “그래서 나는 지혜를 맞아들여 함께 살기로 작정하였다. 지혜가 나에게 좋은 조언자가 되고 근심스럽고 슬플 때에는 격려가 됨을 알았기 때문이다”(8,9). 그러나 그가 지혜를 받아들여 살기로 작정했어도 하느님께서 지혜를 주시지 않으면 달리 얻을 수 없음을 깨달았기에, 그는 주님께 호소하며 지혜를 달라고 마음을 다하여 청합니다(8,21 참조). 마침내 기도로 지혜를 얻은 솔로몬은 주님께서 높은 곳에서 지혜를 주시어 거룩한 영으로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 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9,17-18 참조).

 

9,5 정녕 저는 당신의 종, 당신 여종의 아들 연약하고 덧없는 인간으로서 재판과 법을 아주 조금밖에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솔로몬은 임금이었으나 한낱 인간이기에 하느님의 뜻을 알고 올바로 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연약하고 덧없는 인간이며, 재판과 법을 아주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9,5 참조). ‘덧없다’는 말은 그리스어로 ‘올리고크로노스(ὀλιγοχρόνος)’입니다. 작다는 뜻의 ‘올리고(ὀλιγο)’와 물리적 시간을 의미하는 ‘크로노스(χρόνοϛ)’가 합쳐진 말로 지극히 짧은 시간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여겨지는 솔로몬도 자신을 ‘죽어야 하는 인간’이라고 인정합니다. 보잘것없는 생각과 변덕스러운 속마음을 지녔고 썩어 없어질 ‘흙으로 된’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한다고 말합니다(9,14-15 참조). ‘흙’은 그리스어로 ‘게오데스(γεῶδεϛ)’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 단 한 번 나오며, ‘흙(게, γη)’과 ‘형상(에이도스, ειδοϛ)’을 뜻하는 두 단어가 합쳐진 말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말씀과 차이가 납니다(창세 2,7 참조). 아마도 이 표현은 창세 1장과 2장의 인간 창조를 한 단어로 드러내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으나 흙으로 지어진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주님께 흙으로 만들어진 연약하고 덧없는 인간에게 필요한 지혜와 하느님 백성을 다스릴 임금이 지녀야 할 지혜를 청합니다.

 

16,26 주님,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것은 여러 가지 곡식이 아니라 당신을 믿는 이들을 돌보는 당신의 말씀임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로 이스라엘의 선조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실현하셨습니다(10-19장 참조). 지혜서 저자는 일곱 번에 걸쳐 이집트 탈출의 역사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받은 은총을 이집트인에게 내린 징벌과 비교합니다(11,4-14; 16,1-19,8 참조). 나아가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은 뒤에도 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되었음을 고백하며,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과 삶의 타락을 경계합니다(14,12 참조). 지혜서는 이스라엘 조상들의 경험을 통해 헛것을 좇는 삶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 줍니다(14,14 참조). 또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던 만나는 단지 배고픔만 해결해 준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지혜 안에서 주님을 섬겨야 하는지 깨닫게 해 주었다고 전합니다. “불에도 없어지지 않던 그것이 잠깐 비치는 햇살에 따뜻해지자 그냥 녹아 버린 것은 당신께 감사하기 위하여 해 뜨기 전에 일어나야 하고 동틀 녘에 당신께 기도해야 함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16,27-28).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식과 지혜를 존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이라 여겼습니다. 탈무드에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습니다. “기도 시간은 짧게 하고, 학문에는 오랜 시간을 보내라.” 인간의 기도는 하느님께 하는 일방적 말이므로 맑은 정신으로 짧게 하고, 배움은 하느님의 진리를 익히는 것이므로 오랫동안 정진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말씀 안에서 진리를 배워 참된 동반자인 지혜를 얻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다음 호에서는 집회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2월호(통권 455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집회서]

지혜의 화관

김경랑 귀임마리아 수녀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축제나 혼인 예식 때 아름답게 보이려고 머리에 화관을 썼습니다. 이는 풀과 꽃의 향기로써 악령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집회서에 따르면 지혜의 화관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1,18 참조). 하느님을 믿고 따르고 살면 그 거룩한 삶의 향기가 세상의 모든 악과 그릇됨에서 우리를 보호할 것입니다.

 

총 51장으로 구성된 집회서는 구약성경 중에 저자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입니다. 저자는 자신을 “예루살렘 출신 엘아자르의 아들, 시라의 아들인 나 예수(벤 시라)”(50,27)라고 소개합니다. 이 책을 칠십인역 성경에서는 ‘시라의 지혜’ 즉 ‘소피아 시락(Σοφια Σιραχ)’으로, 라틴어 성경에서는 ‘에클레시아스티쿠스(Ecclesiasticus)’ 즉 ‘모임의 책’ 또는 ‘교회의 책’으로 이름 지었습니다.

 

오랜 형성 과정을 거쳐 완성된 이 방대한 책은 기원전 190-180년경 히브리어로 쓰였으리라 추정합니다. 머리글에서 에우에르게테스 임금 통치 38년(기원전 132년)에 저자의 손자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이 책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였다고 전합니다. 유다교에서 넘겨받은 이 책은 정경성의 여부를 두고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1546년 트렌토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의 정경으로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새로 입교한 신자들을 가르치는 데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1,5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다.

 

이 말씀은 집회서의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집회서는 지혜문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인 잠언, 훈계, 교훈시, 찬가와 기도 등 다양한 형식으로 꾸며진 모음집과 같습니다. 내용 면에서는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을 다룹니다. 24장을 중심으로 창조, 하느님의 정의, 하느님 경외, 가정 생활, 아내와 여자, 우정, 경제, 정치 활동, 전례 지침 및 여러 덕행에 관한 것입니다. 또 지혜에 대한 주제를 비롯하여 역사와 연관된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문제를 언급합니다.

 

이 책의 전체 구조는 다양한 주제의 적용 기준에 따라 여러 형태로 구분됩니다. 집회서에서는 독특한 방식으로 지혜의 기능을 묘사합니다. 1부(4,11-19; 14,20-15,10 참조)와 2부(24장 참조)에서는 교육자의 지혜와 ‘나’를 중심으로 한 인격적 지혜가 나오고, 24장 이후에는 율법을 연구하는 스승의 인격이 지혜를 대신하는 중개자로 등장합니다(24,30.34; 38,24-39,11; 39,12-35 참조). 마지막 부분에서는 지혜가 여인으로 묘사됩니다(51,13-20).

 

6,35 하느님에 관한 온갖 담화를 즐겨 듣고 지혜로운 금언이 너에게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여라.

 

집회서의 저자 벤 시라가 말하는 현인은 율법 학자로, 토라를 연구하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38,34-39,11 참조).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율법을 명상”(38,34)하며, 아침 일찍 일어나 자신을 만드신 주님을 찾는 일에 마음을 쏟아 기도하고(39,5 참조), 모든 조상의 지혜를 찾고 예언을 공부하는 데 몰두하며, 여러 격언의 뜻을 절절이 꿰뚫어 파악한다고 합니다. 또 금언의 숨은 뜻을 깨고 수수께끼 같은 격언을 쉽게 풀이한다고 합니다(39,2-3 참조).

 

저자는 하느님 경외와 토라를 연구하여 얻어낸 값진 보화를 현인들에게 전해 주고, 지혜를 배우려는 학생들에게 가르침을 주려 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변화를 수용하고 삶을 통해 전수되어 온 잠언과 교훈에 담긴 지혜를 뛰어 넘는 가르침을 줘야한다고 여긴 듯합니다.

 

이 책에서는 저자의 체험과 지식을 습득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됩니다(여행의 권유 34,9-11; 만찬과 잔치에 대한 충고 31,12-32,13; 자유 의지와 책임 15,11-17; 병과 의술 38,1-15 참조). 한편으로 그는 이스라엘의 전통 가르침인 부모 공경(3,1-16 참조), 우정의 가치와 기준(6,5-17 참조), 교육 문제 및 권력자와 부자에 관한 훈계(9,12-11,9; 13장 참조), 주님의 율법에 관한 가르침뿐 아니라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 보내는 경고도 주저하지 않습니다(41,8; 42,2 참조). 또 가난한 이들에 대한 부도덕하고 불의한 태도를 비판하며, 윤리적 생활 태도를 바탕으로 올바르게 경신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34,21-31; 35,15-20 참조).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불경한 자들의 제물을 기꺼워하지 않으시고 제사를 많이 바치더라도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신다”(34,23).

 

2,18 인간의 손에 내맡기지 말고 주님의 손에 자신을 내맡기자. 정녕 그분의 위엄이 크신 것처럼 그분의 자비도 크시다.

 

2장에서는 주님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2,7-11 참조), 시련을 겪으면서도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태도(2,1-6 참조) 및 삶에 대한 본보기(2,15-18 참조)을 제시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은 주님을 신뢰하며 그분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2,18에서 ‘주님의 손’은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을 돌보고 보호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뜻합니다. 그러나 벌을 내리시는 손, 세상을 창조하시는 손으로도 묘사됩니다(이사 66,2 참조). 순종을 드러내는 이 말씀은 넓은 의미에서 지혜의 개념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신뢰하며 그분께 헌신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야 합니다(2,1 참조). 그럼으로써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것처럼(2사무 24,14; 1역대 21,13 참조) 언제 닥칠지 모르는 고통과 시련 중에 주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시련에 대비된 사람은 주님을 섬기는 방법을 배우고, 믿음을 정화하여 단련되며, 어려움에 맞서 이길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2,2),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2,6) 두어야 합니다. 여기에 사용된 ‘바로잡다’의 그리스어는 ‘유튀노(εὔθυνω)’인데, ‘똑바르게 하다, 펴다(straighten), 유지하다, 방향키를 잡다(steer)’는 뜻을 지닙니다. 마음과 길을 바로 잡으라는 뜻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주님을 섬기는 마음을 굳게 유지’하거나 ‘키를 바로 잡으라’는 말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2,11 주님께서는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재난의 때에 구해 주신다.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당신을 항구히 섬기며 경외하는 사람을 자비로 돌보십니다. 저자는 주님을 믿고 경외하면 부끄러운 일을 당하거나 버림받을 일이 없다(2,10 참조)고 말합니다. 그는 확신에 차서 “주님께서는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재난의 때에 구해 주신다”(2,11)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경외하는 이유입니다.

 

저자는 하느님을 너그럽고 자비하신 분으로 묘사합니다. ‘너그럽다’의 그리스어는 ‘오이크토스(οἰκτοϛ)’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는 ‘동정심이 있다’는 의미로 영어 compassion과 같은 뜻을 지닙니다. ‘자비’는 그리스어로 ‘엘레오스(ἐλεοϛ)’입니다. 영어 sympathy에 해당하는 말로, 연민을 지닌 동정과 자비를 뜻합니다. 엘레오스는 히브리어 헤세드로 주로 번역됩니다. 이는 사랑, 자비, 신의, 충실 등의 뜻을 지니며 상호 계약 관계에 충실한 태도와 호의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어휘에서 드러나듯 주님께서는 지극한 사랑과 약속으로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을 돌보십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주님을 알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바를 찾고 그분의 율법으로 만족하기에(2,16 참조)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향기가 우러나옵니다. 그러나 비겁한 마음과 게으른 손, 두 길을 걷는 죄인은 불행합니다(2,12 참조). 주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며 그분께서 벌하러 오실 때 속수무책이기 때문입니다(2,13-14 참조). 여기에서 ‘비겁하다(데이로스 δειλόϛ)’거나 ‘게으르다(파리에미 παρίημι)’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소심하다’, ‘나약하거나 소홀하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그분의 도움에 희망을 두지 않거나 역경에 맞서 싸울 힘을 갖지 못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길을 걷는 죄인’은 주님의 율법을 따르는 것과 세상의 방식을 따르는 것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며 사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 이른 새벽부터 지혜를 찾는 이들은 기쁨에 넘치리라”(4,12). 생명의 신비로움이 파릇한 새봄의 향기와 함께 온 누리에 가득합니다. 주님께 대한 경외심이 절로 우러나오는 이 계절에 우리의 내적 아름다움을 지혜의 화관으로 꾸미고 주님을 맞이한다면, 활기차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호에서도 집회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3월호(통권 456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집회서]

더 넓고 깊게

김경랑 귀임마리아 수녀

 

 

가끔 높은 산의 정상에서 수평선이 보이는 넓은 바다를 바라보면, 바다 너머에 그보다 더 넓은 곳이 있음을 느낍니다. 마음이 눈에 보이는 것의 이면(裏面)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지혜 또한 그 생각이 바다보다 풍부하고 그 의견이 큰 심연보다 깊어(24,29 참조) 우리는 성경의 현인들이 들려주는 지혜의 말씀을 마음으로 듣고 깨닫게 됩니다.

 

24장은 집회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지혜를 아름답게 묘사한 장엄한 찬미시입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이 말씀에서 영감을 받아 ‘말씀(로고스)’ 찬가를 지었을 것으로 봅니다. 24장에는 이미 앞에서 다룬 모든 지혜의 특징이 종합되어 있으며, 창조주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지혜가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 설명되어 있습니다. 잠언 8장처럼 의인화한 지혜는 인격적 모습으로 자신을 묘사합니다.

 

24,1 지혜는 자신을 찬미하고 자신의 백성 한가운데에서 자랑하리라. 2 지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모임에서 입을 열고 자신의 군대 앞에서 자랑하리라.

 

도입 부분에서 지혜는 두 번이나 자신을 자랑합니다. 지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입에서 나와 홀로 하늘의 궁창을 돌아다니고 심연의 바닥을 거닐고 모든 것을 다스립니다(24,3-6 참조). 만물의 창조주께서 “야곱 안에 거처를 정하고 이스라엘 안에서 상속을 받”(24,8)게 하십니다. 2-3절에 각각 언급된 ‘지극히 높다’는 말은 그리스어로 ‘휩시스토스(ὕψιστοϛ)’입니다. 이는 ‘휩소스(ὕψοϛ)’의 최상급으로 ‘가장 높은’이라는 뜻입니다. ‘하늘의 궁창’이라는 뜻으로 쓰인 그리스어는 창세기의 창조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창조 때 하느님께서 만드신 ‘궁창’(창세 1,6)과 의미가 다릅니다. 5절에 나오는 하늘의 궁창은 ‘퀴클로오(κυκλόω)’로 ‘에워싸다(surround), 두르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창세기에 묘사된 창공은 ‘스테레오마(στερέωμα)’로, 단단하면서도 평평하거나 둥근 천장 같은 하늘, 천공(天空 firmament)을 뜻합니다. ‘심연(深淵)의 바닥’은 ‘깊은 곳’을 뜻하는 그리스어 ‘바뛰스(βαθύϛ)’와 ‘끝없이 깊은 구렁’을 뜻하는 ‘아뷔쏘스(ἄβυσσοϛ)’로 표현되었습니다. 이는 죽음과 악의 세계를 의미합니다(로마 10,7; 루카 8,31; 묵시 11,7 참조). 이러한 용어들로 봐서 지혜는 그야말로 천상천하를 다스리는 엄청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식처를 찾던(24,7 참조) 지혜에게 하느님께서는 천막을 칠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이스라엘 안에서 상속을 받게 하셨습니다(24,8.12 참조). ‘천막’은 그리스어로 ‘스케네(σκηνή)’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 여정 중에 당신의 현존과 영광을 드러내신 성막을 연상하게 합니다. 또 세상에 거처를 마련하고 사람들과 함께 살며 육화의 신비를 드러내신 예수님을 떠오르게 합니다(요한 1,14 참조).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씀이 육신을 취하여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우리 마음이 치료되었다고 했습니다.

 

24,12 나는 영광스러운 백성 안에 뿌리를 내리고 나의 상속을 주님의 몫 안에서 차지하게 되었다.

 

지혜는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께 상속 재산을 받듯 주님의 몫을 차지하게 됩니다(에페 1,14.18; 콜로 3,24; 히브 9,15 참조). 주님에게서 거처와 상속을 받은 지혜는 특별한 본성과 위대함을 가지고 이스라엘 역사에 생명을 부여하고 번성시킵니다(24,13-17 참조). 지혜는 이스라엘, 특히 자신의 권세를 둔 예루살렘에서 힘찬 생명력을 지니고 아름답게 자라며 사방에 향기를 풍깁니다(24,11-15 참조). 이스라엘 전역에서 자라는 온갖 나무(향백나무, 삼나무, 야자나무, 올리브 나무, 플라타너스, 낙타가시나무)는 지혜가 이스라엘 땅에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는 의미입니다(24,13-15 참조). 여러 향료와 향기(아로마, ἄρωμα)는 주님 앞에 바치는 제물과 기도를 연상하게 하며, 지혜가 전례의 역할을 했다는 점을 의미합니다(24,15; 참조 탈출 30,23-24).

 

지혜는 찬란하고 우아한 가지에서 친절을 포도 순처럼 틔우고, 꽃을 피우고, 영광스럽고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24,16-17 참조). 그 열매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아름다운 사랑과 경외심의 어머니요 지식과 거룩한 희망의 어머니다. 나는 내 모든 자녀들에게, 그분께 말씀을 받은 이들에게 영원한 것들을 준다”(24,18). 이 구절은 대중 라틴어(불가타) 성경에서 “내 안에 길과 진리의 온갖 은총이 있고 내 안에 생명과 힘의 온갖 희망이 있다”로 수정되었습니다. 이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는 예수님의 말씀을 반영한 듯하며, 지혜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그리스도교 사상을 반영합니다(《주석성경》 참조).

 

24,19 나에게 오너라, 나를 원하는 이들아. 와서 내 열매를 배불리 먹어라.

 

이제 지혜는 음식을 차려놓고 사람들을 초대하듯 자신을 찬미하는 사람들을 초대합니다(잠언 8-9장 참조). 지혜의 열매를 먹는 것은 영적 양식으로서 지혜를 차지하고 기억하는 것이며(24,20 참조), 하느님의 계약과 율법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24,23 참조). 그러나 먹을수록 배고프고 마실수록 목이 마릅니다(24,21 참조). 대개 꿀보다 달고 꿀송이보다 단(24,20 참조) 열매는 먹으면 먹을수록 더 먹고 싶어집니다. 이러한 의미는 예수님에 의해 새롭게 바뀝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54-55).

 

지혜의 근원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잔치에 날마다 초대하시어 당신의 거룩한 양식을 먹고 마시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생명의 양식을 먹고 마시며 사람답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나에게 순종하는 이는 수치를 당하지 않고 나와 함께 일하는 이들은 죄를 짓지 않으리라”(24,22).

 

24,25 율법은 지혜를 피손 강처럼 첫 수확기의 티그리스 강처럼 흘러넘치게 한다.

 

저자는 지혜와 율법을 여섯 줄기의 강에 비유합니다. 곧 생명의 원천을 이루는 피손 강,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기혼 샘(창세 2,10-14 참조)과 이집트의 나일 강, 이스라엘의 요르단 강입니다(24,25-27 참조). 지혜는 자신이 강에서 끌어낸 운하이고 정원으로 이어지는 물길이며, 그 운하가 강이 되고 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24,30-31 참조). 율법이 지혜를 넘치게 준다는 것을 활기차고 생기 있게 비유합니다. 강과 물줄기가 땅을 비옥하게 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듯 집회서에서는 지혜와 율법(토라)의 관계가 잘 맺어져 있습니다. 저자는 말씀으로 전승된 지혜가 이미 율법에 담겨 있다는 점을 알려 줍니다. 또 다양한 이스라엘 전승을 통합하려고 시도합니다.

 

24,33 나는 가르침을 예언처럼 다시 쏟아 붓고 세세 대대로 그 가르침을 남겨 주리라.

 

이스라엘의 지혜 전승 과정에는 네 가지 흐름이 있는데, 토라 중심, 영(spirit) 중심, 묵시주의, 쿰란 공동체의 지혜 전통입니다(C. 벤네마). 전통(traditum)과 전승(traditio)은 의미상 다릅니다. 전통은 확정적 개념으로 오랜 역사 전승의 결과물이며, 전승은 유동적 개념으로 하나의 전통이 역사의 변천 과정을 겪으며 변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현재와 미래를 잇는 역동적 과정에 놓인 것이 전승입니다.

 

저자는 지혜 전승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현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언자처럼 가르침을 쏟아 붓고 세세 대대로 그 가르침을 남기려고 한 사람이었습니다(24,33-34 참조). 밤낮으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주님 안에서 참된 양식을 얻어 생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음을 전해 주려고 한 사람이었습니다(시편 1,2-3 참조). 하지만 어느 누구도 지혜라는 대양(大洋)의 풍요로움과 깊음을 깨닫지 못한다고 합니다(24,28 참조). 따라서 무한히 깊고 광대한 지혜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은, 주님께 온전히 의지하여 지혜를 얻고 자기 구원에 힘써야 한다고 일깨웁니다. “주님 안에서 끊임없이 강해지고 그분께서 너희를 강하게 하시도록 그분께 매달려라. 전능하신 주님 홀로 하느님이시고 그분 말고 아무도 구원자가 될 수 없다”(24,24).

 

지혜가 우리 안에 거처를 마련하였듯, 우리도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팔을 활짝 벌리고 높이 달리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 안에 머물러야겠습니다. 심원한 지혜를 더 넓고 깊은 마음으로 깨닫기 위해서 말입니다. 다음 호에서도 집회서의 말씀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4월호(통권 457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집회서] 달인과 현인

김경랑 귀임마리아 수녀

 

 

요즘에는 획기적이고 창의적이면서 전문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이 크게 환영을 받습니다. 자기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가진 ‘달인(達人)’이라면 더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현인(賢人)’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인의 사전적 의미는 어질고 지혜롭기가 성인에 견줄 만큼 뛰어나거나 덕이 두드러지게 드러난 사람입니다.

 

44,1 이제는 훌륭한 사람들과 역대 선조들을 칭송하자.

 

집회서 저자는 42,15-43,33에서 경이로운 자연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마지막 부분(44,1-50,21 참조)에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빛나는 하느님의 지혜와 삼십 명 이상의 성경 인물이 나옵니다. 44,1-49,16은 거대한 딥티콘(diptychon: 중앙에서 접어 포갤 수 있게 경첩을 박아 댄 두 장의 판자)을 이룹니다. 이 부분은 에녹부터 느헤미야까지 과거의 위인들을 중심으로(44,16-49,16) 서술하되, 서언(44,1-15)에는 조상에 대한 칭송과 위인의 특징을, 결론(50장)에는 찬미와 축복의 기원을 기술합니다. 부록(51장)은 지혜와의 만남을 회고하는 감사 시편이며 훈계와 서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자 벤 시라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신앙의 영웅들과 함께해 오신 하느님의 가르침과 그 지혜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게 해 줍니다(시편 78; 105; 106; 135; 신명 32장; 느헤 9,5-37 참조). 저자가 묘사하는 역사는 계약의 역사가 아니라 지혜의 역사이며, 이 신앙의 조상들은 달인이 아니라 영웅이나 현인의 모습에 더 가깝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사람들”(44,1)이며 ‘자비로운 사람들’(44,10 참조)과 ‘경건한 사람들’(43,33 참조)로 묘사됩니다. 그들을 가리키는 말은 모두 히브리어 ‘헤세드(hesed)’에서 나왔는데, 이와 비슷한 뜻으로 쓰이는 히브리어가 ‘하시딤(hasidim)’입니다. 하느님께 충실한 이들을 가리키는(1사무 2,9) 하시드인은 마카베오기에 이스라엘의 용맹한 전사이며, 율법에 헌신한 사람이고, 평화를 모색한 사람으로 나타납니다(1마카 2,42; 7,13 참조).

 

44,16-49,16의 조상들에 대한 찬양에는 창세기의 인물인 노아,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그리고 이집트 탈출 시대의 아론과 피느하스를 거쳐 왕정 시대의 다윗까지 하느님과 맺은 일곱 번의 중요한 계약이 나옵니다. 이로써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고 이끄신 완전한 보호와 결속, 그리고 하느님 백성의 위상이 드러납니다. 저자는 대사제 시몬이 거행하는 제사의 화려한 묘사를 통해 이스라엘의 대사제가 드리는 경신례에서 계약이 실현되고 재현되어 왔음을 보여 줍니다(50,12-20 참조).

 

그리스 로마 문화는 신화적 영웅들, 자신의 자부심과 명예를 고취하는 사람들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이민족을 차별하면서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내세우는 데 이바지하였습니다. 집회서에서 묘사되는 선조들의 영웅담은 이러한 문화 배경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유다 민족 내에서 우월한 민족의식을 함양시키려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부정적 여성관을 지닌 저자는 성경의 역사에서 드러나는 드보라, 룻, 유딧, 에스테르 같은 여성의 영웅담은 하나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네스 마르뵈크에 의하면 여성에 대한 저자의 부정적 관점(9,1-9; 23,22-26; 25,13-26,28; 41,21-22; 42,9-14 참조)은 여성에 대한 적대감이라기보다 지중해 문화에 만연하던 남성의 가치 체계(재산, 말, 가정, 성 등에 대한 여성관)에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에 따른 지배권과 체면 상실에 대한 남자들의 두려움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51,12 당신께서는 저를 멸망에서 구원하셨고 곤경의 날에 저를 건져 주셨습니다.

 

51장 부록 ‘시라의 아들 예수의 기도’에서 저자는 자신이 극심한 박해에서 구원받았던 일을 회고합니다. 저자가 겪은 고통스러운 박해 상황에 대한 언급은 집회서 전체의 부드러운 분위기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36,1-12 참조). 그는 중상하는 혀와 올가미, 거짓을 꾸며 내는 자들의 입술, 부정한 혀와 거짓말 때문에 큰 고난을 겪었다고 밝힙니다(51,2-6 참조). 본문 전체에 산발적으로 드러난 말에 대한 내용은 지혜롭지 못한 말에 대한 고통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가르침입니다. 조상들에 대한 칭송 부분에서도 저자는 그 시대에 중요하게 여겨지는 인물만을 골랐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 시대의 요청에 따라 사제의 중요성을 부각하기 위해 모세보다 사제직을 수행했던 아론과 대사제 시몬을 더 길게 언급합니다(45,6-22; 50,1-21 참조).

 

벤 시라는 무엇보다 하느님에 대한 경외를 삶의 으뜸으로 여깁니다. 선조들의 칭송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경향은 그들이 하느님을 어떠한 방식으로 섬겼느냐는 것입니다. 위대한 다윗에 대한 내용만 보더라도 그는 누구보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추구한 사람이었습니다(47,5-10 참조).

 

47,2-5에 따르면 다윗은 달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자랑인 영웅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 호소하고(47,5 참조), 모든 일을 하면서 거룩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영광의 말씀으로 찬미를 드리며, 온 마음을 다해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한 현인이었습니다(47,8 참조). 그는 임금으로서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찬미하고 그 찬미가 이른 아침부터 성소에 울려 퍼지게 하였습니다(47,10 참조).

 

다윗이 주님을 경외하는 모습에 “지극히 높으신”(47,5.8)이라는 표현을 두 번이나 사용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어로 ‘휩시스토스(ὕψιστοϛ)’인데, 공간적 개념으로 ‘가장 높으신’이라는 최상급의 의미를 지닙니다. 5절에서 목적격, 8절에서 여격으로 쓰였습니다. 이러한 표현으로 다윗이 경외한 하느님의 절대 위상을 드러내고, 그러한 분을 섬긴 다윗의 위대함을 보여 줍니다.

 

24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지혜의 위대한 길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되고 우주와 이스라엘, 시온, 성전, 토라로 이어집니다. 집회서의 마지막 긴 단락에서 창조계에 현존하는 지혜(42,15-43,33 참조)와 이스라엘 역사(44-49장 참조)를 연결한 것은 이 책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집회서 저자 벤 시라가 묘사한 선조들의 모습은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는 위인들의 활동을 생생하게 회상시킵니다. 특히 의인의 묘사(44,4-8 참조), 달인의 경지에 이른 장인의 모습(38,24-34 참조), 율법 학자 현인의 모습이나 이상(理想)(39,1-11 참조)과 같은 위인들에 대한 훌륭한 기억은 지혜를 배우려는 학생들에게 민족 정신과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51,14 나는 성전 앞에서 지혜를 달라고 청하였는데 마지막까지도 지혜를 구할 것이다.

 

저자가 지혜를 열렬히 추구하는 모습은 지혜를 구하는 자세에서 잘 드러납니다. 32,14-16에서는 ‘찾는다’는 의미로 ‘우연히 발견하여 찾는다’는 뜻의 휴리스코(εὑρίσκω)를 사용하고, 51,14에서는 ‘조사나 탐색’의 뜻인 에크제테오(ἐκζητέω)를 사용합니다. 32,14-16에서 ‘찾음’에 대한 세 번의 언급 가운데 두 번은 하느님을 찾는 일이고 한 번은 율법을 찾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일은 율법 탐구자의 중요한 역할이며, 지혜를 추구하는 자세입니다. 저자는 결론 부분에서 행복과 지혜의 길은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고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50,28 참조).

 

저자는 지혜를 찾기 위하여 ‘배움의 집’에 묵으라고 권고합니다(51,23 참조). 배움의 집은 율법 연구에 전념하기 위한 장소를 가리키며 ‘가르침의 집(베트 미드라쉬)’이라 하는데, 유다 전통에서 처음 사용됩니다(《주석 성경》 참조).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을 찾던 첫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묵었고, 그곳에서 지혜의 원천인 메시아를 만났습니다(요한 1,39.41 참조). 메시아를 만난 제자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고 지혜로움을 마음에 간직했기에 주님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따른 제자들은 달인의 길이 아닌 현인의 길을 간 것입니다.

 

지금까지 1년 5개월 동안 지혜문학에 대하여 소개해 드렸습니다. 부족하고 미흡한 제 글을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5월호(통권 45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