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성경의 숨은 이야기 -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8. 6. 17.
[성경의 숨은 이야기] 하느님을 '손에 들고' 다니는 사람

[성경의 숨은 이야기]

하느님을 '손에 들고' 다니는 사람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새해, 주님의 말씀 가운데 ‘선물’ 같은 구절을 골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새해 ‘선물’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한 구절을 찾아 그분께 선물로 드리고 싶어졌습니다. 성경을 뒤적여 주님께서 마음에 쏙 들어 하실 구절을 찾았습니다. 새 아침, 당신께서 가장 기뻐하실 구절이 틀림없다 싶어 홀로 행복했습니다. 함께 외쳐 주실 테지요? “당신 계명의 길을 걷게 하소서. 제가 이것을 좋아합니다”(시편 119,35).

 

흔히 성경은 좋은 말씀이 기록된 책이라 합니다. 온통 옳은 말, 좋은 소리가 가득 적혀 있으며 ‘성스러운’ 하느님의 말씀이 빼곡할 것이라고 어림짐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어 보면 이 생각에 동의하기 힘듭니다. 오히려 세상 죄의 기록이며 얼룩진 인류의 흔적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이 좋은 말씀으로 꽉 찬 거룩한 책이라는 표현은 절반만 맞는 셈입니다.

 

성경에는 별별 망측한 상황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괴하고 끔찍한 일을 숨기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에는 사탄의 말도 섞여 있습니다. 세상을 유혹하려는 사탄의 언어는 매우 ‘반들반들’하고 그럴듯하여 얼핏 하느님 말씀으로 오해될 만큼 참되고 지혜롭게 읽힙니다. 악랄하고 끔찍한 속내를 감추고 ‘먹음직하고 소담스럽게’ 포장하는 일에 능숙한 사탄이 이미 그 ‘말’로 하와를 속여 먹었고 예수님까지 속이려 했던 걸 기억하면, 이해되실 것입니다.

 

욥기의 절반은 ‘어리석은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탄의 술수가 가장 잘 드러난 성경이 ‘욥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친구들의 대화가 기록된 욥기를 처음 읽으면 도통 누가 한 이야기인지 헷갈리기 일쑤입니다. 모두가 옳은 얘기고 바른 소리라 엇비슷하게 읽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기에는 함정이 많습니다. 욥의 친구들 입을 빌린 사탄은 특유의 매끄럽고 세련되며 상당히 ‘옳은 듯’하고 훨씬 ‘그럴듯’하게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더러 ‘사탄의 언어’에 밑줄을 긋고 삶의 지향으로 삼는 묘한 경우가 발생하는 이유일 터입니다.

 

그날 욥의 친구들은 “위안하고 위로하기로 서로 약속”(욥 2,11)하고 그곳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알아볼 수조차 없이 망가지고 추해진 욥의 모습에 아연실색하여 “목 놓아 울며, 저마다 겉옷을 찢고 먼지를 위로 날려 머리에 뿌렸”(욥 2,12)으며 “이레 동안 밤낮으로”(욥 2,13) 애통해 하였습니다. 함께 땅바닥에 앉아 지내며 “아무도 그에게 말 한마디”(욥 2,13) 건네지 못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들의 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통을 당하는 이에게는 어떤 위로의 말조차 사치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들의 꾹 다문 입술로 전해 듣습니다.

 

그 사랑의 침묵을 욥이 깨뜨립니다. 자신을 덮친 끔찍한 재난, 오히려 살아 있음이 형벌이었을 욥이 입을 엽니다. 그런데 ‘겨우’ 자기 생일을 저주하고 태중에서 죽지 않은 일을 한탄합니다. 원망의 화살을 하느님께 겨누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이를 악물었을지, 주먹을 불끈 쥐었을지….

 

욥기는 총 42장입니다. 오늘 저는 감히 욥기의 절반은 ‘어리석은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경에 담긴 얘기지만 그저 인간끼리 주고받은 주절거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서로 좋고 옳고 그럴듯한 얘기를 주고받았지만 그 ‘말’로 인해 그분께 꾸중을 들었으니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어리석음’이며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판결(욥 42,8 참조)을 내리셨으니 그렇습니다.

 

상대방의 아픔을 가슴이 아닌 ‘머리로’ 대할 때, 마음이 아닌 ‘입으로’만 위로할 때, 상대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할 때, 상대의 마음을 보듬지 못할 때 모두 헛것이라는 주님의 결론입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위장하고 정의의 이름으로 단단히 포장을 했더라도, 그분을 속일 수 없습니다. 때문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심으로 위로하려던 그들이 결국 사탄의 도구로 이용된 사실에 통탄하게 됩니다. 그 아리따운 생각을 지키지 못해 사탄의 것으로 전락한 일이 억울하고 속상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저지른 잘못은 먼저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쩌면 그네들은 입에 발린 위로를 넘어, 욥을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에서 ‘새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때문에 더욱 ‘정의’를 일깨워 줄 필요를 느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깨우치도록 “자네도 귀담아듣고 알아 두게나”(욥 5,27)라고 타이르며 욥을 회개시키기 위해 애썼던 것이다 싶기도 합니다. 그 심한 ‘날벼락’을 맞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욥, 요지부동이 되어 ‘죄가 없다고’ 도도하게 버티는 모습이 진심으로 안타까웠던 것이다 싶기도 합니다. 끝까지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는 고집이 너무나 딱해서 얼른 주님께 용서를 청하라고 강력히 권했던 것이다 싶기도 합니다.

 

진심을 몰라 주고 말끝마다 토를 달아 일일이 항변하는 욥이 점점 야속하고 얄미워졌던 것이라 살펴봅니다. 끝내 “악한 사람이 하느님에게서 받을 운명”(욥 20,29)이라고 매몰차게 몰아붙이던 마음을 이해해 봅니다. 그들이 충격요법을 쓰고 막다른 코너로 몰아간 것도 모두 ‘욥을 위한’ 일이라고 여겼던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을 속일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말이 아니라 ‘마음’을 보시는 분이라는 진리를 잊었습니다. “나에게 올바른 것을 말하지 않았”(욥 42,7)다는 두려운 판결을 듣지 않도록 “사람들 앞에서 위선을 부리지 말고 네 입술을 조심하여라. … 네 마음이 거짓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집회 1,29-30)고 일깨우는 성경 곳곳의 외침을 듣지 않았습니다. ‘나 같으면 하느님께 호소하고 맡겨드리겠다’는 입에 발린 믿음은 애당초에 거절하신다는 따끔한 일깨움을 무시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하지 않은 사실에 있습니다. 어리석게도 자기네 생각에 묶여 자기네 뜻을 따르게 하겠다는 각오로 끝장 토론에만 열중했습니다. 자기들 관점이 지혜의 전부인 것처럼 삶의 결론을 도출하려고 왈가왈부했습니다. 세상 지식으로 설왕설래하여 고통의 근원을 밝힐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고통의 뿌리를 뽑아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오만했다는 점도 보태집니다. 끝내 그들은 처음에 가졌던 순수한 의도를 잃고 비난의 강도만 높였습니다. 욥의 기를 꺾어 주려고 모인 듯 똘똘 뭉쳐서 다치고 멍든 가슴에 소금만 뿌려 댔습니다.

 

그런 중에 자신을 비난하고 판단하며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친구들 틈바구니에서 “나의 권리를 박탈하신 하느님께”(욥 27,2) 탄원했던 욥의 믿음이 얼마나 탁월한지 가늠하게 됩니다. “나를 시금해 보시면 내가 순금으로 나오련마는”(욥 23,10)이라고 호소하는 믿음, 자기 마음과 믿음을 뒤집어 보여 드릴 수가 없어 애달파하는 욥의 하소연에 하느님께서 눈물을 삼켰으리라 싶습니다. “이제는 전능하신 분께서 대답하실 차례”(욥 31,35)라고 당당히 응답 달라고 청하는 믿음의 기개에 화들짝 놀라, 얼른 욥을 강복하기 위해 준비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욥이 보여 준 믿음의 확신은 고난마저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야고 1,4)으로 만드시려는 그분의 계획임을 깨달았던 지혜의 편린이라 확신합니다.

 

세상의 고통과 시련은 사랑의 숙제입니다

 

2013년 새해를 맞았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 그늘마다 숨죽여 신음하는 이웃도 여전히 있을 것입니다.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할 일이 결코 줄지 않을 것입니다. 왜 고통이 있는지, 아픔이 있는지 묻고 따지고 분석하는 어리석음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마저 시험을 당하는 일에서 빼주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어떤 고통과 시련도 우리에게는 분석되고 해석될 과제가 아니라 사랑의 숙제라는 사실을 명심하면 좋겠습니다. 욥의 친구들처럼 말만 번지르르하여 “하느님을 제 손에 들고 다니는 자”(욥 12,6)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을 코앞에 걸고 다니는 일도, 그럴듯한 믿음의 언어로 위장하는 모습도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도둑질하여 “손에 들고” 다니는 못되고 막된 행위라고 경고합니다.

 

새해, 우리 모두 하느님을 “손에 들고” 다니는 헛된 믿음에서 탈출하기를 기도합니다. 진심으로 그분 말씀과 그분의 뜻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영’을 돌판이 아니라 마음에 새기는 “그리스도의 추천서”(2코린 3,3)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매일 주님을 신바람 나게 하는 선물 꾸러미를 봉헌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월호(통권 442호)]

 

 


 

 

[성경의 숨은 이야기] 우리의 전투 상대는 악령입니다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무엇보다 먼저 사과를 올리고 싶습니다. 사제로서 신자들에게 명확하고 뚜렷한 주님의 지침을 강권하지 못했던 일, ‘마음 좋은 척, 너그러운 척’ 에둘러 용인했던 오만을 통회합니다. 일단 지루한 구약성경은 나중으로 미루고 신약성경부터 읽을 것을 권했던 일이 가슴 아픕니다. 지금 저는 그래서 더욱 성경 읽기가 힘들어졌을 분들께 제 모자람을 고백합니다. 부실했던 제 의도에 용서를 청합니다.

 

참으로 이런 제 꼴이 답답하다는 듯 꾸짖는 바오로 사도의 음성이 귀에 쟁쟁합니다. 진실로 성경이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께서 주신 “선물”(1코린 2,12)이며 “인간의 지혜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말로 이야기”(1코린 2,13)한다는 사실을 몰랐느냐고 캐묻는 듯 여겨져 난감합니다. 덩달아 베드로 사도도 입을 모아 성경은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1테살 2,13)이라고, “결코 인간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 하느님에게서 받아 전한 것”(2베드 1,21)이라고 똑부러지게 거드시니 면목이 없습니다. 용서를 청하지 않고는 피할 구석이 없습니다. 초대 신자들이 보석처럼 아껴 묵상하던 성경이 모두 구약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지 못했던 점을 진심으로 참회합니다.

 

성경은 합리적인 세상의 손익 계산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묘하고 진기한 책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을 받아 적어 외우라고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때와 장소에 따라 듣는 사람들의 수준에 맞추어 단순하고 명료한 진리를 이해하도록 쉽게 풀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특별하고 고상하고 고차원적인 언어로 골머리를 썩게 하지 않고, 매우 사소하고 지극히 일상적인 인간의 삶을 통해 지혜를 선물하셨습니다. 우리 삶의 평범한 이야기로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천국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별나고 대단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으로, 당신의 나라와 사랑을 이해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눈뜨면 살아내기 마련인 우리의 매일이 곧 주님의 뜻을 이루는 작업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나저나 그 열악한 환경에서 마이크도 없는 생음을 ‘허술히’ 듣지 않고 또렷이 경청했던 제자들의 자세가 예수님을 정말 기쁘게 했을 것이다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오늘 저처럼 이리 적을까, 저 말부터 할까 고민하지 않으셨으며, 좀 더 나은 표현을 찾기 위해 낑낑대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점에서 많이 부럽습니다.

 

성경은 이기적이고 셈이 빠르며 합리적인 세상의 손익 계산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말씀을 읽는 것만으로,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하느님의 일깨움과 가르침의 신비를 체험하도록 합니다. 나아가 믿음을 지키는 방패가 되어 당신 자녀들의 삶에 빛을 선물합니다. 주님처럼 낮은 곳을 지향하는 삶을 용기 있게 살아가도록, 그분을 향한 희망을 잃지 않도록 힘을 줍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2베드 1,20).

 

돼먹지 않은 교리에 솔깃하여 방황하는 요즘 신앙인들

이렇게 분명히 주님께서 이르시는데도 요즘 한국 교회의 신앙인들이 이단의 돼먹지 않은 교리에 솔깃하여 방황하고 있다니 기가 막힙니다. 대충 파악된 이단의 숫자만도 쉰 곳을 헤아린다는 통계에 말문이 막힙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신천지’를 주목해 봅니다. 그들이 기존 교회에 막중한 타격을 가하며 공격하는 실태를 직시하고 싶습니다.

 

신천지는 교주 이만희를 ‘재림 예수’라 추앙하며 일명 ‘추수꾼’들을 비밀리에 각 교회로 파고들게 하여 교세를 늘리기에 혈안입니다. 개인적으로 은밀히 접근하여 자기들의 교리를 주장하고 선전하여 수많은 교우를 현혹하고 있습니다. 유의할 일은 그들이 포섭하는 첫 번째 대상이 교회에 불만을 품고 있는 신자라는 점입니다. 나아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기 위해서 성경을 깊이 있게 공부하려는 이들에게 접근하여 철저한 ‘성경 공부’를 미끼로 던진다는 사실입니다. 참 교활한 수법입니다.

 

한발만 물러나 생각하면 그들의 사기성 짙은 교리가 얼마나 엉성한지 쉬이 알 수 있습니다. 덜컥 속아 넘어가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충분히 감지하게 됩니다. 문제는 청산유수로 입에 발린 거짓말로 성경 지식이 모자란 이들에게 자기네 입맛에 맞춰 이어 붙인 구절들을 장황히 쏟아 낸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의 깊이를 미처 깨닫지 못한 신자들은 그들의 억측을 알아차리기가 힘듭니다. 전혀 터무니없는 엉터리이며 타당치 않은 억지라는 사실에 적절한 반론을 제기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어물쩍대다 허망한 교리를 수용하며 ‘신천지’의 추종자가 되어 버립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주님께 면목이 없습니다.

 

이 모두가 재림 신앙을 왜곡하려는 사탄의 전략입니다. 재림하실 예수님을 두렵고 무서운 존재로 오해하도록 겁주는 사탄의 흉계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희망의 소식을 공포로 몰아가 복음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막는 사탄의 횡포입니다. 사탄의 술수를 이겨 내는 유일한 방법은 말씀이신 주님의 뜻을 깨닫는 것뿐입니다. 때문에 더욱 명백하고 분명하게 그분을 따르는 일에는 가라지의 훼방이 따를 것이라는 주님의 주의 사항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분의 이름을 빙자한 적(敵)그리스도가 여기저기에서 출몰할 것이라고 분명히 경고하신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에 무수히 널려 돌아다니는 시한부 종말론 따위와 ‘언제 어디서’라는 말세론이 터무니없는 주장이며 새빨간 거짓이라는 사실을 주지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명백히 밝히셨다는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강한 말씀의 용사로 훈련시키지 못하였음을 처절히 통회합니다

 

단언합니다. 성경을 지속적으로 통독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를 깨달은 영혼은 결코 이단의 교리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자상하며 감동어린 것인지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 모두 당신의 심정을 알고 기쁘게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 것만을 간절히 원하는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새록새록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성경이 창세 이래로 변함없이 들려주는, 한결같은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절절히 깨닫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영원한 그곳에서 함께 살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 뜻을 알려 주시려 당신의 끈끈하고 절절한 사랑의 메시지를 성경에 담아 주셨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세상사에 아로 새겨진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당신의 진심을 헤아려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하느님의 뜻을 확신하는 뿌리 깊은 신앙인이 됩니다. 천국은 딱 “십사만 사천 명”(묵시 7,4)에게 허락된 곳이 아니라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묵시 7,9)가 하느님의 품 안에서 함께 살아갈 곳입니다. 결코 땅에서 특별하게 ‘격리되고 무장된 특별한 집단’을 위한 곳이 아닙니다. 아울러 천국은 평범한 신앙인은 꿈도 꾸지 못할 멀고 동떨어진 곳이 아니며 지금,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행복으로 빚어집니다.

 

저는 성경 말씀을 그럴듯하게 조합하고 조작하는 많은 이단이 성경 지식이 짧은 교우들을 유혹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오늘 이 지면을 빌려 제 허물을 회개합니다. 성경 지식에 목마른 이들에게 거푸 성경 통독을 권하지 못한 일, 그분의 진리를 영혼에 깊이 새기도록 이끌지 못한 잘못을 참회합니다. 진리에 단호히 대처하도록, 강한 말씀의 용사로 훈련시키지 못하여 주님의 귀한 양 떼를 잃은 아픔을 처절히 통회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영이 맑아져, 이단의 엉뚱한 헛소리를 감별할 수 있는 지혜의 소유자로 무장시키지 못했음을 통탄합니다.

 

이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여 주님의 진리에 밝아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분의 길을 곧게 따르는 지혜로 굳건하여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에페 6,11)하기를 강권합니다. 말씀으로 영이 밝아져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에페 6,12)을 물리치는 주님의 강력한 “성령의 칼”(에페 6,17)을 지닌 용사로 거듭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날, 홀연히 재림하실 주님을 깨어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진리 앞에 과연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 나는 여러분을 속이는 자들과 관련하여 이 글을 씁니다”(1요한 2,22-26). 좋으신 주님께서 우리의 부족함을 당신 사랑과 은총으로 지켜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2월호(통권 443호)]

 

 


 

 

[성경의 숨은 이야기] 요한,  어찌  그리 달라지셨나요?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저는 요한 복음과 노자의 사상을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땄습니다. 솔직히 제 학위는 ‘실력’의 결실이 아니라 사랑의 ‘합작품’입니다. 명성 높은 참고 서적도 무용지물이 되는 까막눈 신세였던 저는 매일이 난감하고 막막했습니다. 자존심으로 버티기? 아는 척하며 넘기기? 밤샘으로 실력 쌓기? 갖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실력은 고만고만…. 마침내 ‘작전 변경’을 시도했습니다. 주님께 항복의 백기를 들고 넙죽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포진한 막강 실력자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당시 끼니를 거르고 밤잠을 놓치는 희생을 감수하셨던 분들의 고마움을 잊지 못합니다. 그네들처럼 이웃의 모자람에 최선을 쏟아 주는 도우미로 살아 갈 각오를 다지게 합니다.

 

요한 복음을 통한 고찰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사도 요한에 대한 개인적 소회는 무덤덤했습니다. 복음서에서 읽히는 요한의 삶이 다른 제자들에 비해 특출하지도 않은데 애지중지하신 주님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못마땅해서 더부룩해진 마음으로 요한의 허물을 까칠하게 따지기도 했습니다.

 

요한의 돼먹지 않았던 성정이 어떻게 ‘사랑’으로 변화될 수 있었을까요?

 

우선 요한은 형님 야고보와 함께 다녔으니 떠돌이 생활의 외로움도 덜했을 법했습니다. 더구나 주님께 자기 아들들을 위해서라면 안면몰수하고 치맛바람을 일으켰던 극성맞은 어머니 살로메가 있었으니 더 기세가 등등했을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니 마마보이, 철부지 근성을 벗지 못하고 ‘만찬 자리에서도 주님의 품에 안겨 비비대는 버르장머리 없는 짓거리를 했구나’ 생각하였습니다. 눈에 미운털이 박히니 요한의 면면은 더 얄밉기만 했다는 얘깁니다. 더욱이 그가 주님께 말씀드리는 일들이 죄다 심술 맞아, 더 눈꼴이 시렸습니다. 주님을 환대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마치 엘리야라도 된 것처럼,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라고 거들먹대는 모습이야말로 ‘모자람과 허풍의 인증샷’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덜떨어진 요한을 끝까지 챙기신 주님의 심정이 더욱 의문이었습니다. 모두 주님을 버린 그때, 유독 당신의 임종을 지키도록 그를 붙드신 이유가 무엇인지, 무슨 까닭에 성모님을 모시는 일까지 요한에게 맡기셨는지 전부 모를 일이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야고보와 요한의 인품을 멋대로 깎아 내리면서도 하나도 죄송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들 때문에 정말 속이 상했을 주님 마음을 ‘홀로 알아주는 양’ 여겼습니다.

 

어느 날, 사도 요한의 편지글이 길고 험난한 그의 일생을 일깨우기까지 제 생각은 늘 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그 성급한 청년, 나대고 설치고 인정받기를 즐기던 그가 오직 기뻐하고 사랑하는 일에 능숙해지기 위해 견디어 낸 긴 단련의 시간이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그날 처음, 저는 요한의 마음속에 알알이 맺힌 슬픔과 인내와 아픔의 흔적이 빚은 깊은 생채기를 보았습니다. 교회의 원로인 요한이 교우들을 생각하며 적어 내린 겸손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글에 무디고 일방적이던 제 마음이 깡그리 부서져 내렸습니다.

 

복음이 전하는 요한의 행적을 살피면 그가 매우 용의주도했고 또 무척 이성적이었다고 깨닫게 됩니다. 일례로 주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함께 새벽길을 번개같이 달려갔을 때에도 그는 침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요한 20,7)는 세심한 관찰력.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요한 20,12)며 그 놀라운 광경을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으니 그러합니다. 마침내 그물에 걸려든 고기가 큰지 작은지까지 일일이 알려 주고 모두 “백쉰세 마리”(요한 21,11)라며 고기의 수까지 기록한 걸 보면 세심하고 주도면밀한 성격에 탄복하게 됩니다. 우리는 치밀했던 그의 성격 덕에 유다의 배신이 야밤에 일어났으며 빌라도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요한 19,16)고 명령한 시간이 “낮 열두 시쯤”(요한 19,14)이라는 것까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무엇이 그를 이렇게 변화시켰던 것인지, 요한의 돼먹지 않았던 성정이 어떻게 ‘사랑’에 젖어 사랑만 말하는 사랑의 사도로 바뀌었는지 캐게 됩니다.

 

성경은 주님께 사랑받은 요한의 참 모습을 은밀하게 일깨웁니다

 

요한의 형 야고보는 사도들 가운데 첫 순교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순교는 분명히 가장 영예로운 죽음입니다. 그렇지만 살아남은 가족의 마음은 고통의 수렁일 것 또한 분명합니다. 괴롭고 슬픈 마음에는 어떤 위로로도 지울 수 없는 시퍼런 멍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형님을 잃은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엄청난 카운터펀치를 맞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순교하기 직전,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일입니다. 그 소식은 온 교회에 기쁨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되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성경은 그 사실을 헤로데 임금이 “먼저 요한의 형 야고보를 칼로 쳐 죽이게 하고서, 유다인들이 그 일로 좋아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아들이게 하였다”(사도 12,2-3)고 전합니다. 그리고 사형 집행일 바로 전날 밤,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를 감옥에서 탈출시켰다고 말합니다. 생각해 봅니다. 똑같은 제자인데 왜 야고보 형님은 죽도록 내버려두셨는지? 왜, 형님 야고보에게는 천사를 보내 주지 않으셨는지?

 

요한은 야고보 형만 죽음에 처하게 팽개치신 주님이 야속했을 것입니다. 어째서 형과 베드로를 차별하시는지 따지고, 무엇 때문에 형님 야고보에게는 기적을 베풀어 주지 않으셨는지 덤비듯 항의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주님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예전의 요한이라면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견딜 수 없어 목이 터져라 소리치며, 따발총처럼 항의의 말을 쏘아 댔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저 같으면 공평하지 않은 주님의 처사가 용인되지 않아, 홱 돌아섰을지도 모를 일이다 싶습니다. 하여 감히 그때가 요한에게는 매우 서럽고 혹독한 시련이었으리라 짐작하게 됩니다. 깊고 혼돈스러우며 외롭고 괴로운 통고의 시간이었으리라 헤아립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의 반응을 한마디도 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어두컴컴한 고통의 시간을 견디었을 요한의 모습이 감지되어 제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 눈에 사랑의 콩깍지가 씌었습니다. 자신의 아픔을 담담히 수용하기 위해 두 주먹 불끈 쥐고 버티고 선 요한의 안쓰러운 자태가 어른거렸습니다. 눈앞의 고통에 굴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신앙인의 기개가 눈에 띄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성모님을 모시고 지낸 시간도 요한에게 매우 친절한 사랑의 교과서였으리라 짐작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 잉태와 자라남을 고통 속에 간직하신 어머니의 일생을 보며, 하느님 때문에 겪는 고난을 마다하지 않는 순명을 배우고, 고통을 넘어선 찬란한 사랑의 모습을 익혔으리라 싶었습니다. 복음서가 앞다퉈 전하는 베드로 사도의 배신 장면을 요한이 유일하게 목격했지만 구구절절 묘사하지 않는 점에서도 그의 변화된 삶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주님께 사랑받은 요한의 참 모습을 은밀하게 일깨웁니다. 한참 모자라고 덜된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들려줍니다. 성질머리 더럽고 성급했던 요한을 사랑의 일인자로 변화시키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순간마다 한 발짝씩 사랑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미성숙한 요한을 택하여 ‘새로이’ 빚으신 당신에게 오늘의 나를 온전히 맡기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의 허물, 비좁고 왜소한 성격까지 꼼꼼히 살펴 당신의 도구로 업그레이드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이 교우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은혜의 최고봉에 오른 사랑의 모범을 만납니다. 사랑의 완성자로 빚어내신 주님의 솜씨를 봅니다. 더 사랑받기만 원하는 우리, 누구보다 더 인정받기만 좋아하는 우리, 내 마음에 차지 않으면 당장 하늘에서 불을 내려 혼쭐을 내주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병든 속내까지 고쳐 새롭게 해 주시리라 의심치 않습니다. 때론 매섭고 혹독하다 싶은 주님의 손길이 꼭 우리 삶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채워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더 ‘큰 상’을 주시려는 그분의 계획이며 작업이니 찬미 드립니다. 더 철저히 간섭하고 참견해 달라고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 품에 한껏 기대어 버르장머리 없이 응석을 부리며 살고 싶은 오늘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3월호(통권 444호)]

 

 


 

 

[성경의 숨은 이야기] 사제는 복의 인증서입니다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부활을 축하합니다. 부활 인사를 올리려니, 베드로 사도의 기쁨이 마음에 차오릅니다. “세례는 몸에서 더러운 때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느님께 서약을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이루어지는 것”(공동번역 1베드 3,21)이라는 말을 새기게 됩니다. 우리 모두에게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은혜가 임하셨을 줄 믿습니다.

 

저희 본당에서는 전 신자 성경 통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도 매일 하루치를 읽으며 읽기 표에 표시를 합니다. 한 칸 한 칸 채워 나가는 일이 꽤 즐겁네요. 그런데 제가 성경을 읽는 자세가 좀 엉망입니다. 서서 읽다가 앉아서 읽다가 하물며 침대에 엎드려 읽는 적도 많습니다. 잠깐 틈이 나거나 눈을 붙일 요량일 때도 얼른 성경을 챙기는 건 분명 ‘이쁜 짓’이지만, 이리저리 뒹굴거리는 모양새는 솔직히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편한 자세로 성경을 읽어 온 덕에 성경 읽기는 저에게 가장 편하고 쉽고 친근한 일로 자리 잡았으니, 주님께서도 귀엽게 보아 주시리라 여깁니다.

 

그런데 어제는 엘리 제사장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뜨끔했습니다. 그의 생활 기록에서 유난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1사무 1,9)거나 “잠자리에 누워 자고 있었다”(1사무 3,2)는 구절이 눈을 찔렀습니다. 마침내 엘리 제사장이 “대문 옆 의자에서 뒤로 넘어지더니 목이 부러져 죽었다”(1사무 4,18)는 비참한 상황을 전하면서도 굳이 ‘몸까지 무거웠던 것’이라고 설명하는 게 꼭 ‘살 좀 빼라는 눈총’ 같았습니다. 꼴사나운 제 모습이 꼬집힌 느낌, 여태 알싸합니다.

 

주님께서는 왜 그렇게 ‘말 바꾸기’를 하신 걸까요?

 

창세기는 처음으로 야훼의 이름을 불러 예배한 인물이 아담의 삼대 손, 에노스였다고 전합니다(공동번역 창세 4,26 참조). 그러나 첫 사제는 아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너의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너에게 가까이 오게 하여, 사제로서 나를 섬기게 하여라”(탈출 28,1)고 하시며 아론과 그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사제로 세우십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르신 다양하고 복잡하고 세밀한 지령들은 우리에게 그분의 제사장 직분이 얼마나 귀하고 영광스러운지를 가늠하도록 합니다. 이 영예로운 사제의 복을 몽땅 허사로 만든 인물이 뚱뚱보 엘리 사제였다니, 쯧쯧 혀를 차게 됩니다.

 

“나는 일찍이 네 집안과 네 조상의 집안에게 내 앞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그러나 이제 결코 그렇게 하지 않겠다”(1사무 2,30)는 주님의 선포를 들으며 우리는 한 번 약속하면 절대로 변치 않으시는 주님의 뜻을 ‘내가’ 얼마든지 흔들어 헐어 버릴 수 있다고 깨닫게 되는데요. 얼핏 읽으면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시킨 듯 보입니다. 때문에 하느님께서 이렇게 마음을 바꿔 버린 일이 유감스럽습니다. 절대 진리이신 하느님께서 오락가락하시다니, ‘어찌 이럴 수 있나’ 싶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이 아니라 서운하다고 삐쭉대고 뾰로통하시니, ‘이를 어쩔꼬’ 싶습니다. 마침내 우리에게 벌을 주시기 위해서 눈꼬리를 치켜 올리고 갖은 허물을 찾는 분, 심술궂은 분으로 상상하게 됩니다.

 

도대체 주님께서는 왜 그렇게 ‘말 바꾸기’를 하신 걸까요? 엘리 제사장의 잘못은 아들들이 패악한 행위를 저질렀을 때 똑 부러지게, 따끔하게, 철저하게 훈육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간 사실 ‘뿐’입니다. 이 단순한 게으름을 주님께서는 “자기 아들들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책망하지 않은 것”(1사무 3,13)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이 바로 “나보다 네 자식들을 소중하게 여긴 것”(1사무 2,29)이라 단죄하십니다.

 

사실 엘리 제사장은 어린 사무엘을 키워낸 존경받을 만한 인물입니다. 사무엘에게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9)는 기막힌 현답을 가르친 지혜로운 스승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결코 뭘 몰라서 자식들을 방종하게 키운 것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주님의 뜻에 따라 자식을 믿음의 자녀로 양육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는 얘깁니다. 더욱이 그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에게 큰 복을 전해 준 성실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자기 아들들에게는 ‘두 손 두 발’을 들고 말았을까요?

 

이 딱한 상황을 요즘 우리에게 대입해 봅니다. 엘리 사제도 마음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짚어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되, 세상의 힘도 함께 숭배하도록 가르치는 일은 솔직히 괜찮은 장사 같습니다. 이를테면 하느님의 복도 챙기고 세상 득도 보는 ‘물 좋고 정자 좋은’ 탁월한 선택인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조금씩 눈에 보이는 세상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질 때, 주님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온갖 복이 깡그리 사라질까 염려하십니다. 당신의 강복 말씀이 모두 귀동냥에 그칠 것이라 경고하십니다. 결국 엘리 제사장처럼 후손의 축복을 깨부수는 조상이 될까 조바심을 내십니다.

 

주님께서는 부모가 ‘오냐오냐’하며 자식을 방치하는 일을 탓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어버이들에게 당신의 자녀를 맡기셨습니다. 그분을 제대로 알고 깨달아 섬기도록 가르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1사무 3,19) 계시며 강복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자녀의 신앙 교육이 정말 쉽지 않다는 사실을 하느님께서 더 먼저 알고 계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의 길을 따라 걷지 않고, 잇속에만 치우쳐 뇌물을 받고는 판결을 그르치게 내렸다”(1사무 8,3)는 말을 들었던 사무엘의 아들만 보더라도, 온전한 믿음이 자랑이었던 히즈키야 임금의 아들이 하느님께서 도무지 용서하실 마음이 없으실 만큼 악했던 므나쎄 임금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하느님께서는 그 어려움을 충분히 꿰고 계실 터입니다(2열왕 24,3-4 참조).

 

엘리 사제는 자신이 자자손손 이어질 사제 가문의 영예를 송두리째 잃게 하는 조상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너의 기운과 네 조상 집안의 기운을 꺾으리니, 네 집안에는 오래 사는 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 내가 너의 가족 가운데 내 제단에서 잘라 내지 않을 자마저도, 눈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슬퍼지게 하겠다”(1사무 2,31-33)는 저주의 말씀에도 유구무언이라 “그분은 주님이시니, 당신 보시기에 좋으실대로 하시겠지”(1사무 3,18)라며 자포자기하듯 살아가고 있다면, 바로 그날 ‘염소 파트’에 줄을 선 예행 연습이라 생각됩니다.

 

솔직히 다 자란 아들네의 불량함은 그들의 몫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엘리 사제의 삶을 통해 부모가 ‘오냐오냐’하며 자녀의 삶을 방치하는 일을 직무유기로 보신다는 사실을 밝히신 것이라 믿습니다. 한마디로 ‘자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부모님의 처지는 도무지 ‘정상 참작’이 되지 않는다는 선포라 믿습니다. 자녀의 신앙생활에 ‘그만하면 됐다’는 방임이나,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걸 알면서도 ‘세례 받았으니 됐다’며 신앙생활의 면제권을 남발하는 일은 주님께 용납될 수 없는 죄임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기분 좋은 부활 인사로 시작한 글이 따가워졌습니다. 사과드리는 마음으로 엘리 사제의 이야기에 담긴 ‘대박’ 비밀 하나를 선물해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에 한참이나 모자랐던 엘리 사제를 통해서도 당신의 복을 흠뻑 내려 주셨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눈물의 기도를 올렸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이 드린 청을 들어 주실 것”(1사무 1,17)이라고 장담한 엘리 사제의 말을 곧이곧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더욱이 덜떨어진 엘리 사제의 인품을 개의치 않으시고 사무엘을 맡아 키우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야말로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이나 어떤 경우의 사제를 막론하고 함께 일하신다는 보증이라 믿습니다. 잘난 것 없어 보이는 사제일지라도 주님께서는 그를 통해 복을 내리시며 기뻐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때문에 저는 오늘 주님께서 세우신 사제 모두가 하느님께서 신자들에게 주신 가장 큰 복의 도구이며 기쁜 선물임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한나처럼 사제를 향해 절대적 신뢰를 보내는 신자가 많아져 사제가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나처럼 ‘해마다’ 이어지는 질긴 헌신으로 사제를 감동시키는 분이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하여 “주님께서 … 그대에게 갚아 주시기 바라오”(1사무 2,20)라는 축언을 듣는 분이 늘어나면 너무너무 좋겠습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는 신자들이 한나처럼 서로 존중하고 존경하는 풍토를 조성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생각을 … 그리스도께 순종”(2코린 10,5)시켜서 그분께 얻은 귀한 ‘복의 인증서’를 한껏 사용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4월호(통권 445호)]

 

 


 

 

[성경의 숨은 이야기] ‘엄친아’, 다니엘이 부러우시지요?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봄 내내 정치판이 들썩였습니다. 임명설 · 해임설 · 낙마설 · 퇴임설 · 사퇴설…. 자고 나면 뒤집어지는 갖가지 소식을 접하며 빠르고 잽싼 현대의 미디어에서 과연 ‘뉴스’라는 매체의 유효 기간이 얼마일지 궁금했습니다. 권력이 권위를 잃고 고작 세간의 가십으로 전락한 현실이 딱했습니다. 부디 우리 정치인들이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는 권위란 있을 수 없다’는 진리를 자각하여, 자신이 ‘하느님의 일꾼’이며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라는 점을 잊지 않기를 기도드렸습니다(로마 13,1-7 참조). 아울러 우리 교우들이 진심으로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1티모 2,2)하는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기를 간절히 청했습니다.

 

사실 권력이란 보통 사람들에게는 생뚱맞은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저 생각으로 어림하고 마음으로 짐작하며 ‘그러려니’ 하고 여기는 뜬구름 같은 소재일 터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부모들의 기도에는 자녀가 높은 자리에 올라 출세하기를 바라는 ‘청원 기도’가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온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귀감이 되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힘껏 후원하시니, 더욱 분발하기 바랍니다. 꼭 응답을 받아 이 땅에 하느님의 뜻을 펼치는 참된 모범 정치인이 많아지기를 소원합니다.

 

임금의 벗, 총리 대신으로 임명된 다니엘

 

다니엘서는 기원전 605년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소년 다니엘이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게 뽑혀 왕궁에서 교육받게 된 사실을 전하며 시작합니다. 다니엘의 총명함을 성경의 여러 곳에서 감지할 수 있는데요. 그의 대단한 면모는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 의해 총리로 발탁된 것에 이어 그 아들 벨사차르 임금 시대에도 총리 대신으로 임명되었다는 점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다니 5,29 참조).

 

뿐만 아니라 바빌론을 멸망시킨 칼데아의 임금 다리우스에게 재상으로 뽑히고(다니 6,3 참조)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에게는 “임금의 벗”(다니 14,2)으로 존경을 받았으니, 정말 대단하다 싶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모시던 왕조가 무너진 후에도 연이어 새 정복자의 신임을 얻어 나랏일을 계속 맡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지경입니다. 가히 다니엘의 특출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임금의 신임을 평생 얻는 일도 보통이 아닐진대 나라가 망하고 왕조가 바뀌는 상황에서도 그 자리를 줄기차게 고수할 수 있었으니 이런 천복(天福)이 어디에 있을까 싶습니다.

 

성경은 바빌론의 포로로 잡혀갔을 때 다니엘의 나이조차 알려 주지 않습니다. 다만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다니 1,3) 중에서 뽑힌 인물이었다는 설명에 기대어 그가 유다의 귀족 출신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당시에 다니엘과 그 친구들에게 내려진 임금의 ‘선처’는 포로에게 매우 큰 특권이었습니다. 때문에 아주 특별하고 월등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나라를 잃은 포로 신세로 적국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도록 훈련된 처지는 비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상황에서 드러난 다니엘과 세 친구의 믿음이 더욱 돋보입니다. 나라는 망해 사라지고 이국땅의 포로가 된 현실에서, 변치 않는 믿음으로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고 지내는 것이 쉬울 리가 만무한 까닭입니다. 그들이 자신의 믿음을 모두에게 밝히며 지낸 점이 말할 수 없이 귀합니다. 그들이 늘 양심에 따라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은 용기에 찬탄하게 됩니다.

 

임금도 사자도 불도 결코 다니엘을 해칠 수 없었다

 

주일학교 선생님에게서 다니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벌렁댔던 기억이 여태 뚜렷합니다. 주위 사람들의 모함으로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져야 했던 상황이 어찌나 분하고 속상했던지 오래오래 마음에 응어리졌습니다. 하지만 남들에 비해 빼어나고 똑똑하다는 사실만으로 시기와 질투를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저의 순수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너무’ 반듯하거나 ‘전혀 흠이 없다’는 것이 왕따의 조건일 수 있다는 걸 눈치채고 말았으니까요.

 

마침내 다니엘처럼 너무 똑똑하고 확실하고 바람직하지 못해서, 친구가 많은 제 처지를 아주 다행스럽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물론 하느님만 원했던 믿음의 사람이라면 으레 세상의 비판쯤이야 너끈히 견디는 덕목을 갖추는 것이 백번 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덕에 성인이 되었으니 불만이 없을 것이다 싶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다니엘이 겪은 사건이 얼마나 심각한 영적 전쟁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서른 날 동안 임금님 말고 다른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를 올리는 자는 누구든지 사자 굴에 던져야 한다”(다니 6,8)는 칙령 앞에서 고심했을 다니엘의 심중이 짚어졌습니다. 성인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며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할 자유 의지를 가졌다는 사실이 마음을 깨웠습니다.

 

다니엘은 역겹고 치사하고 유치한 권력의 아귀다툼에 맞서 수모를 당하며 입술이 부르트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고투를 겪었을 것입니다. 그날 저는 비로소 다니엘의 처지에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나라면 어떻게 할지 물어 보았습니다. 아마도 딱 30일 동안만 조용히 ‘하라는 대로’ 시늉할 궁리를 했을 것 같았습니다. 매일 세 번씩 올리던 기도를 슬쩍 한 번으로 줄이는 꼼수를 계산했을 것도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이시니 충분히 헤아려 이해해 주시리라는 전제로 ‘믿음’을 내세우고 ‘자비’를 흥정하며 30일 기도를 생략했을 것만 같았습니다.

 

다니엘에게도 얼마든지 핑계를 대고 타협할 여지가 충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모든 사안을 버리고 예전과 똑같이 하느님을 향해 감사의 기도를 올리기로 했던 그 순간, 다니엘의 영혼이 순교를 작정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이구나! 이것이 신앙생활이구나!’ 홀로 탄복하며 순수한 영혼의 찬란함에 마음이 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이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며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다니엘은 모든 일에 탁월했습니다. 분명 하느님의 보호와 강복의 결과입니다. 임금도 사자도 불도 다니엘을 해칠 수 없었던 뚜렷한 이유는 특별한 은총의 결과입니다. 하느님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을 세상의 무엇으로도 훼방할 수 없다는 뚜렷한 증거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삶이 얼마나 월등한지 온 세상을 일깨우는 표지로 삼으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 다니엘이 하느님께 전혀 부끄럽지 않고 정의롭게 살았어도 회개하며 금식했던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민족을 위해 기도했다는 점에 유념합니다. 다니엘은 결코 자신의 호의호식이나 권세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자기 민족의 죄를 밝히고 하느님의 자비에만 의지하는 마음을 토로할 수 있었을 터입니다(다니 9장 참조). 소소한 자기 삶의 회개를 넘어 하느님 백성의 대표자가 되어 기도할 수 있었을 터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당신 자신을 생각하시어” 자신의 기도를 들어 달라고 청한 것이 틀림없습니다(다니 9,17-19 참조). 이 당당한 믿음이 하느님을 감동시킨 것이라 헤아립니다.

 

어린 다니엘이 초지일관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의 신앙 교육 덕분이라 짐작합니다. 부모의 야무진 가르침이야말로 다니엘을 평생 지키며 이끌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루 세 번씩, 꼭 예루살렘을 향해 무릎을 꿇고 경배드렸던 질긴 믿음을 지키게 한 힘이라 믿어집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 다니엘만큼 높은 자리에 올라 선정을 펼치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의 기쁨일 줄 믿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의 가르침이 여리고 무딘통에 우리 자녀들이 덩달아 들쭉날쭉한 믿음으로 오락가락하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때문에 하느님을 모르는 세상의 리더가 되는 일은 고사하고, 세상 기분에 맞추느라 애를 쓰고 지내니 속이 끓습니다. 다니엘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보시기에 흠이 없는 삶이야말로 세상에서도 도무지 책잡힐 것 없이 완벽하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분의 명령대로 제대로 살아 낸다면 세상은 기필코 그의 삶을 통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다니 3,95)라며 하느님을 칭송할 것이라고 다니엘서는 일러 줍니다. 하느님의 것만 추구하는 우리를 보면서 “누구나 다니엘의 하느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해야 한다”(다니 6,27)고 덩달아 증언할 것이라고 일깨웁니다. 이 멋진 꿈을 향한 부모들의 기도가 더욱 열렬해지고 신앙 교육이 훨씬 탄탄해질 때, 주님의 자녀들이 모두 세상이 부러워하고 샘을 내는 ‘엄친아’로 소문날 것입니다. 부디 그렇게 되시길….

  

[성서와 함께, 2013년 5월호(통권 446호)]

 

 


 

 

[성경의 숨은 이야기] 착각은 자유가 아닙니다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세상이 소란합니다. 세상에서 “마음이 산란했다”고 하시던 주님의 눈치를 살피게 됩니다. 주님께서 살아 내신 고달픈 삶을 위로해 드리고 싶은데, 왜 이 모양인가 싶어 죄송할 뿐입니다. 그저 주님의 기쁨이 우리 덕에 훌쩍 자라나는 예수 성심 성월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을 위한 방송을 준비하면서 병든 세상의 거친 호흡을 듣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꿈은 창세 이래에 변한 적이 없으며 늘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마음 놓고”(1열왕 5,5) 살아가기를 열망한다고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그리스도인마저 세상의 성공 요법에 세뇌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를 지어도 하느님의 진노를 피할 궁리만 할 뿐, 악과 죄의 음산한 그늘에서 빠져나오려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야고 1,14)이라는 말씀이 마음을 꼬집었습니다. 세상의 성공 요법이 그야말로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의 행위이며 언어라는 것을 어찌 일깨울지 아득했습니다.

 

‘주님의 궤’가 도착했다는 사실에 겁에 질린 필리스티아 군인들

 

이스라엘의 마지막 판관 엘리 제사장 시절,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던 이스라엘군은 아주 기발한 발상을 합니다. 전쟁터에 주님의 ‘계약의 궤’를 모시고 출정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오시어 원수들 손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도록 할 셈이니, 일면 대단한 믿음의 모습 같습니다. 그날 그들이 ‘땅이 뒤흔들리도록 큰 함성’으로 환호했다니 그분의 능력을 참으로 믿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대학살을 당하였고 ‘하느님의 궤’까지 약탈당하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1사무 4장 참조). 기가 찬 일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께서 주님의 궤를 팽개치듯, 이방인의 손에 농락당하게 하신 일이 믿기지 않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그 때문일까요? 성경은 그날 벌어졌던 일을 제법 소상하게 알려 줍니다.

 

그날, 이스라엘 진영에 ‘주님의 궤’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필리스티아 군인들이 겁에 질려 두려움에 떨었던 사실을 전합니다. “우리는 망했다”고 “누가 저 강력한 신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겠는가?”라는 탄식을 들려 줍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이스라엘의 종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이를 악물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우기로 맹세하여 대승을 거두었다고 밝힙니다. 그날 필리스티아인들은 승리한 기쁨에 더해 적국의 신 ‘주님의 궤’까지 차지했으니 엄청 고무되었을 것입니다. ‘적국의 신’을 빼앗았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워 모두 흥겨워하며 ‘다곤’의 강한 힘을 찬미했을 것입니다. 밤새 축제를 벌였을 것도 같습니다. 그날 다곤의 신전에 ‘주님의 궤’를 봉헌하면서 느꼈을 기분도 알 듯합니다. 그러고 보면 그들이 이방 신이라 여겼던 ‘주님의 궤’를 공손히 다루어 다곤의 신전에 고이고이 모신 점이 갸륵합니다. 물론 적국의 신도 잘만 모시면 ‘덕을 볼 것’이라는 심산이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다곤의 신상 곁에 주님의 궤를 안치하며 사이좋은 ‘동무’가 되어 더 많이 강복해 달라고 빌었으리라 어림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튿날에 변고가 발생합니다. “다곤이 땅에 얼굴을 박은 채 주님의 궤 앞에 쓰러져”(1사무 5,3) 있는 해괴한 일이 벌어집니다. 연이어 다곤의 몸통만 남고 머리와 두 손이 잘려 문지방 위에 널부러지는 사고가 잇따릅니다. 다곤의 신전이 있던 아스돗인들의 몸에 종기가 나는 괴이한 현상이 생깁니다. 보다 못해 얼른 주님의 궤를 갓으로 옮겼더니 아뿔싸, 갓의 주민들마저 종기를 앓아 드러눕습니다. 괴이합니다. 성경은 “어찌하여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 옮겨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하는가?”(1사무 5,10)라는 백성의 아우성이 하늘까지 올라갔다는 기록에 덧붙여, “주님의 손이 아스돗인들을 짓누르시어 망하게 하셨다”(1사무 5,6)고 표현하며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짐작하도록 합니다.

 

백성의 마음이 꺾여 “전쟁에서 이기면 뭐하노?”라고 탄식하는 모습이 선합니다. 그리 생각하니 아무래도 하느님께서 과하다 싶습니다. 만민의 주님이신데 그리 혹독하게 구실 것이 뭔가 싶습니다. ‘좋은 게 좋다’는 것을 왜 모르시는지, 당신을 모르는 이방인의 입장을 감안하지 않으시는 옹졸함이 야속합니다. 하느님이시니 다곤의 신전에서도 얼마든지 ‘더 좋은 수’를 쓰실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아쉽습니다. 애당초 전쟁터에 주님의 궤를 옮겨가지 못하도록 조처하셨더라면 나았을 법하고, 주님의 궤를 앞세우며 승리를 확신한 이스라엘의 믿음을 보아서 이기게 했더라면 훨씬 매무새가 무난했을 것이다 싶습니다. 결국 필리스티아의 힘없는 민초까지 싸잡아 고통을 당하게 하시다니, 남의 일이라고 모른 척하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이 신의 지킴이를 자처하는 모양새

 

그런데 필리스티아인들의 자세도 만만치 않습니다. 회의를 열고 의견을 수렴하여 묘수를 세웁니다. 다곤 신의 사제들과 점쟁이들에게 이 끔찍한 일의 연유를 알아 내고 그들이 내린 처방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입니다. 아마도 그날 필리스티아의 대장간이 개업 이래로 가장 분주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느닷없이 “금으로 종기 다섯 개를 만들고 쥐 다섯 마리를 만들어”(1사무 6,4) 내느라고 진땀깨나 흘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드디어 점쟁이들의 계략대로 젖먹이 새끼를 뗀 어미 소들에게 ‘주님의 궤’가 담긴 수레를 끌도록 했을 때, 어미 소들이 울며불며 벳 세메스로 곧장 나아가는 걸 보면서 모두 탄성을 올렸을 것입니다(1사무 6,8-12 참조). ‘참으로 용한’ 족집게 처방에 너도나도 감탄했을 것입니다. 꼬박 일곱 달 동안이나 이어지던 몸서리치는 재난에 마침표를 찍어 준 그들의 공로는 자자손손 대를 이은 가문의 영광이었을 듯도 합니다.

 

그런데 의문이 솟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궤’로 인해 다곤의 신상이 무참히 부서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 현장은 다곤에 견줄 수 없는 하느님의 권능을 알아차리도록 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다곤 신상이 “은과 금 사람의 손이 만들어 낸 것”(시편 135,15)임을 분명히 깨닫게 했을 것입니다. ‘주님만이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부인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곤을 섬기는 일에서 요지부동이니, 정말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다시 그날의 상황을 그려봅니다.

 

그날 아침 신전에 들어서서 기겁하는 모습이 상상되고 허겁지겁 손상된 다곤 신상을 말끔히 치우는 모습을 봅니다. 어서 신상을 원상 복구하려고 동분서주하는 얼굴들, 새 신상을 구하려고 두 발에 땀이 나도록 헤매는 모습도 떠오릅니다. 민망한 사건이 소문나지 않도록 눈 단속 입 단속에 애쓰는 모습도 생각납니다. 어쩌면 그 추한 꼴을 숨기려고 신전 앞에 ‘내부 장식으로 쉽니다’는 팻말을 큼지막하게 내걸었을 것도 같습니다.

 

이쯤에서 생각이 바뀝니다. 함께 모여 궁리한 결과가 고작 쓰러져 너부러진 신에 빌붙어 먹고 살던 다곤의 사제와 점쟁이들에게 비방을 물었다니 딱합니다. 그 ‘처방’에 열심히 따르는 행태가 초라합니다. 금으로 종기 다섯 개와 쥐 다섯 마리를 만들어 치성과 정성을 다하는 꼴이 애처롭습니다. 한술 더 떠서 다곤의 신전에 드나드는 이들에게 다곤의 머리와 두 손이 널려 있던 문지방만은 밟지 못하도록 규칙을 정하여 “오늘날까지도”(1사무 6,18) 준엄하게 지키고 있다니 어이없습니다. 되려 인간이 신의 지킴이를 자처하는 모양새를 보며, 이렇게 빤한 엉터리 지론으로도 얼마든지 인간의 지성을 마비시키고 농락하는 사탄의 계략을 만납니다.

 

주님께서는 그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통해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나는 처음이며 나는 마지막이다. 나 말고 다른 신은 없다”(이사 44,6)는 진리를 선포하신 줄 믿습니다. 교회가 온 세상으로부터 “과연 당신에게만 하느님이 계십니다. … 다른 신이 없습니다”(이사 45,14)는 고백을 듣기를 원하신 것이라 믿습니다. 때문에 세상이 만든 신들과 결코 동무가 될 수 없다는 걸 확실히 밝히신 것이라 믿습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세상 관념에 끝까지 너그러울 수 없다는 차가운 경고이며, 당신 자녀들이 점쟁이도 찾고 부적도 챙기는 못난 짓거리를 당장에 ‘부수어 버리고 싶다’는 일깨움으로 듣습니다.

 

예수 성심 성월, 우리는 예수님의 심장을 둘러싼 가시를 봅니다. 꼭 그분 가슴에서 가시를 뽑아 드리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또, 다시, 거듭, 좋은 게 좋은 줄로 ‘착각’합니다. 주님 심장에 가시를 더 깊이 꽂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6월호(통권 447호)]

 

 


 

 

[성경의 숨은 이야기] 주님을 속이려 들다니, 뭔 배짱인가요?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초대 교회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전해 줍니다. 아름다운 교회의 밑거름이 신자들의 아낌없는 희생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늘 마음 한구석이 짠합니다. 사랑과 헌신과 봉사의 삶을 통한 그들의 굳센 믿음이 놀랍기만 합니다. 성경은 초대 교회의 공동체 생활상을 제법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세상이 꿈꾸는 이상향이 이 땅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싶은데요. 예수님을 진짜로 사랑하기에 온 힘을 다해 교회를 아꼈던 교우들과 함께한 초대 교회 사도들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는 초대 교회의 신자 부부입니다. 재산을 팔아 교회에 헌납할 계획을 세울 만큼 신앙이 돈독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봉헌금을 바치려던 때, 사도들 앞에서 즉사하는 비극을 겪습니다(사도 5장 참조). 쪼들리는 재정 형편에 재산을 헌납하는 교우는 큰 은인일 터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정반대로 응대하신 셈입니다.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인 것”(사도 5,4)이라며 그 자리에서 목숨을 앗아가십니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의 검은 속셈

 

초대 교회의 살림살이가 여유롭지 않았다는 것은 교회의 도움을 받던 과부들이 홀대를 받아 불평을 털어놓은 데에서도 드러납니다. 하지만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사도 4,32)하여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사도 4,34)는 기적 같은 공동체를 일구었습니다. 그리 살필 때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가 교회를 위해 재산을 헌납하고자 한 마음은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열악한 교우들의 처지가 참으로 가슴 아파 보탬이 되려 한 마음도 진짜였을 것입니다. 주님 사랑에 비하면 ‘무엇도 귀하지 않고 아깝지 않다’는 생각에 따른 결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뒷간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ʼ는 속담처럼 스스로 다짐하고 약속했던 마음이 눅눅하고 퀴퀴하게 변질되었습니다.

 

‘왜?’ ‘무슨 이유로?’라는 생각으로 궁금해 안달하는 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경은 시시콜콜한 그들의 변명을 들려주지 않습니다. 다만 초대 교회에서 ‘땅이나 집’을 팔아 봉헌한 사람 중에는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요셉”(사도 4,36)이 포함된 사실을 밝힙니다. 아울러 바르나바가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이라는 교회의 평판을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이쯤에서 ‘반짝’ 하고 뭔가 짚입니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의 검은 속셈을 엿보게 됩니다. 그 부부가 봉헌을 결심하게 된 빌미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교우들에게서 칭송과 존경을 받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바르나바가 교우들에게서 존경받고 우대받는 일을 샘냈습니다.

 

결국 바르나바처럼 대우를 받기 위해 그를 흉내냈을 뿐이라는 진단이 가능합니다. 어쩌면 바르나바의 봉헌금보다 액수가 컸던 것 같기도 한데요. 딱 바르나바만큼만 헌금하면 충분히 존경받고 인정받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렸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에서 우러나온 행동이 아니었으니 생각할수록 아까웠을 것입니다. 잔꾀를 부릴 궁리를 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판 값의 일부를 떼어 놓고 나머지만”(사도 5,2) 바치기로 작정하면서 부부는 ‘하이파이브’를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핵심은 주님께서 그들의 ‘변심’을 못 견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 그런 꼼수가 통할 리가 만무하다는 점입니다.

 

돈의 유혹에 휩쓸려 하느님을 배신하고 거짓말까지 한 잘못

 

그러고 보니 매사 우유부단한 베드로 사도가 그날따라 날카로운 질문을 날리는 모습이 의외입니다. 단호하게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 성령을 속이고 땅값의 일부를 떼어 놓았소?”(사도 5,3) 하고 추궁하는 모습이 어색합니다. 까칠하게 “그대들이 땅을 이만큼 받고 팔았소?” 하고 취조하듯 따지는 일도 평소의 베드로 모습이 아닌 듯 보입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날 베드로 사도의 입을 빌려 판결을 내리셨다고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다시 그날의 현장으로 돌아가 봅니다.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기분 좋게’ 교회 모임에 갔을 사피라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두리번 대며 자신을 ‘알아 주는 시선’을 신경 썼을 것도 같고 가벼운 걸음에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을 것도 같습니다. 달라진 자신의 위상을 기대하며 존경받는 위치에 어울리도록 표정 관리에 신경을 썼을 것도 같습니다. 자신의 우월함이 돋보이도록 좀 더 우아하게 걸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의 불행이 더욱 가엾고 처량합니다.

 

그런데 그날, 남편 하나니아스의 목숨을 거두신 주님께서 아내 사피라를 한나절 동안이나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사피라만이라도 진실을 고백하리라 간절히 고대하셨던 주님의 심정을 떠올려 봅니다. “어쩌자고 이런 일을 하려는 생각”(사도 5,4)을 가졌느냐는 나무람 속에서 “잘못했습니다”는 한마디를 고대하셨을 주님의 심정을 만납니다. “이만큼 받고 팔았소?”(사도 5,8)라는 베드로의 물음에 “아닙니다” 하고 솔직히 말했더라면 틀림없이 용서해 주셨으리라 헤아립니다.

 

저는 그들이 재산을 팔아 교회에 봉헌할 것을 의논했을 때, 주님께서 진실로 감격하셨으리라 느낍니다. 때문에 그들의 봉헌에 주님께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로 갚아 주실 계획을 세우셨던 것을 느낍니다. 그들이 돈의 유혹에 휩쓸려 당신을 배신하고 끝내는 거짓말까지 보태는 일을 못견디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깊고 아린 ‘사랑의 배신’에 몸서리를 치신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욕정에 따른 욕심으로 하느님과 적의를 쌓아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의 행태에 매운 판결을 내리시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싶습니다(야고 4장 참조).

 

그들은 믿음이 깊었던 초대 교회의 신자였습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처분했던 것을 볼 때 교회 일에도 적극 나서서 협조했던 인물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과 사랑이 거짓말 때문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삶의 마지막 언어가 ‘거짓말’이 되지 않도록 평소 찬미의 언어에 익숙해지라는 교훈으로 읽습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앞을 가로막고 말리지 않으십니다. 다만 죄를 지은 후의 우리 모습에 주목하십니다. 스스로 죄를 인정하기를 원하십니다. ‘거짓말하지 마라’는 십계명을 수없이 범하는 우리를 위해 ‘솔직하게 고백하기만 하면’ 용서받게 되는 회개의 길까지 마련해 주십니다. 그 사랑 덕분에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이 허락되고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도 좋고 예수님도 좋지만 돈은 더 좋다’는 생각을 염려합니다. 요즈음 교회에 최선의 헌금을 바치는 이들이 드물어 애통합니다. 누군가와 비교해서 ‘그만하면 됐다’고 여기는 야릇한 심리가 안타깝습니다. ‘체면’을 생각하여 마지못해 ‘생색’을 내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진리이신 그분에게는 진심이 아닌 것은 모두, 진정이 아닌 것은 전부 외면당하고 거부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진리의 말씀을 알면서도 우리는 너무나 자주 주님과 한 약속을 저버립니다. 주님만 사랑하겠다는 다짐을 묵살합니다. 온통 ‘더 가질’ 계획에 골몰하여 헌금을 아까워하는 어리석음의 포로로 전락합니다. 마침내 주님을 ‘내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도구로 여기는 만용에 사로잡혀 지냅니다. 진정 두려운 삶의 행태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은 바로 지금, 우리를 심판할 수 있는 두려운 분이십니다. 그날 주님의 성전에 침투하여 맹위를 떨치던 사탄의 어둠은 우리의 허한 성정을 놓치지 않습니다. 주님과 한 약속을 배반하라고 종용하고 거짓말을 하도록 유인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의심의 재를 뿌리고 주님을 위한 선한 계획을 흔들어 댑니다. 이러한 사탄의 갖가지 훼방 작전은 현재 진행형이며 세상 끝날까지 이어질 유혹이자 시험입니다.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쉬게 될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믿음에 대한 분별력을 지녀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내가 갖고자 하는 것을 구별하는 지혜를 지녀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진심으로 교회를 사랑하여 지상에서 사용하는 마지막 언어가 ‘찬미의 언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7월호(통권 448호)]

 

 


 

 

[성경의 숨은 이야기] 이해하고 싶습니다, ‘요아스 임금의 변절’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갈수록 세상이 험해진다고 합니다. 세상의 뉴스는 온갖 재난과 사고를 전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예전에 저의 할머니는 흉한 소식이 들리면 으레 혼잣말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늘 무서운 줄을 알아야제…. 인두겁을 쓰고 어찌 그런 몹쓸 짓을 할 수 있노?” 구구절절 내용을 캐는 손자들에게는 무서운 표정으로 가림막을 치셨습니다. “뭐 좋은 거라고 알라카노? 몰라도 된대이….” 어른이 되니 알고 싶지 않은 일도 있다는 걸, 몰라도 될 일이 수두룩하다는 걸 느낍니다. 그때처럼 할머니가 세상의 흉한 소식을 몽땅 가려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옛날 옛날의 인간사도 특별히 선하고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땅의 첫 사람 카인이 아우 아벨을 죽인 일에서 시작된 흉보(凶報)는, 세기의 살인마 라멕에게 이르면 입이 쩍 벌어지게 합니다. “나는 내 상처 하나에 사람 하나를, 내 생채기 하나에 아이 하나를 죽였다”(창세 4,23). 어찌 인간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수 있는지, 진실로 하느님 곁을 떠나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창세 4,12)가 되는 일이 얼마나 악한지 가늠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 하느님을 모시지 않고 하느님 앞에서 몸을 숨기기에 급급하다면, 바로 그곳이 “에덴의 동쪽 놋 땅”(창세 4,16)이며 죄악의 터전임을 깨닫게 됩니다.

 

요아스 임금의 가엾고 기구한 팔자

 

유다 임금 요아스는 주님께 충실했던 여호사팟 임금의 증손자입니다. 당시에 막강했던 북이스라엘 임금이 외할아버지입니다.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복덩이 아기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겨우 한 살 남짓한 때에 모진 칼바람이 닥칩니다. 유다 임금 여호사팟이 이스라엘 임금 아합 집안과 사돈이 되어 얽히고설킨 사연은 상당히 복잡합니다. 열왕기 사연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워 역대기까지 뒤져야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엘리야 예언자를 벌벌 떨게 한 아합 임금의 아내 ‘이제벨’은 악녀의 대명사로 기억하면서도, 악한 행위로 따질 때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아합의 딸 ‘아탈야’는 별로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호야다 사제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다”(2역대 24,2)고 기록된 요아스 임금, “사악한 여자 아탈야와 그의 아들들이… 주님의 집에 있는 거룩한 것을 모두 바알들을 위하여 써 버렸던 것”(2역대 24,7)을 보수했던 열정적 믿음의 소유자 요아스가 폭군으로 삶을 마감한 사실도 지나쳐 버립니다. 요아스 임금의 족보가 워낙 복잡하게 꼬인 탓인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기억하기 좋은 김씨 이씨 왕조가 아니라 꼬부랑 이름들이 오락가락대는 탓에 더 심드렁해질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면 관계상 이 글을 요아스의 증조부 여호사팟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지 못하는 게 아쉽습니다. 다만 2열왕 8,16-11,16과 2역대 21-24장을 읽으면 요아스 임금의 가엾고 기구한 팔자가 좀 쉬이 이해될 것이라고 팁을 달겠습니다.

 

똘똘한 임금 요아스는 왜 폭군이 되었을까요?

 

성경의 기록에서 가장 의문스러운 점은 그날, 아들 아자르야가 이스라엘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어머니 아탈야의 포악한 행동입니다. 대번에 유다 집안의 왕족을 “다 죽이기 시작하였다”(2열왕 11,1)니 이런 변이 있나 싶습니다. 그 혼란의 와중에 고모 여호세바가 재빠르게 움직여 요아스 왕자를 구출하는 장면은 참으로 스펙터클합니다. 그런데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아기에게 허락된 삶은 ‘죽은 듯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왕족을 몰살하고 기세등등하게 왕위를 차지한 아탈야 할머니와 한 왕궁에서 지내야 했으니, 그 두려움의 무게에 마음이 섬뜩합니다. 시퍼렇게 눈을 뜨고 살아 있는 할머니에게 자기 존재를 들키지 않는 것이 급선무였을 손자의 처지가 풍전등화라 여겨져 애처롭습니다. 할머니의 눈에 띄면 곧장 죽을 터이니 말 그대로 살아도 살았다 할 수 없는 파리 목숨 신세였으니까요.

 

때문에 요아스는 주눅 들어 눈치만 백 단인 아이로 성장했으리라는 짐작이 듭니다. 왕궁이 여염집보다야 훨씬 웅장하고 넓었을 테지만 자그마치 여섯 해 동안 왕궁에 있는 주님의 집에서 유모와 함께 숨어 지내는 일은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었을 것입니다(2역대 22,10-12 참조). 더욱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직성이 풀리는 어린아이였으니까요. 그래도 그게 어디냐고요? 그만하기가 천만다행이라고요? 하늘이 도왔다고요? 물론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다윗과 맺으신 계약 때문에, 또 일찍이 다윗과 그 자손들에게 영원히 등불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2역대 21,7) 다윗의 집안인 유다 왕족을 멸망시키려 하지 않았다고 밝히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요아스를 죽이려던 장본인이 친할머니라는 사실은 너무 끔찍합니다. 정말 하늘이 무섭지 않았는지 묻게 됩니다.

 

요아스 왕자의 창살 없는 감옥살이가 일곱 해 되던 때에 여호야다 사제는 쿠데타를 모의합니다. 유다의 레위인들과 이스라엘 가문의 우두머리들을 예루살렘으로 모아들여 ‘다윗의 자손’인 요아스 왕자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합니다. 드디어 왕위에 오른 요아스의 나이는 겨우 일곱 살, 사리분별도 힘든 아이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고모부 여호야다의 야무진 종교 교육이 요아스로 하여금 똘똘한 임금의 면모를 갖추게 한 것 같아 흐뭇합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영문일까요? “임금들과 함께 다윗 성에”(2역대 24,16) 묻힐 정도로 온 백성의 존경을 받았던 여호야다가 죽자, 요아스 임금은 완전히 딴사람이 됩니다. 목숨을 건져 준 생명의 은인, 혼신을 다한 삶의 스승,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고모부의 은혜를 배신합니다. 여호야다의 아들 즈카르야 사제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전하는 간언에 발끈하여 ‘주님의 집 뜰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명을 내리니까요. 요아스 임금이 어찌 그리 변한 것일까요?

 

요아스 임금처럼 일등이라는 감옥에 갇힌 이 시대의 아이들

 

인간을 건강하고 튼튼하게 성장시키는 근본 시기는 어린 시절입니다. 모든 어린이는 환경에 따라 마음이 자라고 인격이 형성됩니다. 어린 시절을 인생의 보석이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달리 불행했던 요아스의 환경이 원인으로 꼽힙니다. ‘갇힌’ 상태에서 없는 듯이 지내야 했던 감정의 발로라 짚어집니다. 그 감정을 억누르고 지내느라 성격이 옳고 바르게 형성될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아기 적부터 어른들의 감시와 눈총 속에서 성장한 상처를 보게 됩니다. 신앙마저 힘 있는 고모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도구’로 삼지 않았을까 어림하게 됩니다. 이렇게 변절자, 요아스 임금의 처지를 마음 아프게 이해해 봅니다.

 

아이들은 천방지축이어야 마땅합니다. 아이들은 가두어 양육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의 악에서 보호하기 위해 갇히고, 최고가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으로 사육되는 아이들이 염려됩니다. 단지 ‘악한 아탈야’의 눈길에서 감추겠다는 어른들의 발상에 곪은 상처가 어떤 병폐를 낳을지 무섭습니다. 성적이란 사슬에 묶여 일등이란 감옥에 갇힌 아이들의 감성이 세상을 더 험악하게 할지 몰라 걱정됩니다. 지금 우리의 교육 행태가 자기 꿈을 소신껏 펼치지 못하도록 하는, 일평생 남과 비교하며 노심초사하는 못난이를 양산하고 있음을 우려합니다. 마침내 자존감을 잃고 작은 것에 우쭐대고 시시한 것에 기가 죽어 형편없이 살게 될 것만 같아 심히 가엾습니다. 언제부턴가 부모들이 아합의 딸처럼 포악해지기를 마다치 않고 편협함으로 자녀들 안에 심긴 주님의 선물을 빼앗고 죽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진심입니다. 주님의 간곡한 가르침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은 그분 정의와 사랑에 돌을 던지는 패악입니다. 당신 말씀 외의 것을 추구하는 모든 행위는 그분을 향한 ‘변절과 배신’입니다. 요아스 임금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막은 행위가 하느님께 결코 잊지 못할 큰 사건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까마득히 먼 훗날 예수님의 입에서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 쏟아진 무죄한 피의 값이 모두 너희에게 돌아갈 것”(마태 23,35)이라는 말씀이 나올 줄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의 관점에서 벗어나 세상 이론에 솔깃할 때, 그것이 요아스의 변절이라 믿습니다. 요아스를 통해 배운 이 지혜가 우리의 삶에 명약이 되기를 원합니다. 먼저 그분의 나라를 구하고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일이 영혼의 버릇이 되고 삶의 습관이 되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스스럼없는 행위가 하느님께 길이 기억되는 복의 소재로 쓰이기를 소원합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8월호(통권 449호)]

 

 


 

 

[성경의 숨은 이야기] 잽싸게 ‘뒤집어집시다’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세상의 창조 설화를 들려주며 시작되는 성경은 완전히 새로운 하늘과 땅,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묵시 21,10)의 도래를 이야기하며 마감됩니다. 그리고 그 도성의 열두 성문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적혀 있고, 도성 성벽의 열두 초석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진 사실을 전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열두 지파 명단에 에프라임과 단의 이름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보았다고 말하는 사도 요한의 실수가 아니라면 어떤 곡절이 숨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 요한의 착각이나 후대 기록인의 실수로 누락됐을 리가 만무하니, 주님의 뜻을 더듬게 됩니다.

 

에프라임과 므나쎄는 이집트 총리였던 요셉의 아들이었는데도 “너의 두 아들을 내 아들로 삼아야겠다”(창세 48,5)는 할아버지 야곱의 뜻에 따라 삼촌들과 동등한 지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결과적으로 야곱의 아들이 열셋으로 불어나 버렸는데요. 야곱의 기습적 결단에 하느님도 화들짝 놀라셨는지 얼른 야곱의 셋째 아들 레위를 당신의 몫으로 뽑아 가려내십니다(민수 3,9-12 참조). 그 덕에 이스라엘 후손은 계속 열두 지파로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하늘의 예루살렘 성문에는 이스라엘 열세 지파의 이름이 적혀야 마땅할 텐데, 열둘이라는 사실이 의외입니다. 더욱이 맏형 르우벤을 제치고 장자 가문을 계승한 에프라임의 이름은 온데간데없고 더럭 요셉이 올라 있는 점도 묘하고, 단 지파의 이름은 오리무중입니다. 도대체 무슨 영문일까요?

 

어째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요셉의 아들 둘이 들어갔을까?

 

이스라엘 역사에서 에프라임은 늘 이스라엘의 대표로 거명됩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었을 때 유다와 벤야민 지파를 뺀 열 지파의 임금은 에프라임 지파 출신 예로보암이었습니다. 에프라임의 역사가 곧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로 기록된 이유일 터입니다. 때문일까요? 북이스라엘 예언자들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호소는 늘 “에프라임아, 에프라임아”라는 애끓는 부름으로 시작됩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예로보암이 베텔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백성을 현혹한 일을 아파하십니다. “예로보암이 혼자만 지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까지도 죄짓게 한 그 죄 때문에”(1열왕 14,16)라며 내내 애통해하십니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호세 11,8)라시며 “내가 그들에게 나의 가르침을 많이 써 주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낯선 것으로만 여겼다”(호세 8,12)고 하시는 주님,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호세 11,8)며 몸서리치시는 주님의 통곡을 성경은 선연히 기록합니다. 때문일까요? 남북 이스라엘 임금에 대한 평가는 한결같이 “예로보함의 길을 걸었다”(1열왕 15,34)는 것과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다는 것으로 판가름됩니다. 분명 에프라임의 죄는 우상 숭배에서 꼬여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그러면 단 지파에게는 어떤 지울 수 없는 죄가 있었던 것일까요? 야곱의 다섯째 아들 단의 계보를 살피면 매우 독특한 부분이 눈에 띕니다. 우선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하여 처음으로 인구 조사를 했을 때, 단 지파 자손의 수는 ‘62,700명’이었습니다. 이는 1등인 유다 지파(74,600명)보다 적은 2등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40년 후에 행한 두 번째 인구 조사에서도 ‘64,300명’을 기록한 이사카르 지파를 단 100명 차로 누르고 2등 자리를 고수합니다. 당시 노동력의 제공자, 싸움에 나갈 아들이 많다는 것이야말로 가문의 힘이며 자랑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단 지파에 내린 하느님의 복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민수 26,43 참조).

 

또 하나 단 지파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전을 지을 기술자로 유다 지파의 브찰엘과 단 지파의 오홀리압을 지명하셨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영으로, 곧 재능과 총명과 온갖 일솜씨로 채워 주겠다”(탈출 31,3)고 이르신 유다 지파 브찰엘의 영예도 탐나지만, 그를 도와 같이 일할 인물로 뽑힌 오홀리압에게 “마음에 재능을 더해 주어,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만들게 하였다”(탈출 31,6)고 꽝꽝꽝 선포해 주신 일도 무척 부럽습니다. 더 흥미를 끄는 일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으려고 티로 임금 히람에게 “금은과 청동과 철을 다루고, 자홍과 다홍과 자주 색 천을 짜며, 조각도 할 줄 아는 기술자를 한 사람”(2역대 2,6) 청했을 때 “단 출신 여자의 아들로서, 아버지는 티로 사람”(2역대 2,13)인 후람 아비가 천거된 일입니다.

 

이쯤에서 단의 후손들에게는 특별한 예술 감각과 손재주가 있었던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단 지파가 미카의 집을 습격한 사건, 즉 “에폿과 수호신들과 주조 신상”(판관 18,18)을 약탈했던 것도 ‘아는 만큼 보았던’ 단 지파의 예술적 안목에서 저지른 과오가 아닐까 짐작되어 안타깝습니다. 아무튼 단 지파에게는 대대손손 후손이 불어나고 무슨 일에서나 뛰어난 재주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만큼 단 지파의 고장이 늘 우상 이야기에 연루되는 일이 속 터집니다. 결국 여호수아에게서 분배받은 땅마저도 “잃어버리게 되었다”(여호 19,47)는 단 지파의 허망한 말로가 믿기 어렵습니다.

 

에프라임처럼 주님의 애간장을 녹이고, 단의 후손처럼 세상 것에 쏠린 우리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로 태어난 요셉의 아들 ‘에프라임’은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야곱의 아들로 승격되는 복을 얻었습니다. 때문에 에프라임 지파가 하느님의 선물인 권력과 능력을, 땅의 것들을 쟁취하기 위해 소진해 버린 사실이 마음을 찌릅니다. 단 지파가 이집트에서 고되게 노예 생활을 하는 중에도 후손이 크게 번성하는 복을 얻었으며 주님에게서 특별한 탈렌트를 받았는데도, 그 지혜와 솜씨를 우상을 제조하고 섬기는 일로 탕진했다는 사실을 건성건성 지나칠 수 없습니다. 우상과의 악연을 단호히 끊어 낼 노력은 간데없이, 돈이라는 금송아지를 섬기느라고 주님에게서 받은 탈렌트를 오용하는 우리 모습 같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거듭된 호소와 넓은 사랑을 묵살하는 우리 모습이 얼마나 주님의 마음을 후벼 댈지 아득하기만 합니다.

 

호세아는 에프라임이 멸망한 원인을 “에프라임은 뒤집지 않고 구운 부꾸미”(호세 7,8)였다고 표현합니다.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고소하게 구워야 맛이 나는 부꾸미를 뒤집지 않고 굽는다면 한쪽만 새카맣게 탈 것이 뻔합니다. 주님의 뜻에 느릿느릿 대처하는 삶은 어느새 한 면이 시커멓게 타버려 음식 쓰레기가 된다고 참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누구도 하느님과 금송아지를 함께 섬기며 노릇노릇하고 맛깔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경고로 듣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부요와 명예를 지녔더라도, 누구보다 뛰어난 재주를 가졌더라도 우리 삶의 한 면은 시커멓게 타버릴 것이라는 경고라 믿습니다. 에프라임처럼 주님의 애간장을 녹이는 우리를, 단의 후손처럼 세상 것에 쏠려 있는 우리를 향한 경고라 헤아립니다.

 

세상에서 으뜸이던 에프라임의 이름이 천상의 명단에서 제외된 사실은 몹시 두려운 일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십니다. 회개의 선물이 봉헌되기를 고대하십니다. 회개는 스스로 한 결심을 바탕으로 이뤄집니다. 결심의 어원은 ‘잘라버리는 일’이라는 라틴어에 있습니다. 결심이란 필요 없는 것과 본질이 아닌 것을 잘라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잘라내지 않고 ‘달아 놓고’ 이것저것으로 ‘눈가림만 해 놓고’ 또는 ‘잘라져라’는 생각만 한다면 허사입니다. ‘나중에 잘라지겠지’라는 막연한 마음은 결심이 아닙니다. 변하고 새로워지지 않는 신앙은 영적 게으름과 태만의 증거일 뿐입니다.

 

이 세상은 순간의 것에 불과합니다.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스러지며, 땅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이 드러날 것”(2베드 3,10)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새 예루살렘 성벽에 우리 이름이 누락되지 않기 위해 세상을 향했던 걸음을 뒤집어 돌아서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믿음의 탈렌트를 바르게 사용하기 위해 마음을 뒤집어야 합니다. 사라질 땅에서 기껏 백 년을 호의호식한들 주님께 잊힌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에프라임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이 “어리석고 지각이 없다”(호세 7,11)는 삼엄한 경고를 듣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았으니 나의 하느님께서 그들을 배척하시리라”(호세 9,17)는 심판의 말씀에서 자유롭게 되도록 기도합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얼른얼른 민첩하게 뒤집어지기를 원합니다. 부디 생명의 책에서 우리 이름이 반짝반짝 빛나기를 소원합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9월호(통권 450호)]

 

 


 

 

[성경의 숨은 이야기] 성경 속 숨바꼭질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성경 읽기는 숨바꼭질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주요 주제가 아니라고 가벼이 훑던 구절이 어느 순간 ‘또렷이’ 다가와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한편 강론에 연계할 만한 맞춤 구절이나 사연이 떠올라 확인할 때에 감쪽같이 숨어서 애간장을 태우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성경을 뒤적이다 지쳐 ‘포기할 때’의 안타까움이란…. 그런데 그 구절이 어느 날 ‘까꿍’ 하고 모습을 드러냅니다. 정말 숨바꼭질하는 술래가 된 기분에 약이 오릅니다. 이제는 성경 구절을 찾다 지치면 술래로서 큰 소리로 외치고 싶기도 합니다. “못찾겠다. 꾀꼬리! 깽깽이 발로 나와라.”

 

오래전에 본 영화가 있습니다. 제목은 아리송하지만 몇 장면의 영상이 생생한 영화이지요. 주제는 예수님의 이집트 피난살이였습니다. 흙장난하는 예수가 흙으로 동물 모양을 빚으면 그 동물이 실제로 살아 움직입니다. 개와 새 모양의 흙덩이가 모두 생명이 됩니다. 창조주 하느님과 하나 되어 세상을 빚으신 예수님이니 정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제2경전’으로 분류된 외경에 빼곡하게 있습니다. 외경에는 구약의 예언자와 예수님의 제자들의 기적 사건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믿음은 기적을 일으킨다’는 증명처럼 읽힙니다.

 

그런데 영화 속의 어린 예수는 자기가 지닌 놀라운 능력 탓에 큰 곤욕을 겪습니다. 높은 데서 겁 없이 뛰어내리는 예수, 그런데도 말짱한 걸 보고서 또래가 마구 따라 합니다. 결국 친구들은 얼굴이 깨지고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니, 이웃이 모두 ‘꼴통 예수’ 때문에 골머리를 앓습니다. 마침내 별종 예수를 몰아내기 위해 요셉을 닦달하기에 이르는데요. 이웃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예수와 같은 말썽꾸러기를 도저히 내 새끼와 지내게 할 수 없다며 당장 떠나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렇죠.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이방인 요셉과 마리아의 설움과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장면입니다. 오죽이나 답답하면 아버지 요셉은 철딱서니라곤 없는 예수를 구석으로 끌고 가서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하고 알밤을 먹입니다. 꼭꼭 숨어 지내도 간 떨리는 판에, 천지도 모르고 나대는 철부지 예수를 염려하는 눈빛이 잊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의 비밀을 찾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많은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그런 기적의 힘을 기대합니다. 딱 한 번, 꼭 이번만이라도 ‘뚝딱’ 도깨비 방망이를 휘둘러 달라고 갈망합니다. 또 감히 생각하지 못한, 기대치를 뛰어넘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날 때 ‘응답’이자 ‘복’인 줄로 오해합니다. 결국 기도 끝에 마음이 상합니다. 하느님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고 주님의 불공평을 논합니다. 이를테면 “예수님은 제 마음대로 척척 기적을 일으키며 편하게 지냈으면서, 우리한테는 인색하다”고 푸념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편에서 ‘변명’을 하려 합니다. 그분께서 일으키신 기적의 비밀을 찾았습니다.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는 주님께서 ‘무엇이든지 모두’ 해결해 주시지 못하는 심정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이 글을 씁니다.

 

솔직히 저도 주님의 능력이 부러운 적이 많았습니다. 제자들에게 파스카 만찬 장소를 일러 주시는 장면을 하나의 이적으로 오해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세 복음서가 일제히 그 만찬 장소를 주님의 혜안에 따라 얻어진 듯 착각하게 한 것이 원인일 수 있습니다. “너희가 도성 안으로 들어가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거라. … 그 사람이 이미 자리를 깔아 놓은 큰 이층 방을 보여 줄 것이다”(루카 22,10-12)라고 하니, ‘금 나와라 뚝딱!’ 하는 주문으로 들리는 것입니다(마태 26,18; 마르 14,13-15 참조). 너무나 유명한 그 사연, 매년 사순 시기마다 선포되는 말씀인데도 그 뜻을 살피지 못했으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어느 날, 마태오 복음에서 묘한 뉘앙스를 감지했습니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려야 할지 묻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마태 26,18)라고 말씀하신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아, 무, 개….’ 주님께서는 분명히 그 이름을 말씀하셨는데 성경이 익명으로 처리한 것이라 깨달았습니다. ‘왜? 무슨 이유로?’라는 의문은 복음서가 주님의 부활 사건 이후에 기록된 것임을 생각해 볼 때 증폭되었지요. 그 집이 누구의 집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데 굳이 아무개라고 기록한 곡절이 정말로 궁금했습니다.

 

성경에 숨겨진 인물은 주님께서 베푸시는 또 하나의 기적

 

복음은 주님의 일을 도운 여인들의 이름을 곳곳에 기록합니다. 달랑 이름만 적힌 사람도 있고, 남편 직업까지 밝힌 이도 있으며, 일곱 귀신이 들린 과거지사가 들통 난 인물도 있습니다(루카 8,2-3 참조). 결론적으로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데 남성 열두 제자뿐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여성 제자들의 역할도 만만치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루카 8,2)라는 수식이 붙은 것을 볼 때, 그들 모두 예수님에 의해 병이 치유된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무튼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3)는 여인들의 헌신 덕에 주님의 공생활이 약간 수월했으리라 싶어, 그 배려에 새삼 두 손을 모으게 됩니다.

 

교회의 전승은 최후의 만찬이 거행된 다락방을 복음사가 마르코의 집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마르코 가족의 신앙 계보가 가늠되는데요. 그날 주님께서 이르신 ‘아무개’가 마르코의 어머니였으리라 짐작합니다. 왜 마르코의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답이 궁합니다. 바오로 사도와 함께한 ‘위로의 아들 바르나바’가 마르코의 사촌이었는데도 자꾸만 외가 쪽으로 무게를 싣는 것은 순전히 제 편견일 수 있다는 점을 밝히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루카 8,3)가 마르코의 어머니가 아닐까 짚어 보고 ‘수산나’일 수도 있다고 어림합니다. 물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루카 8,3)니 익명 처리를 원한 매우 겸손한 ‘어느 여인’ 중에 한 분이리라 헤아리기도 합니다.

 

딱 여기까지 적고 며칠 동안 원고를 다시 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틈날 적마다 마르코 어머니의 인품을 생각하고 그의 행적을 더듬었습니다.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는 점에서 성모님처럼 아주 겸손한 분이라고 결론짓기도 했습니다. 원고를 다시 정리하던 날, 왠지 ‘바르나바와 마르코’가 사촌인지 외사촌인지 확인하지 않은 것이 찝찝했습니다. 유럽과 달리 친가와 외가를 분명히 구별하는 우리 정서에 촌수 확인은 필수다 싶던 것입니다. 그런데 ‘있을 만한 부분’을 뒤지고 ‘그럴 만한 얘기’를 아무리 훑어도 그 구절이 오리무중이었습니다. 군데군데 바르나바와 마르코의 이야기를 찾아도 촌수를 밝힌 구절이 ‘사라진’ 것입니다. ‘또 숨었구나.’ 한숨이 나오던 차에 통통 튀어 오르듯 제 눈길을 사로잡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사도 12,12). 그토록 궁금한 마르코 어머니의 이름이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러한 주님의 일깨움에 소름이 돋습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또 하나의 기적이라 의심치 않습니다. 그런데도 마르코의 어머니가 언제 주님을 만났는지, 어떤 사연으로 맺어졌는지조차 알아 낼 도리가 없습니다. 다만 그날 ‘최후의 만찬’을 위한 자리가 ‘기적적으로’ 뚝딱,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듯 즉흥적으로 마련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뚜렷합니다.

 

마르코의 어머니가 성경이 꼭꼭 숨겨 놓은 또 다른 성인이라는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성모님처럼 자신의 치적이나 선행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겸손한 인물이라는 점도 수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 마음을 먹는 중에 ‘쏘옥’ 숨은 ‘머리카락’이 보였습니다. “바르나바의 사촌 마르코”!(콜로 4,10)

 

묵주 기도 성월,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성인을 기억합니다. 부디 마르코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성모님을 닮은 겸손을 지니고 살아 ‘주님을 돕는’ 인물로 기록되기를 원해 봅니다. 훗날, ‘요한이라고 불리는 마르코의 어머니, 마리아’를 뵙고 오늘 이야기를 꺼내어 추억하리라 기대합니다. 더 많은 분이 성경에서 주님과 숨바꼭질하며 뛰노는 친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0월호(통권 451호)]

 

 


 

 

[성경의 숨은 이야기] 세상의 모든 아기는 모세입니다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위령 성월, “내가 나를 위하여 빚어 만든 백성 이들이 나에 대한 찬양을 전하리라”(이사 43,21)는 주님의 고백이 온 땅을 적십니다. “나는 처음이며 나는 마지막이다. 나 말고 다른 신은 없다”(이사 44,6)는 예언자의 음성에 온 천지가 젖어듭니다. 곁을 떠난 이들과 작별한 아쉬움을 더듬으며, 이 땅에 쉼 없이 새 생명을 선물하고 계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야말로 당신 구원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졸지도 않으시고 잠들지도 않으”(시편 121,4)시는 주님의 손길임을 깨닫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뜻에 반기를 든 탓에 꼬박 마흔 해 동안 광야를 헤맨 일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가나안 입성을 처음 명령받았을 때 백성의 숫자가 마흔 해가 흐른 뒤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소스라치듯 일어나 계산기를 두드렸습니다. 603,550명(민수 1,46 참조) 빼기 601,730명(민수 26,51 참조). 꼬박 마흔 해 동안 허송세월하듯 광야를 떠돌았는데 고작 1,800여 명밖에 줄어들지 않았다니, 신비의 커튼을 들춘 기분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딱 일 년간 광야 교육을 한 다음 가나안에 입성시키려 하셨으며, 백성의 숫자는 60여만 명 정도라는 계획안을 수정 없이 시행하신 사실을 일러 주는 듯했으니까요. 그야말로 하느님의 감추어진 지혜라 믿었습니다.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1코린 2,7)가 말씀대로 성취되리라는 증거라 확신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아기, 모세

 

인구가 계속 불어나면 삶의 질이 저하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염려했습니다. 온 세계가 인구 증가를 우려하며 다양한 대책을 강구한 결과, 이제는 ‘저출산’이라는 기이한 현상에 봉착해 있습니다. 그런데도 태아의 낙태는 묵인됩니다. 유전자 검사로 기형아 판별을 받으면 주저 없이 낙태를 권합니다. 이런 행위가 주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가증스러울까요? 분명히 주님께서 새 생명을 땅에 보내신 뜻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인간의 지혜를 뛰어 넘는 복을 계획해 놓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풍요로운 삶을 위한답시고 주님의 계획을 망가뜨리는 행위야말로 끝내 허무에 이를 것이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환경에 놓인 생명일지라도 애끓는 모성으로 대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태어나는 모든 생명에게 우리가 행할 바는 단지 ‘더 사랑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고민하며 ‘사랑의 인큐베이터’를 장만하는 일이라는 얘기입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아기, 모세를 생각하신다면 제 주장이 쉬이 이해되실 듯합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케벳(탈출 6,20; 민수 26,59 참조)은 자신이 낳은 아기를 석 달 동안 숨겨 키웠습니다. 아들을 낳으면 모두 강물에 던져야 한다는 파라오의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인데요.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보다 더 많고 강해졌다”(탈출 1,9)는 우려 때문에 그 명령이 내려진 것을 생각할 때, 자손을 번성시키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마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유감천만으로 여겨졌을 것 같습니다. 부모들은 아기를 강에 던지며 얼마나 오열했을까요? 아기를 숨겨 놓고 키운 요케벳은 또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지새웠을까요? 그 괴로움과 아픔과 탄식이 눈에 선합니다. 어쩌면 모두 험한 꼴을 당하지 않도록 ‘딸’이 태어나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도 같습니다. 차라리 유산되어 “태양 아래에서 자행되는 악한 일”(코헬 4,3)을 보지 않게 되기를 소원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요케벳은 아들을 숨기기 위해서 이웃에게도 “딸을 낳았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아기의 울음과 웃음소리에 천 번 만 번 가슴이 철렁댔을 것도 같습니다. 철없는 아이들의 입단속을 시키려고 아론과 미르얌을 아기 곁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더는 숨겨 키울 수 없어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탈출 1,22)라는 파라오의 명령에 따르려 한 그날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애간장 끓는 고통을 추스르며 고민하고 머리를 짜내느라 며칠 밤을 꼬박 뜬눈으로 새웠을 것입니다.

 

요케벳의 모성애에 응답하신 생명의 하느님

 

마침내 요케벳은 왕골 상자에 역청과 송진을 발라 물에 띄우면서 얼마 동안이라도 아기의 생명을 연장해 주려 합니다. 상자의 엉성한 틈에 역청을 바르고 또 바르며 안팎을 송진으로 메우는 요케벳의 손길이 얼마나 간절했을까요?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법을 어기는 행위였습니다. 임금을 속이고 이웃에게 거짓말을 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일을 이웃이 눈치챘다면 빈정댔을 것입니다. “정들기 전에 내다 버릴 일이지” 하고 고개를 돌리고 “뭔 못할 짓이냐?”고 나무랄 수도 있습니다. “뭣하러 석 달 동안 정을 들여 겪지 않아도 될 아픔을 당하느냐?”고 “차마 못 볼꼴이라”고 함께 울어 주는 마음도 있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그렇습니다. 그 아기는 살아날 수 없는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하늘로 솟아오르지 않는 한 살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운명을 지닌 아기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아기를 살리셨습니다.

 

‘하필이면’ 그 시간에 파라오의 딸이 목욕하러 강으로 간 일은 우연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공주가 갈대 사이에 있는 상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일 수 없다고 믿습니다. 울고 있는 히브리 아기를 불쌍히 여기도록 하느님께서 그 마음을 흔들어 주셨다고 믿습니다. 파라오의 딸이 상자를 여는 긴박한 순간, 하느님께서는 눈앞이 캄캄해지도록 겁에 질리게 하는 “지극히 노여운 눈”(에스 5,1⑦)을 “부드럽게 바꾸어”(에스 5,1⑧) 놓으셨다고 믿습니다. “이 아기는 히브리인들의 아이 가운데 하나로구나”(탈출 2,6) 하면서도 외면하지 않은 마음, 불쌍히 여기고 스스로 거둘 생각을 갖게 한 것은 하느님의 섭리라 믿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요케벳이 임금을 속이고 이웃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나무라시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만 하느라 꼼수를 부리고 꾀를 썼다고 꾸중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련할 만큼 대책 없는 모정에 즉각 응답하십니다. 이렇게 믿음의 행위에는 힘이 있습니다. 철저히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그날, 요케벳이 안쓰러운 마음을 털고 아들을 살려 낼 궁리에 골몰한 모습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요케벳은 백일 된 아기를 죽음의 길에 내놓으며,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왕골 상자에 담아 강물에 띄워 놓은 아기가 살아남으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단 며칠, 단 몇 시간, 단 몇 분이라도 더 살게 하려 한 모성애를 주님께서 진하고 진한 기도로 받으셨습니다. 요케벳이 정성을 다하여 역청과 송진을 바른 그 상자가 바로 아기를 되살려낸 ‘생명의 인큐베이터’였습니다.

 

파라오가 저지른 일은 파란만장한 인류 역사에서 유래 없는 일입니다. 말 그대로 ‘인종 말살 정책’입니다. 파라오의 명령대로 강물에 던져진 아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참혹한 정경을 상상하는 일부터 고통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느님께서 그 끔찍한 현장에서 들려오는 고통의 ‘신음 소리’를 들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고역에 짓눌려 도움을 청하는 소리가 ‘하느님께 올라갔다’고 밝힙니다(탈출 2,23 참조).

 

21세기에 사는 우리에게 또 다른 파라오의 명령이 떨어져 있습니다. 태아에게서 기형 유전자가 발견되면 낙태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사탄의 법령이 ‘현대인의 지혜’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생명을 살리려고 합니다. 생명의 기본 권리를 깨달아 생명에 관한 모든 권한이 하느님께 있음을 외칩니다. 생명을 거스르는 모든 행위는 범죄입니다. 낙태는 명백한 살인 행위입니다. 죽어가는 태아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인간의 행복을 논하는 일이야말로 언어도단입니다. 지금도 매일 6천 명의 태아가 ‘죽음의 강’에 던져지고 있습니다. 매년 2백여만 명의 태아가 학살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의 죄악에 진저리치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결단을 기대하십니다. 한 사람의 모세를 살리려고 왕골 상자에 역청을 바르는 손길을 찾으십니다. 생명을 위해 송진을 덧바르는 끈끈한 기도를 기다리십니다.

 

위령 성월, 오늘도 소리 없이 죽어 간 태아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합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기도합니다. 부디 이 못된 세상을 용서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1월호(통권 452호)]

 

 


 

 

[성경의 숨은 이야기] 여섯 해 동안 무척 행복했습니다!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많은 사람이 연말에 가장 애용하는 단어는 ‘다사다난(多事多難)’일 것입니다. 아담이 땅에서 살림을 꾸린 뒤, 인간의 삶은 매일 다사다난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성경이 전해진 것은 ‘정말 다사다난’한 자신의 이야기를 후손에게 들려준 조상님 덕분일 텐데요. 우리가 살아온 날들도 후손에게 아름답게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한 해 동안 일어난 사건을 총정리하며 2013년 세밑을 장식할 세계의 10대 뉴스에, 3월 13일에 이루어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선출이 분명히 꼽힐 것입니다. 그만큼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언론사의 취재 열기 또한 뜨거웠으니까요. 바티칸 상황이 생중계되고 교황님의 탄생 과정까지 캐내 알리는 신속함이 놀라웠습니다. “부족한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새 교황님의 당부에 온 세상이 환호하는 모습은 또 얼마나 황홀했는지요. 인간의 내면에 영적 갈증이 있다는 증거다 싶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영을 마음 깊숙이 존경하고 사모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교황님의 일거수일투족에 열광하는 모습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인간의 감성이며 하느님께서 빚어 주신 어여쁜 마음임을 느꼈습니다. 어둠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취를 보았습니다.

 

저와 함께 성경을 읽으신 모든 분께 졸업장을 드립니다

 

무조건 성경을 읽고 난 소회를 <성서와함께>에 풀어낸 지 벌써 여섯 해가 흘렀습니다. 6년 전에 태어난 아기가 여섯 살 어린이로 자랐을 것을 생각하니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실감하게 됩니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면 어느덧 대학생이 되었을 테니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새삼 긴 시간 동안 제 글을 읽고 공감해 주신 분들이 고맙습니다. 그리고 물러서도 될, 물러서야 할 ‘때’라는 사실이 마음 한구석에 차오르는 아쉬움을 치워 줍니다.

 

“축! 졸업.”

 

제 글과 함께해 주신 많은 분께 ‘졸업장’을 드리는 기분으로 이 글을 씁니다. 이제 성경 읽기에서 젖을 떼고 성경 묵상에서 상급 학교로 진학할 것이며, 성경을 삶에 적용하는 면에서도 훨씬 대견해지셨을 테니 ‘졸업장’을 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지침서가 있습니다. 제목만 보면 어느새 새로운 세상이 된 듯합니다. 온 세상이 확 달라질 것만 같습니다. 문제는 모든 이가 세상을 이끌어 갈 인재가 되어 군림하는 방법을 꼬집어 주는 일에만 급급하다는 점입니다. 이재(理財)에 밝은 세상은 어제만 해도 새롭던 지식과 담론을 오늘 모두 ‘헌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토록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성경만은 오래오래 두고두고 변치 않으니 구닥다리 중에 구닥다리입니다. 그런데도 말씀은 매일 새롭습니다. 말씀이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세상을 살리는 사랑의 근원이 되신 덕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삶을 위해 투신하고 계신 덕입니다. 그런 까닭에 성경 읽기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으로 성숙시키고 사랑으로 변화되어 살아가도록 합니다. 믿음으로, 하늘의 것으로 충만하여 기뻐하며 살아가도록 합니다. 성경을 통해 만난 하느님은 친절하셨습니다. 정말 다정하고 따뜻한 사랑을 지니셨습니다. 그런 뜻에서 저에게 허락된 여섯 해는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연재하면서 정한 주제는 ‘성경의 숨은 이야기’였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오직 믿음으로 주님을 향하며 보지 않고도 믿는 복된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름도 없이 큰 족적도 없이 그저 하느님의 뜻대로 산 그들이야말로 우리 삶을 반추하는 작은 거울이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끌어 간 영웅도 아니고 빼어나게 살지도 못했지만,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나고 지는 풀잎 같은 인생이라서 더 진한 동질감을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 친근함과 위로를 나눌 생각이었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큰 맥을 이룬 삶에 주목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오직 믿음으로 살고 당신을 증언하며 당신을 사랑한 사람을 결코 잊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9)

 

이별의 자리에서 약간 생뚱맞은 얘기 같지만 성경 통독으로 얻은 은총을 소문내고 싶습니다. 생각할수록 오묘한 성경 통독 피정의 은혜를 자랑하고 싶습니다. 솔직히 아무것도 안 하고 성경만 읽겠다며 시간을 내고 돈을 쓰는 것,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아무리 따져 봐도 덜떨어진 모습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 통독 피정은 주님께서 계획하고 손수 이루시는 작업임을 더욱 확신합니다. 이 허술한 주님의 작업에 선뜻 동조하신 분들이야말로 약삭빠른 세상 속에, 계산에 잽싼 세상 속에 주님께서 몰래 숨겨 놓으신 비밀병기임을 체감합니다.

 

하기야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아흐레, 삶에서 가장 단순하고 맑고 귀하게 주님께 봉헌하는 마음이 어찌 어여쁘지 않을까요? 주님의 말씀을 매일 읽고 묵상하여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데 어찌 현인으로 가꾸어 주시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오늘 자랑할 일은 그것이 아닙니다. 아흐레 동안 무식하게 성경만 읽는 성경 통독 피정에 너무나 귀한 회원이 생긴 것을 알리고 싶고 자랑하고 싶습니다.

 

주인공은 이제 돌이 갓 지난 요한이인데요. 두 해 전 엄마 배 속에서 이미 일독을 마친(?) 요한이는 지난여름 통독 캠프에도 엄마 품에 안겨 참석했습니다. 늦은 밤, 더위를 무릅쓴 장거리 여행에 지친 요한이는 그날 밤 내내 울며 지새더군요. 뒤바뀐 잠자리가 힘들었을 것이라는 얘기를 전해들으며 숫총각은 ‘애간장이 녹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육아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 어른은 요한이의 울음마저 기특하여 자꾸 싱글벙글 웃음이 나왔습니다. 요한이의 투정과 울음과 웃음이 모두 은총의 소리로 들렸습니다. 저뿐 아니라 모든 참석자가 그러했습니다.

 

두 살배기 아기는 얼어붙은 어른들을 웃음으로 살살 녹여 행복의 도가니로 이끄는 재주꾼이었습니다. 아흐레 만에 성경을 모조리 읽어야 한다는 긴장감으로 뻣뻣해진 마음을 무장해제시킨 능력자였습니다. 그동안 저는 성경 통독 피정이 행복한 시간이 될 수 있게 한 일등공신이 아기 요한이라는 것을 소문내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습니다.

 

내친김에 제 소원도 알려 드리지요. 두 살 요한이가 건강하게 자라 세상에서 성경을 최고로 많이 읽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요한이가 여섯 살 쯤 되었을 때 사무엘처럼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9) 하며 주님의 뜻에 귀를 쫑긋거리는 아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주님!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저의 이 성급함마저 강복하소서.

 

아무리 다사다난한 인생일지라도 그 시작과 마침은 하느님의 소관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이렇게 은혜받은 삶을 감사와 찬미의 응답으로 채우는 것은 인간의 몫입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간곡히 당부하십니다. “규정과 법규들을 …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 모든 규정을 듣고, ‘이 위대한 민족은 정말 지혜롭고 슬기로운 백성이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 그것들이 평생 너희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신명 4,5-6.9).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교황님처럼 세상을 감동시키고 요한이처럼 주위를 행복하게 하는 당신의 슬기로운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때문에 눈을 크게 뜨고 우리를 살피십니다. 나를 보시고 부르시고 지키시며 함께하십니다. 그 기쁨을 교황님처럼 몸짓과 표정으로 드러낼 때, 가는 곳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사랑의 맛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이처럼 스스로 계획하지도 않고 앞장선 적도 없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은총의 자리에 앉게 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사랑을 만끽하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기뻐하고 감사를 드리며 행복을 체험케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성경의 숨은 이야기’를 쓰는 일은 마치지만, 성경에서 ‘친절하신 아버지’를 만나 그분 사랑에 잠겨 그분과 이야기 나누는 일은 끝내지 않을 것입니다. 매일 새롭고 신선하며 때로는 핑그르르 눈물이 맺히는 그분과의 만남을 끊을 수는 없으니까요.

 

제 글이 그분과 더 친해지는 데에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제 글이 ‘친절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는 통로로 쓰이기를 원합니다. ‘작지만 명료한’ 하늘 나라의 길라잡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글을 마감하며 주님의 뜻을 읽고 실천하여 천상의 지혜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2월호(통권 4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