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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성경 첫걸음 - 성서와 함께 편집부

by 파스칼바이런 2018. 6. 14.
[성경 첫걸음] 구약성경에 대해 알아볼까요

[성경 첫걸음]

구약성경에 대해 알아볼까요

 

 

“구약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 그 이전 시대 사람들의 상황에 맞게, 하느님과 사람에 관해 알리고, 또 의롭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사람을 대하신 방법을 모든 이에게 드러낸다. 구약성경은 … 하느님을 생생하게 느끼게 하고, 하느님에 관한 숭고한 가르침과 인생에 관한 건전한 지식과 기도의 놀라운 보물을 담고 있으며, 그 안에 구원의 신비가 감추어져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책을 경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계시 헌장》 15항).

 

Q 구약성경은 무엇을 가리키죠?

 

 A 구약성경이라는 명칭은 본래 그리스도교의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로운 계약, 즉 신약의 상대적 표현으로 ‘묵은 계약’ 또는 ‘옛 계약’을 가리키지요. 사도들을 통해 전해진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고백하며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이들은 복음서와 서간 등으로 이루어진 신약성경의 거룩한 책들에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에 체결된 ‘새로운 약속’의 규정이 담겼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전의 거룩한 책들에 ‘옛 계약’ 곧 ‘구약’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하지만 ‘옛(舊)’이라는 표현이 반드시 ‘낡은’이나 ‘한물간’, ‘효력을 상실한’ 등 부정적 의미를 갖지는 않습니다. ‘새(新)’라는 표현에 ‘설익은’ 또는 ‘정통성 결여’의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옛’과 ‘새’라는 표현을 대립적으로 보기보다 분리될 수 없는 상호연관성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Q 유다교의 성경과 구약성경은 무엇이 다른가요?

 

A 유다교의 히브리어 성경을 통칭하는 이름은 ‘타낙’입니다. 유다교의 성경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첫 부분은 토라(Torah, 율법), 둘째 부분은 느비임(Nebi’im, 예언서), 셋째 부분은 커투빔(Ketubim, 성문서)입니다. 첫 글자인 T N K를 붙여 타낙(TaNaK)이 되었죠.

 

기원전 400년경에 최종 완성되었다고 추정되는 토라는 신앙과 실천의 문제를 조정하고 해결하는 공적 척도가 담긴, 규범적 가치를 지닌 책이 됩니다. 이어서 집대성된 예언서는 토라만큼 권위를 지니지는 않지만 율법을 실천적으로 주해하는 기초 역할을 합니다. 성문서는 예언서에 견줄 만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의 경신례와 회당 집회 때 사용되었습니다.

 

다소 다른 견해가 있지만,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전으로 내려오던 역사와 설화가 성경과 관련된 문헌으로 기록된 시기를 기원전 10-9세기부터 기원전 100-50년경으로 봅니다. 유다인의 성경은 모두 24권입니다. 상·하권을 한 권으로, 소예언서 열두 권도 한 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구약성경은 모두 46권입니다.

 

Q 구약성경은 왜 중요한가요?

 

A 유다교의 성경은 하느님과 그분께서 선택하신 백성 사이에 이루어진 사랑의 관계를 기록한 책으로, 예수님과 초대 교회의 유일한 성경이었죠.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사셨던 유다인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뿌리와 과거 역사를 외면하거나 단절하지 않으시고, 복음의 기초로서 구약성경의 가치를 그대로 인정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그리스도교는 이스라엘 신앙의 밑거름이 되었던 구약성경을 예수님께서 친히 완성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유다교의 거룩한 책들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데 필요한 출발점을 찾고, 유다 민족의 성경을 우리 자신을 향해 열려 있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또 신약성경을 구약성경에 비추어 해석하는 한편, 구약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에 비추어 재해석합니다.

 

“신약의 문서들은 유다 민족의 성서가 하느님의 계시로서 항구한 가치를 지닌다고 인정하여 그 성서와 긍정적인 관계를 갖고 그것을 자신이 의지할 토대로 여긴다. 따라서 교회는 언제나 유다 민족의 성서가 그리스도교 성경의 필수적인 부분이 된다고 주장해 왔다”(《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 8항).

 

[성서와 함께, 2013년 1월호(통권 442호), 편집부]

 

 


 

 

[성경 첫걸음]

오경에 대해 알아볼까요

 

 

“신앙인들은 오경을 통해 이스라엘의 신앙 체험을 보고, 또 하느님의 가르침을 듣는다. 진정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 율법인 오경을 참 신앙으로 읽고 그 교훈을 따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계약의 새로운 백성으로서 젖과 꿀이 흐르는 새 가나안 복지, 새 천상 예루살렘으로 안전하게 갈 수 있을 것이다”(《성서 일반 및 모세 오경》, 82-83쪽).

 

Q ‘오경’은 무엇을 가리키나요?

 

A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을 묶어서 일컫는 표현입니다. 유다 전통은 이를 ‘토라’라고 부르지요. 그리스어로는 펜타테우코스(Πεντατευχοs)이며, ‘다섯 개의 두루마리’라는 뜻입니다. 오경은 두루마리 하나에 써서 보관하기에 너무 길고 방대하여, 내용상 여러 개의 두루마리로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구분된 때는 오경을 그리스어로 옮긴 칠십인역 성경이 생기기 전, 대략 기원전 3세기 전에 이루어진 듯합니다. 구약성경의 첫 단위를 오경으로 구분하지 않고 신명기를 오경이 아닌 역사서에 포함시키는 ‘사경(四經)설’과, 오경의 주제는 약속의 땅이므로 땅을 차지하는 여호수아서까지 포함하는 ‘육경(六經)설’, 창세기부터 열왕기의 바빌론 유배까지 땅에 관한 줄거리를 통일성 있게 구성한다고 보는 ‘구경(九經)설’도 있습니다.

 

유다교에서는 각 책의 히브리어 첫 낱말을 따서 이름을 지었고,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성경 번역에 사용되었던, 각 권의 내용을 알려 주는 제목을 사용했습니다.

 

Q 오경은 언제, 어떤 양식으로 쓰였나요?

 

A 오경은 여러 저자의 손을 거쳐 바빌론 유배 후반기나 유배 직후에 본격적으로 집대성되었을 것입니다. 최종 완성은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 유다교가 완전히 자리를 잡은 기원전 5-4세기경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페르시아 제국의 식민지였는데, 페르시아는 각 민족의 고유한 전통 관습과 규정을 허용하였으므로(에즈 7,11-26 참조) 이스라엘 민족은 오경을 완성하여 그들의 신앙과 사상의 근본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죠.

 

오경의 방대한 내용은 크게 두 가지 양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설화와 족보, 시가로 짜인 이야기 부분(하가다)과, 계명 및 규범을 제시하는 법조문 부분(할라카)입니다. 이 두 양식은 옛사람들이 쉽게 선호하고 이해하던 장르였습니다.

 

Q 오경의 저자는 누구인가요?

 

A 유다교 전승은, 모세를 통해 율법이 선포되었기에 그를 오경 전체의 저자로 보았고 그리스도교 전승도 이를 따랐습니다. 하지만 18세기에 이르러, 오경의 본문 대부분이 모세가 죽은 후에 글로 옮겨졌고, 문학 단위가 짧게 끊어져 있으며, 사용된 문체가 다양하다는 점 등을 들어오경의 저자를 한 사람으로 보기 어렵다는 이론이 형성됩니다.

 

이에 기초하여 오경의 기원과 형성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인 문헌 가설이 제기됩니다. 이는 오경이, 하느님을 ‘야훼’로 표현한 야훼계 문헌, ‘엘로힘’으로 표현한 엘로힘계 문헌, 계명과 법전을 기술한 신명기계 문헌, 사제단의 가르침과 예배 위주의 사제계 문헌 등 네 가지 전승 문헌으로 이루어졌다는 가설입니다. 각 문헌을 저술한 이들이 오경의 저자로 추정되었지요. 문헌 가설은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오경을 이해하는 학문의 기초가 됩니다. 1980년대에 와서 문헌 가설만으로 복잡한 오경의 형성층을 밝혀 내는 데 한계가 있다고 밝혀진 후 다양한 학문적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일부 수정된 문헌 가설은 오경을 연구하는 데 필수 지식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전체를 함께 볼 때 오경은 깊은 신학적·영적 실마리를 담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첫 부분인 오경에서 시작되어 일관되게 이어지는 ‘약속의 땅’이라는 주제는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묵시록의 ‘천상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경 전체는 땅을 향해 정향되어 있다.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을 보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 땅은 오경의 항구한 관심사다. 모세는 거기서 죽고 그의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일을 완수하게 될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오경은 ‘미완성 교향곡’이다. 유다인들은 언젠가 메시아가 와서 백성의 모든 구성원을 소집하여 끝이 없는 ‘평화의 왕국’을 건설하리라 믿는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여호수아는 예수님이시다. … 그리스도 신앙에서 예수는 우리가 ‘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요르단 강을 건너게 해 줄 분이시다”(《모세오경 입문》, 413쪽).

 

[성서와 함께, 2013년 2월호(통권 443호), 편집부]

 

 


 

 

[성경 첫걸음]

역사서에 대해 알아볼까요

 

 

“현대인들은 역사를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Fact)에 대한 기록으로 여기지만, 고대인들은 ‘과거의 사건을 통해서 무슨 가르침을 얻을 것인가’(Truth)에 관심을 집중한다”(《성서 입문》, 114쪽).

 

Q ‘역사서’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요?

 

A 구약성경에는 사료에 근거하여 역사적 사실을 서술한 내용의 책들이 존재하며, 문학 유형으로 볼 때 ‘역사서’의 범주에 속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되어 가는 오경 이야기에 이어서 역사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국가를 세우고 성장하다가 멸망과 유배라는 치욕스러운 상황까지 떨어지고, 다시 자기들의 땅으로 돌아와 성전의 전례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야기죠. 역사서는 크게 신명기계 역사서, 역대기계 역사서, 후기 역사서로 분류합니다.

 

Q 신명기계 역사서가 무엇이죠?

 

A 신명기계 역사서는 중심 신학 사상과 문체가 신명기의 영향을 받아 저술된 책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저술 시기는 당연히 신명기가 최종 편집된 후, 즉 바빌론 유배가 끝나갈 기원전 6세기 중반 이후라고 볼 수 있겠네요. 지난 호에서 언급하였듯이, 오경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는 법전과 모세의 연설문으로 이루어진, 오경의 종합이요 결론에 해당하는 책입니다.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모시고 하나의 예배를 드리며 신앙을 고백하라는 명령에 충실할 때 복을 받고, 불성실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내용이죠.

 

성전과 왕궁의 서기관으로 추정되는 신명기계 역사서의 편집자들은 이스라엘에 닥친 ‘멸망과 유배’라는 재앙의 원인을,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과 예배의 중앙 집중화(예루살렘) 정신이 무너진 이스라엘에게 주님께서 내리신 벌이라고 해석합니다. 신명기의 기본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탓이라는 것이죠. 그 안에는 ‘하느님의 은총 → 이스라엘의 죄 →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 이스라엘의 죄’라는 도식이 반복됩니다.

 

여호수아기와 판관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하는 과정이 서술되고, 사무엘기에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통치를 받는 신정(神政)에서 임금이 통치하는 왕정(王政)으로 변하는 과정이 나옵니다. 열왕기에서는 왕국의 분단과 멸망 과정이 그려집니다.

 

Q 역대기계 역사서는 무엇인가요?

 

A 역대기계 역사서는 역대기 신학을 기초로, 아담부터 페르시아 제국에 이르는 이스라엘 역사를 저술한 책들입니다. 이 역사서는 바빌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이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 아래 겪는 정체성 문제에 답을 줍니다. 즉 성전과 왕국의 재건이라는 큰 과제를 안은 채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고 사는 유다인들에게 족보를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의 순수성을 밝히고, 정치 공동체가 아닌 종교 공동체로서 예루살렘의 권위와 성전 중심의 전례를 강조합니다.

 

일반적으로 역대기계 역사서는 신명기계 역사서를 바탕으로 저술되었다고 봅니다. 신명기계 역사서의 신학을 강화하는 한편, 성전과 전례에 대한 관심을 확대했기 때문에 사제계 학자들이 저술했으리라 추정합니다. 최종 편집 시기는 기원전 300년 이후로 봅니다.

 

역대기에서는 아담부터 유배에 이르는 역사를 서술하고, 원래 히브리 정경에서 한 권으로 보는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는 귀환과 성전 재건, 개혁 등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Q 후기 역사서는 무엇을 가리키나요?

 

A 후기 역사서에는 룻기, 토빗기, 유딧기, 에스테르기, 마카베오기가 있습니다. 이 성경들은 비록 역사서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마카베오기 상·하권을 제외하면 역사 서술과 유형이 다릅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보다 ‘신앙의 진리’에 대한 교훈을 주죠. 엄밀히 말하면 ‘교훈 사화’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2-1세기에 저술 · 편집된 이 책들은 각기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느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역사서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단지 순서대로 나열한 책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겪은 무수한 일 가운데 일련의 사건이 역사적 사실로 선택되어 의미가 부여되고, 민족과 신앙이란 주제 아래 뚜렷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엮인 것이죠. “ ‘역사서’에서 이스라엘은 … 사회를 변화 · 쇄신시키는 역사적 체험들에 대한 기억에 곧장 집중하며, 또한 이 기억을 역사의 ‘의미’를 저해하는 사회적·정치적 사건 및 상황들과 비판적 · 유토피아적으로 대결시킨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역사신학은 야훼의 해방 행위로서의 역사와 상충되는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의 한 형식이다”(《구약성경 개론》, 325쪽).

 

[성서와 함께, 2013년 3월호(통권 444호), 편집부]

 

 


 

 

[성경 첫걸음]

시서와 지혜서에 대해 알아볼까요

 

 

“지혜문학은 성서 안에서도 대단히 흥미 있는 책들이다. 왜냐하면 성서의 지혜문학이 다루는 직접적인 대상이 ‘삶’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현자들은 주님의 구원 개입에 대해 신명기계 역사가들과는 그 관심이 달랐다. 이스라엘의 현자들은 현재에 관심을 두었고, 따라서 인간이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 부딪치게 되는 도전적인 상황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로 고심하였다”(《생명의 나무》, 6쪽).

 

Q ‘시서와 지혜서’는 무엇이죠?

 

A 구약성경에서 시서詩書와 지혜서의 범주로 묶이는 책은 욥기, 시편, 잠언, 코헬렛, 아가, 지혜서, 집회서입니다. 히브리 성경은 그중 지혜서, 집회서를 제외한 다섯 권을 성문서(커투빔)라 부릅니다. 유다인들은 다섯이라는 숫자에 특별한 신학적 권위를 부여해서 오경도 다섯 권, 시편도 다섯 권의 시편집(1-41, 42-72, 73-89, 90-106, 107-150), 성문서도 다섯 권이죠. 반면 가톨릭 교회는 칠십인역 성경과 동일하게 일곱 권을 모두 정경에 포함합니다.

 

구약성경의 내용은 무척 다양하고 방대하지만, 대부분이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이루어진 계약과 사랑의 긴 역사 체험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가집니다. 오경은 선택된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내리신 율법을 설명하고, 역사서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의 역사를 기술하며, 예언서는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알립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의 고유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일부 시편을 제외한 시서와 지혜서는 이스라엘만의 특수한 상황을 꼭 집어 이야기하는 대신, 보편적 인간의 삶을 다루며 인생의 의미에 관해 탐구하고 통찰합니다. 마치 율법과 예언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삶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고, 문제들의 해결책을 넌지시 가르쳐 주는 현인의 목소리가 담겼다고 할까요?

 

Q 시서의 특징은 무엇이죠?

 

A 시서에 속하는 책은 시편과 아가입니다. 운문 형식이지만 문학적인 ‘시’의 의미보다 ‘노래’의 의미가 더 강하다는 것을 히브리어 명칭에서 알 수 있죠. 시편은 ‘테힐림’인데 ‘찬양의 노래들’을 뜻하고, 아가는 ‘쉬르 핫쉬림’, 즉 ‘노래 중의 노래’라는 뜻입니다.

 

시편은 오랜 세월에 걸쳐 다듬어진 종교적 시가로 찬양, 탄원, 신뢰, 감사, 교훈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다윗을 저자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큰 인물을 성경의 저자로 내세우는 히브리 관습일 뿐, 수많은 이들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을 것입니다. 저작 연대는 넓게 보아 고대 왕정 시기(기원전 10-6세기)부터 마카베오 시기(기원전 2세기)까지로 추정합니다. 아가는 이스라엘 초기부터 기원전 3세기경까지 불리던 사랑의 노래들을 모아 하나의 노래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아가에 등장하는 남녀의 사랑을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해하는 우의적 해석이 중심을 이룹니다.

 

Q 지혜서(지혜문학)의 특징은 무엇이죠?

 

A 성경의 지혜문학은 고대 근동 지방(이집트, 우가리트, 메소포타미아)에서 꽃피웠던 지혜문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왕정 시대에 국제 무역을 활발히 전개하면서 새로운 문화와 사상이 유입된 것으로 추측하죠. 유다인들은 다른 민족들이 발전시킨 세속적 지혜문학을 야훼 신앙과 접목하여 종교적 지혜문학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지혜문학 작품의 으뜸으로 꼽히는 욥기는 바빌론 유배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한 인간이 부당하게 고통을 겪는 가운데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잠언은 지혜문학의 전형적 형태로 자연과 인간을 관찰하고 경험하면서 깨달은 수많은 경구를 통해 삶의 가르침을 주며, 기원전 10-4세기에 기록·편집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기원전 3세기 후반의 히브리어로 기록된 코헬렛은 인간 존재의 한계를 성찰하여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경외라는 주제를 드러냅니다. 원래 그리스어로 쓰인 지혜서는 철학적 · 수사학적 작품으로 헬레니즘 시대에 쓰인 가치 있는 교훈들을 모았습니다. 집회서는 외래 사조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유다인들에게 이스라엘 전통을 옹호하고 전수하기 위한 작품으로, 기원전 180년경 예루살렘의 유다인 벤 시라에 의해 편집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지혜는 종종 인격화되어 나타나는데(잠언 7,4 참조), 이는 신약성경으로 이어집니다. 말씀 찬가(요한 1,1-18)에서 “말씀(로고스)”은 인격화한 하느님, 곧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며(잠언 8,23-36; 집회 24,1-22 참조) 사도 바오로도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1코린 1,24)라고 천명합니다.

 

지혜문학의 중심 명제는 “하느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원”(집회 19,20 참조)이라는 것입니다. 경외심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가 아니며, 흠숭과 사랑에서 우러납니다. 결국 지혜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인간이 취해야 하는 사랑과 순종의 응답 방식이 아닐까요? “지혜의 인식의 원천은 이성이며, 지혜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이론적 지식이 아니라 성공적이고 훌륭한 삶의 실천이며, 지혜의 기본 원리는 세상의 창조주로서 악을 물리치고 선을 증진시키는 하느님께 대한 근본적인 앎이다”(《구약성경 개론》, 571쪽).

 

[성서와 함께, 2013년 4월호(통권 445호), 편집부]

 

 


 

 

[성경 첫걸음]

예언서에 대해 알아볼까요

 

 

“많은 사람이 구약의 예언자들을 오로지 미래를 예언하는 일만 한 사람들로 생각한다. … 그러나 예언자라는 말은 ‘다른 사람을 대변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자기들과 동시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대신하여 이야기한 사람들이었다(《가톨릭 성경 길잡이 1》, 218쪽).

 

Q ‘예언서’는 어떤 책이죠?

 

A 예언서는 구약성경에서 오경, 역사서, 시서와 지혜서 다음에 놓인 책 묶음입니다. 예언서의 내용이 메시아 사상과 더불어 구약성경에서 신약성경으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하기 때문에 구약성경의 끝부분에 자리하죠. 예언서는 대(大)예언서와 소(小)예언서로 나뉘는데, 그 분류는 예언자의 지명도나 예언 내용의 중요성이 아니라 순전히 책의 분량에 따른 것입니다.

 

대(大)예언서(4권) : 이사야서, 예레미야서(애가와 바룩서 포함), 에제키엘서, 다니엘서

 

소(小)예언서(12권) : 호세아서, 요엘서, 아모스서, 오바드야서, 요나서, 미카서, 나훔서, 하바쿡서, 스바니야서, 하까이서, 즈카르야서, 말라키서

 

히브리 성경은 성경에 배치된 순서에 따라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분류합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역사서로 분류하는 책들 중 일부(신명기계 역사서: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상·하권, 열왕기 상·하권)에도 예언자들이 등장하고 예언 활동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때문에 히브리 성경에서 이를 전기 예언서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예언서의 범주로 묶는 책들(다니엘서 제외)을 히브리 성경에서 후기 예언서라고 부릅니다.

 

Q 예언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요?

 

A 먼저 예언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언’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헤아려 말하는 것’이라는 뜻의 예언(豫言)과, ‘신탁을 받은 사람이 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이나 그 내용’을 가리키는 예언(預言)으로 달리 쓰입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은 후자의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전하다 보면 때로는 미래의 일도 언급해야 하기 때문에 전자의 의미를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습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만나는 예언자가 단순히 미래를 맞히는 요술쟁이나 점쟁이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예언 현상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가나안 등 고대 근동 지방에서 널리 존재했습니다. 예언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나비’는 ‘선견자,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뜻을 포괄했죠. 그들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 생활에서 본질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예언자들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분, 즉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선포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지키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질 때, 예언자들은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하느님의 목소리가 되어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Q 예언서는 어떻게 기록되었나요?

 

A 성경의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예언서도 오랜 기간의 편집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본문으로 최종 집대성되었습니다. 예언서에 쓰인 예언 말씀 중에는 본래 구전으로 전해지던 것이 많지만, 처음부터 글로 기록된 메시지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대 예언자 연구에 따르면, 예언서 가운데 그 이름을 딴 예언자가 직접 저술한 책은 없다고 봅니다.

 

왕조 시대의 초기 예언자들은 메시지를 글로 남기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8세기 이후 왕실이나 성소에 소속된 예언자가 아닌, 하느님께서 부르시어 예언자로 활동한 이들의 메시지가 예언서를 이루었죠. 이렇게 자신의 이름이 예언서 제목으로 남은 예언자를 ‘문서 예언자’라고 하는데, 친저성(親著性) 여부와 상관없이 그들이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글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메시지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확신한 제자들이 그 메시지를 보존 · 전승하고 기록합니다. 또 그 연장선상에서 예언 활동을 하기도 했죠(예를 들면 제2이사야). 그런데 문서화 단계에서 다른 여러 예언자의 신탁이 유명 예언자의 이름 아래 비슷한 주제로 끼어 들어가 합쳐지는 현상도 생깁니다. 또 최종 편집 단계에 이르러서는 단편적 예언 문서들이 당대의 상황과 필요에 의해 재해석되고 수정·보완되기도 하지요.

 

예언서의 발간 작업은 주로 유배 시대와 그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유배 이전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징벌과 재앙을 강한 어조로 선포한 데 반해, 유배 기간과 그 후의 예언자들은 회복과 희망, 위로의 메시지를 주로 남겼지요. 최종 편집할 당시의 종교적 · 사회적 지향과 바람이 예언서 편집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인간이 그 말씀을 받으면 예언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인간에게 전달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고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그 말씀을 간직하고 싶어도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한다(예레 20,9 참조). 주님 말씀이 예언자의 삶 깊숙이 뿌리 내려 그의 내적 힘이 되어 외부로 분출될 수밖에 없다. … 주님 말씀은 하느님께서 부르신 사람의 삶 속에 그대로 들어간다”(《하느님의 목소리》, 15-16쪽).

 

[성서와 함께, 2013년 5월호(통권 446호), 편집부]

 

 


 

 

[성경 첫걸음]

신약성경에 대해 알아볼까요?

 

 

“신약성경을 읽기에 앞서, 우리는 우선 성경이 집대성된 배후에는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성경을 기록하도록 이끌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경 본문들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이보다 앞서 어떤 결정적 사건 - 나자렛 예수가 이 세상에서 활동하셨고,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으며, 죽으시고 부활하신 - 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신약성서 첫걸음》, 11쪽).

 

Q ‘신약’은 무엇을 가리키죠?

 

A 새로운 계약을 뜻하는 신약(新約)은 구약(舊約, 옛 계약)에 대비되는 표현입니다. 본래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어 이스라엘은 야훼 하느님만 섬기기로 약속하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아 지켜 주리라 약속하십니다(탈출 19,5 참조). 유다가 멸망하면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새 계약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예레 31,31-32).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새로운 계약이 실현되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19-20). 그래서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을 ‘옛 계약’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Q 신약성경에는 어떤 책들이 있나요?

 

A 신약성경은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건을 중심으로 저술된 책들의 모음입니다. 27권으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그리스어로 쓰였습니다.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저자가 직접 쓴 자필 원고(原稿)는 하나도 없습니다. 저자가 불러 주는 말을 받아쓰거나 저자가 쓴 것을 베낀 필사본의 필사본이 이어져 온 것이죠. 사본이 파손되면 정성껏 다시 필사한 다음 그 파손된 사본은 불태우거나 묻었다고 합니다. 신약성경은 기원 후 50년경부터 125년경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책이며,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사도들의 활동으로 교회가 꼴을 갖추어 가는 역사는 사도행전에 담겼습니다. 서간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풀이하고 심화하여 교회 공동체의 삶에 적용하는 내용이며, 요한 묵시록은 여러 상징을 동원하여 교회의 현재와 미래 역사를 예고하고 종합합니다.

 

Q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A ‘신약’이라는 말이 ‘구약’이라는 말과의 관계성에서 나온 표현이듯,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의 뿌리에서 탄생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 민족의 후손으로, 유다교의 전통과 토양에서 나고 자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유다 민족의 성경을 자기에게도 열려 있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구약성경의 가치와 중요성을 결코 폄하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루카 24,27)고 전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비추어 구약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계시 헌장>은 다음과 같이 천명합니다. “신구약 성경에 영감을 주신 분이시고 그 저자이신 하느님께서는 신약이 구약에 숨어 있고 신약으로 구약이 드러나도록 지혜롭게 마련하셨다. 그러므로 비록 그리스도께서 당신 피로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지만, 구약성경은 복음선포에 온전히 수용되고 신약 안에서 그 완전한 의미를 얻고 드러내며, 다른 한편으로 신약을 밝히고 설명해 준다”(16항).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깨달아 알게 되면서 그분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데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사실 성경 전체의 심장이며 구약성경에서 걸어 온 길고 먼 여정의 도착점입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이며 교회의 역사입니다. 신약성경이 전하는 메시지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 오직 교회 공동체의 삶에 비추어 신앙의 관점에서 신약성경을 읽는 사람만이, 또 그리스도교를 세우신 예수님의 살아있는 인격을 찾아 나선 사람만이 신약성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성경, 사랑의 편지》, 63-64쪽).

 

[성서와 함께, 2013년 6월호(통권 447호), 편집부]

 

 


 

 

[성경 첫걸음]

복음서에 대해 알아볼까요?

 

 

“모든 성경 가운데, 또 신약성경 중에서도 복음서가 가장 뛰어나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우리의 구원자, 사람이 되신 말씀의 삶과 가르침에 관한 으뜸가는 증언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네 복음서가 사도들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언제나 어디서나 주장하였으며 또 주장하고 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선포하였고, 나중에 성령의 영감을 통하여 사도들과 그 제자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신앙의 바탕을 글로 쓴 것이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네 가지 형태의 복음이다”(<계시 헌장> 18항).

 

Q ‘복음’은 무엇을 가리키죠?

 

A 복음(福音)은 우리말로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을 뜻합니다. 그리스어 에우앙겔리온(ευαγγὲλιον)을 옮긴 표현이죠. 원래 에우앙겔리온은 그리스와 로마 제국에서 전쟁의 승리나 황태자의 탄생, 황제 즉위 등 온 나라가 경축할 만한 기쁜 소식을 백성에게 알릴 때 사용하던 용어였습니다. 신약성경이 집필되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친숙했던 표현인 셈이죠.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단어에 전혀 다른 의미와 성격을 부여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기쁜 소식은 더 이상 세상의 성공과 권력 쟁취가 아니라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Q 복음서는 어떤 책인가요?

 

A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담은 책입니다. 어느 한 사람의 일생을 연대순으로 기술한 전기(傳記)와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 형태를 띤 독특한 문학 유형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제자들을 부르시고, 사람들을 가르치며 치유하시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다 고난을 겪고 돌아가신 후 부활하신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 후에 곧바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먼저 그분이 생전에 직접 일러 주신 말씀과 삶에서 보여 주신 가르침이 존재했죠. 그분이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은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설교하고 선포했습니다. 그렇게 40여 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아마도 일부는 글로 전해지면서 점차 여러 전승이 성격별로 모아졌습니다. 그러한 여러 전승을 복음사가들이 수집하여 일관되게 구성하고 편집한 것이 복음서입니다. 즉 살아 있는 말씀인 기쁜 소식을 글로 체계 있게 정리한 것이 복음서입니다.

 

Q 복음서는 왜 네 권이나 되나요? 서로 어떻게 다른가요?

 

A 각 복음사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각자 고유한 관점으로 기술했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상황과 필요에 맞게 복음 내용을 적용하여 서술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마다 분량과 내용, 신학적 강조점에 차이가 나지만, 서로 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과 삶, 가르침을 온전하게 알려 줍니다.

 

가장 먼저 쓰였다고 추정되는 마르코 복음서는 로마계 이방인을 대상으로 70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복음서 중 가장 짧으며, 이야기체로 예수님의 공생활을 구성하였죠. 마르코 복음사가의 상징은 사자입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유다인을 대상으로 80년경에 쓰였습니다. 족보로 글을 시작하고(마태 1,1-17 참조), 본문에서 서른세 번이나 구약성경을 참조하고 인용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약속이 예수님의 삶과 활동에서 완성되었다고 분명히 밝히려는 의도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의 상징은 사람 또는 천사입니다. 루카 복음서는 그리스계 이방인을 대상으로 80년대 중반쯤에 쓰였습니다. 한층 섬세한 어휘로 세상사에서 펼쳐지는 구원의 역사를 그려 냈습니다. 복음서 중 가장 길며, 유일하게 복음서를 쓴 이유를 밝힙니다(루카 1,1-4 참조). 루카 복음사가의 상징은 황소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모든 이방인을 대상으로 90년대에 쓰였습니다. 하느님 나라 선포를 강조하는 공관 복음과 달리 성부 하느님과 그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성에 주목하죠. 요한 복음사가의 상징은 독수리입니다.

 

흔히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을 묶어 ‘같이 보다’는 뜻의 공관(共觀, 그리스어 synopsis) 복음이라고 하는데, 유사한 표현과 내용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은 어휘나 내용으로 보아 공관 복음 전승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하지만, 자신의 고유한 문체와 신학을 담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만 모은 ‘예수 어록(Q)’이 가장 먼저 존재했으리라고 추정합니다. 이를 토대로 마태오와 루카(어쩌면 마르코도)가 복음서를 저술했기에 각 복음서에 공통 내용이 들어 있다고 가정합니다.

 

“복음서를 읽을 때에는 그 이면의 발전 단계를 알아야 한다. 그것들은 한 개인이 쓴 작품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앙고백이다. 우리는 복음서가 여러 가지 점에서 서로 관련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관계는 복음서에서 발견되는 많은 유사점과 차이점을 설명해 준다. 무엇보다도 복음서는 흥미를 유발시키는 어떤 인물에 관한 정보를 보존하기 위해서만 쓰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복음서가 쓰인 것은 사람들을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초대하기 위해서였다”(《가톨릭 성경 길잡이 신약 편》, 56쪽).

 

[성서와 함께, 2013년 7월호(통권 448호), 편집부]

 

 


 

 

[성경 첫걸음]

사도행전과 바오로 서간에 대해 알아볼까요?

 

 

“신약 성경의 정경에는 네 복음서 이외에도 성령의 영감을 통하여 저술된 성 바오로의 편지와 다른 사도 작가들의 기록들도 포함된다. 이 정경들은 하느님의 지혜로우신 배려로 주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보증하고 바로 그분의 가르침을 더욱더 밝혀주며, 그리스도의 신적 활동이 지닌 구원 능력을 선포하고, 교회의 시작과 그 놀라운 확장을 이야기하고, 교회의 영광스러운 완성을 예고하고 있다”(<계시 헌장> 20항).

 

Q ‘사도행전’은 어떤 책이죠?

 

A 사도행전은 신약성경에서 네 복음서 뒤에 나오는 책입니다.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라는 뜻이죠. 성령 강림 사건 후 사도들은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하신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선포합니다.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에게서 시작된 초대 교회의 형성과 성장 과정이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이야기를 중심으로 담겨 있습니다. 80-90년대 중반에 저술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많은 학자들이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같은 저자의 작품으로 봅니다.

 

“만약에 신약성경에 사도행전이 빠졌다면, 우리는 교회의 태동과 성장과정, 그 과정에 결정적으로 개입하시는 성령과 그분의 이끄심에 따라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와 봉사자들의 모습, 교회가 겪은 박해와 갈등의 양상을 제대로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사도행전은 예수와 사도(교회)의 연속성, 고대 이스라엘과 교회의 연속성을 보여 주며,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성취되어 가는 과정을 증언하므로 중요하다”(《나의 증인이》, 31쪽).

 

Q ‘서간’은 무엇이죠?

 

A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21권이 편지 형식을 띤 서간입니다. 편지(letter)는 이미 고대 사회에서 의사소통의 수단 중 하나였습니다. 개인끼리 오가는 사적 문서이기도 하지만, 개인들이 소속된 한 집단에게 보내는 공식 편지도 포함되죠. 서간(epistle)은 구체적인 의견 교환보다는 체계적인 가르침을 편지 형태에 담은 글입니다. 서간에 담긴 메시지는 여러 사람에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 목적이고 받는 대상도 다수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서간에는 특정 공동체에 보낸 실제 편지들과, 불특정 교우들을 가르치는 서간 형태의 문서가 함께 묶여 있습니다. 편지는 대개 세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발신인의 이름 및 간단한 인사말이 들어간 서두,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담긴 본문, 그리고 축복의 말을 포함한 끝인사입니다.

 

Q 서간은 왜 쓰였나요?

 

A 각 서간은 계기가 있을 때마다 특정한 교회와 수신인들을 위해 쓰였습니다. 많은 경우 신자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 필요한 지침을 주기 위해 작성했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하고 심화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는 사도 바오로가 로마 방문에 앞서 자신을 소개하고 복음을 미리 알리기 위해 쓴 것이고, 코린토 1·2서는 당시 코린토 교회에 생긴 여러 불미스러운 일을 바로잡기 위해 쓴 것입니다. 서간이 그리스도의 선포 내용 전체를 신학적으로 정리하고 종합하기 위한 체계적 결과물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서간을 통해 시대를 초월해 존재하는 실존적 문제와 신앙의 의문, 그리고 이를 해결하는 열쇠인 보편 진리를 동시에 만날 수 있습니다.

 

Q 바오로 서간은 무엇이죠?

 

A 신약성경에 들어 있는 21권의 서간 중에 절반이 넘는 13권이 바오로를 저자라고 밝힙니다. 하지만 그중 7권(로마서, 코린토 1·2서, 갈라티아서, 테살로니카 1서, 필리피서, 필레몬서)만 바오로 친서이고, 나머지 6권(에페소서, 콜로새서, 테살로니카 2서, 티모테오 1·2서, 티토서)은 후대 제자들에 의해 내용이 첨가되거나 편집된 것으로 봅니다. 에페소서, 콜로새서, 필리피서, 필레몬서는 바오로가 옥에 갇혔을 때 썼다는 내용에 의거하여 ‘옥중 서간’이라 부르고, 티모테오 1·2서, 티토서는 교계제도와 사목자의 역할에 대한 내용을 담았으므로 ‘사목 서간’으로 분류합니다.

 

가장 오래된 서간은 50년경에 쓰인 테살로니카 1서로 신약성경 중에 가장 먼저 쓰였다고 봅니다. 50-60년경에 쓰인 바오로 친서들은 80-100년경에 다른 바오로 서간들과 함께 엮여 널리 회람됩니다. 그 사이 복음서가 편집되면서 공동체의 손길을 거쳐 서간의 내용과 신학이 더욱 보강되고 풍요로워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겠죠?

 

“바오로의 전도 활동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연설 방법이나 기술 또는 뛰어난 상술, 메시지의 포장과 표현법이 아닌 다른 것을 보아야 한다. 바오로가 자신의 전도활동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서간 전체를 섭렵해야 할 것이다. 바오로 서간은 그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거나 아니면 간헐적으로 이에 대한 대답 또는 실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바오로 서간과 신학》, 75쪽).

 

[성서와 함께, 2013년 8월호(통권 449호), 편집부]

 

 


 

 

[성경 첫걸음]

가톨릭 서간과 요한 묵시록에 대해 알아볼까요?

 

 

“바오로 서간에 이어서 히브리서가 뒤따르는데 여기에는 누가 쓴다는 말이 없어 저자를 밝혀내기 힘들다. 히브리서 뒤에는 ‘가톨릭 서간’이 따라 온다. … 7권 안에는 저자만 나타날 뿐, 수신인이 정해져 있지 않다. 따라서 이들 편지는 특정 지역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보내는 보편적 편지이므로, 이들을 가리켜 ‘가톨릭 서간’ 또는 ‘공동 서간’ 이라고 부른다”(《서간에 담긴 보화》, 9쪽).

 

Q ‘가톨릭 서간’은 무엇이죠?

 

A 4세기 초에 교회 저술가인 에우세비우스(265-339년)가 바오로 서간 뒤에 이어지는 일곱 개의 성경(야고보서, 베드로 1·2서, 요한 1·2·3서, 유다서)을 ‘가톨릭 편지’라는 이름 아래 묶었다고 합니다. 그 후 라오디케이아 공의회(341-380년)에서 공식적으로 ‘가톨릭’이라 칭하였습니다.

 

가톨릭(Catholic)이라는 말은 ‘일반적, 보편적’이라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카톨리코스(καθολικος)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천주교를 가톨릭이라 부르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모든 시대에 모든 장소에서 믿어’ 왔기 때문이지요. 즉 특정 국가나 지방이나 민족에 국한되지 않고 인류 전체가 믿는 세계적 · 보편적 교회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서간들에 ‘가톨릭’이라는 말을 붙였을까요? 신약성경에 나오는 다른 편지들이 특정한 교회나 교우에게 보낸 편지인데 비해, 가톨릭 서간은 그 내용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이어서 모든 그리스도 교회를 수신인으로 쓴 것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톨릭 서간을 통해 당시 초대 교회가 공통으로 안고 있던 문제들과 그에 대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들이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 우리 공동체와 교회의 삶에도 적용됨을 실감하게 됩니다.

 

Q 묵시 문학이 무엇이죠?

 

A 묵시 문학은 기원전 200년경부터 기원후 100년경까지 유다교에서 유행한 문학 양식입니다. 묵시 문학 작품들은 이 세상의 마지막 상황을 알려 주기보다 ‘하느님 진노의 날’이 꼭 온다고 기술합니다. 현세 이후에 다가올 세계는 하느님께서 직접 다스리며 선(善)과 의(義)를 이루시는 세상인데, 이 새로운 세계가 열리려면 하느님께서 악惡으로 얼룩진 이 세상에 직접 개입하셔야 합니다. 그날이 악인들에게는 공포와 심판의 날이지만 주님의 자녀들에게는 영광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꿈과 희망에 대해 상징적 표현으로 기술한 문학 형태가 묵시 문학이죠. 신약성경의 요한 묵시록은 유다교 묵시 문학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Q 요한 묵시록은 어떤 책인가요?

 

A 이 책에 나오는 첫 단어 ‘아포칼립시스(Ἀποκάλυψις)’가 묵시 문학 장르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계시啓示’를 가리키는 이 단어는 ‘덮개를 벗기다, 숨은 것을 드러내 보이다’ 등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이 작품을 ‘요한’ 묵시록이라 부르는 이유는, 파트모스 섬에 칩거했던 사도 요한이 이 묵시록을 썼으리라고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학자에 따라서는 이 책의 문체와 신학 사상을 요한계 문헌과 비교했을 때 공통점보다 다른 점이 많다고 하여 다른 저자의 작품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일정 부분의 연관성은 인정하지요.

 

저자는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곧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 교회를 수신인으로 하여 신자들에게 용기를 주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시련과 박해를 겪는 이들에게 하느님과 함께 누릴 절대 미래를 제시하고, 이 기쁜 소식을 고유의 상징 언어로 기술하죠. 저술 연대는 1세기 말로 추정합니다. 당시 황제 숭배 관습 등 로마 세계의 질서에 맞서면서 어려움을 겪던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신앙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집필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 묵시록에는 신비적 표상과 직관적 표현이 가득하여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론적 · 교회론적 · 종말론적으로 중요한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어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동시에 성경 전체를 마무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묵시록은 … 특정한 지역의 교회에 필요한 메시지를 써보낸 글이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실재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 따라서 묵시록의 독자는 이 책을 어느 한 부분만 골라 확대 해석하지 말고 여러 가지 신학 사상을 유념하면서 이 책 전체를 통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 환난과 박해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회 공동체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주권을 각인시키려는 저자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성서 입문 하권》, 709쪽).

 

[성서와 함께, 2013년 9월호(통권 450호), 편집부]

 

 


 

 

[성경 첫걸음]

성경의 백성에 대해 알아볼까요?

 

 

“인간 예수는 믿음의 공동체에서, 죽음에 승리한 부활하신 분이요 주님이기에 앞서 이스라엘 민족의 일원으로 태어나셨다. 따라서 그분에게는 조상이 있었고 그 조상의 역사, 언어와 풍토, 문화 및 종교 안에서 성장하셨다. 그분의 조국은 분명히 이스라엘이었으며 우리는 이 민족의 역사를 전제할 때 그분의 생애와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성서의 역사적 배경》, 5쪽).

 

Q 누가 성경의 백성이죠?

 

A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 백성의 역사는 아브라함과 함께 시작합니다. 성경은 셈족의 목자인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의 우르 지역에서 살다가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팔레스티나 땅(당시 가나안)으로 옮겨 갔다고 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원조인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순명하여 가나안 땅으로 떠난 이야기는 창세기에 담겨 있습니다(창세 12,1-5 참조). 아브라함 이야기가 이사악과 야곱, 야곱의 열두 아들로 이어지면서 후손의 수와 영역이 계속 확장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실제 기원은 이집트 탈출과 연결된다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기원전 13세기에 이집트 북부 고센 지방에 살던 히브리인들이 하느님의 인도로 고된 노예살이에서 해방되어 이집트를 탈출합니다. 그 후 40년 동안 시나이 광야를 헤매다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한 민족 공동체가 탄생했다고 보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으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탈출 24,7)다고 약속하고,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 스켐에 모여 하느님을 섬기며 그분의 말씀을 듣겠다고 서약합니다(여호 24,1-28 참조). 열두 지파는 저마다 나누어 받은 영토에서 자치권을 행사하고 번성해 나갑니다.

 

Q 선조들의 삶은 어떠했나요?

 

A 고대 근동의 경제생활은 농경과 목축이 혼합된 형태였습니다. 그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은 주로 목축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가족과 함께 생존에 필요한 가재도구를 가축에 싣고 다니다가 적당한 곳에 천막을 치고 얼마간 머무릅니다. 농경과 목축을 겸하거나 그것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으며 산 것인데, 가뭄이나 전쟁 같은 위기가 닥칠 때 부족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서로 보완책이 되었을 듯합니다.

 

기원전 13세기에 가나안 땅의 산악 지대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은 농경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척박한 광야 생활의 불편을 감수하는 그들에게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식되었지만, 그곳은 경작하기에 좋은 토양이 아니었습니다. 토질이 비옥한 평야의 면적이 한정되어 가파른 산비탈과 자갈밭도 개간하여 씨를 뿌려야 했죠.

 

그들 삶의 기반은 친족 공동체였습니다. 선조들에게 가족은 그 자체가 소규모 생활 공동체요 종교 공동체였습니다. 가부장 사회였으므로 중요한 일의 결정권은 아버지에게 있고, 가장은 가족을 보호하고 생활의 질서를 잡으며 관습에 따라 규율을 집행했습니다.

 

Q 이스라엘인? 히브리인? 유다인?

 

A 하느님 백성을 가리킬 때 ‘이스라엘인’, ‘히브리인’, ‘유다인’이라는 세 명칭을 함께 사용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선조 야곱에게 지어 주신 새 이름(창세 32,29 참조)인 동시에, 하느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와 그들의 영토를 가리키며(여호수아기 참조), 솔로몬이 죽은 뒤 남북으로 갈라진 두 나라(남유다, 북이스라엘)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인은 이스라엘인과 같은 명칭입니다(창세 14,13 참조). 어원은 불분명한데 ‘에베르’(창세 11,14) 또는 ‘아바르’[히브리어 avar: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오다’](여호 24,2-3 참조)와 연관하기도 합니다. 또 기원전 2천 년대 고대 근동 문헌에 나오는 ‘하비루인’(노예, 천민, 유랑민 등의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유다인이라는 명칭은 선조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에게서 비롯한 유다 지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왕국이 남북으로 갈라질 때, 유다 지파가 절대다수였던 남쪽 왕국은 유다라는 이름을 유지했습니다. 아시리아에게 멸망한 후 흩어져 버린 북이스라엘 지파들과 달리, 그들은 바빌론 유배 시기에도 조상의 전통과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 냈습니다. 그리하여 유배가 끝나고 팔레스티나에 돌아왔을 때 유다 지파가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고, 그 후 이스라엘 백성을 유다인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선조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은 ‘우리는 누구이며, 누구와 같지 않은가?’라는 문제를 계속 제기한다. 그들은 선조들의 기원을 메소포타미아로 전하며, … 결코 가나안 땅의 민족들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 가나안 주민과 다르다고 선을 긋는 것은 경제생활뿐 아니라 종교생활의 차별성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시도로 여겨진다”(《보시니 참 좋았다》, 175-176쪽).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께서 친히 선택한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을 뿌리 깊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을 비롯한 선조들은 비단 어느 한 종족의 시조라는 민족 계보상의 의미를 넘어섭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며 그분을 전하는 모든 이는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 새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전하는 성경은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역사를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0월호(통권 451호), 편집부]

 

 


 

 

[성경 첫걸음]

성경의 땅에 대해 알아볼까요?

 

 

“땅은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진실성과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충성이 실현되는 곳이다. 땅은 또한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의 가시적 보증이다. 그리고 이 보증은 생기 없는 상징물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피조물들과 만나고 삶을 통해서 그것들을 성화시켜 나가라고 사람들을 부르는, 생생하고 간절한 초대이다”(《주석 성경》, 529쪽).

 

Q 성경의 땅은 어디를 가리키죠?

 

A 성경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곳은 고대 근동(近東) 지방입니다. 유럽을 기준으로 비교적 서양에 가까운 동쪽 지역이라는 뜻이죠. 곧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세 대륙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동서로는 터키의 에게 해안에서 중앙 이란까지, 남북으로는 터키 중앙에서 홍해까지를 일컫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땅은 범위가 넓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하고, 야곱의 후손들은 이집트에서 오랫동안 종살이를 하죠. 메소포타미아에서 팔레스티나에 이르는 농경 지역이 초승달 모양이라서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 부릅니다. 지금의 팔레스티나 지역은 그 일부에 불과하죠. 하느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하시고 그들이 살도록 허락하신 땅(창세 17,8; 탈출 3,8; 신명 32,49; 여호 11,23 참조)에는 이미 다른 종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전쟁을 치릅니다.

 

‘팔레스티나’(영어 ‘팔레스타인’)라는 지명은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과 대립하던 필리스티아인(판관기와 사무엘기 참조)에게서 유래했습니다. 135년 제2차 유다인 항쟁을 진압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유대아(Judaea)’라는 이름을 지도에서 완전히 없애면서 그곳을 팔레스티나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했다고 합니다.

 

Q 팔레스티나의 환경은 어떤가요?

 

A 팔레스티나에서는 상업과 무역이 활발하지 못했습니다. 팔레스티나는 북쪽의 메소포타미아와 남쪽의 이집트 사이에 자리 잡아, 이 지역을 통해 다양한 사상과 문화, 상인들과 군대가 오갔습니다. 그런데도 마땅한 항구가 없어 북쪽의 페니키아와 지중해를 통해 유럽과 교류하였습니다. 결국 이러한 조건 때문에 팔레스티나는 고대 근동 강대국들의 세력 다툼에 자주 휘말리게 되어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지중해성 기후인 팔레스티나는 남한 면적의 1/3 정도 되는 좁은 영토지만, 지역마다 강우량과 기온의 차이가 뚜렷합니다. 해안에서 중앙 산악 지대까지는 비가 적절히 내려 지중해성 농작물(올리브, 포도, 밀, 보리 등)이 풍부합니다. 사해 옆의 유다 광야 지방과 네겝은 반半 사막이어서 계절에 따라 경작과 양 목축이 이뤄집니다. 이런 기후 조건을 지닌 일부 지방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탈출 3,8)이라는 명칭에 손색이 없지만, 그렇지 못한 곳은 척박한 지형과 기후 탓에 환경이 취약하고 불안정합니다.

 

Q 현재 팔레스티나의 상황은 어떠한가요?

 

A 사실 ‘팔레스티나’는 그곳에 세워진 국가의 이름인 ‘이스라엘’로 불리기도 합니다. 기원전 63년에 로마 제국이 팔레스티나를 정복하여 시리아 속주에 병합합니다. 유다 민족의 제1차 항쟁이 실패로 돌아간 70년에는 성전이 소실되고 로마의 직할 속주가 되죠. 132년에 봉기한 제2차 항쟁도 실패로 끝나 유다인들은 로마 제국의 명령에 따라 팔레스티나를 떠나게 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팔레스티나는 7세기에 칼리프(이슬람교 국왕) 오마르에게 점령되어 16세기 초까지 900년 가까이 아랍인의 통치를 받습니다. 이어서 20세기 초까지 400년 동안 오스만투르크 제국(현재의 터키)의 지배를 받습니다.

 

한편, 나라를 빼앗겼다고 여긴 유다인들은 시온주의 세계 운동, 즉 통일 국가를 만들기 위해 유다인을 팔레스티나 땅으로 복귀시키려는 유다 민족 운동을 전개합니다. 유다인들은 1897년에 국가 건립 계획안을 공표하고 팔레스티나로 이주하기 시작합니다. 이어 팔레스티나 땅을 위임 통치하던 영국의 지지를 받아 수많은 유다인이 팔레스티나로 이주하죠. 유다인이 대량 학살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엔은 모든 아랍국이 반대하는 가운데 팔레스티나 땅을 나누어 유다인들이 나라를 세우는 데 다수결로 동의합니다(1947년). 영국군이 팔레스티나를 떠난 1948년에 유다인 공동체는 이스라엘 국가의 수립을 선포합니다. 이에 반대한 아랍국들이 연합하여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였으나, 정치적 · 경제적 실권을 쥔 전 세계 유다인들과 서방 세계의 비호 아래 이스라엘은 팔레스티나에서 자신들의 땅을 점점 넓혀 가게 됩니다. 성경의 땅 팔레스티나는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에 벌어지는 테러와 전쟁, 폭력과 살상으로 인해 오늘날 분열의 땅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경 말씀대로 우주를 창조하신 분은 주님이시고 그분만이 유일한 주권자이자 주인이시며 온 땅이 그분께 속한다는 것이다. 그분이 민족들에게 땅을 분배하신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그분의 거처이고 유산이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그에게 맡기신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기 위해 이 땅을 사용할 뿐이다. 여러 성경 말씀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집에 거주하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임을 상기시킨다. … 그 땅은 하느님의 것으로 온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 있어야 한다”(《성경의 세계와 지도》, 28쪽).

 

[성서와 함께, 2013년 11월호(통권 452호), 편집부]

 

 


 

 

[성경 첫걸음]

성경을 어떻게 읽고 기도해야 할까요?

 

 

“성경은 ‘영성 생활의 순수하고도 영구적인 원천이 되는’(계시 헌장 21항) 기도와 묵상의 책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진정한 친교가 이루어지도록 돕는 도구입니다”(《성경, 사랑의 편지》, 72쪽).

 

Q 성경을 어떻게 읽고 해석해야 할까요?

 

A 성경 읽기는 하느님과 인간이 ‘짝지어 하는 독서’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는 온순히 경청하고 삶으로 응답하는데, 대화의 주도권은 먼저 말을 건네신 하느님께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목적은 그것을 배우고 익혀 우리 신앙을 성장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이 믿는 이들의 공동체에서 탄생했기에, 우리는 공동체에서 성경을 이해할 때 올바른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고 활동하시는 교회의 살아 있는 한 부분이기에 성경에서 영적 생명을 얻습니다. 교회와 분리된 성경 읽기는 임의적 해석과 주관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교황 대(大)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집 안에서 먹어야 할 빵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거룩한 말씀이라는 양식으로 양육되기 때문입니다.”

 

성경 읽기에는 항상 기도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이는 하나의 행위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반적 태도를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항상 열려 있는 단순하고 겸손한 신뢰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Q 성경으로 어떻게 기도하나요?

 

A 교회의 오래된 기도 전통 중에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가 있습니다. 성령의 빛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여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여정을 말합니다. 이 기도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기 전에 바치는 기도’나 ‘성령 송가’를 바칩니다. 성령께서 비추시어 말씀을 신앙으로 알아듣게 해 달라고 자유롭게 기도해도 좋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읽기(lectio)’입니다. 말 그대로 성경을 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생각으로 주의를 기울여 읽습니다. 본문을 존중하면서 말씀의 뜻을 발견하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묵상하기(meditatio)’입니다. 방금 읽은 성경 말씀을 곰곰이 생각하며 문맥에 유의해 전체 내용을 파악합니다. 우리의 삶과 성경 말씀을 비교하고, 말씀이 나를 어떻게 비추시는지 바라봅니다.

 

세 번째 단계는 ‘기도하기(oratio)’입니다. 말씀이 내 삶과 연결되고 만나는 부분, 어떤 양상으로든 내 마음을 건드린 데 대해 주님께 말씀드립니다. 기도에서 성경 말씀은 찬미와 감사, 탄원과 신뢰, 참회와 축복을 표현하는 동기가 됩니다.

 

마지막 단계는 ‘관상하기(contemplatio)’입니다. 관상을 의미하는 영어 contemplation을 풀면 con(함께하다), temps(시간 · 공간), plation(두다 · 있다)입니다. 즉 그 시간과 공간에 내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읽은 말씀에 머물러 말씀이 자연스럽게 내게 배어, 내용이 나의 것이 되고 내가 그 내용이 되어 말씀과 내가 일치하는 것이 관상입니다. 잠시 눈을 감고 조용히 그분 안에 머물며 그분께 귀 기울이는 때입니다.

 

Q 성경의 어떤 부분을 읽어야 하나요?

 

A 성경은 계시의 전체 맥락에 따라 읽어야 하기에 어느 한 부분을 선별하여 읽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회의 저명한 영성신학자 가스페리스(Francesco Rossi de Gasperis) 신부는 ‘성경 통독(Lectio Divina Continua)’을 권합니다. 이는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으로, 곧 창세기 1장 1절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에서 요한 묵시록 22장 21절 “주 예수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과 함께하기를 빕니다”까지 순서대로 읽는 것입니다. 이로써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구원의 역사를 깨닫게 됩니다. 이런 성경 통독에는 어떤 움직이는 특수한 힘, 즉 영적 역동성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빠질 수 없는 조건이 있습니다. 신앙입니다. 성경의 저자가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으로 나를 투신해 성경을 읽어 갈 때 ‘말씀’이 활동하십니다. 하나 더 중요한 것은 매일 충실하게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꾸준히 읽고 기도하여 내 생활에 말씀이 스며드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과 예수님, 단둘이 하는 영적 수업이라 여기고, 원하는 만큼 여건에 맞춰 매일 읽는 것입니다. 바쁜 일상에서 어떤 계획을 꾸준히 실행하기란 쉽지 않지만,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익숙해지고 그 나라에 뿌리내릴 수 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든 성경 통독이든 그것이 실제 삶으로 나아갈 때 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를 내면에서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열매는 무엇이 하느님의 업적이고 본질이며, 무엇이 무익(無益)하고 악에서 오는 것인지 분별하는 능력이고, 복음의 가치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용기이며, 말씀에 맛들이는 기쁨과 거기서 피어나는 내적 평화입니다.

 

“거룩한 공의회는 모든 신자 … 들이 성경을 자주 읽음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필리 3,8)를 얻도록 강력하고 각별하게 권고한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계시 헌장> 25항).

 

[성서와 함께, 2013년 12월호(통권 453호),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