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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아가, 노래들의 노래 - 안소근 실비아 수녀

by 파스칼바이런 2018. 6. 11.
[아가, 노래들의 노래]

 

[아가, 노래들의 노래]

(1) 아름다운 노래, 아가

안소근 실비아 수녀

 

 

 

 

책의 제목 ‘아가’는 1,1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뜻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로 번역된 히브리어 표현을 한 단어 한 단어 옮기면 ‘노래들의 노래’이지요. 지성소가 ‘거룩한 것들 가운데 거룩한 것’이듯, ‘노래들의 노래’는 가장 뛰어난 노래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책 제목을 아가(雅歌), 아름다운 노래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1세기까지도 이 ‘아름다운 노래’가 성경에 속하는지 논란을 벌였습니다. 라삐 아키바는 아가가 당연히 거룩한 책이라고 단언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가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날에 비하면 온 세상 전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성문서 모두가 거룩하지만 아가(노래들의 노래)는 거룩한 가운데에서 가장 거룩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성소가 거룩하듯 아가가 지극히 거룩한 책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가를 보는 두 가지 시각

 

그런데 라삐 아키바 시대의 유다인들 사이에서 왜 아가가 성경에 속하는지 속하지 않는지 의견이 갈렸을까요? 이는 아가의 첫 구절에서 바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아, 제발 그이가 내게 입 맞춰 주었으면!”(아가 1,2) 성경에 어쩌다 이런 구절이 들어갔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이 구절은 정말 여자가 남자의 입맞춤을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이 문제에 관해 토론한 역사를 짚어 보면, 두 가지 질문이 한데 얽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가가 순전히 남녀의 인간적 사랑을 노래한 것이냐, 아니면 다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남녀의 사랑이라는 외형을 빌어 표현한 것이냐 하는 질문입니다. 이어지는 둘째 질문은 아가가 인간적 사랑을 말했다면, 어떻게 성경의 일부가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책 내용 안에 뭔가 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을 생각해 봅시다. 아무런 판단 없이 아가의 본문을 읽으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나왔다가 양치기가 나오기도 하고 공주가 나왔다가 염소를 치는 아가씨가 나오기도 합니다. 어쨌든 남자와 여자가 이 책의 주인공입니다. 여자는 책의 첫머리부터 남자의 입맞춤을 그리워합니다.

 

그런데 고대와 중세의 여러 해석자는 젊은 남녀의 사랑을 적나라하게 노래한 책이 성경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성경으로 인정된다는 것은 책의 내용에 뭔가 숨은 뜻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우의적(寓意的) 해석’이 오랫동안 주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아가의 우의적 해석

 

‘우의(allegoria)’는 겉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다른 것을 말한다는 뜻입니다. 아가의 우의적 해석은 여러 가지지만 유다교의 전통을 먼저 살펴보면, 유다교는 오랫동안 아가를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 해석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사랑을 혼인 관계에 비겨 이야기한 구약성경의 전통을 배경으로 합니다. 호세아를 쉽게 떠올릴 수 있고(1-3장 참조), 그밖에도 에제키엘서(16장, 23장 참조) 등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 해석 노선에서, 아가에 여러 번 나오는 “나의 연인은 나의 것, 나는 그이의 것”(아가 2,16)이라는 표현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정의하는 계약을 암시합니다. 상대에게 서로 속하는 남녀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이지요.

 

이러한 유다교의 전통적 해석은 구약성경의 아람어 번역본인 타르굼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타르굼의 어떤 부분은 히브리어 성경을 거의 충실하게 아람어로 옮겼지만, 어떤 책에서는 번역자가 많은 내용을 첨가했습니다. 아가의 타르굼이 대표적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아가의 타르굼에는 번역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경 본문에 많은 내용이 첨가되어 아가를 풀이하고 있습니다.

 

타르굼에 따르면 아가는 이집트 탈출부터 종말의 부활에 이르는 이스라엘 역사를 보여 줍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를 찾고 함께 사랑을 나누는 여정에서 타르굼의 저자는 그 역사를 읽어 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것으로 선택하시고, 성전에서 이스라엘의 제사를 받아들이십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지어 하느님에게서 떠나가지만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이스라엘을 일깨워 주십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이 재건된 다음 메시아 시대가 오고 의인들이 부활한다는 역사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아가의 우의적 해석은 다양하게 전개되었습니다. 먼저 유다교의 해석과 대조를 이루며 아가의 신부가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신부(교회)라고 보는 해석이 있었습니다. 유다교의 해석과 비교한다면, 적용 대상은 서로 다르지만 해석 방법 자체는 근본적으로 동일합니다. 아가에서 말하는 남녀의 사랑이 뭔가를 말하기 위한 부호 같다고 보고, 주인공 여인을 신앙 공동체와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유다교에 없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크게 발전하지 않았던 한 종류의 우의적 해석이 중세를 거치면서 그리스도교에서 꽃피게 됩니다. 그것은 아가의 여인을 그리스도인 개인의 영혼으로 보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 또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나누는 사랑의 역사가 아가에 표현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고대에 오리게네스도 그렇게 해석했고, 그 후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아빌라의 데레사, 특히 십자가의 요한 등 신비가들이 그와 유사하게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아가에서 노래하는 사랑이, 영혼이 하느님과 온전히 결합되는 신비로운 체험을 표현했다고 봅니다.

 

아가가 인간적 사랑을 말한 것이라면

 

우의적 해석을 주장하는 이들 대부분은 그것이 아가의 본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곧 남녀의 사랑을 말하는 것은 오직 다른 것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라삐들이 아가를 연애 노래로 해석하는 것에 맹렬히 반대하면서 영적 의미를 강조했던 것을 보면, 당시에도 아가를 단순한 사랑 노래로 받아들인 이들이 없지 않았음을 방증합니다. 그 후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에서도 주류를 형성하지 못했지만, 아가의 자구적 해석을 주장하는 이들이 때때로 나타났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두 가지 질문 가운데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아가는 남녀의 인간적 사랑을 있는 그대로 노래했다고 보는 이가 없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에서도 의견이 다시 갈라집니다. 두 번째 질문, ‘아가가 인간적 사랑을 말한 것이라면 그런 책이 어떻게 성경의 일부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어떤 이들은, 주로 고대와 중세에 아가가 인간적(육적) 사랑을 노래했기 때문에 성경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대표적 예가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였습니다(4-5세기). 그는 아가에서 하느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 책이 영감을 받은 책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솔로몬이 파라오의 딸과 결혼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 이방 여자가 아름답고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이라고 알리기 위하여 만든 노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주장은 많은 이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오히려 교회에서 단죄를 받았습니다. 어쨌든 아가는 성경에 속했고 그것을 반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인간적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 성경의 내용으로 부적절하다고 보았다는 점입니다. 우의적 해석을 하던 이들 가운데에도 많은 이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중세와 근대의 몇몇 저자도 아가가 인간적 사랑을 주제로 삼았다고 보았지만, 그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적 사랑은 성경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남녀의 사랑이 아름답다고 노래한 것이 과연 죄스러운 일이고 구약성경에 어울리지 않는 것일까요? 성경을 보면 인간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은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하는 경탄입니다. 이것부터 성경에서 삭제해야 할까요? 인간적 사랑의 찬란함을 노래한 ‘아름다운 노래’는 오히려 창조선 선성(善性)에 대해 흔들림 없는 믿음을 보여 주는 구약 신학의 절정이 아닐까요? 다음 달에는 이 관점에서 아가를 바라보는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2년 1월호(통권 430호)]

 

 


 

 

[아가, 노래들의 노래]

(2) 벗들아, 사랑에 취하여라(아가 5,1)

안소근 실비아 수녀

 

어떤 유다교 학자는 아름다운 노래, 아가를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가가 열쇠를 잃어버린 자물쇠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호에서는 과거에 아가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었다고 훑어보았습니다. 고대부터 근대까지 해석의 주류를 이루어온 것은 아가를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아니면 그리스도와 교회 또는 그리스도와 영혼의 관계에 적용시키는 우의적 해석이었습니다.

 

감각적이고 성적인 사랑의 신성함을 노래한 아가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은 근대에 들어서부터였습니다. 르네상스와 인본주의, 종교개혁,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인간적인 것’ 그 자체가 지니는 가치를 서서히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 그리고 역사에 대한 관심과 성경에 대한 비판적 연구 등의 요인들이 평가의 기준을 변화시켰습니다.

 

고대 근동 문화를 잘 알게 된 것도 나름대로 큰 역할을 했습니다. 19세기에 이르러 아가를 당시 서양인들이 새롭게 알게 된 시리아의 혼인 풍습이나 이집트의 연애시와 비교하게 되고, 이에 따라 아가가 이스라엘 땅에서 두 젊은 남녀가 서로를 향하여 뜨거운 마음으로 불렀던 사랑 노래였을 가능성이 점점 더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발견보다 더 의미가 깊었던 변화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적 사랑의 가치를 새롭게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고대와 중세에도 자구적 의미를 주장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지만, 그들은 아가가 ‘그런’ 사랑을 노래한다는 사실이 아가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보았지요. 그런데 과연 아가가 남녀의 사랑 노래라면 성경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일까요? 이제는 그 물음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게 됩니다. 고대와 중세에는 아가를 연애 노래로 부르는 것이 성경의 거룩함을 침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면, 근대 이후에는 오히려 ‘바로 그’ 사랑, 감각적이고 성적인 사랑의 신성함을 노래하는 데에 바로 이 책의 중요성이 있다고 보게 됩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책이 당당하게 성경의 한 권이 될 수 있다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창조의 선성을 믿는 사람들의 노래

 

이러한 주제는 구약성경의 신학과 인간학에서 온전히 일치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 현대의 아가 해석에 따르면, 창세 1장에 반복되는 이 확신이 아가 전체에 깔려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에 선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지혜 11,24). 인간의 성(性)도 마찬가지입니다. 꽃이 피고 새가 울 때(아가 2,12 참조) 그 아름다움을 보며 그들을 만드신 하느님을 찬미한다면, 아름다운 인간 남녀의 사랑을 보며 경탄하는 것이 하느님을 거스르는 일일까요? “하느님께서는 …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바로 이러한 하느님 창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이 아가의 자구적 의미입니다.

 

구약성경 특히 지혜문학에서 성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잠언이나 집회서 같은 책을 보면 여자에게 잘못 빠지는 것의 위험을 경계하라고 누누이 경고합니다. 그러나 아가는 그런 두려움을 뛰어넘습니다. 아가의 저자가 철이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가는 오히려 위험성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사랑에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 사랑이 나를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죽음의 물살 같은 그 사랑에 자기 몸을 내맡길 수 있는 사람(아가 8,6-7 참조),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강하게 창조의 선성(善性)을 믿는 사람들의 노래입니다. 아가는 창세 3장에서 인간의 범죄로 얼룩진 세상의 사랑이 아니라 창세 2장, 남녀가 서로를 바라보며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하며 환성을 지르던 그 순수한 인간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가를 ‘창세 2장에 대한 주해’라고 말하는 저자도 있습니다.

 

이 배경에서 아가는 남녀의 사랑을 죄로 여기거나 불결하다고 금하지 않습니다. “먹어라, 벗들아. 마셔라, 사랑에 취하여라”(아가 5,1). 사랑에 빠지지 말라고, 정신 차리고 있으라고 말하지 않고 도리어 그 사랑에 흠뻑 젖으라고 말합니다. 원죄 이전의 티 없이 순수한 인간으로 돌아가,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낙원으로 돌아가, 인간의 죄로 손상된 남녀 관계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뜻하셨던 그 관계대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정복되어 자신을 온전히 상대방에게 내주는 사랑

 

이것이 아가의 일차적 의미라면, 앞서 소개한 것과 같은 여러 가지 해석에 대해 어떤 가치를 부여해야 할까요? 그것들을 하나로 이어 주는 끈이 있습니다. 곧 ‘사랑’이라는 주제입니다. 예언자들이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혼인 관계에 비유했고,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같다고 말했다면, 그것은 그 관계 안에 부부의 사랑 같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공통점 때문에 아가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아가에서 그 면을 크게 부각하지 않지만, 아가의 주인공은 사실 부부입니다(“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아가 4,9). 아가의 주인공인 여인이 자기 연인의 사랑에 정복되어 자신을 온전히 상대방에게 내주는 것이라면,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교회는 그리스도와 그런 관계에 있고 그래서 아가를 자신의 노래로 부를 수 있습니다.

 

이론상 명확하게 구분해 두자면, 아가는 본래 하느님과 이스라엘 또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을 읊은 노래가 아닙니다. 아가는 남녀의 사랑, 감각적이고 인간적인 사랑을 노래합니다. 그것이 아가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하느님과 이스라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나타내는 상징이나 비유가 될 수 있으므로 아가는 그 관계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아가의 저자는 솔로몬이 아니다(?)

 

본문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마무리하면서 몇 가지를 덧붙여 둡니다. 아가 1,1에서는 이 책이 “솔로몬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저자가 솔론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 책에서는 솔로몬에 대해 이야기할 때(3,9; 8,11 등 참조) ‘나는’이라고 하지 않고 ‘솔로몬은’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8장의 경우는 솔로몬을 은근히 비판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책에 사용된 언어도 솔로몬 시대의 히브리어가 아닙니다. 일부러 고풍스런 표현을 사용한 예가 있다 해도, 문법적 특성을 보거나 외래어와 같은 새로운 단어를 보아도 이 책은 최소한 유배 이후, 아마도 헬레니즘 시대의 작품으로 생각됩니다.

 

헬레니즘 시대의 문화는 국제적이었습니다. 아가에서 이집트 문화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는 것 역시, 솔로몬 시대의 흔적이라기보다 헬레니즘 시대에 이루어진 문화 교류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여인을 ‘예루살렘처럼 어여쁘다’(아가 6,4 참조)고 말하는 저자는, 자신의 문화적 · 종교적 전통에 강한 긍지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다른 문화와 대화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줄 알았습니다.

 

숨은 듯이 깃들어 있는 하느님의 지혜 발견

 

그렇다면 이렇게 늦은 시기에 작성된 책을 왜 ‘솔로몬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고 할까요? 히브리 성경에서는 잠언, 아가, 코헬렛을 솔로몬이 썼다고 말합니다(여기에서 히브리 성경이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제2경전을 제외한, 히브리어로 된 유다교의 성경을 가리킵니다). 사실은 그중 어느 것도 실제로 솔로몬이 쓴 것은 아닙니다. 잠언의 경우 오래된 잠언들도 모아놓은 것이니 혹시 일부가 솔로몬 시대부터 전해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 책들을 솔로몬에게 귀속시키는 것은 역사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지혜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지혜’는, 외견상 구약성경의 다른 부분들에 비해 이스라엘의 고유한 신앙만이 아닌 인류 공통을 위한 가르침을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들에게서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다”(1열왕 5,14)고도 하지요. 그러나 조금만 더 들어가 보면 다른 민족들의 지혜와 구별되는 이스라엘 지혜의 특징은, 바로 그 ‘현세적’ 사물들 안에 숨은 듯이 깃들어 있는 하느님의 지혜를 발견하는 데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가 역시 그런 특성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 솔로몬의 책답게 이 책은 사랑과 하느님에 대해 직접 설교하지 않습니다. 감추어진 진리를 알아보는 지혜를 터득하게 될 때 비로소 이 책 안에 들어 있는 신앙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성서와 함께, 2012년 2월호(통권 431호)]

 

 


 

 

[아가, 노래들의 노래]

(3) 그 사랑이 원할 때까지(아가 2,7)

안소근 실비아 수녀

 

 

아가에서는 “우리 사랑을 방해하지도 깨우지도 말아 주오, 그 사랑이 원할 때까지”(2,7; 3,5; 8,4)를 후렴구처럼 여러 번 되풀이하여 말합니다. 사랑에 홀린 남녀를 누가 막을 수 있을까요? 겉보기에 둘을 떼어놓을 수 있다 하더라도 마음을 갈라놓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사랑하라고 법으로 정한다고 무작정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하지 말라고 명령한다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고 있는, 또는 사랑하지 않으려 하는 이도 자기 마음대로 사랑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가의 연인들은 “우리가 원할 때까지” 사랑하게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고, “그 사랑이 원할 때까지” 방해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제부터 아가 본문을 읽으려고 하는데 도무지 계획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지금 아가를 읽기 시작하면 언제 끝날지도 전혀 모르겠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어떻게 될지, 그 알 수 없는 길을 오직 사랑의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듯 아가를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넘치는 사랑의 감정을 쏟아 놓은 책

 

아가의 짜임새를 알아보기 어려운 것도 어쩌면 사랑 자체를 도식화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가는 사랑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아니라 넘치는 사랑의 감정을 쏟아 놓은 책입니다. 연애편지에서 중요한 것은 추론 과정이 아닙니다. 같은 말을 끝없이 반복해도 사랑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쌍둥이라서 그것을 잘 압니다. 저희 둘은 “응”이라는 한 글자로 자주 메일을 주고받습니다. 이런 메일을 가지고 어떻게 본문의 구조를 논할 수 있을까요?

 

여러 사람이 정말 여러 가지로 아가의 구조를 설명했습니다. 사실 지금도 한 의견이 정설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상당수의 학자가 아가에는 구조가 아예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가가 단순히 여러 개의 사랑 노래를 엮어 놓은 책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대중가요 모음집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아가의 노래들 안에서도 공통점이 눈에 띕니다. 앞서 말한 “우리 사랑을 방해하지도 깨우지도 말아 주오, 그 사랑이 원할 때까지”라는 후렴구 외에도 몇 가지 후렴구가 1-8장에서 몇 번씩 반복하여 사용됩니다. 사슴, 노루, 나리꽃(또는 연꽃), 목동, 솔로몬, 정원 등 여러 은유도 한 단락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가 전체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서로 무관한 여러 노래를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학 작품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의 문학 작품이라면 저자가 구상한 어떤 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아가의 단일성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사랑의 감정

 

어떤 이들은 아가에서 한 편의 연극 같은 줄거리를 찾아내려 했습니다. 예를 들면, 아가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은 포도원을 가꾸고 염소를 치는 시골 처녀라고 보고, 이 아가씨의 연인은 양치기이며, 중간에 끼어드는 솔로몬은 그들의 사랑을 방해하고 아가씨를 차지하려 하는 인물로 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뒷이야기는 시골 아가씨가 솔로몬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끝까지 자기 연인을 사랑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식으로 등장인물을 나누고 서사적 줄거리를 찾다 보면 본문을 줄거리의 틀에 꿰어 맞추게 됩니다. 이를 가리켜 ‘본문에 무리를 가한다’고 하는데, 하다 보면 맞지 않는 부분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실 상충하는 본문도 많기에 아가가 단순히 노래들의 모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을 다시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인물들을 보면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으로 말하자면, 아가의 솔로몬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인물이 아닙니다. 3장의 솔로몬은 1장의 목동과 동일 인물입니다. 여인이 사랑하고, 여인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혼란스럽지요. 사랑에 빠진 여인에게 자기 연인은 목동이기도 하고 솔로몬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랑은 목동처럼 자연의 일부이며 솔로몬처럼 화려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8장의 솔로몬은 목동과 다른 인물입니다. 사랑을 방해하고 돈으로 사랑을 사려는 사람입니다.

 

결국 아가라는 문학 작품의 단일성은 잘 짜인 줄거리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아가의 단일성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사랑이라는 감정에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이 거기에 달렸습니다. 사랑이 연인을 목동으로 또는 솔로몬으로 보게 합니다.

 

반복되는 사랑의 여정

 

그러나 사랑이 전개되는 장면을 나누어 볼 수는 있습니다. 단락 구분의 기준에는 ‘등장인물의 변화’, ‘시간과 공간의 변화’라는 고전적 요소 외에도 소위 ‘사랑의 여정’이라는 요소가 있습니다. 물론 사랑에는 법칙이나 도식이 없지만, 사랑을 이야기하는 문학 작품에는 대개 기본 틀이 있습니다. 먼저 둘이 서로 찾고(둘이 동시에 찾지 않고 시간차를 두기 때문에 온갖 TV 드라마가 생겨납니다), 서로 만나고, 마지막에 둘이 결합합니다.

 

아가에서는 5장 1절이 두 연인의 사랑 단계를 알아보는 데 큰 걸림돌이 됩니다. 전체 8장인 책에서 4장이 막 끝났는데, 거기에 나오는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나의 정원으로 내가 왔소. 내 몰약과 발삼을 거두고 꿀이 든 내 꿀송이를 먹고 젖과 함께 포도주를 마신다오”(5,1)라는 표현이 남녀가 이미 합일을 이루고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너무 난감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맙게도 우리보다 먼저 여러 사람이 이 문제를 고민했으니까요. 그래서 제시한 의견이 ‘5장 1절에서 아가 제1부가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여정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됩니다.

 

사랑의 때가 서로 일치할 때 비로소

 

이제 더는 세부 논의를 하지 않고, 아가의 구조에 대한 결론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1은 머리글이며, 1,2-2,7은 서문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여기서는 주로 등장인물들이 소개됩니다. 2,8-17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눈에 띄는 것은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주는 주인공이 여인이라는 점입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2,8) 이렇게 자신을 부르는 사랑의 목소리를 듣는 여인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여인은 그 순간 부름에 응답하여 즉시 따라 나서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3,1-5에서 여인은 잃어버린 애인을 찾아 길거리로 나섭니다. 이렇게 둘이 서로를 찾아 나선 다음, 여인은 가마를 타고 솔로몬에게 옵니다(3,6-11 참조). 드디어 두 연인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습니다. 4,1-7에서 남자는 자기 애인을 바라보며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 나의 애인이여”(4,1)라고 경탄하며(여기서 ‘경탄’은 기억해야 할 중요한 단어입니다) 사랑을 향유하려는 갈망을 표현합니다. 그런 다음 4,8-5,1에서 그 사랑이 정점에 도달합니다. 앞서 인용한 5,1에서는 남녀의 결합이 완성됩니다.

 

5,2-5에서 제2부가 시작됩니다. 1부와 같이 남자가 밖에서 여인을 부릅니다. 여자는 대답할 때를 놓쳤고 한 발 늦게 연인을 찾아 나섭니다(5,6-6,3 참조). 남녀는 서로 만나고, 여기서도 남자가 자기 애인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경탄합니다(6,4-7,11 참조). 그 후 다시 사랑이 완성됩니다(7,12-8,4 참조).

 

이것이 아가의 줄거리입니다. 사랑이 시작된 한쪽에서 상대에게 사랑을 호소하지만 상대는 아직 사랑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르는 소리를 놓칩니다. 뒤늦게 그 소리를 뒤따라가며 애타게 찾고, 이렇게 서로의 갈망이 커진 다음에 서로를 마주보는, 마치 거울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단계가 옵니다. 서로의 아름다움을 경탄하고, 그 경탄이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자신을 상대방에게 온전히 내줄 수 있게 합니다.

 

결국 이번 호에서도 본문 읽기를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계획이란 것이 쉽게 실행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가는 저를 뒤집어 놓았던 책입니다. 저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었던 책입니다. 이제 아가를 읽고자 하신다면, 이 책이 나를 완전히 뒤집어 놓아도 좋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안주하려는 마음으로는 사랑을 할 수도, 사랑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2년 3월호(통권 432호)]

 

 


 

 

[아가, 노래들의 노래]

(4) 내게 입 맞춰 주었으면(아가 1,2)

안소근 실비아 수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감탄사만 연발하는 것 같은, 논리적으로 전개되는 것과 거리가 먼 아가에서 1,2-2,7은 서문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텔레비전에서 연속극을 시작할 때 등장인물들의 얼굴을 잠깐씩 보여 주는 프롤로그와 같습니다. 그런데 아가에서 중요한 등장인물은 둘밖에 없기 때문에 서문에서는 여러 사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로 남녀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리고 그 사이사이에 친구들이 한마디씩 합니다. 그나마 알고 보면 친구들은 독립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기보다 남자 또는 여자가 하는 말을 여러 사람의 입으로 다시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4절에서는 여자가 먼저 말을 시작하고 자기 연인을 임금님으로 묘사합니다. 이어서 여자의 친구들이 그 말을 반향합니다. 5-6절에서는 여자가 다시 자신을 포도원지기로 묘사하고, 7절에서는 자기 연인을 찾기 시작합니다. 연인이 어디 있는지 묻는 질문에 8절에서 남자의 친구들이 대답해 줍니다. 그다음에는 약간 뭉뚱그려 말한다면 1,9-2,3에서 남녀가 계속 번갈아 가며 화답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제는 둘이 만난 듯, 서로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2,4-7에서는 둘이 결합하고, 아가에서 여러 번 나타나면서 단락의 끝을 표시해 주는 2,7의 후렴구로 서문을 마칩니다(“예루살렘 아가씨들이어…”). 이번 달에 서문을 다 읽을 수는 없고, 여자가 처음 입을 여는 1,2-4만 읽도록 하겠습니다.

 

“아, 제발 그이가 내게 입 맞춰 주었으면”(1,2)

 

대단한 여자입니다. 이런 말로 책 한 권을 시작하다니요? 히브리어 문장을 한마디씩 번역하면 좀 더 심합니다. “그이 입의 입맞춤으로 내게 입 맞춰 주었으면.” 그다음에 나오는 “당신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달콤하답니다”는 구절 역시 히브리어 단어를 보면 좀 더 직설적입니다. ‘사랑’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추상명사가 아니라 ‘애무, 성적 유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다고 말하는 8,6과 다른 단어입니다). 아가의 원문을 풀이하다 보면 그냥 번역된 본문을 읽을 때보다 아가가 훨씬 분명하게 남녀의 성적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용감함 때문에 교부들과 중세의 신비가들이 놀랄 만도 했습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여자가 먼저 남자의 입맞춤을 그리워하는 말로 아가가 시작된다는 점은 파격입니다. 아가 전체를 놓고 각 절에서 누가 말을 하는지 계산해 봐도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이 말합니다. 주인공이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가의 저자가 여자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아가에서는 사랑을 묘사하는 데 여자의 시각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사랑에 대한 아가의 특별한 관점을 보여 줍니다. 고대의 여러 문화에서 그랬듯 구약 시대에 여자는 주로 사랑의 대상 또는 남자에게 성적 만족을 주는 배우자로 여겨졌지 사랑의 주체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가는 사랑을 노래하면서 그것을 여자의 입에 담아 놓습니다. 여자가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온전히 인정합니다. 아니 사랑의 전문가는 여자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아가에서 여자의 역할은 단순히 남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도 있지만 여자는 남자보다 더 주도적입니다. 이미 1,2에서 나타났듯이 여자가 먼저 남자의 사랑을 갈망하고 그를 찾아 나섭니다. 나중에 합일에 이르러 여자가 자기 몸을 연인에게 줄 때에도 고전적인 구약성경의 다른 책들처럼 출산을 위한다거나 가부장제에서 타의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오직 자신 안에 있는 사랑에 의해 움직여집니다. 아가에서 여자는 온통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 덩어리와 같고, 아가는 그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말하자면 사회 제도 때문에, 인습 때문에 자신의 가능성을 마음껏 드러내지 못하고 있던 여자의 속마음을 남김없이 해부해 놓은 것이 아가입니다.

 

“나를 당신에게 끌어 주셔요, 우리 달려가요. 임금님이 나를 내전으로 데려다 주셨네”(1,4)

 

여기서도 먼저 시작하는 쪽이 여자입니다. 그런데 2절에서 연인을 3인칭으로 지칭하여 ‘그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남녀는 아직 떨어져 있습니다. 4절은 독백입니다. 아직 떨어져 있는 연인의 사랑을 여자가 갈망하는 것입니다.

 

‘임금님’이라는 호칭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아가에서 주인공 남녀는 때로 임금님으로, 때로 목동으로 제시된다고 했습니다. 며칠 전에 만난 어떤 분이 여행을 갔다가 집에 기념으로 가져갈 물건을 사고서는 “영부인께 갖다 바쳐야지” 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표현입니다.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데 아가의 주인공 남자는 임금이 아닙니다. 아가가 쓰인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임금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목동도 아닐 것 같습니다. 목가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당시의 연애시에서 유행하던 표현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임금님’이라는 표현은 무엇을 뜻할까요? 두 가지로 설명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근동 지방의 혼인 풍습인데,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는 혼인할 때 남녀가 임금과 왕비처럼 축제를 지냅니다. 이슬람 문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데, 여자는 손과 손톱 하나하나에 그림을 그리고 화려한 옷으로 계속 바꾸어 입더군요. 이런 맥락에서 연인을 임금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설명은, 어린 딸을 귀하게 여겨서 ‘우리 공주님’이라고 하는 것같이 연인을 귀하게 일컫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에 자기 연인은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더 귀합니다. 실제로 임금님의 행차가 지나간다 해도 여자는 자기 연인만 쳐다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연인이 자기 ‘내전’으로, 즉 방으로 자기를 데리고 들어가기를 갈망합니다.

 

“우리는 … 당신의 사랑을 포도주보다 더 기리리다”(1,4)

 

오해의 여지가 있는 구절입니다. 앞서 여자가 자기 연인의 사랑을 포도주에 비겼습니다(1,2 참조). 그런데 이제 또 누가, 더구나 ‘우리’라고 일컬어지는 여러 사람이 그의 사랑을 노래하고 그를 사랑한다는 것일까요?

 

여기서 당황하지 않으려면 아가에서 친구들의 역할을 이해해야 합니다. 1,4에서 등장하는 ‘우리’는 여자의 친구들로 여겨지는데, 그들은 연극에서 주인공의 말을 받아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다시 반복해 주는 합창단과 같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경쟁자가 아니고, 앞서 주인공이 했던 말이 근거 없는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연인은 정말 여자를 사랑에 빠지게 할 만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은 “그들이 당신을 사랑함은 당연하지요”(1,4)입니다. 《성경》에는 이 구절도 친구들의 말로 되어 있습니다. 친구들의 말에 주인공 여자가 응답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합창단이 자기 연인의 사랑을 기릴 때 여자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질투가 없습니다. 친밀한 사랑은 분명 두 남녀만의 것이고, 친구들은 그 사랑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끝을 맺기 위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아, 제발 그이가 내게 입 맞춰 주었으면”(1,2). 오늘날에도 이런 말을 드러내 놓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가는 사람을 뒤집어 놓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내가 차마 말하지 않는, 어쩌면 나 스스로 덮어버리고 보지 않던 내 내면을 파헤치기 때문입니다.

 

아가의 주인공 여자의 적나라한 솔직함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사랑에 눈을 감고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살려고 하던 나를 뒤흔듭니다.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살구씨는 얼었다가 터지면서 싹이 나온다고 합니다. 터질 듯이 내 안에서 밀려오는 사랑의 목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성서와 함께, 2012년 4월호(통권 433호)]

 

 


 

 

[아가, 노래들의 노래]

(5) 사랑해도 괜찮아

안소근 실비아 수녀

 

 

아가 서문(1,2-2,7) 가운데 지난달에는 처음 세 절만 읽었습니다. 이제 나머지 부분을 읽어 봅시다.

 

“나… 어여쁘답니다”(1,5)

 

사춘기가 되었는지 봄바람이 불었는지, 꿈꾸듯 연인의 입맞춤을 그리워하는 우리의 주인공 아가씨의 마음이 살랑거립니다. 스스로 자신이 “어여쁘다”(1,5)고 말합니다. 부드러움이 한껏 풍기는 단어입니다. 사랑의 때가 무르익었다는 뜻이지요. 집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빠들이 방해를 합니다. 오빠들은 가부장제 사회 질서를 대변합니다. 그나마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오빠들은 어쩌면 젊은 아가씨가 가장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남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빠는 오빠라서 연인 노릇을 해 주지 않습니다. 집안의 질서를 유지하고 동생을 단속하려고만 합니다. 동생이 연인을 만나러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일을 시킵니다. 동생에게 포도밭을 돌보라고 맡긴 것이지요(16 참조).

 

이렇게 동생이 나돌아 다니지 못하도록 오빠들이 얽어맨다는 것은, 사회가 사랑에 이런저런 제약을 부과한다는 뜻입니다. 오빠들이라고 동생이 평생 처녀로 집안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오빠들은 이런저런 조건을 붙입니다. 때가 되어 좋은 자리로 시집을 가려면 구설수에 오르지 말아야 하고, 엉뚱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지도 말아야 합니다. 오빠들이 시집가라고 할 때까지 동생은 얌전한 숙녀로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그렇게 되던가요? 아닙니다. 오빠들의 강압적 목소리보다 사람을 녹이는 봄바람의 소리가,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소리가 더 컸습니다.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반대를 무릅쓰고 연애를 하거나 혼인하신 분들은 다 이해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데는 외부에서 요구하는 규율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이 아가씨는 포도밭을 돌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돌보지 않은 포도밭은 오빠들의 포도밭이 아니라 ‘내’ 포도밭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같은 절 안에서 ‘포도밭’의 의미가 바뀌는 것입니다. 6절의 앞부분에서 포도밭은 자구적 의미의 포도밭, 오빠들이 맡긴 일터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내 포도밭’이라고 할 때의 포도밭은 여성의 몸을 상징합니다. 아가에서 포도, 석류, 정원, 향료, 밭 등은 모두 비슷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달콤한 포도 열매를 맺어 사람을 즐겁게 하고 취하게 하는 포도밭은, 상대방에게 자신을 내주어 사랑의 감미로움을 맛보게 하는 여성의 표상입니다. 그러니 내 포도밭을 지키지 않았다는 말은, 끝내 오빠들의 말을 듣지 않고 사랑을 찾아 나섰다는 뜻입니다. 이제 아가씨는 푸른 들판으로 달려갑니다.

 

“내 영혼이 사랑하는 이여, 내게 알려 주셔요. 당신이 어디에서 양을 치고 계시는지…”(1,7)

 

아가씨는 “내 영혼이 사랑하는 이”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그저 그를 부르며 찾고 있습니다. 연인의 이름도 없습니다. 어쩌면 아직까지 특별한 연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 내 영혼이 사랑할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의 이름보다 “내 영혼이 사랑하는 이”라는 정의가 더 중요합니다. 그에게 나타나 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때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를 친구들의 목소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 줍니다. 그 대답이 놀랐습니다. 너의 새끼 염소들을 풀어놓고 그 염소들을 따라가라는 것입니다(1,8 참조). 노루나 들사슴처럼 아가에 나오는 여러 동물이 그렇듯 염소는 전통적으로 사랑을 상징합니다. 염소가 새끼를 많이 낳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새끼 염소들”은 ‘너의 사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친구들이 아가씨에게 연인이 어디 있는지 “그대가 만일 모르고 있다면”이라고 말했을 때, 아가씨는 아마도 자신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려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살랑거리는 너의 그 마음을 따라가면 된다고 가르쳐 줍니다. 마음 안에서 사랑이 싹트는 것이 느껴지면 사랑을 하라고, 사랑하고 싶으면 오빠들 때문에, 아버지 때문에, 체면 때문에, 사회 질서 때문에 그 사랑을 묻어 버리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워 줍니다.

 

아가는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사랑의 의무를 말하지 않고, ‘사랑해도 괜찮아, 사랑에 빠져도 괜찮아’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 특히 어린 시절에 가정에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마음이 건강하지 못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에게는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있고 그것이 채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해야 할 필요나 욕구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을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주어야 할 사랑이 자기에게 있는데 그것을 꺼내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 추워 보입니다. 남들은 그런 사람들을 보고 흔히 사랑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고여 있는 사랑을 어떻게 움터 나오게 할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받지 못한 사람만큼이나 병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 해 전에 어떤 수녀님이 저에게, ‘너는 일곱 개의 열쇠로 잠겨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저는 껍질이 두꺼운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사랑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사랑하면 죽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내주는 것이 너무 위험하게 보였고, 그걸 피해 안전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살 길처럼 보였습니다. 담을 쌓고, 그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 안으로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며 살고 싶었습니다. 평온하게 안전거리를 유지하면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때 저는 사랑의 부르심이 밖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윤리 규범, 율법과 같았습니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본성을 거슬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저에게 사랑은 강요된 것이었고, 저는 그것에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부르심이 밖에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아가를 읽으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이 책은 저에게 사랑이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는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아가는 죽지 않기 위해 사랑을 가두어 두는 것이 오히려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네 본성에 귀를 기울이고 네 염소의 발자국을 따라가면 되는 것이라고 저에게 속삭였습니다. 사랑을 거스르면 오히려 죽고 만다고, 사랑의 목소리를 따르는 것이 제가 꽃을 피우고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여러 해 동안 아가를 읽으면서 벽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아가가 옳다는 것은 사랑을 억누르려는 시도가 실패를 겪을 때 깨닫게 됩니다. 살기 위해 사랑을 잠재우려는 시도가 죽음을 가져오는 것을 보고 나면, 사랑이 인간의 본성이며 생명의 길임을 알게 됩니다. 아가는 “나의 연인은 내게 몰약 주머니”(1,13)라고 했습니다. 시신을 방부 처리하는 데 사용했던 몰약은 죽음을 물리치는 생명을 상징하고, 몰약 주머니는 부적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합니다. 사랑을 하면 죽을 것 같지만 바로 그 사랑이 죽음에서 나를 지켜주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을 방해하지도 깨우지도 말아 주오”(2,7)

 

우리 아가씨는 한없이 행복했을 것입니다. 한창 물이 오른, 봉오리가 터지기 직전의 꽃 같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사랑이 원할 때까지”(2,7) 깨우지 말아 달라고 말합니다. 그 사랑이 원한다면 다른 누구도 사랑을 중단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가는 ‘사랑해도 괜찮아’라고 말합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말의 바탕에는 창조의 선성(善性)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사랑을 주지 않고서 살 수 없는 본성이 인간의 마음에 있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본성은 선한 것입니다. 그 본성을 억누르는 ‘오빠들’은 때로 내가 만듭니다. 어떤 이유로 스스로 사랑을 억누르려 할 때, “우리 사랑을 방해하지도 깨우지도 말아 주오”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2년 5월호(통권 434호)]

 

 


 

 

[아가, 노래들의 노래]

(6)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아가 2,14)

안소근 실비아 수녀

 

 

사랑을 하고 싶습니까? 그 사랑에 따라오는 모든 위험까지 감수하겠습니까? 아니면 차라리 안전하게 내 안에 머무르고 말기를 선택하겠습니까?

 

아가 2,8-17의 노래는 이러한 사랑의 충동과 망설임이 엇갈리는 마음을 보여 줍니다. 담장 안에 머물러 있던 여인은 밖에서 부르는 연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점차 마음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3,1-4에 이르면 이 여인은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 붙잡고 놓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내 연인의 소리!”(2,8)

 

1,2-2,7이 서문이라면 사랑 이야기는 이제 비로소 시작됩니다. 서로 떨어져 있는 두 연인은 5,1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점점 가까워집니다. 그런데 그 첫 단락인 2,8-14을 두 연인이 주고받는 대화로, 연극 대사처럼 읽으면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두 사람의 말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2장에서 연인(남자)은 직접 등장하지 않고 그의 말은 모두 여인의 입을 통해 전달되고 있습니다. 초점은 연인이 찾아왔다는 데에 있지 않고 그 목소리를 들었던 여인에게 있으며, 모든 일이 여인의 마음 안에서 펼쳐집니다.

 

여인은 아직 자기 집 안에 있습니다. 사랑을 하러 밖으로 나가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연인의 소리를 듣습니다. 사랑이 다가옴을 감지합니다. 그가 담장 앞에서 기웃거리고 들여다보는 것도, 자기를 불러내려고 하는 것도 느낍니다. 방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밖에서 어떤 이가 문틈으로 기웃거리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여인이 그 소리를 듣는 것은 그만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2,11). 이스라엘에서는 겨울에 비가 내립니다. 비가 멈추면 이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계절이 됩니다.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멧비둘기 소리가 들려오며, 무화과나무가 이른 열매를 맺고 포도나무 꽃송이들이 향기를 내뿜는 것(2,12-13 참조)은 한창 때가 무르익었음을 나타냅니다.

 

사랑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그래서 아가에서는 어떤 달력이나 사회적 관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이 살아나는 때가 사랑의 때라고 말합니다. 서문에서도 연인들의 집 들보는 향백나무이며, 서까래는 전나무이고, 그들의 잠자리는 푸르다고 했습니다(1,16-17 참조). 여인의 집 담장 밖에서 집 안에 있는 여인을 부를 수 있는 것, 그리고 여인이 그 소리를 듣는 것은 때가 무르익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가 안 되었는데 사랑을 강요하는 것은 움이 트지 않은 나무에 억지로 꽃을 피우려는 폭력입니다. 연인은 어쩌면 겨우내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이제 때가 되었다고 여인에게 속삭입니다.

 

“일어나오”(2,13)

 

그러나 사랑은 하나의 모험입니다. 가만히 집 안에 앉아 사랑을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연인은 “일어나오”, “이리 와 주오”(2,13)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오다’로 번역된 단어는 본래 ‘가다’를 뜻하고(동사 hlk), 일어나 간다는 것은 여인이 지금까지의 삶에서 떠나는 것을 뜻합니다. 창세기에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2,24) 아내와 결합한다고 말하지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난다는 것은 물리적 의미에서 혼인하여 부모 집을 떠나는 것만이 아니라 내 삶을 바꾸어 놓는 것, 더 근본적으로 ‘나’를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딸을 시집보내는 어머니가 기쁜 날인데도 슬퍼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제가 만났던 어떤 분은 다른 사람이 딸을 보내는 것만 봐도 눈물이 난다고 하셨습니다. 고이 기른 딸을 주는 것이 너무 아깝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삶의 중심을 옮겨 놓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목소리가 부를 때에는 내가 지금까지 ‘집’이라고 여겨 온 곳을 떠나야 합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의 중심이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원하는 것을 찾게 합니다. 사랑은 때로 나를 죽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랑만큼 ‘나’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요? 그냥 집 안에 머무른 것이 나을까요? ‘집’은 ‘오빠들’이 있는 장소입니다. 오빠들은 사랑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빠들이 누이의 사랑을 가로막으려 한 것은 누이를 보호하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안전과 사랑은 함께 갈 수 없는 것일까요?

 

이것은 남녀의 사랑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38)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궁극적으로 “제 목숨을 잃는”(마태 10,39) 것까지 요구합니다.

 

사랑을 믿을 때 비로소 떠날 수 있습니다. 이 모험은 아브라함의 모험에 비교되곤 합니다. 아가 본문에서 “이리 와 주오”라고 번역된 동사가, 창세 12,1에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거라”고 하실 때와 동일하게 사용되기 때문입니다(창세기에서는 남성형이고 아가에서는 여성형이지만, 두 경우 모두 이해의 여격과 결합된 드문 형태가 나타납니다). 이렇게 “가거라”고 말씀하셨을 때, 75세나 되었던 아브라함은 약속해 주시는 분을 믿었기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히브 11,8).

 

유다교의 전통 해석에서는 아가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이루어진 사랑의 역사를 보여 준다고 생각하는데, 그 첫 시기가 신랑이신 하느님께서 신부인 이스라엘을 불러내시는 시기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관계에서도 이스라엘은 여러 차례 하느님을 믿고 ‘일어나서 나가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칼데아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이 그랬고, 이집트 땅에서 4대를 살았던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호세아서에서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여 이집트에서 불러내셨다고 말하지요(호세 11,1 참조).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가리켜 ‘종살이하던 집’이라고 하면서도, 광야의 거친 음식에 지쳐서는 이집트 땅에서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탈출 16,3) 때를 그리워했습니다. 사랑을 믿고 떠나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미래를 계획할 수 없습니다. 그 미래가 “내가 사랑하는 이”(3,1)의 손에 맡겨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내 남편!”(호세 2,18)이라 부르게 될 때, 사도 바오로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갈라 2,20) 분이라고 고백하게 될 때,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고(갈라 2,20 참조)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서 돌아오셔요”(2,17)

 

여인은 사랑의 상징인 ‘비둘기’이지만 ‘바위틈’에, ‘벼랑 속’에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2,14 참조). 사랑의 때가 되었으나 모험을 두려워하고 있어, 다른 사람(또는 사랑)이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숨어 있습니다. 그러던 여인이 자기를 부르는 사랑의 목소리에 용기를 내어 응답합니다. “나의 연인은 나의 것, 나는 그이의 것”(2,16)이기에, 나를 완전히 내어 주려 하니 “날이 서늘해지고 그림자들이 달아나기 전에”(2,17), 저녁이 되기 전에 자신에게 오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모험이 삶을 뒤흔들어 놓고 미래를 불안하게 만들며 ‘나’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지라도,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마태 10,39)을 감지한 것일까요? “일어나오”(2,13). 히브리어 ‘쿠미(qumi)’에서 ‘탈리타 쿰!’(마르 5,41)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 명령이 떠오릅니다.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마르 5,41). 그 말씀에 응답한 소녀는 죽음에서 살아납니다.

 

처음 질문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사랑하고 싶습니까? 그 사랑에 따라오는 모든 위험까지 감수하겠습니까? 부활을 믿는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 모험을 할 수 있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2년 6월호(통권 435호)]

 

 


 

 

[아가, 노래들의 노래]

(7)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리라(아가 3,2)

안소근 실비아 수녀

 

 

사랑을 하면 죽을 것 같아서,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에게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오”(2,14)라고 한참을 불러도, 비둘기는 몸을 숨겼습니다. 안전지대에 머물려고 했습니다. 2장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비둘기는 저녁이 되기 전에(“날이 서늘해지고 그림자들이 달아나기 전에”: 2,17) 자신에게 와 달라고 연인을 불렀습니다. 비둘기는 연인에게 나를 주고자 합니다.

 

아직 “바위틈” 밖으로 나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연인도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연인이 부르는 소리는 이미 마음을 움직여 놓았습니다. “그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2,14)라는 연인의 말이 큰 몫을 했을 것 같습니다. 여인의 아름다움을 찬란하게 노래할 4장을 미리 한 줄 흘려 놓는 듯한 그 말은, 연인이 그 여인의 아름다움을(“어여쁘다오”), 그 가치를 온전히 알아보고 있음을 이미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그 부름에 응답할 때가 되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3,1)

 

여인이 먼저 연인을 찾기 시작하는 장소는 ‘잠자리’이고 그 시간은 ‘밤’입니다(“밤새도록”: 3,1). 밤의 잠자리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두고 여러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여인이 꿈을 꾸는 것이라고 이해하기도 하고, 아직 혼인하지 않은 이 남녀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제도 면에서 설명해 보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렇게 애쓸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여인이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사랑하는 이를 찾았어도 그를 거기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거기에 없었고, 여인은 이제 사랑을 시작하면서 이미 완성된 사랑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장차 도달해야 할 것입니다. 그 완성을 바라보면서 여인은 일어나 나갑니다.

 

이렇게 찾는 대상은 “내가 사랑하는 이”입니다. 본래는 1,7에 나왔던 “내 영혼이 사랑하는 이”와 같은 표현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영혼(네페쉬, nepes)’이라는 단어가 흔히 어떤 사람을 지칭해서 대명사처럼 사용되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렇게 번역한 것입니다(‘내 영혼’ = ‘나’). 그러나 “내 영혼이 사랑하는 이”라고 번역해 보면 더 강렬한 의미가 드러나지요. ‘영혼’이라는 단어는 문맥에 따라 ‘목구멍, 숨결, 영혼, 생명체, 사람’ 등으로 번역됩니다. 한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이 영혼(nepes)입니다. 그런 나의 nepes가 사랑하는 이, 바로 그를 찾고 있습니다. 어쩌면 나는 홀린 듯 사랑에 빠진 나의 nepes에 의해 움직여지는지 모릅니다.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리라”(3,2)

 

여인이 일어나겠다고 하는 것은 2,10의 “일어나오”에 대한 응답입니다. “일어나오”라는 연인의 목소리가 마침내 집 안에 앉아 있던 여인을 일어나게 했습니다.

 

여기서 1절로 되돌아가 한 가지 덧붙여 둘 것이 있습니다. “밤새도록”이라고 번역한 단어 문제인데, 밤이 다 새서 아침이 될 때까지라고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사용된 단어가 ‘밤들에’이고, 복수형이라고 하여 여러 밤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밤의 여러 부분을 나타낸다고 보지만 하룻밤을 새웠다는 뜻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짚어 두는 이유는, 여인이 “일어나” 돌아다니기 시작하는 것이 새벽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여인은 밤에 잠자리에서 연인을 찾았고 그 밤에 일어나 나갑니다.

 

미친 행동이지요? 네, 그렇습니다, 밤중에 연인이 밖에 나와 있을까요? 성읍과 거리와 광장을 돌아다닌다 한들 연인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3,2)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이입니다. 그렇게 찾아 나선다는 것이 처음부터 별로 전망이 없는 시도였던 것입니다. 야경꾼들의 반응 역시 여인이 무모한 짓을 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3,3)라는 질문을 야경꾼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야경꾼들은 지나가야 할 사람입니다. 사랑에 공감하지 않는 이들, 전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이 설령 그를 보았다 해도 그가 “내가 사랑하는 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사랑은 어리석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어리석지 않습니다. “일어나 … 돌아다니리라”는 여인의 말은 여인이 분명히 변화되었다고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이제는 바위틈에, 벼랑 속에(2,14) 숨지 않습니다. 밤중에 혼자 성읍을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5장에서는 비슷한 상황에서, 밤에 연인을 찾아 나선 여인을 야경꾼들이 보고는 “때리고 상처 내었으며” 성벽의 파수꾼들은 “겉옷을 빼앗았네”(5,7)라고 말합니다. 밤에 돌아다니는 여자를 창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지금 그런 위험을 겪을 수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을 나섰습니다.

 

아가는 마지막 장에 이르러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8,6)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사랑이 여인의 ‘강함’이 됩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말씀으로 사랑의 위력을 표현합니다. 친구들을 위해 죽을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약하고 어리석게 보이면서도 무엇보다(죽음보다)도 강합니다. 십자가의 지혜에 대하여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25)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모든 사랑이 죽음을 감수해야 하고(1코린 2장 참조)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여 그 죽음을 감수할 수 있게 한다면(1코린 3장 참조), 그런 사랑의 힘이 남김없이 드러나는 자리가 바로 십자가의 어리석음(십자가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집으로”(3,4)

 

여인은 야경꾼들을 지나서 사랑하는 이를 찾아내고는,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의 집으로”(3,4) 인도할 때까지 그를 놓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어머니의 집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자기 가족이 된다는 뜻입니다. 3장 후반에는 솔로몬으로 표현되는 연인이 가마를 보내어 사랑하는 여인을 광야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는 장면이 이어지는데, 이 두 장면이 서로 대응됩니다. 이로써 둘의 사랑은 가족 안에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아가는 누이동생의 사랑을 통제하려 했던 “오빠들”을 통해 가족이나 사회 제도가 사랑을 가로막을 수 있음을 말했지만, 그 제도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빠들”과 달리 “어머니”는 언제나 사랑에 호의적이고, “나를 잉태하신 분의 방”은 내 윗세대의 사랑의 장소이며 동시에 나의 사랑의 장소가 됩니다. 아가가 가정 밖의 사랑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라고 여인을 부르는 4,12-5,1에서는 이 남녀가 부부라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아가는 그들의 관계가 제도와 관습의 관계이기 전에 우정과 사랑의 관계라고 말하지만(아가에서 여인을 지칭하는 ‘애인’은 보래 ‘친구’를 뜻합니다), 그렇다고 제도 밖의 사랑을 칭송하는 것은 아닙니다.

 

3,6-11에서 묘사하는 행렬도 “혼인날”(3,11)을 우한 행렬입니다. 레바논의 나무로 가마를 만들어 금과 은으로, 그리고 금만큼이나 값비싼 천이었던 자홍포로 장식하고 여인을 데려오도록 60명의 용사를 보낸 ‘솔로몬’은, 사랑이 죽음임을 알면서도 그 사랑의 모험을 시작하는 여인을 자신의 사랑으로 지켜주며 신부로 맞이하는 신랑입니다. “이스라엘 용사들 가운데에서 봅힌” “역전의 전사들”이 칼로 무장하고 “밤의 공포에 대비하여”(3,8) 그 가마를 호위한다는 것 역시 사랑의 길에 위험이 따를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연인들은 홀로 있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집”으로 갈 때에 여인은 자기 연인을 꼭 붙들고 있고, 여인이 광야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에는 호위하는 요사들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 나를 사랑하는 이가 없다면 결코 할 수 없을 위험한 일을, 죽음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함께 있음’ 때문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2년 7월호(통권 436호)]

  

 


 

 

[아가, 노래들의 노래]

(8) 내 친구야(아가 4,1)

안소근 실비아 수녀

 

 

‘아름다운 노래’ 아가에서 제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4장입니다. 그저 첫 구절에서 하염없이 멈추어 서 있고 싶은 본문입니다.

 

“너 정말 예쁘구나”(4,1: 필자 직역)

 

서로를 부르며 찾던 남녀가 이제 마주 보고 있습니다. 아가의 구성을 되짚어 보면, 1,2-2,7의 서문이 끝난 다음, 2,8-17에서 여인의 집에 연인이 찾아왔습니다. 봄이 되었다고, 밖으로 나오라고 담장 밖에서 불렀습니다. 그러나 아직 둘이 만나지 못했습니다. 여인이 아직 그 부름에 응답하여 나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3,1-5에서는 여인이 뒤늦게 집을 나서 잃어버린 연인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3,6-11에서 여인은 가마를 타고 혼인 행렬과 더불어 ‘솔로몬’, 즉 자기 연인에게 갔습니다. 이제는 서로 만나 상대방의 아름다움에 ‘경탄’합니다.

 

이 아름다운 경탄 가운데에서도 특히 첫 절이 사람의 마음을 홀립니다. 이번 달 제목으로 4장의 첫 구절을 쓰려다가, 다 쓰기가 아까워 운만 띄우고 말았습니다. 성경에는 그 구절이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 나의 애인이여”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물론 맞는 번역이지만, 아마 이런 표현을 듣는 여인의 마음을 직접 느껴보지 못한 번역인 것 같습니다. 제 번역은 “내 친구야, 너 정말 예쁘구나!”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상대방을 쓰다듬으면서 해야 하는 말입니다. 이 남녀는 부부입니다.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를 ‘내 친구’라고 부르면서, 그의 예쁨에 환성을 올리는 것입니다.

 

아가에는 상대방을 바라보며 경탄하는 노래가 네 번 나옵니다(4,1-7; 5,10-16; 6,4-7; 7,2-8 참조). 이러한 형식의 노래는 고대 아랍 문학과 팔레스티나 주변 문화에 있었고, 이집트의 사랑 노래에서도 애인을 묘사하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혼인 예식의 한 부분으로서 주로 여인의 아름다움을 그려 보이곤 했는데, 아가에서는 4장에서 여인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다음, 5장에서 오히려 여인이 남자 연인을 묘사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런 예는 상당히 드뭅니다. 아가에서 여인의 아름다움만 노래하지 않고 서로 상대방을 묘사하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서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예쁜 여자’가 일방적으로 성적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대방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존중하며 감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여정’에서 결정적 순간이 됩니다. 4장의 경우만 먼저 살펴본다면, 4,1-7에서 여인의 아름다움에 ‘경탄’한 다음 4,9-5,1에서 연인은 여인의 사랑을 ‘향유’합니다. 연인이 ‘예쁘다’고 했을 때 사랑하는 여인의 소중함과 가치를 인정하고, ‘경탄’까지 이르렀을 때 여인은 그렇게 소중한 자신을 내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대의 두 눈은 비둘기라오”(4,1)

 

여인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첫 번째 노래는, 여인의 두 눈에서 시작하여 머리채, 이, 입술, 볼, 목으로 점점 내려오면서 젖가슴까지 이릅니다.

 

여기에서 아가에서 사용하는 비유의 한 가지 특징을 알아봐야 하겠습니다. “그대의 두 눈은 비둘기”(4,1)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여인의 눈이 비둘기의 눈과 같은 모양이라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비둘기의 눈이 예쁜가요? 글쎄요. 이 비유는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비둘기 또는 비둘기의 눈이 아니라 그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비둘기는 사랑의 여신의 메신저입니다. 그래서 “그대의 두 눈은 비둘기”라는 말은 여인이 나에게 눈길을 던질 때에 그 눈길이 강렬한 사랑을 드러내 보인다는 뜻입니다.

 

‘머리채가 염소 떼 같다’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흑염소같이 새카만 머리채? 물론 그런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까만 머리를 곱게 빗어서 땋거나 쪽을 찐 것과 거리가 멉니다.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머리채를 생각해야 합니다. 염소 ‘떼’는 또 무엇을 뜻할까요? 다음에 나오는 한양 양 떼에 비하여, 새카만 염소 떼는 야생의 생명력을 나타냅니다. “길앗 비탈을 내리닫는 염소 떼”(4,1)는 주체할 수 없는 힘, 관능적이고 야성적인 매력을 지칭합니다.

 

이와 달리 하얀 이가 “세척장에서 올라오는 양 떼”(4,2) 같다는 것은 질서 있고 깨끗한 인상을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 “모두 쌍둥이를 낳아 새끼를 잃은 것이 하나도 없구려”라는 말은 다시 염소 떼와 같은 다산성의 개념과 연결됩니다. 염소 떼와 양 떼는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 1,28)는 하느님의 첫 강복을 상기시킵니다.

 

이어서 나오는 “진홍색 줄과 같은 그대의 입술”(4,3)은 입맞춤을 위한 것입니다(4,11 참조). 볼이 ‘석류 조각’ 같다는 말은, 사실 ‘조각’이라고 번역된 단어부터 뜻이 분명하지 않아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여러 갈래로 의견이 나뉘지만, 어떤 경우이든 석류가 갖는 상징적 의미는 여러 가지입니다. 우리나라의 혼례에서 폐백할 때 밤과 대추를 신랑 신부에게 던지며 후손을 기원하듯이, 팔레스티나의 농민들은 같은 의미로 신혼부부를 위해 석류를 으깬다고 합니다. 염소 떼의 숫자가 많았듯이 석류도 알이 많아 다산성을 상징합니다. 결국 염소, 양, 석류는 모두 사랑, 생명, 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천 개의 방패들”(4,4)

 

그런데 이제는 다른 종류의 상징이 사용됩니다. 여인은 목은 ‘탑’ 같다고 합니다. 목이 탑처럼 가늘고 길다는 뜻일까요? 그럼 코(7,5)나 가슴(8,10)이 탑이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에서도 앞서 ‘비둘기’와 마찬가지로, 탑의 모양보다 탑의 기능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탑은 가늘고 높다기보다 굵직했습니다. 탑처럼 생긴 목, 코, 가슴이 예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탑은 방어 시설이었습니다. 탑 같은 목에 “천 개의 방패, 용사들의 원방패”(4,4)가 달려 있다는 구절에서도 알아볼 수 있지요. 여인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더 구체적으로 말해 성적 매력이 넘쳐나도(4,1-3 참조), 여인은 자신을 방어할 줄 압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쉽게 내주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에 대한 분명한 의식, 이것이 아가의 주인공 여인의 매우 강한 매력입니다. 여인은 자신이 아름답다는 것을 압니다. 아무에게나 자신을 줘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요즘 잘 쓰는 말로 ‘자존감’입니다. 그것이 여인을 지켜줍니다. 1장에서 오빠들은 누이동생이 쉽사리 사랑에 빠져버릴까 봐 동생을 가두려고 포도밭을 지키게 했다고 말하지요. 그러나 강한 자존감을 가진 여인에게 그런 조처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가의 주인공인 여인에게,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한편으로는 자존감이 여인을 지켜 주고 쉽게 여인을 차지할 수 없게 만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자존감이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내주게 합니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참으로 가치 있고 소중한 무엇인가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여인은 자신을 내주게 되는 것입니다.

 

‘경탄’의 중요성은 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인을 바라보며 “내 친구야, 너 정말 예쁘구나!”라고 말하는 연인은, 바로 여인이 지닌 가치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경탄이 “천 개의 방패들”이 걸려 있는 “다윗 탑” 같은, 요새 같은 여인을 무장 해제시킵니다. 2장에서도 이와 연관된 구절이 있었습니다. “내 위에 걸린 그 깃발은 ‘사랑’이랍니다”(2,4)는 구절입니다. 여기에서 여인은 정복당한 도성과 같습니다. 그 도성에 걸린 정복자의 깃발은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무장된 성채인 여인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몰약 산으로, 유향 산으로”(4,6)

 

다음 단계는 연인이 “몰약 산으로, 유향 산으로” 가는 것입니다. “몰약 산, 유향 산”이 상징하는 것은 여인의 가슴이라고 생각합니다(달리 해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여인에 대한 묘사도 가슴에서 끝났지요(4,5 참조). 이제 연인은 그 산으로 갑니다. 이어서 나오는 사랑의 향유는 다음 달에 읽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2년 8월호(통권 437호)]

 

 


 

 

[아가, 노래들의 노래]

(9)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아가 4,9)

안소근 실비아 수녀

 

 

어느 날 저녁 미사를 가려고 했는데 지나가다 보니 혼배 미사가 있기에 그냥 들어갔습니다. 거의 20년 만에 보는 혼배였습니다. 신랑 신부가 너무나 대단하게 보였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에게 자신의 일생을 걸 수 있을까요?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어떻게 평생을 약속하고 모든 것을 줄 수 있을까요? 지금 얼마나 큰 결단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저 부부가 모르는 것일까요? 아니면 제가 모르는 것일까요? 퇴장하는 신혼부부를 보면서 정말 장하다는 마음으로 열렬한 박수를 보냈습니다.

 

아가의 주인공들도 오늘 그런 용기를 보여 줍니다. 친구들이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아가에서 ‘신부’라는 단어는 오늘 읽을 4,8-5,1의 단락에서만 사용됩니다. 이 단락에서는 주로 ‘신부’, ‘누이’, 그리고 이어서 나올 ‘정원’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그 여인을 표현합니다.

 

“나의 신부여”(4,8)

 

8절과 11절에서는 ‘신부’라는 호칭이 사용되고, 9.10.12절과 5,1에서는 “나의 누이 나의 신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물론 연인이, 신랑이 하는 말입니다. 본래 히브리어 단어 ‘칼라’는 문맥에 따라 신부를 뜻할 수도 있고 며느리를 뜻할 수도 있는데,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여인을 지칭해 온 ‘나의 애인’이라는 표현이 둘의 우정을 나타낸다면(지난달에 이 구절을 “내 친구야”라고 번역했던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신부’라는 말은 이미 그 남녀의 관계가 철저히 배타적인 것임을 드러냅니다. “나의 연인은 나의 것, 나는 그이의 것”(2,16)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던 상호 소속의 관계는 실상 부부에게서 가장 완전하게 실현됩니다. 이제는 온전히 그의 것이지 다른 사람의 것은 될 수 없는 것, 그것이 ‘신부’입니다.

 

아가의 신부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지요. 기본 의미는 물론 부부 관계에서의 신부입니다. 그런데 유다교의 전통 해석에서 아가의 신랑과 신부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그 배경은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을 신랑이신 하느님의 신부라는 표상으로 나타냈던 것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의 명으로 불충실한 아내를 끝까지 다시 데려오며 일방적으로 사랑을 쏟아 주어야 했던 호세아는, 그 아내와 자신의 관계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관계를 보여 주었습니다. “너는 다시 가서, 다른 남자를 사랑하여 간음을 저지르는 여자를 사랑해 주어라. 주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해 주어라”(호세 3,1).

 

제2이사야도 멸망하여 유배를 갔던 이스라엘을 남편에게 버림받았던 여자, 그러나 다시 사랑을 받고 찬란히 회복된 신부로 표현하였습니다. “정녕 주님께서는 너를 소박맞아 마음 아파하는 아내인 양 퇴박맞은 젊은 시절의 아내인 양 다시 부르신다”(이사 54,6). 이러한 예언자들의 전통을 배경으로, 유다교 해석자들은 아가의 ‘신부’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영원한 계약으로 하느님과 맺어진 이스라엘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해석자들은 이러한 유다교 전통과 대비를 이루며 아가의 신부가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그리스도 교회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은, 교부들 이전에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신부의 표상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하지만, 오늘 특히 마음에 새기고 싶은 것은 요한 묵시록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신부’라는 표현을 아낍니다. 처음부터 교회를 신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교회는 ‘약혼녀’입니다. 교회가 어린 양의 신부가 되는 것은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때입니다(묵시 21,2). 그래서 이 마지막 두 장, 새 예루살렘을 그려 보일 대에야 교회는 신부가 됩니다.

 

여기에서 약혼녀와 신부의 차이는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약혼녀도 어린 양의 약혼녀이지만, 완전하게 어린 양에게 속해 있지는 못합니다. 현재의 교회가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적 약함이 있기에, 아직은 겨자씨요 누룩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 교회가 완전히 그리스도께 속하게 될 때 교회는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아가로 돌아가서 ‘신부’라는 표현을 음미해 보면, 그것이 결코 ‘애인, 친구’보다 시들한 단어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신부’가 된다는 것은 사랑의 완성, 온전한 자기 증여를 뜻합니다.

 

“나와 함께 레바논에서”(4,8)

 

그런데 성경은 창세기의 첫 부부인 아담과 하와의 첫 만남을 전하는 장면에서 이미 남녀가 한 몸이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창세 2,24)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아가의 남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부름에 응답하려면 여인은 집 밖으로 나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면 죽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상대방에게 주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은 실제로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4,1-7에서 ‘경탄’이 끝난 다음 연인은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그 여인에게 다시 한 번 “떠납시다”고 재촉합니다(4,8).

 

여인이 사자 굴을 떠나고 표범 산을 떠나야 한다는 것은 그 떠남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말해 줍니다. 그러나 8절의 첫 단어는 “나와 함께”입니다. 사랑이 ‘나’를 위협하는 것이 명백한데도 사람들이 사랑할 수 있는 건 무엇 때문일까요? 사랑에 빠져 본 일이 있는 사람에게는 어쩌면 너무 쉬운 질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험이 가능한 것은 누군가에 대한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다음 절에 나오는 신랑의 말도 이와 유사한 체험을 나타냅니다. “그대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소”(4,9). 히브리 사고에서 ‘마음, 심장’은 이성적 판단을 내리는 자리였습니다. 감정은 심장이 아니라 신장에 머무른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사로잡았소”라는 것은(라틴어 번역에서는 “내 마음에 상처를 입혔소”라고 되어 있지만) 쉽게 말해 정신이 나가게 했다는 뜻입니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동은 사랑을 함께 나누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고 무모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목숨을 내어 주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것이 가장 완전한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3). ‘함께’하는 사랑이기에 그것이 가능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시고 사명을 맡기실 때 늘 똑같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 판관 6,12; 예레 1,19)는 것이고, 그 ‘함께 계심’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듯이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이 그런 모험을, 안전을 떠나고 부모를 떠나고 자신을 떠나는 모험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애인이 ‘신부’가 되기에 이릅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4,9)

 

이 표현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여러 학자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렇듯이 이 부부가 친척이었으리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가와 많은 공통점을 보이는 이집트의 사랑 노래들이나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적이고 예식적인 본문들에서는 사랑하는 여인을 가리켜 ‘누이’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 부부들 사이에서는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누이’라는 말은 내 뼈에서, 내 살에서 나와서(창세 2,23 참조) 나에게 어울리는 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창세 2,20 참조). 아담이 다른 어떤 동물을 보고서도 자기 짝이라고 느끼지 않았고 오직 하와를 보고서야 “이야말로”(창세 2,23) 내 짝이라고 탄성을 질렀듯이, 연인들은 저 사람이 바로 나의 짝이라고 느낍니다. ‘누이’라는 호칭은 그러한 직관을 담고 있습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성서와 함께, 2012년 9월호(통권 438호)]

 

 


 

 

[아가, 노래들의 노래]

(10) 그대는 닫혀진 정원(아가 4,12)

안소근 실비아 수녀

 

 

지난달에는 아가 4장에서 사용하는 “나의 누이, 나의 신부”라는 두 표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아가에서는 이 단락에서만 여인을 ‘신부’라고 지칭하고, 이를 통해 주인공 남녀가 부부임을 알 수 있다고 했지요. ‘신부’는 전적인 자기 증여를 나타내는 명칭이고, ‘누이’는 사랑하는 이들의 동질성을 나타내는 표현이었습니다.

 

그 ‘누이, 신부’의 아름다움에 관한 노래 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4,12-5,1 노래의 핵심은 ‘정원’이라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여성을 상징합니다. 생명이 싹트는 자리인 땅을 어머니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비유로, 성적 의미를 포함합니다. 3년 전, 처음으로 ‘나의’ 화분을 갖게 되었을 때 저는 아가에서 말하는 ‘나의 정원’의 의미를 알 것 같았습니다. 매일 출근하자마자 들여다보던 그 화분은 저의 소중한 분신이었습니다. 새 잎이 나면 제 안에서도 생명이 자라나는 것 같았고, 잎이 시들면 제가 병든 것 같았습니다. 아가 4장의 정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인의 정원은 여인이 소유하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생명을 담고 있는 그 여인 자신입니다.

 

내 정원, 그의 정원(4,16 참조)

 

그런데 이 노래에서 여인을 나타내는 ‘정원’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문맥만을 살펴보면,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2-15절에서는 신랑이 신부에게 ‘정원’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그대는 닫혀진 정원”(4,12)이라는 표현처럼, 누구의 정원이라고는 아직 말하지 않습니다. 16절에서 그 정원을 일컬어 ‘내 정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부입니다. 그런데 같은 절에서, “나의 연인이 자기 정원으로 와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내 정원’이 ‘그의 정원’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 절에서 결정적 전환이 이루어졌음을 뜻합니다. 여인이 ‘내 정원’을 그에게 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정원이 그의 것이 되었습니다. ‘신부’라는 표현에 들어 있던, 전적인 자기증여라는 주제이지요. 탑과 방패로 무장한 요새였던 그 여인이, 바위틈의 비둘기였던 그 여인이 ‘나’를 ‘그의 것’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5,1에서 신랑이 “나의 정원으로 내가 왔소”라고 말하게 됩니다.

 

이렇게 정원이라는 시적 비유로 이 단락에서 말하는 내용이 명백해졌지요. 신부가 신랑에게 자신을 주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그 앞에는 신랑이 신부를 보고 “내 친구야 너 정말 예쁘구나”(4,1 참조)라고 말하는 ‘경탄’이 있었음을 기억하시지요? 자신의 소중함을 알아보고 자신을 사랑하는 연인에게 여인은 자신을 내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단락을 다시 처음부터 읽으면서 단계별로 나타나는 여러 상징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그대는 닫혀진 정원”(4,12)

 

먼저 12절에서 여인이 ‘닫혀진 정원’, ‘봉해진 우물’이라는 것은 처녀성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물리적 의미뿐 아니라 아직 자신을 열어 주려 하지 않는 여인의 상태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 정원은 봉인되어 밖에서 마음대로 열 수가 없습니다. 연인은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오”(2,14)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여인이 안에서 열어 주어야만 그 정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강제로 정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여인이 스스로 사랑을 내줄 때에만 그 정원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가의 여인은 분명히 쉽게 열어 주지 않습니다. 긴 여정을 거쳐 온 아가의 전반부 전체가 바로 이 지점을 향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13-14절에서 언급되는 정원의 석류, 맛깔스러운 과일, 온갖 향료들은 신부가 신랑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 그 감미로운 사랑을 의미합니다. 어떤 식물은 앞에서도 이미 언급되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석류(4,13)가 사랑, 생명, 성을 상징한다는 것은 앞에서 보았고, 나르드(4,13)는 1,12에서 나왔습니다. “임금님이 잔칫상에 계시는 동안 나의 나르드는 향기를 피우네.” 내가 줄 수 있는 향기롭고 고귀한 사랑, 그것을 대변하는 것이 나의 나르드입니다. 요한 12,3에서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나르드 향유를 부어 드린 장면이 생각나지요. 요한 복음서 저자는 분명 아가를 생각하면서 그 단락을 썼을 것입니다.

 

14절에 나오는 ‘몰약과 침향’도 복음서에 나옵니다. 니코데모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하여 가지고 온 것이 몰약과 침향이었습니다(요한 19,39 참조). 그것은 방부 처리를 위하여 사용되는 재료입니다. 여기에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신부가 신랑에게 주는 사랑이 몰약이고 침향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죽음을 쳐 이긴다는 뜻입니다. 한편 사프란이나 육계향 같은 향료는 성경에도 드물게 언급되는 이국적 향초입니다. 그만큼 사랑이 귀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렇게 신랑은 경탄을 계속하며 그 사랑의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여기에서 다른 단어 하나가 눈에 뜁니다. 13절에서 석류나무 ‘정원’이라고 번역된 단어인데, 히브리어에서는 페르시아어에서 빌어 온 외래어를 사용하여 pardes라고 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pardes는 ‘정원’을 뜻하며 세 곳에서 사용되는데, 같은 어원의 그리스어 paradeisos는 대개 에덴 동산을 가리켜 사용되고 그래서 ‘낙원’을 뜻하기도 합니다(영어 paradise 참조). 사실은 에덴 ‘동산’이라고 번역된 단어의 본래 뜻은 에덴 ‘정원’이지요. 아무튼 신랑에게 신부는 에덴 동산과 같은 낙원입니다. 주요한 점 한 가지! 맨 처음 입문에서 말씀드렸던 것인데, 아가는 창세 2장과 연결됩니다. 죄로 인하여 아담과 하와의 관계가 손상되기 전, 티 없는 인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아가는 남녀의 순수한 사랑이 인간에게 원죄 이전의 상태를 체험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일어라, 북새바람아!”(4,16)

 

이어서 16절에서는 신부가 자기 마음을 너무나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일어라, 북새바람아! 오너라, 마파람아! 불어라, 내 정원에, 온갖 향료들이 흘러내리게! 나의 연인이 자기 정원으로 와서 이 맛깔스러운 과일들을 따 먹을 수 있도록!”

 

소심하다고 해야 할까요? 다른 부분에서 아가의 주인공이 이렇게 소심하게 보이지 않는데, 이 구절은 정말 여성스럽습니다. 제가 쓴 이 구절을 보고, 여성 해방을 주장하는 분들은 반대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 마음이 저릴 만큼 공감합니다. 아가의 저자가 여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좀 있는데, 저는 그렇게 주장하기에는 근거가 약하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이 구절은 남성 저자가 썼다고 생각하기에는 놀라운 구절입니다.

 

온갖 감미로움을 자기 안에 지닌 이 여인은, 연인에게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자신의 사랑을 연인에게 전해 주기를 기원합니다. 정원은 일어나 움직이지 않습니다. 있는 자리에서 향기를 바람에 실어 보냅니다. 자신의 사랑을 스스로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불어 나의 향기가 풍겨나게 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연인은 자기 정원으로 옵니다. “나의 정원으로 내가 왔소”(5,1). 네가 바람결에 실어 보낸 너의 사랑을 나는 알아들었다. 그런 뜻이겠지요. 그리고 이제 그 정원이 주는 향기, 꿀, 포도주를 맛봅니다.

 

“사랑에 취하여라”(5,1)

 

이것이 아가 전반부의 마지막 말입니다. 사랑의 모험을 감행한 남녀에게 아가는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이미 여러 차례 말했던 바와 같이, 그 사랑을 긍정하는 것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 참조)고 하신 구약성경의 인간관과 일치합니다. 정원에 있는 석류와 과일들(4,13)이 신부가 신랑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고 그 사랑의 즐거움이었다면, ‘먹어라’는 말은 그 사랑을 누리라는 뜻입니다. 정원에 온 신랑이 포도주와 젖을 마신다면(5,1), ‘마셔라’ 역시 한껏 그 사랑을 향유하라는 뜻입니다. 서로에게 자신을 완전히 주는 사랑을 통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으라는 말입니다. 취할까 봐 두려워하지 말고, 이렇게 아가는 죄에 물들기 전 낙원에서 살던 인간의 모습을 통하여 다시 완성될 낙원의 모습을 그려 보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2년 10월호(통권 439호)]

  

 


 

 

[아가, 노래들의 노래]

(11) 들어 보셔요, 내 연인이 문을 두드려요(아가 5,2)

안소근 실비아 수녀

 

 

아가 5,1에서 이미 연인이 신부에게 와서 사랑에 취했는데, 5,2에서 우리의 주인공은 혼자 있습니다. 이제야 연인이 멀리서 찾는 소리가 들립니다. 왜 그럴까요?

 

아가는 소설이 아닙니다. 드라마도 아닙니다. 그래서 줄거리가 없습니다. 아가는 ‘아름다운 노래’, 감정을 노래하는 시(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 3월호에서 소개한 아가의 구조에서 보았듯이 아가에서는 같은 주제가 반복됩니다. 서문(1,2-2,7)이 끝난 다음에 시작되었던 사랑의 여정은 5,2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됩니다. 제1부(2,8-5,1)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남녀는 서로를 찾고, 갈망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경탄하는 과정을 거쳐 사랑의 완성에 이릅니다. 그리고 아가의 마지막은 처음으로 돌아가며, 사랑의 일치를 다시 풀어 놓으며 끝납니다. 그렇게 해서 사랑을 끝없이 다시 시작됩니다.

 

“내게 문을 열어 주오”(5,2)

 

몇 달 전에 만난 어떤 분이 – 그분도 수녀님이셨는데! - 제가 쓰고 있는 아가 해설에 대해 물으셨습니다. 연애도 안 해 봤는데 어떻게 아가에 대해 쓸 수가 있느냐는 물음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아가 주석서를 남성이 썼다고 생각하면, 그 책의 저자들보다 제가 아가의 주인공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말합니다. 아니 사실 그 과정을 반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아가를 읽으면서 여성성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처음에는 미지의 땅을 탐험하는 것 같았지요. 용감한 우리의 주인공 아가씨 덕분에 제가 많이 배웠습니다. 제 안을 들여다보게 하는 체험이었습니다.

 

오늘의 주제도 상당히 여성적입니다. 사랑의 부름에 단번에 응하지 못하고 한번은 놓치고 마는 것이지요. 사랑이 처음 다가올 때 한편으로 당장 달려가고 싶으나 실제로 달려가는 상상만 무수히 하고 마는, 그런 젊은 여인의 마음을 알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입니다.

 

“나는 잠들었지만 내 마음은 깨어 있었지요”(5,2)

 

밤입니다. 여인은 홀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사실 이 구절은 ‘밤에 여인의 문밖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문학 양식을 도입하기 위한 배경 설정입니다. 구전적 구애 장면으로 시작하는 것이지요. 연인의 문밖에서 부르는 노래는 이집트, 그리스, 로마의 시문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기본 형태를 보면 여인이 끝까지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그저 애틋한 동경을 표현하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사랑을 구하기가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다(실제로 5절에서 여인은 문을 열 것입니다. 정해진 문학 유형의 틀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마음이 깨어 있었다고 하니까요. 잠을 자면서도 연인이 밖에서 불러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구절에도 이와 유사한 암시가 있습니다. “들어 보셔요, 내 연인이 문을 두드려요”(5,2)라고 번역된 구절의 원문은 “문을 두드리는 내 연인의 소리(또는 목소리)”입니다. 문만 두드렸는데 어떻게 연인의 소리인 줄 알까요? 아마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리 약속한 것은 아닙니다. 연인은 그저 밖에서 오지만 여인의 마음에는 이미 사랑이 싹트고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연인이 밖에서 여인을 부릅니다. “내게 문을 열어 주오”(5,2). 그러나 밤길을 달려온 연인에게 문이 바로 열리지는 않습니다. 별걸 다 가지고 토론한다고 하겠지만, 3절에서 여인이 문을 열어 주지 않기 위해 말하는 구실에 대해 학자들은 이런저런 논의를 합니다.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이미 발을 씻었기 때문에 문을 열 수 없다고 하는 것은 핑계라고 봅니다. 옷 하나 걸치고 일어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이런 구실을 대었을까요?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사랑을 허락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보고, 어떤 이는 여인이 기다리다 지쳐 잠자리에 들었는데 연인이 늦게 찾아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 생각에 여인은 문을 열고 싶었을 것입니다. 2절에서 본 바와 같이 이미 사랑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용기가 부족한 것이겠지요. 망설임이겠지요. 여기서 이 절과 2,8-14의 노래가 병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8에서도 5,2에서와 같이 “내 연인의 소리!”라는 표현이 사용되었고, 연인은 산에서 달려와 창틈에서 불렀습니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2,10). 그러나 여인은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였고, 아름다운 그 모습을 보여 달라고 간절히 불러 일으켜야 했습니다(2,14 참조). 5,3에서 여인이 문을 열어 주지 않으려 하는 것은 2장의 비둘기가 바위틈에 숨는 것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사랑의 부름을 느끼고 있지만, 아직 그 사랑에 응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의 연인에게 문을 열어 주었네”(5,6)

 

조급해진 연인은 문틈으로 손을 내밀고, 여인의 가슴은 두근거립니다. “내 가슴이 그이 때문에 두근거렸네”(5,4). 여기서 ‘가슴’이라고 번역된 단어 me im은 ‘내장’을 뜻합니다. ‘두근거렸네’라고 번역된 동사 hamah는 바다에 풍랑이 이는 것, 반란이나 봉기가 일어나는 것, 감정적 동요를 표현합니다. 그러니 심장이 뛴 정도가 아니라 속이 다 뒤흔들린 것입니다. 밖에서 부르는 소리만 들었을 때에는 즉시 응답하지 않았지만, 문틈으로 내민 연인의 손을 보자 달라집니다. 여인 편에서는, 이때가 일어나서 문앞으로 나가게 되는 순간입니다. 이제 일어나 문을 열어 줍니다. “그러나 나의 연인은 몸을 돌려 가 버렸다네”(5,6).

 

왜 떠나갔을까요? 아무리 본문을 분석해도 나오지 않습니다. 성서 주석에서는 “본문이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게 하지 마라”고 합니다. 우스운 말 같지만 중요한 원칙입니다. 본문의 화자가 누구인지 보십시오. 5,2-8의노래는 온전히 여인의 시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연인이 떠나간 이유를 찾아낼 수는 없습니다. 여인은 그저 떠나감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때를 놓쳤습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지 않았기에, 사랑은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이 어긋남은 오히려 여인의 갈망을 키워 줍니다. 이제는 여인 편에서 찾아 나섭니다. 이 부분 역시 아가 전반부에서 병행되는 단락인 3,1-5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 때문에 앓고 있다고”(5,8)

 

여인은 이제 자신의 사랑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길거리로 나섭니다. 3장과 마찬가지로 야경꾼들을 만납니다. 이번에는 야경꾼들의 반응이 더 부정적입니다. “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자 나를 때리고 상처 내었으며 성벽의 파수꾼들은 내 겉옷을 빼앗았네”(5,7).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보통 야경꾼들이 겉옷을 빼앗는 것은 여인을 창녀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밤중에 연인을 찾아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행동은 이미 사랑 때문에 자신을 위험에 내맡기는 일이었습니다. 야경꾼들의 행위는 그 위험을 현실에서 보여 준 것뿐입니다. 야경꾼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은 야경꾼들의 탓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사랑에 수반하는 ‘대가’입니다. 여인은 사랑 때문에 앓고 있습니다(5,8; 2,5 참조).

 

사랑 때문에 병에 걸린다는 데에서 5,2-8의 노래를 꿰뚫는 주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인은 자기 안에 사랑을 가득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따라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누구 탓이 아니라 여인 스스로 마음에 있는 사랑을 펼쳐 놓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안에 고여 있는 사랑 때문에 병들었습니다. 이 병은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이제는 위험에 자신을 노출하면서도 사랑을 찾아 나서게 합니다.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여인 안에 압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힘, 우리 안에 그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실현하는 데에 꼭 한 발씩 늦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한 발 늦음’과 그 후에 따라오는 애달픔은,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가능성을 그냥 묻어 버릴 수 없다고 확인해 줍니다.

 

[성서와 함께, 2012년 11월호(통권 440호)]

 

 


 

 

[아가, 노래들의 노래]

(12) 그이의 모든 것이 멋지답니다(아가 5,16)

안소근 실비아 수녀

 

 

망설이다가 사랑의 때를 놓치고, 연인은 문 밖에서 사라졌습니다(5,2-8 참조). 그래서 마음 안에 고인 사랑을 억누르지 못해 병이 나고 만 우리의 주인공이 길거리로 나섰습니다.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에게, 연인을 만나면 사랑 때문에 앓는 내 소식을 전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은 그 연인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그토록 간절히 연인을 찾느냐고 묻습니다. “그대 연인이 다른 연인보다 나은 게 무엇인가?”(5,9) 이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주인공은 자기 연인을 묘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묘사는 연인의 외모를 중립적으로 전달하는, 말하자면 경찰에게 진술하는 인사착의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이 대답은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이 연인을 알아보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만인 중에 뛰어난 사람”(5,10)

 

 

아가 5,10-16은 연인에 대한 묘사입니다. 아가에 남녀가 서로 묘사하는 노래가 몇 개 있는데, 이 단락 하나만을 제외한 4,1-7과 6,4-7 그리고 7,2-9에서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 보입니다. 5,10-16에서만 예외로 여인이 자기 연인을 묘사하는데, 4장을 읽으면서 잠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이것은 고대의 다른 문학 작품과 비교해 봐도 드문 예입니다. 아랍 문학에는 ‘와스프’라는 문학 유형이 있는데, 보통 혼인 예식을 배경으로 사랑하는 여인의 신체를 묘사합니다. 그러나 아가에서는 남녀 모두 상대방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경탄합니다. 아가에서 여성은 남성의 사랑의 대상으로만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가의 사랑은 서로 동등하게 주고 받는 것입니다.

 

세부 묘사를 시작하기 전에 여인은 “나의 연인은 … 만인 중에 뛰어난 사람이랍니다”(5,10)고 선언합니다. 연인은 과연 그렇게 뛰어난 인물일까요? 잠시 돌려서 생각해 보십시오. 제 쌍둥이는 저를 불 때 ‘이쁜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예쁠까요?(다른 누구도 저를 보고 이쁜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저는 제 쌍둥이를 ‘귀염둥이’라고 부릅니다. 남들이 보기에도 귀여울까요? 또 부모님이 보기에는 영 모자라는 것 같고 눈에 들지 않는 사람을 좋다고 따라다니는 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랑에 빠진 아가씨가 자기 애인이 멋지다고 하면, 그 말을 얼마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여기까지 생각하면, 다시 아가의 본문에 대해 질문할 수 있겠습니다. 아가의 주인공이 자기 연인을 두고 “나의 연인은 … 만인 중에 뛰어난 사람이랍니다.”(5,10)고 말할 때, 이것을 객관적 진술로 보아야 할까요?

 

물론 아닙니다. “예루살렘 아가씨들”(5,8)이 볼 때 그는 “만인 중에 뛰어난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를 사랑하는 여인에게만 “만인 중에 뛰어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느끼는 매력은 그들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그런 것인 모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연인에게서 보물을 발굴하듯 아름다움을 찾아냅니다. 방사선으로 몸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내듯, 사랑어린 눈길이 감추어진 가치를 드러내 놓습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 자신도 알지 못했던 그의 유일무이한 가치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이의 머리는 금 중에서도 순금”(5,11)

 

그런데 아가에 들어 있는 신체 묘사 가운데 유일하게 남자 연인의 모습을 표현하는 이 노래에는 또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연인의 모습을 신상과 같이 나타낸다는 점입니다. 이에 병행하는 문학 작품을 이집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특히 임금의 모습을 신상처럼 묘사하곤 했습니다. 아가 입문에서 잠시 다룬 적이 있는데, 아가는 이집트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책입니다. 아가와 가장 가까운 노래를 이집트의 사랑 노래에서 볼 수 있지요. 이렇게 볼 때, 아가 5,10-16의 노래 역시 – 아랍 문학과 함께 – 이집트 문학의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메소포타미아나 이스라엘에 비하여 훨씬 강한 의미로 파라오를 신격화했습니다. 태양신 라(Ra)가 아버지 임금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나타나 왕비에게 장차 임금이 될 아들을 수태하게 한다고 여겼기에, 임금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이미 신의 아들이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메소포타미아와 이스라엘의 군왕 신학은, 임금으로 즉위하는 순간에 하느님께서 “너는 내 아들”이라고 선언하신다고 여겼지요(시편 2,7 참조). 이렇게 파라오를 절대적 신의 아들로 여기다 보니 자연히 파라오에 대한 묘사가 신들에 대한 묘사와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5,10-16의 본문에서도 연인은 마치 당당한 신상과 같습니다. “그이의 머리는 금 중에서도 순금”(5,11), “그이의 팔은 보석 박힌 금방망이”(5,14), “그의 몸통은 청옥으로 덮인 상아 조각”(5,14), “그이의 다리는 순금 받침대 위에 세워진 하얀 대리석 기둥”(5,15).

 

실제로 신들을 보았더니 몸이 금으로 되어 있어 그다음에 금으로 신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금으로 신상을 만들다 보니 신들의 몸이 금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집트에서는 금이 신들의 살이라고 일컬어졌다 합니다. 그런데 아가에서는 연인의 몸이 금으로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머리는 “금 중에서도 순금”입니다. 팔이 “보석 박힌 금방망이”라는 구절은, 사실 정확히 번역하기 어려운 구절이지만, 아마도 그 살이 금으로 되어 있고 거기에 반지(‘보석’)가 끼워져 있다는 뜻이라고 봅니다. 다리가 기둥이라면 그 다리의 ‘받침대’는 발입니다. 그러니 연인의 발도 금이겠지요.

 

“하느님의 모습으로”(창세 1,27)

 

앞에서 연인을 “만인 중에 뛰어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비교 대상은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연인은 거의 신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우상 숭배일까요? 사랑이 우상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가에서 아직까지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저도 하느님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과, 결코 하느님이 될 수 없는 연인 또는 사랑의 관계는 아가 끝부분에 가서야 밝혀질 것입니다. 지금 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점입니다. 참세 1,27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모습’이라는 히브리어가 본래 뜻하는 것이 ‘상(像), 형상’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모습’은 바로 신상이지요.

 

아가는 정말 놀라운 책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것은 구약성경 인간학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창세 3장부터 이미 하느님의 모상은 손상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아가는 인간에게서 손상되기 전의 모습을 봅니다. 인간이 그대로 하느님의 상(像)임을 알아봅니다. 아가에 따르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가요? 우리는 이 글의 앞부분에서 그것을 이해했습니다.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 안에 감추어져 있는 보물을 발굴해 낸다고 했습니다. 그 절정이 바로 ‘하느님의 모상’을 온전히 찾아내는 것입니다. 아가는 남녀의 사랑을 통해 이것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창세기와 일치하는 생각입니다. 창세 1,27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랑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것을 철학과 신학에서 여러 가지로 설명하지요. 인간이 인식 능력을 가지고 있고,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데 창세 1,27에서는 “하느님의 모습으로”에 이어 “남자와 여자로”라고 말합니다. 아가는 바로 이 구절에 근거하여, 사랑하는 여인이 자기 연인의 모습 안에서 하느님의 모상을 발굴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에 ‘눈이 멀게’ 되었을 대에 오히려 인간의 본 모습을, 하느님께서 그를 처음 만드셨을 때에 바라셨던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누군가 그의 눈길로 내 안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드러내 준다는 뜻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2년 12월호(통권 441호)]

 

 


 

 

[아가, 노래들의 노래]

(13) 아름답고… 두렵고… 나도 몰라

안소근 실비아 수녀

 

 

사랑에 빠진 여인이 “그이의 모든 것이 멋지답니다”(5,16)고 자랑스럽게 내세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자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어리석음, 이미 여러 차례 언급된 주제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놀라운 힘을 지녔습니다. 연인을 꿰뚫어 보는 사랑의 눈길이 연인 안에서 하느님의 모상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창조 때에 ‘하느님께서 보시니 모든 것이 좋았다’(창세 1,4.10.12.18.21.25.31 참조)고 하셨듯이, 사랑하는 이의 눈길은 연인에게서 아름다움을 찾아냅니다.

 

그러면 사랑에 빠진 이는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 사랑을 어떻게 체험할까요? 아가의 전반부에서는 주로 젊은 아가씨의 관점에서 사랑의 부름에 응답하여 마침내 집을 나서게 되기까지의 체험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아가 6,4-9.11-12은 그 아름다운 아가씨를 바라보며 사랑을 느끼는 연인의 속마음을 들려줍니다.

 

“나의 애인이여, 그대는 티르차처럼 아름답고”(6,4)

 

6,4의 첫머리에 나오는 “나의 애인이여, 그대는 … 아름답고”에 대해서, “내 친구야, 너 정말 예쁘구나!”라고 한 번역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4,1 참조). 아가에서는 찾음-만남-경탄-결합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여정’이 두 번 반복된다고 했지요. 5,2 이후에 줄거리가 다시 시작되었으니, “너 정말 예쁘구나!”라는 경탄도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6장의 경탄에서 새로운 점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티르차와 예루살렘에 비긴다는 것입니다. 티르차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나중에는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겨가게 되지요. 한편 예루살렘은 남왕국 유다의 수도였습니다. 그러니 티르차와 예루살렘을 함께 언급하면 그 둘은 남북 왕국 전체에서 가장 눈에 띄는 도시를 뜻하게 됩니다.

 

고대에는 도시를 여인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애가에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여왕’이 ‘과부’로 전락했다고 비기기도 하지요(애가 1,1: 애가는 예루살렘을 한 여인처럼 나타내면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 여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책입니다). 아가에서는 역으로 여인을 도성에 비유했습니다. 2,4에서 여인은 사랑에 정복된 도시이고, 4,4에서는 탑과 방패로 무장한 성벽과 같습니다. 여인 편에서 이 ‘도성’의 비유는 자존감을,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연인은 도성과 같은 여인에게 오히려 매력을 느낍니다. 단번에 쉽게 넘어오지 않는, 쉽게 말하면 튕기는 여인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일부러 조금씩 튕기는 모습은 자신을 만만하게 보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지요. 그 여인을 바라보는 편에서도 그녀를 “티르차처럼 아름답고 예루살렘처럼 어여”(6,4)쁘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도성 가운데에서 으뜸인 그 두 도시처럼, 애인은 모든 여인 가운데 뛰어납니다. 수도가 함락되면 그 나라는 전쟁에 패배하는 것입니다. 히즈키야 시대에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쳐들어 왔을 때에도 유다의 성읍 마흔여섯 개가 함락되었다고 하지만, 예루살렘이 끝까지 무너지지 않았기에 유다는 멸망을 면하지요. 마지막 보루, 난공불락의 요새. 여느 여인들과 달리 그만큼 정복하기 어렵고 매력 있는 여인입니다. 그래서 앞서 여인이 “나의 연인은 … 만인 중에 뛰어난 사람이랍니다”(5,10)고 말했던 것처럼, 그 연인도 자기 애인이 “오직 하나”(6,9)라고 말합니다.

 

“나의 티 없는 여인은 오직 하나”(6,9)

 

솔로몬에게는 부인이 많았습니다. “왕비가 예순 명 후궁이 여든 명 궁녀는 수없이 많지만”(6,8)에 나오는 숫자는 솔로몬의 왕비나 후궁 숫자와 일치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 구절이 우리에게 솔로몬을 연상시킵니다. 아가의 사랑은 솔로몬의 사랑과 대비됩니다(8,11-12 참조). 솔로몬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수많은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던 것과 달리, 아가의 사랑은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한 사랑입니다. “나의 비둘기, 나의 티 없는 여인은 오직 하나”(6,9). 사랑은 숫자로 세어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에서는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라고 말합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유일한 사랑이시기를 요구하는 하느님이십니다. 질투하시는 하느님, 이스라엘이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하느님이십니다. 속이 좁아서 그러실까요? 아닙니다. 당신께서 이스라엘을 유일한 사랑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갈림 없는 사랑, 바로 그런 사랑이 아가의 두 연인이 서로에게 바치는 사랑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이며, 또 그런 사랑이라야 다른 어떤 사랑과 비길 수 없는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런 사랑은 나를 몽땅 걸어야 하는 사랑입니다.

 

“기를 든 군대처럼 두려움까지 자아낸다오”(6,4)

 

나를 몽땅 걸어야 하는 사랑이라…. 그런 사랑에 빠지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사랑이 나보다 강하고, 나를 휘어잡고, 나를 위험에 처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인을 바라보는 연인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여인이 너무 - 글자 그대로 지나치게 -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도성 같고 군대 같은 여인에게 매력을 느끼면서도, 사랑에 빠질까 두려워합니다.

 

구약성경의 토빗기에는 사랑하기를 두려워한 한 남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토빗의 아들 토비야입니다. 토비야는 라파엘 천사와 함께 먼 여행길에 오르는데, 중간에 라파엘 천사가 토비야에게 라구엘의 딸 사라와 결혼하라고 말합니다. 라구엘이 토빗의 친척이었기에, 토비야에게는 사라를 아내로 맞을 권리와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토비야는 두려워합니다. 사라는 “일곱 남자에게 시집을 갔지만, 신부와 관련된 관습에 따라 신랑이 사라와 한 몸이 되기도 전에, 아스모대오스라는 악귀가 그 남편들을 죽여 버렸”(토빗 3,8)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에는 고대의 전설이 있습니다. 남녀가 결혼할 때에 거기에, 말하자면 액이 끼기 때문에 그 액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전설은 ‘악귀’나 ‘액’으로 사랑의 두려움을 표현합니다. 사랑하려는 순간에 느끼는, 악귀가 출현할 것 같은 두려움. 사랑이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두려움! 그러나 토비야는 라파엘이 가르쳐 준 대로 기도의 힘으로, 그리고 라파엘이 처방해 준 방법으로 악귀를 몰아내고 사라와 결혼합니다. 사랑의 힘이 두려움을 이기는 순간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무모하고 어리석게 보일 뿐 아니라, 사랑을 하려는 당사자에게도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연인은 “내게서 당신의 눈을 돌려 주오. 나를 어지럽게 만드는구려”(6,5)라고 말합니다. 어지럽게 만든다는 것은, 정신을 온통 혼란스럽게 한다는 뜻입니다. 즉 내가 사랑에 빠져 정신을 잃는 것이 두려우니 그 사랑의 눈길을 나에게 던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나를 사랑에 홀리게 하지 말아 다오! 여기서 표현되는 것은 사랑의 엄청난 힘입니다. 인간은 무엇에 ‘당하는’ 듯 그 사랑의 힘을 체험합니다. 두려워서 피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사랑의 힘에 굴복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인은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6,12) 사랑으로 움직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6,12은 아가에서 번역하기 가장 어려운 구절이지만, 어떻든 12절의 첫 마디는 “나는 모른다/몰랐다”입니다. 사랑,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랑, 그 사랑을 나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 ‘나’를 잃어버려 가면서, 나의 삶을 다른 사람이 좌우하게 만들면서, 나를 몽땅 내거는 사랑을 하는지? 사랑하는 사람 자신도 모릅니다. 그것은 사랑이 나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월호(통권 442호)]

 

 


 

 

[아가, 노래들의 노래]

(14) 오, 사랑!(아가 7,7)

안소근 실비아 수녀

 

 

어떤 분이 지혜문학 과제로 아가에 대해 세 페이지를 쓰셨는데 거기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경 공부를 가르치시던 수녀님이 아가를 읽을 차례가 되자 아가는 너무 관능적인 책이어서 수녀로서 차마 못 다루겠다고 하시고 그냥 지나가셨답니다.” 무슨 뜻이었을까요? 이 수녀님은 아가의 뜻을 어느 정도 알아들으셨는데, 그걸 가르치시지는 못하겠다는 뜻이었을까요? 아니면 혹시, 아가를 너무 조금만 알아들으신 것은 아닐까요? 아가의 자구적 의미는 알아들었으되, 그 의미 안에 들어 있는 신학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처음 아가 입문을 소개할 때 두 달에 걸쳐 짚어 본 바와 같이, 사실 아가는 일차적으로 남녀의 성적 사랑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노래가 성경에 들어와 있는 것은 그 안에 신학이, 매우 성서적인 신학이 들어 있음을 전제합니다. 아가의 마지막 두 장에서는 그 두 면이 뚜렷이 드러날 것입니다. 아가 7장은 아가의 다른 부분보다도 더 관능적이고, 아가 8장은 가장 신학적인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7장을 읽고 나면 반드시 다음 달에 8장도 읽으셔야 합니다. 제가 7장에 대해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8장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술람밋이여”(7,1)

 

일단 7,1은 화자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고 단락 구분도 좀 모호하고 번역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래도 7,2-11에 묘사된 여인의 춤을 도입하는 것이라는 정도는 말할 수 있겠습니다. “두 줄 윤무”라고 번역된 구절은 사실 번역이 어렵고 어떤 춤을 말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춤은 춤입니다. ‘술람밋’이라고 일컬어지는 여인은 춤을 추고, 사람들은 그 여인을 바라봅니다.

 

‘술람밋’이 무슨 뜻인지도 말하기 어렵습니다. ‘솔로몬’의 여성형이라고 보기도 하고, ‘수넴 여자’라는 뜻으로 여기기도 하고, ‘예루살렘 사람’을 뜻한다는 주장도 있고, 히브리어 ‘샬롬’ 즉 ‘평화’와 같은 어근에서 나와서 ‘평화를 찾은 여인’을 뜻한다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8,10 참조). 그 중에서 무엇이 정답이라고 말씀드리면 제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됩니다. 아직까지 그 의미가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해야 솔직한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것을 다 밝혀 알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7장 1절, 한 절 안에도 도대체 몇 가지의 문제가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도 이 정도로 희미하게 남겨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술람밋은 아가의 주인공인 여인입니다. 솔로몬의 왕비로서 예루살렘으로 인도되는 공주로 묘사되든, 목자들의 천막에서 연인을 찾는 시골 아가씨로 묘사되든, 늘 같은 인물인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7,1에서 이 여인에게 청하는 것은 “우리가 그대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7,2-10에서 그 여인이 춤추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오, 사랑, 환희의 여인이여!”(7,7)

 

아가에서 가장 관능적인 부분이라고 했지요. 나체 묘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 그렇지 않더라도 여인의 허벅지, 배, 배꼽, 젖가슴은 형체를 직접 알아볼 수 있도록 드러나 있습니다. 바라보는 이가 그 곡선을 그대로 묘사할 수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리고 4,1-7과 6,4-7에서 여인의 모습을 표현할 때에는 주로 얼굴 묘사에 집중했기 때문에 여인의 곡선 전체를 제시하지 않았는데, 7장에서는 발끝에서 시작해서 머리끝까지 묘사합니다. 몸 전체를 그려 보이는 것입니다. 게다가 춤을 추고 있습니다. 몸 전체가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배와 허리를 보여 주면서 말입니다. 이제부터 할 설명을 들으면서 무슨 저런 소리를 하느냐고 하실까 봐 미리 저의 결론을 말씀드리면, 여기에서 묘사하는 것은 여인의 몸이 그 기본 구조부터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 덩어리’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전에 언젠가 한번 썼던 표현이지요.

 

귀족 집 따님의 어여쁜 발(7,2) - 묘사의 첫 마디에서 “오, 귀족 집 따님이여”라고 못을 박아 두는 것은, 춤을 추는 여인을 그야말로 관능적으로 묘사한다 해도 이 여인이 천박한 여인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기 위해서입니다. 이제부터 묘사할 것은 고귀한 사랑의 주체이며 대상인 여인이 지니는 티 없이 아름다운 본성이지, 값싸게 몸을 팔려고 내놓은 여인의 광고가 아닙니다.

 

예술가의 작품인 둥근 허벅지(7,2) - 묘사가 발부터 올라가고 있으니까 우리도 그 방향으로 말한다면, 다리 윗부분에서 허리까지의 곡선을 말합니다. 대중 라틴 말 성경은 (즉 성 예로니모는) 허벅지라고 번역하지 않고 아예 여성의 음부라고 번역했습니다. 일단은 부정확한 번역입니다. 히브리어 단어가 복수형(정확히는 쌍수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허벅지의 곡선이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여성이 성적 사랑을 통해 자신을 내어 줄 수 있는 가능성은 명백히 제시됩니다. 보석 세공을 하는 예술가가 깎아 만든 목걸이처럼 완벽한 곡선입니다. 더구나 그 곡선을 보여 주며 춤추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성성이 남김없이 표출되고 있습니다.

 

향긋한 술이 담긴 배꼽(7,3) - 허리 아래의 곡선을 이야기한 다음 이제는 그 중심으로 옵니다. 배꼽은 탯줄과 연결되고 자궁과 연결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배꼽 역시 손톱만한 실제 배꼽에만 국한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더구나 술이 담긴 동그란 잔은 사랑으로 연인을 취하게 만들 수 있는 여인의 몸을 말합니다. 실상 아가에서 포도주는 사랑의 상징입니다. 1,2에서 이미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달콤하다고 말했고(1,4; 4,10 참조), 2,4에서 연인은 연회장으로,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술의 방으로 여인을 데려갑니다. 결정적으로 5,1에서 연인은 “나의 누이 나의 신부”의 사랑을 향유하는 것을 “내 포도주를 마신다”고 표현하고, 친구들은 그에게 “마셔라, 사랑에 취하여라”고 화답합니다. 다시 말하면, 배꼽에 담긴 향긋한 술은 여인이 그 몸에 담고 있는 사랑의 능력, 사랑의 가능성입니다. 여인의 배꼽에서 “향긋한 술이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 사랑이 언제나 끊임없이 샘솟으리라는 것을 뜻합니다.

 

밀 더미 같은 배(7,3) - 밀 더미를 눈앞에 떠올리다 보면 갑자기 아가가 싱거워질 것입니다. 시각적 상상을 덮으십시오. 중요한 것은 밀이 생명의 양식이고 그래서 생명, 풍요, 다산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배가 밀 더미 같다는 것은 출산 능력을 의미합니다.

 

사슴 같은 젖가슴(7,4) - 8절에서는 젖가슴이 야자 송이 같다는 표현도 사용됩니다. 배와 마찬가지로 젖가슴도 물론 풍요, 다산, 출산과 연결됩니다. 그 젖가슴이 젊은 사슴처럼 가볍게 움직입니다.

 

“나는 … 포도주”(7,10)

 

물론 사랑은 아름다우면서도 두려운 것이라, 7장의 와스프(아랍 문학의 한 유형으로 보통 혼인 예식을 배경으로 사랑하는 여인의 신체를 묘사한다; 2012년 12월호 참조)에도 그 여인의 아름다움과 매력뿐 아니라 강한 자기의식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 주제는 8장 끝부분에서 다루겠습니다. 7장에서 더 크게 부각되는 것은 여인의 매력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과반수는 여성이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자신의 몸을 바라보십시오. 외모가 어떻든 여성의 몸은 아름답습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에 색깔 하나하나를 심사숙고하여 선택하듯이, 조각가가 자칫 흠집이 생길세라 조심스럽게 세부를 완성하듯이, 그 몸의 선 하나하나는 모두 사랑을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상대방에게 사랑을 향유하도록 자신을 내어 주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사랑을 통해 자신을 실현하고 완성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아가의 주인공은 “나는 나의 연인에게 곧바로 흘러가는, 잠자는 이들의 입술로 흘러드는 포도주”(7,10)라고 말합니다. ‘나는 사랑’이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성성이라는 것, 그것은 모든 차원을 포괄하는 사랑의 가능성일 것입니다.

 

결혼을 앞둔 여성이 아가를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아가를 처음 읽었을 때 정결의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제가 봉헌한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정결은 사랑의 포기가 아니라 그 사랑의 가능성을 남김없이, 유보 없이 실현하도록 모든 이를 향하여 열어 놓는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2월호(통권 443호)]

 

 


 

 

[아가, 노래들의 노래]

(15) 꽃이 망울졌는지 우리 보아요(아가 7,13)

안소근 실비아 수녀

 

 

어느새 다시 봄이 오고 있습니다. 들로 나가 밖에서 밤을 지내자고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계절입니다.

 

지난달에 읽은 것은 아가 7,2-11, 여인에 대한 묘사와 그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연인이 자기 애인에게 “오, 사랑, 환희의 여인이여!”(7,7)라고 환성을 올렸을 때, ‘사랑’이라고 불렸던 그 여인은 자신이 ‘나의 연인에게 곧바로 흘러가는 포도주’이고 ‘내 연인의 것’이라고 화답했습니다. 술이 익어가듯 사랑도 익어갑니다. 제가 썼던 표현으로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 덩어리’인 여인에게서, 그 ‘가능성’이 실현될 때가 가까웠습니다. 이제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여인은 자신을 온전히 연인에게 부어 줄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7,12-14에서는 사랑을 나누기 위해 들로 나가자고 연인을 부르고, 8,1-4에서는 어머니의 집에서 사랑이 완성되기를 갈망합니다.

 

“우리 함께 들로 나가요”(7,12)

 

“오셔요, 나의 연인이여 우리 함께 들로 나가요”(7,12)라고 말하는 이는 여인입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망설였는지요!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2,14)라고 간절히 불러도 바위틈에 몸을 숨기려고만 하던 때와 얼마나 달라졌는지요! 다시 한 번 상기할 점은, 그러한 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 연인의 ‘경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인은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얼마나 고귀하고 소중한지 알았을 때에 그 귀한 자신을 누군가에게 주려고 합니다.

 

여인은 들로 나가자고, 시골에서 밤을 지내자고 초대합니다(7,12 참조). 1,17에서 “우리 집 들보는 향백나무”라고 말했을 때나 2장에서 장마가 걷혔으니 밖으로 나오라고 부르던 때와 마찬가지로, 들과 시골은 인간의 간섭이 없는 자연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도시에는 야경꾼이 있었고(3,3; 5,7 참조) 오빠들도 여인을 가로막았습니다. 사랑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사랑이 자연에 속한 것이라면, ‘들’은 그 사랑을 맘껏 펼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더 살필 것이 있습니다. “포도나무 꽃이 피었는지 꽃망울이 열렸는지 석류나무 꽃이 망울졌는지 우리 보아요”(7,13). 여기서 다시 절묘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포도나무 꽃이 핀다는 말에 두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1장에서는 오빠들이 포도밭을 지키라고 시키고, 여동생은 “내 포도밭은 지키지도 못하였”(1,6)다고 말합니다. 그때의 포도밭은 처음에는 자연적 의미의 포도밭을 뜻했지만, 나중에는 여인의 몸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7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인은 지금 들판으로 나가자고 말하면서 포도나무 꽃을 이야기하지만, 그 꽃은 포도밭에 피는 꽃이면서 여인의 몸에 피는 꽃입니다. 사랑이 자연의 일부라면, 자연에 봄이 돌아오는 것은 여인에게도 사랑의 때가 오는 것과 겹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포도나무 꽃이 피고 꽃망울이 열린다는 것은 여인이 사랑을 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선 신체적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성으로서 성숙해지는 것을 의미하지요. 전통적으로 사랑을 나타내고 여성을 나타내는 비유인 포도나무와 함께, 석류도 같은 의미를 전달합니다. 광고 문구에서 ‘미인은 석류를 좋아한다’고 했던가요? 사실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석류가 여성을 상징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래서 8,2에 가서도 여인은 “당신에게 … 나의 석류주를 대접하련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나의 사랑을 당신에게 주겠다는 뜻이지요. “나는 … 포도주랍니다”(7,10)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포도나무 꽃이 핀다는 것이 신체의 성숙만을 가리킬까요? 몸만 자라면 사랑을 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이 인격의 성숙입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표현이 있습니다. “… 우리 보아요”(7,13)입니다. 겉으로 다른 사람이 혼자서 보고 판단할 수 있지 않기에 둘이 같이 보아야 합니다. 여인이 스스로 사랑의 때가 되었는지 보아야 합니다. 자신을 내주겠다고 스스로 원하게 될 때에만 여인은 몸과 마음을 연인에게 줍니다. 사랑을 위해 들판으로 나가자고 하는 여인은, 그 순간이 오기까지 자신 안에서 사랑을 성숙시켜 왔습니다. “햇것도 있고 묵은 것도 있어요”(7,14).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줘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두 내가 당신을 위하여 간직해온 것이랍니다”(7,14). 순결을 말합니다. 여인의 몸이 포도나무라면, 지금까지 그 나무 열매를 따 먹은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 온갖 과일을 여인은 때가 될 때까지 간직해 두었습니다. 썩혀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하여’ 간직한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단 한 사람에게 온전히 주기 위해서입니다. 전적인 증여를 위해 보존된 사랑입니다.

 

“거리에서 당신을 만날 때”(8,1)

 

8장으로 넘어가면 배경이 바뀝니다. 들판에서 계속 살 수 없는 것이지요. 두 사람은 사회 안에서, 특히 가족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도시에는 사람들의 이목이 있습니다. 관습이 있습니다. 하물며 현대도 아닌 고대 사회에서 연인들이 길거리에서 입을 맞출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 오라버니 같다면!”(8,1) 비현실적인 가정이지요. 남매같이 자연스럽게 사랑을 표현하기를 갈망합니다. 현실적으로 그렇게 드러내놓고 사랑을 보여 줄 수 없기에, 여인은 지금 이 말로써 자신의 속마음을 다 표현하고 말았습니다!

 

다음 구절은 어렵습니다. 일단 번역부터 쉽지 않습니다. “나를 가르치시는 내 어머니의 집으로”라고 되어 있는데, 본문에서는 나를 가르치는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기가 어렵습니다.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서는 ‘당신’도 될 수 있고 ‘내 어머니’도 될 수 있습니다. 칠십인역은 아예 “나를 낳으신 어머니”로 되어 있고, 대중 라틴 말 성경은 “당신이 나를 가르칠 텐데”로 되어 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어머니일 경우와 연인일 경우, 각각 의미가 다릅니다. 먼저 그 장소가 “내 어머니의 집”(8,2)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는 남녀의 사랑이 들판에서 끝나지 않고 가족 안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어머니의 집은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고 낳은 집입니다. 아가에는 누구의 아버지도 등장하지 않기에, 가족의 역사는 사랑하고 잉태하고 출산했던 어머니들을 통해 이어지는 것으로 묘사됩니다(“당신 어머니가 당신을 잉태하셨답니다”: 8,5). ‘어머니의 집’이 이러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나를 가르치시는 내 어머니”는 사랑을 가르치는 어머니를 뜻합니다. 사랑의 역사를 이어 가도록 어머니가 딸에게 가르치고, 자연에 속하는 사랑이 가족이라는 사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한편 ‘가르치다’의 주어가 연인이라고 하면, “[나는] 내 어머니의 집으로 당신을 이끌어 데려가고 당신은 나를 가르치련만”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사랑을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여인은 그것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이 … 오라버니 같다면!”(8,1)이라는 전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래 같은 가족이 아니었던 남녀가 남매와 같이 가족 안에서 받아들여질 때 그들의 사랑은 완성되고, 여인은 “나의 석류주를”(8,2) 연인에게 줄 수 있게 됩니다.

 

“나의 석류주”(8,2). 석류주를 주는 것일까요, 나를 주는 것일까요, 사랑을 주는 것일까요? 저는 제 머리로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모호한 표현이 싫었습니다. 그런데 작게나마 경험해 보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뭔가를 줄 때, 사물인 석류주를 주고 있다 해도 실제로 주는 것은 ‘나’이고 ‘사랑’입니다. 그 석류주의 가치가 석류 몇 개의 값어치는 아닙니다. 석류주를 한 잔 가득 부어 연인에게 주는 여인은 이미 자신을 그에게 주고 있습니다.

 

“사랑을 방해하지도 깨우지도 말아 주오”(8,4). 자연스럽게, 가장 자연스럽게. 사랑은 계절이 바뀌듯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자라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3월호(통권 444호)]

  

 


 

 

[아가, 노래들의 노래]

(16)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아가 8,6)

안소근 실비아 수녀

 

 

걱정입니다. 아가 8,6-7만 해도 이번 달 분량이 넘칠 것 같습니다. 그 두 절만 얘기하려 해도 빠른 템포로 글을 써야겠습니다. 거두절미. 사랑과 죽음의 싸움입니다.

 

“인장처럼 나를 당신의 가슴에”(8,6)

 

선물을 받으면 대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쓰도록 내놓게 되고,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절대 그럴 수 없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신학생들이 제 도장을 새겨 준 것입니다.

 

도장은 오직 한 사람의 것입니다. 그 사람 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고 쓸모도 없습니다. 에스 3,10에는 크세르크세스 임금이 인장 반지를 손에서 빼어 하만에게 주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것은 임금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리는 문서를 만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만은 임금의 인장을 받아 임금 대신 법적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어떤 문서에 제 도장을 찍으면 보는 사람은 분명 제가 확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장은 그 사람을 대변합니다. 제가 죽고 나면 제 도장은 쓰레기가 됩니다.

 

그만큼 도장은 그 주인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인장처럼 나를”(8,6)이라는 표현으로 ‘나’는 연인의 인장이 됩니다. 연인과 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나에게 그의 이름이, 곧 그가 새겨지게 됩니다. 그리고 연인은 나를 절대로 떼어 놓을 수 없게 됩니다. 고대에 인장은 목에 걸거나 손목 또는 손가락에 끼웠다고 하는데, 그래서 아가에서도 가슴에, 팔에 나를 꼭 매어 두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죽음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나와 결합된 그 사랑이 죽음에서 연인을 지켜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8,6)이라고 말할 때, 아가는 아직 사랑과 죽음 가운데 어느 편이 더 강한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죽음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죽음은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저승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이나 정열도(‘질투’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으려고, 정열을 품지 않으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죽음 같은 사랑에 휩싸이게 될 때 나를 지켜줄 뭔가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장’이라고 일컬어진 애인입니다. 결국, 참 모순되지요. 사랑이 나를 위협할 때 나를 지켜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두 사람의 사랑으로 사랑에 따르는 위험을 이겨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길”(8,6)

 

아가 번역에서 대단히 문제가 되는 단어가 8,6에 들어 있습니다. 아가에는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이 여럿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여러 가능성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하든 책 전체의 이해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전체의 해석을 좌우합니다.

 

“그 열기는 불의 열기” 다음에, 우리말 번역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한 불길이랍니다”라고 번역된 구절이 히브리어에서는 한 토막입니다. ‘불길’이라는 단어 뒤에 ‘야’가 붙어 있습니다. 칠십인역에는 “그의 불꽃들”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마소라 본문을 그대로 번역해 본다면, 여기서 사용된 ‘야’는 ‘할렐루야’의 ‘야’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야의 불길’이 되지요. 우리말 《성경》의 번역은 여기에서부터 설명할 수 있습니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하느님의 불’ 또는 ‘주님의 불’이 강한 불을 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1열왕 18,38 등 참조).

 

이 표현을 ‘야의 불길’이나 ‘주님의 불길’로 번역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격렬한 불길’이라고 번역하는 이유는, 아가의 나머지 부분 전체에서 하느님이 언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특이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까요? 여기서 사랑을 ‘야의 불길’이라고 선언하면, 이 구절은 아가 전체를 설명해 주는 구절이 됩니다.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사랑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것, 그러나 저항할 수 없는 것, 강제로 명령할 수도 없고 억지로 금지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봄이 오고 꽃이 피고 철새들이 돌아오는 것과 같이, 사랑은 자연이었습니다. “우리 사랑을 방해하지도 깨우지도 말아 주오, 그 사랑이 원할 때까지”(2,7; 3,5; 8,4)라는 후렴구는 오히려 인간이 그 사랑의 시간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설령 “사랑은 야의 불꽃”이라는 번역을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더라도, 그 사랑이 하느님께 속한 것임을 인정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창세 1,27)하시고 보시니 좋다고 여기신 하느님,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창세 2,18)고 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적인 사랑의 근원에 계십니다. 그리고 아가는 바로 그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룩한 책입니다. 맨 처음에 아가의 해석사를 요약하면서, 자구적 의미를 받아들여 아가가 인간적인 사랑을 노래한 것이라고 할 때, 어떤 이들은 아가가 성경에 속하기에 부당한 책이라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가에서 노래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사랑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사랑이고, 그 사랑을 티 없이 아름답다고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창세 3장에서 비로소 도입되는 죄의 역사보다 더 강하고 근본적인, 창세 1-2장에 기술된 창조의 선성(善性)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큰 물도 사랑을 끌 수 없고”(8,7)

 

그래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죽음처럼 저항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죽음을 이깁니다. ‘물’은 생명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상징입니다. 물은 생명이 시작되는 원천이면서 많은 생명을 죽게 만들 수 있으며 어둠의 심연이기도 합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사랑은 기쁨과 생명으로 한 사람을 가득 채우지만, ‘나’를 ‘사랑하는 이’에게 완전히 내어 줄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나에게 죽음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일단 하느님에게서 오는 그 사랑이 내 안에 있게 되면 그 사랑의 힘은 나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합니다.

 

“나는 성벽”(8,10)

 

중요한 한 가지 주제가 아직 남았습니다. 여동생이 아직 어리다고 생각한 오빠들은 동생이 사랑에 빠지지 않도록 막으려 합니다. 동생에게 울타리를 치고 널빤지로 가로막으려고 합니다(8,9 참조). 그러나 동생은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나는 성벽, 내 가슴은 탑과 같아요”(8,10). 여기서 말하는 성벽과 탑은 방어 시설입니다. 아무에게나 쉽게 자신을 내주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한 자의식입니다.

 

그러나 공격해 오는 모든 이를 막아 내는 성벽이라 하더라도 사랑에 정복됩니다. “하지만 그이 앞에서는 화평을 청하는 여자랍니다”(8,10). “화평을 청하는 여자”라는 구절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평화를 찾는 여인’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정복하려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성벽과 같이 굳건했으나, 진정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자신을 사랑해 준 연인에게는 성문을 열어 줍니다(“내 위에 걸린 그 깃발은 ‘사랑’이랍니다”: 2,4).

 

“화평을 청하는 여자”, ‘평화를 찾는 여인’에 대해서는 마지막 달에 더 깊이 있게 살펴볼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더 짚어 둘 것은, 8,11-12에 나오는 솔로몬처럼 돈으로 사랑을 사려는 사람에게 여인은 정복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는 여인의 자존심이 너무 강합니다.

 

아가 본문에 대해서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두 달은 아가에 관해 제가 썼던 편지 두 편을 읽어 드리려고 합니다. 본문을 마치면서 마침표 하나를 찍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면 죽지 않게 될까요? 전혀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불사불멸이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죽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사랑이 죽음을 이긴다는 것은, 인간은 죽지 않으려고 하지만 사랑을 하면 죽을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4월호(통권 445호)]

 

 


 

 

[아가, 노래들의 노래]

(17) 아가, 나의 이야기 1

안소근 실비아 수녀

 

 

이달에 실을 글은 제가 2009년 2월에 썼던 편지입니다. 편지를 받는 사람은 아가에 대해서 600쪽 분량의 주석서를 쓰신, 제 논문을 지도하신 신부님입니다.

 

2009년 1월 31일에 저는 도망치듯 로마를 떠나 한국에 왔습니다. 거기에 더 있으면 죽을 것 같아서 돌아왔습니다. 돌아왔을 때에는 거의 죽어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2월 휴가 중에 저는 이탈리아어를 영어로 번역한 신부님의 주석서 교정을 보았습니다. 영어 교정이 아니라 주로 성경 장절 표기와 각주 표기를 확인하는 것이었지요. 그렇게 아가를 다시 읽고 나서, 거의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던 신부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이 편지는 한 줄 한 줄 천천히 읽으셔야 합니다. 이 편지 안에 제가 그때까지 살았던 삶 전체와, 그 삶이 전복되기 시작하는 과정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2009년의 아가 해석

 

여성으로서 아가를 읽는다는 것은, 이 책이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가는 매우 깊이 있는 책이기에 저로 하여금 사랑의 ‘역설’을, 저의 ‘역설’을 이해하게 합니다. 아가 주석서는 그것을 체계적 방식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이로써 저에게도 모순으로 보였던 제 마음의 신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아가를 세 번 읽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2004년. 이 책은 저에게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게 해 주었습니다. 성(性)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소홀히 해왔던 면이었습니다.

 

흔히 인간은(예를 들어 어린이) 사랑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의 절반일 뿐입니다. 인간, 특히 여성에게는 사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닫힌 정원”(4,12)은 “정원의 샘”(4,15)이기도 한 것입니다. 물은 흘러야 합니다. 살아 있기 위해, 생명을 주기 위해 말입니다. 아가는 저에게 그것들이 제 본성에 속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죽지 않기 위해 닫힌 채로 있던 저에게 큰 도전이었습니다. 누군가 저와 달리 생각하거나 다른 생활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저는 즉시 서로 이해하려는, 이해를 시키려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정말로 사랑은 아름다우면서도 두려운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너무 컸고, 그래서 저는 평온하게 머물기를 선호했습니다. 저는 계속 벽을 쌓아 갔고, 그 안에서 계속 살았습니다.

 

2006년에 저는 다시 아가를 읽었습니다. 수도회 연례 피정을 위해 아가를 택했는데, 그것은 바로 제가 아직도 닫혀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가는,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2,10.13)라고 말하며 저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내주는 것이 생명을 찾고 자신을 실현하는 길이기에, 자신을 닫는다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고 생명을 잃지 않기 위한 올바른 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올해(2009년) 저는 아가를 다시 한 번 읽으려고 했습니다. 아가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모험을 시작하도록 도와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전에 말씀드린 대로,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기대하지 않은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위해서는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 자신을 열도록 강요할 수도 없고 닫도록 강요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주로 그 두 번째 면, 제가 쌓은 벽 안에 갇혀서 결국 죽고 만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첫 번째 면이 저에게 더 중요했습니다. 때를 기다리지 않고서는 아무도 사랑에 법칙을 부과할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도, 저 자신도 말입니다. 마음의 것들은 자연스럽게 사랑이 원할 때 이루어져야 합니다(2,7 등 참조). 이렇게 저는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강제로 자신을 닫는 것이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라면, 강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의 폭력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을 하지 못한다면, 한편으로는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는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랑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저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때가 되어야, 포도나무에 꽃이 피어야(2,15 참조)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가를 읽으면서 저는 성탄을, 무방비한 아기를, 그 취약함을 생각합니다. 그 약함은 온갖 위험에 내맡겨져 있으면서도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는 진정한 사랑의 표지입니다.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하여 죽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반면 누군가(저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도 위험한 모험을 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해 근본적으로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의 두려움입니다.

 

실상 아가의 여인은 자신에 대한 강한 의식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스스럼없이 내줄 수 있습니다. 먼저 자신에게,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4,1)라고 말하는 데 이르러야 하고, 자신을 내주는 가치를 인식해야 합니다. 그럴 때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게 됩니다. 신체의 성숙뿐 아니라, 다른 무엇보다 이러한 확신, 성숙한 인격이 사랑을 위한 조건일 것입니다(‘거리’의 모티브, 8,14). 성탄과 비교해 본다면, 그 아기는 약했지만 육화는 지극히 분명한 의식을 요구하는 결정이었습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갈라 4,4).

 

아직 더 생각해야 할 주제 하나는, “내 위에 걸린 그 깃발은 ‘사랑’”(2,4), “나와 함께 레바논에서”(4,8), “자기 연인에게 몸을 기댄 채”(8,5)입니다. 이것이 해답일 것입니다.

 

아직 묵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저는 추상적 개념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고 체험을 바탕으로 쓴 것입니다. 아가를 세 번 읽고 나서, 저는 이 책과 마찬가지로 역설적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충만한 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내주는 것, 이것이 저의 본성에 폭력을 가하지 않는, 제가 가야 할 길일 것입니다. 무방비 상태이면서도 마음을 정복할 줄 아시는 저의 연인이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언젠가는 “나는 그의 눈에서 평화를 발견한 여인이 되었지요”(8,10 참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편지의 답장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습니다. 물론 평소에 속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던 제가, 떠나서는 이런 편지를 써 보냈으니 너무 놀라셨겠지요. 신부님은 “내가 너를 아직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제 글이 아니라서 허락 없이 여기에 실으면 안 될 것 같아 한 구절만 인용합니다. 아가에 대해 많이 연구하셨던 신부님은 “고통스러우면서도 솔직하게 쓴 이 두 페이지”가 “아가에 대한 가장 진실한 해석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며, 제 편지를 보존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음 달에는 이 편지를 쓰고 1년 4개월 후인 2010년 6월에, 제 삶의 전복이 한창 이루어지던 때에 다시 썼던 편지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5월호(통권 446호)]

 

 


 

 

[아가, 노래들의 노래]

(마지막 회) 아가, 나의 이야기 2

안소근 실비아 수녀

 

 

지난번 편지의 수신인인 신부님께서, 성경의 여인들을 주제로 여러 저자의 책을 엮던 중에 아가의 주인공에 대해 ‘술람밋, 평화를 발견한 여인’이라는 글을 쓰시게 되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저에게 어떤 의미에서 아가가 저의 책이라고 생각하는지 다시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아래의 편지는 그 답장으로 제가 2010년 6월에 쓴 것입니다. 이번에도 아주 천천히 읽으시기를 부탁합니다.

 

작년에 저는 두려움에 대해, 자신에 대한 의식과 자신을 주는 것에 대해 썼습니다. 오늘 편지는 그 앞부분을 조금 반복하고, 전에 아직 쓸 수 없었던 것, 작년과 금년의 체험에 대해 계속 쓸 것입니다. 모든 것은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 나의 애인이여”(4,1: 저의 번역은 “내 친구야, 너 정말 예쁘구나!”)라는 한 구절을 중심으로 할 것입니다.

 

술람밋: 아가의 ‘평화를 발견한 여인’

 

한 여인이 겪은 사랑의 여정을 묘사하는 아가는, 제 내면을 해부해 놓은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사랑의 부름에 저항합니다. 그것이 밖에서 오는 것 같고, 많은 요구를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왜 이런 모험을 해야 하는지? 집 안에 머무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저항할 수 있을지? 정말로 사랑의 부름이 밖에서 오는 것이라면 저항할 수도 있겠지요. 귀를 막고 평온하게 살 수도 있겠지요(‘평화를 발견한’ 여인?).

 

그러나 사실 그 부름은 안에서 옵니다(1,8: “그대의 양 떼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그대의 새끼 염소들이 풀을 뜯게 하오”). 저의 경우, 저는 이 진리를 매우 늦게 알았습니다. 바로 아가를 읽으면서 알게 된 것입니다. 작년에 쓴 것처럼, 저는 저를 닫곤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평화롭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나를 열어 놓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제 ‘본성을 거슬러’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가를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제 안에서 사랑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일 뿐이었습니다. 저는 뭔가 가로막혀 있다고 느꼈지만, 그 동기가 무엇인지 말하기 어려웠습니다. 두려움이었을까요? 아니면 다른 어떤 정당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작년 2월에 다시 한 번 아가를 읽으면서, 저는 제 두려움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아직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에 대한 인식의 문제…. 저는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혼자 그 모험을 시작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제가 느끼는 것을 말할 뿐이고, 모든 여성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혼자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저에게 “정말 아름답다”고 말하기가 어려웠습니다(4,1 참조).

 

그런 상황에서 외부의 장애는 매우 효과적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랬습니다. 아가 8,8에 나온 오빠들의 말은, 사회와 가족이 주는 장애를 대변합니다. “우리에게는 누이가 하나 있네, 조그만 누이. 아직 젖가슴도 없다네.” 성벽이나 “향백나무 널빤지”(8,9)보다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고 권위를 가진 (또는 가졌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 누이가 “아름답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 그것은 사랑으로 나아가는 데 치명적인 걸림돌이 됩니다. 자신을 신뢰하기가 어려워지고, 자신을 내어 줄 마음이 사라집니다(너는 아무것도 줄 수 없다고, 또는 네가 줄 수 있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아가 8장에서는 남녀의 사랑을 말하기 때문에 젖가슴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같은 내용을 수많은 방식으로 다르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겨울, 겨울…. 이것으로 사랑이 완전히 죽는다면 아마 더 간단하겠지요. 그렇지만 그 부름은 안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침묵시킬 수가 없습니다. 가로막힌 사랑은 상처 입은 사랑이지만 죽은 사랑이 아니고, 그래서 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결과: ‘평화를 발견하지 못한’ 여인).

 

어떻게 평화에 이를 수 있을까요? 작년에 저는 편지 마지막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 위에 걸린 그 깃발은 ‘사랑’”(2,4), “나와 함께 레바논에서”(4,8), “자기 연인에게 몸을 기댄 채”(8,5)입니다. 이것이 해답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작년과 금년의 경험을 통해 이제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 사랑과 지지는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 나의 애인이여”(4,1)라는 말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가치의 인정. 아마도 저는 너무 약한 것 같습니다. 제가 자신에게 그 말을 해야 하는데, 저는 혼자서는 거기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연인’이 있어야 했습니다. 연인이 저에게 그 말을 하며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2,14)라고 말해 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아가에서 ‘경탄’이 지니는 역할입니다. 아가에서 연인이 서로 아름다움을 알아볼 때, 그것은 자신을 주는 것을, 결합을 가능하게 합니다. 특히 제가 의심을 품었을 때, 그것이 바로 저를 정복하는 ‘연인의 깃발’이었고, 근본적으로는 그것이 창세 1장에서 주님께서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저는, 다른 많은 이도 저와 같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금년에 저는 여러 번, 저와 공동체의 자매들에게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 나의 애인이여”라고 말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좋지만, 언제나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의 경우는 그랬지만, 어떤 사람에게 아무도 그 말을 해 주지 않는다면…. 언제나 효과가 있는 것은 창세 1장입니다.

 

어느 날 저는 저희 집의 커튼 하나를 빨았습니다. 저는 그 커튼이 새것이었을 때, 14년 전에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흰 커튼이었습니다. 많은 햇수가 지나고 나서, 커튼은 회색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집에 온 지 얼마되지 않은 수녀들은 그 커튼의 본래 색깔을 몰랐습니다. 저는 그 커튼을 두 번 빨아 다리미질을 했습니다. 그때 한 수녀가, 그것이 어디 커튼인지 물었습니다. 성당 앞 창고 커튼이라고 하자, “회색인 줄 알았어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창조의 선성(善性)’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 커튼에게는 제가 그 본래의 색깔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러지 않고 그 흰색을 되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좋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그것을 잊어버립니다. 이미 더러워진 커튼만, 부정적 면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부차적인 것입니다.

 

‘평화를 발견한 여인.’ 8장에서 ‘평화를 찾은’ 여인은 정복된 여인입니다. “나는 성벽, 내 가슴은 탑과 같아요. 하지만 그의 눈앞에서 저는 평화를 찾은 여인이 되었지요”(8,10 참조). 성벽은 오빠들이(또는 다른 이들이) 그 여인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고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그 여인이 아름답다고 할 때, 다른 이들이 그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여인 스스로 자신을 방어해야 합니다. 그러나 연인이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인정한다면, 무기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편지를 쓰면서 3,7-8의 ‘이스라엘 용사들’에 대해 몇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용사들이 그 여인을 보호하는 것은, 그 여인이 그들에게 소중하기 때문이고, 그 가치를 알기 때문이지요. 그를 존중할 줄 모르는 다른 이들에게 그 아름다움을 줄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술람밋이 ‘평화를 찾은’ 여인이 되는 것은 그에게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 나의 애인이여”라고 말하는 연인에게 정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능력이 실현되는 것은, 이렇게 자신을 주는 것이 (자신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고 (다른 이들에게) 폭력적으로 요구된 것이 아닐 때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저에게, 보시니 “참 좋다”고 말씀하시는 한 분이 계십니다(창세 1,31 참조).

 

[성서와 함께, 2013년 6월호(통권 44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