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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성경과 영성 - 전영준 바오로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8. 6. 13.
성경과 영성 (1) 종교 생활에도 등급이 있다고요?

성경과 영성

(1) 종교 생활에도 등급이 있다고요?

전영준 바오로 신부

 

 

“교형자매 여러분! 영성 생활, 신심 생활, 신앙생활 중 어느 것이 가장 고차원일까요?” 가끔 이곳저곳 성당에 가서 특강을 할 기회가 있을 때, 신자들에게 묻는 질문이다. 대부분 그중에 영성 생활이 가장 고차원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정답은 ‘똑같다’이다. 신자들은 다양한 형태로 표현된 종교 생활에 왜 등급이 있다고 생각할까?

 

신앙생활은 신심 활동보다 내공이 적은 종교 생활 같다(?)

 

성당에 다니는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성당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행위를 총칭하여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생활에는 주일 미사만 겨우 참석하는 모습도 있고, 매일미사뿐 아니라 각종 전례 행사에 부지런히 참석하는 모습도 있다. 또 자신과 가족만을 생각하며 성당에 다니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여 성당에서 희생하며 봉사하기도 한다. 성당에서 일어나는 이런 형태는 주로 외적 모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내면의 깊은 모습이 없다고 속단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많은 신자는 신앙생활을 왠지 내공이 적은 차원의 종교 생활이라고 단정하는 것 같다.

 

한편 신자들이 성당에서 표면적 종교 생활을 하다 보면 더는 외적 모습에만 머물지 않고 더욱 내면을 성찰할 수 있는 기도의 실천을 접하게 된다. 그들은 성당에 다양한 형태의 기도를 바치는 단체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다양한 방법으로 기도를 실천하는 단체를 총칭하여 보통 ‘신심 단체’라고 일컫는다. 신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기도를 실천하면서 자기 내면을 성찰하는 행위를 신심 생활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많은 신자는 신앙생활보다 신심 생활이 더 높은 등급의 내적 생활이라고 여기게 된다.

 

21세기 들어 여기저기에서 사용하기에 이른 ‘영성 생활’이라는 말

 

이렇게 신앙생활과 신심 생활이란 용어를 사용하던 한국 가톨릭교회에 언제부터인가 영성 생활이라는 용어가 출현하였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교회에서 가끔씩 언급되던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라는 단어를 21세기에 들어서는 교회뿐 아니라 일반 사회의 이곳저곳에서, 이 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영성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지 않거나 추상적인 것과 관련지어 생각하였다. 교회의 신자들은 초자연적 질서나 하느님과 관련된 비상한 행위를 일컬어 영성 생활이라고 여기고, 영성 생활을 신앙생활이나 신심 생활보다 더 고차원급으로 생각하는 편견을 갖게 되었다.

 

사실 교회에서는 ‘수덕 생활’과 ‘신비 생활’이라는 단어를 학문 용어로 오랫동안 사용하였다. 2천 년의 교회 전통에서 영성가들은 인간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하고자 하는 열망을 신비 생활이라는 여정으로 묘사하였다. 수도자들은 일정한 형태의 극기와 덕행 실천의 수련 과정을 수덕 생활로 묘사하였다. 어떤 면에서는 수덕 생활과 신비 생활이 신자들의 영적 여정을 설명하는 데 훨씬 명확했다. 그러나 이 용어들은 역사상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고, 이단의 징후를 드러내 보이기도 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 교회에서는 이 용어들을 영성 생활이라는 한 단어로 통합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또 다른 모호함을 만들었고, 신자들에게 영성이라는 개념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다.

 

가톨릭 영성 생활에도 여러 종교의 수행 방법이 스며들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주변의 다양한 분위기에 따라 영성 생활의 정체성을 혼동한다고 볼 수 있다. 몇 해 전에 한국 가톨릭 신자들이 성당을 찾는 이유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중에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성당에 다닌다는 응답이 90%에 달하였다. 게다가 요즈음 한국 사회도 심리적 안정을 추구하면서 심리 상담 등을 적극적으로 받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인간 내면의 정신세계를 다루는 심리학의 연구 결과가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을 주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내적 생활을 포함하는 영성 생활에 대해서도 심리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심리학의 한 분야로 축소하여 인식하게 되었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심리적 안정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에, 심리주의가 마치 영성 생활을 대변한다는 잘못된 인식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국에는 많은 종교와 종파가 존재한다. 몇 해 전 한국을 방문했던 여러 나라의 종교 지도자들이 한국을 극찬한 적이 있었다. 한국에 몇백 개의 종교와 종파가 있는데도 큰 불상사 없이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이 그 이유였다. 하기야 외국은 같은 종교라 하더라도 종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무기를 겨누며 유혈 사태까지 일으키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그에 비해 한국에서는 많은 종교가 대승적 차원에서 교류하려는 분위기가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좋은 분위기가 연출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한국에는 종교가 단 하나밖에 없는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즉 어떤 종교든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예외 없이 무속 신앙의 영향을 깊이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종교가 혼합주의 모습을 갖게 된다. 가톨릭 영성 생활에도 여러 종교의 수행 방법이 스며들게 되었다. 가톨릭 신자들도 혼합주의 관점에서 다른 종교의 내적 생활을 가톨릭의 영성 생활과 혼동하여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거나 묵인하는 가운데 그것들이 포함된 잘못된 영성 생활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영성 생활에는 다양한 특성의 영적 여정이 있다(?)

 

가톨릭교회 밖에서 영향을 준 잘못된 영성 생활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잘못된 부분이 무엇인지 식별하기가 쉬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부에서 잘못 생각하여 나타난 영성 생활이 더 큰 문제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기도 어려워서 잘못된 부분을 식별하여 교정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요즈음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경계해야 할 관점은 지나치게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주제에 따른 영성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 소식지를 살펴보면 소위 ‘OO영성’ 강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이러한 영성 강좌는 교회의 전통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거나 때로는 교회에서 자주 통용되는 주제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신자들은 이 강좌에서 제시하는 영성 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다가간다.

 

그러나 이렇게 전문주의의 모습을 띤 영성 생활은 각각 구별되는 다양한 특성의 영적 여정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다는 말입니까?”(1코린 1,13)라고 하면서 코린토 신자들을 책망한 적이 있다. 사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한 분이시고 우리가 전해야 하는 복음도 하나이듯,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실천해야 할 영성 생활도 하나이다. 우리가 자칫 긴장을 늦춘다면 여러 가지 영성 생활이 있는 것처럼 오해받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영성 생활이란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ㄴ; 참조 레위 11,44ㄱ.45ㄴ; 20,26ㄱ). 구약성경의 레위기는 이집트를 탈출하여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후 하느님의 명을 따라 만남의 천막을 만든 모세가, 바로 그 성소(聖所)에서 하느님께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규칙과 법규들을 듣는 이야기로 꾸며진다. 레위기가 들려주는 중요한 주네는 성성(聖性)에 대한 부르심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거룩함으로 부르신다. 비록 지금 우리가 미천한 상태에 놓여 있지만, 우리는 거룩함 자체이신 하느님께 나아가야 할 소명을 받들어 실천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하게 되기를 이미 구약성경 시대부터 바라셨을 뿐 아니라, 신약성경 시대에도 당신의 아드님 예수님을 통하여 계속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다시 한 번 우리에게 하느님을 닮으라고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인의 영성 생활은 하느님을 닮고 하느님을 만나 뵙기 위해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여정은 인간 영혼이 내적으로 발전 단계를 거쳐 마침내 주님의 은총을 통하여 초자연적 질서에 다다라 하느님과 합일의 체험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의 유일하고 진정한 영성 생활은 신 · 망 · 애의 복음 삼덕과 그 밖의 다른 덕행을 실천하면서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도달하는 진보의 삶이다.

 

필자는 신자들이 올바른 가톨릭 영성 생활을 실천할 수 있도록 몇 번에 걸쳐 글을 실으려 한다. 성경 말씀으로 어떻게 기도 생활을 할 수 있는지 2천 년 영성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와 함께하는 이 여정을 통하여 독자 여러분도 성경 말씀과 함께 영적 성장을 체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성서와 함께, 2012년 1월호(통권 430호)]

 

 


 

 

성경과 영성

(2) 성경에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요?

전영준 바오로 신부

 

 

천주교 신자들이 개신교 신자들 앞에만 서면 마냥 위축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성경 지식일 것이다. 흔히 개신교 신자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폄하할 때, 주로 천주교 신자들의 짧은 성경 식견을 이야기하곤 한다. 심지어 개신교 일부 교단에서는 성경 지식이 짧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집중적으로 선교하여 개종시킨다는 이야기까지 들릴 정도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을 대하는 천주교 신자들의 자세이다. 많은 천주교 신자가 성경에 대한 식견이 짧다고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성경의 장절을 줄줄 외우지는 못할지라도 성경을 열심히 읽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성경을 열심히 읽지 않고서도 많이 안다고 하지 않고, 솔직하게 모른다고 인정한다는 점이다. 부족함을 인정하면 언젠가 개선할 여지와 가능성이 있다.

 

성경에 대해 조금만 열의를 가진다면

 

천주교 서울대교구 시노드 준비위원회가 지난 2011년 5-6월에 교구 내 모든 신자를 대상으로 의견을 수렴하여 정리한 <전 신자 대상 의견 수렴 결과 보고서>를 보면, 성경에 대한 흥미 있는 정보를 발견할 수 있다.

 

시노드 준비위원회는 20세 이상 일반 신자들이 제안한 의견을 정리하여 233개의 소분류 영역을 설정하였다. 그중 한 가지가 ‘단계별 심화 교육 등을 통하여 성경 교육을 좀 더 활성화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많은 신자가 성경 교육에 관심을 가져 성경 교육에 대한 제안이 전체 233개의 소분류 영역 중에 상위 5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아마도 1980-90년대 한국 천주교회에서 성경 공부의 열기가 유행처럼 번졌던 분위기를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천주교 신자들이 성경에 대한 부족한 식견을 인식하고 공부의 필요성을 스스로 충분히 느끼고 있는 것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목구 성서사목부가 2008-2009년에 교구 내 본당에서 시행한 성경 공부 현황을 조사하여 정리한 <서울대교구 성서사목의 현황과 과제>를 보면, 현재 한국 천주교회 내에는 성경 공부 사도직 프로그램이 11개 정도가 있다.

 

각 본당에서는 이러한 프로그램을 선택하여 실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성경 읽기, 성경 필사, 성경 특강도 함께 하고 있다. 일반 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스스로 조금만 신경 쓰고 열의를 가진다면, 어렵지 않게 성경 공부 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많은 신자가 성경 공부에 참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부 신자들은 평신도 성서사도직 봉사자로 활동하면서 다른 신자들의 성경 공부를 도와주고 있다.

 

 예전에 비해 성경에 대한 자신감과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성경에 관해 행복한 신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1784년 이승훈이 처음 세례를 받은 이후 1801년 신유박해가 있기 전에 교우들은 이미 한글판 《성경직해광익》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 책은 주일과 축일 미사에서 읽는 성경 말씀과 약간의 설명을 첨가한 한문판 《성경직해(聖經直解)》와 《성경광익(聖經廣益)》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우리 신앙 선조는 천주교 전래 초기부터 일부이기는 하지만 성경 말씀을 한글로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77년 개신교와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와 2005년 한국 천주교회가 독자적으로 작업한 가톨릭 공용 《성경》을 통해 신자들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편하게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제12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보고에 따르면 2008년 현재 전 세계에서 성경을 일부만이라도 번역한 언어가 총 2,454개이다. 그중에서 성경 전체를 완역한 언어는 438개뿐이라고 한다. 게다가 성경의 일부조차 번역을 시도하지 못한 언어가 아직도 4,500여개에 달한다. 이러한 노력 때문인지 요새 천주교 신자들은 개신교 신자들에 비해 과거보다 덜 위축된 모습을 보이고, 성경에 대한 자신감과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참여한 성경 공부 프로그램만 강조하거나 성경 지식의 길고 짧음만을 다른 이들과 비교하려는 모습을 보이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을 어떤 자세로 대하며 활용하는 것이 좋을까? 오늘날 천주교 신자들이 자신의 삶에서 성경 말씀을 어떻게 바라보며 이해하고, 각자의 영성 생활에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가톨릭 교회 교리서》를 살펴보고자 한다(101-133항 참조).

 

성경의 궁극적 저자는 하느님이시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초자연적 방법으로 직접 개입하시기보다 인간 저자들을 매개자로 앞세우셨다. 하느님께서는 성경 각 권의 인간 저자들에게 성령의 감도로 영감을 주셨고, 인간 저자들은 영감 받은 진리를 기록하였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이간 저자의 자유 의지를 허락하셔서 저자들은 자신의 능력과 역량을 충분히 활용하여 성경을 저술하였다. 물론 저자들이 자유롭게 저술하였지만 성령의 영감을 받아 저술하였기에, 기록된 성경은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담고 있다.

 

“성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기록으로 보존된 성경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접한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죽은 문자로 경전 안에 갇혀 계시지 않는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미 사람이 되시어 살아 계신 말씀으로 늘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오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잘 깨닫기 위해서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체험하였던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셔야만 한다. “성령을 통해 쓰여진 성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111항).

 

서경이 다양한 장르와 문체와 주제로 꾸며진 여러 권의 책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하느님의 커다란 계획 아래에서 동일한 목적지를 향해 가는 단일한 책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의 관점에서 성경 전체를 단일한 구성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을 오해하고 잘못 해석할 수 있다. 가끔 개신교 신자들이 성경의 일부분만을 확대 해석해서 현혹할 때 천주교 신자들이 쉽게 걸려 넘어지는 것은 우리 신자들이 구원 역사라는 단일성의 관점에서 성경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은 교회의 거룩한 전통 안에서 읽고 해석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경전(經典) 안에 문자로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교회의 마음, 교회의 거룩한 전통 안에 함께 하신다(113항 참조). 개신교 신자들이 그럴듯한 논리로 성경을 해석하여 유혹한다 하더라도 우리 신자들은 교회의 거룩한 전통인 성전(聖傳)에 비추어 성경 말씀을 바라봐야 한다.

 

또 우리는 성경을 신앙의 유비(類比)에 의거하여 알아들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신앙의 진리는 외적 형태가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전체 계획 안에서 상호 일관성 있게 진리를 담고 있다. 간혹 다른 학문, 특히 과학 같은 분야에서 성경 안에 모순되는 내용이 있다고 오도하기도 하지만, 이는 신앙의 유비, 성경 전체의 일관성을 알아듣지 못해서 하는 지적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주의 사항들을 유념하면서 성경을 접하고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성경의 네 가지 의미를 파악하는 해석

 

가톨릭교회는 오랜 전통에 따라 성경 말씀의 의미를 자구적(字句的) 의미와 영성적 의미로, 영성적 의미를 세분해서 우의(寓意)적 의미, 도덕적 의미, 신비적 의미로 나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경 읽기는 이 네 가지 의미의 심오한 조화로써 더욱 생생해지고 풍요로워진다(115항 참조).

 

인간 저자가 처했던 상황이나 삶의 자리가 오늘날과 달라 성경 말씀을 얼른 알아듣지 못하는 것뿐이므로, 일차적으로 성경은 쓰인 글자 그대로 알아들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자구적 의미를 파악하는 해석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느님 계획의 일관성과 단일성을 표현하므로 마땅히 문자 너머의 숨은 뜻을 살펴야 한다. 이것이 영성적 의미를 파악하는 해석이다.

 

성경 안에는 다른 사물에 빗대어 은연중에 어떤 의미를 비추는 내용이 있어 그것의 우의적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것을 의미하며 세례의 표징이 된다. 한편 성경은 다양한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를 올바른 행동으로 이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도록(1코린 10,11 참조) 도덕적 의미를 파악하도록 촉구한다. 또 성경 말씀은 우리의 시선과 관심을 종국에는 하늘 나라로 향하게 한다. 수많은 교부와 영성가들은 성경에서 이러한 신비적 의미를 파악하고자 노력하였다.

 

우리가 단순한 지적 호기심으로 성경 말씀에 다가가면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경 말씀에 다가가 그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고 해석한다면, 분명 우리의 신앙은 깊어지고 굳건해질 것이다. 성경 말씀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영성 생활을 발전시키는 데 훌륭한 도구이자 지침서이다.

 

“글자는 행한 것을 가르치고, 우의는 믿을 것을 가르치며, 도덕은 행할 것을 가르치고, 신비는 향할 것을 가르친다”(118항).

[성서와 함께, 2012년 2월호(통권 431호)]

 

 


 

 

성경과 영성

(3) 유다교인들은 성경을 어떻게 알아들었을까?

전영준 바오로 신부

 

 

‘그리스도교의 모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정답은 ‘유다교’이다. 그것은 유다교가 그리스도교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는 언뜻 비슷한 신앙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당신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하느님을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모두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은 분명히 다른 종교다. 아담이 순종하지 않아 멸망과 죽음을 맞게 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 즉 구세주를 맞이하는 자세에서 두 종교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맞이하여 믿는 데 반해, 유다교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고 오늘날까지도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두 종교는 정경(正經)으로 인정하는 성경의 범위와 입장을 각자 다르게 규정하였다. 그리스도교는 구약성경뿐 아니라 예수님의 이야기와 믿음을 다루는 신약성경도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신앙의 원천으로 삼았다. 반면에 유다교는 신약성경뿐 아니라 애초에 그리스어로 집필되었거나 그리스어본으로만 전해지는 구약성경도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유다교는 히브리 민족의 언어인 히브리어와 일부 아람어로 집필된 성경만을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신앙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런데 유다교인들은 성경의 메시지를 해석하고 실생활에 맞게 재해석 하면서 신앙을 보존하고 영성 생활을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유다교인들이 신앙과 영성 생활을 위하여 성경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으려고 노력하였는지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유다교인들은 성경을 현명하게 해석하여 신앙을 보존하였다

 

먼저 성경 형성 초기 단계부터 성경의 여러 편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 논리적 모순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민수기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이유를 모세와 아론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공동체에게 주는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민수 20,12).

 

신명기에서도 주님께서는 비슷한 논조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너희가 친 광야에 있는 므리밧 카데스 샘에서, 이스라엘 자손들 한가운데에서 나를 배신하였고, 이스라엘 자손들 한가운데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신명 32,51). 결국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이유는 이집트를 탈출한 후 마싸와 므리바의 샘물 사건(탈출 17,1-7 참조)에서 빚어진 모세의 잘못 때문이다. 아마도 이 본문을 작성한 저자들이 다윗 왕조의 권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루살렘 지역의 사제계 학파에 속하였기에 모세의 권위가 훼손되더라도 수정 없이 그냥 언급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신명기의 다른 부분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의 꾸짖음을 전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주님께서는 너희 때문에 나에게도 화를 내시면서 말씀하셨다. ‘너 또한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신명 1,37). 이 본문은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다가 북왕조가 멸망한 후 예루살렘으로 피신해 활동하였던 신명기계 학파 저자들이 작성하였다. 그러므로 모세의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신명기계 학파는 모세가 가나안 당에 들어가지 못한 탓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리려고 수정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여푼네의 아들 칼렙과 여호수아를 함께 언급한 것은(신명 1,36.38 참조) 가나안 땅을 염탐하고 돌아온 정찰대가 그곳을 정복하기 엷다고 하여 사람들이 동요할 때 칼렙만이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정복을 독려함으로써(민수 13,25-33 참조), 주님께서 다른 이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칼렙과 그의 후손은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신 사건(민수 14,22-24 참조)을 연상시킨다. 곧 백성 때문에 모세가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음을 주장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시편 저자는 이 두 가지 주제를 혼합하였다. “그들이 므리바 샘에서 그분을 노엽게 하여 그들 때문에 모세가 화를 입게 되었으니 그들이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하자 그가 제 입술을 함부로 놀렸기 때문이다”(시편 106,32-33).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믿지 않아 모세가 경솔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유다교인들은 성경을 현명하게 해석하여 자기들에게 하느님의 율법을 전해 준 모세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막고 신앙을 잘 보존할 수 있었다.

 

유다교인들은 영성 생활을 왜곡하는 성경 말씀을 수정하려고 노력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인 기원전 100년경 셈족어로 집필되었으나 그 후 그리스어 번역본으로만 전해진 마카베오기 상권을 유다교에서는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다교인의 실상을 보여 주는 그 책에서 유다인 스스로 율법을 재해석하는 사례를 볼 수 있다.

 

시리아 임금 안티오코스가 유다교와 유다인들을 박해하자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가 광야로 피난을 갔다. 임금이 큰 군대를 보내 안식일에 그들을 공격하자 그들은 안식일법을 준수하기 위해 반격하지 않고 공격을 받아 죽고 말았다(1마카 2,29-38 참조). 마타티아스와 그의 벗들이 이 소식을 듣고 율법을 다음과 같이 재해석하여 결의하였다. “안식일에 우리를 공격해 오는 자가 있으면, 그가 누구든 맞서 싸우자. 그래야 피신처에서 죽어 간 형제들처럼 우리가 모두 죽는 일이 없을 것이다”(1마카 2,41). 안식일법 때문에 모든 유다인이 죽어 하느님을 찬미할 수 없게 되는 것보다 살아남아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사해 주변에 모여 생활했던 쿰란 공동체가 남긴 문헌을 보면 유다교인들이 명분뿐인 율법을 실상에 맞게 재해석한 사례를 살필 수 있다. 당시 쿰란 공동체에서 잘못된 전통이라고 생각한 규정은 부모님을 봉양할 재물이라 하더라도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서약하면 그 재물로 부모님을 봉양할 의무가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쿰란 공동체에 속하는 다마스쿠스 문서의 저자는 미카서를 언어유희적으로 주석하여 이 문제를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미카 예언자는 온 백성의 타락을 슬퍼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저마다 제 형제를 그물로 잡는다”(미카 7,2). 다마스쿠스 문서의 저자는 히브리어 단어 ‘그물’이 ‘자원예물(自願禮物)’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자원예물로 형제를 잡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재물을 임의로 하느님께 봉헌한다고 나서서 가족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 전통은 쉽게 고쳐지지 않고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서도 문제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마태 15,3-6; 마르 7,9-13 참조). 하지만 율법 규정이라 하더라도 실상에 맞지 않아 영성 생활을 왜곡할 수 있다면 유다교인들은 과감하게 수정하려고 노력하였다.

 

기원후 70년경 로마 제국의 군대가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을 파괴한 후, 성전 제사와 관련된 지도자들이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라삐들은 유일하게 유다교 지도자로 남아 하느님의 말씀과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쳤다. 라삐들이 성경을 주석하면서 집필한 미드라쉬 문헌은 유다교인들이 파스카 축제를 지낼 때 아버지가 자녀에게 이집트 탈출 이야기를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네 가지 유형의 자녀를 언급하였다.

 

첫째,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모님께 명령하신 법령과 규정과 법규들이 왜 있습니까?”(신명 6,20)라고 묻는 아들은 지혜로운 아들이다. 둘째, “이 예식은 무엇을 뜻합니까?”(탈출 12,26)라고 묻는 아들은 악한 아들이다. 셋째, “왜 그렇게 하십니까?”(탈출 13,14)라고 묻는 아들은 단순한 마음을 가진 아들이다. 넷째, 어떤 질문도 없이 그냥 아버지가 아들에게 설명하는 경우는(탈출 13,8 참조) 전혀 질문할 능력이 없는 아들이다. 이렇게 라삐들은 미드라쉬 문학을 통해 이미 알려진 성경 말씀으로 모르는 것까지 배우겠다는 원리를 세웠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논리적 추리와 언어학적 관찰을 시도하였다. 라삐들의 목표는 성경 본문을 명확하게 알아듣고 알아들은 것을 실천하려는 데 있었다.

 

유다교인들은 신앙을 보전하고 영성 생활을 발전시키기 위해, 우선 성경 본문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고 일관성 있고 인정할 만하게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또 모든 새로운 상황과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감춰진 일반 원칙을 추구하면서, 성경에서 확인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할 때에도 늘 성경을 기준으로 삼아 연구하고 적용하였다. 바로 이 점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교인이 반드시 배워야 할 자세이다. 비록 해석상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성경에서 알아듣고 배우려는 자세는 그리스도교인의 신앙과 영성 생활을 위해 좋은 본보기가 된다.

 

[성서와 함께, 2012년 3월호(통권 432호)]

 

 


 

 

성경과 영성

(4) 그리스도교인은 성경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

전영준 바오로 신부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예수님께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을 꾸짖으며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마르 12,27).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한 우문(愚問)에 예수님께서 현답(賢答)으로 응수하시자(마르 12,12-17 참조), 사두가이들이 그 틈을 타서 백성 앞에서 우쭐거리려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꾸중을 들었다.

 

우리가 주변에서 성상이나 성화로 접하는 예수님은 대개 서양인의 모습이지만, 사실 예수님은 유다인이다. 신약성경에서 접하는 예수님은 유다인의 율법 정신을 잘 이해하시고, 유다인의 성경 권위를 존중하신다. 그분은 유다인이 소중하게 여겼던 계명(신명 6,5 참조)을 가장 큰 계명으로 꼽으셨으며(마태 22,37-40 참조), 세상이 끝날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기를 바라셨다(마태 5,18 참조).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 못지않게 유다인의 성경과 율법 정신을 잘 꿰뚫어 이해하셨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늘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다인의 성경과 율법을 답습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산상 설교에서 율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율법의 참뜻과 정신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율법을 적용하기도 하셨으며(마태 5,21-37 참조), 기존의 율법을 무력화하고 하느님의 뜻이 더 잘 반영된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셨다(마태 5,38-48 참조). 또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보다 성경이 암시하는 뜻을 더 잘 해석하셨다. 즉 다윗의 자손과 메시아의 관계를 시편 110,1을 인용하여 명쾌하게 규정하셨다(마태 22,41-45; 마르 12,35-37 참조).

 

하지만 예수님께서 성경을 잘 이해하시는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낸 부분은 당신의 정체성과 사명에 관련된 사항을 해석하시는 장면이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초기에 사렙타의 과부와 엘리야 예언자, 시리아 사람 나아만과 엘리사 예언자에 관련된 성경 일화를 언급하시면서 만민 구원에 대한 당신의 사명을 밝히셨다(루카 4,25-27 참조). 또 유다인의 성경이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39).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발현하신 다음에는 다시 한 번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루카 24,44). 결국 예수님께서는 늘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가르치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그리스도교인이 굳은 믿음을 지키고 올바르게 영성 생활을 하기를 바라셨다고 볼 수 있다.

 

사도들은 성경을 통해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깨닫고 그분을 전하였다

 

사도들은 예수님보다 더 많이 성경에 의존하고 성경을 인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약간의 견해 차이로 논쟁이 벌어졌을 때 공자나 맹자의 말은 인용하면 사람들이 대개 수긍하여 사태가 마무리되었듯, 사도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유다인에게 증언하고자 할 때 성경의 권위를 가지고 접근하면 더 쉬우리라 여겨 성경을 자주 인용하였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제정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므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보다 자유롭게 성경을 해석하신 반면, 사도들은 유다교 지도자들과 비슷한 입장에서 성경에 접근한 것이 미미한 차이다.

 

사도 바오로는 성경의 권위와 가르침이 그리스도교인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가 분명히 밝힌다. “성경에 미리 기록된 것은 우리를 가르치려고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로마 15,4).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와 바오로의 선교 연설문을 보면, 청중이 유다인이거나 유다교 출신 그리스도교 신자일 경우 그들은 성경 말씀을 더 많이 인용하면서 예수님이야말로 메시아이시라고 선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오로는 늘 하던 대로 유다인들을 찾아가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토론하였다. 그는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신 다음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했음을 설명하고 증명하면서,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고 있는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사도 17,2-3). 사도들은 성경을 통해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깨달으면서 유다교의 해석을 넘어서게 되었다.

 

사도들은 성경을 통해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구원 사업이 무엇이었으며, 예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구원 사명을 완성하셨는지 이해하고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하였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1코린 15,3-4)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완성하셨다고 말한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씻고자 죽음을 받아들이셨고, 부활하시어 우리를 이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증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로마 4,25). 사도들은 성경을 해석하면서 유다인과 달리 구세주 예수님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깨닫고 우리에게 그분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의 정체성과 구원 사명을 깨달은 사도들은 그리스도교인의 정체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규정하기 시작하였다. 사도 베드로는 성경을 인용하면서 새롭게 선택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그리스도교인을 정의한다.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엄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한 대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백성입니다”(1베드 2,9-10). 또 그리스도교인은 하느님 백성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하느님 자녀의 지위도 얻게 되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로마 8,21).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인은 성경 말씀을 통해 겸손한 영성 생활을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사도 바오로도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래서 성경에도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코린 1,31).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계시는 신구약 성경에 하나로 묶여 있다

 

이렇게 예수님과 사도들이 유다인의 성경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본 초대 그리스도교인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자세를 본받아 구약성경에도 신약성경과 똑같은 권위를 부여하고 신앙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인은 구약성경을 읽을 때 신약성경의 메시지에 따라 해석하였을 뿐 아니라, 신약성경을 읽을 때도 구약성경을 배경으로 삼아 해석하려고 하였다.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안에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계시가 동일하게 흐르면서 두 성경이 단일하게 묶여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 단일성은 예형론(豫形論)의 관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즉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수많은 업적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분이 구원 계획을 완성하실 것을 미리 암시하였다는 것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28항 참조).

 

예를 들어 세상의 구세주이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정체성을 선포하고 이해시키기 위해 초대 교회는 구약성경에서 취한 호칭인 새로운 아담, 새로운 모세, 신명기에서 약속된 예언자,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을 약속된 후손, 이사야가 예언한 고난받는 주님의 종,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신비한 ‘사람의 아들’ 등을 사용하였다. 또 교회는 유다인의 파스카 음식이 주님의 최후의 만찬을 기억하며 행하는 그리스도교인의 성찬례 예형이라고 강조하였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사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며 죽으셨다가 부활하시어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을 수 있게 된 것은 예형이라고 이야기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에게는 버팀과 활력이 되고, 교회의 자녀들에게는 신앙의 힘, 영혼의 양식 그리고 영성 생활의 순수하고도 영구적인 원이 되는 힘과 능력이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1항). 초대 교회 신자들은 이 점을 깊이 깨닫고 영성 생활의 발전을 위해 늘 신구약 성경을 가까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령의 인도에 따라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에 깊이 머물러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경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르고, 그리스도를 모르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다.

  

[성서와 함께, 2012년 4월호(통권 433호)]

 

 


 

 

성경과 영성

(5)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전영준 바오로 신부

 

 

그리스도교의 발생지는 동양일까? 아니면 서양일까? 오순절에 사도들이 성령을 가득 받고 설교하여 삼천 명가량에게 첫 세례를 베푼 예루살렘 도성이 속한 유다 지방은, 오늘날 중도 지역의 팔레스티나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동양에서 출발한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서양에서 들어온 종교라고 여긴다. 아마도 그리스도교가 초세기 중반,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에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성장하면서 전 세계에 존재를 각인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중세에 이슬람교가 출현하여 중동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그리스도교가 동서로 나뉘면서 세력이 약화되기 전까지 동방 지역에서도 그리스도교의 활동과 영향력은 대단했다. 동방 지역에서 그리스도교의 중심 역할을 한 곳을 꼽으라면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플을 언급할 수 있다. 그중에서 그리스도교의 발생지로서 상징성을 가졌던 예루살렘과 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어 뒤늦게 주목받았던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하고,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두 도시는 여러 면에서 사뭇 다른 특성을 지니면서 그리스도교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는 기원전부터 이미 그리스 문화권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몇백 년 전부터 유다교인이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면서 유다교의 영향을 받은 곳이었고, 안티오키아는 초세기부터 사도 바오로를 비롯한 그리스도교인이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곳이었다. 두 도시는 서로 다른 종교적 배경을 지니고 있었기에 성경 해석, 신학 발전, 영성 생활 등 교회 활동에서 다른 모습을 보였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경과 율법을 해석하는 데 우의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알렉산드리아는 구약성경의 그리스어 역본인 칠십인역이 출간된 도시로 유명하다. 이 도시에서는 기원전부터 그리스 문화가 성행했으며, 플라톤 철학을 비롯한 그리스 철학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 중에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유다인 필론은 플라톤 철학과 유다교 사상을 잘 조화하여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보존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필론은 성경과 율법을 해석하는 데 문자적(leteral) 의미뿐 아니라, 철학의 언어를 수단으로 한 문자 이상의 우의적(寓意的, allegorical) 의미를 살펴 그 분야에 크게 공헌하였다. 즉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그림자에 불과한 잠정적이고 부차적인 것이므로 우의적 해석을 적용하여 상징적이며 영적인 의미를 찾아야 성경에 담긴 본래의 심오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고대부터 근세까지 오히려 그리스도교인들이 유다인 필론을 기억하고 전해 주었다는 것이다. 정작 유다인들은 최근까지 그를 잘 모르고 있다. 그만큼 필론의 사상과 업적은 그리스도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2-3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라고도 불리는 필론식 그리스도교 학교, 알렉산드리아 학교가 설립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운영한 이 학교는 오리게네스에 의해 전성기를 맞았다. 알렉산드리아 학교는 필론을 따라 우의적 성경 주석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오리게네스는 그 방법을 완성시켰다.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문자적 의미도 우의적으로 해석해야 참뜻을 알아들을 수 있다. 또 성경에는 단순한 사람들을 위한 문자적 의미와 배운 사람들을 위한 윤리적 의미,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적 의미가 담겨 있다.

 

오리게네스는 자신의 저서 《아가 주해》 서문에서 성경에 담긴 삼중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우의적 접근 방식을 언급하였다. 그는 그리스 철학의 윤리학, 자연학, 형이상학을 언급하면서 구약성경에서 솔로몬 임금의 작품으로 알려진 잠언, 코헬렛, 아가를 언급하였다. 이때 윤리학은 덕으로 키우는 습관의 기반을 마련해 주고, 자연학은 본성에 역행하지 않으면서 창조주가 마련하신 개별 사물의 본성을 고려하며, 형이상학은 거룩하고 천상적인 것을 관상한다. 또 간결한 격언을 가지고 삶의 규범을 마련하는 윤리학은 잠언에, 헛되고 하찮은 것과 유익하고 필요한 것을 구별하여 취사선택하는 지혜를 얻는 자연학은 코헬렛에, 그리고 형이상학은 신랑과 신부의 형상을 가지고 거룩하고 천상적인 것에 대한 사랑이 영혼에 스며들게 하는 아가에 담긴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를 탐구하는 데 노력하였다

 

알렉산드리아 학교가 있던 지역에는 중기 플라톤 사상 및 신플라톤 사상이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중기 플라톤 사상 및 신플라톤 사상에서는 절대적 신으로 여겨지는 일자(一者)의 차원과 인간이 속한 물질적 차원을 로고스가 연결해 준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런 까닭에 알렉산드리아 학파 신학자들은 인간과 하느님을 이어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플라톤 사상에서 말하는 로고스와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생각하였다. 즉 신학자들은 철학적 사고에 기반을 둔 로고스를 통해 그리스도를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서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신성의 특징만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고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를 탐구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즉 하느님의 아들이신 로고스가 육화하여 로고스의 신성이 타락한 인간을 구원받을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인 로고스가 인간을 신성화(神性化)했다는 것이다. 이 점 때문에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한계를 드러냈다. 이 학파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드러내 놓고 적극적으로 거부한 것은 아니지만, 신성만 강조하다 보니 인성이 축소되어 왜곡된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을 낳는 결과를 가져왔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 알렉산드리아 학파 신학자들이 삼위일체 논쟁에서 결정적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당시 중기 플라톤 사상 및 신플라톤 사상의 영향으로 일자와 로고스의 관계가 모호한 상태에서 삼위의 관계에 그들의 주장을 무리하게 적용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그러나 성부에게만 신의 본질을 인정하고 성자의 본질은 피조물에 가깝다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한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이 반박하면서 본질과 위격을 구별하여 삼위일체론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하여 성경을 우의적으로 해석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상징적이며 영적인 의미의 초월적 차원을 다루던 플라톤 사상과 만나면서 믿을 교리에 약간 혼란을 가져오기도 하였지만, 결국 교의신학을 정립해 가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부들은 그리스도교인의 영성 생활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면서 모든 결론을 연역적으로 풀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그리스도론은 ‘위로부터의 하강 그리스도론’이라고 불린다. 이 특성은 그리스도교 계시의 초자연적 영역을 풍요롭게 하면서 우리의 관심을 하느님과의 합일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신플라톤 사상의 배경을 가진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교부들은 우의적 성경 해석과 함께 인간 영혼과 하느님의 합일을 살피는 신비 체험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교인의 영성 생활에 많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예를 들어 오리게네스는 인간 세상에서 더 높게 올라가 하느님을 만나는 영적 여정을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일곱 단계로 묘사하였다. 그가 쓴 《아가 강론》 서문에 따르면 인간 영혼이 영적 여정을 시작하는 출발점은, 이스라엘 백성이 갈대 바다를 건너면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났듯이 갈대 바다를 건너는 행위가 예표하는 ‘세례’이다. 그렇게 시작된 영적 여정은 이스라엘 백성도 광야에서 어려움을 겪었듯이 잠정적으로 통과하는 시련을 겪을 수 있다. 하지만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였듯이 인간 영혼은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여 신랑과 신부가 함께 아름다운 영혼의 노래인 아가를 부르는 것처럼 환희의 노래를 부르면서 하느님과 합일하는 신비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저서 《아가 강해》와 《모세의 생애》에서 인간 영혼이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 중에 지나게 되는 빛, 구름, 어둠의 세 가지 길을 구약성경에 묘사된 모세의 삶과 함께 설명하였다. 첫째,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느님의 현현을 체험한 모세는 진리의 빛이신 하느님을 알기 시작하였다. 둘째, 광야에서 구름 기둥을 쫓아온 이스라엘 백성과 구름에 둘러싸인 산으로 오르는 모세는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을 점점 관상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좀 더 깨닫게 되었다. 셋째, 모세는 산 위 더 높은 차원에 올라서야 어둠 속에 계신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인간 영혼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어둠 한가운데 들어가야만 암흑 속에서 하느님을 뵐 수 있게 된다.

 

결국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플라톤 사상을 배경으로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을 탐구하던 분위기에 힘입어, 교의신학 분야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그리스도론이 전개되었다. 이와 함께 성경을 우의적으로 해석하던 분위기였으므로 영성신학 분야에서 하느님과 합일하고자 하는 인간 영혼의 영적 여정인 신비 체험도 갈망하게 되었다. 이러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특성은 그 후에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성경 해석과 영성 생활 분야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성서와 함께, 2012년 5월호(통권 434호)]

 

 


 

 

성경과 영성

(6) 안티오키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전영준 바오로 신부

 

 

예수님을 구세주로 굳게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불렸을까? 정답은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설립된 뒤 얼마 되지 않은 초세기 중반에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던 신앙인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사도 11,26 참조).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기원전부터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상황은 조금 다르게 전개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오래전부터 유다인 디아스포라(유다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유다교의 영향이 공존하였다. 물론 안티오키아에도 그리스도교가 전래되기 전에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사도 11,19 참조). 그러나 안티오키아는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정치 ·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곳은 로마 제국이 페르시아의 뒤를 이은 파르티아 왕조(기원전 247-기원후 226년) 및 사산 왕조(226-651년)와 전쟁을 치를 때 요충지였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원로원이 파견될 정도였다. 따라서 안티오키아에서는 유다교의 활동이나 세력이 도드라지게 나타나지 않았고, 그리스 문화가 훨씬 번성하였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안티오키아에서 멀지 않은 도시인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난 사울을 당신의 사도로 부르셨다(사도 9,1-18 참조). 그리스 문화의 영향이 강한 지역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상황에서 바오로만한 인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그런 까닭에 바오로 사도는 안티오키아와 밀접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아마도 그리스도교인들이 유다와 갈릴래아 지방에서 유다교인들의 박해를 피해 팔레스티나를 벗어나 처음 접한 그리스 문화권 지역인 안티오키아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상대적으로 크게 설립했던 것 같다. 바오로 사도는 선교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늘 안티오키아에서 여행 준비를 하였다.

 

그러므로 안티오키아에 살던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추종하던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안티오키아에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눈에 띄었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유다교의 색채가 짙어 훗날 전래된 그리스도교에도 큰 영향을 끼쳤고, 안티오키아에서는 유다교의 영향이 적은 가운데 그리스도교가 광범위하게 자리 잡고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안티오키아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경 해석에서 충돌하였다

 

알렉산드리아에는 플라톤 사상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것과 달리 안티오키아에는 오래전부터 현실적 사고방식을 지닌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이론철학’에서 실재(實在)를 변화시키는 궁극적 원인(불변하는 제1원인)을 언급하면서 신학을 다루었다. 그는 또한 ‘실천철학’에서 개인과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간의 행위를 규정하면서 윤리학을 다루었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플라톤 사상처럼 초자연적 신의 영역인 이데아계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의 사상은 실제로 존재하는 가시적 세계를 다루면서 신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언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을 지닌 안티오키아에서 3세기 중엽에 그리스도교 교리문답을 연구하는 안티오키아 학교가 설립되었다. 안티오키아의 루키아누스가 시작한 이 학교는 5세기 초반까지 전성기를 누리면서 오랫동안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보완적이면서 대립적 관계를 유지하며 신학 발전에 일조하였다.

 

안티오키아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경 해석에서 충돌하였다. 현실 세계에 중심을 두었던 안티오키아 학파는, 이데아계를 중요시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성경에 담긴 의미를 지나치게 우의적으로 해석하여 성경을 환상적으로 만들었다고 비난하였다. 안티오키아 학파는 문자적 의미와 역사적 의미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우의적 해석이 성경에 나오는 사건의 역사성과 역사적 의미를 훼손하고 하나의 신화에 기초하여 그리스도교를 건설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알렉산드리아 학파도 안티오키아 학파가 성경의 껍데기만 헤아리는 육적 해석을 하고 있다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안티오키아 학파가 늘 문자적 · 역사적 · 문법적 의미만을 중시하며 성경을 해석하지는 않았다.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한 그리스도교 주석가들은 구약성경을 이스라엘의 역사에 국한하여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지 않았고, 신약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해석해야만 명백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부분은 예형론적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 경우에 안티오키아 학파는 예형론적 해석을 알렉산드리아 학파처럼 광범위하게 적용하지 않고 최소화하여 아주 분명하다고 확신할 때만 적용하였다.

 

안티오키아 학파는 예수 그리스도 인성(人性)의 완전성을 강조하였다

 

성경을 해석할 때 역사적 의미를 찾고자 했던 안티오키아 학파는 신약성경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할 때에도 예수의 역사성에 관심을 갖고 역사의 예수님을 강조하였다. 그런 까닭에 안티오키아 학파는 그리스도론을 전개하는 데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에서 출발하였고, 그리스도 인성의 완전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안티오키아 학파는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세상의 유혹을 이겨 냈고 부활을 통해 완전성에 도달하였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안티오키아 학파의 그리스도론에서는 책임 있게 행동하는 그리스도의 윤리적 가치가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 안티오키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강조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오랫동안 그리스도론 논쟁을 펼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인정하면서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분리될 수 없는 긴밀한 일치와 단일성을 이룬다는 긍정적 관점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소홀하게 다루는 부정적 면도 드러내었다. 그 결과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주장한 견해의 극단적 형태인 그리스도론적 이단주의(아폴리나리우스주의)가 4세기경에 출현하였다. 아폴리나리우스주의는 원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옹호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하였으나 그 노력이 지나친 나머지 그리스도의 인성을 무시하게 되었다.

 

반대로 안티오키아 학파는 아폴리나리우스주의를 강하게 반대하면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더욱 강조하였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 안티오키아 학파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확실하게 구분되어 나타난다는 긍정적 면이 있었다. 하지만 신성과 인성이 너무 독자적 모습을 취하다 보니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긴밀하게 결합되지 않아 단일성이 약화되는 부정적 면도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안티오키아 학파가 주장한 견해에서도 극단적 형태를 지닌 또 다른 그리스도론적 이단주의(네스토리우스주의)가 탄생하였다. 네스토리우스주의는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의 독립된 두 인격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의 인격으로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정통 교리와 대립하였다. 물론 그 후에 또 다시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도 단성론을 주장하는 이단주의가 출현하였지만, 결국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며 두 학파는 교부 시대에 올바른 그리스도론을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면서 모든 결론을 귀납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풀었던 안티오키아 학파의 그리스도론은 ‘아래로부터의 상승 그리스도론’이라고 불린다. 이 특성은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집중하면서 경험된 사실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파악해 나간다.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점차 깨닫게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그분을 향해 자신을 투신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보여 주신 길을 걸어야 하는 우리는 윤리적 삶을 살아야 한다.

 

안티오키아 학파가 사용했던 신학 방법론은 후대에 다양한 영향을 끼쳤다. 먼저 성경을 이해할 때 문자적 · 역사적 의미에 관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성경의 인간 저자가 처했던 역사적 상황까지 관심을 갖고 이성적으로 설명하려 노력하였던 점은 훗날 성경 주석에서 역사비평적 방법론의 초석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안티오키아 학파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기초하여 이성주의적이고 현실적인 접근 방법을 전개한 것은 훗날 중세 서방교회에서 조직적인 스콜라 신학을 전개하는 데 사람들로 하여금 낯설지 않게 하는 간접적 영향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안티오키아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방법론에 차이가 있었을 뿐, 모두 성경 해석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공을 들였다. 그러나 그 차이가 영성 생활의 관점에서 사뭇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문자적 의미 이상의 것을 탐구하였던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신비적 경향을 나타내면서 하느님과 합일하고자 열망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영성 생활에 크게 기여하였다. 반대로 문자적 · 역사적 의미에 대한 탐구에 치중하였던 안티오키아 학파는 경험론과 현실론의 특징을 지니면서 그리스도교인들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사목적 관점에 기여하였다. 즉 안티오키아 학파는 피안(彼岸)의 세계를 바라보는 영성 생활에 대한 열의가 다소 부족하였고, 현실 세계에서 윤리적 삶을 추구하는 것을 크게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아무리 성경 말씀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였다 해도 때로는 지나친 이성주의가 영성 생활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성서와 함께, 2012년 6월호(통권 435호)]

 

 


 

 

성경과 영성

(7) 4세기 서방 교회에서는 성경을 어떻게 공부하였을까?

전영준 바오로 신부

 

 

한국 가톨릭 교회는 서방 전례에 속할까? 동방 전례에 속할까? 우리나라가 위치한 곳은 동양의 끝자락이지만, 가톨릭 전례만큼은 ‘서방 라틴 전례’에 속한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1054년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는 서로 상대방에게 파문 칙령을 선포하면서 나뉘게 되었다. 하지만 교회의 결별 전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그리스도교는 시리아와 소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래되면서 초세기 중반에 이미 로마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로마 교회는 로마 제국의 수도에 위했다는 이유뿐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잇따른 선교 활동과 순교로 인하여 교회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초세기 중후반부터 로마 황제가 박해하기 시작하여 한동안 지하 교회의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교는 로마 황제가 반포한 종교 자유에 관한 ‘밀라노 칙령’(313년)과 로마 제국 국교에 관한 ‘황제 칙령’(392년)을 발판으로 성장하며 발전할 기회를 얻는 듯하였다. 하지만 330년 동방의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로마 제국이 395년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나뉘면서 교회에도 그 영향이 미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서방 라틴 교회와 동방 비잔틴 교회는 언어, 전례, 신학이 분리되어 각자의 특성을 만들며 따로 성장하게 되었다.

 

특히 서로마 제국의 빈자리를 대신하면서 유럽 지역을 이끌어야 했던 로마 가톨릭 교회는 동방 교회로부터 신학과 영성에 대한 도움을 받으면서도 독자성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양 교회는 모두 신학과 영성을 펼치기 위해 성경 말씀을 읽고 이해하는 데 중심을 두었으나, 서방 교회는 실질적이고 실용적 관점을 신학을 전개한 반면 동방 교회는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 신학을 전개하였다.

 

동서방 교회를 두루 섭렵했고 가교 역할을 한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4세기에 이르러 서방 교회에서는 유럽 본토를 중심으로 굵직한 신학자들이 출현하여 활동하면서, 동방 교회의 신학과 영성을 바탕으로 서방 교회의 고유한 특성을 지닌 신학과 영성을 만들어 가기 시작하였다. 먼저 동서방 교회를 두루 섭렵하고 가교 역할을 했던 프랑스 출신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315-367/68년)를 들 수 있다.

 

세례를 받기 전의 힐라리우스는 고대의 다른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철학을 탐구하면서 절대자인 신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러던 중 성경을 접하게 된 힐라리우스는 성경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발견하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교인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힐라리우스는 이런 자신의 회심 과정을 영적 발전의 여정으로 기억하였다.

 

성경에 깊은 감명을 받은 힐라리우스는 성경 주석에 관심을 갖고 공을 들여 저술 작업에 매진하였다. 그는 성경 주석에 대한 초기 작품인 <마태오 복음 주해>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 나타난 주제에 대해 해석을 시도하였다. 먼저 성경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본 뒤, 교회 전체의 지평 아래에서 각자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가 영성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펴보았다. 그렇게 하여 그의 성경 주석 방법은 동시대뿐 아니라 시대를 초월해 다른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었다.

 

동방 교회 지역으로 유배되었던 힐라리우스는 오리게네스의 성경 연구 방법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힐라리우스는 유배 후에 저술한 <시편 주해>에서 예형론적 관점으로 시편을 해석하였다. 즉 시편의 내용은 메시아와 관련된 예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을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와 함께 읽어야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를 올바로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을 우의적으로 해석하였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방법론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할라리우스는 시편에만 국한하지 않고 또 다른 작품인 <신비에 관하여>에서 구약성경 전체를 그리스도론적 관점에서 예형론으로 소개하였다. 또 그는 말년에 프랑스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수도 생활을 권장하면서 영성가의 면모를 보이는 등 영성 생활에도 많은 관심을 드러내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영향을 받아 성경을 주석한 암브로시우스

 

다음으로 동시대에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활약한 암브로시우스(337/9-397년)를 살펴보자. 귀족 가문 출신인 암브로시우스는 로마에서 상류 계층의 고등 교육을 받고, 밀라노에서 황제의 행정관으로 봉직하다가 갑작스럽게 밀라노 교구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스어에 능통했던 암브로시우스는 주교직을 수행하는 동안 동방 교회의 신학을 자연스럽게 접하고 받아들였으며, 훗날 자신의 작품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동방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우선 암브로시우스는 성경과 신학 공부에 매진하였다. 그는 당시 수도자들 사이에서 통용되었던 성경 독서법(소리 내어 읽기)을 사용하지 않고 속독법을 사용하였으며, 사사받은 성경과 신학 교육을 묵상과 기도로 심화하면서 미래의 사목 활동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이 노력이 바탕이 되어 성경 묵상을 토대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강론을 할 수 있었다.

 

암브로시우스의 구약성경 해석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다인 필론과 그리스도교인 오리게네스의 성경 주석 방법에 심취하여 성경 본문에 대한 문자적 · 윤리적 · 영적 의미를 이야기하였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전통 신학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창세기를 비롯하여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과 내용을 가지고 설명하곤 하였다.

 

또 암브로시우스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조화를 위해 우의적이고 예형론적 해석의 관점을 발전시켰다. 당시 교회에 잘못된 관점이 많이 나돌고 있는 것을 의식했는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조화로운 일치 속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된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사람들이 쉽고 알맞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소개하였다.

 

반면에 암브로시우스는 신약성경을 많이 주석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에게 좋은 영향을 준 인물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 까닭에 그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특성에 더 가깝게 문자적 의미를 통해 신약성경을 주석하는 경우가 더 잦았다. 하지만 방대한 분량으로 다룬 신약성경 주해서인 <루카 복음 해설>에서 그는 풍부한 영적 감수성을 보이면서 여성과 가난한 사람 등 루카 복음의 대표 주제들을 주석하였다.

 

훗날 그리스도교인의 여성 생활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던 암브로시우스는 <직무론>에서 성직자뿐 아니라 일반 신자를 위한 영성 생활의 길을 제시하였다. 특히 여성 신자에게도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동정녀>를 통해 여성 수도자의 삶에 대한 사목적 배려를 잊지 않았다.

 

동서방 교회의 신학 및 유다이즘과 서방 신학을 연결시킨 히에로니무스

 

마지막으로 ‘예로니모’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오늘날 슬로베니아 국경 지역 출신 스트리돈의 히에로니무스(347/48-419/20년)에 대해 살펴보자. 히에로니무스는 <이사야 주해>에서 성경에 관한 명언을 남겼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히에로니무스가 성경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고 여길 수 있는 점은 성경의 라틴어 역본(불가타)을 출판한 것이다. 그는 번역 작업을 계기로 서방과 동방 교회의 신학을 연결시켰을 뿐 아니라, 히브리어 성경과 라삐들의 주석을 통해 유다이즘과 서방 신학의 만남을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성인이 되어 수도 생활을 동경하였던 히에로니무스는 수도 생활을 본격적으로 체험하고자 동방으로 건너갔다. 이때 그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문자적 의미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우의적 · 예형론적 의미를 탐구하는 성경 주석 방법론을 접하였다. 결국 안티오키아 학파의 방법론에 더 기울었던 그는 오리게네스의 방법론을 비판하기도 하였지만, 오리게네스의 저서에 많이 의지하면서 작품을 저술하였다. 그런 까닭에 히에로니무스는 구약성경을 주해할 때 히브리어 본문을 번역한 다음 자구적 의미뿐 아니라 영적 의미도 함께 살펴보았다.

 

평생을 수도 생활에 대한 열망과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살았던 히에로니무스는 수도자도 성경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수도 생활을 해야 한다는 점을 늘 강조하면서 성경 독서를 자신의 정화 수단으로 제시하였다. 다만 안티오키아 학파가 영성 생활을 깊게 발전시키지 못한 한계를 보여 주었던 것처럼, 역사적 · 문자적 의미를 탐구하는 특성 때문이었는지 상대적으로 히에로니무스는 후덕한 모습보다 다른 사람의 작은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고 가차 없이 비판하면서 늘 분쟁의 중심에 서 있는 모습을 보였다.

 

고대 교부들의 신학 활동은 사실상 성경 연구로 집중되었다. 중요한 신학 주제의 논쟁에서도 성경에서 답을 찾으려 하였다. 그만큼 성경 주석은 고대 그리스도교에서 중요한 신학 작업이었다. 로마 제국의 수도에서 멀리 위치했던 동방 교회가 먼저 신학 논쟁과 성경 연구의 중심이 되었지만, 4세기 종교의 자유 이후 서방 교회에서도 서서히 성경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서방 교회는 성경 연구에 대한 동방 교회의 유산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이미 라틴어가 자리를 잡은 서방 교회에서도 서서히 독자적 관점을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 서방 교회에서는 개인의 영성 생활에 관한 문제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위한 사목적 배려도 중요한 관심사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성서와 함께, 2012년 7월호(통권 436호)]

 

 


 

 

성경과 영성

(8) 북아프리카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전영준 바오로 신부

 

 

오늘날 주민의 98% 이상이 이슬람교를 믿는 북아프리카 지역에도 그리스도교 신자가 있을까? 통계 자료를 살펴보면, 북아프리카 중앙에 위치한 작은 나라 튀니지 국민의 1%가량이 그리스도교 신자이다. 북아프리카 지역이 그리스도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시기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오늘날의 튀니지 일대에 있었던 카르타고는 기원전 2세기경에 로마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초세기 중엽 로마 제국에 그리스도교가 진출하면서 2세기 말에 카르타고에도 교구가 설정되고 주교좌가 설치되었다. 카르타고 교회는 로마 교회와 함께 5세기까지 서방 교회의 한 축을 이루며 교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 오늘날의 알제리 지역에 있었던 히포레기우스라는 도시에도 교구가 설정되어 북아프리카 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함께 담당하였다.

 

그러나 5세기 중엽부터 북아프리카 교회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게르만족의 일파였던 반달족이 429년에 북아프리카를 침공하여 히포레기우스와 카르타고를 차례로 함락하고 439년에 반달 왕국을 세웠다. 공교롭게도 반달족은 그리스도교 이단 사상인 아리우스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그리스도교 신자와 교회를 박해하였다. 물론 534년에 동로마 제국이 반달 왕국을 멸망시켜 그리스도교가 다시 자유를 얻을 수 있었지만, 불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610년에 아라비아 반도 메카에서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이야기하는 무함마드(마호메트)는 622년에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메디나에서 이슬람교 원년을 선포하였다. 632년에는 이슬람교를 근본으로 삼은 우마이야 왕조가 탄생하여 7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아라비아 반도를 거의 정복하였다. 698년에 아라비아인들은 북아프리카를 침공하기 시작하여 705년에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북아프리카 지역을 이슬람교의 영향권 아래에 놓았다. 그 결과 북아프리카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쇠퇴하여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 3-5세기경에는 북아프리카 교회에서 훌륭한 교부가 많이 배출되었고 신학 활동도 활발하였다. 대표 인물로는 카르타고의 주교 치프리아누스와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가 있다.

 

성경을 열심히 읽는 삶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치프리아누스

 

카르타고의 치프리아누스(200/10-258년)는 이교 집안에서 태어나 문학과 수사학을 배우며 성장하여 유명한 수사학 교사로 활동하다가, 성경을 접하면서 늦은 나이에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치프리아누스는 세례를 받은 뒤에도 늘 성경과 함께 생활하였다. 성경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정은 그가 세례 후 2년 만에 주교가 되어 교구를 책임져야 했을 때에도 참된 진리 안에서 교회의 모든 일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치프리아누스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거나 성령께서 권고를 하시고자 할 때는 늘 성경을 통해 하신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치프리아누스는 어떤 문제를 해결할 가르침을 얻고자 할 때 한두 구절의 성경 말씀에 의존하지 않고 관련된 다른 구절을 가능한 많이 찾아보고 참고하는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치프리아누스의 저서 중에 《포르투나투스에게》와 《퀴리누스에게》가 대표적인데, 그것은 각 주제와 관련된 성경 구절을 많이 모아 놓은 형태(성경 명구집)로 구성되었다.

 

치프리아누스는 동방 교회의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에게서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성경 해석 방법론에서는 유사한 점이 많다. 치프리아누스는 구약성경을 주석할 때 예형론적 방법론을 구사하였다. 즉 구약성경에 나타난 인물과 사건은 역사적 가치와 거룩한 의미를 독자적으로 지니지만, 다른 면에서 신약성경과 그리스도를 깊이 연관시켜 영적 의미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성조와 예언자가 나름대로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 밖에 있었던 사람 모두가 목숨을 구할 수 없었듯이 교회 밖에 있는 사람 역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교회 일치》 6항).

 

신약성경을 주석하는 치프리아누스의 관점을 엿보는 중요한 이야기도 찾을 수 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이 간청은 영적인 의미와 자구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데, 두 해설 모두 우리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의도를 나타냅니다”(《주의 기도》 18항). 그는 안티오키아 학파처럼 자구적 의미만 강조하지 않고, 알렉산드리아 학파처럼 영적 의미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치프리아누스는 영적 의미와 자구적 의미를 균형 있게 살펴야 성경에 담긴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며 영성 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치프리아누스는 기도 생활과 함께 성경을 열심히 읽는 삶이 중요하다고 권고하였다. “항구하게 기도하며 영적 독서를 하고, 지금 하느님과 함께 대화하게. 그러면 하느님께서 자네와 함께 계실 걸세”(《도나투스에게》 15항). 그는 성경 말씀을 학문의 대상으로 보고 단순히 진리를 찾기 위해서만 연구하지 않았다. 신앙인이 영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도뿐 아니라 성경 말씀 읽기(lectio)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늘 강조한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항상 성경 말씀과 함께 했던 치프리아누스는 결국 로마 제국의 박해에 맞서 신앙을 증언하기 위해 기꺼이 순교할 수 있었다.

 

성경을 이해하는 원칙으로 ‘사랑’을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

 

북아프리카 교회를 대표하는 또 한 명의 교부는 바로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이다. 그는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열의가 강하여 젊은 시절에 마니교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니교에 환멸을 느끼고 결별을 결심한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저서 《고백록》에서 밝혔듯이, 어디선가 “집어 읽어라(Tolle lege)(제8권, 제12장)는 소리를 듣고 곧바로 성경을 펴서 로마 13,13-14을 읽은 뒤 회심하였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를 찾아 나선 초창기에 이미 성경을 접했지만, 당시에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역사가 야만스럽게 느껴졌고 성경에 쓰인 문체도 투박하다는 이유로 거부감을 가졌다. 하지만 암브로시우스를 통해 신플라톤 사상의 영향을 받고 영적 해석의 가능성을 깨닫고 난 후부터 구약성경에 대한 나쁜 인상을 바꾸어 성경 말씀을 마음 깊이 받아들였다. 그런 까닭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와 진리에 대한 문제르 연결하여 탐구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성경 말씀에 맛들인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로 성경 해석학 교본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 교양》을 저술하였다. 물론 오늘날과 같은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한 주석학을 집필한 것은 아니지만, 신학적 해석학 방법론을 시도하여 고대뿐 아니라 중세까지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 교양》 제2권에서 성경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글자 그대로 알아듣는 문자적 의미를 찾아야 하며, 그것을 위해 일반 학문의 지식도 총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최종적으로 교회의 권위에 따라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제3권에서는 문자와 영을 구분하여 글자 뒤에 숨은 의미까지 깨닫기 위한 원칙을 이야기하였다. 즉 성경에서 우선 자구적 의미를 밝히고, 때로는 같은 구절에 복수의 의미가 있는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표상적 의미도 담겨 있으니 주의를 기울여 파악해야 하는데, 이를 통해 윤리적 · 영적 의미까지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이런 관점으로 바라본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약성경을 예형론적 관점에서 그리스도론적 의미로 탐구하였다. 저서 《시편 강해》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저자 이면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라고 권고하였다. “예언자가 스스로 말한다 할지라도 진리를 말씀하시는 주님 자신이 그를 통해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56,13). 그렇기 때문에 시편의 다양한 문맥에 나타난 다양한 표상이 예형론적 관점에서 모두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계명의 목표는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임을 인식한다면, 또 자기의 성서 이해를 오로지 이 점에 귀결시킨다면, 그는 성서 해독에 안전하게 접근하기에 이를 것이다”(《그리스도교 교양》 제1권, 40,44). 아우구스티누스의 성경 이해의 원칙은 ‘사랑’이었다. 사실 사랑은 윤리적 계명을 실천하는 궁극적 방법이요, 완덕으로 나아가는 여정의 마지막 정점에 위치하여 하느님과의 합일을 완성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을 통해 이미 이러한 점을 깊이 인식하였던 것이다.

 

고대 교회의 교부들은 성경 말씀을 바라보면서 역사적 가치를 추구하는 문자적 의미와 영적 가치를 추구하는 우의적 의미를 살피고자 하였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문자적 의미보다 우의적 의미에서 훨씬 쉽게 영성 생활을 이끌어 내어 발전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방 교회 교부들도 성경 말씀을 통해 영성 생활에 대한 염원을 추구했지만,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가 어떻게 하면 믿음을 굳건히 보존할 수 있는지 고민하면서 성경 말씀을 사목적 관점에서 더 많이 사용하였다.

 

고대 교부들과 당시의 교회는 성경을 묵상하는 영성 생활에 직접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은수자들은 성경을 묵상하면서 더 깊고 구체적인 영적 발전의 길을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성서와 함께, 2012년 8월호(통권 437호)]

 

 


 

 

성경과 영성

(9) 고대 이집트 사막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전영준 바오로 신부

 

 

그리스도교 수도 생활의 시조이며 이집트 수도자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은 누구일까? 정답은 안토니우스(251-355/56년) 성인이다. 그가 보여준 삶은 홀로 한적한 곳에 머물면서 고행을 실천하는 은수자의 모습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수도원 형태의 삶은 안토니우스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지역인 이집트 사막에서 활동했던, 수도원 제도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파코미우스(290/92-346/47년) 성인에 의해 소개되었다.

 

물론 그들이 글자 그대로 첫 번째 수도자이고 처음으로 수도 생활을 실천한 것은 아니다. 몇몇 문헌의 간접 증언과 전승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신자들은 복음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모습의 하나로 고행을 실천하는 개념을 이미 알고 각자 처한 곳에서 극기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3세기 오리게네스(185-254년)가 자신의 저서에서 영적 투쟁이나 금욕 생활을 다루었던 것을 보면, 이미 그런 삶을 추구하는 신앙인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3세기 초에 이미 시리아에는 교회에 봉사를 하기 위해 공동생활을 실천하였던 수도 공동체의 초기 형태가 존재했다는 증언도 접할 수 있다. 그렇지만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에 출현한 이집트 사막의 수도자들을 수도 생활의 기원으로 보는 것은 제대로 기록된 문헌이 있기 때문이다.

 

3세기 말에 안토니우스와 그를 본받아 수도 생활에 나선 사람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남쪽에 위치한 나일 강 하류 이집트 북부 지역에서 은수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곳은 깊은 계곡과 언덕에 위치한 동굴 때문에 은수자가 생활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이집트 북부 지역에서는 안토니우스 시대에 이미 세 곳에 은수 생활 중심지가 형성되었다. 반면 4세기 초에 나일 강 상류 이집트 남부 지역에서는 파코미우스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울타리를 둘러친 수도 생활 공동체를 형성하여 함께 생활하는 형태를 정착시켰다. 이집트 남부 지역에서는 파코미우스 시대에 이미 아홉 개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고대 교부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더 잘 알아듣기 위하여 성경 말씀을 이론적으로 열심히 탐구하면서 삶에 적용해 나갔다. 반면 고대 수도자들은 하느님과 일치하여 살기 위하여 성경 말씀에 실천적으로 접근하면서 영적 삶을 심화시켰다. 수도자들은 비록 학식이 깊지 않았지만, 성경 말씀을 수도 생활에 매우 잘 적용하여 영성 생활을 심화시킬 수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수도 생활을 온전히 성경 말씀에서 배웠다

 

안토니우스는 은수자로서 살아가기 위해 결단을 내리는 출발점뿐 아니라 수도 생활 전체에서 늘 성경 말씀에 귀 기울이고 가까이하며, 말씀과 함께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안토니우스는 《서간 1》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기록된 율법의 이러한 증언은 그들 안에 이 부르심에 순종하려는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서간 1》 1항).

 

안토니우스의 이야기에 따르면, 사람들이 하느님께 불리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인간 본성 안에 부여된 사랑의 법에 따르는 것이고, 둘째는 성경 말씀에 따르는 것이며, 셋째는 시련을 통해서이다. 안토니우스는 그중 두 번째 방법인 성경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달았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아타나시우스(295/300-373년)는 저서 《안토니우스의 생애》에서 안토니우스가 어떻게 하느님께 불리게 되었는지 그 일화를 소개한다. 스무 살 때쯤에 안토니우스는 성당에 갔다가 우연히 복음 말씀을 듣게 되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마태 19,21). 안토니우스는 즉시 여동생의 몫만 조금 남겨 두고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안토니우스의 생애》 2항 참조). 얼마 후 다시 성당에 간 안토니우스는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복음 말씀을 듣고 나서 여동생의 몫마저 가난한 자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여동생을 수녀원에 맡긴 다음 본격적으로 수도 생활에 전념하였다(《안토니우스의 생애》 3항 참조).

 

이렇듯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수도 생활을 온전히 성경 말씀에서 배웠다고 소개한다(《안토니우스의 생애》 46항 참조). 때로는 그가 다른 이들에게 믿음을 가지고 격려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 성경 말씀이면 충분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안토니우스의 생애》 16항 참조). 그런 까닭이었는지 안토니우스의 《서간》뿐 아니라, 아타나시우스의 《안토니우스의 생애》에 기억된 안토니우스는 늘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다른 수도자들에게 그들의 수도 생활을 격려하고 가르침을 주었다.

 

하지만 우리가 안토니우스의 모습에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이 한 가지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그는 읽은 것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에 실패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완전히 이해할 정도였고, 그의 기억은 성경책을 대신할 정도였다”(《안토니우스의 생애》 3항).

 

당시 성경책은 요즘처럼 잘 인쇄되고 제본되어 휴대하기 간편한 책이 아니라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손으로 직접 필사한 책이기에 부피도 컸을뿐더러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은수자로서 수도 생활을 하는 안토니우스가 성경책을 직접 소유하고 읽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낮에 마을의 성당에 가서 읽거나 전례 시간에 낭독되는 말씀을 귀로 듣고 기억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안토니우스는 한 번 접한 성경 말씀을 잘 기억하였을 뿐 아니라 반복하여 암송함으로써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영성 생활이나 다른 이들에게 가르침을 줄 때 늘 성경 말씀과 함께할 수 있었다. 고대 수도자들의 삶에서 성경 말씀은 이렇게 기억 속에서 암송되면서 그들의 영성 생활에 유익함을 주었다.

 

파코미우스는 수도자들이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수도자들의 성경 사랑은 공동 거주 형태인 수도원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회(會) 수도자의 아버지라 불리고 공주(公住) 생활 수도원 제도를 확립한 파코미우스는 자신이 쓴 수도 규칙서에서 성경 말씀과 밀접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파코미우스는 먼저 수도 생활에 입문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입회하고자 하는 순간부터 성경 말씀을 강조한다. “수도원에 처음으로 입회하려는 사람에게 … 시편 스무 개나 (바오로) 사도의 서간 두 개나 너머지 성경의 한 부분을 그에게 주어 (외우게 할 것이다)”(《계명집》 139항; 참조 49항). 파코미우스는 계속해서 수도자는 성경 구절을 꼭 암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수도언 안에서 글자를 배우지 못하거나, 성경의 어떤 것, 적어도 신약성경과 시편을 암기하지 못하는 사람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계명집》 140항). 모든 수도자가 각자 성경을 소유하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수도 생활을 하면서 늘 성경 말씀과 함께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을 암송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파코미우스는 수도 규칙서에서 수도자들이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도 성경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해야 한다고 자세히 언급하였다. 먼저 수도자들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자기 방을 나서서 집회소에 다다를 때뿐 아니라, 모임 후에 자기 방이나 식당으로 갈 때까지 성경의 한 구절을 묵상해야 했다(《계명집》 3항, 28항). 또 식당 앞에서 다른 형제들에게 과자를 나누어 주는 담당자들뿐 아니라, 빵을 만드는 담당자들도 일을 하면서 동시에 성경의 한 구절을 묵상하거나 노래해야 했다(《계명집》 37항, 116항). 심지어 수도원의 모든 형제가 모여 걸어갈 때에도 각자 성경의 한 구절을 묵상해야 했다(《계명집》 59항). 그러므로 수도자들은 일과 중에 늘 성경 말씀과 함께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물론 파코미우스는 성경 말씀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은 수도자들이 성경 말씀을 멋대로 해석하게 방치하지 않았다. 만약 장상에게 성경 강의 등 가르침을 들으면,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듣고 암기한 내용을 서로 돌아가며 이야기하여 그 내용을 곱씹을 수 있어야 하고, 형제들의 모임에서 들은 강론 내용도 서로 회상하며 나누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계명집》 122항, 158항). 또 파코미우스의 제자들이 작성한 파코미우스의 전기를 보면 파코미우스 자신도 종종 형제들에게 주님의 말씀과 그에 대한 해석을 가르쳤던 모습을 볼 수 있다(《파코미우스의 생애》 86항). 결국 파코미우스가 수도 공동체를 기도와 성경 말씀으로 무장시켜 유지했던 점을 알 수 있다.

 

고대 수도자들은 오늘날과 다른 출판과 독서 환경에서 주님의 말씀에 매달리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지닐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하였고, 그것이 ‘암송’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도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경 말씀을 읽거나 듣고, 그 읽고 들은 바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암송하였다. 그렇게 암송한 성경 말씀을 그들은 일상에 늘 가까이 두고 수도 생활을 실천해 나갔다. 그들이 이렇게 열심히 노력한 까닭은 그만큼 고대 수도자들에게 성경 말씀이 그들의 영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하면서도 거의 유일한 버팀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 말씀을 쉽고 간편하게 접하고 간직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이 처한 환경이 너무나 화려하고 산만하여 성경 말씀에 집중하고 머물러 있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과연 주변 환경만 탓하는 것이 옳은 길일까? 아는 것을 실천에 옮긴 이들이 바로 수도자였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실천’이다.

[성서와 함께, 2012년 9월호(통권 438호)]

 

 


 

 

성경과 영성

(10) 동방 교회의 수도 생활은 어떻게 발전되었을까?

전영준 바오로 신부

 

 

소아시아를 비롯하여 지리상 동쪽에 위치한 그리스도교인 동방 교회에서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은 누구일까? 정답은 ‘대(大) 바실리우스’라고 불리는 카이사리아의 바실리우스(329/30-379년) 성인이다. 물론 몇십 년 앞선 안토니우스나 파코미우스도 동방 교회에 속한 인물이었지만, 바실리우스는 수도 생활을 위한 방대한 《규칙서》를 저술하여 수도 생활을 더욱 체계화했다고 높이 평가받는다.

 

이집트 사막에 수도자들이 출현하고 몇십 년밖에 지나지 않은 때, 이미 수도 생활을 하는 수도자의 수가 수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인근 지역에서 살던 평범한 신자였지만, 때로는 먼 곳에서 찾아온 신자도 있었다. 평범한 신자들은 비록 많이 배우지 못하였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열정만큼은 대단하였다. 그런 가운데 간혹 학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 수도 생활에 합류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글을 아는 수도자들 중에서 때로는 자신의 수도 생활을 보고문 형식의 글로 써서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자 시도하는 이도 있었다. 학식이 있는 수도자들 중에서 때로는 자신의 수도 생활을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이론 체계를 갖추고자 시도하는 이도 있었다. 그들은 수도 신학을 학문적으로 정립하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라, 동시대에 공존했던 다양한 이단 사상으로부터 수도 생활을 지키기 위해 올바른 관점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특히 그들은 수도 생활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전에 영적 투쟁이나 금욕 생활에 대한 저서를 남기면서 영성 생활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오리게네스(185?-254?년)의 사상을 새롭게 적용하였다. 대표 인물로 이집트 사막에서 은수자로 지냈던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345/46-399년)를 들 수 있다. 그는 오리게네스의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수도 생활에 대한 이론적 가르침을 담은 여러 작품을 저술하였다.

 

한편 이렇게 수도 생활을 학문적으로 정립하려는 시도는 수도자들 사이에 분열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학문에 무지한 수도자들은 수도 생활에 대한 체계적 작품을 이해할 수 없어 유식한 수도자들을 시기하였다. 반대로 유식한 수도자들은 무지한 수도자들이 수도 생활의 열정과 정신을 너무 단순화하거나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무시하고 이단 관습에 물들었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감정싸움으로 번진 분쟁 때문에 에바그리우스를 추종하던 수도자들은 이집트 사막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동방 교회의 수도 생활은 이 과정을 겪으면서 이론 체계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고, 훗날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줄 준비를 차곡차곡 하게 되었다.

 

성경을 통해 참된 그리스도교인이 누군지 알려 준 바실리우스

 

동방 교회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바실리우스는 사실 평생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만 한 인물은 아니다. 20대 후반에 세례를 받은 바실리우스는 하느님께 전 생애를 바쳐 복음 정신대로 살기로 결심하고 1년여 동안 이집트와 팔레스티나와 시리아를 돌아다니면서 훌륭한 수도자들을 만나 수도 생활을 체험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인근에 수도 공동체를 설립하여 동조자들과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30세 중반에 지역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고, 40대 초반에는 카이사리아의 교구장 대주교가 되어 더는 수도 공동체에서 수도 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다.

 

수도 생활 초기에 오리게네스의 저서에 심취했던 바실리우스는 주교직을 수행하는 동안 교의상 논쟁이 되던 많은 주제에 대한 신학 작품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수도 생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그는 수도 생활을 돕는 수덕적 작품도 질의응답 형식으로 여러 편 저술하였다. 그 수덕적 작품들은 동방 교회에서 오늘날까지 중요한 수도 규칙서로 인정받고 있다. 그중에서 203개의 질의응답으로 이루어진 《소(小)수덕집》은 일찍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방 교회에 《바실리우스의 규칙서》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면서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수도 규칙서로 인정되었던 바실리우스의 수덕적 작품들은 성경 말씀과 긴밀히 관계를 맺고 있다. 그것이 수도자들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성경 말씀을 어떻게 수도 생활에 적용하여 실천해야 하는지 다루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실리우스는 많은 경우에 성경을 인용하면서 대답하였다.

 

그 작품들 중에 《도덕집》이 특별하다. 당시에 과장되고 엄격한 금욕주의가 유행인 것을 알게 된 바실리우스는, 그리스도교인은 누구이며 그리스도교인의 삶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신약성경에 찾고자 하였다. 그 결과 참된 그리스도교인과 관련된 주제들을 총 80장에 걸쳐 다루면서 신약성경을 직접 인용하여 해답을 제시하는 형식으로 《도덕집》을 완성하였다. 바실리우스는 이 작품에서 다룬 내용이 수도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인에게도 해당한다고 생각하였다. 신약성경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인을 위한 참된 규칙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간직한 채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 카시아누스

 

서방 교회에 동방 교회의 수도 생활을 본격적으로 알려 준 인물로 에바그리우스의 제자로 알려진 요한 카시아누스(360/65-430/35년)를 들 수 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능통했던 카시아누스는, 젊은 시절 팔레스티나와 이집트에서 동방 교회의 수도 생활을 몸소 배우고 익혔다. 무지한 수도자들과 분쟁하여 이집트 사막을 떠나게 된 카시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로마에서 잠시 지내다가 말년에 남프랑스 지방에 직접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수도 생활을 하면서 사방 교회에 올바른 수도 생활 전통을 확립하는 데 일조하였다. 특히 카시아누스가 말년에 저술한 《제도서》와 《담화집》은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카시아누스는 저서 《담화집》에서 성경의 일부를 암기하고 그 뜻을 배우고 싶어 하는 수도자들에게, 네스테로스 아빠스가 가르치는 형식으로 영적 지식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마음이 약간이라도 복잡한 세속 일에 몰두하면 지식의 은사를 얻을 수 없고 영적인 감각을 느끼지 못하며 거룩한 독서에 항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입을 다물고 깊은 침묵을 지켜서 독서에 대한 열정과 그리움으로 가득 찬 노고가 헛된 교만으로 무용지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담화집》 제14담화 9항). 자만심이야말로 독서에 열중하지 못하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카시아누스는 성경 말씀을 빨리 알아듣지 못한다고 조바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권고하였다. “암기하기 위하여 자주 반복하여 읽어도 시간의 여유가 없어 그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뒤에 해야 할 일들과 눈에 들어오는 영상이 우리 마음을 빼앗지 않는 조용한 때 – 특히 밤의 침묵 가운데 되뇔 때에 – 그 내용을 더 밝게 알아차릴 수 있다”(《담화집》 제14담화 10항). 결론적으로 카시아누스는 “거룩한 말씀을 정성으로 받아들이고 마음 깊숙한 곳에 간직하여 침묵으로 봉하면 그것이 나중에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향기로운 포도주와 같이‘(《담화집》 제14담화 13항) 되고, ”깨끗하지 못한 영혼은 독서에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영적 지식을 얻을 수 없다“(《담화집》 제14담화 14항)고 언급하였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간직하고 육신의 악습을 끊어야만 성경을 열심히 읽거나 외우더라도 의미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한편 카시아누스는 고대와 중세에 교회에 통용되던 성경 해석의 방법론에 대한 식견도 소개하였다. 그는 ’역사적 해석‘과 ’영적 이해‘를 언급하고, 영적 이해는 다시 ’윤리적 해석‘과 ’우의적 해석‘과 ’신비적 해석‘으로 나뉜다고 소개하였다. 카시아누스는 이 방법론을 갈라 4,22-27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적 해석이고, 사라와 하가르가 두 계약을 가리킨다는 것은 우의적 해석이며,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을 언급하는 것은 신비적 해석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예루살렘을 인간 영혼으로 이해하는 것은 윤리적 해석이라고 언급하였다(《담화집》 제14담화 8항 참조).

 

고대 동방 교회에서 시작된 수도 생활은 이집트 사막을 벗어나 다른 지역까지 멀리 전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도 생활을 단순히 실천하는 것을 넘어 학문적으로 조명하고 이론적으로 체계를 세워 나가는 방향으로 발전하면서 후대에 널리 영향력을 미쳤다.

 

특히 서방 교회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바로 바실리우스와 카시아누스이었다. 누르시아의 베네딕투스(480/90-555/60년)는 저서 《수도 규칙》에서 그들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였다. ”수도 생활의 완덕을 향해 달려가려 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거룩한 교부들의 가르침이 있으니, … 교부들의 담화집이나 제도서나 그들의 전기나 그밖에 우리의 거룩한 사부 《바실리우스의 규칙서》는 착하게 살고 순종하는 수도승들의 덕을 닦기 위한 도구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수도 규칙》 제73항 2.4-6항)

 

그들의 영향은 체계화된 수도 생활을 서방 교회에 가르쳐 준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방 교회의 수도자들이 성경 말씀을 어떤 자세로 대면하여 읽고, 어떻게 삶에 적용하여 살아갔는지 전수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를 통해 서방 교회에서는 거룩한 독서를 실천하는 틀이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성서와 함께, 2012년 10월호(통권 439호)]

 

 


 

 

성경과 영성

(11)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은 어떻게 발전되었을까?

전영준 바오로 신부

 

 

누르시아의 베네딕도(480?-547년경) 성인 하면 대부분 ‘서방 교회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고 기억한다. 베네딕도가 자신과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모아 정주(定住) 수도회를 설립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답은 초급 수준이다. 혹자는 베네딕도를 ‘기술자와 건축가와 개간자의 주보 성인’으로 기억한다. 베네딕도 수도회와 베네딕도 수도 규칙을 따르는 후배 수도자들이 사회를 안정되게 이끈 그의 공적을 기리면서 그렇게 별칭을 붙였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은 베네딕도를 ‘유럽의 주보 성인’으로 기억한다. 베네딕도 수도 규칙서를 지키는 많은 수도회가 중세 중기까지 유럽 전역에 정치적 안정뿐 아니라 문화유산의 보존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베네딕도와 베네딕도 수도회

 

누르시아 시골에서 베네딕도가 태어날 때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유럽 대륙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한 세기 전부터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서로마 제국은 정책과 정치의 실패로 국력이 쇠약해져 갔으며, 게르만족 출신 용병과 갈등을 겪다가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켜 476년에 멸망하였다. 그 후 오도아케르는 동로마 제국의 총독으로서 이탈리아를 잠시 다스렸다. 그러나 10여 년 후에 동쪽에서 게르만족의 하나인 동고트족이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오도아케르를 제압하고 493년에 동고트 왕국을 세웠다. 동고트 왕국은 553년에 동로마 제국에 의해 멸망되고, 이탈리아는 다시 동로마 제국에 편입되었다. 이렇게 이탈리아 전역에 통치 세력이 느슨해지자 또 다른 게르만족인 랑고바르드족이 북쪽에서 내려와 568년에 이탈리아 북부에 랑고바르드 왕국을 세웠다. 랑고바르드족은 577년에 이탈리아의 주부까지 침입하여 로마를 위협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어수선한 시기에 베네딕도는 성장하였다. 그는 청년 시절에 로마에서 수학하면서 사회의 모순과 백성의 고단함을 목격하였다. 권력자의 사리사욕에 입각한 조세 정책은 백성을 더욱 궁핍하게 만들었다. 이민족의 잦은 침입은 백성이 미래를 설계하며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피난살이를 하게 했다. 베네딕도는 로마 남쪽에 위치한 수비아코에 가서 3년 동안 은수 생활을 하면서 수도자의 삶을 시작하였다. 마침내 베네딕도는 뜻을 같이하는 형제들과 한 곳에 정착하여 생활하는 수도히를 설립하였다. 기도 생활뿐 아니라 노동의 가치를 다시 조명할 수 있도록 욕체노동을 함께 강조하는 수도회였다. 그러므로 한 곳에 정착하여 노동의 중요성을 실천하던 수도원과 수도자들의 모범은, 안팎으로 나라가 어수선하여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른 이들의 재물을 탐하며 일확천금을 기대하던 사회 분위기를 개선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일하며 기도하라(Ora et labora)

 

위에서 살펴본 이유 때문에 베네딕도 성인과 베네딕도 수도원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구절이 있다. 바로 ‘일하며 기도하라(Ora et labora)’이다. 지금까지 노동과 기도는 베네딕도 수도원의 상징으로 모든 사람이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만 기억한다면, 베네딕도와 베네딕도 수도원을 절반 정도 이해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베네딕도 수도 규칙서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정해진 시간에 육체노동을 하고 또 정해진 시간에 성독(聖讀)을 할 것이다”(《수도 규칙》 48,1). 물론 이 표현이 베네딕도 수도 규칙서에 딱 한 번 언급되었지만, 오늘날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라고 일컫는 성경 독서가 언급된 것이 특이할 만한 점이다. 이것은 베네딕도가 동·서방 수도자들이 성경 독서를 중요하게 여긴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게다가 베네딕도는 거룩한 독서를 언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독서를 매일 적어도 2-4시간 정기적으로 실천하라고 권고하였다. “부활절부터 10월 1일까지는 아침에 ‘제1시기도’를 끝낸 다음 제4시까지 필요한 노동을 하고, 제4시부터 ‘제6시기도’를 바칠 때까지 독서에 전념할 것이다. 10월 1일부터 사순절 시작까지는 제2시 끝까지 독서에 전념하고, 제2시에 ‘제3시기도’를 바칠 것이다. 그리고 제9시까지 모든 이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할 것이다”(《수도 규칙》 48,3-4.10-11). 또 베네딕도는 육체노동과 균형을 맞추어 독서를 게을리 하지 말고 꾸준히 실천하라고 강조하였다. “식사 후에는 개인의 독서나 시편 (공부에) 전념할 것이다. 특별히, 형제들이 독서에 전념하고 있는 시간에 한두 사람의 장로들에게 책임을 맡겨 수도원을 돌아다니게 하여, 혹시라도 한가함이나 잡담에 빠져 독서에 힘쓰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무익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방해가 되는 게으른 형제가 있는지 살피게 할 것이다. 주일에도 여러 가지 직무를 맡은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든 이들은 독서에 전념할 것이다”(《수도 규칙》 48,13.17-18.22).

 

거룩한 독서(Lecio Divina)

 

그런데 수도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성경 독서를 실천하였을까? 베네딕도에 앞선 동·서방 수도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성경을 읽고 난 후, 은수처에서 성경 말씀을 되뇌면서 암송하였다. 베네딕도 수도 규칙서에는 베네딕도 수도자들이 어떻게 거룩한 독서를 실천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제6시기도’ 후에 식사를 마치면 자기 침대에서 안전한 침묵 중에 쉴 것이지만, 만일 누가 혼자 독서를 하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수도 규칙》 48,5). 이때 각자 자기 방에 머물고 있으면서 다른 방에서 쉬는 형제에게 방해가 될 정도라면 큰 쇠를 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당시에는 독서할 때 크게 소리 내어 읽는 것이 보편된 방법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다른 형제에게 방해가 되는 상황에서는 작게 소리 내어 독서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크게 소리 내어 읽든 작게 소리 내어 읽든, 이는 오늘날 우리가 침묵한 채 눈으로만 책을 읽는 방식과 사뭇 다르다.

 

그렇다면 베네딕도 수도자들은 거룩한 독서 시간에 주로 무엇을 읽었을까? 베네딕도는 그것을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거룩한 독서 시간에 주로 성경을 읽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뿐 아니라 다른 교부의 저서들도 읽으라고 베네딕도 수도 규칙서에 제시되어 있다. “수도 생활의 완덕을 향해 달려가려 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거룩한 교부들의 가르침이 있으니, 이것을 지키는 사람은 완덕의 절정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권위로 (쓰인) 신·구약성서의 어느 면이나 어느 말씀이 인간 생활의 가장 올바른 규범이 아니겠는가? 또한 거룩한 가톨릭 교부들의 어느 책이 우리 창조주께 바른 길로 나아가라고 소리치고 있지 않는가? 또한 교부들의 담화집이나 제도서나 그들의 전기나 그밖에 우리의 거룩한 사부 《바실리우스이 규칙서》는 착하게 살고 순종하는 수도승들의 덕을 닦기 위한 도구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수도 규칙》 73,2-6) 그러나 다른 모든 수도자에게 성경이 핵심이었고, 그들이 수도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책들은 결코 읽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면, 베네딕도 수도자들에게도 성경이 거룩한 독서의 1차 자료였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중심으로 한 거룩한 독서가 육체노동과 기도와 더불어 베네딕도 수도회의 근본을 이루는 실천 사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유럽에서 베네딕도와 베네딕도 수도원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교황 대(大) 그레고리우스 1세(540?-604년)에 의해서다. 그레고리우스 1세는 랑고바르드족의 침략 위협 속에서 일생을 늘 불안하게 살았다. 따라서 북방 민족의 위협에서 벗어나 안정되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교황 재임 기간에 유럽 전역의 게르만족을 개종시키고자 선교 활동을 활발히 계획하고 지원하였다. 교황은 베네딕도 수도자를 30-40명씩 무리지어 유럽 전역에 파견하였다. 그들은 그곳 대도시 주변에 수도원을 짓고 생활하면서 지역 주민에게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래서 베네딕도 수도자들은 유럽 전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고, 새로 입교한 신앙인들은 수도자들의 영향을 받으며 영성 생활을 실천할 수 있었다.

 

거룩한 독서를 실천하는 수도자들의 수가 서방 교회 전역에 자연스럽게 늘어나면서 성경 독서와 묵상을 중심으로 한 수도 생활과 영성 생활이 후대에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이 거룩한 독서를 중심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베네딕도 성인의 공헌이 참으로 크다.

 

[성서와 함께, 2012년 11월호(통권 440호)]

 

 


 

 

성경과 영성

(12) 중세 초기 수도자들은 시편을 어떻게 활용하였을까?

전영준 바오로 신부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느님을 찬미하는 교회의 공적(公的)이며 공통적인 기도는 무엇일까? 정답은 ‘성무일도(聖務日禱, Divine Office)’이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에서 성무일도는 성직자가 의무로 바쳐야 하는 기도일 뿐 아니라, 수도자도 수도회의 회원에 따라 바치는 기도이며, 일반 신자에게도 권유되는 기도이다. 성무일도의 기도문은 주로 시편으로 이루어지는데, 사실 하느님 백성이 기도로 시편을 낭송한 것은 무척 오래된 전통이다.

 

구약성경에서 시편은 그 자체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훌륭한 노래요 기도이다. 히브리 민족에게 시편은 하느님을 향한 예배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시편을 제외하고서 자신들의 신앙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신약성경에서도 시편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었음을 확인해 주는 훌륭한 척도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부활하여 발현하신 예수님의 입을 통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주님의 가르침을 깨우치기 위하여 시편까지 받아들여 읽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을 소개하였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루카 24,44). 그뿐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기를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서도 시편을 인용하고 활용한 찬미의 기도를 몇 편 소개하였다.

 

일찍이 동방 교회에서도 수도 생활을 시작하는 수도자들에게 시편 기도문과 깊은 관계를 맺도록 권고하였다. 지난 호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파코미우스의 수도원에서도 수도회에 입회하고자 하는 지원자들에게 다만 몇 편이라도 시편의 내용을 암기하라고 지도하였다. 이 전통이 서방 교회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서방 교회으 베네딕도 성인은 기도하는 데 시편을 적극 사용하라고 권하였다. 그는 《수도 규칙》에서 성무일도를 할 때 구약과 신약의 성경 독서와 함께 시간경마다 시편을 여섯 편이나 세 편 정도 바치라고 규정하였다(《수도 규칙》 9-17장 참조). 또 요일별 시간경에 따라 외워야 할 시편의 순서도 자세히 언급하였다(《수도 규칙》 18장 참조).

 

베네딕도 성인은 시편을 기도로 바쳐야 하는 수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자세를 지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시편을 외울 때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 목소리와 조화되도록 할 것이다”(《수도 규칙》 19,6-7). 기도를 바칠 때 외워야 할 시편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수도자는 따로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야간 기도’ 후에 남은 시간은, 시편이나 독서를 더 익혀야 할 형제들이 공부하는 데 쓰도록 할 것이다”(《수도 규칙》 8,3).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켈트족과 게르만족의 신앙생활

 

고대 말과 중세 초, 그리스도교가 북유럽에 복음을 전할 때 만난 민족은 켈트족과 게르만족이었다. 켈트족은 기원전부터 고대까지 유럽 본토에 거주하다가 고대 말에는 점점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 뒤를 이어 발트 해 연안 북유럽에서 기원한 게르만족이 고대 말에 유럽 전역으로 이동하였다. 고대의 부족이나 민족은 대개 토속적 민간 신앙을 갖고 있었는데, 두 민족에게도 민간 신앙이 있었다. 그러나 켈트족 사회는 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게르만족 사회는 무사를 중심으로 한 호전적 분위기가 많이 반영되었다. 그런 까닭에 켈트족 그리스도교인들은 토속 종교에 담긴 종교적 열성을 발휘하여 개인마다 헌신하며 그리스도교를 실천하였다. 반면에 게르만족 그리스도교인들은 토속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집단 의식(儀式)을 통해 혼합주의 형태로 신앙을 표현하였다.

 

켈트족 지역인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선교 덕분에 많은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켈트족 수도자들은 종교에 대한 민족적 열정에 힘입어 그리스도교 수도자로 사는 데에도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 고유 언어가 있어 라틴어를 몰랐던 수도자들은 먼저 성경을 읽기 위해 라틴어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런 다음 영성 생활에 전념하기 위하여 시편을 비롯하여 성경 전체를 읽고 묵상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열정적인 켈트족 수도자들은 완덕에 더 나아가기 위하여 매일 두 팔을 수평으로 펼쳐 들고 시편을 전부 암송하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시편은 그들의 기도 생활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 그들은 성경을 주석하는 작업에도 많은 공을 들여 중세 그리스도교 문화 형성에도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멜트족 그리스도교인들은 신심을 개인적으로 표현하는 그들 관습의 영향으로 참회와 고해를 개인 차원에서 행하는 특성을 보였는데, 보속을 실천하는 데에도 시편을 적극 활용하였다. 즉 신앙이 얕은 사람이 거짓 증언을 하였을 때는 매을 700대나 맞았을뿐더러 시편을 50편이나 암송해야 했다. 일반 신앙인이 금식을 지키지 못하였을 대는 무릎 꿇고 시편을 50편 암송하거나 무릎 꿇지 않고 시편을 60편 암송해야 했다.

 

켈트족 그리스도교인들의 열렬한 종교심은 일부 게르만족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전해지면서 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켈트족 수도자들은 서게르만족으로 구성된 프랑크 왕국 전반기를 지배하였던 메로빙거 왕조 시절에 아일랜드를 떠나 유럽의 북서부 지역 브르타뉴 반도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거기서 나태한 신앙생활을 하는 게르만족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종교적 열정을 불어넣어 주었다. 특히 그들에게 성경을 읽고 공부하며 묵상하는 훈련을 단단히 시켰다. 켈트족 수도자들은 하느님을 관상하는 소명이 모든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꼭 켈트족 수도자들의 선교 덕분만은 아니었겠지만, 서게르만족은 아리우스 이단 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고 곧바로 정통 신앙을 접하고 받아들여 안정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반면에 동게르만족은 아리우스 이단 사상에 먼저 물든 까닭에 올바른 신앙을 갖기까지 어려운 여정을 걸어야만 했다.

 

중세 초기 수도자들의 수도 생활

 

그리스도교에 의미 있는 사건이 여러 번 일어났다. 수도자들의 선교 활동 덕분에 이 시기에 유럽 전역에는 수많은 수도원이 설립되었지만, 수도원마다 제각기 다른 수도 규칙을 지키며 수도 생활을 하였기에 큰 혼란이 발생하였다. 이에 교황 레오 3세에게 서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아 서방 그리스도교의 보호자로 나섰던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742-814) 대제는 제국 내의 수도원을 정비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자 다음 황제인 경건왕 루이(778-840)가 선왕의 뜻을 잇고자 아니안의 베네딕도(750-821) 수도원장에게 개혁의 중책을 맡겼다.

 

아니안의 베네딕도는 당시 수도원의 모든 규칙을 연구하여 유럽의 모든 수도원이 초심으로 돌아가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을 동일하게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그 덕분에 수도원에서는 렉시오 디비나(성독)를 다시 한 번 주목하여 실천하였다. 하지만 아니안의 베네딕도는 렉시오 디비나의 대상을 성경뿐 아니라 고대의 유명한 교부들과 심지어 교황의 저서까지 확대하였다. 그는 수도원에 관상 생활을 실천할 것을 강조하면서 성무일도뿐 아니라 끝기도 전에 15편의 시편을 더 암송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아니안의 베네딕도의 개혁은 곧바로 찾아온 그의 죽음과 수도원 외부의 압박에 의한 개혁 구조, 프랑크 왕국의 분열 등으로 지속되지 못하였다.

 

프랑크 왕국 시절의 수도원은 왕족과 귀족에 의해 세워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왕족과 귀족이 수도원장을 마음대로 임명하면서 수도원은 늘 정치적 외풍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얼마 후 다시 수도원 개혁의 바람이 불게 되었다. 910년에 아키켄의 기욤 공작은 클뤼니에 수도원을 설립하면서 수도원의 독립을 보장해 주었다. 그 후 클뤼니 수도원은 세속 권력에서 독립하고자 하는 중세 수도원 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백여 년 사이에 유럽 전역에는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정신을 따르는 수도원이 많이 설립되었다.

 

클뤼니 수도원의 제2대 원장이었던 오도(879-942년) 수도원장은 특히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을 철저히 준수할 것을 강조하면서, 전례와 렉시오 디비나에서 활력을 얻으라고 역설하였다. 물론 렉시오 디비나의 대상에 성경 주석서, 신학 저서, 교부들의 문헌과 백과사전까지 포함하면서 렉시오 디비나의 중요성이 약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전례 기도를 강조하면서 매일 138편의 시편을 낭송하였다. 그러나 전례 기도에 필요한 책들을 손으로 필사하는 정신노동이 육체노동을 대신하면서 베네딕도의 수도 생활 정신이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고대의 동방 수도자들이 성경 암송을 중심으로 관상 기도를 실천하면서 수도 생활에 도움을 받았다면, 중세의 서방 수도자들은 전체 성경 중에서 특히 시편을 중심으로 전례 기도를 실천하면서 수도 생활에 활력을 얻었다. 한편 중세의 수도자들은 렉시오 디비나의 대상 범위를 확대하면서 성경의 비중을 축소하느 결과도 가져왔다.

 

결국 중세 전반까지 유럽의 수도원은 대부분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을 준수함으로써 성경 독서 전통의 명맥을 유지하는 공통점을 지니게 되었다. 이는 그들의 수도 생활과 영성 생활에 커다란 자양분이 되었다. 다만 중세 중반 이후 수도자들의 수도 생활과 그리스도교인들의 영성 생활이 세상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면서 적응의 몸부림을 피해갈 수 없게 되었다.

 

[성서와 함께, 2012년 12월호(통권 441호)]

 

 


 

 

성경과 영성

(13) 중세 중기의 신앙과 이성은 영성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전영준 바오로 신부

 

 

역사가들이 그리스도교를 부정적으로 보면서 중세 유럽의 특징을 일컫기 위해 사용한 용어는 무엇일까? 정답은 ‘암흑기’이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중세에 그리스도교가 성경의 세계관과 역사관을 이식하려고 하여 인간 이성과 문명의 발전을 크게 저해하였기에 중세의 유럽 역사를 암흑기라고 평가한다. 뿐만 아니라 종교 개혁 이후에 개신교에서도 가톨릭 교회를 폄하하기 위해 중세 유럽을 암흑의 시기였다고 언급한다.

 

물론 중세 초기는 다른 이유로 암흑기라고 말할 수 있다. 4세기부터 유럽에서 범(汎)게르만족이 대이동을 시작하면서 한동안 정복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런 중 5세기 후반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여 유럽에서는 커다란 정치 세력이 소멸되고, 유럽의 영토와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군소 세력들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일반 백성은 한 곳에 정착하여 일을 하며 평화롭게 살아갈 수도 없었다. 정규 교육 기관에서 배움의 길을 걸을 수도 없었으며, 안정된 신앙생활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 놓였던 중세 초기를 암흑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8세기말 프랑크족 카롤링거 왕족이 유럽 대부분을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암흑기는 일단락되었다. 샤를마뉴 대제가 그리스도교와 손을 잡고 수도원을 중심으로 문화 육성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오히려 그때부터 그리스도교는 교육과 문서 보급 사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즉 수도원이 정규 교육 기관을 대신하기 시작하면서 훗날 교회가 운영하는 대학으로 발전하였으며, 많은 수도자는 성경과 교부 문헌 및 교회와 관련된 서적을 필사하여 개인이나 도서관 등에 보급하였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이러한 현상이 그리스도교인의 영성 생활을 방해하는 장애 요인이 될 수는 있었어도, 모든 사람의 이성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정신을 따르는 많은 수도원에서, 수도자들은 육체노동보다 성경과 교회 서적을 필사하는 정신노동에 집중하여 교회 안팎에 문서를 보급함으로써 이성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온종일 정신노동에 시달린 수도자들이 여가 시간에 두뇌를 사용하지 않으려 하여 성경 독서와 묵상을 소홀히 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결국 수도자들은 영성 생활에 많은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스콜라 철학의 영향으로 신앙을 이성으로 조명하기 시작하다

 

중세에 그리스도교가 인간 이성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다른 예는 ‘스콜라 철학’의 출현일 것이다. 샤를마뉴 대제의 르네상스 시대를 통해 그리스 철학을 다시 새롭게 접한 유럽은 토론 문화를 바탕으로 인간 이성의 역할을 극대화하면서 신앙과 이성 간에 갈등을 낳았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인간의 이성과 학문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 인물로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영국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무스(1033-1109년)를 들 수 있다. 베네딕도회 수도자인 안셀무스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대전제를 제시하면서 신앙을 전제하지 않는 이성은 오만이고,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신앙은 태만이라고 주장하였다. 안셀무스는 저서 《독어록(獨語錄, Monologion)》에서 귀납법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하였는데, 전례가 없는 특이한 독창성을 드러냈다. 즉 그는 성경과 전승뿐 아니라 교부들의 가르침도 완전히 배제한 가운데 합리적 방법만을 사용하여 하느님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물론 안셀무스는 《대어록(對語錄, Proslogion)》에서 연역법과 함께 하느님께 기도를 바치는 형식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하여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이러한 시도는 성경을 이성으로만 헤아리고 다가가려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스콜라 철학의 영향으로 신앙을 이성으로 조명하기 시작하면서 스콜라 신학이 출현하게 되었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을 체계화하면서 신학을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스콜라 신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대표 인물로 성 빅토르의 후고(1096-1141년)를 들 수 있다. 성 빅토르 수도원의 제3대 수도원장이었던 후고는 하느님 증명 문제뿐 아니라 하느님 인식 문제에서도 신앙과 이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후고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자신의 내면을 잘 성찰함으로써 하느님의 존재를 인식하는 단계에 다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후고는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도 이성과 신앙의 공동작업으로 접근하였다. 그는 저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성사들(De sacramentis christiane fidei)》에서 구약성경을 창조 사업의 면에서, 신약성경을 구원 사업의 면에서 조명하면서 그 두 주제가 조화를 이루는 성경 신학을 제시하였다. 그는 영성 생활에서도 인간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하는 단계에서 ‘인지-묵상-관상’의 세 단계를 제시하였다. 신비 체험의 첫 단계에서는 이성이 감각이나 기억을 잘 통찰하기를 강조하였고, 관상의 단계에서는 직관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는 지성의 침투를 강조하였다.

 

스콜라 신학의 반대편에 서서 성경을 중심으로 영성 생활을 펼치다

 

한편 세속 권력에서 자유로워지고자 수도원 개혁을 주장하였던 클뤼니 수도원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되자 부작용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화려한 전례와 필사에 국한된 정신노동 때문에 육체노동을 점차 등한시하여 베네딕도 수도 규칙의 초심을 잃고 귀족화된 클뤼니 수도원은, 육체노동을 전담할 평수사를 수도원에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교회 안에서도 스콜라 신학이 발전하면서 이성의 작용을 강조하기 시작하자, 11세기경에 일부 수도자들은 초기의 단순한 수도 생활로 돌아가려고 시도하였다. 베네딕도 수도 규칙을 각기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여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수도회가 출현하였다.

 

그중 하나가 1010년에 창설된 카말돌리회이다. 이 수도회의 수도자들은 베네딕도 수도 규칙을 독수(獨修) 생활 형태로 엄격히 지키고자 하였다. 다른 하나는 1098년에 창설된 시토회이다. 이 수도회의 수도자들은 산 속 깊이 들어가 수도원을 세우고 베네딕도 수도 규칙을 공주(共住) 생활 형태로 엄격히 지키고자 하였다. 시토회 수도원은 여러 면에서 클뤼니 수도원과 대조를 이뤄 많은 이의 호응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고, 더 명맥을 잇지 못한 클뤼니 수도원과 달리 오늘날까지 이어 오고 있다. 시토회는 최초의 수도 규칙을 단순하고 엄격하게 지키고자 하였으며, 전례뿐 아니라 필사와 관련된 정신노동을 줄이고 육체노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수덕 생활과 세상과 단절하여 관상 생활을 실천하는 것이 시토회의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시토회 수도자로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1090-1153년)를 들 수 있다. 베르나르두스는 스콜라 신학의 발전에 기여한 성 빅토르의 후고와 친분 관계를 맺었지만, 스콜라 신학 분위기의 반대편에 서서 고대 교부들의 방법론을 따라 철저하게 성경과 교부들의 성경 주석을 중요한 가르침으로 생각하였다. 그런 까닭에 일부 사람들은 베르나르두스를 그리스도교 ‘최후의 교부’라고도 일컬었다.

 

베르나르두스는 성경에 집중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의 신비에 빠져들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성경은 그리스도의 신비 외에 다른 어떤 신비도 전해 주지 않는다. 사실 베르나르두스 이전까지의 신비 사상에서는 인간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하고자 하는 하느님 중심의 신비 체험이 전개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베르나르두스가 성경을 중심으로 영성 생활을 펼쳐나감으로써 그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비를 체험하게 되었고, 이 점이 그의 신비 체험의 특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 후부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비롯하여 그리스도교 내의 중요한 영성가들에게 그리스도 중심의 신비 체험은 보편된 관점이 되었다.

 

중세 중기에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했던 스콜라 신학은 교의신학을 낳는 데 크게 기여하였지만, 영성 생활에서는 장애가 되었다. 교회 안팎의 사람들이 신앙 문제까지도 이성으로 따지기 시작하면서 직관적 인식과 체험을 따르는 영성 생활은 설 자리를 점점 잃게 되었다. 결국 고대에 수도자들이 교부들의 성경 주석과 성경을 중심으로 실천하였던 관상 생활은 일부 수도원에서 그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1084년에 성 브루노(1030-1101년)가 설립한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은 훗날 성경과 영성 생활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베네딕도 수도 규칙을 변형한 규칙과 함께 공주 생활 수도원 안에서 독수 생활을 실천한 카르투지오회는, 성경 필사 작업을 주로 하면서도 침묵과 고독 가운데 보장된 많은 시간을 통해 성경을 깊이 묵상할 수 있었다. 결국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은 훗날 ‘거룩한 독서’ 방법론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한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월호(통권 442호)]

 

 


 

 

성경과 영성

(14) 거룩한 독서는 영성 생활 발전에 어떤 도움을 주었을까?

전영준 바오로 신부

 

 

성경에서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뵈러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대표 장소로 어느 곳을 제시할까? 필자는 ‘산’을 정답으로 꼽고 싶다. 성경에서는 하느님께 선택된 민족이나 하느님의 일꾼들이 때로 ‘광야’에 나아가 하느님을 체험하는 일화를 전해 준다. 하지만 인간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세상을 벗어나 광야에 나가 있을 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수동적 개념을 더 강하게 느낀다.

 

반면 산은 올라가는 수고로움이 필요한 장소이다.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머무르고 계신다고 생각하는 하늘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만 그분을 체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산에 오른다. 비록 하느님을 만나는 최종 순간은 그분의 은총에 의한 수동적 순간이지만, 광야보다 산은 능동적으로 올라가야 하는 과정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합일하고자 하는 인간의 영적 여정을 묘사하는 데 많은 영성 작가가 광야보다 산을 선호하였다고 볼 수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뒤에 하느님과 계약을 맺기 위해 시나이 산에 올랐다(탈출 19장 참조).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저서 《모세의 생애》에서 하느님을 만나러 시나이 산에 오르는 모세의 등정을 가지고 하느님과의 합일의 영적 여정을 설명하였다. 또 십자가의 요한도 저서 《카르멜의 산길》에서 카르멜 산 등정의 그림과 비유를 통해 자신의 신비 체험을 해설하였다.

 

땅과 하늘을 연결한 층계, 수덕을 증진시켜 완덕에 이르는 여정

 

우리는 성경에서 땅과 하늘을 연결하여 소통할 수 있게 하는 또다른 표상을 발견할 수 있다. 야곱은 베텔에서 잠을 자다가 꿈 속에서 땅에서 출발한 층계가 하늘에 닿아 있고, 천사들이 그 층계를 따라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는 것을 보았다(창세 28,12 참조). 그런데 영성의 역사에서 수도자들은 이런 층계의 표상을 ‘사다리’로 바꾸어 수도자들이 수덕을 증진시켜 완덕에 다다르는 여정을 표현하였다.

 

6세기 서방 교회 수도자인 누르시아의 베네딕도는 저서 《수도 규칙》에서 성경 말씀의 권고에 따라 겸손의 덕을 닦아 나아갈 때, 베텔에서 야곱이 보았던 천사들이 오르내리던 사다리를 영적 발전의 증진을 가늠하는 척도로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수도 규칙》 7,5-9 참조). 7세기 동방 교회 수도자인 요한 클리마코는 저서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에서 수도자들이 현세 생활을 벗어나 수덕의 단계를 거쳐 관상의 높은 경지에 이르는 여정을 서른 개의 사다리로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이런 가운데, 12세기 서방 교회 수도자인 귀고 2세가 ‘거룩한 독서’로 불리는 ‘렉시오 디비나’의 체계를 더욱 분명하게 잡아 놓았다. 귀고 2세는 11세기 말에 창립된 카르투지오 수도회의 제9대 원장으로 훌륭한 영성 작품을 남긴 인물이다. 귀고 2세는 저서 《수도승들의 사다리》에서 봉쇄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그들의 고유한 영적 수행인 관상 생활을 실천해 나가는 데 유용한 네 단계의 사다리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수도원의 거룩한 독서 전통을 접목하여 성경에서 출발하여 관상에 다다라 하느님과 합일하는 여정의 단계를 ‘독서-묵상-기도-관상’으로 구분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아마도 귀고 2세 역시 사다리의 표상이 지상에서 천상에 이르는 인간의 영적 여정을 효과 있게 잘 설명한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귀고 2세가 사다리 표상을 가지고 거룩한 독서의 발전 단계를 자세히 구분지어 묘사하여, 수도자뿐 아니라 평신도도 거룩한 독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구분 단계는 오늘날까지 큰 영향을 끼쳐 거룩한 독서의 올바른 수행법으로 인식되고 있다.

 

거룩한 독서의 네 단계 ‘독서-묵상-기도-관상’

 

첫 번째 ‘독서’ 단계는 먼저 성경을 펼쳐 읽어 나가는 단계이다. 고대 수도자들의 전통에 따라 성경을 소리 내어 읽든지, 오늘날 같이 눈으로만 읽든지, 일단 성경을 먼저 읽는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는 온 정성을 다 기울이고, 온 힘을 집중하여 읽어야 한다. 대충 읽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는 마음가짐으로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이때 독서자는 성경에서 복된 삶의 감미로움을 추구하는 자세로 독서에 임해야 한다. 산해진미와 진수성찬이 있어도 먹어 봐야만 맛을 아는 것처럼, 성경 말씀에 담긴 좋은 보화와 귀중한 가르침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단계는 외부의 감각 기관을 통해 이루어지는 초보 단계에 불과하다.

 

두 번째 ‘묵상’ 단계는 성경 말씀에 감추어진 진리를 탐구하는 단계이다. 성경 말씀은 문자적 의미뿐 아니라 영적 의미도 담고 있다. 특히 영적 의미는 인간 이성의 도움을 받아 이면에 감추어진 의미를 알아듣고자 노력해야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난 후, 능동적으로 최선을 다해 성경 말씀에 담긴 진리를 찾도록 다양한 시도를 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 끝에 묵상자는 성경 말씀의 의미, 즉 성경에 감추어진 진리를 통해 복된 삶의 감미로움을 깨달을 수 있다. 이는 마치 사람이 입에 들어온 음식을 잘게 씹어 분해하는 과정과 비교할 수 있다. 결국 이 단계는 사람의 중심인 내면에서 내적 감각 기관을 사용하는, 조금 발전한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세 번째 ‘기도’ 단계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여 깨달은 바를 하느님께 정성을 다해 봉헌하는 단계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기를 바라시고 우리를 선으로 이끄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기도자는 복된 삶의 감미로움이 은총으로 베풀어지기를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 이것은 음식을 물리적으로 씹는 과정을 넘어서 화학적으로 음식에 담긴 맛을 음미하는 것과 같다. 기도 단계부터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시어 우리를 이끄시도록 그분께 청하는 것이 강조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의 갈망을 은총으로 채워 주십사고 기도로 청하게 된다. 따라가 이 단계는 더 진보한 단계라고 볼 수 있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인 ‘관상’ 단계는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 들어 올려져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는 단계이다. 이때 관상자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한없는 감미로움을 맛보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되어 복된 삶의 감미로움을 진정으로 맛보게 된다. 음식을 먹는 최종 목표가 섭취한 음식으로 활동 에너지를 얻고자 하는 것이듯이, 성경 독서에서 출발하여 음미했던 하느님 말씀이 마침내 우리에게 비교할 수도 없는 감미로운 환희를 은총으로 베풀어 주시어, 우리는 영적으로 큰 위로를 받고 우리의 영혼이 생동감 넘치고 활기를 띠게 된다. 관상의 정점에서 우리는 환희와 기쁨과 함께 은총으로 하느님과 합일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 단계는 완성을 이루는 최종 단계라고 볼 수 있다.

 

귀고 2세는 하느님과 합일하기를 갈망하는 영혼들에게 사다리 비유를 통해 하느님께 다가가는 방법을 체계 있게 설명하고자 하였다. 사다리의 한쪽 끝은 땅에 닿아 있고, 다른 한쪽 끝은 하늘에 닿아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영혼은 누구라도 사다리를 오르면 된다. 네 개의 계단으로만 구분된 이 사다리를 오르려면 처음에 능동적으로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면도 있지만, 더 높이 올라갈수록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가야 하는 수동적인 면이 생긴다. 그러므로 기도 단계부터는 능동적 수덕 생활에서 수동적인 은총의 신비 생활로 잘 전환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귀고 2세가 어째서 거룩한 독서와 신비 체험을 함께 결합하여 설명하려 했는지 그 절묘한 의도를 살펴봐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기도를 잘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나 관상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방법을 터득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수덕 생활을 실천한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방향을 잃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혹시 출발점에서 뭔가 잘못되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다. 귀고 2세는 거룩한 독서와 신비 체험을 접목하는 첫 단계가 성경 독서라고 제시하였다. 모든 기도나 하느님을 만나러 나가는 여정의 출발점이 성경이라는 의미이다.

 

성경에서 출발한 기도라야 올바른 기도가 될 수 있고, 성경에서 출발한 여정이라야 하느님을 올바로 찾아갈 수 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무턱대고 하느님을 찾아 나섰고, 무작정 기도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성경 말씀과 영성 생활이 분리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점이다. 진정으로 영적 발전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성경 말씀을 가까이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

 

[성서와 함께, 2013년 2월호(통권 443호)]

 

 


 

 

성경과 영성

(15) 거룩한 독서의 각 단계는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가?

전영준 바오로 신부

 

 

진정한 영성 생활은 발전 단계를 거쳐 가는 영적 상승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무조건 하느님을 향한 상승의 여정을 걷고자 노력하면 모두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을 얻을 수 있을까? 혹시 성경에서 그 실패 사례를 찾아볼 수 있을까?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바람으로 열심히 위로 올라가지만 실패했고, 하느님의 진노까지 얻은 경우가 ‘바벨 탑 사건’이다.

 

동쪽에서 이주해 오다가 신아르 지방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자기 이름을 널리 알리려고 했다. 또 그렇게 해서 흩어지지 않고 함께 모여 살고자 하였다(창세 11,2-4 참조). 이런 시도는 겉으로 보기에 엄청난 성읍과 탑을 건축하여 자신들의 위대함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은 것이겠지만, 그 내면에는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곳까지 다다르는 높은 탑을 짓고 그곳에 올라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교만이 숨겨져 있다.

 

하느님을 향하여 산, 사다리, 탑을 맹목적으로 또는 교만한 마음으로 오른다면, 성덕의 발전을 통한 완덕을 완성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에 떨어져 하느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결국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말을 뒤섞어 놓으시어 그들은 여러 곳에 흩어져 살 수밖에 없었고, 성읍도 탑도 완성할 수 없었다(창세 11,7-8 참조).

 

한편 우리가 하느님께 올라가야만 그분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경우도 있다. 야포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무르던 베드로는 옥상에서 기도하던 중에 무아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환시 속에서 온갖 짐승이 담긴 그릇을 보았고, 그것들을 잡아먹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인이지만 과거 유다교 시절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셨다는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 짐승들이 여전히 속되다고 여기면서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였다(사도 10,9-15 참조).

결국 신앙인이 하느님을 향해 올라가더라도 교만하면 실패한다. 선입견으로 인한 무지에 사로잡혀 있으면 하느님께서 찾아오셔도 그분의 은총을 받지 못한다. 성경은 이러한 점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승의 여정을 단계별로 제대로 밟아 걸어가야 하고, 열린 마음으로 베풀어 주시는 은총을 잘 받아야 한다. 거룩한 독서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자 할 때도 각 단계가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하는지 잘 살펴야만 성공할 수 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귀고 2세는 저서 《수도승들의 사다리》에서 거룩한 독서의 각 단계를 잘 이해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예수님의 산상 설교 중한 구절을 강조하였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이는 상승의 영적 여정을 걸어가서 완덕에 이르러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출발부터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현세구복(現世求福) 같은 사심을 갖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을 지녀야 영적 여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깨끗한 마음을 지닌 영혼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거룩한 독서의 첫 번째 단계인 ‘독서’에서, 영혼은 이성의 능력으로 성경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서 어떻게 하느님께 나아갈지 묻고, 그 답을 찾기 시작한다.

 

귀고 2세는 거룩한 독서의 두 번째 단계인 ‘묵상’에서도 몸이 아니라 마음이 깨끗한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씻지 않은 손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지만, 입에서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힐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마태 15,18-20 참조). 악한 행실을 하지 않는다 해도 마음이 정화되지 않아 불손한 생각이 남아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마음을 깨끗이 하고 묵상에 임해야 하느님과 만나는 일이 얼마나 기쁘고 영광스러운지 잘 깨달을 수 있다. 하지만 깨끗한 마음이 영혼에게 감미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이교인도 묵상을 하여 선을 발견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혼은 스스로 감미로움에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닫고, 억지로 노력하기보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거룩한 독서의 세 번째 단계인 ‘기도’이다. 마음을 깨끗이 한 공로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야 그분을 만난다. 그러므로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묵상하면서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더욱 커진 것은 영혼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불타올랐기 때문이다.

 

여정을 출발한 영혼이 마음을 깨끗이 하여 영적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더욱 불태우면, 하느님께서 감동하시어 그 영혼을 만나러 급히 오신다. 그때부터 거룩한 독서의 네 번째 단계인 ‘관상’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 단계에 도달하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오로지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시어 우리에게 개입하실 때 이루어지며, 그 시간도 하느님께서 정하시기에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다만 그 결과, 육이 영에 대항하지 못하면서 완전히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을 공동으로 체험할 수 있다.

성경을 읽는 최종 목적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

 

이렇게 깨끗한 마음을 지니고 성경 독서에서 출발하여 상승의 단계를 밟아 하느님과 만나게 되지만, 귀고 2세는 거룩한 독서의 각 단계가 시간과 인과관계 순서에 따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곧 거룩한 독서는 마지막 단계에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출발해야지, 아무런 목표점도 없이 첫 단계를 출발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또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고 싶은 마음이 급해 첫 단계에서 제대로 출발하지 않고 서두른다면 그 결과가 제대로 나올 수 없다.

 

다시 말해 음식을 먹는 목적은 영양분을 얻기 위해서인데 배탈이 나서 영양분을 하나도 흡수하지 못한다면 음식을 먹은 의미가 없다. 또 음식을 먹지도 않은 상태에서 영양분이 몸에 흡수되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경을 읽는 최종 목적은 하느님을 만나는 데 있다. 아무 목적 없이 성경을 읽는 것은 의미 없는 행동이고, 하느님과 만나기를 원하면서도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그분을 절대 만날 수 없다. 혹시 하느님을 만났다고 생각되더라도 그것은 악의 유혹에 현혹되어 진짜 체험을 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묵상을 전제하지 않고 독서를 한다면 무미건조한 일이다. 이방인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으나 하느님과의 친밀한 만남이 없이는 묵상으로 발전시킬 수 없으므로, 그들은 성경을 읽는 참된 의미에 도달하지 못한다. 또 독서를 제대로 하지 않고 서둘러 묵상에 들어간다면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성경 말씀을 깊이 새기지 않고 선입견이나 단편적 지식만으로 자기만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묵상 없이 곧바로 기도로 들어간다면 열정 없는 미지근한 기도가 될 것이다. 합당하게 자신을 정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바치는 기도이기에 공허할 수 있으며 은총을 제대로 받을 수 없다. 기도로 발전하지 않는 묵상도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묵상이 이성의 작용에 비중을 더 두고 있기 때문에 행동보다 생각에 머무를 것이고, 기도를 통해야만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성덕이 증진되면서 영적 열매를 잘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에서는 두 가지 면을 찾아 볼 수 있다. 기도를 열정적으로 드릴 때 어느 순간 관상의 단계에 다다른다. 그렇기 때문에 통상 기도를 드리지 않은 상태에서 관상의 단계에 들어갈 수는 없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를 드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당신이 원하시기만 하면 기도 단계를 아주 단순화하거나 생략한 상태에서도 은총을 통해 관상의 단계에 다다르게 하신다. 다만 이는 하느님의 결정에 달렸다. 우리가 기도를 소홀히 하면서 관상의 단계에 다다르게 해 달라고 청할 일은 분명히 아니다.

 

‘거룩한 독서’라고 ‘독서’에만 강조점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귀고 2세는 고대 수도자들의 거룩한 독서 전통을 하느님과 만나는 영적 여정으로 승화시켰다. 거룩한 독서는 독서를 바탕으로 출발하여, 묵상에서 하느님의 위로를 찾고자 숙고하고, 기도에서 하느님의 위로를 직접 체험하며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한다. 관상은 모든 단계를 잘 거친 이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과 복이다.

 

그러므로 남의 묵상이 적힌 책만 읽으면서 거룩한 독서를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 종류의 책을 읽는 것은 자신이 묵상하는 데 도움을 얻고자 하는 참고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직접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이 모든 과정을 성실히 실천하고 있다고 여기신다면, 반드시 은총을 주시어 관상을 통해 당신과 만날 수 있도록 허락하실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3년 3월호(통권 444호)]

 

 


 

 

성경과 영성

(16) 중세 후기 이후 성경을 이해하는 관점은 어떻게 변했을까?

전영준 바오로 신부

 

 

중세 유럽에서 최초로 설립된 대학은 무엇이며, 언제 어느 곳에 세워졌을까? 역사학자에 따라 견해 차이가 약간 있지만, 일반적으로 1088년에 이탈리아 북부 볼로냐에 설립된 볼로냐 대학을 중세 유럽 최초의 대학으로 본다. 당시 볼로냐 대학은 교회법과 시민법을 중심으로 법학을 가르치는 곳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프랑스 국민은 다르게 생각한다. 그들은 11세기에 이미 파리에 대학이 설립되었다고 주장하나 흔히 파리 대학은 1109년에 설립되었다고 본다. 파리 대학은 철학과 신학을 주요 과목으로 가르치면서 유럽 전역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중세 이후 교회사에서 중요한 신학자들 대부분이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는 사실만으로 파리 대학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한편 12세기 중반에 잉글랜드 옥스퍼드에 옥스퍼드 대학이 설립되었다. 이 대학은 파리 대학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사람들이 활발하게 연구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설립되었는데, 주로 파리 대학과 볼로냐 대학의 체계를 본받았다. 옥스퍼드 대학은 신학, 법학, 의학, 교양 과목을 가르치면서 중세에 아주 중요한 유럽 대학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결국 13세기 들어 몇몇 교황이 문서를 통해 이 대학들의 운영과 학위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명실공히 신학을 공부하고 석·박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교회 관련 대학의 지위를 인정받고 그 입지를 확실하게 굳혔다.

 

중세 초기에 많은 사람이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하여 무지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비교해 본다면, 중세 중·후기에 대학의 설립으로 많은 사람이 교육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큰 변화였다. 이 분위기가 교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학문 연구는 대학 설립 이전부터 시도되었다. 이미 11세기부터 교회 안팎에서는 고대 철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그 결과 12세기부터 교회에서도 스콜라 철학과 스콜라 신학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 분위기가 대학 설립과 맞물려 이성을 통해 사변적으로 신학을 연구하는 노력이 폭발하듯 증가하였다.

 

수도원에서는 귀고 2세 수도원장에 의해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영적 여정을 걸어가는 전통 방법을 훌륭하게 집대성하여 정점을 찍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대학을 중심으로 신학을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일반 학자들뿐 아니라 수도원을 제외한 교회 내에서 성경을 거룩한 독서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보다 이성 작용으로 탐구하는 지성적 활동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게다가 13세기에 기존의 수도회와 전혀 다른 형태를 가진 탁발 수도회가 출현하면서 교회에서 성경을 다루는 입장에 일대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대학과 탁발 수도회의 설립으로 거룩한 독서의 전통이 축소되었다

 

6세기 초에 누르시아의 베네딕도에 의해 설립된 베네딕도 수도회를 시작으로, 12세기까지 서방 교회에서 많은 수도회가 설립되었다. 그중에 거의 모든 수도회는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을 따랐다. 외형에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 거룩한 독서를 중심으로 한 전통 수도 생활을 실천하였다. 그런데 보편 교회 당국에서는 너무 많은 수도회가 무분별하게 난립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를 소집하여 새로운 수도 단체를 설립할 수 없다는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새 수도회 설립 금지 결정이 내려졌는데도 라테란 공의회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베네딕도회 계열의 수도회와 형태를 달리하는 새로운 수도회가 설립되고 교회 인준까지 받았다. 교황 호노리오 3세는 1216년에 도미니코 수도회를 인가하였고, 1223년에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제출한 규칙을 승인하였다. 두 수도회는 복음에 따른 가난의 정신대로 살아가는 청빈 생활을 강조하여 ‘탁발 수도회’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도미니코 수도회는 기존 수도회의 전통인 거룩한 독서와 육체 노동을 오히려 소홀히 하는 대신 거룩한 진리에 대한 연구를 강조하면서 수도원 공동 기도와 전례도 축소하거나 관면을 허가하였다. 반면에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육체노동을 유지하면서 설교와 선교 활동을 강조한 수도 규칙을 마련하였다. 두 수도회의 초창기 모습은 청빈 생활 때문에 ‘탁발 수도회’라고 불린 것을 제외하고는 특성과 모습이 상이하였다. 도미니코 수도회는 이미 스콜라 철학의 출현을 염두에 두고 이단자를 개종시키기 위해서라도 학문 연구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에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기존 수도회와 유사한 모습을 지니면서 수도회 개혁 차원에서 단순하게 청빈 생활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각 수도회는 교황청의 인준을 받은 지 20년이 지나기도 전에 학문 연구 분야에 뛰어들어 신학 연구에 매진하기 시작하였다. 1230년을 전후로 두 수도회는 파리 대학 근처에 수도원을 설립하여 신학 강좌를 개설하였다. 그 후 수도회 소속의 많은 신학자가 기존 대학과 수도원에서 신학 연구와 강의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대표 학자로는 도미니코회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프란치스코회의 보나벤투라를 꼽을 수 있다.

 

12세기에 시토회 수도자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가 성경의 이해와 활용에서 사변적 방법론을 거부하고 거룩한 독서의 묵상과 관상 방법론을 선호하는 동안, 13세기에 파리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자들은 탁발 수도회 수도자들과 함께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주석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4세기 잉글랜드에서 출현한 신비 체험가와 신비 신학자들이 과거 전통에 따른 성경 묵상을 시도하면서 저술하였으므로 옥스퍼드 대학을 중심으로 성경 연구와 교육 활동이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14세기 말엽에 대학을 중심으로 성경 연구 작업이 학문의 대상으로 다시금 활기를 띠게 되었다. 결국 중세 중·후기에 대학과 탁발 수도회가 설립되면서 성경을 영성 생활에 바로 접목하려는 전통은 많이 축소되었고 거룩한 독서의 경우 영적 관점까지 흔들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가 성경의 가르침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왔다

 

그런 가운데 14세기 유럽에서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되어 교회의 성경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되면서 나타난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중세 스콜라 철학과 신학이 지닌 지성 중심의 분위기를 의지 중심으로 바꾸고자 시도하였다. 하지만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고전 문헌에 대한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고, 이 바람이 교회까지 불면서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의 고전 문헌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연구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출신 로렌조 발라는 르네상스 시대의 탁월한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이다. 수사학자이자 문법학자였던 발라는 오늘날에도 통용될 수 있는 고전 문헌에 대한 원문 대조 비평과 문학적 분석 방법론을 이미 15세기에 적용하였다. 그는 라틴어 역본인 불가타 성경과 그리스어 원문 신약성경을 비교하여 라틴어 번역에 심각한 오류가 있는 부분을 찾아내 지적하였다. 또 그리스어 원문의 도움으로 라틴어 역본 불가타 성경에서 알아듣기 어려운 부분을 쉽게 주석하여 《신약성경 주석》을 출간하였다. 이 저서는 가톨릭 교회에서 성경 본문 비판 방법론을 처음으로 적용하여 저술한 작품이었다.

 

한편 네덜란드 출신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도 15세기 후반부터 활동하면서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에라스무스는 로렌조 발라의 작품을 접하면서 문헌 비평의 방법에 눈을 뜨고 난 뒤 성경 연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는 여러 개의 신약성경 수사본을 비교 분석하여 신약성경 원문 비평본인 《신약성경》을 출판하고, 그 작품을 교황 레오 10세에게 헌정하였다. 또 성경을 직역하지 않고 번역자의 개인 견해가 들어가는 의역 형태로 해설을 첨가한 성경 해설서 《의역》을 출판하였다. 이렇게 라틴어 역본 성경에 대한 비판은 처음에는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학문을 실질적으로 연구하는 처지에서 단순히 외적 오류만을 지적하여 성경 번역에 대한 완성도를 높여 성경의 가르침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좋은 결과도 가져왔다.

 

결국 중세 중·후기에 수도원 전통의 거룩한 독서는 수도원 울타리 안에서만 실천되었다. 수도원 밖에 있는 그리스도인과 일반인은 성경을 학문의 대상으로만 생각하여 호기심을 충족하는 성경 주석 연구에 매진하면서 성경에서 더는 영성 생활의 길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영향으로 고전 문헌 연구의 분위기가 성경 본문까지 미치게 되자, 번역 오류뿐 아니라 성경 본문 비판본의 문제까지 제기되고 성경의 권위마저 도전받는 듯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를 중심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찾고자 했던 인문주의의 취지 때문에 외적인 성경 본문보다 내적인 성경 내용을 통해 성경의 관점에서 본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면서 성경을 통해 다시 영적 여정으로 들어서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 결과 근세에 이르러 새로운 성경 묵상 방법론이 출현하였다.

 

[성서와 함께, 2013년 4월호(통권 445호)]

 

 


 

 

성경과 영성

(17) 근세에 성경 묵상은 어떤 과정을 거쳐 체계화되었을까?

전영준 바오로 신부

 

 

가톨릭 교회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책은 무엇일까? 15세기경 토마스 아 켐피스가 저술한, 우리말 번역본 제목으로 《준주성범》이라 하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 전 세계 교회뿐 아니라 한국 교회에서도, 신학교와 수도원 및 일반 신자 가정에서 꾸준하게 읽혀 온 베스트셀러이다.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 오면서 교회 안팎에서 많은 변화가 감지되었다. 스콜라 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극단으로 치달았던 사변적 영성 생활에 신앙인들은 거부감을 갖기 시작하였다. 독일권 신학자들이 지나치게 사변적으로 이론화한 신비신학은 사람들이 알아듣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그 자체에 모순과 이단 성향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영성 생활을 삶에서 실천해야 하는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북유럽에서 먼저 시작되었던 실천적 영성 생활 분위기는 삽시간에 유럽 전역에서 나타났다.

 

하느님 중심의 중세 영성 생활은 헤아리기 어려운 하느님의 추상적 개념을 탐구하는 데 집중하여 학문과 생활을 조화시키지 못해 영적 발전을 더디게 했다. 근세 영성 생활은 서서히 그리스도 중심으로 전환하였다. 신앙인들은 초세기에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나자렛 예수님을 묵상하는 것이 하느님의 개념을 헤아리고 이해하는 데 훨씬 쉽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특히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그리스도의 모습과 행적을 모방하는 영적 여정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 변화에는 근세 초기에 출현한 휴머니즘(인본주의)도 한몫을 하였다. 휴머니즘은 인문주의로 불리는 고전 문헌 연구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 회복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교회에서 그리스도교 휴머니즘이 출현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곧 공생활을 하는 인간 예수님에게 관심을 집중하여 그분을 본받고 그분의 행동을 모방하며 영성을 실천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결국 이러한 분위기에서 새로운 성경 묵상 방법이 나타났다. 신앙인들이 성경을 묵상할 때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중심으로 추리적이고 정감적으로 쉽게 묵상하는 방법을 찾아나선 것이다.

 

근세에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영성 훈련, ‘새 신심 운동’

 

중세 중기 이후 스콜라 신학의 영향으로 사변적 분위기가 교회 안에서 주류를 이루면서, 귀고 2세가 단계를 구체화시켰던 렉시오 디비나는 일부 수도원에서만 실천되었다. 교회 안에서 묵상 방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 않았기에, 신앙인들은 성경 독서 다음으로 하는 묵상 단계를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다만 수도자들은 오랜 수도 전통에 따라 스스로 직관에 가까운 묵상을 실천할 뿐이었다.

 

근세 들어 네덜란드에서 공동생활 수도회와 관련하여 시작되었던 ‘새 신심 운동’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것이 ‘영성 훈련’이란 실천 영성으로 발전하면서 지성보다 의지 중심의 영성적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 맥락에서 몇몇 영성 작가는 성경 묵상 중심의 영성 생활을 소개하는 작품을 저술하였다. 주로 성경을 어떤 입장에서 바라보고 읽어야 하는지와 어떤 방법을 통해 성경을 체계적으로 묵상할 수 있는지 소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새 신심 운동의 가장 대표 인물인 토마스 아 켐피스는 수도자들의 수도 생활을 돕고자 저술한 자신의 저서 《준주성범》에서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라고 권고했다. “성경에서는 진리를 찾을 것이요, 문체를 따질 것은 아니다. 성경은 성경을 쓴 그 정신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는 말의 정묘함보다도 유익한 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 우리는 호기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므로 자주 해를 받는다. 그대로 읽어 나가도 좋을 것을, 알아들으려고 하고 해석하려 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아 유익을 얻으려면 겸손되이 읽고 순직하게 읽고 또한 성실하게 읽어라”(《준주성범》 제1권, 제5장). 아울러 그는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힘쓸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묵상함이다”(《준주성범》 제1권, 제1장)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본받을 것을 강조하였다.

 

한편 토마스 아 켐피스의 지인이었던 그란스포르트는 묵상이 어려운 수도자들을 위하여 《묵상의 사다리》를 저술하였다. 그는 그 책에서 거의 최초의 체계적 묵상 방법으로 여겨지는 단계적 묵상 방법을 묘사하였다.

 

첫 번째는 준비 단계이다. 두 개로 세분되는 이 단계에서 묵상자는 묵상 주제와 관련 없는 생각을 제거하여 묵상에 가장 적합한 상황을 조성한다. 두 번째는 상승 단계이다. 열여섯 개로 세분되는 이 단계에서 묵상자는 자신의 지성과 판단 및 의지를 순차적으로 훈련하면서 실질적으로 묵상한다. 세 번째는 최종 단계이다. 세 개로 세분되는 이 단계에서 묵상자는 전체 묵상 과정에서 자신의 열정적 염원을 하느님께 맡겨 묵상의 전 과정을 총정리한다. 수도자들은 이렇게 체계화한 성경 묵상으로 수도 생활을 개혁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란스포르트, 바르보, 시스네로스가 제안한 묵상 방법

 

북유럽에서 실천된 그란스포르트의 묵상 방법은 파리 근교에 위치한 베네딕도 수도원 원장 몽베어에 의해 계승되고 발전하여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몽베어는 《영적 로사리오》에서 수도자가 자신의 신심 생활의 장미 정원에서 아주 중요한 세 가지 화단인, 성무일도와 성체성사 및 묵상을 가꾸는 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하였다.

 

첫째, 엄지손가락으로 다른 손가락을 문지르면 시편을 기도하는 동안 연관된 말씀이 수도자가 열망했던 경건한 생각과 의향을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둘째, 같은 방법으로 내적 신심과 함께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을 도울 것이라고 하였다. 셋째, 지성이 묵상 주제에 집중하는 것을 도울 것이라고 하였다. 이때 몽베어는 그란스포르트의 방법을 거의 가져와서 묵상 단계에 적용하였는데, 사다리의 여러 단계와 그것에 상응하는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취한 다양한 예로 이루어진 지성의 행동을 설명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북유럽에서 전개되던 새 신심 운동과 별개로, 파두아에 위치한 베네딕도 수도원 원장 바르보가 묵상 방법에 관해 언급하였다. 바르보는 《묵상 양식》에서 기도의 세 가지 유형을 언급하였다.

 

첫째, 소리 기도는 초보자에게 가장 적합하다. 둘째, 묵상은 기도의 두 번째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적합하다. 셋째, 관상은 묵상이 아주 잘 진행되었을 경우 도달할 수 있다. 결국 바르보의 언급은 묵상 방법에 대한 구체적 감각이라기보다 묵상에 관한 묶음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바르보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요청으로 스페인 발라돌리드에 위치한 베네딕도 수도원 수도자들에게 묵상 방법을 체계적으로 가르쳐 주려고 이를 저술하였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사용하는 묵상 방법이 스페인까지 알려지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체계적 묵상 방법은 남유럽의 수도 생활 개혁에도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스페인에서는 훗날 발라돌리드에 위치한 베네딕도 수도원에 속한 시스네로스가 체계적 묵상 방법을 넘어서 총체적 영성 훈련과 관련한 표준 지침서에 해당하는 작품을 저술하였다. 시스네로스는 《영성 생활을 위한 훈련》에서 세 주간에 걸친 영성 훈련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시스네로스의 영성 훈련 방법은 경당에 들어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면서 정해진 주제를 묵상하고, 성경을 암송하며 잠심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경당을 나서는 것이다. 정해진 주제는 주간마다 다르다.

 

첫 번째로 정화 주간에는 거룩한 두려움과 통회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관련한 주제를 묵상하였다. 두 번째로 조명 주간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나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주제를 묵상한다. 세 번째로 일치 주간에는 현세에서 초탈하여 하느님만 섬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양한 하느님의 속성에 관한 주제를 묵상한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 인간 영혼은 오직 사랑으로 하느님께 상승해 나아간다. 시스네로스는 구세주의 생애에 관한 세 가지 관상 방법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첨가하였다. 즉 우리는 처음에 구세주의 거룩한 인성을 바라보다가, 다음으로 하느님이며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구세주의 인성을 넘어 신성에 대한 지식과 사랑으로 상승한다는 것이다.

 

근세 영성 작가들이 저술한 체계적 묵상 방법에 관한 작품들은 수도자가 자신의 수도 생활을 쇄신하여 영성 생활 발전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 체계적 묵상 실천은 영적 발전을 갈망하는 평신도에게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신심 깊은 평신도는 영성 훈련을 쌓기 위해 수도원을 찾아다니기도 하였다.

 

다만 동시대에 활동하였던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도 성경 독서를 권고하였지만, 그들의 목적은 달랐다.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인이 세속의 이념으로부터 신앙을 지키기 위해 믿음을 재확인하는 차원에서 성경을 읽으라고 강조한 것이 아니라, 고전 문헌에 관심을 갖고 그것에서 삶의 교훈을 얻고자 하는 차원에서 성경을 읽으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인문주의는 영성 생활 발전에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

 

결국 근세에 나타났던 그리스도의 생애를 중심으로 체계적 성경 묵상을 실천하는 영성 훈련의 분위기는, 르네상스(문예 부흥)와 종교 개혁으로 인한 이교적·이단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영성 생활을 준비시켰다고 볼 수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5월호(통권 446호)]

 

 


 

 

성경과 영성

(18) 근세의 정감적 성경 묵상 방법은 어떻게 출현하였는가?

전영준 바오로 신부

 

 

16세기 유럽에서 가톨릭 교회를 화들짝 놀라게 한 역사적 사건은 바로 ‘종교 개혁 운동’이다. 16세기 초중반에 독일의 루터는 루터 교회를, 스위스의 츠빙글리와 칼뱅은 개혁 교회를, 영국의 왕 헨리 8세는 영국 국교회를 세웠다. 이렇게 밖으로 개신교의 도전에 직면했던 가톨릭 교회는 안으로도 교회 쇄신의 요청에 귀 기울여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 결과 가톨릭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를 소집하였다. 공의회에서는 우선 개신교를 단죄하였다. ‘오직 성경만으로’라는 표어를 강조한 개신교의 주장에 맞서, 가톨릭 교회 신앙의 원천은 성경(聖經)뿐 아니라 성전(聖傳)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그 외에 원죄, 의화, 성사, 미사, 성인 공경 등에 관한 교의도 분명하게 발표하였다.

 

종교 개혁 운동의 영향과 반작용은 가톨릭 교회의 영성 생활에도 직간접으로 나타났다. 종교 개혁 운동의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은 스페인에서는 기존에 펼친 새 신심 운동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적 영성 훈련의 형식이 더욱 발전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가 그리스도교인의 성경 묵상 생활을 돕는 결실을 맺은 것이다. 한편 종교 개혁 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스위스와 프랑스에서는 프란치스코 드 살이 개신교로부터 가톨릭 신앙인을 보호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뿐 아니라 쉴피스회가 트리엔트 공의회의 교회 쇄신 정신을 계승하여 가톨릭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하고 발전하고자 노력하면서 또 다른 성경 묵상 방법을 소개하였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저서 《영신수련》을 통해 동시대뿐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교인이 성경 묵상과 기도 생활을 실천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 가는 시기에 정립된 체계적 성경 묵상 방법은 지성과 정신을 사용하는 추리적 묵상 기도의 형태를 지녔다. 하지만 이냐시오는 추리적 묵상 기도를 기반으로 삼으면서도 의지와 마음을 사용하는 정감적(情感的) 묵상 기도를 실천하여 성경 묵상을 심화시켰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묵상 방법에 대해 주의할 점으로 “인간적 추리에 의하든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든지 간에, … 영혼을 풍족하게 하고 또 만족시키는 것은 풍부한 지식이 아니라, 사물의 내용을 깊이 깨닫고 맛보는 것”(2항)이라고 언급하였다. 또 “지성으로 추구할 때보다도 의지의 행동에서, 즉 말로나 마음으로 우리 주 하느님이나 성인들과 더불어 담화할 때, 더 큰 존경을 표시해야 한다”(3항)고 강조하였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기도의 세 가지 방식을 소개하는데, 그중에서 그리스도교인이 실천할 수 있는 대표적 성경 묵상 방법은 육신의 오관에 상응하는 영적 오관을 사용하여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것이었다(247-248항 참조).

 

한 가지 예로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시는 이야기(루카 7,36-50 참조)를 오관으로 묵상해 보자(《영신수련》 282항 참조). 먼저 예수님께서 초대받으신 바리사이의 집 안 광경을 영적 눈으로 바라보자. 다음으로 예수님 앞에 마련된 음식을 영적 입으로 먹어 보자. 이때 한 여자가 들고 온 옥합 안에 든 향유의 향기를 영적 코로 맡아 보자. 또 여자가 눈물과 머리카락으로 씻겨 드리고 입 맞추고 향유를 발라드린 예수님의 발을 영적 촉각으로 느껴 보자. 끝으로 그런 광경을 바라보면서 수군덕거리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영적 귀로 들어 보자. 이 정감적 묵상 과정을 통해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7,48)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으면서 주님을 향한 열정과 사랑이 더욱 솟아오를 것이다.

 

결국 이냐시오의 정감적 묵상 방법은 당시의 수도자뿐 아니라 평신도가 성경 묵상을 실천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오늘날에도 이 방법으로 성경 묵상을 실천하는 그리스도교인이 많다.

 

프란치스코 드 살 성인의 묵상법

 

가톨릭 교회에서 거의 최초로 평신도 그리스도교인의 영성 생활에 도움을 주는 작품을 저술하였다고 일컬어지는 프란치스코 드 살은, 저서 《신심 생활 입문》에서 간단한 묵상 방법을 제시하였다. 프란치스코는 무엇보다 묵상을 다음과 같이 실천하라고 권고하였다. “내가 그대에게 권하는 바는 마음의 기도 즉 묵상, 그중에서도 주의 생애와 수난에 대한 묵상이다”(《신심 생활 입문》 Ⅱ, 제1장).

 

프란치스코는 묵상의 초보자인 평신도에게 먼저 묵상을 잘할 수 있는 세 가지 준비 단계를 설명하였다. 첫 번째, 묵상자는 자신이 하느님 대전에 나와 있다는 것을 간절히 느끼면서 묵상 기도를 실천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곳에 계시는 전능한 분이므로 어느 곳에서 묵상을 실천하든지 하느님의 대전을 느끼라는 것이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도 머무르시기에 우리는 마음 안에서 하느님 대전에 나아갈 수 있다. 또 예수님께서 당신의 인성을 통해 우리 인간을 바라보시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인성을 상상하면서 하느님 대전에 다다를 수 있다. 두 번째, 묵상자는 여러모로 부족한 자신이 하느님 대전에 나올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면서, 그 후로도 하느님께 계속 도와달라고 간절히 청하면서 묵상 기도를 실천해야 한다(《신심 생활 입문》 Ⅱ, 2-3장 참조).

 

세 번째, 묵상자는 앞선 단계와 다른 차원에서 준비 단계를 마무리한다. 즉 이냐시오의 묵상 방법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상상을 통해 묵상하고자 하는 장면이나 주제를 구체적으로 머리에 그려보는 것이다. 이렇게 묵상하려는 주제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동안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한 곳에 집중할 수 있다(《신심 생활 입문》 Ⅱ, 제4장 참조). 묵상 준비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이성의 활동을 통해 묵상을 실천하는데, 그 묵상은 우리의 의지를 자극하게 된다. 그리하여 묵상을 마친 다음에 결심한 내용을 겸손하게 실천에 옮기게 된다(《신심 생활 입문》 Ⅱ, 5-8장 참조).

 

프란치스코의 묵상 방법은 오늘날 그리스도교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어쩌면 다른 방법과 차별화되지 않아 커다란 영향을 주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개신교의 영향을 받는 가톨릭 신앙인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수호하기 위하여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묵상 방법을 소개하고 독려하였다.

 

쉴피스회에서 소개한 정감적 묵상 기도

 

쉴피스회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권고한 체계적인 신학생 양성의 정신에 부응하고자 17세기에 프랑스에서 설립된 사제 단체이다. 따라서 쉴피스회는 여러 지역에 신학교를 설립하여 신학생 양성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신학생 양성 과정에서 신학생들에게 성경 묵상을 실천할 수 있도록 소개한 묵상 방법이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교인이 실천할 수 있는 묵상 방법으로 발전하였다.

 

쉴피스 묵상 방법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덕성을 본받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화하신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과 긴밀히 일치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예수님께 경배를 드려야 한다. 우리가 완덕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범이신 예수님을 존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찬미를 드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자기 마음 안에 모시고 그분과 일치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분석과 추리,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미래를 향한 열망으로 자신을 성찰하면 예수님의 덕성에 참여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과 더욱 일치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덕행을 실천하기로 결심하고, 은총의 도움에 협력하면서 실천에 옮겨야 한다. 온종일 묵상한 덕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쉴피스 묵상 방법은 성찰을 중심으로 실천하는 정감적 묵상 기도다. 특히 추상적인 하느님이 아니라 성경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데 목적이 있다. 물론 초보자는 추리로 더 많이 기울어 묵상하겠지만, 끊임없이 묵상을 실천하면 점점 정감적 묵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근세에 들어서 문예 부흥(르네상스)과 인문주의 출현으로 적잖은 영향을 받았던 가톨릭 교회는 종교 개혁 운동이라는 현실 앞에서 많은 것을 고민하고 개선해 가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특히 인문주의자들의 연구로 성경을 바라보는 입장에 미묘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상황에서, 개신교의 출현은 앞으로 성경을 대하는 입장에 더 많은 변화가 있으리라는 예고와 같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차원 높은 영성 생활을 추구하려는 훌륭한 영성가들은 끊임없이 성경 묵상 방법을 소개하고 실천하였다. 가톨릭 신앙인들은 새롭게 발전한 성경 묵상 방법인 정감적 묵상 기도를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도전 앞에서 올바른 신앙을 지킬 수 있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6월호(통권 447호)]

 

 


 

 

성경과 영성

(19) 근세 중후반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성경 연구 방법에 어떻게 대처했나?

전영준 바오로 신부

 

 

20세기 말엽에 가톨릭 교회가 과거 결정 중에 잘못이 있었다고 고백하고 시정했던 사건과 관련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는 말로 유명한 이탈리아 출신의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년)이다. 지동설을 먼저 주장한 사람은 갈릴레이보다 한 세기 전에 살았던 폴란드 출신의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년)였다. 그런데 1613년에 갈릴레이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한다고 밝히면서부터 그는 성경을 근거로 반박하는 신학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갈릴레이는 절대 진리를 지녔다는 성경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성경을 지나치게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논박하였다.

 

급기야 1633년 가톨릭 교회는 갈릴레이를 감금하여 재판하였다. 갈릴레이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나서야 석방되어 자택에 연금된 채 지낼 수 있었다. 갈릴레이는 죽을 때까지 가톨릭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갈릴레이가 교황청을 나서면서 혼잣말로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고 말했다는데, 사실은 한 세기 후의 작가가 지어 낸 말이라고 한다.

 

오늘날 지동설은 당연히 올바른 이론이다. 하지만 16세기에 종교개혁을 경험한 가톨릭 교회는 당시 교회를 추스르기에 급했던지 거리상 먼 폴란드에서 나온 지동설에는 즉각 대응하지 못하다가, 17세기에 들어서서 이탈리아에서 나온 주장에는 즉각 대응하였다. 아마도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로 교회의 분위기를 재정비하고 난 후, 조금이라도 교회에 해가 될 것 같은 일이 생기면 예민하게 반응했다고 볼 수 있다.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이의 재판과 판결을 재고할 것을 권고하였다. 곧이어 1981년에는 신학자와 과학자, 역사학자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결국 가톨릭 교회는 1992년 10월 31일 “당시 조치가 비극적인 상호 이해 부족에서 나온 실수였다”고 고백하면서 교회 법정의 오류를 인정하였고, 359년만에 갈릴레이를 복권하였다. 결국 이 정정 사건으로 인해 가톨릭 교회도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올바로 알아듣기 위해 인식을 계속 발전시켜야 한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봇물 터지듯 시작된 성경 본문에 대한 비판적 연구

 

문예부흥(르네상스)과 종교개혁을 경험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인 성경은 여러모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영성 생활을 실천하던 신앙인들은 혼동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근세에 들어와 인문주의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에서 오랫동안 사용하던 라틴어 역본 성경이 히브리어, 그리스어 원본과 일부 차이가 있다고 밝혀지자 경전의 진정성에 대해 세상으로부터 심한 도전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종교개혁가들은 칠십인역 그리스어 구약성경을 근거로 라틴어 역본에 포함된 가톨릭 교회의 일부 성경이 히브리어 원본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구약성경의 정경 범위를 유다인과 같이 히브리어 원본 성경으로 국한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세상의 도전을 직시하면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성경 원문의 권위와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가운데 오랜 세월 동안 교회에서 사용한 ‘불가타’ 라틴어 역본 성경의 진정성을 확인할 필요를 느꼈다. 가톨릭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성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가톨릭 교회 안에서 늘 읽혀 온, 옛 불가타 라틴어 역본에 포함된 모든 책과 기록을 신성한 경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번 시작된 성경 본문에 대한 비평적 연구는 교회 안팎에서 봇물 터지듯 계속 시도되었다. 종교개혁 직후인 16세기 후반부터 성경의 권위를 비교적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교회 밖의 인물이 성경에 대한 비평적 견해를 쏟아냈다. 유명한 법률가인 휴고 그로티우스(1583-1645년)는 교회 밖 학자들이 일반 서적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성경을 연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일부 성경의 저자나 저술 연도 및 저술 의도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즉 구약의 아가, 코헬렛, 욥기와 신약의 히브리서, 테살로니카 전후서 등은 다시 연구되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철학자 토마스 홉스(1588-1679년)는 구약성경을 중심으로 각 권의 제목은 신뢰할 만한 수준이 아니어서 각 권의 저자 문제를 해결할 답을 제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홉스는 성경 각 권의 인간 저자의 활동에 대한 문제에 국한하여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지, 인간 저자를 통해 중재하시는 하느님의 권위에 대해서는 비평을 가하지 않았다. 또 다른 철학자인 바뤼흐 스피노자(1632-1677년)도 구약성경 각 권의 저자, 저술 동기 및 저술 연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중세까지의 전통 견해를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스피노자는 자신이 제기한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해법을 스스로 찾아서 제시하지 못했다.

 

교회 안에서 신학자가 성경 본문을 비판하기 시작한 경우는 개신교보다 가톨릭에서 먼저 나타났다. 17세기에 프랑스 오라토리오회 소속 사제였던 리샤르 시몽(1638-1712년)은 문헌 비평을 통해 모세가 오경의 저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시몽은 역사서도 본문에 나오는 연대보다 훨씬 후대에 수집된 자료를 가지고 편집되었다고 언급했다. 시몽에 따르면, 공적인 필사자들의 모임에서 단편 기록 자료들을 수집하여 보전하면서 후대에 전승했다는 것이다. 당시 교회 당국은 시몽의 주장에 제동을 걸지 않았지만, 시몽의 견해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시몽의 저서들을 적극적으로 소각하였다.

 

18세기에 들어와 의사이자 의학 교수인 장 아스트뤽(1684-1766년)은 오경에서 동일한 사건이 반복되어 나오고, 야훼와 엘로힘이라는 두 가지 하느님 이름이 불규칙하게 섞여 사용되며 사건의 연대가 뒤죽박죽이라고 지적하였다. 아스트뤽은 특히 창세기에 야훼계 자료군과 엘로힘계 자료군을 비롯하여 11개의 소자료군이 존재하는데, 이 자료군을 재배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시도하였다. 아스트뤽의 주장은 2백여 년 동안 후대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프랑스보다 독일에서 더 큰 인정을 받았다. 게다가 18세기부터는 개신교 신학자들도 성경 비평 작업에 합류하면서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성경 연구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전통 견해에 따라 성경을 신앙과 영성 생활의 원천으로 삼고 살아가는 신앙인도 많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부정적 영향을 받고 혼란스러워하는 신앙인도 있었기 때문에 결국 가톨릭 교회는 다시 어떤 식으로든지 입장을 표명하여 신앙을 보호해야 할 책무를 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성경 연구 방법에 대한 근세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라틴어 역본 성경뿐 아니라 오경의 저자 문제에 대한 진정성이 도전받고 훼손되자, 교황 레오 13세는 1893년에 역사비평적 성경 연구 방법론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 회칙 <섭리의 하느님>을 반포하였다. 레오 13세는 이 회칙에서 성령께서 성경의 인간 저자들을 통하여 우주 만물의 본질적 성격을 가르친 것도 모두 인간 구원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언급하였다. 따라서 성령의 영감에 의해 저술된 성경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온갖 지각없는 견해에서 성경의 권위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하여, 특히 성직자들은 매일 열정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설명해 줄 의무가 있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라고 권고하였다.

 

19세기 말까지는 성경과 관련한 고고학 유물이 발굴되기 전이었기에, 교회 당국은 역사비평적 방법론을 적극 수용하기보다 전통 견해에서 성경의 권위를 지킴으로써 신앙인이 마음 놓고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배려하려고 했다.

 

1943년 교황 비오 12세는 레오 13세의 회칙 반포 50주년을 기념하여 회칙 <성령의 영감>을 반포하였다. 비오 12세는 이 회칙에서 성경 연구에 대한 교회의 새로운 입장을 표명하였다. 즉 성경 본문에서 신학적·영적 의미를 파악하고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므로 때에 따라 학문적 성경 연구 방법을 적극 수용하여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아우구스티누스도 언급하였듯이 비오 12세도 성경을 연구할 때 고전 언어를 익혀 원문으로 돌아가 연구하는 것이 필요할 뿐 아니라, 성경 본문의 전승에서 발생한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동일한 본문에 대한 다수의 필사본을 상호 비교하는 본문 비평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또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삶의 자리를 아는 것도 성경의 가르침을 올바로 알아듣는 데 필요하므로 성경 시대 유물과 관련한 고고학 자료를 적극 활용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므로 교회 당국은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이런 점을 유념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열심히 연구하라고 당부하면서 새로운 성경 연구 방법론을 지지하였다.

 

계시종교인 가톨릭 교회는 근세에 계몽주의의 도전에 직면하면서 자신을 성찰하여 교회에 대한 이해를 더 높이고 교회의 진면목을 깨달아 사람들에게 교회를 더 명백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성경을 연구하고 올바로 이해하는 면에서도 가톨릭 교회는 직면한 새로운 도전을 잘 극복하여 새로운 방법을 어떻게 수용할지 찾아 나아갔다. 교회는 신앙인이 걱정 없이 성경을 묵상하며 영적 여정을 잘 걸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였다.

 

[성서와 함께, 2013년 7월호(통권 448호)]

 

 


 

 

성경과 영성

(20) 현대 가톨릭 교회가 성경을 바라보는 입장은 어떻게 변했는가?

전영준 바오로 신부

 

 

1990년대 초에 방영된 한국 드라마 중에 시청률이 50%에 육박하여 방송을 하는 날이면 많은 사람을 일찍 귀가하게 한 드라마가 있다. 바로 [여명의 눈동자]다. 그 드라마에 미사 장면이 나왔는데, 시대 배경이 1944년 겨울쯤이었다. 상하이의 어느 성당에서 거행된 미사에 참례한 한 우익인사가 공산주의자에게 포섭당하고 있던 주인공에 의해 암살된다. 당시 이 장면이 방영된 후 성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그 장면을 떠올리며, “연출자가 고증을 좀 더 철저하게 했어야 했다”고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이 난다. 시대 배경이 1944년인 드라마에서 사제가 신자들을 바라보며 중국어로 미사를 집전했기 때문이었다.

 

현대 교회사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는 가톨릭 교회를 쇄신하는 계기가 된 커다란 사건이었다. 교회 밖으로는 비(非)그리스도인과 적극적으로 대화하려는 분위기로 돌아섰을 뿐 아니라, 교회 안으로는 전례 예식의 정비와 신앙의 원천 중의 하나인 성경의 활용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1965년 이전의 전례 정신에서는 하늘 위에 높게 초월해 계시는 하느님을 흠숭하는 데 강조점을 두었기에, 성당 뒷벽에 설치된 제대에서 사제는 신자들을 등지고 서서 미사를 집전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전례 정신은 교회 공동체 안에 현존해 계시는 하느님께 신자들과 함께 기도를 올리는 데 강조점을 두어, 제대가 사제와 신자들 사이로 옮겨지고 사제는 신자들과 마주 보며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앞서 언급한 드라마의 미사 집전 장면은 시기상 맞지 않았다.

 

한편 그때까지 비공식적으로는 자국어를 어느 정도 사용하고 있었지만, 교회 내에서는 공식적으로 미사 경본과 성경 모두 라틴어판을 사용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비로소 보편교회는 지역교회에서 현지의 언어를 공식 전례에서 사용할 수 있다고 허용하였다. 성경의 경우에는 단순히 지역교회 언어로 번역하여 사용할 수 있는 변화 외에 다른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지난 몇 세기동안 교회 내에서 꾸준히 문제로 제기되었던 역사비평 방법론을 수용하고 활용하는 데 전향적 입장을 표명하게 된 것이다.

 

계시 진리이며 신앙의 원천인 성전과 성경에 대한 폭넓은 고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5년에 공표된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계시 헌장>)’인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계시 진리이며 신앙의 원천인 성전(聖傳)과 성경(聖經)을 폭넓고 심도 있게 고찰하였다. 특히 교회 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하기 위해 성경을 시대에 맞게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권고하였다.

 

먼저 공의회는 성경 해석에 대해 최근 몇 세기 동안 제기되던 견해를 대폭 수용하였다. “성서 해석자들은 성서 저자가 제한된 상황에서 그 시대와 문화의 여러 조건들에 따라 당시의 일반적인 문학 유형들을 이용하여 표현하려 하였고 또 표현한 그 뜻을 연구해야 한다. 성서 저자가 글로써 주장하고자 한 것을 옳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널리 쓰이던 그 지방 고유의 사고방식, 언어 방식, 설명 방식 그리고 사람들이 상호 교류에서 관습적으로 사용하던 방식들을 면밀히 고려해야 한다”(<계시 헌장> 12항).

 

결국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 소위 ‘삶의 자리’를 살피는 역사비평 방법을 적극 받아들이게 되었다. 따라서 20세기 후반에 역사비평 방법은 가톨릭 교회에서도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공의회는 성경 번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하느님의 말씀을 어느 시대나 접할 수 있어야 하므로 어머니 마음으로 교회는 여러 나라 말로, 특히 성서 원문에서 적절하고 올바르게 번역하도록 힘쓰고 있다”(<계시 헌장> 22항). 그 결과 자국어 성경 번역은 더욱 활기를 띠어, 여러 나라 신자가 자국어 성경을 읽으면서 쉽게 성경 말씀의 의미를 헤아리며 묵상과 기도를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공의회는 교회의 승인만 있다면 갈라진 형제인 개신교와 함께 공동으로 성경을 번역해도 그 본문을 가톨릭 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계시 헌장> 22항 참조). 한국 가톨릭 교회가 2005년에 새 번역 《성경》이 나오기 전까지 한국 개신교와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점에 근거한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역사비평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다

 

1993년에 교황청 성서위원회는 <교회 안의 성서 해석>이라는 문헌을 발표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에서도 역사비평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보편화되었고, 많은 성경 주석가가 그 방법을 자주 사용하였다. 사실 20세기 중후반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도 중세 수도원 전통에 따른 성경 묵상보다 주석에 대한 관심을 중심으로 평신도 사이에서 성경 공부 열기가 뜨겁게 달구어지기도 하였다. 이렇게 오랜 논의 끝에 받아들인 방법론이라 그런지 받아들인 후에는 비판 없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으나,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고 나니 서서히 그 방법론의 한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보편교회는 이에 대한 적절한 견해를 밝힐 수밖에 없었다.

 

우선 교회 문헌은 역사비평 방법이 고대 본문의 의미를 학문적으로 탐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방법이라고 재천명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을 사용하는 데는 한계도 있다고 밝혔다. 즉 역사비평 방법은 성경이 쓰인 역사적 상황에서만 성경 본문의 의미를 탐구하기 때문에 계시에서 오는 선험적 의미나 훗날 교회 역사에서 드러나는 의미에 대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비평 방법이 미처 다 파악할 수 없는 의미까지 밝힐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계속 개발하여 사용해야 한다. 문헌은 새로운 문헌 분석 방법들뿐 아니라, 전승에 근거한 접근, 인문과학을 통한 접근, 상황 접근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대안으로 언급하였다.

 

2010년에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교황 권고문 <주님의 말씀>을 발표했다. 이 문헌은 금세기 가톨릭 교회가 하느님 말씀인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관점을 집대성하였다. 앞선 문헌(<교회 안의 성서 해석>)에서 역사비평 방법의 한계를 직시하고 성경 해석을 위한 또 다른 학문적 방법을 성찰해 보았다면, 이번 문헌에서는 성경 해석을 위한 학문적·신학적 방법에 대한 고찰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신앙 여정을 위한 사목적이고 영성적인 접근 방법까지 함께 고찰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성경 말씀에서 지적 호기심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발전까지 나아가 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 문헌에서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은 과거 수도원 전통이었던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와 연관 지어 하느님 말씀을 살펴보자고 언급한 항목이다. “성경 본문은 그 자체로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읽기, lectio) “성경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묵상, meditatio)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그분께 무엇을 말씀드리는가?”(기도, oratio) “주님은 우리에게서 정신과 마음과 삶의 어떤 회개를 요구하시는가?”(관상, contemplatio) 그리고 거룩한 독서는 결국 행동(actio)에 이르러서야 완결된다고 강조하였다(<주님의 말씀> 87항 참조). 그런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성경 공부에 진지하게 몰두하는 것뿐 아니라, 성경을 꾸준하게 영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면을 이미 강조하였다(<계시 헌장> 25항 참조). 문헌은 결론에서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교회 안에서 선포하고, 듣고, 기념하고, 묵상한 하느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주님의 말씀> 121항).

 

“그래서 우리 시대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새로운 경청과 새로운 복음화의 시대가 되어야 합니다”(<주님의 말씀> 122항). 우리는 성경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알아듣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영적 발전으로 승화하여 하느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영성 생활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안에서만, 교회 안에서만 하느님 말씀을 경청할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하느님 말씀을 듣지 못한 모든 사람에게도 하느님 말씀이 전해질 수 있도록 복음 선포 사명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가톨릭 교회는 중세까지 성경을 영적 독서 중심으로 활용하다가, 근세에 와서 다분히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는 방향으로 해석하는 데 더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학문적 접근을 유지하면서도 영적 접근을 해야 한다는 종합을 이루어 내었다고 볼 수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8월호(통권 449호)]

 

 


 

 

성경과 영성

(21) 동방 교회는 어떤 기도 전통을 발전시켰는가?

전영준 바오로 신부

 

 

기원전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땅이었고,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후에는 그리스도교에 중요한 성지가 되었으나 여성과 동물의 암컷은 들어갈 수 없는 땅은 어디일까? 정답은 그리스 북쪽 마케도니아 지역에서 에게 해를 향해 돌출한 곶串에 위치한 ‘아토스 산’이다. 그곳이 금녀의 땅이 된 데는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어느 날, 사도 요한은 성모님과 함께 키프로스 섬에 사는 라자로를 방문하러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아토스 산자락에 표류하였다. 그러자 성모님은 아토스 산이 너무 아름다워 하느님께 그 땅을 자신에게 주십사고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그곳을 ‘마리아의 정원’이라고 이름 지으셨다. 그 후 그곳은 성모님만을 위한 땅으로 여겨져 여성은 어느 누구도 발을 들여놓을 수 없게 되었다. 다만 하느님께서 그곳이 구원을 찾는 자들의 피난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에, 3-4세기에 수도자들이 들어와 수도원을 짓고 수도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9세기에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수도자들만 출입할 수 있도록 하여 지금까지 수도원 공화국이 유지되고 있다.

 

근현대를 지나면서 유럽 사회는 정신적 피곤을 느끼게 되었다. 17-18세기에 계몽주의가 등장하여 이성을 계몽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렸고, 19세기 초에는 실증주의의 영향으로 모든 것을 이성에 따라 합리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19세기 말에는 역사주의가 출현하여 역사적 배경과 의미를 매사 점검하느라 정신없이 살아야 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유럽 사회는 전 세계를 정복하려고 나서면서 동양과 동양 사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서양이 이성을 통해 합리적으로 영성 생활에 접근했다면 동양은 감성을 통해 직관적으로 접근했다. 서양이 분석적인데 반해 동양은 종합적이라는 면이 유럽 사회의 지성인뿐 아니라 신앙인에게까지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영성 생활을 실천하면서도 이성적 접근 방법으로만 분석하여 피곤을 느끼던 차에 동양의 방법론은 하나의 해방구 같았다. 다만 너무 급작스럽게 동양의 사상 체계를 서양 사상에 접목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동양적이면서도 그리스도교적인 동방 교회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게다가 20세기 중반에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가 화해한 분위기는 서방 교회가 동방 교회의 영성 생활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방 교회는 성경을 배경으로 한 수도 생활에 커다란 가치를 두었다

 

동방 교회의 영성 생활과 기도 생활은 오랫동안 수도자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약성경 시대에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유다교 제도권과 마찰을 빚은 참된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자 광야로 찾아들어 갔다. 구약의 마지막 인물인 세례자 요한도 광야에서 낙타 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로 요기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신 후에 광야로 나가서 사탄의 유혹을 이기셨다. 이렇게 광야에서 하느님의 뜻을 접할 수 있다고 생각한 동방 교회 그리스도교인은 사막 은수자의 삶을 적극 수용하였다. 그러므로 동방 교회는 성경을 배경으로 한 수도 생활에 큰 가치를 두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기도 생활과 성경의 관련성이 미미해졌다.

 

4세기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는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카이사리아의 바실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와 친분이 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의 제자로서 신플라톤 사상에 친숙했다. 그는 엘리트 지성인으로서는 거의 처음으로 사막 은수자의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지성적 배경을 가졌는데도 기도 생활에서 지성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에바그리우스는 기도란 인간 지성이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라고 여겼지만, 인간의 감성을 통해 지성의 완고함을 깨버리지 않는다면, 하느님께 온전히 기도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성의 작용이 정지하여 모든 물질적 대상과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느님께 ‘순수한 기도(Pure Prayer)’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급기야 에바그리우스는 금욕 생활을 기도 안에서 지성을 탈물질화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결국 지성 작용을 멀리하고자 한 에바그리우스의 순수한 기도는 성경의 배경과 다소 거리가 있는 지성적 기도로 인식되었다.

 

한편 영성신학 분야에서 펠라기우스주의로 일컫는, 하느님의 은총보다 인간의 기도를 우위에 놓았던 이단 사상인 메살리아주의에 속한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 위(僞)-마카리우스(4세기 말)는 저서 《영적 설교》에서 의미 있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이원론적인 신플라톤 사상에 기반을 둔 에바그리우스와 달리, 일원론적 인간학과 강생의 신비에 기반을 두고 ‘마음의 기도(Prayer of the Heart)’를 강조했다. 즉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은 나뉠 수 없는 영혼과 육신의 통합체로, 성자께서 바로 그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인간의 육신과 영혼 그리고 지성의 중심이요 으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뵙고자 끊임없이 기도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마음을 통하는 마음의 기도를 바쳐야만 한다.

 

하지만 마음의 기도가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했다. 5세기 포티케의 디아도쿠스는 저서 《영적 완전에 대하여》에서, 하느님 은총의 현존을 더욱 느끼고 온몸에 확산되게 하기 위해 신앙인들은 주님께 시선을 돌리고 예수님의 이름을 끊임없이 부르면서 기도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어린아이가 옹알거리며 계속 ‘아빠’라는 말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이 신앙인들도 예수님의 이름을 끊임없이 부른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7세기의 요한 클리마쿠스 역시 저서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단조롭고 더듬는 말이라도 단 한마디 말로 하느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요한 클리마쿠스는 나아가 마음 안에 현존하는 세례의 은총을 통해 자기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혼자 고요하게 머무르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훌륭한 기도라고 언급했다. 그러므로 혼자 고요하게 머물기 위해서 자신의 호흡 리듬에 맞추어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했다. 결국 이러한 ‘예수 기도(Jesus Prayer)’는 수도자뿐 아니라, 일반 그리스도인들이 기도 생활을 쉽게 실천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고요하게 기도하는 방법인 동방 교회의 헤시카즘

 

동방 교회에서 발전한 기도 전통은 요한 클리마쿠스의 호흡법과 함께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게 되었다. 요한 클리마쿠스가 혼자 고요하게 머물라고 강조하면서, ‘고요함’을 뜻하는 그리스어 ‘헤시키아(hesychia)’에서 유래한 ‘헤시카즘’(hesychasm, 묵적주의 默寂主義)에 따른 기도 방법이 13-14세기에 동방교회의 대표적 기도 방법으로 인식되었다. 헤시카즘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마음의 기도와 예수 기도를 종합하여 믿음과 사랑으로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이름을 끊임없이 암송하며 고요한 기도 생활을 실천해야 한다. 특히 그리스의 아토스 산에 머무르는 많은 수도자가 헤시카즘 전통에 따라 기도 생활을 실천했다.

 

그중에서도 14세기 동방 교회의 신비 신학자인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가 헤시카즘 신학을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팔라마스는 당시 동서방 교회의 일치 운동에 따른 주장으로,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부정 신학적 견해를 극단적으로 주장하던 사상에 맞서,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해 주시므로 초자연적인 은총을 통해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하느님의 은총을 감지하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고요함을 유지하며 주님을 향하는 기도를 끊임없이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때 동방 교회에서 주로 실천했던 기도가 단문 형식의 기도문이 결합된 헤시카즘 기도였다. 단문 형식의 기도문은 4세기 대(大) 마카리우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 마카리우스는 기도를 바칠 때, “주님,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언급했다.

 

헤시카즘의 기도 방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읽거나 생각하거나 추론하거나 상상하지 않고 고요함에 머물도록 해야 한다. 다음으로 예수 기도를 반복하여 실천한다. 물론 이때 다양한 형식의 단문 기도를 함께 암송하는 것이 유익하다. 대표적 단문 기도는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님!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이다. 그리고 기도문을 암송할 때 리듬에 맞춰 규칙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정한 리듬을 유지하기 위해 기도문을 자신의 호흡과 일치시키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배와 배꼽을 응시하면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기 쉽다. 이를 통해 내적 온기를 느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기도의 목표는 인간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하는데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베드로 사도도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 1,4)라고 언급했다.

 

동방 교회의 기도 생활이 성경에서 직접 기도 주제를 끌어오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을 간접 배경으로 삼아 주님께 더 깊이 다가가는 기도 생활을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9월호(통권 450호)]

 

 


 

 

성경과 영성

(22) 동방 교회의 기도 전통에서 영향을 받은 기도 운동은?

전영준 바오로 신부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가장 완전하고 훌륭하며 아름다운 기도는 무엇일까? 혹자는 ‘시편 기도’를 언급할 수 있다. 하지만 ‘주님의 기도’가 더 옳은 답이다. 복음서마다 전승이 약간씩 차이가 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친히 가르쳐 주시기 위해 주님의 기도를 알려 주셨다는 점이 중요하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산상 설교 중에 유다인의 전통적 재계(齋戒) 방법인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언급할 때, 올바른 기도를 바칠 것을 권고하면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고 전한다. 즉 위선자처럼 드러내 보이려고 기도해서는 안 되고, 다른 민족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면서 기도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한편 루카 복음사가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고 전한다. 다만 세례자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준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응하셨다는 점이 다른 복음서와 다르다.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의 서간 편은 사도들도 간절히 기도하기를 바라면서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어떤 정신과 마음가짐으로 기도에 임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다고 전한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도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를 실천했을 것이다.

 

동방 교회의 ‘예수 기도’는 서방 교회에 반향을 일으켰다

 

기도하라는 성경의 권고와 동방 교회의 헤시카즘 전통에 따른 기도 실천(지난 호 84쪽 참조)이 함께 만나면서 서방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는 오늘날 서방 교회의 기도 운동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이 실존하는지 허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 출간된 《어느 러시아인의 순례 이야기》가 20세기 초반에 유럽 사회에 소개되면서, 서방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동방 교회의 기도 전통에 다시 한 번 커다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79년에 우리나라에서 《이름 없는 순례자》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이 책은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후 한국 교회에서도 동방 교회의 기도 전통에 관심을 갖고 예수 기도를 실천하는 신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항상 성경 말씀에 의존하면서 영적 여정을 걷던 한 이름 모를 순례자가,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라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 항상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헤매다 스승을 만나게 되었다. 스승은 순례자에게 동방 교회의 많은 영적 스승의 가르침이 담긴 《필로칼리아》라는 책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문을 가르쳐 주었다. 순례자는 스승의 지도에 따라 묵주 알을 돌리며 ‘예수 기도’를 하루에 일만 이천 번 이상 드릴 수 있게 되면서, 드디어 끊임없이 기도하는 법을 터득하였다. 그리고 스승이 사망한 후에 성경과 《필로칼리아》를 지니고 시베리아와 러시아를 횡단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의 길을 걸었다. 그러면서 분심과 잡념 없이 언제나 평온하고 기쁜 마음으로 늘 예수 기도를 드리며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예수 기도라는 동방 교회의 단순한 기도 실천 방법이 서방 교회에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단순한 방법으로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향심 기도

 

한편 오늘날 평신도가 단순한 방법으로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기도 운동이 서방 교회에서 새롭게 시도되었다. 1970년대에 미국 트라피스트회의 몇몇 수도자가 14세기에 저술된 《무지의 구름》에서 기도 방법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현대에 맞게 해석하고 적용하여 평신도도 능동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향심向心 기도’(Centering Prayer)로 발전시켜 보급하기 시작했다. 그때 수도자들은 “그냥 앉아서 긴장을 풀고 편안히 있으라”고 한 《무지의 구름》의 권고에서 향심 기도를 착안했다.

 

향심 기도는 기도하는 신앙인에게 두 가지를 시도한다. 하나는 자기 마음에 현존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만나도록 마음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을 돕는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 현존하며 활동하실 수 있도록 하느님께 응답하는 일을 돕는다. 우리는 참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거짓 자아를 성찰하여 그것을 넘어설 때, 자기 마음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뵙게 된다.

 

그러기 위해 기도를 바치는 신앙인은 먼저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떠올릴 수 있는 단어를 선택한다. 그런 다음 편안한 자세에서 눈을 감고 그 단어를 떠올리며 기도한다. 기도 중에 분심과 잡념이 생기면 즉시 선택한 단어로 돌아가 기도에 집중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도를 마치면서 한동안 침묵 가운데 머무른다.

 

향심 기도가 중세 신비신학에 바탕을 둔 기도 전통에서 착안되었다 해도, 《무지의 구름》 자체가 동방 교회의 부정신학에 기반을 두었기에 넓은 의미에서 동방 교회의 기도 전통, 특히 마음의 기도와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마음에 우리 마음을 결합하는 ‘예수 마음 기도’

 

단순함에 기초한 기도가 많은 관심을 받으면서, 한국 교회에서도 단순한 기도를 실천하는 운동이 자발적으로 생겨났다. 1990년대부터 성심수녀회의 몇몇 수도자가 시작한 뒤 뜻을 같이하는 몇몇 교구의 성직자들이 점차 함께 모여 기도하면서 ‘예수 마음 기도’라는 기도 운동의 싹이 생겨났다. 이 기도 운동은 예수 성심 신심과 이냐시오 영신수련에서 제시하는 영적 식별 방법, 화살기도 및 예수 마음 호칭 기도와 같은 단순성을 지닌 기도에 바탕을 두고 형성되었다.

 

예수 마음 기도는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우리의 마음을 결합한다. 즉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하느님 아버지께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바치는 기도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인간 영혼은 삼위일체 하느님과 합일할 수 있다. 이때 관건은 우리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을 일치시키기 위해 단순한 기도를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예수 마음 기도를 하면서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다. 그러면서 자기에게서 우러나오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친다.

 

예수 마음 기도를 할 때는 반드시 성경을 읽는다. 기도를 바치는 사이에 짧은 시간을 마련하여 복음서를 중심으로 한 신약성경을 읽으며 기도를 완성한다. 성경 말씀을 읽는 것도 훌륭한 기도 실천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여정은 이성의 작용으로 예수님을 상상 속에서가 아니라 마음으로 체험케 한다.

 

동방 교회는 오랫동안 하느님께 마음으로 다가가는 기도 전통을 발전시켰다. 하느님께 마음을 바쳐 드리는 기도는 몇 마디 말만 필요한 단순한 기도다. 영성 생활마저 이성적이고 사변적으로 발전시킨 서방 교회의 전통에서 보면 동방 교회의 기도 전통은 분명히 매력적이었다. 결국 단순한 기도는 오늘날 서방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서방 그리스도인이 예수 기도를 앞다퉈 실천하게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한국 교회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또 한 가지, 기도 안에서 성경의 활용 문제가 정리되었다. 중세 초반까지 동서방 교회는 거룩한 독서의 전통에 따라 성경 말씀에 머물면서 바치는 기도를 실천했다. 그 후 서방 교회에서 수도원을 중심으로 거룩한 독서 전통을 근근이 유지하다가 오늘날 많은 신앙인이 다시 관심을 갖게 되면서, 성경을 이성적이고 학문적인 호기심으로 접근하기보다 기도의 원천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그 결과 성경 독서와 기도 실천이 조화를 이루면서 그리스도인이 삼위일체 하느님을 올바로 찾아갈 수 있는 안전한 길을 개척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오늘날 새롭게 시도하는 기도 운동이 올바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것은, 동방 교회의 기도 전통을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여 동서방 교회의 기도 전통에 있는 장점만 모아 훌륭한 기도 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도 방법은 동양 사람이면서도 서방 교회에 속한 한국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 맞는 기도 방법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우리에게 꼭 맞는 방법으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0월호(통권 451호)]

 

 


 

 

성경과 영성

(23) 오늘날 성경 해석의 방법은 어떻게 확장되었나?

전영준 바오로 신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누구일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포악한 독재자나 흉악한 범죄자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세태를 풍자한다면 ‘책을 단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아닐까 싶다. 책을 단 한 권만 읽은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누구일까? 답은 ‘단 한 권의 책을 단 한 번만 읽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책을 단 한 번 읽을 때 대충 읽은 사람’이다. 그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있다면 ‘책 목차만 살펴본 사람’이며, 가장 무서운 사람은 ‘책 제목만 본 사람’이다. 이는 책 한 권마저 겉만 훑어보고 많이 아는 사람처럼 생색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책을 여러 권 읽으면서 관련 주제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여러모로 살펴야 현명하다는 의미이다.

 

얼마 전 국내 한 대학교의 학내 무신론 동아리가 제작한 ‘전도 퇴치 카드’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 유인물에 쓰인 문구가 눈에 띄었다. “당신은 아마 한 권의 책을 읽고 맹목적으로 믿겠지만, 저희는 더 많은 책을 읽고 합리적으로 생각합니다.” 얼핏 보면 한 권의 책과 여러 권의 책을 대조하고, 맹목적 믿음과 합리적 생각을 대조하여 나름대로 호소력을 지닌 듯 보인다. 종교와 신앙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길에서 선교하는 이에게 한두 번 시달린 사람이라면 솔깃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지구 상에 출판되어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성경’이다. 그리스도교인은 물론이고 타 종교인이나 비종교인도 한 번쯤 관심을 두고 본 책이 성경이다.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이 어떤 책인지 다 안다. 그런데 성경책 한 권을 읽은 사람이 책 한 권만 읽은 무서운 사람으로 취급되거나 책 한 권에만 빠진 광신자라고 평가될 수 있을까? 오히려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한 권인 성경마저 읽지 않는다고 걱정한다. 하기야 한 권의 성경마저 설렁설렁 들여다보고 아는 척하는 신앙인은 정말 무서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열린 마음으로 성경에 다가가고자 한 20세기 영성가 토마스 머튼

 

오늘날 가톨릭 영성가를 대표할 인물로 토마스 머튼(1915-1968년)을 들 수 있다. 토마스 머튼은 엄률 수도회인 트라피스트회 수도자인데도 중세에 세상과 단절하고 살던 수도자와 조금 다른 분위기를 보인다. 이는 그가 살던 20세기가 두 차례나 일어난 큰 전쟁, 서양과 동양사상의 만남, 사상의 대변화를 체험한 시기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토마스 머튼의 작품을 살펴보면, 그가 중세 이래 전통 수도 신학에 정통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동양 사상과 종교에 많은 관심을 갖고 직접 교류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점도 알 수 있다. 그가 태국에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은 것도 타종교간 대화를 위한 모임에 참석한 때였다. 한편 유작 형식으로 발표된 작품들에서는 토마스 머튼이 생전에 세계 평화에 대해 많이 염려하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사망하기 전 마지막으로 탈고한 《성서를 펼치며》를 살펴보면, 성경을 대하는 그만의 새로운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동서양을 아우르는 다양한 체험이 바탕이 되어 성경을 열린 자세로 들여다보고 싶어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토마스 머튼의 생각에 따르면, 성경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다. 독자에게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인간의 사고 범주에서 기록된 책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에 의해 쓰인 천상 기원의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메시지는 우리의 이성이 아니라 실제 경험을 통해 알아듣게 된다. 즉 성경이 오히려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우리는 그 질문에 답을 찾아가면서 자아실현과 자기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성경 읽기는 다양한 독자의 삶과 연관된 독서이기에 그 메시지를 파악하는 데도 여러 관점이 있을 수 있다.

 

토마스 머튼은 20세기에 최고의 관심을 받은 역사 비평적 성경 연구 방법론에 회의적이었다. 이는 방법론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한 가지 방법론에 매달리는 연구 자세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리스도교인들이 과거부터 전해오는 전통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선입견에 빠져 있거나 몇몇 연구 방법론만 유일한 방법론이라고 생각할 때, 성경의 메시지를 올바로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비그리스도교인이 더욱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에서 성경의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파악할 수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암울한 상황만은 아니라고 역설했다. 현대는 다양한 가능성을 모두 타진해 보고자 투쟁하는 혁명의 시기이므로, 열린 마음으로 성경에 다가갈 가능성도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이 성경 안에 인격적으로 참여하여 성경과 관계를 맺어 갈 때 성경을 제대로 통찰할 수 있다. 또 모든 사람이 제각기 역동적으로 성경에 참여하는 모습을 받아들인다면, 모든 것을 포용하는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열린 자세를 유지하는 모습이다. 이것이 다양한 이념과 종교를 접한 토마스 머튼이 언급할 수 있는 성경 해석의 입장이라고 볼 수 있겠다. 가톨릭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년)에 이르러 역사 비평적 방법론을 긍정적으로 고찰하고 받아들인 것과 비교할 때, 토마스 머튼은 역사 비평적 방법론을 뛰어넘고, 심지어 신앙인이라고 스스로를 제한하는 선입견마저 넘어서서 열린 마음으로 성경에 다가가자고 한 걸음 더 앞선 주장을 펼친 것이다.

 

다양한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고자 한 20세기 후반 성서학자들

 

성경 해석에 대해 해석학적 관점을 제시하려는 시도는 이미 시작되었다. 20세기 전반에 성서학계의 일부 신학자들은 심리학적 관점에서 예수님의 자의식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반대 입장을 보인 전통 학자들과 일대 공방을 벌였다. 이 와중에 1970년대 이후부터 심리학계에서는 종교 심리학자로 유명한 칼 융의 심리학적 해석학의 접근 방식으로 성경과의 대화를 시도하게 되었다.

 

결국 1990년대에 들어서 성서학계에서도 심리학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보여 주었다. 이 시기에 미국 성서학계의 대표 모임 중 한 곳이 소단위 연구 모임에서 ‘심리학과 성서학’을 주제로 정할 정도였다. 이 연구를 계기로 20세기 후반 성서학자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입장에 다양한 관점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가톨릭 교회에도 나타났다. 1993년에 교황청 성서위원회는 문헌 <교회 안의 성서 해석>에서 성경 해석을 위한 다양한 접근 방법을 소개했다. 이 문헌에 따르면, 가톨릭교회는 기존의 보편적 방법인 역사비평, 문헌 분석, 전승비평뿐 아니라, 인문과학을 통한 접근 방법과 상황에 따른 접근 방법도 사용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이 문헌은 인문과학적 접근 방법으로 사회학과 문화인류학적 접근 및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적 접근이 있다고 언급했다. 특히 심리학은 신학과 대화를 계속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리학적 · 정신분석학적 연구는 성경 주석을 풍요롭게 한다고 강조했다.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은 성경에 나오는 상징어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성경 주석가와 심리학자들은 올바른 성경 해석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문헌은 상황에 따른 접근 방법으로 해방신학에서 제시하는 해방의 관점과 현대에 와서 더욱 주목받는 여성 해방의 관점을 제시하였다.

 

성경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가 잘못된 일은 아닐 것이다.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본다 해도 외형적·방법론적 틀만 집착하고 접근한다면 놓치는 것이 있을 것이다. 토마스 머튼의 언급대로 성경의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는 데 소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양한 관점의 방법론보다 열린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

 

심리학적 관점은 영성 신학이 활용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그러므로 본의 아니게 심리학을 중심으로 성경과 영성 생활이 만나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심리학이 영성 생활을 전부 대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성경이 아무리 심리학과 만난다 해도, 심리학의 관점만으로 성경에 담긴 영성 생활을 다 살필 수는 없다. 영성 생활에 칼 구스타프 융 서도 성경에서 들려오는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1월호(통권 452호)]

 

 


 

 

성경과 영성

오늘날의 영성 생활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전영준 바오로 신부

 

 

주일과 대축일 미사에서 성찬 전례가 시작되기 전에 신앙 고백문을 바친다. 전에는 조금 짧은 ‘사도신경’을 바쳤고, 요즘에는 좀 더 긴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바친다. 신경의 기도문에는 우리 신앙인이 믿고 고백해야 할 신앙의 핵심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가장 잘 담고 있으면서 제일 짧은 신앙 고백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서양식으로 예수가 이름이고, 그리스도가 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자렛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다는 의미다.

 

신앙인으로서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입술로는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자기만의 하느님을 상상하고, 자기 멋대로 이해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올바른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 역사에는 잘못된 신관을 형성하여 이단의 길로 접어든 예가 많이 있다. 특히 그리스도교가 올바른 신앙을 통해 제자리를 찾아가던 고대에,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다르게 생각한 결과 그릇된 신앙으로 나아가게 된 경우가 많았다.

 

우리의 신앙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예언자들에 의해 오시기로 약속된 구세주이시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이다.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고 잘못된 신앙을 바탕으로 영성 생활을 한다면, 결국 이단 성향을 띤 영성 생활로 전락하여 참 하느님께 다다를 수 없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뵙기 위한 영적 여정은 올바른 신앙고백에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원천부터 제대로 배워야 한다. 가톨릭 교회는 성경(聖經)과 성전(聖傳)을 신앙의 원천으로 가르친다. 교회는 올바른 신앙을 전승하면서 보전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고정된 형태의 성경을 전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해 올바른 신앙을 배우고 깨달으며, 주님을 믿고 고백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올바른 영성 생활의 실천은 성경 말씀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의 2천 년 역사에서 성경 말씀과 영성 생활은 의도하지 않은 긴장 관계를 형성하며 흘러왔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긴장 관계를 유지하며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초대 교회부터 근세 교회까지 이르는 성경과 영성 생활의 관계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발현하시어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완성하기 위해 수난받아야 했던 당신의 사명을 구약의 율법서와 예언서의 증언을 통해 설명하셨다. 그분께서는 공생활 기간 중에 당신을 따른 사람들에게 당신을 따르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구약의 율법 정신을 강조하며 설명하셨다. 사도들도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명에 관한 복음을 선포할 때, 늘 구약성경의 말씀을 바탕으로 설교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로 살아가라고 권고할 때에도 늘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야기했다.

 

계시 진리를 바탕으로 ‘믿을 교리’를 확립해 가던 고대의 교부들은 성경을 주석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성경 말씀으로 하느님의 메시지를 깨닫고, 예수님의 정체성을 정확히 이해했을 것이다. 교부들은 성경을 단순히 지적 호기심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주석하지 않았다. 영성 생활 발전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영적 의미를 살피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초대 사막의 은수자들은 성경 말씀에 직접 다가갔다. 수도 생활의 처음부터 끝까지 늘 성경 말씀에 머물면서 주님의 가르침을 깨우치고, 성경 말씀을 곱씹으면서 영적 여정의 최고 단계에 다다르고자 열심히 노력하였다.

 

중세 서방 교회의 수도자들도 이와 같은 정신을 계승하였다. 수도자들은 늘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성경 말씀으로 기도하였다. 결국 중세 중기의 수도원에서는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고 관상하는 방법 ‘거룩한 독서’를 체계화했다. 이로써 성경 말씀에서부터 출발하여 실천하는 영성 생활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다만 안타까운 일은 비슷한 시기에 세속에서 대학이 설립되어 지성 활동이 늘어난 영향으로 교회에 스콜라 신학이 출현하고 조직신학이 확립되어 성경 해석과 영성 생활이 분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몇몇 수도자가 이러한 현상을 강력하게 경고하였지만, 결국 성경 말씀과 함께하는 영성 생활은 몇몇 수도원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교회 구성원은 영성 생활마저 사변적 지성 활동에 기반을 두고 실천하여 중세 후반에 이르러 그릇된 영성 생활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근세 초기에는 인간의 의지와 정감적 감각에 기반을 둔 영성 생활이 새롭게 등장했다. 이에 성경 말씀을 가깝게 대하고 묵상하는 분위기가 잠시 확산되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영성 생활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심을 가져 예수님의 공생활을 중심으로 복음서를 묵상하는 영성 생활의 기조를 만들었다. 그 덕에 성경 말씀을 기반으로 영성 생활을 하는 전통이 조금이나마 복원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근세 중기 이후에 인류는 지성을 중시하는 사조를 만들면서 교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즉 계몽주의, 실증주의, 역사주의 등의 출현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성을 함께 논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쳐진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성경 말씀 묵상과 함께하는 교회의 전통적 영성 생활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고고학과 문헌 비평학에 기반을 둔 역사비평 방법이 성경 해석 분야에서 거의 유일하고도 최상의 방법론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성경에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가

 

오늘날 영성 생활은 성경 말씀과 그다지 깊은 관계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영성 생활은 윤리적 권고를 중심으로 실천에 비중을 둔 수덕 생활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또한 인간 내면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심리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전개되는 형국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영성 생활이 어느 곳에서 출발해야 하는지, 어느 곳을 향해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하면서 방향을 잃고 엉뚱한 곳을 맴돌고 있다. 성경 말씀 역시 역사적 비평을 통해서만은 알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성서신학이 현대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올바른 모습을 제시해 주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이성 최상주의’라는 자신의 꾀에 걸려 넘어져 성경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 영성 생활에서 성경 말씀을 방향타로 삼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이러한 혼돈에서 우리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의미 있는 지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베네딕토 16세는 《나자렛 예수》라는 제목으로 총 세 권의 책을 펴냈다. 교황은 서문에서 이 책은 교도권 차원의 공식 문헌이 아니라 주님의 얼굴을 찾는 개인의 연구이므로 반론을 제기해도 무방하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교의신학자로서 오늘날 성서신학이 방법론적 한계 때문에 전통 그리스도론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근현대의 역사비평 성경 연구 방법론은 성경을 해석하는 데 나름대로 도움을 준 의미 있고 유효한 방법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한계도 지니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경 주석학은 역사적 관점을 과도하게 적용하여 성경을 늘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우리가 믿어야 할 그리스도를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부들의 전통적 해석 방법이던 성경 본문 이면에 숨은 영적 의미를 찾는 작업을 통해 성경에서 믿음의 그리스도를 제대로 찾아야만 우리의 영성 생활에 분명한 도움이 될 것이라는 관점이다. 이러한 지적은 오늘날 우리가 영적 성장을 위해 성경에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를 시사한다.

 

결국 우리의 영성 생활은 성경 말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야만 주님을 올바로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역사를 살펴보면, 성경 말씀을 지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고 과도하게 사변적 학문의 관점으로 접근했을 때, 성경 말씀과 영성 생활이 괴리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신앙으로 성경 말씀에 다가가 성경 말씀에서 주님을 제대로 만나야 한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해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총을 베푸시어 주님과 하나 되는 체험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성경 말씀이 없는 기도 생활과 영성 생활은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우리를 잘못된 영성 생활로 이끌 수 있다.

 

필자가 2년 동안 강조하고자 한 것도 바로 이 점이다. 독자 여러분이 성경 말씀과 늘 함께하는 영성 생활을 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며 연재를 마친다. 주님의 은총이 항상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성서와 함께, 2013년 12월호(통권 4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