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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 임숙희 레지나

by 파스칼바이런 2018. 6. 12.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1) 기도하는 사람, 바오로

임숙희 레지나

 

 

땅끝까지 복음을 전했던 초대 교회의 위대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 삶의 특별한 주제인 기도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새해, 교회가 제정한 ‘신앙의 해’에 로마서의 기도 본문을 통해 ‘기도하는 사람, 바오로’의 모습을 따라가며 하느님 앞에서 사는 근본 자세가 무엇인지, 바오로가 전한 ‘복음’에 맞는 삶이 무엇인지 성찰하려 한다.

 

바오로도 기도하는 사람인가?

 

기도는 인간의 ‘영적 체험’의 절정이며 인간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내밀한 관계로 들어간다.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은 피조물인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에서 제자들이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라고 예수님께 요청한 것은 오늘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되풀이되는 기도이기도 하다. 기도를 배우는 데는 여러 가지 길이 있지만 성경의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 기도의 본질과 자세를 가장 많이 배울 수 있다. 구약의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솔로몬부터 신약의 예수님, 사도들, 마리아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다양한 기도의 인물을 소개한다. 그렇다면 신약성경 서간 대부분을 쓴 사도 바오로도 성경의 ‘기도하는 사람’ 대열에 포함될 수 있을까?

 

바오로가 신학자와 선교사이기 전에 먼저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서간 곳곳에서 드러난다. 바오로는 서간을 시작할 때마다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다. 그에게 기도는 신자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자신이 복음을 전해 준 신자들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그로 하여금 항상 하느님에 대한 감사 기도가 터져 나오게 한다. “먼저 여러분 모두의 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이 믿음이 온 세상에 알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로마 1,8).

 

바오로는 항상 스스로 먼저 기도하고 신자들에게 기도하라고 권고한다. 첫 서간인 테살로니카 1서부터 거의 마지막 서간인 로마서에 이르기까지 기도하라는 권고를 되풀이한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바오로의 권고를 실천하기 위해 교부들은 사막으로 들어갔다. 그 말씀에 영감을 받은 성인 성녀들은 성령에 이끌려 깊은 기도 생활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았다.

 

바오로는 신자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부탁도 자주 한다. 그는 신자들의 기도가 그의 선교에 협력하는 중요한 영적 지원이며, 기도의 힘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나를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나와 함께 싸워 주십시오”(로마 15,30).

 

바오로에게 기도는 단지 개인적 내면생활의 한 측면에 머물지 않는다. 그에게 기도는 내적 사도직으로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복음을 전하는 외적 사도직과 병행한다. 바오로는 열렬한 복음 선포자이자 하느님께 무릎을 꿇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분 아드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내 영으로 섬기는 하느님께서 나의 증인이십니다”(로마 1,9).

 

바오로 서간에도 기도 자료가 있을까?

 

바오로의 기도에 대해 알아보려면 가장 먼저 그가 사용한 기도 용어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므로 전부가 기도 자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바오로의 기도라는 특별한 주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서간에서 특별히 기도 본문이라고 할 수 있는 ‘지도’가 필요하다. 바오로는 초세기의 어느 신약성경 저자보다 기도 용어를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먼저 바오로 서간에서 전례용 기도나 시편 저자들처럼 하느님을 2인칭 ‘당신’이라고 부르며 바오로가 지어낸 기도문을 찾볼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이 어려움 때문에 바오로의 기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바오로 서간에서 기도 자료를 구분하기 위해 오랫동안 진지하게 연구하고 논쟁해 왔다.

 

여러 견해가 있으나 바오로 서간에서 기도 본문을 파악해 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오로와 동시대(초세기) 유다인이 바쳤던 세 가지 기도 형태인 찬미, 중재, 감사 기도에 바탕을 두고 서간에 나오는 다양한 기도 용어를 분류하는 것이다. 이 구분의 근거는 바오로 당시에 유다인이 회당과 집에서 매일 바치던 기도인 ‘세모네 에스레(Shemoneh Esreh)’이다. 이 기도문은 100년경 가말리엘 2세가 최종 편집한 것으로, 18개의 간구문으로 이루어져 있어 ‘18 간구 기도문’이라고 불린다. 모든 유다인은 이 기도문을 아침, 낮, 저녁 하루 세 번씩 기도할 때 사용하였다.

 

세모네 에스레의 앞에는 ‘찬미’ 기도 세 개(1-3), 마지막에는 ‘감사’ 기도 세 개(16-18)가 나온다. 그 중간에 나오는 열두 개의 기도(4-15)는 죄와 회개, 죄와 용서, 바른 깨달음과 구속의 소망, 영혼과 육체의 치유, 땅의 풍요,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과 재건, 하느님의 통치 희구, 기도의 응답 등에 대한 ‘중재’ 기도이다. 바오로의 기도가 세모네 에스레의 기도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를 뒷받침하는 본문은 없다. 하지만 찬미, 중재, 감사라는 세모네 에스레의 기도 구조는 바오로 서간에도 존재한다. 이것이 충실한 바리사이였던 바오로의 기도 생활의 기초 구조르 반영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바오로의 기도는 단지 유다인의 기도라는 과거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초대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에 바탕을 두고 새롭게 변하였다. 유다인의 기도와 바오로의 기도의 본질적 차이점은 바오로가 ‘감사’를 가장 중요한 기도로 본다는 점이다. 바오로에게 감사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에 대한 응답으로, ‘그리스도인의 전형적 자세’이다.

 

바오로의 기도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중재’ 기도이다. 이웃 사랑의 구체적 표현인 중재 기도의 바탕은 하느님 은총에 대한 체험이다. 먼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남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바오로는 자신을 우해 기도를 바치지 않는다. 그가 바치는 기도의 대부분은 신자들을 위한 중재 기도이며, 기도는 사도직의 필수 도구였다. 바오로 서간에 나타나는 감사와 중재 기도 등 여러 기도 형태의 토대는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신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관상과 찬미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에게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사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로마서가 바오로의 기도를 배우는 자료가 될 수 있을까?

 

로마서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읽고 해석할 수 있다. 과거에 로마서는 바오로의 신학을 체계화한 서간이라고 여겼지만, 지금 바오로 학자들은 대부분 로마서도 다른 바오로 서간처럼 초세기에 구체적 상황에서 특별한 문제를 안고 살아가던 로마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사목 서간이라고 여긴다. 로마서에는 감사, 중재, 찬미와 관련된 바오로의 기도 용어가 다른 어느 서간보다 많이 담겨 있다. 로마서의 구조에서 중요한 위치마다 기도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안에서 바오로는 기도를 ‘그리스도인 삶의 전형적 자세’로 소개하며,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깊어져야 한다고 권고한다. 나아가 우리는 로마서의 기도를 통해 ‘기도하는 사도’로서 바오로의 정체성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마치면서 바오로에게 함께 기도를 드리자. “바오로 사도여, 우리가 깊은 신앙을,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희망을, 주님에 대한 불타는 사랑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순결한 양심으로 교회는 섬기는 사도가 되도록, 우리 시대의 어둠 한가운데에서 교회의 아름다움과 진리에 대한 증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바오로가 죄수로 갇혔던 로마 레골라 성당의 기도문).

 

[성서와 함께, 2012년 1월호(통권 430호)]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2) 로마서의 구조에서 나타나는 여러 기도

임숙희 레지나

 

 

로마서를 바오로의 기도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때, 바오로가 코린토에서 로마서를 쓰던 57년경의 로마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바오로의 상황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로마서의 역사성에 관심을 가지면 하느님의 말씀이 전달되는 구체적 시간과 장소를 토대로 로마서에 나타난 바오로의 기도를 이해할 수 있으며, 해당 기도 구절의 배경도 파악할 수 있다.

 

로마 그리스도교 공동체

 

바오로는 로마서 머리말(1,1-7 참조) 끝자락에서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로마의 모든 신자”(1,7ㄱ)에게 은총과 평화를 비는 인사를 한다. 로마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푸테올리 항구(사도 28,13 참조)에서 로마로 통하는 고대 로마의 상업도로를 따라 로마에 들어온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최초의 확실한 근거지를 회당에서 찾았을 것이다.

 

다시 로마에 있던 회당은 20-50개 정도로 추정되는데, 권위 있는 중심 조직체는 없었다. 그보다 로마의 유다인들은 자발적 연합체로 조직되어 있었다. 로마 주민 가운데 많은 이방인은 유다교의 믿음과 실천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특히 유일신 신앙, 높은 차원의 윤리, 안식일 준수, 그리고 특정 음식을 금욕하는 데 호의적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믿음과 신앙을 실천하는 로마 유다교 공동체에게서 동료 이방인보다 더 우월한 생활방식을 보았다. 로마의 유다교 공동체도 스스로 이 우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방인들 가운데 소수만이 할례를 받고 완전히 유다교 생활방식으로 개종하였고, 대다수 사람은 로마 유다교 공동체와 결합되어 있으면서 그들의 신앙과 의식을 선택하여 받아들였다.

 

로마의 첫 그리스도인들은 회당을 토대로 차츰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 고고학자들은 초세기 로마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로마에서 가장 가난한 두 개의 유다인 구역에 살았는데, 그곳은 작은 주택들이 밀집된 지역이었다는 것을 밝혀 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그리스도인과 유다인 사이에 소요가 많이 일어났던 40년대 말,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칙령으로 유다인 대표들이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바오로가 “예수님 안에서 나의 협력자들”(16,3)이라고 부르는 프리스카와 아퀼라 부부도 이 사건으로 추방되어 코린토에 가서 바오로를 만나게 되었고, 로마 교회에 대한 소식을 그에게 전해 주었을 것이다(사도 18,2 참조).

 

이 사건이 일어난 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회당과 갈라져 독자 노선을 걷게 되었다. 몇 년 후 클라우디우스가 죽자 많은 유다계 그리스도인이 로마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방계 그리스도인들과 율법 준수와 음식 문제 등으로 갈등을 겪으면서도 신앙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바오로가 로마서를 쓸 때 로마에는 ‘교회(에클레시아)’라고 부를 수 있는 견고하게 일치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도시 전체에 흩어져 있는 개인 거주지에서 나뉘어 만나고, 가정 교회에서 모임을 가지곤 하였다.

 

바오로의 상황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 그는 중대한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갈라디아 교회에서 율법 때문에 자신이 전한 복음이 허사로 돌아가는 정신적 위기를 겪은 바로 뒤였다. 사도직 면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쿰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한 후(15,19 참조), 더는 그곳에서 할 일이 없다고 여기고 스페인 선교 계획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스페인으로 가기 전에 바오로는 이방인 교회에서 모든 성금을 예루살렘 성도에게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다가 로마에 잠시 들릴 예정이었다(15,22-33 참조).

 

바오로는 왜 자신이 창립하지도 않은 로마 그리스도 공동체에 그토록 체계적이고 긴 서간을 보냈을까? 아마도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1,16)인 복음의 본질을 로마 공동체의 신자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구체적 삶에서 체험하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이 목적 외에 이방인의 사도로서 더 많은 신자를 얻기 위한 선교적 목적, 공동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사목적 이유, 로마 공동체에 자신을 소개하고 그의 복음을 변호하기 위한 것 등 다른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로마서의 구조 안에서 본 기도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는 첫걸음으로, 로마서의 구조에서 기도 자료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알아보자. 로마서의 중요한 대목에서 바오로의 감사 기도, 탄원이나 중재 기도, 찬미가와 영광송을 찾아볼 수 있다. 아래 표는 로마서의 기본 설계도이다.

 

1,1-7: 시작 인사

1,8-17: 입문(1,16-17의 주제 구절로 마무리)

1,18-4,25: 신앙으로 의로워지는 유다인과 이방인

5-8장: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삶

9-11장: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관계와 이스라엘의 장래

12,1-15,13: 공동체에게 하는 권고

15,14-21: 바오로의 사도직

15,22-33: 바오로의 여행 계획

16,1-27: 안부와 마지막 인사

 

바오로가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 안부라는 서간의 전형적 요소 세 가지를 담은 서문(1,1-7 참조)을 마무리하며 로마 공동체에 ‘은총과 평화’를 비는 기도를 한다(1,7ㄴ 참조). 서간 마지막에서도 “우리 주 예수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16,20)고 기도하여 ‘은총’이라는 용어가 서간의 처음과 끝을 여닫는 액자 틀을 구성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1,7; 16,20 참조). 이어서 ‘감사하다’는 동사로 시작되는 ‘감사 대목’(1,8-15 참조)에서 세 구절이 감사와 탄원 기도에 할애된다(1,8-10 참조).

 

1,18-4,25은 유다인과 이방인이 모두 신앙으로 의로워진다는 주제를 담고 있다. 이방인과 유다인은 각기 다른 이유에서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지 않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신앙으로 의로워진 그리스도인의 새 삶을 다루는 5-8장의 중간 부분인 6장과 7장에서 바오로는 죄에서 벗어나 이로움의 종이 된 것에 대해(6,17 참조), 죄의 법에 빠진 몸을 구해 준 것에 대해(7,25 참조)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8장은 ‘성령 안의 삶’을 다룬다. 기도와 성령의 뗄 수 없는 관계(8,15-17.23.26-27 참조)와 ‘우리를 위해’ 천상에서 기도하시는 중재자인 그리스도의 모습을 소개한다(8,34 참조). 508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찬미가(8,31-39 참조)로 마무리되며, 1-8장의 내용을 요약한다.

 

5-8장에서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과 희망을 설명한 후, 9-11장에서 바오로의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에 따른 구원을 거부하는 유다인들에게 옮아간다. 바오로는 세 장에 걸쳐 자신을 동족인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그의 ‘탄원 시편’을 하느님께 대표로 바치는 사람으로 소개한다. 9-11장은 구조상 구약성경의 탄원 시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이스라엘의 위치를 성찰하는 9-11장은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을 찬미하는 영광송으로 마무리된다(11,33-36 참조).

 

12,1-15,13은 로마 공동체에 전하는 구체적 권고를 담고 있다. 이 대목은 공동체가 일치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두 개의 기원 기도(15,5-6; 15,13 참조)에서 절정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사도직 계획을 전하면서 로마서에서 처음으로 신자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해 달라고 간절히 청한다(15,30-33 참조). 로마서는 바오로가 자신의 복음 선포를 통하여 모든 민족을 믿음에 순종하도록 이끄신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바라는 장엄한 영광송으로 끝난다(16,25-27 참조).

 

[성서와 함께, 2012년 2월호(통권 431호)]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3)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임숙희 레지나

 

 

지난 두 달에 걸쳐 바오로가 왜 기도하는 사람인지, 로마서 전체 구조에서 기도가 어느 곳에 자리 잡고 있는지 보았다. 로마서에서 처음 다루게 될 기도 본문은 바오로가 로마서 서문(1,1-7 참조)을 마무리하면서 로마 신자들에게 은총과 평화를 비는 기도이다(1,7 참조). 이 기도에서 바오로는 자신을 ‘하느님의 복을 인간에게 도달하게 하는 중재자’로 소개하면서 우리가 서로 ‘은총과 평화’를 빌 수 있도록 초대한다.

 

문맥 보기(1,1-7)

 

바오로 시대의 일반적 편지 양식은 본론을 시작하기 전에 발신자와 수신자, 그리고 간단한 안부를 기록하는 것이었다. 안부에는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건강과 행운을 비는 말 등이 포함되기도 하였다. 바오로도 로마서를 시작할 때 이 양식을 따른다. 발신자와 수신자, 그리고 안부가 포함된 서문으로 시작하면서 자기 목적에 맞게 다른 내용을 덧붙여 확장한다(1,1-7 참조). 바오로는 1,1에서 “그리스도의 종,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복음을 위해 따로 가려내어진 사람”(필자 직역)이라는 세 가지 표현으로 로마 신자들에게 자신을 소개한다. 이 용어들은 그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부르심(회심) 체험과 관련된 삶을 암시한다. 바오로는 ‘하느님의 복음’(1,2-4 참조),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선포하는 사도가 되는 사명을 주님에게서 받았다(1,5 참조). 그는 수신자인 로마 신자들도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로마에 있는 모든 이들”(필자 직역 1,7 참조)이라고 긴 문장으로 표현한다. 바오로는 이들에게 ‘은총과 평화’를 비는 기도로 로마서를 시작한다.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로마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필자 직역 1,7 참조).1)

 

은총과 평화

 

바오로는 로마서뿐 아니라 대부분의 다른 서간에서도 ‘은총과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로 시작한다. 더욱 짧은 인사 형태는 테살로니카 1서에 나타난다.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1테살 1,1). 더 후대에 쓰인 편지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인사에 은총과 평화의 기원인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로마 1,7; 1코린 1,3; 2코린 1,2; 갈라 1,3; 필리 1,2, 필레 3절)를 덧붙인다. 이런 강복(축복의 기원)은 전례에서 사용되는 말과 비슷하다. 바오로가 쓴 서간에서 이런 표현이 자주 발견되는 이유는 바오로 서간이 원래 공동체 전례 모임에서 읽혔기 때문이다.

 

‘은총’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카리스(χαριs)’는 유다 종교 문학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단어이다. 아마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해석하기 위하여 이 단어를 그리스도교에 사용한 첫 번째 신학자일 것이다. 고전 그리스어에서 이 단어는 선물하는 사람의 순수하고 선한 마음과 그 선물을 받는 사람의 감사한 마음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이런 뜻을 알면 바오로가 사용한 ‘은총’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나아가 하느님은 항상 변함없이 인간에게 주시는 분이고 모든 인간은 그분의 은총에 의지하여 살아간다는 사실 때문에, 바오로는 구약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에 들어 있는 ‘감사’의 의미도 받아들여 ‘카리스(χαριs)’를 신앙에 관련된 다양한 문맥에 사용한다. 문맥에 따라 ‘은총’은 여러 가지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근본 개념은 하느님의 자비와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관대함을 강조한다. 따라서 ‘은총’은 위대하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본질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께서 일하심으로써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선물 받았다. 이 ‘은총’에 대한 지식은 바오로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해석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삶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느님과 그분의 은총에 달렸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일까? 바오로의 사고에 비추어 보면 그리스도인은 ‘은총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하느님께서 거져 주시는 복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은총’이 지닌 깊은 신학적 의미는 단순한 안부 인사를 넘어서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 즉 인간은 자기 일이나 업적 때문이 아니라 철저히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과 관계된다(1,16-17 참조).

 

나아가 바오로는 ‘은총’에 ‘평화(ειρηνη)’라는 말을 덧붙인다. ‘평화’는 유다인들의 인사인 ‘샬롬’을 연상시킨다. ‘평화’는 단지 다툼이나 전쟁이 없고, 인간 영혼이 내적으로 평온한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번영과 성공 등 충만한 자아실현을 의미하는 개념을 상기시키면서도 ‘평화’라는 인사가 복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6). “이 법칙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자비가 내리기를 빕니다”(갈라 6,16).

 

그러므로 ‘평화’라는 용어 뒤에는 인간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의 풍요로움을 암시하는 유다인의 사고가 존재한다. 나아가 ‘평화’는 구약의 예언서에서 메시아의 도래와 연결된 하느님의 종말론적 선물이기도 하다(이사 9,5-6 참조). 바오로는 ‘평화’라는 유다인의 평범한 인사를 그리스도인을 위한 축복으로 변화시킨다. ‘평화’라는 말은 ‘은총’처럼 하느님의 행위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가장 깊은 차원에서 인간이 누리는 ‘평화’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화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은총’과 ‘평화’라는 선물은 바오로 자신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온다. 따라서 ‘은총과 평화’를 비는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토대를 부여한다. 그리스인과 유다인이 사용한 ‘은총’과 ‘평화’라는 두 개념이 혼합되어 서간 첫머리에 나오는 축복의 정식(定式)이 된 것은 바오로 시대에 매우 드물었다. 이 축복은 바오로 서간의 경우, 바오로가 자신을 ‘구원의 특별한 신적 선물을 중재하는 사람’으로 여겼다는 점을 보여 준다. ‘은총과 평화’는 그리스도인들끼리 따뜻한 애정을 표현하는 것뿐 아니라 권위를 지닌 축복의 인사이기도 하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서로 축복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로마 12,14).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3,9).

 

바오로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

 

바오로가 1,7에서 ‘은총’과 ‘평화’라는 말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사할 때,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신자들을 위해 그들을 보살피는 아버지요 사목자로서 기도하고 있다. 바오로의 마음을 감히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는 이런 심정이었으리라!

 

“나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본질상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신앙을 성숙시키기 위해 새 것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이미 받은 ‘은총’의 체험을 매일 깊이 있게 배우십시오. 피조물이 하느님 앞에서 지녀야 할 유일한 자세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인간에게 주신 구원의 선물에 감사하는 것임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항상 하느님과 화해하여 삶 전체를 하느님께서 주신 충만한 생명력으로 활짝 꽃 피우십시오. 또 만나는 형제자매에게 온 마음을 다해 ‘은총’과 ‘평화’를 빌어 주십시오.”

 

1) [ ] 안의 말은 원문에 없지만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삽입하였다.

 

[성서와 함께, 2012년 3월호(통권 432호)]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4) 나의 하느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임숙희 레지나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 모두에 대하여 나의 하느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신앙이 온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입니다”(필자 직역 1,8 참조).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1,7 참조)는 축복 기도에 이어 ‘감사 대목’이라고 할 수 있는 1,8-10이 이어진다. 바오로는 자신의 서간을 자주 하느님께 바치는 감사로 시작한다. 그리고 갈라티아서처럼 감정에 복받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실제 문제를 청중에게 바로 표현하려 할 때는 ‘감사 대목’을 생략하기도 한다(갈라 1,6 참조). 대개 바오로 서간의 ‘감사 대목’에는 감사와 청원 기도가 함께 등장한다(에페 1,5 이하; 필리 1,3 이하; 콜로 1,3 이하; 필레 4절 이하; 2코린 1,1 참조).

 

감사는 기도의 정원에 첫 번째로 주는 물

 

로마서의 ‘감사 대목’도 감사 기도(1,8)와 청원 기도(1,9-10)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감사 기도’를 바치고 이어서 ‘청원 기도’가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도록 초대한다. “기도의 정원은 먼저 감사로 물을 주면 더욱 풍요로워지게 된다”(도날드 코간).

 

축복 인사, 영광송, 그리고 청원이나 중재 기도 등 바오로의 기도 언어는 다양하다. 이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감사의 언어’이다. 내가 바오로를 직접 만나서 “당신의 기도 생활을 변화시키고 영감을 준 말이 있나요?”라고 질문한다면, 그는 눈을 빛내며 ‘감사’라고 즉시 대답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24시간 동안 어떤 불평도 하지 않고 모든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사람이 있을까? 바오로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신 새롭고 놀라운 행위에 대한 지식이 그의 삶을 철저하게 바꾸었기에, 그는 항상 마음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감사를 표현하지 않고서는 그의 서간을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슴에서 기도가 터져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바오로가 감사드리는 이유

 

‘감사하다’는 그리스어 동사(에우카리스테오)는 바오로 서간에서 24번 나온다. 일반적 기도를 가리키는 전형적 동사 ‘기도하다(프로세우코마이)’ 보다 더 많이 사용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오로 서간 전체에서 바오로가 감사를 바치는 동기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독자들을 위한 하느님의 구속 활동 때문에 감사드린다. 이것은 과거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그분의 인격 안에서 드러났고, 현재에도 성령의 활동 안에서 계속 표현된다(1코린 1,4-9; 필리 1,6; 콜로 1,12-14; 1테살 1,4; 2테살 2,13-14 참조). 그러므로 바오로는 감사 기도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속 활동을 암시하는 ‘그분을 통해서’, 또는 ‘그분의 이름 때문에’(1,5 참조)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둘째, 바오로는 신자들이 그가 선포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토대로 그들이 신앙과 희망과 사랑으로 살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1코린 1,6; 필리 1,5; 콜로 1,6; 1테살 1,3-10; 2,13-14; 2테살 2,14 참조). 셋째,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이 계속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로마 1,8; 에페 1,15; 콜로 1,4-5; 1테살 1,3; 2테살 1,3-4; 필레 5절 참조).

 

1,8에서 바오로가 감사 기도를 드리는 동기는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로 이어지는 문장에서 표현된다. 바오로는 온 세상에 알려진 로마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때문에 감사드린다. 언제 누구에 의해 로마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전파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당시 잘 닦인 로마의 도로망을 통해 이름 없는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로마 공동체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바오로는 로마를 방문한 적이 없지만 로마인들의 신앙에 대한 소식을 듣고 큰 기쁨에 차서 감사 기도를 드린다. 이 기도는 독자들에게 그들이 얻게 된 ‘신앙’의 선물에 대해 스스로 감사 기도를 드리고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대해서도 돌아보라는 초대이기도 하다.

 

바오로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이 부족하다고 전제하며 그들이 회심하기를 바라면서 로마서를 시작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오로는 무엇보다 로마서의 메시지를 통해 로마인들이 이미 잘 살고 있는 신앙의 본질을 더욱 깊이 이해하기를 바란다. 바오로가 로마에 복음을 전하려고 간절히 원한 것은 로마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더욱 강화시키려는 데 있다(1,11 참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에게

 

바오로의 감사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대부분 하느님이다. 바오로는 여러 이유로 친구나 후원자에게 감사를 드릴 때도 있지만(필리 4,10-18 참조), 하느님을 모든 복의 궁극적 원천으로 여긴다. 이것이 그리스와 로마 문화권에서 사용하던 감사와 바오로의 감사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는 구약의 시편 저자들처럼 ‘나의 하느님’이라는 칭호로 하느님을 부르며 감사 기도를 바치는데, 이로써 자신과 절대적이고 무한한 존재와의 내밀한 관계를 표현한다. “저는 모태에서부터 당신께 맡겨졌고 제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하느님이십니다”(시편 22,11). 바오로에게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 그의 삶에 일어난 모든 사건과 마음 안에 일어나는 온갖 섬세한 움직임을 다 아시는 분이다.

 

바오로는 ‘나의 하느님’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δια Ιησου Χριστου)’라는 표현을 덧붙인다. 그리하여 바오로의 기도 언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 두 가지를 성찰하도록 초대한다.

 

첫째, 바오로가 기도를 바치는 대상은 하느님이지 그리스도가 아니다. 이 점이 바오로의 기도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둘째, 바오로에게 기도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다. 바오로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느님과 새로운 구원의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한 ‘아버지의 아들’이다. 그분은 인간이 아버지인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로마서에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무엇을 얻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여러 가지를 열거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은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5,1 참조),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52 참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받게 되었으며(5,9 참조),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다(5,11 참조).

 

이렇게 볼 때 바오로가 행한 감사 기도의 근본 중심이 왜 아들을 통한 하느님 아버지의 구속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예수 그리스도가 왜 ‘감사’의 중재가 되는지 알 수 있다. 콜로새서 저자는 바오로의 생각을 아름답게 표현한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콜로 1,13-14). 이 관점은 그리스도교의 기도와 다른 종교의 기도가 구분되는 특징이다.

 

바오로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

 

1,8의 감사 기도에서 우리는 기도 생활에 빛을 비추어 주는 중요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주어지지 않은 복이나 건강을 위해서만 기도하지 말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삶에서, 나아가 내가 만나 보지 못한 지구 반대쪽의 사람들에게도 하느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깊이 살펴보는 것이 기도 생활, 나아가 영성 생활 전체에 대단히 중요하다.

 

성령께서 열어 주시는 ‘신앙의 눈’은 세상의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찾아내고 감사를 드릴 수 있게 한다. ‘감사’를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여러 가지 봉사 활동과 신심 행위를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노래를 잃어버린 카나리아처럼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자신이 모든 일에 감사 기도를 드리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이 피조물로서 자신을 지은 창조주에게 ‘감사(에우카리스티아)’가 터져 나오도록 영감과 힘을 주는 사람이다.

 

[성서와 함께, 2012년 4월호(통권 433호)]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5) 하느님의 뜻에 따라 여러분에게 갈 수 있기를

임숙희 레지나

 

 

“그분 아드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내 영으로 섬기는 하느님께서 나의 증인이십니다. 나는 끊임없이 여러분 생각을 하며, 기도할 때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어떻게든 내가 여러분에게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빌고 있습니다”(로마 1,9-10)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로마인의 신앙에 감사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1,8 참조), 하느님의 뜻에 따라 로마 교회를 방문할 수 있기를 간절하게 기도한다(1,9-15 참조). 위대한 사도 바오로도 오늘 우리가 매일 체험하듯 불확실한 상황에서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온전히 맡기는 것을 기도하는 가운데 인내하며 배워야 했다.

 

그분 아들의 복음 선포를 통해 내 영으로 섬기는 하느님

 

바오로는 감사 기도에 이어 1,9-10에서 자신이 로마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알린다. 그는 이 기도의 증인으로 “그분 아드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내 영으로 섬기는 하느님”을 내세운다. 오직 하느님만이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움직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동사 ‘섬기다(라트레우오)’는 말은 원래 제사와 관련된 예배 용어이다. 바오로는 벤야민 지파 출신이자 바리사이로서 성전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 제사와 전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런 예배 용어를 하느님 아들을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도 직분과 관련시킨다. 바오로에게 복음 선포는 ‘내 영으로’ 즉 그의 지성과 의지, 사랑 등 자신의 삶 전체로 하느님을 섬기는 도구이다. 그는 훌륭한 성과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시고, 그가 어떤 상황에서든 온전히 하느님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 사도직을 수행한다.

 

이런 자세는 바오로가 자신의 사도직을 단순히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거룩한 ‘사제직’(로마 15,16)으로 여겼다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나아가 그는 특별한 봉사 직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도 하느님께 바치는 거룩한 예배로 여겼다(로마 12,1 참조). 그리스도는 희생되신 ‘파스카 양’(1코린 5,7)이며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마 3,25)로 내세우셨다는 데 그 근거가 있다. 바오로가 자신이 로마인들을 기억하고 있다고 알리면서 “그분 아드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내 영으로 섬기는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집어넣은 것은, 모든 민족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려는 자신의 사도직(로마 1,5 참조)이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며 하느님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로마인들에게 알리려는 것이다.

 

끊임없이 여러분을 생각하며

 

바오로는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운 뒤 로마인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른 서간에서도 기도할 때 신자들을 기억한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바오로 서간에서 ‘기억하다’는 중요한 기도 용어이다(2티모 1,3 참조).

 

바오로에게 기도란 하느님의 현존 앞에 머물러 사람들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 기억하는 것’이다. “저는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느님과 당신을 함께 생각할 것입니다”(조지 맥도날드). 끊임없이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진정한 사랑의 표지이다. 여기서 바오로는 보이지 않는 로마인들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과장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사도로서 그가 본질적으로 지닌 영적 애정을 표현한다.

 

그는 가슴 속에서 샘솟듯 솟아나는 애정을 감추어 둘 수 없는 사람이었다. 바오로는 항상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는 데 관심이 많았고 그것을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 우정의 그물은 그가 사도직을 확장시키는 데 중요한 도구이기도 하였다. 바오로는 로마인들을 만나기 전에 하느님 앞에서 그들을 항상 기억한다는 말로 이메일이나 전화보다 훨씬 더 차원이 깊고 단단한 기도의 영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로마로 가려는 이유

 

바오로는 다른 서간에서 종종 기도 안에서 ‘끊임없이 생각한다’는 말을 쓴다. 그리고 이어서 그가 ‘생각하는 것’의 내용을 적는다(에페 1,16-19); 필리 1,3-5; 1테살 1,2-3; 2티모 1,3-5; 필레 4-6절 참조). 로마서가 이 유형을 따른다면 로마 방문에 대한 바오로의 갈망(10절)은 그가 바치는 기도 내용(9절)이 된다. 그가 로마에 가기를 간절히 원하는 이유는 1,11-15에 서서히 드러난다.

 

첫째, ‘영적 선물’을 나누어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이다(11ㄴ절). ‘영적 선물’이란 아마도 복음 설교나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일 것이다. 둘째, 그것을 통해 바오로는 자신과 신자들이 다 함께 격려받기를 바란다(12절). ‘힘을 북돋다’와 ‘격려하다’는 서로를 비추는 말이다. 서로 격려해 주는 데서 막강한 힘이 나오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목자도 신자들의 신앙에서 격려받을 필요가 있으며, 그것이 그의 사도직에 커다란 힘이 된다는 것을 신자들이 알기 바란다. 바오로가 단지 주려고만 했다면(일방통행식의 사목) 결국 그는 인간적으로 매우 가난한 사람으로 남았을 것이다. 셋째, 바오로는 다른 교회처럼 로마 교회에서도 어떤 ‘열매’를 거두려 한다(13절). 아마도 이 열매는 모교회 예루살렘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모금을 의미할 것이다(15,28 참조). 로마에 가고 싶어 하는 갈망은 15절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바오로가 로마에 가려는 것은 개종자들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로마에서 신자가 된 사람들에게 그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을 알려 그들을 확고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성하는 데 있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바오로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자신이 로마에 갈 수 있기를 기도했지만 그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긴다. 그는 로마 방문 계획이 여러 차례 무산되는 것을 보면서(13절; 참조 15,22),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달렸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10절; 참조 15,32). 나아가 ‘하느님의 뜻’은 그의 생애를 각인하는 말이다. 바오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뜻’이었다(2코린 1,1; 콜로 1,1; 에페 1,1; 2티모 1,1 참조). 그래서 그의 마음은 그릇을 빚는 도공처럼 자기 삶을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의 뜻’에 항상 일치해 있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바오로가 하느님께 바치는 깊은 경배이기도 하다.

 

이렇듯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도의 모습은 구약성경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전형적 자세를 상기시킨다.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그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더 정확하게는 그분의 뜻과 조화를 이루는 그의 기도를 그분이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시편 18,7; 65,3; 예레 29,12 참조). 그러므로 바오로는 굳은 신뢰로 기도한다. 그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스멀스멀 스며드는 유혹과 의심을 알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내맡긴 예수님을 닮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바오로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

 

“바오로는 주어진 때가 당도할 때까지 시간을 두고 기다릴 줄 안다. 헤아릴 수 없는 섭리에 모든 것을 맡김으로써 자신의 영혼으로 하여금 합당한 뜻을 좋게 한다”(요한 크리소스토모). 바오로는 개인의 삶과 봉사 직분에서 지금 인간적으로 좋게 보이고 사도직에서도 효과 있게 보이는 일조차, 하느님을 찬미하고 섬기는 데 도움이 되는 경우에만 좋은 것이라고 가르친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분이 원하는 때와 장소에서 그분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리라.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할 때가 많다.

 

[성서와 함께, 2012년 5월호(통권 434호)]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6)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임숙희 레지나

 

 

“그들은 하느님을 알고서도 그분께 하느님으로서 영광을 드리지 않았고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생각은 허망하게 되었고 지각없는 마음은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1,21 필자 직역).

 

바오로는 형제자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자기에게는 진정한 기도이며 영적 예배라고 로마인들에게 강조하였다(1,9-15 참조). 기도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 하느님의 거룩함에 매료된 사람의 마음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흠숭과 찬미의 노래이다(1,21 참조).

 

문맥 보기

 

바오로는 1,16-17에서 하느님의 구원 약속이 유다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향한다고 말한 뒤 1,18-4,25에서 복음의 핵심인 신앙에 의한 의화(義化)를 다룬다. 첫 대목 1,18-3,20에서는 죄, 분노, 심판에 대해 말한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거저 주시는 복음의 선물(3,21-26 참조)을 소개하기 위한 준비다. 바오로는 하느님을 알면서도 영광과 찬미를 드리지 않는 것(1,21 참조)이 모든 죄의 출발점이라는 데서 시작한다(1,18-32 참조).

 

하느님을 알면서도

 

1,18-32에서 바오로가 말하는 모든 내용의 주제는 ‘아는 것’과 관련된다. 하늘에서 하느님의 진노가 당신을 거부하는 사람들 위에 내려오는 데(1,18 참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느님께서 창조물을 통해 당신을 알 수 있게 하셨는데도 그것을 거부했다는 것(1,19-20 참조)과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여기고 영광과 찬미를 드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오로는 당대의 이방인과 유다인의 관점을 함께 취하면서 잘못을 바로잡는다. 하느님께서 창조물을 통해 당신을 명확하게 드러내셨다는 것은 이스라엘 지혜문학만이 아니라 당시의 이방인도 근본적으로 동의하는 주제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 필론은 “작품을 통해서 창조자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조물은 하느님의 그림자”라고 말한다(Leg. alleg. 3,96-99). 바오로는 여기에 찬성하면서도 창조물을 통해 하느님을 아는 것은 이방인이 생각하듯 인간 편에서 자기 능력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하느님 편에서 당신의 보이지 않는 본성인 권능과 신성함을 계시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도권은 하느님에게 있다(1,20 참조).

 

여기서 바오로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보고 감탄하는 데 머무르지 말고 ‘멈추어서’ 하느님을 체험하라고 강조한다. 봄날 푸른 나뭇잎 사이에서 작은 진주 알처럼 하얗게 반짝이는 태양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자신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명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릴 때까지 귀 기울여 들어 보라는 것이다. 이방인은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도 하느님을 체험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것이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는 이유이다.

 

바오로는 유다인의 관점도 함께 고려한다. 유다인은 이방인이 창조물을 통해 하느님을 알 수 있지만 그것이 하느님에게 이르지 않으면 우상 숭배에 바질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지혜 13-15 참조). 그러나 유다인의 차가운 지식도 하느님과의 생생한 만남에 이르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들도 참으로 하느님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바오로가 겪은 체험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 ‘안다는 것’은 마음으로 체험하는 것, 사랑하는 것이다. 바오로는 율법 학자로서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았지만 오랫동안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에서 하느님의 계시로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의 힘으로 감겨 있던 마음의 눈이 스르르 열리면서 본래 있던 것을 이해할 능력이 생겼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죽은 하느님의 아들에게서 하느님의 영광, 죄인인 자신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본 것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으랴?”(8,35 필자 직역) 바오로의 체험으로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끌어지지 않으면 하느님을 참으로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영광과 찬미를

 

이어서 바오로는 ‘죄’의 뿌리가 하느님을 알면서도 영광과 찬미를 드리지 않은 데 있다고 말한다. ‘영광을 드리다’는 말은 ‘아주 중요한 사람을 알아보는 것, 존경하는 것, 흠숭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을 세상과 자기 인생의 유일한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 하느님을 그분 영광의 ‘그림자’인 창조물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감사를 드리다’는 동사는 하느님을 ‘찬미하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바오로는 두 동사를 짝지어 인간이 하느님에게 다가가는 종교적 태도를 표현한다. 이는 하느님이 자신의 주님이자 세상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그분을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할 분을 고백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두 동사는 모두 기도하는 사람이 하느님께 다가가는 자세를 표현한 것인데, 아자르야가 우상 숭배를 강요하는 이방인 앞에서 바치는 기도(다니 3,26-45 참조)에도 나타난다.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칭송받으소서. 당신의 이름은 영원히 영광 받으소서”(다니 3,26).

 

아마도 바오로는 당대 로마 공동체의 구성원인 유다인과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유다인이 잘 알고 있는 ‘영광’이라는 단어와 이방인도 공유하는 ‘감사’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했을 것이다.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흠숭과 찬미를 드리지 않을 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가 살아가는 환경에 현존하는 하느님의 이웃마저 볼 수 없게 된다.

 

바오로가 1,21ㄴ에서 영광과 찬미를 드리지 않는 것을 인간 의식의 타락과 직접 연결하는 것은 바오로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그들의 생각은 허망하게 되었고 지각없는 마음은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1,21ㄴ 필자 직역).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존재하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려는 허망한 생각이 인간의 어리석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머리’를 지배하는 것은 ‘마음’이다. 심장이 굳어 버리면 생명을 가진 존재는 즉시 죽음에 이르듯, 마음의 어리석음이 깊어져 ‘어둔 밤’이 되어 버리면 하느님과 하느님을 닮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이 사라진다. “죄는 육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며, 악의 샘물에서 솟구치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패하면 정상적인 궤도에서 이탈하는 파탄을 가져오며 결국은 분별력을 잃고 맙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알아 모시지 못한 대가는 우상 숭배(23절)와 불결한 마음의 욕망(24절), 동성애(26-28절), 온갖 악한 행위(29-31절)로 이어진다.

 

바오로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

 

1,21에서 우리는 기도에 대해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성찰할 수 있다. 첫째, 하느님에게 영광과 찬미를 바치는 것은 내가 받은 은혜 때문인가? 아니면 하느님께서 존재하시고 그분이 무한한 사랑이시기 때문인가? 우리의 기도는 얼마만큼 순수한가? “그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감사드리고 찬미해야 한다. 하느님을 찬미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존재하시며, 하느님께서 스스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다는 것을 기뻐하는 일이다. 하느님의 현존을 마음 깊이 기뻐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시다. … 그게 전부다”(장 라 프랑스).

 

둘째, 인간이 더는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을 때 우상 숭배와 죄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 그 외에 어떤 다른 것도 아닙니다”(마더 데레사). 우리가 의식적으로 매일 기도라는 영양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우리 신앙은 순식간에 하느님의 이름을 붙이며 행해지는 온갖 문화에 휩쓸려 황폐한 사막이 될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2년 6월호(통권 435호)]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7) 나는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임숙희 레지나

 

 

“그런데 그대는 자신을 유다인이라고 부르면서 율법에 의지하고 하느님을 자랑하며(2,17) … 율법을 자랑하면서 왜 그대는 율법을 어겨 하느님을 모욕합니까?”(2,22; 필자 직역)

 

유다인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한 민족이었다. 그들에게 기도는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삶 전체였다. 그러나 그들은 특권 의식 때문에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죄’에 빠지게 된다. 바오로는 2,1-3,20에서 당대의 경건한 유다인의 죄를 지적하며 그들이 하느님과 맺고 있는 관계를 돌아보도록 초대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 앞의 삶’을 살지만 죄를 짓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부재한 삶’을 산다.

 

문맥 보기

 

바오로는 죄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아무도 “하느님의 진노”(1,18)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여긴다(2,1-11 참조). 바오로 시대의 유다인은 그들이 받은 특권인 율법(2,12-24 참조), 할례(2,25-29 참조), 하느님의 약속(3,1-8 참조)이 미래에 있을 하느님의 심판에서 그들을 보호하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바오로는 이 특권도 율법을 실천하지 않으면 하느님 진노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고 경고하며, 유다인과 이방인 모두 죄의 길로 향하고 있다고 선언한다(3,9-20 참조).

 

아,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바오로가 1,18-32에서 지적하는 죄들을 보면서 유다인은 “맞다, 저런 사람들은 하느님의 벌을 받아 당연하지!”라고 손뼉을 쳤다. 바오로는 철저히 율법을 지키던 바리사이였기에 동족 유다인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거울 보듯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만심까지 느끼는 유다인의 죄, 모든 유다인이 아니라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경건한 유다인의 죄를 비난한다.

 

2,1-11에서 바오로는 남을 심판하면서 자기도 똑같은 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비난한다.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남의 인생을 습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사람이다. 남과 비교하느라 자기의 고유한 은사와 소명에 집중하는 것도 잊어 하느님 앞에서 해이한 삶을 산다. 이 “남을 심판하는 사람”(1절)이 ‘유다인’이라는 것은 9-10절에서 언급된다. 바오로가 이곳에서 “먼저 유다인이 그리고 그리스인까지”라는 표현을 되풀이하는 이유는 하느님께 선택된 유다인의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그들의 죄는, 하느님은 선택한 민족에게 끝까지 복을 내리시는 분이라고 여긴 자만심에 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윤리적 행위, 인간의 선과 악에 깊은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잊었다(시편 11,7 참조). 그들도 이방인과 같이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 자기 삶을 들고 가서 사랑의 셈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11절)에 유다인이나 이방인 모두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

 

율법을 듣는 이가 의로운 것은 아니라네

 

2,12-16에서 바오로는 경건한 유다인의 삶의 안전한 토대로 삼는 ‘율법’을 건드린다. 바오로 시대에 유다인은 율법을 받아들이고 연구하는 것도 하느님의 진노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여겼다. 바오로는 그 점을 공격하였다. 12-16에서 그것을 이론적으로 논증하고 17-24에서 가상의 대화 상대자에게 직접 질문하면서 반론을 제기한다. 여기서 율법(노모스, νομοs)은 토라인 오경을 가리킨다. 유다인들은 율법에 하느님의 뜻과 그들이 살아야 할 삶의 모델이 담겨 있다고 여겼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오로가 ‘율법을 듣는 자’가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것이다(13절 참조). 유다인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를 매일 기도로 바치는 민족이었다. 그들은 들은 율법의 규정과 법규를 실천해야 하는데(신명 4,5-6; 야고 1,22 참조) 그것을 저버렸다.

 

이어서 바오로는 이 주제를 더 보완하기 위해 율법을 모르더라도 본능적으로 율법의 총체적 의미를 유다인보다 더 잘 지키는 이방인이 있다고 상기시킨다(14-15절 참조).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덕이 있고 자유로운 인간은 마치 자신이 법 자체인 것처럼 행동할 것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IV.8)고 말한다. 율법을 모르지만 율법에 기록된 정신을 실천할 내적 빛과 힘을 지닌 자유로운 영혼, ‘양심의 소리’를 듣고 율법의 궁극적 목표인 사랑(로마 13,8-10; 예레 31,33 참조)을 실천하는 진지한 영혼이 세상에 존재한다. 유다인은 이것을 인정하고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나는 하느님을 자랑하렵니다

 

2,17-24에서 바오로는 유다인이 자랑으로 삼는 특권을 구체적으로 다루며 그들의 죄를 비난한다. ‘자랑하다’로 번역된 동사 카우카오마이(καυχαομαι)는 문맥에 따라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갖다, 뽐내다, 또는 누구에게 영광을 드리거나 기뻐하다’ 등으로 해석된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께서 하신 행위를 ‘자랑하는 것’은 하느님을 찬미한다는 의미에서 기도 용어로 종종 사용된다. “그런 자랑은 신뢰, 기쁨과 감사의 요소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역설적인 것은 그렇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사람은 자기 자신한테서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그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신앙 고백이 된다”(R. 불트만). 성경에서 자기 자랑, 즉 자기를 찬미하는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신학적 근거는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이 더는 창조주요 구속주인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에게만 집중하기 때문이다(예레 9,23 이하 참조).

 

바오로는 ‘하느님을 자랑하는 것’을 비난하지 않고 다만 율법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자랑하는 경건한 유다인의 주장이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하느님이 삶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자랑하는 사람이 왜 그분의 뜻이 담긴 율법은 실천하지 않는가? 그는 “율법을 자랑하면서”(23절) 율법을 어겨 하느님의 이름이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모독 받게 하는 죄를 저지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24절 참조). 바오로는 24절에서 이사야 시대와 그의 시대의 비슷한 점을 발견했기에 칠십인역 이사 52,5을 인용한다(에제 36,20-23 참조). 과거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자신을 보호하리라고 자만하다가 유배되자 이방인은 그런 초라한 민족을 선택한 하느님을 조롱했다. 어떤 유다인의 탈선도 이방인이 그런 자질 없는 민족을 선택하신 하느님을 비방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바오로의 논리로 궁지에 몰린 경건한 유다인은 드디어 ‘할례’를 생각해 낸다(2,25-29 참조). 왜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공격하는가? 우리는 최소한 할례 받으라는 율법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는가? 그러나 바오로는 다시 율법을 실천하지 않으면 유다인도 할례 받지 않은 사람과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외적 할례를 받은 유다인의 삶이 할례받지 않은 사람보다 더 흠 없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가?

 

바오로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

 

바오로는 당시 경건한 유다인의 ‘죄’에서 자신의 과거를 본다. 사도로서 깊은 고통을 느끼며 그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온갖 설득 기술을 사용한다. 이 본문은 바오로의 기도에 들어 있는 두 가지 뿌리를 성찰하게 한다. “하느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사랑 내지 그리스도의 인격을 바라보는 감탄의 시선과 자기의 죄와 고통을 통해 세상과 형제들을 바라보는 고결한 시선이 그것이다”(장 라 프랑스). 이천 년 전에 바오로가 지적한 경건한 유다인의 ‘죄’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자기 자랑을 생존의 필수 조건으로 여기는 시대에 사는 우리의 근본 문제는 기도할 때 쉽게 죄의식을 갖지 못한다는 데 있다. 로마 2,1-3,20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참모습을 발견하기 위해 진정한 죄의식을 갖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주님, 제가 헤아릴 수 있는 죄보다 제 마음에 감춰진 죄가 무엇인지 더욱 잘 볼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성서와 함께, 2012년 7월호(통권 436호)]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8)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임숙희 레지나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그리되었습니까? 행위의 법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입니다”(3,27; 참조 3,21-31).

 

자랑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태도이다. 여러 종류의 자랑은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랑은 내 삶의 토대가 어디에 있는 보여 준다.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는 율법을 믿는 유다인과 다른 종류의 자랑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내 삶의 구세주이심을 깨닫고 아들을 선물로 주신 하느님을 자랑하라고 권고한다.

 

문맥 보기

 

바오로는 1,18-3,20에서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유다인의 특권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방인에게 자랑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1,18-3,20은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을 다룬 3,21-31을 준비하는 본문이다. 3,21-26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의로움을 설명하고, 3,27-31은 앞 단락의 내용을 토대로 결론을 내린다. 인간은 율법이 아니라 신앙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는가?

 

‘그러니‘는 3,27-31이 앞 단락 3,21-26의 결론으로 소개되는 내용임을 알려 준다. 모든 인간이 죄를 지은 상황에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신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의로우실 뿐 아니라 죄에 빠진 사람들을 한순간에 의로운 사람으로 만드신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상실한 모든 인간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시고, 죄의 종살이에서 풀려나게 하시며 죄를 용서하셨다. 이 새로운 삶이 그리스도의 피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의 이 행위로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일하시는 새로운 방식이 알려졌다. 이것이 바오로가 전하는 기쁜 소식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가 구원받은 것에 대해 자기가 한 일이라고 결코 자랑할 수 없다. 의로움은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얻어지므로 어느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

 

자랑이라는 것은 자신을 칭찬하는 태도다. 자랑이란 당시의 유다인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이 지닌 공통된 죄다. 인간이 저지르는 그토록 많은 죄가 결국은 자랑과 교만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바오로가 3,27에서 경고하는 자랑은 구체적으로 유다인의 자랑을 가리킨다. 27ㄴ-28절에서 율법을 말하고, 대화 동반자가 유다인(2,17)이며, 29-30절에서 유다인에게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왜 유다인의 자랑이 나쁘다고 공격하는가? 자랑을 금지하는 이유는 인간적 이유 때문이다. 많은 유다인이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하느님께 어떤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하느님과의 관계에 토대를 두고 인간적 행위를 자랑하려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 그것을 바오로는 2,1-3,20에서 강하게 거부한다. 모든 유다인이 그런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았지만 율법에 중심을 둔 유다인 사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위험에 빠질 우려가 있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

 

바오로의 초점은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해 한 행위의 해석학에 있다.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는 이미 로마의 그리스도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께서 인간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시려는 것에 대한 인간의 적절한 반응, 즉 신앙이었다.

 

로마 교회의 유다계 보수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였고, 그분이 구약의 사제처럼 짐승이 아니라 당신의 몸을 속죄 제물로 바쳤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객관적 사실을 받아들인 것이 그들의 주관적 신앙과 연결되지는 않았다. 복음을 받아들여 신자가 되었지만 그들은 아직도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 신앙보다 율법에 집착하였다. 하느님의 은총 아래에서 이루어진 일도 자신의 행위와 연결하였고, 그것을 자랑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생각했지만 바오로가 보기에는 아직도 그들에게 진정한 믿음이 부족하였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객관적 사실에 인간이 적절하게 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를 비유는 신앙뿐이라고 생각하였다. 바오로에게 ’신앙‘이란 단순히 사실을 아는 것, 객관적 지식의 차원이 아니었다. 신앙은 사랑으로 표현되는 삶이었다. 복음은 그것을 믿는 사람의 삶과 만나 가슴을 울릴 때, 삶을 바꿀 때 기쁜 소식으로 계시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해 한 일, 그분이 죄 많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쳤다는 것을 아무리 잘 알고 논리정연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해도 그분이 ’나에게 구세주‘가 아니면 신앙이 없는 것이다.

 

의화 신앙과 인간의 자랑

 

바오로는 행위의 법은 자랑을 부추기는 것으로, 신앙의 법은 자랑을 없애는 것으로 소개한다. 바오로는 모든 율법을 반대하지 않으며 율법을 올바르게 이해하면 신앙을 통한 의화와 조화를 이룬다고 본다. 3,31에서 믿음이 율법을 굳게 세운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하는 말이다. 3,21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율법과 상관없이‘ 나타났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율법의 윤리적 규칙을 지키는 데서 면제되며 제멋대로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하느님의 뜻이 담긴 율법의 계명을 충실하게 지킬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어떤 자랑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이다.

 

신앙을 통한 의화 교의를 선포한 후에,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로써 특히 종교적 형태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모든 자랑이 깨졌다고 선언한다(1코린 1,29.31; 갈라 6,13 참조).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인간에게는 새로운 자랑이 주어졌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분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5,2.3.11)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바오로의 메시지는 자신의 힘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 종교에게는 폭탄과 같다. 율법을 소유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경건함과 의로움을 자랑으로 삼았던 유다인이 바오로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이것 때문이다(로마 8,30-10,4 참조).

 

바오로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

 

그리스도인도 하느님의 은총보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자랑할 때가 많다. 바오로는 우리에게 무엇을 자랑해야 하는지 가르친다. 나의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을,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에 대한 비전을 자랑하라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몰랐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마음에 무엇을 품고 이 인생을 질주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저 약하고 죄 많은 존재로 머무르지 않았을까? 세상에서 나를 과시할 수 있는 자랑거리를 찾아, 나의 갈망을 채워 줄 대상과 일을 찾아 무질서하게 애착하며 살지 않았을까?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이 내 삶의 가장 큰 자랑거리이다. “성령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 삶의 구세주, 저의 모든 갈망을 채워 주시는 분임을 기도 중에 깨닫게 해 주십시오.”

 

[성서와 함께, 2012년 8월호(통권 437호)]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9) 우리 조상 아브라함

임숙희 레지나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불신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로마 4,2.20).

 

문맥 보기

 

바오로는 3,21-31에서 인간은 모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로워진다고 설명한 후 4,1-25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인물로 아브라함을 소개한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으로 의화되었다(4,1-8 참조). 그것은 할례(4,9-12 참조)나 율법(4,13-17 참조)과 상관이 없다. 그의 우대한 믿음 때문에 그는 우리 모두에게 믿음의 모델이 된다(4,18-25 참조). 바오로는 이런 아브라함의 인간상을 통해, 신앙을 통한 의화가 성경에 드러난 종교 체험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지닌 믿음의 자세는 진정으로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게 한다.

 

창세 15,6과 아브라함

 

4,2은 1절의 시작 질문과 함께 4장 전체에 걸쳐 전개되는 선조 아브라함 이야기의 입문에 해당한다. 3,27의 전반부(“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와 연결되면서 3,21-31의 주제를 계속 진행한다. 바오로는 먼저 아브라함이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여겨진다는 것을 문제시한다. 그런 사고는 몇 가지 문제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자기 힘으로 그렇게 되었다면 획득한 결과를 모두 자신에게 귀속할 권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랑은 ‘하느님 앞에서는 가치가 없다.’ 하느님보다 자신을 더 높은 자리에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3,27 참조). 아브라함이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는 생각은 성경 말씀의 힘에 의해 배제된다.

 

바오로가 아브라함을 모델로 택한 것은 당대 유다인들이 아브라함에게 지니고 있던 호감 외에 다른 이유가 있다. 당시 바오로는 회당과 갈등을 겪으면서 누가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인지 정의를 내려야 할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는 할례나 율법의 행위 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의화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가장 권위 있는 증언인 성경 첫머리부터 시작해야 했다. 창세 15,6은 신앙과 의화와 관련된 성경의 첫 구절이다. 바오로는 4장 전체에 걸쳐서 창세 15,6을 토대로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에 대해 세심하게 작업을 한다.

 

이 작업으로 바오로가 증명하려는 것은 이방인을 아브라함의 가족에 포함시키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신앙의 모범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바오로의 목적은, 인간은 믿음으로 의화된다는 3,21-22의 내용을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증명하려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창세 15,6을 해석할 때 창세 22장의 도움을 받아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행위와 충실함의 길을 통해 그를 부르셨다고 해석한다(느헤 9,7-8; 2에즈 19,7-8; 집회 44,19-21 참조). 그러나 바오로는 창세 15,6을 다르게 해석한다. 바오로가 보기에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일반 사례가 될 수 없다. 바오로는 의화가 할례와 율법을 지키는 것과 상관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성경에서 근거를 찾는다. 창세 15,6은 신앙과 의화의 관계를 설정하는 성경의 첫 구절이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영광을 바치다

 

아브라함이 할례(4,9-12 참조)나 율법(4,13-17 참조)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주제를 마치면서 마침내 4,18-25에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던 상황으로 돌아간다. 바오로는 아브라함이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처지에서도 하느님을 믿었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바쳤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4,20 참조).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질은 하느님의 약속을 불신하지 않는 데 있다. 그리스어 문장을 보면 4,20에서 ‘하느님의 약속’이 제일 처음에 나오는데, 그의 믿음이 하느님의 약속에 바탕을 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아브라함이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결코 순간의 주저함도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하신 약속과 관련하여 불신의 태도가 깊게 자리 잡는 것을 피했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약속은 보통 사람이 보기에 정신 나간 약속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성으로 믿을 수 없는 ‘하느님의 정신 나감’에 자신을 내맡긴다.

 

믿음은 아무 일 없이 인간이 스스로 결단하거나 인간 내부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정확한 개념에 바탕을 둔다. 하느님은 생명을 원하시는 분이며(로마 4,17 참조), 믿음을 통해 살게 하시는 분이라는 확신에서 그의 믿음이 흘러나온다. 그는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 때문에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더욱 굳세어졌다. 여기서 믿음은 ‘굳세어진 것’의 수단이나 원인이라기보다 목적일 것이다. 점점 성장한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 그 자체였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성장한 것은 하느님의 약속과 겉으로 보이는 것 사이의 갈등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방해를 극복한 데서 비롯된다.

 

아브라함은 굳세어지는 믿음으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린다.’ 이 말은 ‘영광을 바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성경에서 ‘하느님께 영광을 바친다’는 아브라함처럼 오로지 하느님만 의지하는 사람의 자세를 가리킨다. 인간은 자기만족에 빠질 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지 않는다. 자신의 삶의 원천에서 서서히 멀어져 간다. 20절에서 ‘영광을 바친다’는 말은 이런 일반적 의미보다 ‘믿음’을 더 깊게 표현하고 불신앙과 반대로 기능한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약속을 끝까지 완성하실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약속 앞에서 불신에 빠지지 않고 믿음이 굳세어져 하느님께 영광을 바친다. 이것이 바로 그가 ‘의로움으로 인정받은 이유이다’(창세 15,6 참조). 이 흔들리지 않는 신앙에 아브라함의 의화의 모든 비밀이 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

 

믿음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인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부르심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는 행위, 죽은 이들에게 삶을 선물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남김없이 내주는 것이다. 믿음은 자신이 결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진실한 신호에 응답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세는 바로 이런 믿음을 우리에게 가르치기에 그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4,12), 모든 신앙인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 아브라함과 믿는 이들이 동등하다면 믿음을 통해서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느님이 죽음의 지배를 받는 곳에서도 생명을 일으키시는 분이라는 사실에 바탕을 둔다. 그의 믿음은 죽은 이들 사이에서 일으켜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매우 가깝다(4,24-25 참조).

 

바오로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교부는 로마 4장에 소개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해석한다. “믿음 그 자체가 하느님께 영광이 됩니다. 바오로는 믿는 사람이 행한 사람보다 더 크게 역사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많은 사람이 믿음을 무익한 것으로 여기고 믿음 안에서 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약속을 받았을 때 상황을 떠올리고 아브라함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의 태도를 오랫동안 바라본다면 우리도 아브라함을 닮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은 항상 하느님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조바심을 내는 우리에게 믿음 그 자체가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이 될 수 있고, 그것이 믿음의 본질이라고 가르친다. “아브라함, 당신은 우리 믿음의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당신의 믿음과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본받을 수 있도록, 믿음으로 일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성서와 함께, 2012년 9월호(통권 438호)]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10)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임숙희 레지나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로마 5,1-3.11).

 

문맥 보기

 

로마서에서 두 번째 큰 단락에 해당하는 5-8장의 주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1-4장 참조)이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랑 안에서 구원을 보증을 발견하는 것이다. 단락 전체에서 바오로는 현세의 새로운 삶과 내세의 영광스러운 희망에 대해 자신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기쁨에 찬 감사를 드리자고 초대한다. 5,1-11은 5-8장의 입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락의 중심에는 ‘자랑’이라는 동기가 자리 잡고 있다. 1,18-4,25에서 바오로는 모든 인간적 ‘자랑’을 금지한다(3,27 참조). 하물며 아브라함도 좋은 일을 했다고 자랑할 수 없다(4,2 참조). 그러나 바오로는 이제 어조를 바꾸어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긍정적 ‘자랑’을 소개한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랑은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의화의 결과에 대한 자랑(5,1-2)

 

5,1-11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1절)으로 시작된다. 바오로는 지금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에 의해 실현된 구속을 통해 거저 의롭게 된다고 주장했는데(3,24 참조), 5,1에서는 ‘우리’라는 1인칭 복수형과 과거형에 초점을 맞춘다. 1-2절에서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과거에 이루신 일의 결과에 대해 현재 자랑하고 계시다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자랑’은 인간의 행위에 바탕을 둔 교만이 아니다.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에 찬 목소리로 전하는 것, 나아가 복음 선포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의화(義化)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이 영적 삶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의롭게 된 이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삶에 이루신 놀라운 일을 어디에서든지 큰 목소리로 자랑해야 한다. 자랑함으로써 그들이 체험한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과 자비가 온 세상으로 퍼져나간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현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1절)를 누린다. 이 평화는 단순히 내적 평화가 아니라 의롭게 된 이들이 처한 새로운 상황을 의미한다. 이 평화는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해 오며, 믿는 이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아버지와 관계를 맺도록 허용한다(3,25-26 참조). 따라서 하느님과의 평화나 화해는 믿는 이들을 새로운 관계로 초대하는 방식의 하나이다. 이 평화는 부활하신 분이 제자들에게 발현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라고 하신 말씀에서 나온 것과 비슷하다.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지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때문에 공동체가 하느님과 화해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는 자신이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가져다주신 평화를 삶에서 계속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바오로는 10-11절에서 ‘화해’라는 말로 다시 이 평화의 개념을 취한다. 2-3절에서는 1절에서 말했던 평화를 다른 면으로 소개한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그들이 서 있는 ‘은총’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시간과 상황에 따라 변하기 쉬운 인간의 권력과 영광이 아니라 바위처럼 단단한 하느님의 은총 위에 서 있다. 그들은 죄 때문에 상실했던 하느님의 영광(3,25)을 장차 충만하게 소유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자랑의 역설(5,3-5)

 

바오로는 믿는 이들의 영광에 대한 희망에 바로 환난에 대한 자랑을 덧붙인다(3-4절 참조). 바오로의 이 확신에는 자신의 체험이 자리 잡고 있다(2코린 12장; 2코린 4,16-18 참조).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환난도 기쁘게 받아들인다.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은 환난을 자랑으로 바뀌게 한다. 이 희망을 품에 안고 기꺼이 받아들인 환난은 인내를 낳는다. 인내는 어떤 시험이 닥쳐와도 용감하게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인내는 ‘수양’과 시험으로 단련된 덕으로 바뀐다. ‘수양’은 미래의 목표를 놓치지 않고 삶의 어려움을 직접 대면하게 하는 굳건한 능력이다. 이 단련된 덕에서, 아니 이것과 조화를 이루며 희망이 더욱 확고해진다. 하느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 믿는 이의 마음 안에 부어졌기 때문이다. 과거에 우리는 의로워졌고, 현재에 하느님의 은총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미래까지 이 새로운 상태를 자랑한다.

 

자랑의 토대(5,6-11)

 

이어지는 구절에서 하느님 사랑의 본성이 설명된다. 6-8절은 인간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이 어떻게 대조되는지 묘사한다. 인간의 사랑은 항상 조건이 달려 있고 자기 이득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나의 공덕과 상관없이 거져 주는 사랑이다. ‘우리’(6ㄱ절), 즉 ‘불경건하고’(6ㄴ절) ‘죄인’(8절)이며 ‘원수들’(10절)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으로 철저하게 변화된다.

 

11절에서 바오로는 2절과 3절에서 나온 자랑이라는 주제를 다시 취하며 이 단락을 마무리한다. 이제 ‘자랑’은 하느님과 직접 관계를 맺는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의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의미 때문에 믿는 이는 자랑할 수 있다(예레 9,22.23; 1코린 1,31; 2코린 10,17 참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다. ‘화해’란 단순히 싸운 뒤 다시 사이가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선택으로 죄를 짓게 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 되라는 그분의 소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마치 하느님과 싸우기나 한 듯 하느님께 낯선 존재가 되어 버린다. 이 관계를 돌이키는 것이 화해이다.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인간을 바로 잡으시기 위하여 무거운 벌을 내리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분은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과 화해하여 관계를 회복하신다. 하느님의 이 무한한 자비 위에, 믿는 이의 새로운 삶에 동반되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따른다. 믿는 이는 자신이 하느님에게 사랑받는 존재이며, 그의 삶은 하느님 사랑의 눈길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을 깨닫는다(시편 138,19-22 참조).

 

바오로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

 

5,1-11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삶’을 다루는 5-8장의 입문에 해당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발견된다는 것이 5-8장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주제이다. 하느님과의 평화도 그리스도를 통해서(5,1 참조), 하느님을 자랑하는 것도 그리스도를 통해서(5,11 참조) 온다. 5,1-11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계획을 하나의 그림으로 소개한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인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와 화해하시고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하셨다. 현재 우리는 고난도 자랑으로 여긴다. 우리 안에 현존하는 ‘성령’이 종말에 있을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희망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5,1-11은 우리의 고귀한 신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성찰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인간은 삼위(三位)의 역동성,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각각의 방식으로 인간에게 계시하시는 사랑에 의해 드높여진 존재이다. “참된 관상 기도는 삼위에 대한 묵상에서 시작됩니다”(장 라 프랑스).

 

[성서와 함께, 2012년 10월호(통권 439호)]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11) 아담과 그리스도

임숙희 레지나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들어와 범죄가 많아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 5,12.20-21).

 

문맥 보기

 

5,1-11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얻게 된 새로운 삶에 대해 설명한 후, 5,12-21에서 우리 삶을 받치고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주제를 더욱 강조하기 위하여 ‘아담의 삶’과 ‘그리스도의 삶’을 비교한다. 12절은 죄와 은총의 비교를 설정하는 입문에 해당한다. 그러나 곧이어 13-17절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지 않고 잠시 멈춘다. 죄와 율법(13-14절 참조), 아담과 그리스도의 차이(15-17절 참조)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논리의 흐름에서 벗어나 샛길로 보이는 13-17절은 독자로 하여금 아담과 그리스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하는 데 필요하다. 그리고 18-19절에서는 12절과 연결하여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한다. 20-21절은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모두 요약하는 결론에 해당한다. 5,12-21에서 바오로는 선물로 받은 은총의 삶에 감사하라고 우리를 초대한다.

 

아담과 그리스도(5,12-19)

 

12절을 시작하는 말 ‘그러므로’는 5,12-21에서 계속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하여 인간과 하느님의 화해를 위해 그리스도가 한 역할을 더 잘 설명하려고 한다고 일러 준다. 12절은 인류의 죄의 기원을 다룬 창세 2-3장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12절)에서 ‘한 사람’은 14절에 가서야 구체적 이름이 나온다. ‘한 사람’은 아담을 가리키고 ‘세상’은 인류를 가리킨다. 아담의 죄를 통해 죽음이 들어오는데, 이 죽음은 육체적 죽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창세 3장에서 아담은 죄를 지은 후 즉시 죽지 않고 하느님 앞에서 숨고 에덴 정원에서 추방된다. 창세기는 죄의 결과인 ‘죽음’이 근본적으로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 하느님과 인격적 친교가 끊기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런 관계의 상실이 아담의 죄를 통해 세상 안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문맥에서 죄와 죽음은 인간 위에서 인간을 지배하고 노예로 만드는 막강한 ‘힘’으로 등장한다(5,14.17; 6,2.6.9.12.14.16.18.22.23 참조).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예형”(14절)인데 아담과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각각 반대되는 영향을 끼친다. 바오로는 두 인물이 인류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기 위해 ‘한 사람’이라는 말을 열 차례[12,15(2번).16.17(2번).18(2번).19(2번)절]나 되풀이한다. 한 사람 아담의 죄는 죄(12.19절), 처벌(16.18절), 죽음(12.15.17절)을 인류에게 가져왔다. 대신 다른 한 사람 그리스도의 의로움(18절), 순종(19절)의 행위, 즉 그의 죽음과 부활은 의화(16-19절 참조)와 생명(17-18절 참조)을 인류에게 선물(15-17 참조)로 가져왔다. 12-19절에서 바오로가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는 의도는 마지막 구절,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언급에서 드러난다(20-21절 참조).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는 목적

 

바오로는 5,12-21에서 ‘아담 안에 있는 인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이라는 두 원형 아래에서 인간의 모든 역사를 요약한다. 18절에 사용된 ‘모든’이라는 말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아담과 그리스도라는 두 통치자가 지배하는 영역 안에서 항상 살아간다. 아담 안에서 아담과 더불어 죄와 죽음과 파괴의 삶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은총, 부활과 생명으로 살아간다. 인간은 한 사람 안에서 쓰러지고, 한 사람 안에서 다시 일어선다. 바오로 서간의 본문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이런 연대성은 바오로 신학의 열쇠이고 신비체(Corpo Mistico) 교의의 토대를 이루는데, 그것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5,12-21의 주된 목적은 아담의 죄라는 교의를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든 믿는 이의 삶에서 넘쳐흐르는 은총의 지배를 보여 주려는 것이다. 바오로가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는 까닭은 그리스도를 닮으라고 호소하기 위해서이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죽음에 성사적으로 일치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죄와 죽음의 승리에도 참여한다. 필리 2,5-11은 로마 5,12-21에 담긴 바오로의 사고를 잘 해설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아담의 불순종을 극복하였다. 아담은 불순종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상실했으나(로마 3,23 참조),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통하여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셨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1코린 15,21-22에서 아담과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무엇을 가져왔는지 더 간략히 소개한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바오로는 모든 인류의 죄를 아담에게 돌린다. 그것이 당대 유다인들의 사고방식이었다. 5,12-21에서는 죽음뿐 아니라 죄도 아담의 것으로 돌린다. 바오로가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삶’을 통해 얻게 된 자유를 다루는 로마 5장에서 ‘아담’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담’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이라는 그리스도의 체험을 설명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죄와 죽음의 삶, 은총과 생명의 삶(5,20-21)

 

20-21절은 12절부터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해 온 바의 절정 또는 결론에 해당한다. 20절에서 바오로는 갑자기 율법이라는 주제를 다시 소개한다. 15-19절에 길게 진행된 아담과 그리스도의 비교는 13-14절과 연결되는데도 이 구절에서 제시된 문제에 답변하지 않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율법이 없을 때도 죄의 결과인 죽음이 세상을 지배했다고 하면 ’왜 율법이 생겨났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대해 바오로는 20ㄱ절에서 명확하게 답변한다. “율법이 들어와 범죄가 많아지게 하였습니다.” 율법은 죄를 의식하게 할 뿐 아니라(3,20 참조) 하느님의 분노를 불러일으킨다(4,15 참조). 율법의 규정은 적어도 인간이 알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행위 때문에(7장 참조) 죄를 없애기보다 죄가 많아지는 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 활동은 죄보다 우위에 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왔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 온 은총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 보시기에 의롭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21절)이다. 5,12-21에서 아담과 그리스도의 비교는 아담의 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은총에 초점을 맞춘다.

 

바오로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

 

5,12-21에서 바오로는 죄와 죽음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은총에 대해 성찰하도록 초대한다. 인간이 숨 쉬고 일하며 평온하게 산다고 해서 정말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겉으로 큰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죄인이 아닐까? 바오로의 관점에서 보면 죄인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떠나 아버지와 친교하기를 거부한 인간, 그리스도의 얼굴을 외면한 인간이다. 그는 살아 있지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는 아담에 속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바쁘게 달리는 것을 잠시 멈추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표면에 떠오르지 않던 우리의 죄, 아담의 죄와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자비를 발견한다. “우리 죄는 내적 성찰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관상할 때 발견됩니다. 죄의 발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발견입니다”(장 라 프랑스).

 

[성서와 함께, 2012년 11월호(통권 440호)]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12)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임숙희 레지나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마음으로부터 표준 가르침에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가르침에 여러분 자신이 넘겨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죄에서 자유롭게 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습니다.”(6,17-18 필자 직역).

 

문맥 보기

 

5장에서 바오로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하면서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삶으로 들어섰다고 설명하였다. 6장에서는 이 새로운 삶의 의미를 설명한다. 1-14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믿는 이들이 얻게 된 삶의 특징을 설명하고, 15-23절에서는 이 삶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라고 권고한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단지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체험을 내 삶에서 새롭게 하는 것이다. 바오로는 이런 변형(變形)의 여정이 죄와 갈라서고 그리스도를 닮으며 살겠다고 선택한 세례의 순간에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세례를 통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삶을 선물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라고 초대한다.

 

세례의 의미

 

바오로가 6,17-18에서 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지 이해하려면, 그가 6장에서 세례라는 용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지 알아야 한다. 바오로는 세례 받은 이는 죄에 머무를 수 없다고 확신한다(6,1 참조). 믿는 이는 세례를 받아 명확하게 죄와 갈라섰기 때문이다. 6,2은 6장 전체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죄에서는 이미 죽은 우리가 어떻게 여전히 죄 안에 살 수 있겟습니까?” 바오로는 이 구절에서 세례 받은 이의 정체성을 ‘죄에서 죽은 사람’으로 소개한다. 이런 강한 확신은 아마 바오로의 체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뒤에 죄를 지으며 사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것이 양립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세례 받은 사람은 ‘새로운 창조물’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갈라 6,15; 2코린 5,17 참조).

 

6,3에서 처음으로 세례라는 주제가 등장한다. 바오로는 세례를 ‘그리스도 안의 세례, 그의 죽음 안에 세례’라고 표현한다. ‘그리스도 안에(《성경》에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라는 표현에서 전치사 ‘안에’(에이스, ειs)는 보통 장소의 이동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세례 행위의 결과로 나오는 후속 행위 전체를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런 해석은 신약성경에서 ‘세례 받다’는 말의 일반적 쓰임과 일치한다. 요한이 베푼 회개의 세례를 죄의 용서를 위한 것이었다(마르 1,4; 루카 3,3; 사도 2,38 참조).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에 참여하기 위한 부르심이다. 6,4에서 바오로는 즉시 죄에 물든 삶과 세례 사이의 불연속성 원칙을 단언한다. 믿는 이는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삶(죽음, 매장, 부활)에 참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깊이 일치하며 살아기기 때문에 죄가 지배하는 삶을 살 수 없다(필리 3,10-11; 2티모 2,8-12 참조).

 

이런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6,11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위해 산다’는 표현으로 절정에 달한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이들, 곧 믿는 이들은 결국 하느님께 속한다. 그래서 그들의 새로운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단지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만 의미하지 않고, 죄와 육과 죽음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본보기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아마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위해 산다’는 말은 바오로의 삶을 이끄는 좌우명이었을 것이다(갈라 2,19 참조). 이 표현은 또한 바오로가 로마서의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마치 자기 것처럼 체험하는 사람이다(2코린 6,10; 12,10; 필리 3,10 참조). 그 체험은 세례를 통해 시작되고 계속 성장해 간다. 그래서 믿는 이의 세례는 ‘그리스도 안의 세례’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6,17은 해석하기 힘든 구절이다. 해석의 첫 번째 어려움은 ‘표준 가르침’(튀포스 디다케스, τυποs διδαχηs)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튀포스’는 ‘각인, 표시, 표상’이나 종교와 철학의 주제를 체계 있게 다룬 것 또는 그 요약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 그 용법 외에도 바오로 서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모델’이 되는 사람, 특히 신앙의 모범이 되는 사람을 가리킨다(1코린 10,6; 필리 3,17; 1테살 1,7; 2테살 3,9; 1티모 4,12; 티토 2,7 참조). 그러나 6,17에서는 ‘튀포스’가 ‘가르침(디다케)’과 직접 연결되기 때문에 모델이 되는 어떤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표준 가르침’은 믿는 이의 삶의 모든 차원을 이끌어 가는 ‘복음 또는 가시적 가르침, 삶의 모델이 되는 가르침’을 가리킬 것이다.

 

해석의 두 번재 어려움은 6,17 후반부 문장이 보기 힘든 문장 구조라는 데서 비롯된다(에이스 혼 파레도세테 튀폰 디다케스, ειs ον παρεδοθητε τυπον διδαχηs), ‘표준 가르침’이 믿는 사람들에게 넘겨진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표준 가르침’에 넘겨졌다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바오로에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권위, 믿는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감사를

 

로마의 그리스도인은 ‘표준 가르침’을 마음으로 순종하며 받아들였기에 죄에서 자유롭게 되었고 의로움의 종이 되었다. 바오로는 로마의 그리스도인의 과거와 현재의 바뀐 신분을 생각할 때 절로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감사란 자기 삶이 온전히 창조주에게 달렸음을 믿는 신앙의 행위이자 자신이 선물로 받은 것을 헤아릴 줄 아는 행위이다(6,11 참조).

 

6,17-18에서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가 한때는 죄의 종이었는데도 이제는 의로움의 종이 되었으니까요. 제가 한때의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의로움의 종, 하느님의 종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감사는 하느님께서 자기 삶 안에 행하신 사실에 대한 믿음을 표현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진정한 감사는 이런 좋은 일을 해 주신 분께 행동으로 보답하는 것, 하느님의 종이 되어 그의 소명인 성화에 도달하는 것이다(6,19-23 참조). 인간은 하느님의 종이 되지 않으면 죄의 종이 된다. 아담 안에 있거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오직 하느님의 종이 되는 것,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을 빚으신 창조주에게 의존하며 살아가는 데 달렸다(1,18-32; 5,12-21 참조).

 

바오로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

 

6장은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으로 부르심을 받으 것에 대한 찬미가라고 할 수 있다. 초대 교회는 세례를 외적 죄를 거부하고 새로운 삶의 양식을 택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으 입문 의식으로 여겼다. 바오로는 초대 교회가 지녔던 세례에 대한 생생한 감각과 체험을 많이 상실한 우리에게 신앙의 시작인 세례 체험으로 돌아가라고 초대한다. 세례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위해 살라’는 부르심이자 죄에 머물지 말고 끊임없이 회심하나는 초대이다. 6장에서 바오로는 로마의 그리스도인에게 세례라는 용어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이 왜 ‘감사’가 되어야 하는지 말하고자 한다. 세례 받은 이는 하느님의 은총과 ‘신앙의 눈’으로, 힘든 인생도 길고 넓고 깊게 바라볼 줄 안다. 그의 시선은 현세에 멈추지 않고 종말까지 이어진다. 그러니 세례는 정말 귀하고 놀라운 선물이다. 하느님께 감사할 일이다.

 

[성서와 함께, 2012년 12월호(통권 441호)]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13) 누가 이 비참한 나를 죽음에서 구하리오?

임숙희 레지나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4-25ㄱ).

 

문맥 보기

 

로마 6장에서 초대 그리스도인에게 세례는 죄와 갈라서는 결단,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여정을 시작하는 초대인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인생이란 항상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 그것을 아는 바오로는 7장에서 세례 받은 이의 삶을 영과 육 사이에서 겪는 ‘투쟁’으로 소개하며, 이 투쟁을 ‘율법’과 관련지어 설명한다.

 

먼저 율법에서 해방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주제를 소개하고(7,1-6 참조), 하느님의 계획에서 율법이 하는 역할을 설명한다(7,7-13 참조). 이어서 아직도 율법 아래에 있는 인간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묘사한다(7,14-25 참조). 그러나 바오로는 자기 힘으로 빠져나오기 힘든 이 갈등의 상황을 그리스도를 통해 벗어나게 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7장을 마무리 짓는다(7,24-25ㄱ 참조). 7장에서 우리는 탄식이 어떻게 감사로 바뀌는지 보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7,7-25은 신약성경에서 해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무엇보다 ‘나’의 정체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나의 체험’에 대해 학자들은 많은 논쟁을 하는데, 그 논쟁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에덴 정원에서 하느님의 명령을 받은 아담의 체험, (2)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의 체험, (3) 율법의 구속 아래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스라엘의 체험, (4) 사도 바오로 자신. 필자는 ‘나’를 자기 갈등에서 벗어난 인간 바오로, 나아가 그리스도의 제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할 것이다.

 

바오로는 7,7-25에서 자기가 겪은 ‘영’과 ‘육’의 투쟁 체험을 묘사한다. 바오로 안에서 일어났던 ‘영’과 ‘육’의 투쟁은 갈라 5,13-6,10에 잘 묘사되어 있고, 로마 8,3-17; 필리 3,3; 1코린 3,1에서도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바오로는 7,7-25에서 ‘영과 육의 투쟁’이라는 체험을 서로 구분되면서도 연결되는 두 단락(7,7-13; 7,14-25)에서 전달한다. ‘나’의 체험은 인생의 중요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친다. ‘인생이란 죽을 때까지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온 힘을 다해 싸우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주제가 로마 7,7-13; 7,14-25의 인간 ‘나’와 연결된다.

 

율법과 죄는 무엇인가?

 

먼저 로마 7,7-13의 주제는 율법의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율법은 “탐내서는 안 된다”(탈출 20,17; 신명 5,21)를 인용하고 ‘계명’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사용하는 것으로 봐서(7,8-11 참조), 모세의 율법에 제한되지 않고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법을 가리킬 것이다. 바오로는 율법 자체를 비난하지 않고 죄가 율법을 도구로 사용했다고 강조한다.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가 든 예는 율법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어떤 장소에 이르게 하는 넓은 길을 상상해 봅시다. 거기에는 버려진 돌이 많고 또한 여기저기 구덩이가 패어 있습니다. 어두운 밤에 이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이 장애물들 때문에 계속해서 넘어지고 뜻하지 않게 구덩이에 빠진다고 상상합시다. 이런 상황일 때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장애물을 볼 수 있도록 어떤 사람이 횃불을 들어 교차로에 갖다놓습니다. 사람들이 더 넘어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애물들을 드러내서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빛이 죄가 무엇인지 환하게 드러낸 것이 잘못한 것입니까? 아니면 여행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더욱 안전한 여행이 되게 하는 이 빛을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까? … 우리는 이것 때문에 이성적으로 율법을 죄로 여기거나 죄로 정의하지 말아야 합니다! … 율법은 무엇보다도 … 죄가 무엇인지 밝혀 주는 것입니다”(《Commento alla lettera ai Romani》, Citta Nuova, Roma, 1991, 69쪽).

 

이 글에서 보는 것처럼 빛(=율법)은 넘어질 위험이 있는 것을 보여 주면서 감추어진 악행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긍정적 역할을 한다. 빛(=율법)은 부정한 것(악행)의 원인이 되거나 그것을 만들어 내지 않고 뚜렷하게 드러냈을 뿐이다. 바오로는 율법 자체의 가치는 긍정하면서도 현실에서 율법이 자기 의도와 상관없이 죄의 확장에 사용되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죄라는 사탄 세력이 안심하고 발을 내디딜 교두보를 마련해 주는 것은 ‘육’이다. 죄란 단지 몸으로 짓는 죄뿐 아니라 우상 숭배, 미움, 투쟁, 격노, 이단 등 육신이 저지르는 모든 종류의 죄다(갈라 5,20 참조).

 

7,14-25에서는 7,7-13처럼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 동사를 주로 사용한다. 바오로는 아직도 그리스도인 안에 머물고 있는 죄의 힘을 자기 체험으로 깊게 인식하고 있기에 그것을 다시 설명하려고 한다. 바오로에게 죄인이란 경매에서 일단 낙찰되어 주인의 확실한 소유가 되어 버린 노예와 같다. 어떤 습관이나 악행에서 벗어나기를 필사적으로 원하지만 그렇게 할 힘이 없다.

 

바오로는 이 단락에서 ‘나’가 겪는 내면의 투쟁을 드러낸다. 이런 인간의 내면 분석은 18-19절에서 심오하게 드러난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7,18-19). 그러니 나쁜 것은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 들어가 그를 구속하고 종처럼 부리는 죄다(7,20.23 참조). 하느님의 계명과 나의 갈망 사이에서 ‘흔들리는 나의 정체’는 모든 인간의 드라마를 요약한다.

 

누가 나를 죽음에서 구할 수 있는가?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7,24)는 ‘나’의 탄식은 마지막에 감사의 외침으로 바뀐다. 7,25ㄱ에는 7,14-25에서 바오로가 묘사한 투쟁이 요약되어 있다. 마지막에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체험한 자유의 원천 때문에 계속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는데, 이 감사 내용은 8,1-4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소개될 것이다. 7,25ㄱ은 로마서 전체의 메시지, 아니 인간과 그의 하느님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역사의 메시지를 요약한다. 그리스도인은 좋고 아름다운 것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어두운 터널을 혼자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다. 우리가 이 상황에서 빠져나오도록 그리스도께서 실질적 기회를 제공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7,24의 탄식에서 7,25ㄱ(8,2 이하)의 감사로 넘어가는 것은 구약성경의 시편에서도 자주 보는 표현이다. 감사 시편에서 하느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나’의 찬미는 강도 높은 탄식 후에 자주 일어난다(시편 22,22-23; 69,30-31 참조).

 

바오로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

 

로마서에서 기도에 대한 구체적 방법론이나 특별한 훈련 방법을 배울 수는 없다. 그것은 바오로의 의도가 아니며, 서간이 그런 목적으로 기록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바오로가 성경이 가르쳐 주는 기도의 스승이라면, 그것은 바오로가 기도의 방법과 기교보다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 앞에 머물러야 하는지, ‘기도하는 사람의 본질적 자세’를 우리에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감사 기도는 하느님의 법과 말씀에 비추어 자기 삶을 솔직히 들여다보고 자기의 비참함을 깨달은 사람의 탄식, 그렇지만 그를 계속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자비와 은총을 깨달은 사람이 외치는 기쁨의 환호이다. 인생이란 싸우는 것! 눈물과 탄식의 기도가 그치지 않을 것이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니 감사기도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월호(통권 442호)]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14)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

임숙희 레지나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로마 8,1-2).

 

문맥 보기

 

바오로는 로마 5-8장에서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삶’이라는 주제를 다루는데,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영적 여정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것(5장 참조),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같은 운명으로 초대되었으며 그분처럼 실제로 살 수 있다는 것(6장 참조)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땅에 발을 딛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필요한 양식을 얻기 위해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기에, 인생은 ‘투쟁’이라는 것을 체험한다(7장 참조). 살아 있는 한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지 투쟁과 갈등은 운명처럼 우리를 따라다니지만, 이것이 인생의 마지막 말은 아니다. 바오로는 7장에서 갈등하는 인간 ‘나’의 체험을 소개한 후, ‘성령 안의 삶’을 다룬 8장을 덧붙인다. 그러므로 7장은 8장과 같이 읽지 않으면 미완성 드라마가 된다. 8장은 7장을 배경에 두고 이해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8장에서 우리는 성령과 기도의 관계에 대해 깊이 성찰하도록 초대된다.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

 

바오로가 8장을 시작하면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8,1)다고 확신하는 것은 7장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신앙과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과 맺는 친교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을 가리킨다(6,11 참조). 이렇게 그리스도인을 정의하는 것을 이해하려면 5-7장에서 말한 주제들을 함께 모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은 하느님의 분노, 죄, 율법, 죽음에서 자유롭게 된 사람이다. 바오로는 이 모든 것을 8장의 첫 두 구절에 놓는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8,2)은 8장의 문맥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8,2을 7,1-6과 연결하여 읽을 때 해석의 열쇠를 찾을 수 있다. 8,2에 나오는 모든 중요한 요소는 이미 7,1-6에서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법은 성령의 선물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관계나 성령에 의해 규정된 법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법은 성령 자신, 하느님에게 순종하는 삶으로 인간을 이끄는 성령 자신이다(3,27 참조).

 

바오로는 일반적으로 하느님 또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하는데, 이 구절에서는 자유롭게 하는 주체가 성령으로 바뀐다. 믿는 이의 구원은 성령의 활동에 달렸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든 모든 이가 자유롭게 되도록 이끄신다. 우리는 자유롭게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갈라 5,13 참조).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과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나와 어떤 관계인지 설명하고 체험을 말할 수 있지만, 성령에 대해서 자기 체험을 쉽게 표현하지 못한다. 성령은 우리에게 단순히 ‘날아다니는 비둘기’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소유할 수 없는 것인가? 우리는 성령 없이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바오로도 과연 성령 체험을 했을까?

 

바오로의 성령 체험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프네우마, )’은 근본적으로 이론이 아니라 체험에 바탕을 둔 용어이다. 바오로는 거의 모든 서간에서 성령이 그리스도인 삶의 원천이라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표현한다. 그러나 바오로 자신이 어떤 성령 체험을 했는지는 서간에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 두 가지 동기 때문에 바오로는 자신의 성령 체험에 대해 명시적으로 말하기를 주저했을 것이다.

 

첫째, 바오로는 깊은 종교 체험을 했으면서도 자신의 환시나 계시 체험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이런 신비 체험을 사사롭다고 여겼고, 매일 하느님과 맺는 인격적 관계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특별한 체험보다 더욱 중요하고 근본적이라고 여겼다. 둘째, 바오로는 ‘영적 고백록’이 아니라 서간을 썼다. 그의 서간은 여러 공동체에서 일어난 구체적 문제들을 사목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공동체에 보낸 것이다. 따라서 바오로는 공동체의 삶에 관련되는 요소들을 더 우선하기 때문에 서간에서 그의 개인 체험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런 까닭에 바오로의 성령 체험이라는 주제에 대해 그의 서간을 토대로 연구할 수 있는 자료가 제한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성령 체험의 핵심이 다마스쿠스에서 그리스도와 만난 체험에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안에 있는 성령의 현존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오로의 성령 체험의 본질은 그의 삶을 이끌었던 모토라고 할 수 있는 갈라 2,20에 잘 요약되어 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하느님께 부름 받은 초기에 한 이 성령 체험도, 다른 진정한 종교 체험처럼 수많은 선교 활동과 성찰을 통하여 생애 내내 성숙해 갔다.

 

로마서와 성령

 

57년경 바오로가 코린토에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다른 어느 서간보다 더욱 자주 성령이 하는 역할을 묘사한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된다(1,4 참조), 성령은 영적 선물을 주며(1,11; 12,6-8 참조), 율법과 대조된다(2,29; 7,6.14; 8,2.4 참조). 성령은 하느님 사랑의 통로이기도 하다(5,5; 15,30 참조). 특히 ‘성령의 장’이라 불리는 8장에는 ‘프네우마’라는 용어가 자주 나오는데 대부분 성령을 가리킨다.

 

성령은 육과 반대되며,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고, 믿는 이들에게 힘을 준다(8,5-13 참조). 성령은 믿는 이들이 하느님 자녀로서 정체성을 깨닫도록 도와준다(8,14-17 참조). 그러나 세례 때 우리가 받은 성령은 “첫 선물”(8,23)이다. 하느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내려주실 완전한 선물에 대한 담보와 보장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11,16; 1코린 15,20 참조). 성령은 믿는 이들의 기도를 도와주며(8,26-27 참조), 평화와 기쁨을 불어넣어 준다(14,17; 15,13 참조). 성령에 대해 바오로가 신학적으로 성찰한 바의 근본 요소는 특히 8,3-4.9-11에 나타난다. 이 여러 구절에서 바오로는 “우리”(4절), “여러분”(9-11절), “누구든지”(9절)라는 다양한 대명사를 사용하면서, 성령 체험을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체험으로 간주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한다. 그분의 삶, 죽음과 부활, 그분의 기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분의 존재 자체를 닮아가게 한다”(로마노 펜나).

 

바오로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

 

바오로는 로마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깊이 관계를 맺도록 자주 권고한다. 진정한 유다인의 삶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느님을 기억하게 하는’ 기도로 이어졌다. 그러나 바오로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 체험을 하면서 그의 기도도 변화되었다. 그에게 기도는 인간의 의무나 영적 훈련이 아니라 온전히 ‘성령의 선물’이었다. 8장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새로운 삶의 특징을 ‘성령 안의 삶’으로 소개하면서 이를 배경으로 기도와 성령의 뗄 수 없는 관계를 설명한다. 바오로는 그 관계에 대한 자신의 체험을 글로 남겨, 기도를 배우고 싶어 하는 모든 세기의 사람들에게 확실한 성서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성서와 함께, 2013년 2월호(통권 443호)]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15) 하느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

임숙희 레지나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로마 8,9-11).

 

문맥 보기

 

지난 호에 이어 8,9-11을 중심으로 바오로의 성령 체험을 살펴보겠다. 바오로는 이 세 구절에서 그리스도인을 ‘하느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지닌 사람들’로 소개한다. 9-11절은 ‘육’과 ‘영’의 대조 관계를 다룬 8,1-17에 속한다. ‘육’ 안에 있는 이는 죄에 굴복하며 살고 그리스도에 의해 아직 구속되지 않은 사람, 성령의 활동에 자신을 열지 않은 사람이다. 바오로는 이런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8절)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9-11절에서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의 다양한 면을 ‘그리스도 체험’으로 설명한다.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면 …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면(9절 참조) 8절의 주어 ‘그들’(3인칭 복수형)이 9절에서 ‘여러분’(2인칭 복수형)으로 바뀐다. 이는 성령 체험이 독자 모두와 관련되었음을 드러내며, 성령에 대한 두 가지 요소를 표현한다.

 

첫째, ‘여러분 안에 사는 하느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갈라 4,4; 필리 1,19 참조)이다. 구약에서 영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루아흐(rûah)는 397번 나오는데, 주로 ‘하느님의 영’을 가리킨다. 나아가 이 용어는 창조물이나 역사 등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방식을 가리킨다. 신약성경에 ‘하느님의 영’은 30번 나오는데 그중에 19번이 바오로 서간에 나온다. 바오로에 따르면 구원이든 단죄든 영적인 개입은 오로지 하느님께 속한다. 신약에서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으로 여기는 구절은 6번 나온다(2테살 2,8; 갈라 4,6; 로마 8,9; 필리 1,19; 사도 16,7; 1베드 1,11 참조).

 

8,9에서 성령은 하느님의 생명과 활동을 전달하며 그리스도와 관련지어 정의된다. 적어도 기능적 면에서는, 그리스도와 하느님이 동등하게 성령에 의해 대표된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와 하느님을 뚜렷하게 동일시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활동 면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영’은 ‘성 프란치스코의 영’처럼 순수하게 자격을 부여하는 소유격이 아니다. ‘겸손의 영, 가난의 영’처럼 둘째 단어인 영이 첫 단어인 가난으로 축소되는 것처럼 설명하는 소유격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한마디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하는 하느님의 영’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영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영의 도구가 된다. 이런 의미가 15,18-19에 잘 표현되어 있다. “사실 다른 민족들이 순종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이룩하신 일 외에는, 내가 감히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 일은 말과 행동으로, 표징과 이적의 힘으로, 하느님 영의 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쿰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였습니다.” 이 하느님의 영이 부활하신 분의 모든 활동을 대표한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신 사람’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영을 갖는다’, ‘그리스도에게 속한다’와 같은 뜻이다.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것은 부활하신 분의 영향을 받으며 산다는 것,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구속력으로 자신을 정화하며 산다는 것, 그분이 사랑하는 것처럼 살고, 하느님을 기반으로 자기 삶을 건설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오로가 믿는 이를 ‘그리스도의 영을 모신 사람’이라고 정의할 때, 이는 믿는 이들의 삶이 부활한 주님과 내밀한 일치를 이룬 삶이라는 의미이다. 믿는 이는 예수님의 삶의 형태(죽음·묻힘·부활)를 그대로 따라간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10절)

 

10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로 바뀌면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을 덧붙인다. 10절 후반부는 조건문 귀결절인데 두 문장의 대조를 강조한다.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이 문장 구조에서 그리스도가 ‘죽음’(죽은 몸)에서 ‘생명’으로, ‘죄’에서 ‘의로움’으로 건너 가게 하는 주체라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 방식으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힘과 생명을 주는 성령 활동의 토대를 건설한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는 갈라 2,19-20에 묘사된 바오로의 다마스쿠스 체험을 연상시키는 신앙생활의 기원(시작)을 가리킨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에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라는 표현은 믿는 이들의 실존을 변화시키고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동하게 하는 근본 요소이다.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우리 신앙의 시작이며,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은 그리스도화하는 신앙의 여정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끌어 간다. 아마도 8,10은 초대 교회에서 세례와 관련된 말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바오로 서간에 자주 나오는 ‘그리스도 안에서’와 ‘성령 안에서’는 서로 관련된 표현이다. 그러나 항상 유념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 안의 삶이 성령 안의 삶보다 먼저라는 점이다(사도 19,1-6 참조). 바오로의 관점에서 보면 성령(그리스도에 의해 중재된 하느님의 영)은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 안에서 활동하신다.

 

예수님을 부활시킨 분의 영이 여러분에게 생명을(11절 참조)

 

11절에서는 앞 구절에 나온 다양한 성령 체험이 “다시 살릴 것이다”는 말에 요약되는데, 그것은 부활을 가리킨다. 이는 믿는 이들이 신앙을 통해 죽은 몸의 부활뿐 아니라 ‘생명’에 대한 희망도 가질 것이라는 점을 밝힌다. 성령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신다. 성령은 현재와 미래에 죽음을 생명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성령은 먼저 지금 이 순간에 권능을 지니고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새롭게 살도록 한다. 성령은 미래에 죽을 이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에 필적하는 생명을 가져다줄 것이다.

 

바오로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

 

8,9-11에서 바오로는 성령 체험을 그리스도 체험과 연관시킨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체험된다.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체험과 분리해서 성령을 체험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영’을 주고, 성령은 우리를 하느님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로마 8,29; 참조 1코린 15,49) 이끄신다. 성령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삶으로 우리를 데려가신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스승이자 주님이신 분의 여정을 걷게 하신다.

 

바오로는 후대 교회에서 체계화한 삼위일체 교의처럼 삼위를 위격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이 근본적으로 하느님 아버지, 그분의 아드님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활동하는 하느님의 영의 상호 관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으며, 그리스도처럼 기도하고 싶은 갈망을 갖는다.

 

[성서와 함께, 2013년 3월호(통권 444호)]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16) “아빠! 아버지!”라고 외치게 하는 성령

임숙희 레지나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4-15).

 

문맥 보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하실까? 하느님께서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성령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온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의 가정으로 쉬지 않고 초대하신다. 바오로는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라고 권고한 후(8,13 참조),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은 이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여정에서 하는 역할을 “아빠! 아버지!”(8,15)라는 기도와 연결하여 소개한다.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

 

바오로는 8,15에서 성령의 역할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프네우마 휘오테시아스, πνεῦμα υἱοθεσίας)으로 표현하는데, 직역하면 ‘아들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이다. 흥미롭게도 바오로는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과 반대되는 것으로 ‘자유의 영’이라는 표현 대신에 더욱 커다란 것, 즉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소개한다. 이 영을 통해 자유가 온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로마서 강해》, 14,2-3).

 

‘자녀로 삼다’를 의미하는 ‘휘오테시아(υἱοθεσία)’는 바오로의 전형적 용어인데 바오로 서간에서만 다섯 차례 나온다(로마 8,15; 8,23; 9,4; 갈라 4,5; 에페 1,5 참조). 8,15에서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이라는 표현은 성령이 신자가 아니었던 사람을 새 신자로 만든다는 의미보다, 세례를 통해 이미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가진 이들이 계속 이를 유지하고 발전하며 완성하도록 성령이 도와준다는 의미에 더욱 초점을 맞춘다.

 

성령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결합시키고, 그리스도를 믿게 하며, 유일한 하느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가 가진 권한과 똑같은 권한에 참여할 수 있게 하면서, 세례부터 종말 때까지 ‘하느님 자녀’의 신분을 완성시킨다. 바오로는 그의 복음의 핵심, ‘인간은 하느님 편에서 거저 주는 선물을 받아 하느님의 가족에 속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구약성경과 유다교의 ‘하느님 아들’의 개념에 토대를 두면서도, 로마의 양자법을 통해 로마 제국에 널리 알려진 ‘휘오테시아’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께 외치는 것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는 “아빠! 아버지!”를 외친다. 성경의 전통에서 동사 ‘외치다, 부르짖다(크라조 κράζω)’는 기도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구약성경의 그리스어역인 칠십인역(LXX)에서는 보통 개인이나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서 하느님께 외치거나 간청할 때 이 동사를 기도의 의미로 사용한다(창세 18,20; 탈출 2,23; 3,7; 22,22; 1사무 5,12; 욥 34,28; 시편 34,16 참조).

 

신약성경에서도 동사 ‘크라조’는 기도를 암시하는 구절에 들어 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바치신 마지막 외침을 ‘크라조’로 표현한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마태 27,50). 루카 복음서의 병행 구절은 예수님의 이 마지막 외침이 아버지께 바치는 그분의 마지막 기도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루카 23,46).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장면에서도 이 동사를 사용하여 그의 마지막 기도를 묘사한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사도 7,60). 성경의 예를 통해 8,15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외치는 것은 단순히 하느님을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하느님 자녀들이 다양한 상황에서 하느님을 향해 부르짖고 갈망하는 것, 곧 기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빠! 아버지!

 

성령의 힘으로 ‘아빠, 아버지’에게 외치는 것은 바오로의 기도 체험이지만, 그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기도 체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용어는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니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바치신 긴 기도에서도 발견된다(마르 14,32-42 참조).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예수님께서는 죽음 앞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구원을 청하는 것과 당신 뜻대로 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 대신 수난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길을 선택하신다.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는 기도에는 하느님의 개입이 수반된다. 우리가 우리의 ‘아빠,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신뢰하는 마음으로 온전히 모든 것을 내맡길 때, 그분은 우리의 삶에 개입하신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고통 받고 하느님의 뜻에 내맡기시는 모습을 통해 마르코 공동체도 박해와 죽음 앞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모범을 제시한다. 마르코 공동체는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며 기도해야 한다. 이 장면에 소개된 예수님의 기도에서 바오로의 기도와 비슷한 점을 찾아볼 수 있다. 겟세마니에서 예수님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마르 14,36)라고 하느님께 세 차례 간청한 것처럼, 바오로도 몸 안에 있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느님께 세 번이나 간구한다(2코린 12,7-10 참조). 아마도 예수님의 기도가 바오로에게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바오로는 그의 서간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어 새롭게 알게 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말로 자주 표현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이런 친밀한 관계는 ‘아빠! 아버지!’라는 표현으로 더욱 강조된다.

 

8,15에서 2인칭 복수(“여러분은 … 받았습니다”)는 1인칭 복수(“우리가 … 외칩니다”)로 인칭과 시제가 바뀌는데, 이는 ‘아빠! 아버지!’라는 표현이 팔레스티나뿐 아니라 바오로 시대의 모든 교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믿는 이들은 세례 때 받은 성령의 힘을 통해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아빠! 아버지!’는 이미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도이다. 지금 ‘아빠! 아버지!’라고 외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라, 마음 안에 부어진 성령의 영감을 받은 이의 목소리이다. ‘아빠! 아버지!’라는 외침은 믿는 이들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정의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의 자녀 되어 실제로 살아가는 체험을 하도록 그들을 이끈다. ‘아빠! 아버지!’라는 초대 그리스도인의 짧은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 진리를 기억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 구체적으로 행동하기 전에, 이미 존재 자체로 하느님의 자녀이며, 이 신분은 나아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로마 8,17)라는 소중한 신분과 결합된다.

 

바오로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

 

바오로 사도여, 당신은 우리가 기도를 배우기 위해 매일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겪는 모든 상황에서 ‘아빠, 아버지’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아빠! 아버지! 당신 뜻에 모든 것을 맡깁니다” 하고 기도할 때, 우리는 예수님과, 당신이 기도할 때 느꼈던 하느님 체험 안으로 들어갑니다. 세례 받은 모든 이에게는 하느님 아버지께 성령 안에서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를 단지 인간적 훈련으로 생각하면 기도는 어렵습니다. 바오로 사도여, 온전히 성령의 힘으로, 오직 성령께 내맡기면서 하느님께서 내려오시는 것을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기도라고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4월호(통권 445호)]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17)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임숙희 레지나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나약함 안에서 도와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직역: 로마 8,26).

 

문맥 보기

 

성령의 모든 활동은 우리를 성부와 성자께 길들이는 데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성부의 영을 부어 주시고 우리는 그 영의 힘으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8,15)라고 부를 수 있다. ‘하느님 자녀’라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완성시키는 성령(8,14-17 참조)은 현재 고통을 겪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부활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으며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북돋운다(8,18-25 참조). 바오로는 8,26-27에서 독자의 현재 체험에 집중하면서 성령이 우리의 기도를 어떻게 돕는지 더욱 구체화한다. 이 두 구절에는 성령과 기도의 관계에 토대를 둔 바오로의 기도 신학의 핵심이 담겨 있다. 이달에는 8,26을 해설하고 다음 달에 8,27을 해설하겠다.

 

우리의 짐을 함께 지고 가시는 성령

 

우리말로 ‘돕다’라고 번역된 ‘쉰안티람바노마이(συναντιλαμβάνομαι)’를 직역하면 ‘옆에서 함께 짐을 짊어지다’는 뜻이다. 성령은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 옆에 다가와 “걱정하지 마, 내가 네 짐을 함께 들어줄게, 목적지까지 함께 가자!” 하고 말하는 친구이다. 이 동사에는 다른 사람의 일을 거든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그가 하고 있는 일에 실제로 관심을 갖는 것, 나아가 실제 목표한 것에 대해 어떤 결과를 달성한다는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 동사로 표현되는 성령의 생생한 도움은 8,26에서 ‘우리의 나약함 안에서(테 아스테네이아 헤몬 τῇ ἀσθενείᾳ ἡμῶν)’, ‘올바른 방식으로(카토 데이 καθὸ δεῖ)’,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στεναγμοῖϛ ἀλαλήτοις)’으로 표현된다.

 

우리의 나약함

 

26절에서 ‘나약함(아스테네이아 ἀσθενεία)’의 의미에 대해 학자들은 주로 두 가지로 나누어 해석한다. 첫째, 인간 삶의 본질에 해당하는 육에 따른 일반적 나약함으로 해석한다. 나약함은 육을 지니고 사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것이다. 단지 성령의 힘, 하느님의 사랑이 이 고통에서 믿는 이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게 한다. ‘나약할 때’ 성령이 도우신다는 것을 바오로는 체험했다(2코린 13,3-4 참조). 바오로는 서간 여러 곳에서 자신의 나약함 안에서 하느님의 권능을 자랑한다고 고백한다(2코린 11,30; 12,9 참조). 이런 의미에서 ‘나약함’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랑과 연결되는데, 그것을 통해 하느님의 권능이 생명의 샘으로 계시된다. 나약함에 대한 바오로의 개념은 그리스도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둘째, 나약함은 그리스도인이 기도라는 특별한 영역에서 겪는 한계다. 그것을 나약함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런 의미가 26절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접속사 ‘왜냐하면(가르 γάρ)’이 지시하는 것처럼, 이 구절은 ‘기도에 대한 우리의 나약함’이라는 관점에서 나약함의 체험을 언급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독자가 현재 겪는 체험에 집중하면서 성령이 그들을 뒷받침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어 한다.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는 우리

 

우리말 본문에서 ‘올바른 방식으로’라는 그리스어(카토 데이 καθὸ δεῖ) 표현은 ‘그 정도에 따라 적절하게’를 의미한다. 곧 ‘기도의 목적인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게’라는 어감을 가지고 있다. 기도 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청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령은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여’ 기도하도록 우리를 돕는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인간의 뜻에 복종시키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뜻을 하느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바오로는 이 ‘올바른 방식’이라는 표현으로 성령이 기도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돕는지 소개한다.

 

성령의 도움은 우리가 해결하기를 바라는 일상생활의 모든 문제에 구체적 해결책을 제공하지 않는다. 아버지 하느님 앞에서 자녀로서 지녀야 할 올바른 태도,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는 자세를 형성시키며, 하느님 아들의 십자가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그들을 향한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을 믿도록 그들을 인도한다. 8,26.28에서 바오로는 동사 ‘(우리는) 알고 있다(오이다멘 οἴδαμεν)’를 믿는 이들의 공통 체험과 관련지어 두 번 사용한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모른다(8,26 참조). 그러나 우리는 기도 안에서 희망을 간직한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계획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8,28-30 참조).

 

몸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바오로는 26절 후반부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στεναγμοῖς ἀλαλήτοις)’를 통해 26절 전반부에 나온 기도에 대한 우리의 나약함을 도우러 오시는 성령의 다른 면을 설명한다. 형용사 ‘말로 표현할 수 없는(알랄레토스 ἀλάλητος)’은 신약성경에 한 번 나온다. ‘너무 강한 감정을 표현할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성령을 주어로 하는 26절의 ‘탄식(스테나그모스 στεναγμός)’은 8,22의 피조물의 탄식과 8,23의 성령을 첫 선물로 받는 ‘우리 자신’의 탄식과 다르다. 그것은 단순한 ‘한숨이나 탄식’이 아니라 성령의 진정한 기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칠십인역(LXX)에서도 종종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히브리인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탄식과 기도를 자주 연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다”(탈출 2,24; 참조 6,5). 성경의 전통에서 인간의 탄식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고통을 기억하시게 하는 도구가 된다.

 

위에서 말한 논거를 토대로 볼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이 ‘신령한 언어’에 대한 구체적 암시라고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오늘날 많은 성경학자도 이 표현을 신령한 언어로 제한하기보다 ‘성경의 기도’로 해석하는 데 더 비중을 둔다.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바오로는 명백하게 신령한 언어는 ‘말해지는 언어, 사실상 천상의 언어’라고 말한다(1코린 14장 참조). 이는 26절에서 성령의 탄식이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성령이 ‘탄식한다’고 말하는데 성경 어디에서도 ‘성령의 탄식이 들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구절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26절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은 글자의 의미 그대로가 아니라 은유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결과를 낳는다. 이 표현의 핵심은, 믿는 이들의 갈망이 너무나 커서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는 데 있다. 곧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은 인간의 나약함과 같은 의미를 내포한다.

 

성령은 인간의 나약함의 뿌리에서 일을 한다.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이 8,26에서 효과적인 기도로 나타나는데, 성령은 이 탄식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룬다. 성령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은 우리 모두 우리를 위한 성령의 중재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내포한다. 성령은 항상 우리를 위해 중재하나, 우리는 그분이 어디에서 무엇으로 어떻게 우리를 돕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성령의 탄식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하느님만 성령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을 이해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중재에 대한 우리의 무지는 기도가 단지 인간의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인간의 나약함 한가운데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중재 기도는 고통당하는 인간의 역사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고, 그분이 거기에서 인간에게 당신을 창조주이자 구원자로 드러내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성령의 탄식은 우리의 나약함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거기에 참여하고 그것을 짊어지시는 하느님의 탄식이다”(H. 쉴러).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우리 위에서 탄식한다. 그렇게 그분의 영을 통해 하느님께서 몸소 개입하시고 당신의 피조물이 필요한 것을 채우러 오신다.

  

[성서와 함께, 2013년 5월호(통권 446호)]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18) 하느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시는 성령

임숙희 레지나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 8,27).

 

문맥 보기

 

기도하면서 느끼는 나약함은 기도할 때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청하는 것이 좋은지 모른다는 데 있다(26절). 27절에서 바오로는 성령의 중재 기도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라는 표현으로 더욱 구체화하여 소개한다. 이 구절은 신약에서 유일하게 성령의 중재 활동을 언급한 구절이다. 성령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궁극 목적은 이어지는 28-30절에 소개된다. 성령은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평온하게 그리스도의 모습과 닮아 가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도록 기도하신다.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

 

누가 우리 마음을 살필 수 있을까? 누가 우리 마음 밑바닥에 흐르는 말없는 탄식을 꿰뚫어 볼 수 있을까? 오로지 하느님만 인간의 마음을 아신다.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호 에라우논 타스 카르디아스 ὁ ἐραυνῶν τὰϛ καρδίαϛ)”이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을 가리킬 때 종종 사용된다(1역대 28,9; 29,17; 시편 7,10; 139,1.23; 예레 17,10 참조).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은 종종 인간적 태도를 취하시는 분으로 소개된다. 그분은 굽어보시고, 인간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시며, 인간의 가난과 비참을 측은히 여기신다. 하느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당신의 창조물인 인간을 샅샅이 살피고 아시는 분이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시편 139,1-2).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악을 보시며 그것을 판단하기도 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그분의 판단을 헤아리기 힘들다. 하느님께서 아시는 ‘성령의 생각’은 우리를 위한 성령의 중재 내용, 곧 “말로 다할 수 없는 탄식”(26절)을 의미한다. 26절에서 성령의 중재 기도가 “말할 수 없는 탄식”인 이유가 27절에서 설명된다.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 인간 내면의 비밀을 꿰뚫어 보실 수 있는 분이어서 말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성령의 탄식이 인간이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적절한 언어의 꼴을 갖추지 않아도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신다. 이 구절에서 바오로는 “하느님은 기도할 때 우리의 말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을 평가하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오리게네스, 《로마서 강해》 7,6).

 

하느님이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라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믿는 이들이 성령을 통해 바치는 기도, 곧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을 듣고자 하느님께서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도 보여 준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고, 내가 청한 것을 하느님께서 자꾸 잊어버리기나 하신다는 듯 되풀이해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종종 긍정적 답변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기 때문에 항상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받아들이신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무지와 나약 때문에 좌절되지 않고 그것을 충만히 완성한다. 성령이 우리를 위해 중재 기도를 하고 하느님께서 그 성령의 생각을 받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중재자인 성령

 

‘간구하다’로 번역된 동사(엔튄카노 ἐντυγχάνω)는 ‘긴급하게 어떤 것을 계속 청하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청하는 대상이 하느님이므로 이 동사는 ‘중재하다’를 의미한다. 바오로는 이 개념을 어디에서 가져왔을까? 당시 유다교에는 천사 같은 하늘의 중재자가 하느님과 인간을 중재한다는 개념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쿰란 공동체 회원들도 성령을 통해 하느님께 기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는 어떤 인간도 당신에게서 갈라지면 의롭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영원히 당신 종에게 당신의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당신이 저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기도합니다”(1 QH 16,11-12). 그러나 성령의 중재 기도에 대한 바오로의 확신은 아마도 자신의 나약과 무능력을 받쳐주는 하느님의 힘을 체험했던 초대 그리스도인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체험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을 언급한다.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법정에 넘길 때, 무슨 말을 할까 미리 걱정하지 마라. 그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시는 대로 말하여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성령이시다”(마르 13,11).

 

하느님의 뜻에 따라

 

27절에서 성령의 중재 개념은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여, 또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카타 테온 κατὰ θεὸν)”라는 표현으로 더욱 명확하게 밝혀진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는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 무엇을 먼저 청해야 할지 순서를 정하면서 기도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9-10).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기도하는 법과 자세를 잃어버렸다. 이제 성령이 그런 그리스도인을 돕기 위해 오시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를 위해 기도하신다.

 

하느님의 뜻에 따른 성령의 기도는 성령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우리를 일깨운다. 성령은 예전에 없던 새로운 기도 방식을 창안해 내신 것이 아니다. 성령의 중재 기도는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기도를 다시 떠올리게 하여 그것을 계속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성령의 일은 ‘하느님 아들’의 죽음과 부활로 시작된 하느님의 일을 믿는 이들이 계속하게 하는 것이다. 성령은 단독으로 활동하지 않고 항상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일하신다.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을 통해 행동하고 성령에 의해 대표된다.

 

여기서 성령은 삼위의 한 위격이라기보다 인간과 하나가 되어 모든 것을 함께하는 인격적 존재로 간주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성령은 인간의 마음과 일치하고 그 안에 적절한 기도의 형태를 형성시키신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우리 인생의 길을 비추는 내면의 스승이며 영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의 기도 목적

 

믿는 이들이 항상 희망에 차 있고 평화를 간직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성령이 하느님 뜻에 따라 살아가도록 기도해 주시기 때문이다(8,26-27 참조). 무엇 때문에 성령은 우리를 위해 그런 기도를 하시는가? 이어지는 28-30절은 성령의 중요한 기도 목표가 하느님 계획의 완성, 곧 믿는 이들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상을 닮아가게 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성령은 기도 중에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알게 하고, 장차 그리스도처럼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 우리의 미래임을 상기시키신다. 성령은 우리의 시선을 현재에 두면서도 미래를 향해 이끌어가신다.

 

바오로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

 

바오로 사도여, 제가 기도할 때 저 혼자가 아니라 성령께서 함께 기도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성령은 항상 하느님이 ‘아빠, 아버지’이심을 떠올리게 하십니다. 그분은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는 저를 도와주십니다. 기도한다고 해서 삶의 모든 문제가 풀리지 않을 것이며 하느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도 알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저를 사랑하시며 저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이 당신 계획의 모자이크 조각들이라고 계속 말씀하시기에 저는 희망을 갖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 마음을 살펴보시고 성령을 통해 오늘도 내일도 제 삶을 그리스도 곁으로 끌어당기며 제가 거대한 하느님 가족에 속한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기도는, 성령의 생명력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의 현존에 참여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며 그분과 친교를 나누는 일치를 뜻합니다”(장 라 프랑스).

 

[성서와 함께, 2013년 6월호(통권 447호)]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19) 차라리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았으면

임숙희 레지나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를 기도하곤 했습니다”(로마 9,3: 필자 직역). “형제 여러분, 내 마음의 소원과 그들의 구원을 위한 나의 기도를 하느님을 향해 바칩니다”(로마 10,1: 필자 직역).

 

문맥 보기

 

1-8장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가치가 얼마나 귀한지 소개한 후, 9-11장에서는 그것을 거부한 동족 이스라엘이 구원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깊이 성찰한다. 9-11장은 세 단계로 전개되는데, 각 단계는 하나의 주제 구절을 가지고 있다.

 

먼저 입문에서는 이스라엘이 현재 처한 상황의 수수께끼를 다루고(9,1-5 참조) 세 개의 주요 단락으로 나누어 이 문제에 답변한다(9,6-11,32 참조). 하느님의 부르심은 역설적이며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이 하느님 구원 계획의 실패를 뜻하지는 않는다(9,6-29 참조: 주제 구절 9,6). 이 상황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 곧 구원을 가져오시는 분을 믿기보다 율법을 선호했기 때문에 생겨났다(9,30-10,21 참조: 주제 구절 10,4).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하나의 도구로 삼으신 하느님께서는 미래에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11,1-32 참조: 주제 구절 11,1ㄱ). 바오로는 결론으로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하느님의 지혜를 찬미하는 영광송을 바친다(11,33-36 참조). 이와 같이 9-11장에서 우리는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중재자 바오로의 모습을 보게 된다(9,3; 10,1 참조).

 

바오로, 모세보다 더 위대한 중재자

 

9,3은 그리스어 문장에서 습관적 기도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 ‘기도하곤 했다’(에우코멘 ηὐχόμην)로 시작한다.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려는 백성을 위해 기도하고, 자기 형제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며, 그의 형제 히브리인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차라리 자신이 ‘저주(아나테마 ἀνάθεμα)’ 받기를 바란다. 동족을 위해 자기 생명까지 주려는 바오로의 극단적 자세에서 죄인들을 위해 생명을 주셨던 그리스도가 다시 되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너 자신의 목숨을 잃으면서 다른 사람을 구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그가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제 스승이자 주님에게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사람은 잃고 그것을 잃은 사람은 얻을 것’(마태 16,25; 마르 8,35 참조)임을 배웠습니다”(오리게네스).

 

바오로는 형제를 위해 목숨을 잃는 것을 동족을 위한 중재 기도로 표현한다. 그는 충실한 유다인으로서 유다 전통에서 물려받은 중재 기도에 대해 깊은 감각을 지녔는데, 유다인들은 중재를 ‘의인들의 기도’로 간주하였다(야고 5,16; 1베드 3,12 참조). 9,3에서 드러나는 바오로의 자세는 백성을 위한 위대한 중재자였던 조상 모세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중재자로서 모세가 보인 모범은 탈출 32,30-32에 잘 나와 있다. 그러나 바오로는 모세와 비슷한 길을 따르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모세보다 더 위대한 인물, 새로운 모세라 할 수 있다. 그는 모세처럼 하느님의 뒷모습만 바라본 것이 아니라, 2코린 3,8.17에서 말하듯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직접 보았다. 모세는 그의 백성에게 외적 규정인 율법을 주지만, 바오로는 복음 곧 ‘새로운 피조물’로 인간을 변화시키는 내적 율법을 주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백성의 죄를 사하시도록 하기 위해 인간의 행동을 포함하여 그들의 운명이 적혀 있는 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삭제되기를 기도했다(탈출 32,32 참조). 그에 비해 바오로는 형제들의 구원이라는 선(善)을 위해 자기 삶 자체인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나가 저주받기를 청한다.

 

‘하느님 앞에서’ 기도합니다

 

바오로는 이미 9,1-3에서 표현된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그의 근심을 10,1에서 다시 표현한다. 그런데 앞에서보다 더욱 부드러운 어조를 취한다. 바오로의 중재 기도는 ‘소원(에우도키아 εὐδοκία)’과 ‘기도(데에시스 δέησις)’라는 두 단어에서 드러나는데, 그는 두 가지 기도 자세를 강조한다.

 

바오로는 ‘소원’을 마음에서 원하는 것과 사랑에서 솟아나오는 인간적 ‘갈망’을 가리키는 데 사용한다(필리 1,15-16 참조). 이 방식으로 ‘소원’은 마음의 끊임없는 고통(9,2 참조)과 결합된다. 나아가 칠십인역에서는 ‘에우도키아’가 인간의 갈망만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 마음에 들기 때문에 바로 그 결정에 맞게 일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가리키기도 한다. ‘소원’과 ‘기도’가 나란히 놓인 것은 바오로 삶의 특별한 방식, 구체적으로 그가 어떻게 하느님께 탄원 기도를 바치는지 보여 준다.

 

바오로는 동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 그는 자신의 갈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 보시기에 적절한 때에 올바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를 탄원한다.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하느님을 향하여(프로스 톤테온 πρὸς τὸν θεὸν)’라는 표현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의 하느님 현존 체험과 관련한다. 그리스도와 일치하며 일상에서 그분의 힘을 느끼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그분의 영을 통해 그들 안에 현존하시는 분, 곧 하느님과 일치한다. ‘하느님을 향하여’는 바오로의 삶을 요약하는 팻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하느님께서 아들을 계시하시어 자신을 구원하셨다는 특별한 하느님 체험 덕분에 항상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의 눈앞에서’ 살아간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1테살 1,3; 3,9; 1코린 1,29; 2코린 2,17; 12,19 참조). 그에게 진정한 사도직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시간과 공간에서 육화하는 것이다.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바오로는 10,1에서 ‘그들을 위하여(휘페르 아우톤 ὑπὲρ αὐτῶν)’ 바치는 중재 기도의 목적이 동족의 ‘구원’이라고 소개한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은총의 도구가 되도록 선택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구원 계획의 성취에 응답하는 데 실패하였다. 바오로는 복음 선포라는 자신의 사도직과 관련한 문제라기보다 자신의 사사로운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그들의 ‘구원’을 걱정한다. 어떻게 그런 자세가 가능할까? 사도는 현재 동족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기 전에 자신이 살았던 과거를 환히 보기 때문이다. 바오로가 과거에 그랬듯 동족도 하느님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지만 이 열정은 아직 완전하지 않다. 그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통해 하느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충실한 유다인이 지니는 삶의 궁극적 목적이었다.

 

바오로는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난 후에, 그리고 수십 년간 선교 활동과 성찰을 하면서 그분을 계속 만나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였다. 이 체험으로 바오로는 동족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진정으로 알도록 기도하게 하는 동기를 갖게 되었다. 바오로의 이런 중재 기도는 희망을 거슬러 희망하는 것이다(2코린 1,10 참조). 이 기도에 담긴 바오로의 사고를 그가 지닌 종말론적 전망과 연결하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로마 5,9.10; 8,24; 13,11 참조).

 

지금 바오로는 11,25-26에서 말할 것을 미리 보여 준다.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기도를 바칠 때 지금 당장, 또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 그것을 보게 해 달라고 청하지 않는다. 구세사에서 보이는 하느님 뜻의 신비에 맡겨 드려야 한다고 가르친다(9,6ㄴ-29 참조). 이런 바오로의 기도 자세는 역사에서 하느님의 주권과 그분의 충실함에 대한 체험에서 비롯한다. 그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모든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계속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기도를 통해 로마의 그리스도인에게 가르친다. 자기 목숨을 거는 중재 기도는 한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바오로처럼 평생 ‘하느님을 향해’ 살아온 사람의 자연스러운 선택일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3년 7월호(통권 448호)]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20)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권고합니다

임숙희 레지나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1-2).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문맥 보기

 

지난달에 중재자로서 바오로의 모습(9-11장 참조)을 통해 중재 기도가 그의 사도 직분에서 핵심 역할을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바오로는 이스라엘의 구원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인간이 감히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 계획에 맡겨 드리면서 아름다운 찬미가로 9-11장을 마무리한다(11,33-36 참조). 12,1-2은 권고 항목인 12-15장의 내용을 포괄하는 주제 구절이다. 12,1에 나오는 접속사 ‘그러므로’는 로마서의 논리 전개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오로가 1-11장에서 제시한 가르침을 토대로 12-15장에서 로마 신자들에게 공동체에서 실천해야 할 사항을 권고하기 때문이다.

 

12,1-2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믿어 새 삶을 얻게 된 사람들은 영적 제사와 변화된 삶으로 신앙을 세상에 증언하라고 권고한다. 이어서 12,1-2의 정신을 기초로 12,3-21에서 성령께서 이끄시는 삶(8장 참조)의 구체적 특징을 보여 주는 사항들을 권고한다. 이 단락 가운데에 위치한 12,12에서는 항상 기뻐하고 희망하며 고통 가운데에서도 인내할 수 있는 자세가 기도에서 흘러나온다고 가르친다.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권고합니다

 

바오로는 12,1에서 로마서에서는 처음으로 동사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의 1인칭 단수형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내가 권고합니다(παρακαλῶ οὖν…).” 고대 그리스어에서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는 ‘다른 사람에게 외치다’ 또는 ‘어떤 사람을 자기 옆으로 부르다’는 의미이다. ‘기도하다, 요청하다’는 의미로도 자주 사용된다. 이 동사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109번 나오는데, 바오로 서간에서만 54번 나오므로 바오로가 즐겨 쓰는 동사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서간의 권고 항목은 종종 파라칼레오 동사로 시작된다(로마 12,1; 2코린 10,1; 1테살 4,1; 필리 4,2; 에페 4,1 참조). 바오로는 이 동사를 ‘권고하다’는 원칙적 의미 외에도 ‘위로하다’, ‘계속해서 탄원하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권고는 ‘명령’과 다르다. 바오로는 공동체와 관계를 맺을 때 힘과 권위를 사용했지만, 그것으로 공동체를 지배하거나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바오로는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낳은 영적 아들과 딸인 신자들을 격려할 줄 알았고, 자신을 그들과 함께 일하는 동료로 여겼다(2코린 1,24 참조). 바오로의 이런 자세는 그가 신자들에게 지시할 때도 ‘권고하다’는 동사를 자주 사용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바오로는 신자들에게 ‘명령할 수 있을 때’에도 먼저 ‘호소하는’ 방식을 택하여 신자들의 ‘자발성’에 우선권을 두었다. 참된 배움은 배운 것을 스스로 내면화하여 다른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파라칼레오를 사용하여 신자들에게 권고할 때 주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나 이와 비슷한 표현을 함께 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12,1에서는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디아 톤 오이크티르몬 투 테우 διὰ τῶν οἰκτιρμῶν τοῦ θεου)”라는 표현과 함께 권고한다.

 

바오로의 사도적 권고의 배경은 구약의 하느님이다. 구약성경에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십니다”(시편 86,15)는 표현이 27번 가량 나온다. 이스라엘은 이런 요소들을 하느님의 특성으로 여겼고, 이는 경건한 이스라엘인이 바치는 기도의 일부가 되었다.

 

바오로의 관점에서 하느님의 자비는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2코린 5,21)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로마 5,8)신 것으로 가장 잘 드러난다. 바오로의 삶 자체가 하느님 자비의 선포이자 하느님 자비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드러낸다. 바오로에게 “당신의 하느님 체험을 어떻게 표현하고 싶은가?”라고 질문한다면, 그는 “하느님의 자비를 맛본 체험”이라고만 말할 것이다.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공동체를 위한 탄원 기도가 바탕이 된 이 권고에서 바오로는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 정신에 따라 영적 예배로 바치라고 요구한다. 복음 선포의 궁극 목적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아가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제물이 되게 하는 것(로마 15,16 참조)이다. 복음 선포는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변형된 삶을 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 선포는 구약의 가장 완전한 제사인 번제와 비교할 수 있다. 번제에서 희생 제물은 불로 살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하느님께 도달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12,1)라는 말은, 복음 때문에 완전히 변형된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로 드리는 예배를 염두에 둔 말이다.

 

산 제물에서 ‘산(ζῶσαν, living)’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인이 세례를 받아 갖게 된 ‘새로운 삶’(6,4)과 연결된다. ‘새로운 삶’의 의미는 6,13ㄴ에서 끌어 낼 수 있다. “오히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도구로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세례는 인간을 죄에서 분리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일치시키며,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참여하게 한다.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받은 그리스도인은 자기 몸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드러낸다. 사도의 삶이 갖는 궁극 목적은 그리스도의 삶을 드러내는 것이다(2코린 4,10-12 참조). 이런 영적 예배는 오로지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바칠 수 있다. 성령 안에서 서서히 이루어지는 변화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12,2) 이끌어 준다.

 

12,1-2의 권고에서 바오로는 이방인과 유다인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로 봉헌하는 중재자의 모습을 보인다. 바오로의 복음 선포는 직접 수행하는 예배, 또는 희생 제사의 기능을 하는 거룩한 행위다. 바오로는 하느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선함, 성령의 사랑을 토대로 로마 신자들에게 영적 예배를 바치라고 권고한다. 바오로는 권고할 때 주관적 생각이나 판단이 아니라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권고한다. 이런 권고는 하느님 앞에서 항상 신자들을 기억하는 바오로의 기도 습관에서 흘러나온다. “내가 하느님 앞에서 살면서 당신이 좋은 신자가 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을 권고합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그것을 이루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희망과 인내는 기도에서 흘러나온다

 

12,12에서 바오로는 세 가지를 권고하는데 이는 서로 연결된다. 첫째, “희망 속에서 기뻐하십시오.” 기쁨은 무척 힘든 현재의 처지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종말론적 희망 속에서 누리는 감정이다.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을 때 성령께서는 미풍 같은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도록 이끄시며 다시 용감하게 걸어갈 힘을 주신다. 둘째, “환난 속에서 인내하십시오.” 이 표현에는 바오로가 체험한 고통의 가치가 스며들어 있다.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인내하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것을 증언한다.

 

마지막 권고는 앞선 두 권고의 영적 배경을 이룬다.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기도는 자녀들의 청원을 기쁘게 들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도록 신앙을 성장시킨다. 기도를 포기하는 것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포기하고, 세상에서 고아로 살겠다고 마음먹는 것과 같다. 누가 과연 신앙 공동체에서 참된 권위를 가지고 신자들에게 권고할 수 있는가? 기도하면서 희망하고 인내한 사람! 바오로처럼 기도하는 사도이리라!

 

[성서와 함께, 2013년 8월호(통권 449호)]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21) 나를 위하여 기도하고 함께 싸워 주십시오

임숙희 레지나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나를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나와 함께 싸워 주십시오. 내가 유다의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서 구출되고 예루살렘을 위한 나의 구제 활동이 성도들에게 기꺼이 받아들여지도록, 내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분과 함께 쉴 수 있도록, 그렇게 해 주십시오.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아멘”(로마 15,30-33).

 

문맥 보기

 

바오로는 공동체에게 권고(12,1-15,21 참조)하는 것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미래 계획을 밝힌다(15,22-33 참조). 이번 호에서 우리가 함께 읽고 묵상하며 기도할 15,30-33은 16장에 나오는 안부 인사와 영광송을 제외하면, 로마서의 마지막 단락인 15,22-33에 속한다. 이 단락에서 바오로는 로마 여행의 이유를 밝힌다. 그러나 로마에 가기 전에 예루살렘 공동체에 모금을 전달하는 일이 남아 있다. 바오로에게는 거기서 체포되어 죽을지도 모르는, 두렵고 불안한 여행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여행을 앞두고 바오로는 공동체의 기도가 자기에게 힘이 된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사랑으로

 

15,30은 12,1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오는 동사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로 시작된다. 여기서 파라칼레오는 ‘권고하다’가 아니라 ‘부탁하다, 요청하다’를 뜻한다. 바오로는 1-14장까지 말해 온 모든 것에 기반을 두고, 예루살렘 교회에 모금을 전달하려는 계획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로마 공동체가 기도로 자신을 도와주기를 희망한다.

 

기도해 달라는 이 요청은 두 가지 수단을 통해 강조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을 통해서(διὰ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καὶ διὰ τῆς ἀγάπης τοῦ πνεύματος).” 첫 번째 전치사 디아(δια)는 ‘-의 이름으로’라고 풀이할 수 있다. 바오로는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를 부탁하는지 소개한다. 12,1에서처럼 자기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의지하고, 거기에 ‘성령의 사랑’ 곧 성령이 믿는 이들의 마음 안에서 울려 퍼지게 하는 사랑을 덧붙인다. 바오로는 성령이 그리스도인의 기도에 영감을 주는 원천임을 명시한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바오로의 기도 요청이 삼위(三位) 체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함께 싸우다

 

바오로는 자신이 사도직을 하면서 겪는 싸움에 기도로 함께 참여해 달라고 부탁한다. 동사 ‘함께 싸우다(συναγωνίσασθαί)’는 일반 기도뿐 아니라 투쟁, 노동, 임무, 어둠의 힘에 맞서는 영적 고뇌라는 요소까지 진정한 사도적 기도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런 식으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오로를 위해 기도하면서, 그와 사도직 투쟁을 함께 한다. 바오로는 자신의 유익이나 행복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그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위해 중재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복음을 온전히 전하는 사명이 잘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열정 때문이다.

 

‘하느님 앞에’ 선다는 것은 바오로에게 항상 기쁨이었다. 지금까지 그의 사도직이 성공하게 된 원천은 ‘하느님’이었다. ‘하느님 앞에’라는 정식(定式)은 바오로가 기도한다고 명시하지 않아도, 그의 사도 직분이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라는 문맥 안에서 사용된다. ‘하느님 앞에서 기쁘게 바치는 중재 기도’라는 주제는 구약성경에도 자주 나온다. 예언자들의 중요한 소명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 앞에서 백성을 위해 중재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인들과 하느님의 관계는 성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2코린 3,4; 로마 15,30 참조). 바오로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체험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느님과 맺는 친교로 정의한다(필리 1,21; 갈라 2,20; 로마 8,10-11; 에페 3,17 참조).

 

하느님 뜻에 따라

 

로마 공동체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목적은 31-32절에서 나오는 목적절(히나 ἵνα) 문장 두 개에 소개된다. 첫째, 31절에서 바오로는 예루살렘 공동체가 자신이 가져가는 모금을 잘 받아 주도록 기도해 달라고 청한다. 바오로가 모금을 전해 주고 예루살렘 공동체가 그 모금을 받는 것은, 그의 관점에서 갈라진 이방계 그리스도인과 예루살렘 유다계 그리스도인이 이루는 협력과 평화를 상징한다. 그들 사이에 있었던 적대감은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극복되었다. 다양한 교회가 물질적으로 협력하는 것은 깊은 차원에서 은총의 열매, 곧 여러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하는 영적 협력에 해당한다. 둘째, 32절에서 바오로는 예루살렘을 방문한 후에 로마의 그리스도인들 곁에서 쉴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다. ‘쉬다’로 번역된 동사 쉰아나파우오마이(συναναπαύομαι)는 ‘누구 곁에서 함께 휴식을 취하다’를 뜻한다. 동사 아나파우오(αναπαύω)는 기쁨과 위로의 열매인 내면의 고요함과 평화를 뜻한다. 바오로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오는 어떤 종류의 휴식을 찾고 있다(1,12 참조).

 

“내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기쁜 마음으로”는 바오로가 하느님의 뜻이라면 로마에 오기를 바란다는 갈망을 표현한 1,10을 상기시킨다. ‘하느님의 뜻’은 그의 부르심(2코린 1,1; 참조 콜로 1,1; 에페 1,1; 2티모 1,1 참조)이든지, 그 후 계속된 사도직(1,10; 15,32 참조)이든지 바오로의 삶을 조각하는 핵심 용어다. 바오로의 기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갈망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일어나는 긴장에 주목해야 한다. 로마서에서 바오로가 하느님께 바친 모든 기도는 그가 바라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영적 열매를 나누어 주고 신앙 안에서 함께 힘을 얻기 위해 로마에 가기를 기도하지만(1,9-10 참조), 죄수로서 쇠사슬에 감겨 죽기 위해 로마에 가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거부하는 동족 유다인들의 구원을 위해 자기 목숨을 걸고 기도하지만(9,3; 10,1 참조), 죽는 순간까지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기도해 온 동족 유다인들의 고발로 죽게 된다. 예루살렘 공동체가 자신에게 맡겨진 이방인 선교의 ‘열매’인 모금을 잘 받아 주기를 청하였으나(15,30-33 참조) 이루어지지 않았다.

 

선교를 위한 바오로의 싸움, 복음을 통해 교회를 일치시키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는 바오로의 사도직에 참여하라는 호소는 하느님의 평화를 비는 축복으로 마무리된다. “평화의 하느님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16,20에 나오는 “평화의 하느님”(2코린 13,11; 필리 4,9; 1테살 5,23 참조)이라는 표현은 평화가 하느님에게서 오는 선물임을 상기시킨다(레위 26,6; 민수 6,26; 이사 26,12; 예레 16,5 참조). 이 평화에는 모든 이에게 제공되는 구원이 포함된다.

 

바오로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

 

15,30-33은 로마서에서 처음으로 바오로가 자신을 위한 기도를 요청하는 구절이다. 바오로는 자기와 개인적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뿐 아니라 자기와 직접 관계가 없는 로마 공동체도 기도를 통해 자신의 사도직에 함께 참여하기를 기대한다. 그는 로마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지만 신자들도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잘 알고 있고 로마인들도 그것을 알기를 바란다.

 

바오로의 기도 요청에는 일반적인 선교 활동뿐 아니라 사도직 상황에서 비롯된 자신의 근심과 두려움, 특별히 필요한 것까지 포함된다. 15,30-33에서 바오로는 솔직하게 그리스도인의 체험에 호소하며 우리에게 기도에 대해 이렇게 가르친다. “당신이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면, 당신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성령의 사랑을 체험한다면, 자매와 형제를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그 사랑을 보여 주십시오!”

 

[성서와 함께, 2013년 9월호(통권 450호)]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22)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영광을!

임숙희 레지나

 

 

“하느님은 내가 전하는 복음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로, 또 오랜 세월 감추어 두셨던 신비의 계시로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이제는 모습을 드러낸 이 신비가 모든 민족들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끌도록, 영원하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예언자들의 글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로마 16,25-27).

 

문맥 보기

 

바오로는 로마서를 영광송으로 마무리한다 16,25-27에서 바오로는 그에게 맡겨진 복음의 신비에 따라, 공동체에게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해’ 그의 사도직의 기원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바친다. 이 영광송은 독자들이 구원에 관한 하느님의 계획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을 기억하게 하고, 믿는 이들 편에서 구체적 응답을 불러일으킨다.

 

힘을 북돋아 주실 능력이 있는 분

 

그리스어 본문에서 이 영광송은 ‘능력이 있는 분’(25절)으로 시작된다. 바오로의 찬미를 받으시는 분의 정확한 정체는 16,27에 가서야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으로 밝혀진다. ‘하느님의 힘’이라는 주제는 바오로가 선호하는 개념으로, 로마서 앞부분에도 자주 나온다(1,16.20; 4,21; 9,17.22; 11,23; 14,4 참조). ‘힘, 능력(뒤나미스, δύναμις)’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과 은총으로 인간의 역사를 이끄시는 본성을 가리킨다. ‘능력이 있는 분’으로서 하느님의 본성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과 관련지어 사용하는 동사 ‘힘을 북돋다(스테리조, στηρίζω)’에서 드러난다. 이 동사는 ‘힘을 주다, 뒤에서 받쳐주다’를 뜻하는데 쿰란 문서에서도 이런 용도로 사용된다. “나의 하느님,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당신 힘으로 저를 뒤에서 받쳐 주셨기 때문입니다”(1QH 7,6).

 

바오로 서간에서 이 동사가 사용될 때는(로마 1,11; 16,25; 1테살 3,2.13; 2테살 2,17; 3,3 참조) ‘공동체에 힘을 주는 것’을 뜻한다. 바오로는 첫 편지인 테살로니카 1서에서 시작하여 그가 하는 사도직의 궁극 목표를 ‘공동체 신자들의 신앙을 단단하게 하고 힘을 주는 것’, ‘확고한 신앙을 갖도록 강하게 만드는 것’,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확신을 갖게 하는 것’으로 삼는다.

 

로마서에서 두 차례(1,11; 16,25 참조) 사용되는 이 동사는 문맥에 따라 뜻이 약간 다르다. 1,11에서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강하게 할 수 있는 어떤 ‘영적 선물’을 전달하기 위하여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보기를 원한다. 그러나 16,25에서는 ‘건전한 교리와 확고한 믿음 안에서 강해지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두 구절 모두 힘의 기원은 오직 하느님이며, 하느님만이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다고 말하는 점에서 비슷하다. ‘내가 전하는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 ‘오랜 세월 감추어 두신 신비의 계시’는 모두 동사 ‘스테리조’와 연결된다.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힘을 북돋기 위한 것이며, 그분께서는 그럴 능력을 갖고 계신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복음에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을 실행할 능력이 있다.

 

그러고 나서 바오로는 ‘신비(미스테리온, μυστήριον)’로 옮아 간다. 이 ‘신비’의 내용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없다. 그러나 바오로 서간에서 ‘신비’가 나오는 구절의 용도를 종합하여 살펴보면, 바오로의 관점에서 ‘신비’는 하느님 계획에 감춰진 미래의 어떤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지는 하느님의 결정적 행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1코린 2,1.7; 로마 16,25; 콜로 1,26.27; 2,2; 4,3; 에페 1,9; 3,3.4.9; 5,32; 6,19 참조). “바오로가 생각하는 신비의 종합적 차원은 성경의 하느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보여 준다”(R. 펜나).

 

이 신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전달하는 목소리가 필요하다. 바오로는 자신의 사도 직분을 ‘그리스도의 봉사자이자 하느님 신비의 관리인’으로 요약한다. 바오로는 거룩한 신비를 체험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자 책임 있는 중재자다.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계시한 다마스쿠스 체험에서 이 ‘신비’에 대한 지식을 얻었을 것이다(갈라 1,16 참조). 그 후에도 선교 활동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성찰, 그리고 ‘신비의 계시의 중재자’인 성령이 주시는 선물 덕분에 바오로의 생애에서 이 신비에 대한 지식은 계속 성숙하고 발전했을 것이다. 이 신비는 오랫동안 하느님에 의해 드러나지 않았다. 신적 수동태로 표현된 ‘감추어 두셨다(세시게메누, σεσιγημένου)’는 오직 하느님이 당신의 신비에 대해 침묵하고 계시할 책임이 있는 분이시라고 말해 준다. 하느님의 침묵은 말의 부재가 아니라 충만함과 집중으로서 창조 이전의 위대한 침묵과 유사하다. 복음은 신비, 곧 신비의 계시다. 복음은 ‘하느님 힘’의 계시이기도 한데, 그것을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본성을 이해한다.

 

예언자들의 글

 

‘예언자들의 글’(26절)은 신비의 계시에 도달할 수 있는 도구로, 영원한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신앙의 순종을 위해 모든 이방인에게 선포되는 도구다. 바오로가 지금 기록하는 로마서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이 구절은 하느님께서 바오로에게 맡기신 사명을 암시한다. 바오로는 사도로서 하느님께서 오랫동안 침묵하신 ‘신비’를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의무를 갖고 있는데, 지금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그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 이 ‘신비’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 구절에서 복음이 선포되는 두 가지 차원, 곧 하느님의 ‘점진적’ 뜻과 그 뜻이 육화하는 장소인 ‘사도의 임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느님의 뜻’만 있다면 인간의 역사에서 복음은 풍요로운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인간은 그분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 하느님의 뜻 없이 ‘사도’가 존재할 수 없다. 신비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바오로의 과제는 25절의 ‘힘을 북돋우다’처럼 26절에서도 ‘믿음의 순종’이라는 표현으로 강조된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 구원의 역사에 당신의 뜻을 육화하기 위한 계획,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25절 참조)를 실현하고 계신다.

 

바오로의 파견은 민족들 사이에 ‘믿음의 순종’을 낳기 위한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의 종말론적 실현이다. ‘믿음의 순종’은 바오로의 복음 선포에 대한 믿는 이들의 온전한 응답을 표현한다. 믿음의 순종으로 하느님께서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하신다. 하느님의 신비는 ‘오랜 세월’ 감추어져 있었으나 영원한 하느님의 뜻에 의해, 그리고 바오로가 행한 사도 직분이라는 중재에 의해 ‘이제는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고’ 이방 민족들에게 알려졌다.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27절에서 바오로는 25절에 나오는 찬미의 어조를 다시 취한다. 이제 ‘능력이 있는 분’은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으로 밝혀지고, 그분께 영광이 귀속된다. 로마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영광송의 핵심은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을 강하게 하시는 분께 바치는 기도에 들어 있다. ‘지혜로우신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11,33을 떠올려 준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유다인과 이방인 모두의 하느님이시다(3,29-30 참조).

 

그분은 인간이 당신의 길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인간을 인도하신다. 하느님은 ‘지혜로운’이라는 속성을 지닐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11,36의 영광송은 ‘모든 이스라엘’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 때문에 하느님을 찬미한다. 16,25-27의 영광송은 이방인들의 구원 때문에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11,36을 보완한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주제는 로마서에 자주 나오는데(1,23; 2,7.10; 3,7.23; 5,2; 6,4; 9,23; 11,36; 15,7 참조) 16,27에서는 앞과 달리 전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오로는 로마서를 마치면서 ‘하느님 신비의 관리인’으로 자신을 내세우고, 그것을 수행할 힘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바친다. 지혜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갈 때 영광을 받으신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0월호(통권 451호)]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23) 바오로의 기도 여정

임숙희 레지나

 

 

우리가 걸어온 여정

 

2년간 연재한 글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를 마무리할 때다. 이 글은 바오로를 왜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로마서가 바오로의 기도에 대한 연구 자료가 될 수 있는지에서 시작하였다. 문맥을 고려하며 로마서에서 관련된 여러 기도 구절을 주석하는 과정에서 필자가 초점을 둔 것은 ‘바오로에게서 어떤 기도 모델을 발견할 수 있는가’였다.

 

바오로는 신학자와 선교사이기 전에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기도 생활은 내면 생활의 한 면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복음을 전하는 외적 사도직과 병행하는 내적 사도직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의 사도직’이라는 표현은 바오로에게 정말 어울리는 말이다.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개인적 · 사회적 상황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러므로 바오로의 기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오로의 기도 개념, 그가 물려받은 기도 전통과 새롭게 바뀐 것이 무엇인지 관찰해야 한다.

 

바오로의 기도

 

여러 저자가 기도라는 용어를 각각 다르게 정의한다. 가장 일반화한 정의는 ‘하느님께 말하는 것’, ‘하느님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다. 기도에 대해 사용하는 다양한 용어는 하느님께 한 말의 특징에 따라 감사, 다른 이를 위한 중재, 찬미 등으로 분류된다. 바오로의 기도를 생각할 때 기도는 단순히 정해진 기도문을 ‘구송한다’는 개념을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도가 ‘하느님께 하는 말’이라는 정의는 기도의 대상인 하느님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교 기도의 중심이자 토대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을 토대로 한 기도의 내적 구조에는 세 가지 특징, 곧 인격적이며 살아 계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 그런 하느님과 인간의 구체적 대화(F. 풀러)가 담겨 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린다. 아버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고 ‘우리를 위한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다. 우리는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주님의 기도’를 바칠 수 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우리를 위해 계속 기도해 주시고, 기도할 줄 모르는 우리를 도와 하느님의 뜻에 맞게 기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뿐 아니라 그분에 대한 지식에 토대를 둔다. 우리의 기도는 항상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향한다. 기도에 대한 이런 정의는 바오로의 기도 구절에서 그의 영성의 영적 배경으로 암시적이거나 명시적으로 표현된다.

 

바오로는 우리에게 기도서를 남겨 주지 않았고, 시편에 나오는 것처럼 기도 유형을 구체적으로 소개하지도 않았다. 그의 서간에서 기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서두 인사, 감사, 청원, 동족의 미래에 대한 근심과 선교 여행에 대한 걱정과 희망, 하느님에 대한 찬미 등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 활동에 대한 인식’에서 나온 언어로 전달된다. 바오로는 자신이 기도한다는 표시로 신자들을 위해 바치는 간접적 기원 기도, 규칙적으로 바치는 감사 기도, 중재 기도, 서간에 자주 등장하는 하느님에 대한 찬미와 하느님의 강복을 구하는 기도를 보여 주었다.

 

유다교의 기도

 

바오로의 기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를 중시한 유다교 전통으로 돌아가야 한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이 된 뒤 기도를 배운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마스쿠스에서 회심하기 전에 이미 전통에 충실한 유다인으로서 진지하게 기도한 사람이었다. 유다인에게 셰마(Shema: 신명 6,4-9; 11,13-21; 민수 15,37-41 참조)는 가장 근본이 되는 기도이다. 신앙 고백인 셰마는 대개 기도로 소개된다. 유다인에게 중요한 기도는 ‘축복 기도문 18조(셰모네 에스레, Shemone Esre)’이다. 100년경 라삐 가말리엘 2세가 최종 편집한 이 기도문은 탈무드에서 단순히 기도, 곧 ‘터필라(Tefillah)’라고 불린다. 유다교 회당에서는 이 기도문을 매일 바친다. 바오로 시대에 회당과 연결된 기도 전통이 이미 확립되었는데, 바오로의 기도 구절은 그가 이 기도문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유다인의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자세는 자발성이다. 히브리 현자들이 기도에 대해 내린 가장 적절한 정의는 ‘마음의 봉사’다. 그들은 기도를 하느님 앞에 선 사람이 지닌 마음의 ‘자발적 표현’으로 이해했다. 의무가 아니라 하고 싶어 하는 것, 또는 그것을 하도록 마음이 저절로 움직여지는 것이다. 나아가 유다교 배경은 바오로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에 응답하는 데 두 가지 이해를 제공했다. 하나는 하느님의 창조, 계시와 구속(셰마 안에서처럼)을 확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배, 탄원, 감사로써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셰모네 에스레 안에서처럼)이었다.

 

유다교 기도의 이 모든 요소가 로마서의 기도 구절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바오로는 이스라엘의 전통에 따라 유다인으로서 기도했다. 예를 들어 성전 예배, 희생 제사, 자선, 종교 관습의 준수 등 유다인으로서 기도하며 살았다. 또 그는 유다교에서 기도하는 공동체의 전통뿐 아니라 기도는 내적인 것,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이 모든 기도 체험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다마스쿠스에서 만나 그리스도와 계속 관계를 맺으면서 새로워진 기도를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 되었다.

 

다마스쿠스 체험

 

유다인 바오로는 다마스쿠스 체험으로 새로운 방식에 따라 기도하게 된다. 이는 그의 새로운 영적 체험과 일치한다. 사도행전 본문(사도 9,1-19; 22,3-16; 26,12-18 참조)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바오로의 만남이 어떤 방식으로 그의 기도 생활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찾기 힘들다. 그러나 바오로 서간의 본문(필리 3,7-15; 1코린 9,1; 13,8-10; 2코린 4,6; 갈라 1,15-16 참조)은 기도 생활에 대해 바오로가 긴 성숙과 변화의 여정을 거쳤다는 점을 짐작하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다마스쿠스 체험이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옮아가는 개종이 아니라 회개라는 것이다.

 

바오로는 다마스쿠스 체험을 한 후에도 유다인이자 이스라엘인으로 남았다. 바오로의 기도는 유다 전통과 이어져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의 빛에 따라 변형되고 심화된다. 바오로가 사용하는 다양한 기도 용어는 그가 거친 신앙의 해석 과정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잊을 수 없는 다마스쿠스 체험에 토대를 두는데, 이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오로가 바치는 기도의 뿌리가 된다. 유다 세계의 기도 구조는 바오로가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로 변형되었다.

 

그리스도 신앙의 내면화

 

바오로의 기도는 그의 영적 진보를 보여 준다. 바오로는 자신의 기도 체험을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치는데, 그 기도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하신 인류 구원에 대한 ‘감사’다. 바오로의 기도 생활이 주님의 활동에 대한 의식을 내면화하기 위한 여정이라는 점을 이해하면, 기도는 인간의 계획을 넘어서는 ‘신비로운 들음’이 된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이 된다. 바오로에게 기도는 기도 정식을 되풀이하거나 예식을 거행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일관되고 영속된 자세’로 하느님 앞에 머무르는 것이다. 바오로는 하느님 앞에 머무르면서 ‘기억’을 통해 사람들과의 생생한 관계, 하느님과 하느님의 은총을 중재하는 자신과 신자들의 삼각관계 안으로 들어간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1월호(통권 452호)]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마지막 회) 기도하는 사도 바오로

임숙희 레지나

 

 

첫 회에서 필자는 ‘바오로는 기도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글을 시작했다. 마지막 회는 ‘로마서를 읽은 후에 바오로는 어떤 면에서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마무리하려 한다. 이 글의 목적은 로마서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바오로의 영성, 곧 바오로라는 한 신앙인이 실천한 신앙(lived faith)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다. 참된 성경 해석은 문자적 의미에서 출발하여 영적 의미를 탐구하는 데로 나아간다. 로마서에서 바오로는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의 본보기가 된다.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를 ‘감사’로 시작하며(1,8 참조) 중요한 맥락에서 마음에서 절로 솟아나는 감사 기도를 터뜨린다(6,17; 7,25 참조).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라는 선물을 받았기에 무엇보다 먼저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에 대한 응답으로 ‘감사’를 강조한 점에서, 타종교와 다른 그리스도교 기도의 독창성을 보여 준다. ‘감사’는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나의 신앙고백이다. 감사 행위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모든 선의 근원이심을 알고, 이 신앙의 진리를 마음과 입으로 고백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는 기도의 첫말이 아니라 항상 둘째 말이다. 하느님의 창조와 구속, 자연과 역사에서 하느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응답이 그분에 대한 찬미인 까닭이다. 따라서 바오로의 감사는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삶에서 일하고 계심을 알아보고 그분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로마서에서 감사는 바오로가 자신의 삶과 믿는 이들의 삶에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알아보고, 그런 일을 하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흠숭과 그 비슷한 말로 기록된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참된 기도를 바칠 수 있다. 중재 기도의 배경은 형제애인데, 이 사랑은 하느님의 은총에서 비롯된다. 감사는 하느님 앞에서, 아들로서 심오한 실존 안에 새롭게 변형된 그리스도인의 태도다. 이런 의미에서 ‘감사’는 로마서에 나오는 다른 중요한 신학 용어인 ‘은총’, ‘신앙’, ‘의화’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사도

 

로마서에 나오는 기도의 대부분은 바오로가 그리스도 공동체를 위해, 또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동족 이스라엘을 위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다. 이것은 바오로의 마음 안에서 중재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자신의 사도직에서 얼마나 필요한지를 바오로가 잘 알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충실한 유다인이던 바오로는 이런 자세를 구약성경과 유다인의 전통이라는 유산에서 물려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가장 위대한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모범을 발견했을 것이다.

 

바오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에게서 ‘하느님께 순종하는 아들’을 본다. ‘순종’이라는 말은 바오로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포괄할 수 있는 용어다. 그는 다마스쿠스 체험에 토대를 두고 자신의 ‘십자가 신학’을 발전시켰다.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종과 그분의 의로움에 대한 지식은 바오로가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한 데서 나온 열매다. 이런 관점에서 바오로는 자신의 삶과 다른 이를 위해 바치는 기도에서 ‘하느님의 뜻’을 강조한다.

 

‘인간의 청원과 하느님의 뜻 사이의 관계’라는 질문은 바오로가 로마서에서 바치는 모든 청원 기도에서 암시된다. 바오로는 기도를 통해 현재 처한 모든 문제나 기원을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내려놓는다. 이는 구약에 언급되는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와 다르다. 하느님의 뜻에 대한 온전한 순종은 바오로의 기도가 종말에 대한 비전을 포함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바오로의 중재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 주셨듯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삶을 영위하면서 하느님을 위해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바오로는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거의 하지 않는다. 로마서에서도 단 한 번,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예루살렘 여행을 앞두고 로마 신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한다. 그러나 그런 기도 부탁도 로마 신자들 역시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로서 그의 사도직에 동참함으로써 교회의 사도직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는 기회가 된다.

 

하느님께 영광을 바치는 사도

 

로마서는 바오로가 하느님께 바치는 영광송(16,25-27 참조)으로 끝난다. 바오로가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이방계 그리스도인과 유다계 그리스도인이 한목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기 위해서다(15,3-7 참조). 일치된 교회로 지상에 하느님의 영광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교회 밖의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하느님을 찬미하게 된다.

 

기도의 궁극적 목적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우리 삶에 개입하시어 부어 주신 은총을 자각하는 감사 기도에서 시작한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은총이 흘러들어가기를 기원하는 중재 기도로 이어진다. 그리고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하느님의 신비’ 앞에 기도하는 사람을 데려와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바치게 한다.

 

그러므로 감사, 중재, 찬미라는 기도의 세 가지 유형에는 상호관계가 존재한다. 바오로 기도의 중심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관상,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관상이 자리 잡고 있다. 바오로 사도직의 목적은 이러한 하느님의 신비를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 목적 때문에 그의 사도직은 하느님께 계속 영광을 드리는 것이며, 바오로의 신학은 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바치는 영광송이 된다.

 

바오로의 기도, 신학과 영성을 연결하는 다리

 

바오로는 사도직을 시작할 때부터 기도에 대한 조직신학을 만들지는 않았다. 기도에 대한 신학은 다마스쿠스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한 뒤 오랫동안 사도로 살면서 발전되었다. 가장 깊은 바오로의 신학을 담고 있는 로마서는 이런 점에서 바오로의 기도에 대해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바오로의 모든 신학이 그렇듯 그의 기도 신학도 그의 체험과 분리될 수 없다. 그의 기도 신학은 하느님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바오로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관상하면서 하느님 앞에 머무르는 것’이 기도라고 가르친다. 기도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 청하는 가난한 개념에 국한되지 않는다. 단지 인간적인 것에만 의지해서 만들어진 기도 개념은 하느님의 권능과 선함을 관상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바오로의 모든 신학은 그의 기도 안에서 발견된다. 그의 신학은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는 신앙, 관상된 신앙이다. 바오로는 우리에게 전능하신 하느님, 계약의 하느님을 소개하면서 우리에게 우리의 진정한 신학을 소개한다. 우리의 신학이란 단 한 줄 ‘하느님께 영광을’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이 신학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우선권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A. 함만).

 

그런 점에서 바오로의 기도에 대한 연구는 바오로의 신학과 영성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는다. 기도는 그 자체가 본성상 참된 신학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의 깊게 로마서를 읽으면, 바오로의 기도가 바로 하느님에 관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하느님에 관한 말인 신학(teo-logia)에 집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오로 사도여, 우리가 깊은 신앙을,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희망을, 주님에 대한 불타는 사랑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순결한 양심으로 교회를 섬기는 사도가 되도록, 우리 시대의 어둠 한가운데에서 교회의 아름다움과 진리에 대한 증인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바오로가 갇혔던 로마 레골라 성당의 기도문).

 

[성서와 함께, 2013년 12월호(통권 4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