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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탈출기를 처음 읽는데요 - 성서와 함께 편집부

by 파스칼바이런 2018. 6. 15.
[탈출기를 처음 읽는데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

[탈출기를 처음 읽는데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

 

 

탈출기를 잘 담은 애니메이션으로 [이집트 왕자](1998년)를 꼽을 수 있습니다. 영화는 모세의 출생부터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갈대 바다를 건너 이집트를 탈출하기까지의 과정(탈출 1,1-15,21 참조)을 담았습니다. 영화의 첫 장면에 흘러나오는 노래는 영화의 주제를 확연히 드러냅니다. “어깨를 가르는 모진 채찍질/ 온몸에 맺히는 피와 땀방울/ 하느님, 우리의 신음소리 들으시어/ 고통과 어둠에서 건지소서/ 핍박받는 백성을 굽어 살피소서/ 구하소서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끝 장면에서 모세는 십계명이 새겨진 돌 판을 들고 백성 앞에 나섭니다.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해서 완전히 구원된 것은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탈출기는 우리 신앙에 관한 이야기

 

‘일상 탈출’, 분주하고 복잡한 현실에서 벗어나 삶의 활력을 되찾으려는 시도입니다. 현대인이 꿈꾸는 삶이지요. 그래서 ‘탈출’하면 억압과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와 해방이 연상됩니다. 탈출기도 자유와 해방과 구원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어떤 장소나 구속에서 빠져나오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의 탈출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창세기에서 그 믿음의 여정은 성조들(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탈출기에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드러납니다. 백성의 이야기인 탈출기는 곧 우리 신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탈출 1,1에는 야곱과 함께 이집트로 들어간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손은 늘어만 가서 그들은 번성하고 더욱 강해집니다. 마침내 이집트 땅은 이스라엘 자손들로 가득 찹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하늘의 별들처럼 후손이 많아지리라’(창세 15,5 참조)는 말씀이 실현된 것인데, 이는 오히려 억압과 구속을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그 상황을 만드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왜 이스라엘 백성을 고통과 어둠 속에 갇히게 하셨을까요?

 

파라오의 명령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난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려라’

 

탈출 1,1-2,22에는 여러 죽음이 등장합니다. 이집트 임금은 점점 번성하는 히브리인들이 두려워 특단의 대책을 내놓습니다. 그는 히브리 산파들에게 명령합니다. “너희는 히브리 여자들이 해산하는 것을 도와줄 때, 밑을 보고 아들이거든 죽여 버리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탈출 1,16). 이 대책은 실패로 끝납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산파들이 분부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이집트 임금은 히브리인에 대한 증오를 숨기지 않고 드러냅니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탈출 1,22).

 

파라오가 히브리인 사내아이들을 죽인 반면, 모세는 이집트인을 때려죽입니다. 공주(파라오의 딸)의 양자로 궁궐에서 교육받고 자라온 모세는 어느 날 자기 동포들이 있는 데로 나갑니다. 그곳에서 이집트인 하나가 히브리인을 때리는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고통 받는 동포에 대한 연민과 약자에 대한 정의감을 느낀 그는 그 이집트인을 때려 죽이고 시신을 모래 속에 묻어 감춥니다. 이 일을 전해 들은 파라오는 모세를 죽이려 합니다. 모세는 파라오를 피해 미디안 땅으로 도망칩니다. 파라오의 억압에서 자기 혼자 탈출한 셈입니다.

 

죽음의 세력은 생명의 힘을 꺾을 수 없다

 

이야기가 죽음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난다면 그건 성경의 이야기가 아니지요. 하느님께서는 죽음의 세력에 맞설 생명의 힘을 곳곳에 부어넣어 주십니다. 우선 산파들은 히브리인 사내아이를 죽이라는 파라오의 말에 따르지 않습니다. 그들의 지혜가 죄 없는 아기들의 생명을 살립니다.

 

레위 집안의 남자 ‘아므람’과 레위의 딸 ‘요케벳’에게서 태어난 모세. 요케벳은 아기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기릅니다. 그러나 더 숨길 수 없게 되자 “왕골 상자를 가져다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그 안에 아기를 뉘어 강가 갈대 사이에 놓아”(탈출 2,3)둡니다. 요케벳이 파라오의 명령을 따르려고 아기를 강가에 놓아둔 것일까요? 누구에게든 발견되어 생명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강가에 놓인 아기를 지켜본 사람이 있습니다. 아기의 누이입니다. 그런데 그 누이는 지켜만 보지 않습니다. 파라오의 딸이 아기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기던 순간 그에게 나타나, “제가 가서, 공주님 대신 아기에게 젖을 먹일 히브리인 유모를 하나 불러다 드릴까요?”(탈출 2,7) 하고 제안합니다. 누이가 부른 유모는 바로 모세의 어머니 요케벳이었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파라오의 딸이 히브리인 사내아이를 ‘물에서 건져내고’ 그 누이와 어머니로 하여금 그를 키우게 합니다. 산파들, 요케벳, 모세의 누이, 파라오의 딸 모두 죽음에서 생명을 구한 사람입니다.

 

모세가 이집트인을 때려죽인 일을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보셨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싸우고 있던 히브리인의 입을 통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당신은 이집트인을 죽였듯이 나도 죽일 작정이오?”(탈출 2,14) 그 순간 모세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깨닫습니다. 그 깨달음은 미디안 땅의 어떤 우물가에서 드러납니다. 그는 목자들에게 쫓겨난 미디안 사제의 딸들을 돕습니다. 그가 어떻게 도왔는지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지만, 이집트에서 했던 폭력은 결코 아니었을 것입니다. 개인의 폭력으로는 구원을 가져올 수 없다는 사실을 느꼈겠지요. 우물가에서 모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낯선 땅의 나그네로서 이집트 왕자라는 명예와 권력과 부를 벗어던지고,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을 찾아 작은 탈출을 감행한 것입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도 생명으로 가는 작은 기적

 

“아가야 미안하다/ 이 길만이 네가 살 수 있는 길/ 언젠가 만날 거야/ 주님께서 구해 주시는 날.” 요케벳은 아기를 잡으러 다니는 이집트 병사들을 피해 모세를 품에 안고 강가로 달려갑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반드시 모세를 구해 주시어 언젠가 다시 만나리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가는 기적을 보여 주고 있습니까? 그 기적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도 생명으로 가는 작은 기적입니다. 삶의 이곳저곳에서 작은 기적이 일어나는 한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월호(통권 442호), 편집부]

 

 


 

 

[탈출기를 처음 읽는데요] 이제 가거라

 

 

여든 살의 양치기가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어떤 산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아주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덤불로 된 키 작은 나무(떨기나무)가 불에 타는데도 타서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가 나무에 가까이 다가가자 누군가 그를 부릅니다. “모세야, 모세야!”(탈출 3,4) 그는 두리번거리며 자기를 부르는 누군가를 찾지 않고, “예, 여기 있습니다”(탈출 3,4) 하고 대답합니다. 누군가가 말합니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탈출 3,6). 그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때와 장소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미천한 양치기를 부르시는 하느님

 

탈출 2장에서 모세는 아직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레위 집안에서 태어난 히브리인이지만 어린 시절 이집트의 왕자로서 이집트인의 모든 지혜를 배웠습니다. 어른이 되어 히브리인이 억압받는 모습을 보고 이집트인을 때려죽인 뒤, 파라오를 피해 낯선 땅으로 도망쳐 사제의 딸과 혼인하였습니다. 그 뒤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는 미천한 양치기로 평범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처음 만난 그날도 장인의 양 떼를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고 하느님을 뵙게 됩니다. 그분이 모세를 부르신 까닭은 한 가지입니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탈출 3,10).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깁니다. 그분은 왜 왕자가 아닌 양치기에게 당신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게 하셨을까요?

 

고통받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당장 구해주시지 않는 분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며 부르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듣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하지만 고통받는 당신의 백성을 당장 구해 주지 않으십니다. 파라오 앞에 ‘짠’ 하고 나타나 당신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한순간에 옮겨 놓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아마 때를 기다리신 것이 아닐까요? 태어날 때부터 눈여겨보았던 한 사람이 당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지기를 오랫동안 지켜보신 듯합니다. 이때다 싶을 때 그분은 떨기 한가운데에서 불꽃으로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모세가 왕자였을 때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더 쉽게 실행되지 않았을까? 일리 있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뭔가를 변화시키고 쇄신하고 개혁하고 싶을 때 그 일을 할 만한 힘(권력)과 자리를 먼저 떠올립니다. 국회의원이 되고 시장이 되고 대통령이 되어야 불의를 내치고 정의를 세울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른바 지도층이 될 수 없다면, 지도층과 친해지기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킬 가장 쉬운 방법은, 하느님께서 왕자 모세에게 나타나 파라오로 하여금 마음을 돌려 히브리인들을 억압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느님다운 방법일까요? 또 왕자인 모세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 그 계획을 실행할까요?

 

모세의 다섯 차례 거절과 하느님의 대응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께서 모세를 불러 당신의 사람으로 세우십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탈출 3,11)라는 모세의 말에,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그분은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고 대답하십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를 믿지 않고 자기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주님께서 자기에게 나타나셨을 리가 없다고 하면 어찌하느냐고 묻자, 그분은 지팡이가 뱀이 되고 나병에 걸린 손이 제 살로 돌아오는 능력을 주십니다. 급기야 모세는 자신이 말솜씨가 없는 사람, 입도 무디고 혀도 무딘 사람이라고 핑계를 댑니다. 그분은 “누가 사람에게 입을 주었느냐? 누가 사람을 말 못하게 하고 귀먹게 하며, 보게도 하고 눈멀게도 하느냐? 나 주님이 아니냐? 그러니 이제 가거라. 네가 말할 때 내가 너를 도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겠다”(탈출 4,11-12)고 일갈하십니다. 그러나 모세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주님께서 보내실 만한 이를 보내십시오”(탈출 4,13). 모세의 마지막 일격에 그분은 결정타를 날리십니다. “너의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나는 그가 말을 잘하는 줄 안다. … 네가 말할 때나 그가 말할 때, 내가 너희를 도와주겠다. 너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겠다”(탈출 4,14-15). 모세와 하느님의 대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모세를 통해 당신 백성을 구해 주시겠다는 그분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마침내 떨기나무 한가운데에서 솟아오르는 불꽃이 모세에게 전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를 선택하신 분

 

신명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다. 사실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수가 가장 적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어,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끌어 내셔서, 종살이하던 집,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너희를 구해 내셨다”(신명 7,7-8).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에게 마음을 주고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자유와 생명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그분은 현존하며 우리를 돌봐 주십니다. 참으로 놀랍고 감격스러운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나아가는 ‘뜻밖의 여정’

 

최근 개봉한 영화 [호빗-뜻밖의 여정]에서 마법사 간달프는 중간계의 평화를 지킬 원정대의 일원으로 호빗인 빌보 배긴스를 선택합니다. 요정 갈라드리엘이 간달프에게 왜 호빗을 선택했느냐고 묻자 간달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루만은 강력한 힘만이 악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요. 난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 악을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선행이나 사랑 같은….” 모세가 ‘뜻밖의 여정’을 시작하게 된 것은 그가 양치기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소소한 일상을 사는 우리를 당신의 구원 계획으로 부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나아가는 뜻밖의 여정에 함께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성서와 함께, 2013년 2월호(통권 443호), 편집부]

 

 


 

 

[탈출기를 처음 읽는데요] 나는 주님이다

 

 

1970년대 디스코 그룹 보니 엠(Boney M)의 노래 가운데 귀에 익은 노래가 있습니다. 제목은 ‘리버스 오브 바빌론(Rivers of Babylon, 1978년).’ 노래가 한창 유행하던 때에 그 첫 부분을 개사하여 재밌게 부르곤 했습니다. “다들 이불 개고 밥 먹어. 너는 왜 이불 안 개고 밥 안 먹니.” 일명 ‘다이밥송’이라 불리는 이 노랫말의 원문은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ye-eah we wept, when we remembered Zion”입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바빌론의 강가에 우리는 앉아 있었어요/ 그래요, 우리는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어요”입니다. 여기에서 낯익은 단어 두 개가 눈에 띕니다. ‘바빌론’과 ‘시온’입니다.

 

바빌론 강기슭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디스코 풍의 이 노래는 3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댄스 음악이나 응원가로 쓰입니다. 그러나 노랫말을 음미하면 흥겨운 노래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노랫말은 시편에서 따왔습니다.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거기 버드나무에 우리 비파를 걸었네.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우리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하는구나. ‘자, 시온의 노래를 한가락 우리에게 불러 보아라.’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시편 137,1-4) 어떻습니까? 제 나라가 멸망하여 낯선 땅에 포로로 끌려온 이들의 설움과 한탄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반드시 해방시켜 주시리라 굳게 믿으며 탈출기를 썼습니다. 바빌론 강 기슭에서 고향을 생각하며 울던 이들은, 이집트 파라오의 압제 아래에서 고통 받고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모를뿐더러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도 않겠다는 파라오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에게 가서 말합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을 내보내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위하여 축제를 지내게 하여라”(탈출 5,1).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파라오는 콧방귀를 뀝니다. “나는 그 주님을 알지도 못할뿐더러, 이스라엘을 내보내지도 않겠다”(탈출 5,2). 익히 예상한 반응입니다. 파라오의 나라는 우리나라처럼 작은 나라도 아니고 당시 근동 지역을 지배하던 막강한 제국이었습니다. 제국을 유지하려면 튼튼한 경제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는 경제의 근간인 노동력을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착취했으므로 그들을 내보낸다는 것은 제국의 안정을 위협하는 잘못된 선택입니다. 당연히 거절해야 합니다.

 

그런데 파라오는 단순히 거절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종의 ‘괘씸죄’를 적용합니다. 작업 감독들과 조장들을 불러 벽돌을 만드는 데 쓰는 짚을 대 주지 말라고 명령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더 힘들게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느님을 위한 제사를 지낸다느니, 이집트를 떠나겠다느니 하는 딴 생각을 품지 않고, 모세와 아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의 교활한 계략은 성공합니다. 노동 강도가 세지자 이스라엘인 조장들이 파라오에게 가서 부르짖습니다. “어찌하여 임금님의 종들에게 이렇게 하십니까?”(탈출 5,15) 파라오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너희는 게으르기 짝이 없는 자들이다”(탈출 5,17)고 일갈합니다. 파라오에게서 물러 나온 조장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악담을 퍼붓습니다. “당신들은 파라오와 그 신하들이 우리를 역겨워하게 만들어, 우리를 죽이도록 그들 손에 칼을 쥐어 주었소”(탈출 5,21). 결국 모세는 안팎으로 휘둘리는 상황을 맞습니다. 그는 하느님께 하소연합니다. “주님, 어찌하여 이 백성을 괴롭히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보내셨습니까?”(탈출 5,22)

 

파라오는 누구일까요? 그는 모세와 아론, 이스라엘인 조장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 줍니다. 언로(言路)를 막지 않았다는 점에서 민주적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리하고 명석하고 유능하고, 요컨대 꽤 매력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특권과 지위, 사회적 역할에 묶인 사람입니다. 그의 모습에는 인간의 생명과 자유를 규제하는 형식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그가 착취한 이스라엘인 조장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죄의 속박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삶보다 현실에 안주하는 삶이 낫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라지도 않은 말을 내뱉는 모세와 아론을 ‘눈엣가시’로 여깁니다. 노예근성이 깊이 박힌 그들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나는 야훼다 나는 주님이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야훼다”(탈출 6,2). “나는 주님이다. 나는 이집트의 강제 노동에서 너희를 빼내고, 그 종살이에서 너희를 구해 내겠다”(탈출 6,6). “나는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너희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탈출 6,7).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기로 손을 들어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데리고 가서, 그 땅을 너희 차지로 주겠다. 나는 주님이다”(탈출 6,8). 그분은 “나는 주님(야훼)이다”고 세 번이나 거듭 말씀하시며 당신을 굳게 믿으라고 당부하십니다. 이는 고집불통 파라오와 아둔한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고통과 시련을 겪는 모든 이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모세와 아론만이 그분 말씀의 뜻을 깊이 헤아려 실천합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다”(탈출 7,6).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나의 모습은?

 

최근 노동자들의 잇따른 자살 소식이 우리 마음을 짓누릅니다. 경영 악화로 해고되어 생계가 꽉 막힌 상황, 노동쟁의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며 사측이 신청한 막대한 금액의 손배가압류,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대우가 힘없는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어떠합니까? 자기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3월의 마지막 날에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맞습니다. 부활을 맞는 나의 모습이 파라오인지, 이스라엘 백성인지, 아니면 모세인지 하느님 앞에서 잘 들여다봐야 할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3월호(통권 444호), 편집부]

 

 


 

 

[탈출기를 처음 읽는데요] 나 주님이 이 땅에 있음을

 

 

성경에 ‘재앙’이란 말이 맨 처음 나오는 구절은 어디일까요? 성경의 시작이 창세기니까 창세기의 홍수 이야기(창세 7,6-8,14 참조)에 나올 법하겠죠. 그런데 아닙니다. 홍수 이야기에서는 홍수가 났다고 하지 재앙이 일어났다고 하지 않습니다. ‘재앙’은 창세 12,17에 처음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아내 사라이의 일로 파라오와 그 집안에 여러 가지 큰 재앙을 내리셨다.” 아브람이 나그네살이하려고 이집트에 들어갔을 때, 파라오는 아름다운 사라이를 보고 아브람에게 잘해 줍니다. 아브람은 사라이를 자신의 누이라고 속이는데, 이 일로 파라오에게 재앙이 닥칩니다. 재앙을 겪은 파라오는 아브람과 사라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떠나보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절대 권력자 파라오와 다른 모습이네요.

 

창세기의 파라오 탈출기의 파라오

 

언뜻 보기에 창세 12,10-20(‘이집트로 간 아브람’)과 탈출 6,28-11,10의 이야기는 비슷해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파라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는 내용이 같으니까요. 그러나 재앙을 겪는 파라오의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창세기의 파라오는 아브람을 순순히(어찌보면 제발 떠나 달라고 애원하듯) 떠나보내지만, 탈출기의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절대 내보내지 않습니다. 재앙에 대처하는 이 상반된 태도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선 하느님께서 탈출기의 파라오에게 왜 재앙을 내리시는지 그 이유가 쓰인 구절을 찾아봅시다. “내가 이집트 위로 내 손을 뻗어 그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어 내면, 이집트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탈출 7,5). 재앙은 하느님과 파라오의 대립을 극적으로 보여 주기 위한 장치인데, 그 근본 목적은 파라오의 패배가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 것입니다. 곧 ‘이집트의 참된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해 답을 구하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파라오는 아홉째 재앙까지 겪으면서 그 답을 구할까요?

 

재앙의 순서: 물이 피가 됨, 개구리 소동, 모기 소동, 등에 소동, 가축병, 종기, 우박, 메뚜기 소동, 어둠

 

재앙의 순서는 이렇습니다. 물이 피가 되다, 개구리 떼가 이집트 땅을 뒤덮다, 이집트 땅의 먼지가 모기로 변해 사람과 짐승에게 달려들다, 등에 떼가 땅을 폐허로 만들다, 흑사병으로 이집트의 집짐승이 모두 죽다, 이집트 사람과 짐승에게 종기가 생기다, 우박이 쏟아져 사람과 짐승이 우박에 맞아 죽다, 메뚜기 떼가 온 땅을 덮어 들의 모든 것을 먹어 치우다, 짙은 어둠이 사흘 동안 이집트 땅을 덮다. 재앙의 강도는 점점 세집니다. 넷째 재앙까지는 그야말로 소동에 불과하지만, 다섯째 재앙부터 사람과 짐승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아홉째 재앙이 ‘어둠’이라 시시하게 보이지만, 그것은 이집트의 맏아들과 맏배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재앙의 전조입니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재앙을 겪는 파라오의 태도는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요술사들에게 재앙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게 하여 재앙에 대항하고, 재앙이 좀 심각하다 싶으면 하느님을 위한 제사를 지내게 하겠다고 거짓말하며 꼼수를 부립니다. 게다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모세에게 부탁까지 합니다. 그러나 재앙이 끝나면 파라오는 마음이 완고(완강)해져 그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탈출 7,13; 7,22; 8,11; 8,15 참조). 백성을 내보내지 않습니다(탈출 8,28; 9,7 참조). 파라오 이 사람, 어찌 그리 고집불통인가요?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는 뜻은?

 

성경은 파라오의 마음이 ‘완고하다’, ‘완강하다’고 표현합니다. 사전은 ‘완고하다’를 ‘융통성이 없어 올곧고 고집이 세다’고 풀이합니다. 이 뜻을 파라오에게 적용하자니 뭔가 꺼림칙합니다. ‘올곧다’는 말 때문입니다. 파라오는 진정 올곧은 사람이었을까요? 글쎄요. 재앙으로 백성이 죽든 살든 상관없이 자기 권력만 유지하려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아닌가요?

 

한편 어떤 이는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탈출 7,3; 9,12; 10,20; 10,27; 11,10 참조)며 의구심을 갖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내 백성을 내보내지 않게 하겠다”(탈출 4,21). 이 말씀에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한 주체는 분명히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파라오를 완고하게 하신 분은 하느님인데, 파라오가 백성을 내보내지 않는다고 재앙을 내리신 분도 하느님인가? 하느님께서 원인을 제공하고 심판까지 하시니, 하느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하시나?’

 

정말 그런 걸까요?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완고해지는 파라오의 마음을 막지 않고 그대로 두셨다는 뜻입니다. 지난 호에서도 말했듯,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파라오를 해치우고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순간 이동시키시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앙은 인간의 자유 의지가 어떤 방향으로 향할지 선택게 하는 중대한 계기입니다. 파라오는 재앙을 겪고도 자신만 옳다고 믿었기에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매’인 재앙에서 그분의 현존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재앙이 회개와 구원의 선물이 될 수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완고함을 풀려면

 

마음이 완고한 파라오에게서 ‘소신’과 ‘고집’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미국의 배우 겸 시인이자 시민운동가로 샌프란시스코 최초의 흑인 전차 차장이었던 마야 안젤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신과 고집은 다르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오랫동안 돌 벽에 머리를 대고 있으면, 어느 순간에 벽이 돌로 되어 있고, 자신의 머리가 피가 통하는 살로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란 사실은 알고 있다.” 벽이 돌로 되어 있고, 자신의 머리가 살로 되어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 마음의 완고함도 풀릴 것입니다. 요즘 ‘소통’이라는 말이 자주 화두가 됩니다. 누군가와 잘 소통하기 위해 갖춰야 할 마음가짐은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를 진실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소통할 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성서와 함께, 2013년 4월호(통권 445호), 편집부]

 

 


 

 

[탈출기를 처음 읽는데요]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

 

 

성적표를 받을 때 설레는 학생이 몇이나 될까요? 우등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성적표 받기를 주저합니다. 성적이 뚝 떨어졌다면 근심은 더 커집니다. 부모에게 성적을 확인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쉽게 유혹에 빠집니다. 부모의 도장을 훔쳐 찍거나 사인을 위조하는 경우이지요. 그러고 나서 한동안 부모가 성적표를 보여 달라고 하지 않는다면 ‘완전 범죄’가 됩니다.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부모의 지갑에서 돈을 몰래 빼냈는데 부모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여기며 안도합니다. 그런데 정말 부모가 모르고 지나쳤을까요?

 

약하고 부족한 우리의 선택은?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마태 10,26). 복음 선포의 사명을 띠고 파견되는 제자들에게 두려움을 떨쳐 버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분은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세상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고 일깨우십니다. 그런데 약하고 부족한 우리는 순간의 위기와 두려움을 모면하기 위해 잔꾀를 부립니다. 그것이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키는 줄 모르고 그러는 것이지요.

 

‘파괴자’의 손아귀가 이집트를 할퀴고 지나간 그날 밤

 

하느님께서 파라오와 이집트에 내린 마지막 재앙은 재앙의 완결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 맏아들과 맏배의 죽음’이라는 열째 재앙의 원인이 파라오에게 있다고 모세를 통해 분명히 밝히십니다. “그때 파라오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주님께서 사람의 맏아들부터 짐승의 맏배까지 이집트 땅에서 처음 난 것을 모조리 죽이셨다”(탈출 13,15). 그 고집 때문에 파라오의 맏아들뿐 아니라 선량한 이집트인, 심지어 감옥에 갇힌 포로의 맏아들까지 죽임을 당합니다. “초상나지 않은 집이 하나도 없었”(탈출 12,30)다는 대목을 읽으면 하느님께서 너무하셨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파라오의 잘못이니 그의 맏아들만 치시면 되지 않았을까요?

 

이집트에 큰 곡성이 터진 그날 밤, ‘파괴자’(탈출 12,23)의 손아귀가 이스라엘 백성을 거르고 지나갑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이 파스카 예식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가서 저마다 제 집안을 위하여 작은 짐승을 한 마리씩 끌어다 파스카 제물로 잡아라. 그리고 우슬초 한 묶음을 가져다가 대야에 받아 놓은 피에 담가라. 그것으로 그 대야에 받아 놓은 피를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라. 너희는 아침까지 아무도 자기 집 문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탈출 12,21-22).

 

파스카의 밤은 파라오와 이집트인에게 공포와 죽음의 밤이 되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자유와 구원의 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밤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 대가가 바로 파스카 제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탈출이라는 구원을 거저 받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희생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점을 그들에게 똑똑히 일러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스카 축제는 신앙의 정점

 

그런데 탈출 12,1-13,16을 다 읽고 나면, 이야기가 일관성 없이 진행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파스카 축제와 무교절에 대해 말씀하시는 장면, 모세가 이스라엘의 원로들에게 파스카 축제에 대해 지시하는 장면 다음에야 비로소 열째 재앙이 등장합니다. 재앙을 겪고 백기를 든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집트를 떠나라고 하여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온 뒤, 파스카 축제 세칙과 맏아들과 맏배의 봉헌, 누룩 없는 빵에 대한 세칙, 맏아들과 맏배의 봉헌 세칙이 나옵니다. 이야기가 파스카 축제에서 계속 맴도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절정이라 할 열째 재앙과 이집트 탈출이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스카 축제야말로 그들 신앙의 정점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누룩 없는 빵에 대한 세칙을 말하는 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날 너희는 너희 아들에게, ‘이것은 내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하신 일 때문이란다.’ 하고 설명해 주어라. 이것을 너희는 너희 손에 감은 표징과 너희 이마에 붙인 기념의 표지로 여겨, 주님의 가르침을 되뇔 수 있게 하여라.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기 때문이다”(탈출 13,8-9). 이집트 탈출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손수 마련하신 사건입니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스러운 종살이를 굽어보시고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파스카 축제는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대대손손 기념하게 할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파스카는 하느님 안에서의 새 삶으로 ‘건너가는’ 날

 

그러나 파스카 축제는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잔치가 아닙니다. 누룩 없는 빵과 쓴나물을 곁들여 파스카 제물을 먹으면서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축제의 주인공은 모인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곧 하느님을 축제의 주빈으로 모시는 사람들의 잔치입니다. ‘거르고 지나가다’는 뜻의 파스카는 새해 첫날 낡은 것을 버리고 묵은 때를 벗겨내면서 신앙의 여정을 새롭게 시작하는 날입니다. 귀찮아서, 몰라서, 하기 싫어서 거르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구속과 억압, 부패와 타락에서 벗어나 하느님 안에서의 새 삶으로 ‘건너가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파스카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한 그분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희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았다고 모두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하신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놓는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구원은 잡을 수 없는 뜬구름에 그치고 맙니다. 거르고 지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식별하여 실천하는 삶이 오늘 우리의 파스카 축제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5월호(통권 446호), 편집부]

 

 


 

 

[탈출기를 처음 읽는데요]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다

 

 

통화 기능을 훨씬 뛰어넘어선 요즘 시대의 스마트폰. 이 똑똑한 기기의 기능 중에 정말 똑똑하다고 칭찬할 만한 것이 ‘길 찾기’입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낯선 곳을 찾아갈 때면, 정보가 빈약한 약도를 손에 들고 길에서 그곳이 어딘지 물었습니다. 때로는 잘못된 정보 때문에 더 길을 헤매고, 쭉 앞으로만 가면 금방 도착할 것을 빙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스마트폰의 똑똑한 기능은 사람의 기억력을 퇴화시키고 있습니다. 한 번 갔던 곳을 다시 가기 위해 또 스마트폰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어려움 없이 찾아간 곳이 아니라 힘들게 물어물어 찾아간 곳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거기에 발품과 땀이 배어 있으니까요.

 

이스라엘 백성의 ‘길 찾기 앱’

 

이스라엘 백성은 일단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제 그들은 낯선 땅으로 길을 떠나야 합니다. 그들에게 ‘길 찾기’ 기능을 갖춘 스마트폰이 있었을까요? 물론 없었습니다. 그러나 없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밤낮으로 행진할 수 있도록 그들 앞에 서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 속에서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 속에서 그들을 비추어 주셨다”(탈출 13,21).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길 찾기 앱’이었던 셈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우회로를 선택하셨을까?

 

그런데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가장 빠른 길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을 지나는 길이 가장 가까운데도, 그들을 그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 하느님께서는 백성을 갈대 바다에 이르는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셨다”(탈출 13,17-18). 성경에서 말하는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을 지나는 길’은 지중해 해안을 따라 동북쪽으로 난 무역로이자 필리스티아인들의 군사 도로였다고 합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는 지름길이지만 파라오가 추격해 오기 쉬운, 가장 위험한 길입니다. 반면 ‘갈대바다에 이르는 광야 길’은 갈대 바다를 건너 시나이 반도 남단으로 내려가 시나이 광야를 지나는 길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려면 다시 북동쪽으로 올라가 모압 광야를 거쳐야 합니다. 쉽게 말해 아래로 쑥 내려갔다가 위로 올라가는 U자 모양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일자로 쭉 뻗은 길과 빙 돌아가는 길 중에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왜 우회로를 선택하셨을까요?

 

이집트 탈출 이야기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갈대 바다가 쫙 갈라지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파라오의 끈질긴 추격입니다.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을 차립니다. “우리를 섬기던 이스라엘을 내보내다니, 우리가 무슨 짓을 하였는가?”(탈출 14,5) 맏아들과 맏배의 죽음 앞에서 잠깐 슬픔에 잠겼던 그들이 냉정을 되찾습니다.

 

말을 탄 이집트 군대가 육백 대나 되는 병거를 앞세우고 무서운 기세로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뒤로 군사들이 빠르게 다가오는 모습을 봅니다.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했을 그들은 자포자기하고 맙니다.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어 광야에서 죽으라고 우리를 데려왔소?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렇게 만드는 것이오?”(탈출 14,11)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다’는 말이 그들의 처지를 기막히게 드러냅니다. 새로운 곳에 대한 불안, 처음 맛보는 자유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을 휩싸고 있습니다.

 

밤새도록 바닷물을 밀어내어 마른 땅을 만드신 하느님

 

앞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뒤는 파라오의 말과 병거와 기병. 이스라엘 백성은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실 분은 역시 하느님 한 분이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나에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일러라”(탈출 14,15). “앞으로 나아가라”는 하느님의 말씀과 “두려워하지들 마라”(탈출 14,13)는 모세의 말을 듣고도 주저하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뻗었다. 주님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샛바람으로 바닷물을 밀어내시어, 바다를 마른 땅으로 만드셨다”(탈출 14,21).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참으로 사랑하시기에 밤새도록 바닷물을 밀어내십니다. 밀려난 바닷물은 이스라엘 백성을 온갖 위험에서 막아 주는 든든한 벽이 됩니다. 죽음과 어둠을 상징하는 바닷속이 어머니의 자궁 같은 생명의 터전이 됩니다.

 

바다를 건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파스카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를 다 건너간 뒤, 이집트 군사들과 그들의 병거와 기병들은 모두 바닷물에 잠깁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가로막던 모든 장애물과 그들을 동요케 했던 모든 불안이 바닷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리고 갈라졌던 바다는 다시 합쳐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그 바다를 다시 건널 수 없습니다. 그들이 살던 풍요로운 이집트 땅, 묏자리가 사방 천지에 널린 땅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를 ‘건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파스카입니다. 그때 그들은 하느님을 찐하게(!) 체험합니다. 창검으로 무장한 이집트 기병, 모래바람을 휘날리며 돌진해 오는 수백 대의 병거가 무서워 벌벌 떨던 그들이 마침내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과 그분의 종 모세를 믿게”(탈출 14,31) 됩니다.

 

내 신앙의 길 찾기는?

 

파라오에게서 완전히 벗어난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이 기쁨에 겨워 주님께 노래합니다. “나는 주님께 노래하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다. 이분은 나의 하느님, 나 그분을 찬미하리라”(탈출 15,1-2). 그러나 그들은 기쁨의 노래를 부를 때 광야에서 겪을 고난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 오랜 세월을 거쳐 험난한 길을 따라 가나안 땅에 가야 하는지, 그 길에 담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길 찾기’는 갈대 바다를 건너는 순간에 시작됩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길 찾기’는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성서와 함께, 2013년 6월호(통권 447호), 편집부]

 

 


 

 

[탈출기를 처음 읽는데요] 우리를 왜 광야로 끌고 왔소?

 

 

요즘 주말마다 캠핑장으로 향하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가족과 함께 준비하는 특별한 식사,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며 나누는 정겨운 이야기는 가족 모두에게 잊지 못할 추억이 됩니다. 캠핑이 크게 인기를 끌면서 캠핑용품 시장도 점점 커져 3년 전에 비해 그 규모가 네 배나 커졌다고 합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삭막한 도시와 메마른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과 벗하며 낭만과 여유를 즐깁니다. 짧은 며칠 밤을 밖에서 보내지만 집에 있는 살림살이만큼 좋은 캠핑용품과 먹을거리를 챙겨서 집을 떠납니다. 캠핑이 비박(텐트 없이 밤을 지내는 야영)이나 노숙처럼 불편하다면 이렇게까지 열풍이 불었을까요?

 

여행 양식도 장만하지 못한 채 이집트를 떠나다

 

예부터 어른들은 “집 떠나면 고생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집 떠나면 잠자고 먹는 것 하나하나가 자기 집처럼 편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떠나면서 어떤 물건을 챙겼을까요?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가 일러 준 대로, 이집트인들에게 은붙이와 금붙이와 옷가지를 요구하였다. 주님께서는 … 요구하는 대로 다 내주게 하셨다”(탈출 12,35-36). “그 밖에도 … 양과 소 등 수많은 가축 떼도 올라갔다”(탈출 12,38). “그들은 이집트에서 쫓겨 나오느라 머뭇거릴 수가 없어서, 여행 양식도 장만하지 못하였던 것이다”(탈출 12,39). 이 구절들로 보아 은붙이와 금붙이와 옷가지, 그리고 가축 떼는 챙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급히 나오느라 정작 중요한 양식은 장만하지 못했습니다. 생존하기 위해 꼭 필요한 물, 추위와 바람을 막아 줄 천막, 그 외에 간단한 가재도구를 챙겼다는 말도 성경에 없습니다. 결국 이 결핍은 광야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걸림돌이 됩니다. 물과 먹을거리의 부재, 이민족의 위협, 백성 간의 갈등이 그들에게 닥친 또 다른 이집트이자 파라오, 갈대 바다였습니다.

 

마라의 쓴 물을 단 물로

 

이스라엘 백성은 수르 광야를 사흘간 걸었는데도 물을 찾지 못합니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갈대 바다를 건너게 해 주신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을 잊은 채 불평을 쏟아놓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마셔야 한단 말이오?”(탈출 15,24) 써서 마실 수가 없는 마라의 물을 하느님께서 단 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러면서 “나는 너희를 낫게 하는 주님이다”(탈출 15,26)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온 만나와 메추라기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가 엘림을 떠나 신 광야에 이릅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나온 뒤, 둘째 달 보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물로만 연명한 것 같습니다. 드디어 불만이 터져 나옵니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탈출 16,3)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곤궁함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탈출 16,4). 그런데 조건을 거십니다. 아침저녁으로 배불리 먹을 빵과 고기를 주겠지만, 그날 먹을 만큼만 모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백성은 그분의 말씀을 고분고분 잘 듣습니다.

 

마싸와 므리바의 물

 

이스라엘 공동체가 주님의 분부대로 신 광야를 떠나 르피딤에 진을 쳤을 때, 다시 그들에게는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시비를 겁니다. “우리가 마실 물을 내놓으시오”(탈출 17,2). 그들의 태도는 간절한 부탁이나 읍소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다소 위협적입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그들의 가련한 처지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네(모세)가 그 바위를 (지팡이로) 치면 그곳에서 물이 터져 나와, 백성이 그것을 마시게 될 것이다”(탈출 17,6).

 

아말렉과의 싸움

 

그때 그곳 르피딤에서 아말렉족이 몰려와 이스라엘과 싸움을 벌입니다. 물도 먹지 못해 기운이 없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민족이 달려든 것입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말합니다. “너는 우리를 위하여 장정들을 뽑아 아말렉과 싸우러 나가거라. 내일 내가 하느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언덕 꼭대기에 서 있겠다”(탈출 17,9). 싸움은 두 진영의 전투력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모세가 들어 올린 두 손과 그 손을 받쳐 준 아론과 후르의 수고가 아말렉족을 이긴 원동력이었습니다.

 

이트로의 충고

 

그토록 힘들게 광야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모세의 장인 이트로가 모세를 찾아옵니다. 이트로는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 이야기를 듣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그러고 나서 백성의 재판을 혼자 주관하는 모세에게 조언을 합니다. “자네가 일하는 방식은 좋지 않네. 자네뿐만 아니라 자네가 거느린 백성도 아주 지쳐 버리고 말 걸세. 이 일은 자네에게 너무나 힘겨워 자네 혼자서는 할 수가 없네”(탈출 18,17ㄴ-18). 모세는 이트로의 말에 따라 어려운 일만 자기에게 가져오게 하고, 작은 일은 모두 천인대장, 백인대장, 오십인대장, 십인대장에게 맡깁니다. 공동체 내부의 안정을 위해 모세가 이방인의 말을 듣고 행한 슬기로운 처사였습니다.

 

일상의 광야에서 찾는 ‘하느님의 것’

 

“이스라엘 자손들은 정착지에 다다를 때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탈출 16,35). 이스라엘 자손들이 사십 년 동안이나 광야를 헤매며 만나를 먹게 되리라 생각했을까요? 금방이라도 고기와 빵을 배불리 먹고, 여유롭게 양을 치며 따뜻한 잠자리에서 가족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리라 상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 생활에 대한 준비 없이 광야에 접어들었기에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쯤 되니 하느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세세히 말씀하지 않으셨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집트의 것은 그냥 거기에 두고 나오라는 뜻입니다. 당신께서 현존하시는 광야에서 당신의 것을 찾으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것’은 마라와 마싸와 므리바의 물, 만나와 메추라기, 모세가 높이 든 두 손, 이트로의 슬기입니다. 요즘 시대의 광야는 삭막한 도시의 메마른 일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상의 광야에서 여러분이 찾은 ‘하느님의 것’은 무엇입니까?

 

[성서와 함께, 2013년 7월호(통권 448호), 편집부]

 

 


 

 

[탈출기를 처음 읽는데요] 십계명, 명령이 아닌 기도

 

 

첫영성체반 어린이들은 교리를 배우는 동안 기도문 찰고(擦考)를 합니다. 아이들은 성호경,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까지는 술술 잘 외웁니다. 사도신경에 이르러서는 몇몇이 고전하는데, 기도문이 길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을 외울 차례가 되면, 순서가 기억나지 않아 자꾸 버벅거립니다. “사람을 죽이지 마라” 다음이 “간음하지 마라”인지, “도둑질하지 마라”인지 헷갈립니다. 그럴 때 교사는 십계명의 첫 글자를 딴 ‘한하주부사간도거남남’으로 외우면 쉽다고 일러 줍니다. 그런데 그렇게 외워도 아리송한 부분은 남습니다. ‘남의 아내가 먼저일까, 남의 재물이 먼저일까?’

 

십계명은 기도가 아닌 것 같아요

 

어느 똑똑한 아이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 십계명이 기도예요?” 잠시 당황하는 사이에 아이가 계속 말을 건넸습니다. “다른 기도문은 우리가 하느님에게 말하는 건데, 십계명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뭐는 하고 뭐는 하지 말라고 한 거잖아요. 기도가 아닌 것 같아요.” 뜻밖의 문제 제기에 십계명이 기도인 이유는 설명하지 못하고, “당연히 기도지” 하고 얼버무렸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이의 말이 틀린 것 같지 않았습니다. 십계명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신 ‘규범’이고 ‘율법’이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드린 ‘열 가지 기도’는 아니니까요. 십계명은 정말 기도가 아닐까요?

 

탈출기의 중심인 십계명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광야에 도착한 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는 부분(탈출 19,1-20,21)은 탈출기의 중심이요 절정의 시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십계명으로 개화됩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예전에 노아,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과 계약을 맺으셨지만, 십계명을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를 당신의 품 안으로 맞아들이십니다. 그래서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탈출 19,4)고 말씀하십니다. 어미 독수리가 연약한 새끼를 자기 날개에 태워 보호하듯, 당신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자유를 위해 기꺼이 계약을 맺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렛소리, 번개 뿔 나팔 소리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기 위해 몇 가지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성결하게 하고 옷을 빨고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셋째 날 아침이 되자 우렛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고 짙은 구름이 산을 덮은 가운데 뿔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 위로 내려오셨다는 표징입니다. 진영에 있던 백성은 모두 벌벌 떨었습니다. 그런 백성을 모세가 진영에서 데리고 나오자 백성은 산기슭에 섰습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이르신 대로 그들은 산에 오르지 않고 모세만 산봉우리로 올라갔습니다.

 

나는 너를 해방시켜 자유를 준 하느님이다

 

그때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탈출 20,2).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친근하게 다가가십니다. “나는 너를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자유를 준 하느님이다. 이제부터 너에게 하는 말은 자유와 생명을 줄 말이다.” 그런 다음 하나하나 세세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탈출 20,3).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탈출 20,4).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탈출 20,7).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탈출 20,8).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탈출 20,12). “살인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3). “간음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4).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5).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6).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탈출 20,17).

 

십계명은 일반 법률이 아니다

 

계명의 내용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를 고리타분하고 딱딱한 법률로 이해합니다. ‘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와 부정의 뜻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십계명은 재판에 적용하는 일반 법률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어기면 처벌한다’는 규정이 전혀 없습니다. 모세는 두려워 떠는 백성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들 마라.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시험하시려고, 그리고 너희가 그분을 경외하는 마음을 지녀 죄짓지 않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다”(탈출 20,20). 이 말에서 십계명을 주시는 그분의 뜻이 드러납니다. 죄지으면 벌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죄짓지 않게 하겠다는, 당신의 자유와 생명 안에 계속 머물러 ‘거룩한 민족’이 되고 ‘당신의 소유’(탈출 19,5 참조)가 되게 하겠다는 지극한 사랑입니다.

 

십계명이 ‘신앙 다짐’으로 바뀔 때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 나타나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려가서 백성에게, 주님을 보려고 밀려들다 많은 이들이 죽는 일이 없게 경고하여라”(탈출 19,21). 그분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전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모세만 보자고 한 뜻은 당신을 보려고 밀려들다 많은 이들이 죽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그 뜻을 곡해하여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그랬다가는 우리가 죽습니다”(탈출 20,19) 하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요? 십계명은 우리를 못살게 하고 급기야 죽이는 올가미가 아닙니다. 십계명이 ‘신앙 다짐’으로 바뀔 때 명령이 아니라 기도가 된다는 것을 비로소 느낄 것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겠습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겠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겠습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겠습니다. 간음하지 않겠습니다. 도둑질하지 않겠습니다. 거짓 증언을 하지 않겠습니다. 남의 아내를 탐내지 않겠습니다. 남의 재물을 탐내지 않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8월호(통권 449호), 편집부]

 

 


 

 

[탈출기를 처음 읽는데요]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

 

 

“당신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인가요?” 이 질문에 바로 “예” 또는 “아니요”라고 답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조금 머뭇거리겠죠. 물론 속으로는 ‘나야말로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하고 생각하겠지만요. 그러면 다음 질문에는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 법이 없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세상이 엉망이 되리라고 자신 있게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두 질문에 대한 답이 모순되어 보입니다. 나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지만, 법이 없다면 세상이 엉망이 된다고 하니 앞뒤가 안 맞는 셈이죠. 나는 도덕과 양심에 따라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 수 있지만, 남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오만함의 발로일까요?

 

법을 모르면 살 수 없는 현대 사회

 

현대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은 일상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주차 구역이 아닌 곳에 주차하면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과태료(범칙금)를 내야 하지 않습니까? 수많은 법이 제정된 현대 사회는 법 없이 사는 사회가 아니라 법을 모르면 살 수 없는 사회입니다. 법전에 쓰인 한 구절 때문에 없는 죄가 생기고, 지은 죄가 사라지며, 급기야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기도 합니다. 법(法), 한 음절로 된 낱말인데 그 무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그래서 법이라고 하면 골치가 지끈지끈 아픕니다.

 

탈출기, 신명기, 레위기에 나오는 하느님의 법

 

탈출 20,22 앞에 붙은 제목은 ‘계약의 책’(계약 법전)이며, 그다음 줄의 제목은 ‘제단에 관한 법’입니다. 23장까지 쭉 훑어보면 제목마다 ‘법’이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종에 관한 법, 폭력에 관한 법, 상해에 관한 법, 절도에 관한 법, 손해 배상 법, 처녀를 범한 자에 관한 법, 약자 보호법, 하느님을 섬기는 몇 가지 법, 정의 실현에 관한 법, 안식년과 안식일에 관한 법, 연중 3대 축제에 관한 법. 본문을 꼼꼼하게 읽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법을 내려 주셨다고 눈치 챌 수 있습니다.

 

법이 탈출기에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신명 12-26장에는 ‘규정’이라는 이름으로 법이 등장하고(신명기 법전), 레위 17-26장에는 ‘성결법’(성결 법전)이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성막 규정(탈출 25-31장)과 제사 규정(레위기) 등의 법령도 있습니다. 성경이 법전은 아닐 텐데 왜 이렇게 성경에 법이 많이 나올까요?

 

십계명을 주신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네가 그들 앞에 세워 놓아야 할 법이다”(탈출 21,1).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법은 십계명을 실천할 세부 사항입니다. 그런데 천천히 읽다 보면 좀 의아한 조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남종이나 여종을 몽둥이로 때렸는데, 그 종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경우, 그는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종이 하루나 이틀을 더 살면, 그는 벌을 받지 않는다. 종은 주인의 재산이기 때문이다”(탈출 21,20-21). 주인은 이 법을 악용하여 종을 죽지 않을 만큼만 때릴 수 있습니다. 또 맞은 종이 사흘 째 되는 날 죽는다면 벌을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법은 상해했다는 사실에 잘못이 있다고 하면서도 종은 주인의 재산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하는 당대의 문화를 반영합니다. 현대의 법에 따르자면 종을 상해한 주인은 종의 생사와 관계없이 처벌됩니다.

하느님의 법에 흐르는 정신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랑

 

이처럼 성경에 쓰인 하느님의 법은 오늘날의 법과 차이를 보입니다. 성경이 쓰일 당시의 사회 질서가 지금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법에 흐르는 정신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바탕은 정의와 공정입니다. 백성 간에 일어나는 갈등 상황(폭력, 상해, 절도, 손해, 살인)에 대해 하느님께서 불편부당하게 판결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분께서는 ‘-하면 -한다’는 조건법이 아니라 ‘-해야 한다, -해서는 안 된다’는 당위법을 말씀하십니다. 곧 정의 실현에 관한 법, 안식년과 안식일에 관한 법, 연중 3대 축제에 관한 법, 가나안 땅 입주에 관한 약속과 경고입니다. 이 법을 어겼다고 처벌을 받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의지로 부과되는 사회적 · 윤리적 · 종교적 규범인 당위법은 계약 당사자인 개인의 양심에 따라 지켜집니다. 하느님 백성으로 살고 싶다면 마땅히 지켜야 할 법입니다.

 

시시콜콜하게 일러 주시는 하느님을 친절한 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깐깐한 선생님처럼 여길 수도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니 ‘십계명’ 정도만 말씀하시고, 나머지는 인간이 알아서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하나 자세히 일러 주시는 하느님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큰 줄기만 말씀하시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도록 맡겨 주시는 하느님을 원하십니까? 참 고민스러운 문제입니다.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계약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하느님께 들은 모든 말씀과 모든 법규를 백성에게 일러 줍니다. 그러자 온 백성이 한목소리로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탈출 24,3) 하고 다짐합니다. 모세는 주님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산기슭에 제단을 쌓고, 기념 기둥 열둘을 세웁니다. 주님께 친교 제물을 바치면서 그 피를 백성에게 뿌리고,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탈출 24,8) 하고 선포합니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원로 일흔 명은 주님을 뵙고서 먹고 마십니다. 그들은 분명히 주님의 모든 말씀을 받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법에 얽매일지 법을 받아들일지

 

하느님은 일정한 영역이나 한계를 넘어, 또는 그 위에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발밑에는 ‘청옥으로 된 바닥 같은 것’(탈출 24,10)이 있습니다. 그 맑기가 꼭 하늘 같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발을 내딛고 사는 이 세상이라는 바닥은 어떤 모습입니까? 그분께서는 우리도 청옥으로 된 바닥 위에 서 있기를 바라시지 않을까요? 하늘 같은 맑은 세상을 만들라는 뜻으로 그분께서 법을 세우셨습니다. 그 법에 얽매일지 그 법을 기쁘게 그 받아들일지는 우리의 ‘의지’에 달렸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9월호(통권 450호), 편집부]

 

 


 

 

[탈출기를 처음 읽는데요] 내가 그들 가운데에 머물겠다

 

 

‘유비쿼터스(Ubiquitous).’ 한 번쯤 들어 본 말입니다. 라틴어 ‘유비크(ubique)’를 어원으로 하는 이 말의 뜻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입니다. 개인용 컴퓨터(PC)뿐 아니라 휴대전화, TV, 게임기, 내비게이션 등 컴퓨터가 아닌 기기로도 언제 어디서나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환경을 말합니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이 용어를 6-7년 전에는 자주 사용했습니다. 아무데나 유비쿼터스를 붙였습니다. 뭔가 획기적인 새 세상이 온 것 같아서였습니다. 2013년 현재 유비쿼터스를 잘 구현한 기기는 스마트폰입니다. 스마트폰 하나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네트워크에 접속하고 있으니까요. 바야흐로 유비쿼터스 시대입니다.

 

눈만 뜨면 스마트폰을 켭니다. 지하철과 버스, 길에서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습니다.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부터 백발의 어르신까지 남녀노소 누구나 손에 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외로움으로 인한 자살은 늘어만 갑니다. 언제 어디서나 소통하는데 우울하고 쓸쓸합니다. 날마다 정보가 넘쳐나는데도 기억에 남는 것은 그다지 없습니다. 아이러니입니다.

 

인간이 사는 천막에 머무르시겠다는 하느님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 머무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에게서 십계명과 모든 법규를 받았습니다. 이제 백성이 해야 할 일은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이 나를 위하여 성소를 만들게 하여라. 그러면 내가 그들 가운데에 머물겠다”(탈출 25,8-9).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지상으로 내려오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백성은 하느님께 거룩한 곳(성소)에 머물러 달라고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분께서는 저 높은 시나이 산에 계시지 않고 백성이 사는 한가운데에서 그들을 만나겠다고 하십니다. 그분의 깊고 깊은 자비입니다.

 

탈출 25,1-31,17의 내용은 하느님의 말씀으로만 이뤄져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어떻게 성소를 건립하고 그 내부를 장식해야 하는지 아주 상세하게 말씀하십니다. 건축가나 실내디자이너처럼 재료, 크기, 높이, 길이, 모양 등을 낱낱이 지시하십니다. 그런 다음 의상디자이너가 되신 것처럼 사제들의 옷을 규정하고, 임직식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도 알려 주십니다. 덧붙여 인구 조사와 속전, 물두멍, 성유, 향료, 성막 기술자, 안식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성소를 건립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은 지루하고 복잡하다?

 

본문을 계속 읽다 보면 지루함을 느낍니다. 현재 우리가 쓰는 길이 단위가 아닌 ‘암마’가 도대체 몇 센티미터인지 몰라 규모를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마실, 아마포, 커룹, 에폿, 쓰개, 홍옥수, 물두멍, 세켈…. 낯선 낱말이 연이어 나와 어지럽습니다.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것도 성경인가?’ 성경이 맞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니까요. 그럼 도대체 하느님께서는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말씀하실까요? 답은 그 복잡함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탈출 24,3) 하고 굳게 약속했습니다. 그들이 그분의 말씀에 따라 성소를 짓고 부속 기물을 만들고 사제 옷을 짓고 임직식을 하려면 그분의 말씀을 아주 여러 번 되뇌어야 합니다. 게다가 금과 은을 비롯한 귀중품을 저마다 내놓아야 합니다. 자신이 가진 물건과 재능과 기술을 함께 나누며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는 일, 그것이 바로 거룩한 천막에 하느님을 모시고 그분과 만나는 신앙 체험입니다. 그런데 아둔한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뭐 그리 말씀이 많으신 거냐고 투덜거립니다. 지시 사항을 그림 한 장에 담아보여 주시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준비해 봤습니다. 이동용 성소인 성막(만남의 천막) 그림입니다.

 

 

 - 성막(만남의 천막)

 

① 계약 궤: 아카시아 나무로 만든 궤. 안팎이 순금으로 되어 있다. 궤 위에 속죄판을 얹고 궤 안에는 증언판(십계명이 새겨진 돌 판)을 넣는다.

 

② 제사상: 아카시아 나무에 순금을 입혀 만든다. 그 위에 대접, 접시, 단지, 잔, 제사 빵을 올려 둔다.

 

③ 등잔대: 등잔대와 그에 딸린 기물들은 순금으로 만든다.

 

④ 분향 제단: 향을 피우는 제단으로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 순금을 입힌다.

 

⑤ 물두멍: 몸을 씻기 위해 물을 담는 청동 기물. 만남의 천막(성막)과 제단 사이에 놓는다.

 

⑥ 번제 제단: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 청동을 입힌다. 속죄 제물을 바칠 때 쓴다.

 

⑦ 성막: 널빤지로 기초를 세운다. 성막 내부를 세 공간(지성소·성소·성막 뜰)으로 구획하는 물건은 휘장과 막이다.

 

⑧ 휘장: 자주와 자홍과 다홍 실, 가늘게 꼰 아마실로 만든다. 휘장 뒤에는 증언궤를 모시고, 휘장 앞에는 제사상, 등잔대, 분향 제단을 놓는다.

 

㉮ 지성소: 계약 궤가 모셔진 곳. 대사제가 1년에 하루(속죄일)만 들어갈 수 있다.

 

㉯ 성소: 제사상과 등잔대가 있는 곳.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다.

 

㉰ 성전 뜰: 제단이 있고 울타리가 쳐져 있다.

 

㉱ 울타리: 휘장, 기둥, 밑받침, 기둥 고리, 가로대로 만들어진다.

 

하느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신다

 

하느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성막의 지성소일까요? 예루살렘의 거대한 성전일까요? 오늘날 성당에 모셔진 감실일까요? 그분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방식대로 지성소와 성전과 감실에 머무르십니다. 마침내 그분께서는 사람이 사는 천막뿐 아니라 짐승이 사는 곳(구유)까지 갓난아기가 되어 찾아오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소통하는 유비쿼터스 시대, 수시로 스마트폰을 만지듯 언제 어디서나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성서와 함께, 2013년 10월호(통권 451호), 편집부]

 

 


 

 

[탈출기를 처음 읽는데요] 그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21년 전에 방영되어 56.1%라는 놀라운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가 있습니다. 최수종과 고 최진실 주연의 [질투]입니다. 1992년의 여름을 뜨겁게 달군 이 드라마는 젊은이들의 사랑과 우정을 감각적 영상과 신선한 연출로 표현했습니다. 한밤중에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는 장면, 내숭 떨지 않고 자기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장면은 당시의 신세대 문화를 잘 보여 주었습니다. 종영한 지 세월이 꽤 흘렀는데도 등장인물과 장면보다 더 깊이 기억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드라마 주제가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질투를?

 

“넌 대체 누굴 보고 있는 거야/ 내가 지금 여기 눈앞에 서 있는데/ 날 너무 기다리게 만들지 마/ 웃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유승범 노래). 제목은 ‘질투’인데, 가사에 ‘질투’라는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질투의 이유로 여겨지는 부분은 “나의 마음 전하려 해도 너의 눈동자는 다른 말을 하고 있잖아”입니다. 노랫말의 주인공은 서로를 잘 아는 것을 사랑이라 여겼다며 언젠가는 사랑을 고백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이 노랫말을 불쑥 꺼낸 이유는 탈출기의 한 구절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질투하는 이’, 그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탈출 34,14).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질투를 하시다니! 조선 시대에 질투(투기)는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일곱 가지 이유 중 하나로 혼인한 여인에게 큰 죄악이었습니다(七去之惡). 사극을 보면 왕비가 승은을 입은 후궁을 질투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그때 대비나 대왕대비가 왕비에게 투기를 한다고 꾸짖습니다. 이렇듯 질투는 ‘국모’라고 일컫는 왕비도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께서 질투를 하실까요?

 

금송아지 사건이 터지다

 

‘질투하는 하느님’이라는 말씀이 어떻게 나오는지 찬찬히 살펴봅시다. 이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계약을 맺을 때 나온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첫 번째 계약은 십계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십계명과 더불어 여러 법규를 일러 주십니다. 모세가 모든 계약이 담긴 책을 백성에게 읽어 주자, 백성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탈출 24,7) 하고 분명히 약속합니다. 그 뒤 모세는 시나이 산으로 다시 올라갑니다. 모세가 산 위에서 성소 건립 등에 관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산 아래에서 그 유명한 ‘금송아지 사건’이 터집니다.

 

“금송아지가 너의 신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오랫동안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불안하고 초조해합니다. 자신들을 이끌 지도자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황량한 광야에서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자 모세를 대신하여 백성을 이끄는 아론이 말합니다. “여러분의 아내와 아들딸들의 귀에 걸린 금 고리들을 빼서 나에게 가져오시오”(탈출 32,2). 아론은 모인 금으로 수송아지 상을 만듭니다. 황소는 원래 고대 근동 지방에서 성적 경향을 띤 종교의 신상이었는데, 아론이 왜 수송아지 상을 만들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는 그저 백성의 반발을 잠재우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백성은 금송아지를 보고 외칩니다.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탈출 32,4). 하느님께서 금송아지 형상으로 백성에게 머물겠다고 하신 적이 없는데, 그들은 금송아지를 하느님으로 삼습니다. 그들 입맛에 맞는, 그들 소유의 신을 만들어 낸 명백한 배신입니다.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께서 금송아지 사건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그분께서 진노하십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탈출 32,9-10). 이는 이집트 임금 파라오와 그의 군대에게 하신 말씀과 같아 보입니다. 고마워할 줄 몰라 목이 뻣뻣한 백성에게 그분께서 진노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가 봐도 이스라엘 백성은 큰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것, 곧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망가트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애원합니다.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큰 힘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당신의 백성에게 진노를 터뜨리십니까?”(탈출 32,11) 모세의 간청에 하느님께서 마음을 누그러뜨리십니다. 그러나 사건은 그 상태로 흐지부지되지 않습니다.

 

다시 계약을 맺으시는 하느님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하느님께서 손수 써 주신 증언판 두 개를 내던져 깨 버립니다. 금송아지를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 물에 뿌리고서 백성에게 마시게 합니다. 믿음이 충실한 레위인들로 하여금 주님의 편에 서지 않는 자들을 죽이게 합니다. 그렇게 죗값을 치른 뒤 모세는 하느님께 용서를 청합니다. “아,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탈출 32,31-32).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시 돌 판 두 개를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고 다시 계약을 맺으십니다. 두 번째 계약(탈출 34,10-28 참조)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과 하느님의 은총(자비·용서)까지 표상합니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탈출 34,6-7)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느님의 질투는 지극한 사랑

 

금송아지만 바라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너희는 대체 누굴 보고 있는 거냐? 내가 지금 여기 너희 앞에 서 있는데….” 그분의 질투는 그저 기분 나쁜 감정이 아닙니다. 인간을 죄악에서 구해 주고자 하는 지극한 사랑입니다. 그분의 분노는 서릿발 같지만, 용서는 부드러운 바람과 같습니다. 그런 그분에 의해 정화되면 모세처럼 하느님의 사람으로 빛나게 됩니다(탈출 34,29-30 참조). 질투하시는 하느님을 여러분은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그분의 질투는 구원의 참빛을 보게 하는 죽비가 아닐까요.

 

[성서와 함께, 2013년 11월호(통권 452호), 편집부]

 

 


 

 

[탈출기를 처음 읽는데요] 길을 떠났다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콩쥐팥쥐 이야기는 어머니를 여읜 콩쥐에게 계모와 팥쥐가 오면서 시작됩니다. 끝은 콩쥐가 원님과 혼인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입니다. 이른바 ‘해피엔딩(행복한 결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의 끝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인공이 죽는 비극적 결말도 있고, 뚜렷한 해결 없이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열린 결말’도 있습니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열린 결말을 취할 때 성격 급한 이는 분통을 터뜨립니다. “그래서 뭐 어떻게 된다는 거야?”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잘 됐든 못 됐든 확실하게 끝나는 이야기가 좋습니까?

 

탈출기의 시작과 끝

 

탈출기는 ‘이집트로 들어간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야곱과 함께 저마다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들어간 이스라엘의 아들들 이름은 이러하다”(탈출 1,1). 그리고 ‘이스라엘인들을 이끄는 구름’으로 이야기를 끝맺습니다. “그 모든 여정 중에 이스라엘의 온 집안이 보는 앞에서, 낮에는 주님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탈출 40,38). 시작과 끝을 중심으로 탈출기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집트로 간 이스라엘인들이 주님의 구름을 따라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을 향해 떠났다’가 됩니다.

 

그런데 탈출기를 처음 읽은 사람들은 결말이 허무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이야기가 끝나는 것 아닌가? 어째 이야기를 하다 만 것 같네.’ 그렇습니다. 탈출기의 끝은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장면이 아닙니다. ‘고된 종살이에서 벗어난 이들이 하느님에게서 십계명을 받고 모진 광야 생활을 견디어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 잘 먹고 잘 살았다’ 하고 끝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길을 떠났다.’ 이것이 탈출기의 결론입니다. ‘열린 결말’이지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좀 난감합니다.

 

탈출기의 행복한 결말은 어디에?

 

먼저 우리가 짐작하는 결말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봅시다. 그것은 오경(하느님과의 계약과 기본 체험이 담긴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이 아닌 여호수아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모든 땅을 그들에게 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을 차지하여 살게 되었다. … 주님께서 이스라엘 집안에 하신 그 모든 좋은 말씀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이루어졌다”(여호 21,43-45). 그야말로 해피엔딩이네요. 그럼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까요? 하느님 말씀을 고분고분 듣고 그분을 충실히 믿으면서 그 땅을 점령했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목이 뻣뻣한 이스라엘 백성

 

모세의 형제인 아론과 미르얌은 모세가 에티오피아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자 모세를 시기합니다(민수 12장 참조). 그 결과 미르얌은 악성 피부병에 걸립니다. 지도층이 이런데 백성인들 오죽하겠습니까? 백성은 여전히 광야 생활에 대해 불평합니다. 풍요롭던 이집트 생활을 잊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약속을 지키겠노라 누누이 말씀하시는데도 그분을 믿지 않고 샛길로 빠지고 급기야 반란을 일으킵니다. 모세를 끌어내고 자기들만의 우두머리를 내세워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선동합니다(민수 14장; 16장 참조). 시나이 산 아래에서 벌인 금송아지 사건을 까맣게 잊은 채 또 우상을 숭배합니다. 이에 하느님께서 분노하십니다. “이 백성은 언제까지 나를 업신여길 것인가? … 언제까지 나를 믿지 않을 것인가?”(민수 14,11) 과연 목이 뻣뻣한 백성입니다.

 

모세마저 잘못을 저질러 하느님께 꾸중을 듣습니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공동체에게 주는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민수 20,12). 이 말씀대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고령(120세)으로 죽은 것은 분명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입니다. 그는 하느님과 일치하려고 애썼고, 하느님의 도구로서 이스라엘이 그분의 백성이 되도록 이끈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모세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염려합니다. 온갖 죄에서 벗어나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당부합니다(신명 32,46-47 참조). 어째서 그들은 종살이하던 이집트 땅을 그토록 잊지 못할까요? 왜 사춘기 청소년처럼 반항하고 방황할까요?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잘 구분하여 실행하지 못할까요? 좌충우돌하는 그들이 참으로 딱해 보이지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 삶을 탈출기에 배춰 본다면?

 

내 삶을 탈출기에 비춰 보았으면 합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처럼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습니까? 나를 억압하고 학대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이집트는 무엇입니까? 그 이집트에서 탈출하려고 노력합니까? 혹여 이집트 생활이 그리워 그곳에 돌아가려 하지는 않습니까? 나의 최종 목적지, 가나안 땅은 어디입니까? 지금 그 땅으로 가고 있습니까? 가는 길이 힘들어 주저앉지는 않았는지요? 어쩌면 지금까지 온 길을 거슬러 이집트로 돌아가는지도 모르겠네요.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내 삶의 여정에 누가 함께 계셨는지, 고통에 짓눌려 아파하고 힘들어할 때 내 곁을 지켜 주신 분이 누구였는지….

 

“그러니 이제 가거라.”(탈출 4,12)

 

탈출기에는 결말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결말이 처음부터 정해지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탈출기의 ‘열린 결말’은 은총의 표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구원으로 향하는 길이 언제나 활짝 열려 있다는 뜻이니까요. 하느님께서는 자유와 생명과 평화가 가득한 당신의 나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갈 길을 몰라 헤매는 우리에게 인자한 목소리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제 가거라”(탈출 4,12). 머물겠습니까, 떠나겠습니까? 하느님을 향해 길을 떠나는 사람, 그가 바로 탈출기의 주인공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2월호(통권 453호),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