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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모압 여인의 사랑과 도전, 룻기 - 안소근 실비아 수녀

by 파스칼바이런 2018. 6. 25.
모압 여인의 사랑과 도전, 룻기 (1) 모압 여자의 도전장

모압 여인의 사랑과 도전, 룻기

(1) 모압 여자의 도전장

안소근 실비아 수녀

 

 

룻은 상종하지 말아야 할 인간입니다. 모압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암몬족과 모압족은 주님의 회중에 들 수 없고, 그들의 자손들은 십 대 손까지도 결코 주님의 회중에 들 수 없다”(신명 23,4). 십 대 손까지도! 그런데 룻기 마지막의 족보에 따르면 룻의 아들이 오벳, 오벳의 아들이 이사이, 이사이의 아들이 다윗입니다. 룻기는 신명기의 법전에 도전장을 던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언제 도전장을 던졌나

 

도전장을 언제 던졌을까요?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룻기의 주인공인 룻과 룻기의 저자를 구별해야 합니다.

 

룻기의 첫 절은 “판관들이 다스리던 시대에”(1,1)라는 말로 룻기의 배경을 설정합니다. 룻을 판관 시대에 살았던 인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차례를 보아도 룻기는 판관기 다음에 나옵니다. 이렇게 룻기를 판관기와 사무엘기 사이에 놓고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룻기도 그 앞뒤의 책들과 같은 종류의 역사책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룻기가 그 자리에 있던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은 토라, 예언서, 성문서로 나뉘는데, 토라 바로 다음에 나오는 것이 여호수아기, 판관기, 그 다음은 본래 사무엘기입니다. 룻기는 성문서에 속하기 때문에 예언서가 모두 나온 다음, 맨 끝부분에 있었는데 바로 그 “판관들이 다스리던 시대에”라는 첫 구절 때문에 성경을 번역하던 사람들이 여기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룻기는 본래 판관기에 이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기야 뭐, 판관기라고 해서 판관 시대에 쓰인 것도 아닙니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세종대왕에 대한 드라마를 만들었으니까요. 어떤 시대이든 판관 시대의 인물 룻에 대해 쓸 수는 있었겠지요. 수백 년 전에 살았던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역사를 꺼내 와서 소통이 없는 현대의 상황을 비판할 수 있듯이, 후대의 누군가가 룻의 이야기를 하여 당대 상황에 도전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언제? 순전히 가능성만 말한다면 판관 시대 이후 어느 시대라도 가능했겠지요.

 

다윗 시대?

 

어떤 이들은 룻기가 아주 오래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룻기가 “이사이는 다윗을 낳았다”(4,22)는 말로 끝나는 데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저자가 룻기를 쓴 목적이 다윗의 조상 가운데 모압 여자가 있다는 것에 대한 비판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봅니다. 아직 다윗 왕조의 권위가 확립되지 않았던 기원전 10-8세기에 이 책이 작성되었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이렇게 연대를 추정하는 데 다른 근거도 제시합니다. 룻기에서 때때로 고풍스런 단어나 이른 시기의 문법 형태를 사용하고, 오래전의 법률 제도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런 근거는 그다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현대인이 세종대왕 드라마를 만들 때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같이 요즘에는 쓰지 않는 옛 표현을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후대의 저자가 오랜 과거를 배경으로 글을 썼다면 일부러 예스러운 형태를 사용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근래에는 룻기가 다윗 시대에 작성되었다고 보는 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보다 늦은 시기의 책이라는 증거가 더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에즈라 시대?

 

사극에서 옛날 어투를 모방할 수는 있지만, 미래 시대의 신조어를 미리 생각해 낼 수는 없지요. 그런데 룻기에는 다윗 시대의 히브리어가 아닌, 몇 세기 지난 다음에 히브리어에 영향을 미쳤던 아람어의 흔적이 나타납니다. 그만큼 후대에 작성된 책이라는 증거일 것입니다. 게다가 ‘옛날 이스라엘에는 … 관습이 있었다’(4,7 참조)는 식의 설명은 이 책이 작성된 때에는 이미 그런 관습이 사라졌음을 말해 줍니다. 룻은 “판관들이 다스리던 시대”(1,1)에 살았던 인물로 등장하지만, 룻기의 저자는 그 시대를 ‘옛날’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그럼 룻기의 작성 연대는 어느 시대일까요?

 

룻기가 도전하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살펴봅시다. 이스라엘이 모압 여자 룻을 거부했던 시대는 언제일까요?

 

이스라엘이 외국인에 대해 유독 배타적 태도를 보인 때는 에즈라-느헤미야 시대였습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다음, 기원전 5세기경의 일입니다.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고 다윗 왕조가 무너져 처절히 멸망했던 이스라엘은 우리가 왜 멸망했을까 생각했고, 50년 후 유배지에서 돌아와서는 이제부터라도 민족의 정체성을 철저히 지켜 내자며 결의를 단단히 했습니다. 백성은 온종일 모여 서서, 에즈라가 읽어 주는 율법서를 들으며 울었습니다. ‘아, 우리는 우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곳에서 해방시켜 이 땅에 데려다 주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셨던 대로 살지 않았구나.’ 그들은 깊이 참회하며, 주님의 백성으로서 순수성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한쪽으로 치닫다 보면 다른 쪽은 보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에 온통 집중했던 이들은, 다른 민족들을 자신들과 같이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 생활을 개혁하고자 했던 에즈라와 느헤미야는, 유다인 남자들과 이미 결혼해서 살고 있고, 자녀까지 딸린 이방 여자들을 모두 내보내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여러 책에서는 여러 가지로 설명하지만) 이건 너무했습니다.

 

그 시대를 대변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요나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여 구원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동쪽(니네베)으로 가라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서쪽(타르시스)으로 달아난 인물, 요나가 에즈라-느헤미야 시대 이스라엘의 초상입니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룻기는 모압 여인을 수용합니다. 모압 여인과의 혼인을 옹호합니다. 아니, 모압 여인을 다윗의 조상으로 내세웁니다. 당시 사람들의 배타적 태도를 찌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룻기의 작성 연대를 늦게 잡을 때에는, 다윗의 족보가 첫 번째 해석과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룻기의 이야기가 다윗의 권위를 밑받침해 주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족보가 룻기의 이야기를 밑받침해 주게 됩니다. 에즈라 시대에 다윗은 의심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닌 인물입니다. 의심스러운 것은 오히려 룻의 도전입니다. 여기에서 이 이야기가 다윗의 족보로 끝난다는 것은, 룻기가 선택한 길이 올바른 길임을 입증한다는 뜻입니다.

 

어느 시대라도 상관 없다?

 

이렇게 다윗 시대 또는 에즈라 시대에 룻기가 작성되었다고 보는 이들은, 룻기의 주제가 그 시대의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이가 그렇게 보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룻기는 판관기나 사무엘기와 계통이 다릅니다. 물론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열왕기로 이어지는 신명기계 역사서도 학문적 의미에서 순수한 역사책이라고 말하기 어렵고 신학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책들의 근본 의도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성찰입니다. 그러나 룻기는 에스테르기, 유딧기와 함께 역사서라기보다 교훈을 주는 이야기에 속합니다. 다음에 지적하겠지만, 룻기가 전하는 이야기 가운데 상당 부분은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룻기가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묻게 되지요. 그 대답의 예로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한 며느리 룻의 충실성을 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 가정의 중요성 등 다른 대답도 가능하겠습니다. 이러한 해석에서 룻기의 시대적 배경이나 작성 연대는 그 책을 이해하는 데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혼란스러우시지요? 조금씩 익숙해지며 단련하시면 좋겠습니다. 하나의 책에 대해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해석합니다. 룻기의 경우 많은 이가 룻기의 시대 배경으로 지지하는 것은 두 번째 해석입니다. 도전장의 내용을 보면 누구에게 도전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모압 여자 룻은 자신을 배척하는 이들에게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그 길이 무엇인지는 아직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해석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여러 해석에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풍요로움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7월호(통권 448호)]

 

 


 

 

모압 여인의 사랑과 도전, 룻기

(2) 룻기의 치밀함

안소근 실비아 수녀

 

 

드라마 대본을 쓰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시청자들이 다음 회를 보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들 수 있을까’ 머리를 쓰는 것 같습니다. 줄거리가 어떻게 전개될지 판가름이 나야 할 상황에서 꼭 그날의 분량이 끝나 버리지요. 예고편이 있으면 시청자들은 더 자극을 받습니다. 예고편은 다음 줄거리를 미리 알려 주는 듯하지만 사실 더 궁금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룻기는 바로 그런 치밀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습니다. 대략 알고 있을 룻기의 줄거리를 되짚어 보면서, 룻기의 저자가 얼마나 세밀하게 독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는지 주목해 보겠습니다.

 

룻기의 짜임새

 

1장은 나오미가 모압 땅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것을 전해 줍니다. 나오미는 본래 유다 베들레헴 출신이지만 기근을 피해 모압 지방으로 이주했습니다. 거기에서 나오미는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마흘론과 킬욘을 여의었습니다.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길을 떠나면서 모압 여인인 며느리 오르파와 룻에게 각자 제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 재혼하라고 권고합니다. 오르파는 떠나가지만 룻은 끝까지 나오미 곁에 남겠다고 하여,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한 것은 보리 수확이 시작될 무렵이었다”(1,22). 이것이 1장의 마지막 말입니다. 그러니 독자들은 보리 수확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하며 다음 장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과연 2장은 보리 수확을 배경으로 전개됩니다.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모압 여인 룻은 추수하고 남은 이삭을 주우러 다닙니다. 그런데 룻이 이삭을 주우러 간 밭이 마침 엘리멜렉의 친척인 보아즈의 밭이었습니다. 보아즈는 룻이 시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룻에게 호의를 베풀어 자기 밭에서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보살펴 줍니다. 2장의 마지막 말은 “그래서 룻은 보리 수확과 밀 수확이 끝날 때까지 보아즈의 여종들 곁에서 이삭을 주웠다. 그러고 나서 룻은 시어머니와 함께 집에 머물렀다”(2,23)입니다. 다음 질문은, ‘보리 수확과 밀 수확이 끝났으니 이제 룻은 어떻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수확 기간에 이삭을 줍는 일로는 1년 내내 안정된 삶을 보장할 수 없지요. 그러면 이제 룻과 나오미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요? 다시 궁금한 마음으로 3장을 펼칩니다.

 

3장에서 나오미는 룻을 보아즈에게 보냅니다. 룻은 나오미의 지시에 따라 밤에 타작마당으로 보아즈를 찾아가 그에게 접근합니다. 그리고 법률상의 구원자 의무를 다하여 친족인 자신을 돌보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자기와 혼인해 달라고 요청하지요. 보아즈는 룻에게 보리 여섯 되를 주어 나오미에게 보냅니다. 3장의 마지막 말은 나오미의 입에서 나옵니다. “내 딸아, 일이 어떻게 될지 알게 되기까지 잠자코 있어라. 그분은 오늘 안으로 이 일을 결말짓지 않고는 가만히 있지 못할 것이다”(3,18). 드라마에서 마지막 회가 다가올 때에 느끼는 예감, 그런 것이 느껴지지요? 이제는 ‘오늘’의 일만, 하루 분량만 보면 이 드라마의 긴장이 해소되리라는 것을 독자는 눈치챕니다(눈치를 못 챘다면 약간 둔한 독자입니다!).

 

4장에서는 보아즈보다 룻에게 더 가까운 친족인 다른 구원자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는 룻과 혼인하여 엘리멜렉의 대를 이어 주려 하지 않았으므로, 보아즈는 룻과 나오미를 맡기로 하여 룻과 혼인하고 엘리멜렉에게 속한 밭을 삽니다. 그 후 룻은 오벳을 낳았고, 그 오벳이 다윗의 할아버지가 됩니다. 이렇게 탄탄하게 짜인 4장의 줄거리가 끝을 맺습니다. 룻기는 하나의 뛰어난 문학 작품으로, 마치 단편소설 같은 모습을 보여 줍니다.

 

다윗의 족보?

 

4장의 마지막은 좀 특이합니다. 4,18-22에서 ‘페레츠의 족보’가 나오는데, 이 족보는 페레츠에서 시작하여 헤츠론, 람, 암미나답, 나흐손, 살마, 보아즈, 오벳, 이사이, 다윗으로 이어집니다. 이 족보에서 룻은 보아즈의 아내이고 오벳의 어머니이며, 다윗의 증조모가 됩니다.

 

과연 다윗의 실제 족보에 룻이 들어 있었을까요? 일단 제가 검색해 보았는데 구약성경에서 ‘룻’이라는 이름은 룻기에만 등장합니다. 룻기 마지막 부분의 족보와 병행하는 1역대 2장의 족보에도 룻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물론 그 족보에 어머니들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으니 크게 문제될 일은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러면 지난 호에 소개한 룻기에 대한 여러 해석 가운데 ‘다윗의 조상 가운데 모압 여인이 있다는 것에 대한 비판을 막기 위해서 썼다’고 보는 첫 번째 해석은 별로 가능성이 없게 됩니다.

 

다윗의 족보에 룻이 들어 있어 문제를 일으켜야, 그 문제에 답하기 위해 룻기가 작성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실제로 룻기 밖에서 룻의 존재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윗의 족보에 들어 있는 룻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룻기가 작성되지 않았다면, 이 족보는 달리 이해해야 합니다. 룻기의 작성 연대가 다윗 시대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유배지에서 돌아온 에즈라-느헤미야 시대였다고 할 때, 다윗에게는 룻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이지요. 룻기에서 다윗이 필요합니다. 룻기의 저자는 자신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이야기의 마지막을 다윗의 족보로 끝내는 것입니다.

 

지난달에 다루지 않은 룻기 입문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탄탄한 문학 구성을 갖춘 룻기가 실제 역사의 기록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답부터 말씀드린다면 룻기는 역사 기록이 아닙니다. 룻기의 등장인물 가운데 구약성경의 다른 부분에 언급된 사람은 보아즈뿐입니다(1역대 2,11.12 참조). 더구나 등장인물은 대부분 상징적 이름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나의 감미로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은 ‘나의 하느님은 임금’, 나오미의 아들 마흘론은 ‘질병’, 킬욘은 ‘허약함’을 뜻하고, 며느리인 오르파는 ‘목덜미’, 룻은 ‘원기 회복’을 뜻합니다. 과연 실제 인물의 이름일까요? 또 룻기에서 객관적으로 말해 너무나 가능성이 적은 우연한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도(물론 이러한 우연성은 하느님의 섭리를 드러내는 신학적 의미를 갖습니다) 룻기가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방증합니다. 룻이 이삭을 주우러 간 밭이 엘리멜렉의 친척인 보아즈의 밭이었다든가, 보아즈가 다른 구원자를 말하고 나서 다음 날 아침 그 구원자가 보아즈. 앞을 지나간다든가 하는 장면은 실상 룻기가 허구임을 독자에게 말해 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룻 이야기는 역사 기록이 아니라 저자가 만든 이야기입니다. 저자가 이 이야기를 다윗의 족보로 끝나게 한 것은 그가 다윗의 권위에 의지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압 사람이고 여성인 룻이 에즈라-느헤미야 시대의 이스라엘에게 던진 도전에, 다윗의 권위로 힘을 실어 주려한 것이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룻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룻이 다시 족보에 등장합니다. 잘 알다시피 마태 1장에 실린 예수님의 족보에는 다섯 어머니의 이름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유다의 며느리로서 창녀로 가장하여 시아버지에게서 아들들을 낳은 가나안 여인 타마르이고, 둘째는 예리코의 창녀였던 라합이며, 셋째는 모압 여인 룻입니다. 넷째는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이고, 마지막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여기서 마태오 복음서는 그 맥락으로 룻기를 해석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족보에 외국 여인들의 이름이 언급되었다는 것은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마태 1,1)가 유다인만의 구원자가 아니라 모든 민족의 구원자라는 의미입니다. 둘째, 이 여인들은 빈틈없이 일정하게 이어지는 족보의 도식을 깨뜨려 역사가 인간의 계획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과 개입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도 모압 여인 룻은 도전적입니다. 인간의 계획과 계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하느님의 결정으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압 여인의 도전장을 받으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 도전이 나를 전복시킬 수 있도록, 누구의 말이라도 들을 준비를 하십시오.

 

[성서와 함께, 2013년 8월호(통권 449호)]

 

 


 

 

모압 여인의 사랑과 도전, 룻기

(3) 나를 마라라고 부르셔요(룻 1,20)

안소근 실비아 수녀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셔요.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너무나 쓰라리게 하신 까닭이랍니다”(1,20). ‘나오미’라는 이름은 ‘나의 감미로움’을, ‘마라’는 ‘쓰라리게 하다’를 뜻합니다. 1장에서 보여 주는 것은 바로 나오미의 삶에 죽음의 그림자가 덮이는 사건들입니다.

 

나오미 – 마라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사람인 엘리멜렉이 기근 때문에 모압 지방에서 나그네살이를 합니다. 기막힌 상황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모압은 이스라엘이 상종하지 말아야 할 민족이었습니다(신명 23,4-5 참조). 그런데 얼마나 먹을 것이 없었으면 그런 모압 지방에 더부살이를 하러 갔을까요? 더 역설적인 것은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입니다. 히브리어로 ‘빵의 집’이라는 뜻이지요. 이름대로라면 베들레헴에는 양식이 풍부해야 합니다. 그런 베들레헴에 먹을 것이 없어서, 그 땅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이 모압 땅으로 가야 했다니…. 그것은 생존을 위한 마지막 시도였습니다.

 

그나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은 모압 지방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이제부터 1장의 중심에 나오미가 서게 됩니다. 그 땅에서 10년쯤 지나는 사이 나오미의 두 아들 마흘론(‘질병’)과 킬욘(‘허약함’)도 세상을 떠납니다. 나오미에게는 남편과 두 아들도, 생명을 유지할 양식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배고프고 힘든 타향살이 끝에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셔요.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너무나 쓰라리게 하신 까닭이랍니다. 나 아쉬움 없이 떠나갔는데 주님께서 나를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답니다. 그런데 어찌 그대들은 나를 나오미라 부르나요? 주님께서 나를 거칠게 다루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불행을 안겨 주셨답니다”(1,20-21).

 

이렇게 1장은 나오미가 점점 ‘빈손’(1,21)이 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나오미의 삶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습니다.

 

오르파

 

나오미에게는 며느리가 둘 있습니다. 유다인인 마흘론과 킬욘이 모압 여자들과 결혼한 것은 율법에 어긋납니다. 특히나 에즈라-느헤미야 시대에, 느헤미야는 율법서에서 암몬인과 모압인은 하느님의 회중에 영원히 들어올 수 없다는 규정을 발견합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에서 이방인들을 분리했고, 이방 여자들과 혼인한 유다인들에게는 그 여자들을 내보내게 했습니다(느헤 13장 참조). 룻기는 벌써 느헤미야기와 충돌하기 시작합니다.

 

나오미는 모압 며느리들에게 “각자 제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거라”(1,8) 하고 말합니다. 나오미는 아들도 없는 과부입니다. 구약성경 특히 신명기계 법전에서 ‘고아, 과부, 외국인’은 보호가 필요한 사회적 약자를 대표하지요. 가부장제와 부계 상속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서, 남편도 없고 아들도 없는 과부에게는 안정된 미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앞날을 보장해 줄 수가 없습니다. 나오미에게 다른 아들이라도 있었다면, 남편이 죽은 며느리는 남편의 동생에게서 후손을 얻을 수 있었지요. 나오미는 그나마도 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들에게 사회적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친정으로 돌아가 재혼하라고 이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저마다 새 남편 집에서 보금자리를 마련하도록 배려해 주시기를 바란다”(1,9).

 

두 며느리의 이름은 오르파와 룻입니다. 그 이름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지만, ‘오르파’는 ‘목덜미’와 연관되어 시어머니에게 등을 돌리고 떠나간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오르파는 나오미의 말을 따라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룻기는 오르파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르파의 선택이 당연하고 정당하기 때문입니다.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모압의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할 때에도, 모압인들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나 종교적 판단은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며느리들의 미래였고, 나오미는 그들의 행복을 빌어줍니다.

 

 

‘룻’이라는 이름은 더 어렵습니다. 과거에는 ‘친구’라는 의미로 여겨졌지만, 근래에는 ‘충족시키다, 만족시키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고 봅니다. 비와 눈이 땅을 적시고(이사 55,10 참조) 술잔에 술이 가득하듯이(시편 23,5 참조), 가득 채우고 생기를 되찾게 한다는 의미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 이름을 지닌 룻은 나오미 곁에 남기를 선택합니다. “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1,16).

 

바로 이어서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1,16)라는 구절이 나오기는 하지만, 지금 문제의 핵심은 룻의 개종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유다인 중심의 시각에서) 모압 여자인 며느리 룻이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것이 이방인의 개종을 나타낸다고, 룻기의 주제가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룻을 개종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룻기가 이방인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가르치려 했다면, 나오미는 룻에게 “네 동서는 제 겨레와 신들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를 따라 돌아가거라”(1,15)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오르파의 선택이 비난받을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이고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면, 그만큼 룻의 선택은 특별하다는 사실입니다. 룻의 행동은 기대치를 훌쩍 넘어서는 것입니다.

 

룻의 이러한 행동을 가리켜 보아즈는 ‘효성’(3,10)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효성’으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이지요. 룻기 안에서도 3,10 외에는 ‘자애’로 번역됩니다. 이 ‘자애’와 관련하여 나오미는 중요한 말을 합니다. “너희가 죽은 남편들과 나에게 해준 것처럼 주님께서 너희에게 자애를 베푸시기를 빈다”(1,8).

 

하느님의 자애가 룻기에서 그리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방금 인용한 1,8의 예만 봐도, 나오미는 하느님께서 며느리들에게 자애를 베푸시기를 기원하지만, 실제로 룻이 보아즈에게서 아들을 얻을 수 있도록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계획하고 지시하는 것은 시어머니 보아즈입니다. 이와 유사한 예를 룻기를 읽으면서 더 만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보아즈는 룻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의 날개 아래로”(2,12) 피신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룻을 덮어 주는 것은 보아즈의 ‘옷자락’(3,9)입니다(히브리어에서 ‘날개’와 ‘옷자락’은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룻기의 하느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룻기는 결국 사람들 사이의 덕행을 말하는 책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너희에게 자애를 베푸시기를 빈다”(1,8)고 한 나오미의 말은, 그 후에 룻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드러나지 않는 하느님의 자애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미리 알려 줍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인간이 인간에게 행한 자애가 하느님의 복과 자애를 불러 온다는 것을 밝혀 줍니다(1,8: “너희가 죽은 남편들과 나에게 해 준 것처럼”).

 

이렇게 해서 운을 떼었습니다. 이제부터 룻기가 끝나는 때까지 줄창 ‘헤세드’에 대해 말할 것입니다. 모압 여자가 던지는 도전장이 바로 ‘헤세드’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1장을 읽었습니다. 1장에서 나오미는 스스로 ‘빈손’이고, ‘나오미’(나의 감미로움)가 아닌 ‘마라’(쓰라린 여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나오미 곁에 모압 여자 룻이, 룻의 헤세드가 함께 있습니다. 그것은 룻의 선택이었고, 안정된 미래나 새로운 가능성을 포기하면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시어머니 나오미 곁에 남기로 한 결단이었습니다. 룻이 오르파처럼 떠나갔다 한들 아무도 룻을 탓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자유로운 사랑인 헤세드를 행합니다. 나오미 역시 과부로서 보호자가 없는 신세였고, 룻은 그런 나오미와 함께 있으려 합니다. 룻이 그와 함께 있었기에 나오미에게는 미래가 열릴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나오미를, 인간을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해 봅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9월호(통권 450호)]

 

 


 

 

모압 여인의 사랑과 도전, 룻기

(4) 호의를 베풀어 주는 사람(룻 2,2)

안소근 실비아 수녀

 

 

생명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듯한 나오미가 계속 생명을 이을 수 있던 것은 모압 여자 룻이 나오미의 곁에 머물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룻 역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약자입니다. 1장의 질문이 ‘나오미를 살 수 있게 한 것이 무엇인가?’라면, 2장의 질문은 ‘룻을 살 수 있게 한 것은 무엇인가?’가 될 것입니다.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 사람 뒤에서”(2,2)

 

1장이 끝날 때 다음 장을 위한 예고편이 나옵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한 것은 보리 수확이 시작될 무렵이었다”(1,22). 보리 수확은 2장의 배경이 됩니다.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룻은 추수하고 남은 이삭을 주우러 가겠다고 말합니다. 본래 구약의 율법에서는, 수확할 때 떨어진 이삭이나 포도 등을 ‘가난한 이와 이방인’을 위해 남겨 두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레위 19장에서는 이렇게 명합니다. “너희 땅의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밭 구석까지 모조리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고 남은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너희 포도를 남김없이 따 들여서는 안 되고,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를 주워서도 안 된다. 그것들을 가난한 이와 이방인을 위하여 남겨 두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레위 19,9-10). 주의 사항! 여기서 말하는 ‘이방인(게르)’은 그 지역에 자기 땅을 소유하지 않아 남의 땅에 몸을 붙이고 사는 사람을 가리키지, 국적상의 외국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상종하지 않아야 할 인간인 모압 여자 룻에게는 이 율법이 적용되지 않고, 룻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세대주도 없고 주민등록도 없고 건강보험도 없는, 오늘날의 불법 체류 이주 노동자 같은 처지입니다.

 

그래서 룻은 누군가의 ‘호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 사람 뒤에서 이삭을 주울까 합니다”(2,2)라고 말합니다. 나중에 보아즈가 룻에게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고 물을 마시라고 할 때에도 룻은 “저는 이방인인데,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고 생각해 주시니 어찌 된 영문입니까?”(2,10)라고 말합니다. 여기서의 ‘이방인(노크르야)’은 레위 19장의 ‘이방인’과 달리 국적상 외국인을 지칭합니다. 룻은 외국인으로서 기대할 수 없는 호의를 입어 이삭을 줍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연히”(2,3)

 

이삭을 주우러 간 룻은 ‘우연히’(2,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척인 보아즈의 밭에 가게 됩니다. 우연히! 국어사전에서 ‘우연’을 찾으니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않게 일어난 일’이라네요.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이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일어난 일이 아님을 압니다. 지난달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나오미가 이미 며느리들에게 “너희가 죽은 남편들과 나에게 해준 것처럼 주님께서 너희에게 자애(헤세드)를 베푸시기를 빈다”(1,8)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1장에서 룻은 나오미에게 ‘효성’(3,10)을, 헤세드를 보였습니다. 나오미가 살 수 있도록 자기 겨레와 어머니 집을 떠나 (아브라함이 고향과 아버지 집을 떠났던 것처럼!) 나오미와 함께 머물렀습니다. 그런 룻에게 이제 하느님의 자애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룻기는 하느님께서 숨어서 움직이시는 책이라, 여기에서는 나오미의 말과 같은 축복과 기원을 특별히 눈여겨봐야 합니다.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 기원이 실현되면서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기 때문입니다. 룻기의 저자가 정말 ‘아무런 인과 관계 없이’ 그러한 일이 이루어진다고 여겼다면 그런 축복을 적어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2장에서만 한번 볼까요? 보아즈는 룻에게 “그분께서 너에게 충만히 보상해 주시기를 빈다”(2,12)라고 말합니다. 과연 룻은 그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보아즈에 대하여 룻에게, “너를 생각해 준 이는 복을 받을 것이다”(2,19)라고 말합니다(20절도 참조). 찾아보니 축복이 많지요? 이것이 룻기 저자의 표현 방법입니다. 우연히 일어난 듯 보이는 사건이 사실 하느님의 자애로 이루어졌다고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너를 생각해 준 이”(2,19)

 

보아즈는 모압 여인인 룻이 자기 밭에서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허락했을 뿐 아니라 종들이 길어다 놓은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해 주고, 끼니때에는 배불리 먹고 남길 만큼 음식을 줍니다. 그의 종들에게 이삭을 흘려 주라고 말하고, 룻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일러둡니다. 그렇게 룻은 하루에 보리 한 에파를 주웠습니다. 한 에파는 40리터입니다. 어떤 해석에서는 나오미가 그 보리의 양을 보고 이것이 단순히 보리 이삭을 주워 모은 것이 아님을 즉시 알아챘으리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보아즈가 룻에게 호의를 베푼 것은, 룻이 자기 친척인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며느리이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렇다면 그는 의무를 다한 것일 뿐, 룻을 특출하게 여긴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할까요? 설령 그렇다 해도 당시 유다 사회의 모습에 비추어 볼 때 보아즈의 행동은 뜻밖입니다. 에즈라-느헤미야 시대에 이방인과 혼인한 유다인은 율법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 아내와 아이들을 내쫓았습니다. 민족의 정체성 확보가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에, 이미 가족이 되었어도 상관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아즈는 룻이 모압 여자라고 해서 내치지 않습니다. 율법에 충실한 당시의 유다인이라면 그런 보아즈를 질책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호의에 룻이 “어찌 된 영문입니까?”(2,10) 하고 보아즈에게 묻자, 보아즈는 “네 남편이 죽은 다음 네가 시어머니에게 한 일과 또 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네 고향을 떠나 전에는 알지도 못하던 겨레에게 온 것”(2,11)을 들어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룻이 나오미에게 베푼 호의에 보아즈가 보답하여 룻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네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신하려고 왔으니, 그분께서 너에게 충만히 보상해 주시기를 빈다”(2,12).

 

“자애”(2,20)

 

보아즈의 축복, 이어서 실현되는 하느님의 자애. 과연 하느님의 자애일까요, 보아즈의 자애일까요? 2장에는 문법상 애매한 문장이 있습니다. “그분은 산 이들과 죽은 이들에 대한 당신의 자애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주님께 복을 받을 것이다”(2,20)라는 나오미의 말입니다. 이 번역에서 산 이들과 죽은 이들에 대한 자애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산 이들과 죽은 이들에 대한 자애를 저버리지 않는 그분은 주님께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옮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산 이들(나오미와 룻)과 죽은 이(엘리멜렉)에 대한 자애를 저버리지 않는 보아즈가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는 말이 되지요.

 

이 문장의 애매함은 어쩌면 룻기의 애매함을 대변합니다. 바로 그 애매함에 룻기의 신학이 담겨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자애가 눈에 보이는 인간의 자애로 구체화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1장부터 시작해 봅시다. 나오미를 살 수 있게 한 것은 룻의 헤세드였습니다. 이제 2장에서 룻을 살 수 있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네, 보아즈의 너그러움입니다. 율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룻을 율법에서 정해진 것 이상으로 배려한 보아즈의 호의는 글자 그대로 룻과 나오미를 ‘살 수 있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과부인 그들은 보아즈 덕분에 살게 된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그런 모양입니다. 요구한 것보다 더 많이 베푸는 이들 덕분에 내가 살아갑니다. 그들은 나에게 하느님의 자애를 보여 줍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자애를 베푸는 이들 안에 하느님께서 계심을 봅니다.

 

“고아들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고 그들의 어머니에게 남편 노릇을 해 주어라. 그러면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되고 그분께서 네 어머니보다 더 너를 사랑해 주시리라”(집회 4,10).

 

[성서와 함께, 2013년 10월호(통권 451호)]

 

 


 

 

모압 여인의 사랑과 도전, 룻기

(5) 네 효성을 전보다 더 훌륭하게(룻 3,10)

안소근 실비아 수녀

 

 

추리소설을 끝부터 읽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재미가 다 없어질 테니까요. 그렇지만 추리소설의 결말을 알고 나면 앞부분을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탐정이 추리 과정을 설명할 때에 독자는 “아하!” 하면서 앞에서 나온 이야기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이 사람은 왜 이런 말을 했고, 저 사람은 왜 저런 행동을 했는지 눈앞에 드러납니다.

 

같은 원리로, 저는 성경을 끝부터 읽는 방법을 자주 씁니다. 물론 저자는 우리에게 그렇게 읽으라고 하지 않지요. 공감하고 몰입해서 읽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분석을 하려면 끝부터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룻기 3장 전반부에는 이상한 일이 많이 벌어집니다. 며느리를 밤에 타작마당으로 보내는 나오미, 밤에 잠들어 있는 보아즈를 찾아가는 룻, 잠든 남자 발치에 누워 있는 여자. 남의 눈을 피해 해야 하는 위험한 행동. 독자의 눈에 기이하게 보이는 이 행동을 가리켜 보아즈는 룻에게 “네 효성을 전보다 더 훌륭하게 드러낸 것”(3,10)이라고 말합니다. 여러 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여기에서 효성으로 번역된 단어도 ‘헤세드’입니다. 3장의 문제는 또다시 룻의 헤세드인 것입니다.

 

“어르신은 구원자이십니다”(3,9)

 

보리 수확과 밀 수확이 끝날 때까지 룻은 보아즈의 밭에서 이삭을 줍습니다. 수확이 끝나면 어떻게 살아갈까요? 룻의 미래는, 나오미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나오미는 룻에게 “네가 행복해지도록 내가 너에게 보금자리를 찾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3,1) 하고 말합니다. 앞서 나오미는 오르파와 룻에게, “주님께서 너희가 저마다 새 남편 집에서 보금자리를 마련하도록 배려해 주시기를 바란다”(1,9)고 말했습니다. 이제 나오미는 다른 방식으로 그 하느님의 배려를 실행합니다.

 

나오미 편에서 추구하는 것은 룻의 행복입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타작마당으로 보아즈를 찾아 가라고 말하지만, 그에게 무엇을 요구하라고 상세히 지시하지는 않습니다. 보아즈가 먹고 마시기를 마칠 때까지 숨어 있다가, 그가 누운 자리에 가서 발치를 들치고 누워 있으라고만 합니다. “그분이 네가 해야 할 바를 일러줄 것이다”(3,4).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가 시킨대로 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 달라고 보아즈에게 요청합니다. “저는 주인님의 종인 룻입니다. 어르신의 옷자락을 이 여종 위에 펼쳐 주십시오. 어르신은 구원자이십니다”(3,9).

 

룻의 이 말에는 법적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이삭을 주우러 간 룻이 나오미에게 돌아와 보아즈의 밭에서 호의를 입었다는 것을 전했을 때, 나오미는 “그분은 우리 일가로서 우리 구원자 가운데 한 분이시란다”(2,20)라고 말했지요. 여기서 ‘구원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고엘’은 한 가정의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 그 가정의 가족을 보호할 의무를 지닌 사람을 가리킵니다(《주석 성경》 참조). 빚 때문에 가족이 종으로 팔려 가면 그를 속량하고, 한 집안에 속한 땅이 다른 집안에 넘어가게 될 경우에는 그것을 다시 사들여 그 집안의 재산을 지켜 주어야 하며, 친족이 살해되면 피의 복수까지 하는 것이 고엘의 역할입니다.

 

“어르신의 옷자락을 이 여종 위에 펼쳐 주십시오”(3,9)

 

그렇다면 “어르신의 옷자락을 이 여종 위에 펼쳐 주십시오”라는 말은 “어르신은 구원자이십니다”라는 말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옷자락을 펼쳐달라는 말은 자신을 아내로 맞아 달라는 뜻입니다. 에제 16,8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너는 사랑의 때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서 내가 옷자락을 펼쳐 네 알몸을 덮어 주었다”라고 하시는 것도, 신랑이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신부로 맞아들이듯 당신 백성으로 삼아 주셨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남편과 자식이 없는 과부와 혼인하는 것은 본래 고엘의 임무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룻은 보아즈가 고엘인 것을 내세워 결혼을 요구합니다.

 

이 요구를 이해하기 위해 잠시 4장으로 건너가겠습니다. 4장에서 나오미는 엘리멜렉에게 속한 밭을 팔려고 내놓습니다(4,3 참조). 고엘이 나서야 하는 때는 오히려 여기입니다. 고엘은 엘리멜렉의 밭이 다른 집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그 밭을 사들여야 합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고엘이 밭을 사는 목적은 한 집안에 속한 상속 재산이 다른 집안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 주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엘리멜렉과 나오미에게는 고엘이 밭을 사준다 해도 그 땅을 물려줄 후손이 없습니다. 그러니 고엘이 정말로 나오미를 위해 엘리멜렉의 상속 재산을 지켜 주고자 한다면, 그 땅을 물려받을 후손까지 낳아 주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다른 법률 조항이 연관됩니다. 신명 25,5-10에 따라 어떤 사람이 후손 없이 죽었을 경우 그 아내를 죽은 사람의 형제가 아내로 맞아들여 그의 대를 이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장에서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내 배 속에 아들들이 들어 있어 너희 남편이 될 수 있기라도 하단 말이냐?”(1,11)라고 물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말입니다. 나오미에게 다른 아들이 있었다면 그가 룻을 아내로 맞아 아들을 낳게 해 주었겠지요. 이것이 시숙의 의무였습니다. 그러나 나오미의 아들들은 모두 죽었으니 이제는 다른 가까운 친척이 그 의무를 이행해 주어야 합니다.

 

룻은 보아즈에게 크나큰 요구를 합니다. 엘리멜렉 집안의 사람으로서, 나오미와 자신이 살아갈 수 있도록 후손을 낳아 엘리멜렉의 대를 이어갈 수 있게 해 주고, 그의 재산이 될 땅도 지켜 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엘에 관한 법과 시숙의 의무에 관한 법을 연결하는 것은 구약성경의 룻기에만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룻의 독특한 율법 해석이 들어 있습니다.

 

“네 효성을 전보다 더 훌륭하게 드러낸 것이다”(3,10)

 

보아즈는 룻을 칭찬합니다. 룻이 젊은 남자를 쫓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룻이 보아즈에게 찾아온 것은 나오미에 대한 헤세드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룻은 큰 모험을 했습니다. 보아즈가 룻을 받아 주지 않는다면? 나오미는 지금까지 보아즈가 룻을 돌보아 준 모습을 보고 그를 믿은 모양입니다. 그러나 보아즈가 에즈라-느헤미야 시대의 열심한 유다인들처럼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율법에 충실하기 위해 모압 여자 룻을 내쳤다면? 밤중에 찾아온 룻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 수치를 당하게 했다면? 추수의 즐거움에 아마도 술을 마다하지 않았을 보아즈가, 목욕하고 향유를 바르고 온 룻을 하룻밤 데리고 지내고는 돌아보지 않는다면?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룻은 보아즈에게 갑니다. 룻은 다른 사람을 찾아 가정을 이루기보다 엘리멜렉의 집안을 살리려 합니다. 보아즈는 룻의 이러한 행위가, 홀로 남은 나오미 곁에 남기로 한(1장 참조) 이전의 효성보다 더 훌륭한 효성이라고 말합니다.

 

보아즈가 룻에게 “네가 말하는 대로 다 해 주마”(3,11) 하고 약속하는 것은 그러한 룻의 헤세드가 불러일으키는 반향입니다. 보아즈에게도 희생이 요구됩니다. 모압 여자를 받아들여야 하고, 엘리멜렉의 밭을 사 주어야 합니다. 보아즈는 시험을 치르는 듯합니다. 모압 여자가 이스라엘을 시험합니다. 율법의 해석에 관한 시험입니다. 율법을 어떻게 해석해야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요?

 

룻은 고엘에 관한 율법의 핵심을 꿰뚫었습니다. 상속을 받을 사람이 없는데 상속 재산을 되사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모압 여자 룻의 도전장입니다. 그리고 보아즈는 시험을 통과합니다. 주님의 날개(히브리어 ‘카나프’) 아래로 피신한 룻에게 보아즈는 자신의 옷자락(카나프)을 덮어 줍니다. 다시 한 번 그는 하느님 헤세드의 도구가 되어 한 철의 양식을 마련해 주는 데 그치지 않고, 후손을 이어 주어 나오미와 룻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룻의 도전장은 예수님의 도전장과 닮았습니다. “안식일에 …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이들의 완고함을 보시고 몹시 슬퍼하십니다(마르 3,5 참조). 율법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율법과 거리가 멀 것 같은 모압 여자가 이러한 율법의 정신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칩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1월호(통권 452호)]

 

 


 

 

모압 여인의 사랑과 도전, 룻기

(마지막 회)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네(룻 4,17)

안소근 실비아 수녀

 

 

룻기 4장은 복잡합니다. 법적 문제가 이리저리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교 전통과 현대 학자들이 여러 가지 설명을 시도하지만, 이야기에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나보다 더 가까운 구원자”(3,12)

 

지난달에 슬쩍 미뤄둔 부분이 있습니다. 보아즈에게 룻이 “어르신은 구원자이십니다”(3,9)라고 말했을 때, 보아즈가 룻에게 “나보다 더 가까운 구원자가 있다”(3,12)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보아즈는 다른 고엘이 의무를 실행한다면 그대로 좋고, 그가 의무를 실행하려 하지 않으면 자신이 룻의 요청을 들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제 4장입니다. 보아즈는 성문으로 올라가 앉습니다. 성문은 우리의 숭례문, 흥인지문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어서 그 근처에 시장이 서고, 재판을 비롯한 공공 생활이 이루어집니다. 지금 보아즈는 재판하려고 성문으로 간 것입니다. “때마침”(4,1) 보아즈가 말한 고엘이 지나갑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벌써 아시지요? 룻기 본문은 우연인 듯 말하지만 사실 그 이루어지기 힘든 우연이 바로 하느님의 개입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보아즈는 그 고엘에게, 나오미가 엘리멜렉에게 속한 밭을 팔려고 내놓았다고 말합니다. 이 밭은 수수께끼와 같습니다. 밭이 있다면 나오미는 빈털터리가 아니고 룻은 이삭을 주우러 갈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지만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밭 이야기를 들은 고엘은 밭을 사겠다고 말합니다. 엘리멜렉에게는 후손이 없으니 고엘이 산 밭은 나오미와 룻이 죽고 나면 결국 그가 차지하겠지요. 그는 명목상으로 율법이 부과하는 의무를 수행하여 누구의 비난도 받지 않으려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재산을 그대로 보전합니다.

 

그러나 보아즈는, 그 밭을 사들이면 룻을 아내로 맞아 엘리멜렉의 대를 이어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목할 것은 보아즈가 성문에 올라가 앉아 율법을 해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난달에 본 바와 같이, 집안의 상속 재산을 지켜 주는 것이 율법에서 고엘의 의무를 규정한 진정한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후손이 없는 과부에게 밭만 사 줘서는 그 법의 정신을 구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라고 말씀하셨겠지요. 자동차가 신호가 바뀌었다고 보행자가 있는데도 그냥 내달려서는 안 됩니다. 교통 법규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고인의 이름이 … 없어지지 않도록”(4,10)

 

그 고엘은 자기 재산을 망치지 않기 위하여(4,6 참조) 고엘의 의무를 포기합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보아즈에게도 그 밭을 살 의무는 없습니다. ‘어차피 엘리멜렉에게는 후손이 없는데 나오미의 땅을 사 주면 무엇하랴, 그 땅을 누구에게 물려주랴.’ 이렇게 생각하고 그 땅이 다른 사람에게 팔리도록 내버려 둘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보아즈에게 율법 해석을 가르친 이는 룻이었습니다. 엘리멜렉 집안에 고엘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룻을 아내로 맞아 아들을 낳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어르신의 옷자락을 이 여종 위에 펼쳐 주십시오. 어르신은 구원자이십니다”(3,9)라며 가르쳤습니다. 보아즈는 그 요구를 받아들여 “고인의 이름을 그의 소유지 위에 세워, 고인의 이름이 형제들 사이에서, 그리고 그의 고을 성문에서 없어지지 않도록”(4,10) 합니다. 보아즈가 룻을 아내로 맞이하지 않았다면, 나오미와 룻이 죽은 뒤 그 집안은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보아즈는 룻의 율법 해석을 따라 한 집안을 살립니다.

 

보아즈보다 더 룻과 가까운 다른 고엘의 이름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불편함을 감수하며, 그가 실제로 고엘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는데도 달리 방법이 없어 매번 ‘그 고엘’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이름이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보존되지 않았습니다. 엘리멜렉과 보아즈와 룻의 이름이 보존된 것과는 대조됩니다.

 

온 백성과 원로들은 룻을 축복하여, 하느님께서 룻을 “둘이서 함께 이스라엘 집안을 세운 라헬과 레아처럼 되게 해 주시기를”(4,11) 기원합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모압 여자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어머니에 비견됩니다. 이것은 룻의 헤세드가 가져온 결과이고, 더 좁게 말하면 룻의 율법 해석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오르파와 같이 모압의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시어머니 곁에 남기를 선택한 룻의 헤세드, 다른 사람을 만나 혼인하려 하지 않고 엘리멜렉 집안을 위해 고엘인 보아즈를 찾아간 헤세드, 이에 응답한 보아즈의 헤세드. 율법 정신을 지키기 위해 규정된 의무를 넘어서는 룻과 보아즈의 율법 해석, 이것이 모압 여자를 다윗의 조상이 되게 합니다.

 

“보아즈는 오벳을 낳았다”(4,21)

 

지금까지의 논리에 따르면 룻은 엘리멜렉의 대를 잇기 위해 나이든 나오미를 대신하여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그러니 오벳은 나오미의 아들이어야 합니다(“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네”: 4,17). 신명기의 규정에 따라 죽은 형제를 대신하여 과부인 형수를 아내로 맞을 경우, 일반적으로 그 혼인은 영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룻과 보아즈의 경우는 다릅니다. 보아즈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어떤 경우이든 룻이 엄밀한 의미에서 보아즈의 형수는 아니므로 룻과 보아즈의 혼인은 영속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오벳은 어떤 경우에는 나오미의 아들이라 일컬어지고 - 그렇다면 족보상 엘리멜렉의 아들이어야 합니다 - 다른 경우에는 보아즈의 아들이라 일컬어졌을 것입니다.

 

룻이 낳은 아들 오벳이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4,17)라는 점에 특별히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족보가 없었다면 룻과 보아즈의 이야기는 한 평범한 집안의 따뜻한 사랑 이야기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이는 다윗을 낳았다”(4,22)는 마지막 구절은 룻기 전체를 새로운 차원으로 올려놓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지니는 전무후무한 의미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다윗은 영광스러운 과거의 임금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다윗의 후손을 기다린 데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다윗은 메시아의 전형입니다. 아니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은 임금이었으니 글자 그대로 메시아였습니다. 그런 다윗은 룻이 있어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엘리멜렉의 이름이 사라지지 않도록 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희망이 룻에게 달려 있게 된 것입니다.

 

마태 1장의 족보에서도 룻의 이름이 언급된다는 사실 역시, 룻 이야기가 한 집안의 이야기가 아님을 말해 줍니다. 룻기가 작성된 에즈라-느헤미야 시대는 율법을 크게 강조한 시대입니다. 이방인을 배척한 시대입니다. 이스라엘의 미래는 모압 여자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고 말하며 룻기는 이러한 시대에 도전한 것입니다.

 

아가와 마찬가지로, 룻기는 축제 오경에 속합니다. 룻기는 추수절 전례 때에 사용됩니다. 이 경우 역시 처음부터 룻기가 추수절을 위해 쓰인 것은 아니고, 후대에 그러한 관습이 생겨난 것입니다.

 

왜 추수절에 룻기를 읽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룻기의 사건이 추수절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파스카 축제로부터 50일이 지난 후에 시작되던 추수절은 본래 보리 추수를 끝마치는 감사의 축제였지만, 후대에는 하느님께서 시나이에서 율법을 주신 사건과 계약 체결을 기념하는 축제로 변했습니다. 룻기는 율법과 관련해서도 추수절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해석은 여러 가지입니다. 룻을 개종자의 전형으로 보면서 룻의 개종을 통해 율법의 선물이 외국인들에게까지 확장됨을 기념한다고 설명하기도 하고, 룻의 충실함이 토라에 대한 이스라엘의 충실함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룻의 율법 해석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모압 여자 룻은 참으로 율법을 실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스라엘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압 여자의 도전장,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헤세드로 살라는 의미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2월호(통권 453호)]